동양(중국) 제자백가의 사상 4 – 명가의 사상
[목차]
– 명가(제자백가)
– 명가의 사상
.직하의 학
.등석
.혜시
.공손룡
– 종합
– 명가(제자백가)
명가(名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전국시대에 생겨난 제자백가 중 하나로 백마비마론, 견백론 등의 논리학으로 명성을 떨쳤다. 등석, 혜시, 공손룡 등이 주요한 사상가이다. 이들의 논리술이 정교해 다른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서양의 소피스트와 비교되기도 한다. 법이나 문장을 엄밀하게 따져 송사에서 큰 이득을 봤다고 한다. 이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명가 사람들은 법규의 한 문장 한 문장을 파고들어 문장의 허점을 도출해냄으로 이득을 얻고 혼란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명가는 명과 실의 관계를 분명히 밝힘으로서 당대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사회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사물이나 사물의 실태와 그 호칭과의 사이에 복잡한 엇갈림이 생기게 되었다. 예컨대 “군(君)”이라는 말을 보면 그것이 옛날 노예적 봉건사회의 군장(君長)을 뜻할 경우도 있고, 유가가 주장하는 왕도적 군주를 뜻할 때도 있고, 신흥의 봉건 지주계층의 정치적 주권자를 뜻할 때도 있다. 각각 다른 개념에 의하여 군(君)을 논한다면 갖가지의 혼란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실태와 호명(呼名)을 바로 하려는 명실의 논의가 생겼다. 한편 또 여러 가지 발상을 하나의 논리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논리학이 필요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열국 사이를 유세하며 책모(策謨)를 안출하려면 논리를 전개해서 궤변마저 농(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명가라고 불리는 일파의 논리학자들이 출현하였다.
명가에서는 명실을 바로하려고 하는 명실론의 방향과 그리스의 소피스트들과 같이 궤변술을 연구하는 두 흐름이 혼재하였다.
– 명가의 사상(名家-思想)
춘추전국시대의 사회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사물이나 사물의 실태와 그 호칭과의 사이에 복잡한 엇갈림이 생기게 되었다. 예컨대 ‘군(君)’이라는 말을 보면 그것이 옛날 노예적 봉건사회의 군장(君長)을 뜻할 경우도 있고, 유가가 주장하는 왕도적 군주를 뜻할 때도 있고, 신흥의 봉건 지주계층의 정치적 주권자를 뜻할 때도 있다. 각각 다른 개념에 의하여 군(君)을 논한다면 갖가지의 혼란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실태와 호명(呼名)을 바로 하려는 명실의 논의가 생겼다. 한편 또 여러 가지 발상을 하나의 논리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논리학이 필요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열국 사이를 유세하며 책모(策謨)를 안출하려면 논리를 전개해서 궤변마저 농(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명가’라고 불리는 일파의 논리학자들이 출현하였다. 명가에서는 명실을 바로하려고 하는 명실론의 방향과 그리스의 소피스트들과 같이 궤변술을 연구하는 두 흐름이 혼재하였다. 명가의 출발은 춘추시대의 정(鄭)의 대부(大夫) 등석(鄧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등석은 자산(子産=公孫僑)과 함께 정국의 국정에 임하였으나, 자산이 지은 법령의 자구해석을 둘러싸고 일일이 자산과 다투어 마침내 자산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등석은 자산이 정한 법에 대하여 변호사적 입장에서 법령의 확대해석을 용허하지 않고 법의 불비를 찔러 자산과 논쟁했던 것이다. 자산은 우수한 정치가로서 공자로부터 존경받은 사람이었으나 그 자산(子産)에게 논리를 구사(驅使)하여 등석은 저항하였다. 등석의 저라고 전해지는 등석자(鄧析子)가 오늘날 남아 있으나, 그것은 후인이 편집한 것이지 등석이 지은 것은 아니다. 등석에 대해서는 여씨춘추(呂氏春秋) ‘이위편(離謂篇)’에 설명되어 있다. 명실론은 묵자(墨子)의 ‘귀의편(貴義篇)’에 ‘명(名)’과 ‘취(取)’의 문제를 놓고 ‘명’은 개념적 지식, ‘취’는 사실에 즉(卽)한 구체적 인식으로 ‘취’야말로 제일의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가치관이 변동하는 사회에서는 ‘실(實)’을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묵가의 이러한 생각은 바로 묵가 후학의 논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제(齊)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였는데, 그 위왕(威王), 선왕(宣王) 시대(전357∼전301)에 천하의 학자를 초대하여 잘 대접하였다. 또 도성(都城)의 남문을 직문이라고 하였는데 이 직문 아래에 초빙한 학자의 저택을 짓게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이 시기의 학술을 직하(稷下)의 학이라고 하였다. 이 직하에 모여든 학자 중에는 묵가의 송견과 윤문(尹文)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개념의 분석을 왕성하게 행한 듯한데, 그것을 별유(別宥)라고 칭하였다( 莊子 ‘天下篇’). 유(宥)라 함은 구역의 뜻이니 개념의 경계를 변별하는 것이 즉 ‘별유’이다. 송견·윤문의 후배에 공손룡(公孫龍)이 있었다. 묵가(墨家)의 논리학을 해설한 것이 묵자 중의 ‘묵경(墨經)’편이다. 묵경은 경상(經上)·경하(經下) 및 경설상(經說上)·경설하(經說下)·대취(大取)·소취(小取)의 6편으로 되었고 묵가의 후학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 중에 공손룡의 궤변을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작된 시대는 혜시(惠施), 공손룡보다 후인 것 같다. 공손룡이 묵가와 관계가 깊었던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다. 궤변적 논리학은 혜시(惠施)에서 시작되어 공손룡(公孫龍)에 의하여 깊어진 것이지만, 공손룡자(公孫龍子)에 보이는 공손룡의 이론(‘白馬는 말이 아니다’ 등)은 얼른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그 논리의 구성이나 발상 방법이 근대과학의 수학이나 물리학의 논증 방식이나 발상에도 견줄 만하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궤변이 단순한 궤변술에 그치고 말았을 뿐이다. 전국 말기의 종횡가(縱橫家)라고 칭하는 유세가들은 이런 유(類)의 궤변술을 상당히 많이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이 명가의 사고방식이나 논리의 형성 방법이 과학사상으로 전개한 일은 전부터 없었다. 중국인은 별로 추상적인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고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길 바란다. 따라서 명가의 설은 공손룡(公孫龍) 이후 학술적으로 거의 발전하지 못하였고 근근히 묵가의 후학에 의하여 ‘묵경(墨經)’이 정리된 것에 그쳤다. 그러나 명실론은 그 후 순자(荀子)에게 받아들여져 이후 유가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 직하의 학
명실론은 묵자(墨子)의 귀의편(貴義篇)에 따르면, “명(名)”과 “취(取)”의 문제를 놓고 “명”은 개념적 지식, “취”는 사실에 즉(卽)한 구체적 인식으로 “취”야말로 제일의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가치관이 변동하는 사회에서는 “실(實)”을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묵가의 이러한 생각은 바로 묵가 후학의 논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제(齊)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였는데, 그 위왕(威王), 선왕(宣王) 시대(기원전 357~301)에 천하의 학자를 초대하여 잘 대접하였다. 제나라(齊)의 수도였던 임치(臨淄)의 도성(都城) 남문을 직문(稷門)이라고 하였는데 이 직문 아래에 초빙한 학자의 저택을 짓게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이 시기의 학술을 직하(稷下)의 학 또는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고 하였다.
이 직하(稷下)에 모여든 학자 중에는 묵가의 송견(宋銒)과 윤문(尹文)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개념의 분석을 왕성하게 행한 듯한데, 그것을 별유(別宥)라고 칭하였다(《莊子》 〈天下篇〉). 유(宥)라 함은 구역의 뜻이니 개념의 경계를 변별하는 것이 즉 별유이다.
송견 · 윤문의 후배에 공손룡(公孫龍)이 있었다.
○ 등석
명가의 출발은 춘추시대의 정(鄭)의 대부(大夫) 등석(鄧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등석은 자산(子産 ·公孫僑: 기원전 585~522)과 함께 정국의 국정에 임하였으나, 자산이 지은 법령의 자구해석을 둘러싸고 일일이 자산과 다투어 마침내 자산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등석은 자산이 정한 법에 대하여 변호사적 입장에서 법령의 확대해석을 용허하지 않고 법의 불비를 찔러 자산과 논쟁했던 것이다. 자산은 우수한 정치가로서 공자로부터 존경받은 사람이었으나 그 자산(子産)에게 논리를 구사(驅使)하여 등석은 저항하였던 것이다.
등석의 저서라고 전해지는 ‘등석자(鄧析子)’가 오늘날 남아 있으나, 그것은 후인이 편집한 것이지 등석이 지은 것은 아니다. 등석에 대해서는 여씨춘추(呂氏春秋) ‘이위편(離謂篇)’에 설명되어 있다.
○ 혜시(惠施)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철학자로 장자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혜시(惠施)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 전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제설을 종합하면 혜시는 송나라 사람으로서 양나라 혜왕(惠王) 밑에서 벼슬하여 법전을 만든 일도 있고, 혜왕 몰후에는 양왕(襄王) 밑에서 9년간 벼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장자와 대를 같이 하였음을 장자(莊子)에서 알 수 있다. <장자>의 ‘천하편(天下篇)’에 의하면 혜시의 저서는 다섯 수레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저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설은 장자 ‘천하편(天下篇)’이나 순자 ‘불구편(不苟篇)’ 에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근근히 알 수가 있다. 한비자(韓非子) ‘칠술편(七術篇)’에 의하면 혜시도 또한 묵가였던 것 같다. 혜시(惠施)의 궤변은 그 논제가 표시되어 있을 뿐 해설이 없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모르지만 공간론에 흥미를 가졌던 것 같다. ‘두께(厚) 없는 것은 쌓지 못하겠지만 그 크기는 천리(千里)’
등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학상(數學上)으로 말하는 점(点)은 얼마를 쌓든지 점이지만 공간에는 무한의 점이 존재하고 하나의 점속에는 또 우주가 있다고 하는 것을 논한 것일까. “나는 천하의 중앙을 안다. 그것은 연(燕)의 북이며 월(越)의 남이다”라는 논제도 있다. 천하의 중앙은 이론상으로는 하나 밖에 없으나 그것은 최북단의 나라인 연(燕)의 북이라도 좋고 최남단의 나라인 월(越)의 남에 있어도 좋다. 요컨대 중심을 어느 곳에서 보는가에 의하여서 공간의 넓어짐이 변경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널리 만물을 사랑하면 천하가 일체로다’라고도 한다. 이 생각은 역시 묵가(墨家)의 겸애설을 논리적으로 전개시킨 것인 듯하다. 이상, 혜시(惠施)의 궤변은 장자 ‘천하편'(天下篇)’에 소개된 것을 인용한 것이다.
○ 공손룡(公孫龍)
자는 자병(子秉)이며 조나라 사람이다. 조(趙)의 평원군(平原君)에 벼슬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기원전 3세기 중엽까지 활약한 사람 같다. 묵가의 송견, 윤문의 후배라 하며 그 궤변은 ‘묵경’에도 해설되어 있으므로 혜시(惠施)와 같이 묵가의 동지라고 생각된다. 혜시의 궤변론에 대하여 공손룡이 독자적인 궤변을 떨쳐서 응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장자(莊子) ‘천하편’에는 공손룡이 궤변 21조를 실었고, 열자(列子) ‘중니편(仲尼篇)’에는 8조를 실었다.
공손룡의 궤변으로 유명한 것은 ‘알에 털(毛)이 있다’ ‘백마(白馬)는 말이 아니다, 견석(堅石)은 돌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알에 털이 있다’는 말은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론을 결론적으로 집약한 것인 듯하다.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논제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말이라는 것은 형상에 이름을 붙인 것이요 백(百)이라고 함은 색(色)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색에 이름을 붙인 것과 형상에 이름을 붙인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런 까닭으로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또 “만일 사람이 말을 구하였을 때는 황마(黃馬)나 흑마(黑馬)도 되겠지만, 백마를 구하였을 경우에는 황마·흑마로는 주문에 맞지 않는다.
설령 백마를 말이라고 한다면 황마·흑마도 말인 이상 어느 것을 가져와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도 황마·흑마를 가져오는 것으로는 합당하지 않는다 하면 백마가 말이라고 하는 가정(假定)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마는 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 논리에는 확실히 속임수가 있다. 그러나 형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색(質)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동일하게 논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그 나름대로 옳을 수 있다. 같은 논리로 “단단한 돌은 돌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외에 공손룡은 “비조(飛鳥)의 그림자는 아직까지 움직인 일이 없다”라고도 한다. 그림자는 물건의 정지의 순간에 비치는 것이기 때문에, 비조의 그림자라고 할지라도 정지의 순간의 점의 연속인 까닭에 비조의 그림자는 아직까지 움직인 일이 없다고 한다. 공손룡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여 공손룡자(公孫龍子) 6편이 남아 있다.
– 혜시와 공손룡 종합
묵가(墨家)의 논리학을 해설한 것이 묵자 중의 묵경편(墨經篇)이다. 묵경편은 경상(經上) · 경하(經下) 및 경설상(經說上) · 경설하(經說下) · 대취(大取) · 소취(小取)의 6편으로 되었고 묵가의 후학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 중에 공손룡의 궤변을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작된 시대는 혜시(惠施), 공손룡보다 후인 것 같다. 공손룡이 묵가와 관계가 깊었던 것은 이것으로 알 수 있다.
궤변적 논리학은 혜시(惠施)에서 시작되어 공손룡(公孫龍)에 의하여 깊어진 것이지만, 공손룡자(公孫龍子)에 보이는 공손룡의 이론(“백마(白馬)는 말이 아니다” 등)은 얼른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그 논리의 구성이나 발상 방법이 근대과학의 수학이나 물리학의 논증 방식이나 발상에도 견줄 만하다. 다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궤변이 단순한 궤변술에 그치고 말았을 뿐이다. 전국시대 말기의 종횡가(縱橫家)라고 칭하는 유세가들은 이런 유(類)의 궤변술을 상당히 많이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이 명가의 사고방식이나 논리의 형성 방법이 과학사상으로 전개된 일은 전부터 없었다.
중국인은 별로 추상적인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고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길 바란다. 따라서 명가의 설은 공손룡(公孫龍) 이후 학술적으로 거의 발전하지 못하였고 근근히 묵가의 후학에 의하여 묵경(墨經)이 정리된 것에 그쳤다. 그러나 명실론은 그 후 순자(荀子)에게 받아들여져 이후 유가의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