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중국) 제자백가의 사상 7 – 농가, 종횡가, 음양가, 잡가, 소설가의 사상
[목차]
.농가의 사상 / 허행
.종횡가의 사상 / 귀곡자, 소진, 장의
.음양가의 사상 / 추연, 추석
.잡가의 사상 / 여씨춘추
.소설가의 사상
○ 농가의 사상(農家-思想)
농가(農家)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의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사상가로서 저명하였던 대표적인 농가의 인물은 허행(許行)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있었던 농가 사상(農家思想)에는 기술과 사회사상에 관한 것 두 방면의 것이 있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농업 생산기술에 대하여 말한 기록이 주례(周禮), 관자(管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속의 몇몇 편에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있던 농가사상에는 기술과 사회사상에 관한 것 두 방면의 것이 있으나 여기서는 후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주례(周禮), 관자(管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속의 몇몇 편에 농업 생산기술에 대하여 말한 기록이 있다. 사회사상가로서 저명한 농가는 허행(許行)이다.
– 허행
허행은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의 등(藤)에 살면서 수십인의 문인(門人)에게 농업생산에 의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주장하였다. 허행이 있는 곳으로 곧 송(宋)에서 진상(陳相)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하는 수십인이 달려 왔다.
허행의 무리들은 농업신(農業神)이기도 하고 상고(上古)의 전설적인 제왕이기도 한 신농(神農)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기치로 삼아,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것을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商人)의 농민에 대한 이윤추구를 배척하였고 그에 저항하였다.
허행의 무리는 농업 생산에 필요한 공구를 생산하는 수공업자 역시 노동에 종사하는 자라 하여 그 존재의 의의를 인정하였다.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에 의하여 자신의 생활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剩餘)는 각자 노동자의 소유에 귀속시킨다. 이렇게 해야만 천하가 고루 공평하게 된다고 하였다.
허행의 농가 사상은 공상적(空想的)인 사회사상에 가까운 면이 있다. 그러나, 춘추시대 당시의 점차로 강고해져가고 있던 봉건지주들과 봉건 제후국들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 종횡가의 사상(縱橫家-思想)
종횡가(縱橫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가운데 하나이다.
종횡가란 열국(列國)을 돌아다니며 독특한 변설로 책략을 도모하는 사람들로 열국의 연합체를 조직시켜 그 힘의 균형을 이용해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종횡가의 시조는 귀곡선생(鬼谷先生) 또는 귀곡자(鬼谷子)이다. 종횡가는 책모(策謀)를 다해 지배자 계층간에 권력 투쟁을 야기시켜 놓고, 그 권력 투쟁을 이용하여 정권을 확보하는 일을 목표로 하였다.
종횡가란 열국(列國)을 돌아다니며 독특한 변설로 책략을 도모하는 사람들로 열국의 연합체를 조직시켜 그 힘의 균형을 이용해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그 시조는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 한다. 귀곡선생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사람인 왕후를 가리킨다. 하남성(河南省)의 귀곡(鬼谷)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귀곡선생이라고 한다. 병가(兵家)인 손빈도 그 문인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귀곡선생의 문인으로서 가장 저명한 활동가는 소진(蘇秦), 장의(張儀) 두 사람이다. 오늘날 ‘귀곡자(鬼谷子)’ 12편이 존재하나 그것이 귀곡선생의 저서라고 하는 확증은 없다. 소진(蘇秦)은 낙양(洛陽) 사람이다. 당시 점차로 강대해진 진(秦)에 대하여 연(燕)·한(韓)·위(魏)·조(趙)·제(齊)·초(楚)의 6국이 연합하여 진(秦)에 대항할 것을 득의에 찬 변설로 열국에 설파하였다. 이것을 합종설(合縱說)이라고 한다. 소진의 이 책략 때문에 진은 15년간 침략을 정지하였다. 소진의 동생인 소대(蘇代)도 소진과 힘을 합쳐서 합종(合縱)의 성립에 노력하였다. 장의(張儀)는 위(魏)의 사람으로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에게 배웠다. 소진·소대의 합종설에 대하여 6국이 연합, 진에 복종하여 섬길 것을 주장한 연형설(連衡說)을 열국에 주창하였다. 한때 합종설의 세력에 패하여 위로 돌아가 그 재상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그의 연형설이 승리하였다. 이에 합종설의 주장자인 소진은 제(齊)에서 암살되었다. 종횡가의 무리는 책모(策謀)를 다해 지배자 계층간에 권력 투쟁을 야기시켜 놓고, 그 권력 투쟁을 이용하여 정권을 확보하는 일을 목표로 하였다.
– 귀곡자(鬼谷子)
귀곡자는 기원전 4세기에 전국시대를 살았던 정치가로 제자백가 중 종횡가(縱橫家)의 사상가이다. 그는 역시 종횡가에 속한 소진과 장의의 스승으로, 귀곡에서 은거했기 때문에 귀곡자 또는 귀곡 선생(鬼谷先生)이라 불렸다. 그의 이름과 성씨 및 향리까지 모두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성(姓)은 왕(王)씨고 이름은 후(詡)로, 제(齊)나라(일설에는 초나라) 사람이라 전해진다.
.귀곡자 서
귀곡자의 사상을 담은 책 또한 ‘귀곡자’라고 불린다.
이 책의 지은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귀곡자라는 설, 귀곡자의 제자인 소진(蘇秦)이라는 설, 그리고 육조시대의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아무개라는 설 등이 있다. 다만 현존하는 형태로서의 책은 육조시대사람이 귀곡자의 이름을 가탁해 엮은 것이다. 그러나 이 책 가운데는 선진시대(先秦時代) 종횡가들의 이론이 드러나 있어, 주요 사상과 내용은 귀곡자의 기록과 언급이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귀곡자’에는 상대의 심리에 맞추어 그의 신임을 얻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고, 기회를 틈타 상대의 약점을 장악해서 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둬야 한다는 내용도 있으며, 상대를 잘 위무해 그의 진심을 끌어내 확인함으로써 상황을 추측하고 파악해서 책략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요컨대 ‘귀곡자’는 유세할 때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귀곡자’는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비판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 법술은 어리석은 군주에게만 운용될 뿐 명군(明君)과 치세(治世)를 만나서는 쓸데가 없고 바른 사람을 만나서는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시대 이래로 천하의 법도가 사라지고 어지러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계모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달리 평가할 수도 있다.
.’귀곡자’ 목차
1.권상(卷上)
1) 제1편 열고 닫음[捭闔]
2) 제2편 반대로 대응함[反應]
3) 제3편 내면적인 상호 결합[內揵]
4) 제4편 틈새를 막음[抵巇]
2. 권중(卷中)
1) 제5편 칭찬하여 옭아맴[飛鉗]
2) 제6편 배반과 결합[忤合]
3) 제7편 헤아림[揣篇]
4) 제8편 어루만짐[摩篇]
5) 제9편 자세히 살펴봄[權篇]
6) 제10편 모략을 세움[謀篇]
7) 제11편 결단함[決篇]
8) 제12편 부합하는 말[符言]
9) 언사를 원활(圓滑)하게 굴림[轉丸] (분실됨)
10) 혼란을 열어놓음[胠亂] (분실됨)
3. 권하(卷下)[외편(外篇)]
1) 근본적인 다스림 은밀하게 들어맞음[本經陰符] 7편
(1) 정신을 왕성하게 함[盛神]
(2) 의지를 기름[養志]
(3) 생각을 충실하게 함[實意]
(4) 위세를 발휘함[分威]
(5) 위세를 발산함[散勢]
(6) 계모를 원활하게 굴림[轉圓]
(7) 잡념을 줄여 마음을 집중시킴[損兌]
2) 관건을 장악함[持樞]
3) 내심으로 다스림[中經]
– 소진(蘇秦) ; 합종가
소진(蘇秦, ? ~ 기원전 317년?)은 동주(東周)의 낙양(洛陽)에서 태어났고 자는 계자(季子)이다.
낙양에서 태어나 제나라 귀곡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는것 정도가 사기에 기록된 부분이다.
.합종을 제안하다.
‘자치통감’ 제2권 주기(소진의 합종책) 편에 따르면, 하산후 소진은 각국을 돌아다니며 유세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고향에 돌아와 병법과 독심술에 관한 책을 읽으며 1년간 공부한뒤 주나라 현왕을 찾아갔으나 왕은 소진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에 소진은 진(秦)나라로 갔으나 당시 상앙을 처형한 직후 유세객을 미워하던 분위기에 밀려 다시 조(趙)나라로 갔는데 거기서도 역시 환영받지 못했다. 이에 연(燕)나라로 떠나 겨우 문후(文侯)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소진은 연나라 왕에게 합종의 전략을 주장했다. 합종이란 가장 강력한 진(秦)나라를 막기 위해서는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소진은 이렇게 말했다.
“연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진나라와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 먼저 가까이에 있는 이웃인 조나라와 친해져야 합니다. 천 리나 떨어져있는 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백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는 것 중 어느것이 더 쉽겠습니까? 그러므로 연나라의 걱정은 진나라가 아니라 바로 조나라입니다. 조나라와 합종하십시오. 천하와 하나가 되면 연나라는 우환이 없게 될 것입니다.”
문후는 소진의 말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많은 예물을 주며 조나라와의 동맹을 채결하도록 했다. 당시 조나라는 소진을 미워하던 재상 봉양군(奉陽君)이 죽고난 직후라 소진은 조나라 왕 숙후(肅侯)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천하의 형세를 살펴보면 한, 위, 제, 초, 연, 조 여섯 나라의 영토는 진나라의 다섯 배나 되고 여섯 나라의 병사는 진나라의 열 배가 됩니다.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서쪽의 진나라를 공격한다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왕께서는 진나라를 섬기며 진나라의 신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하라고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신하라고 부르는 것이 어찌 같겠습니까?”
조나라 왕은 소진의 말에 기꺼이 동의하며 많은 수레와 황금, 비단 등을 주면서 다른 주요 제후들을 설득해 합종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다. 다음으로 소진은 한나라로 가서 선왕(宣王)을 만나 유세했다.
“천하의 강한 활과 좋은 칼은 모두 한나라에서 생산되며 수십만 명의 무장 병력은 용맹하기로 유명합니다. 이처럼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현명한 대왕께서 진나라에 굴복하신다면 이야말로 천하의 웃음거리입니다. 이보다 더 심한 모욕이 어디 있습니까? 바라건데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한나라가 진나라에게 굴복한다면 진나라는 계속해서 대왕에게 영토를 요구할 것입니다. 달라는 대로 계속 주다 보면 대왕의 영토는 종시에는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속담에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 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대왕께서 진나라는 섬기시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의 꼬리가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언변으로 한나라 역시 합종에 참여시킨 소진은 위(衛)나라의 양왕(襄王)을 찾아갔다.
“위나라는 천하의 강국이고, 대왕은 천하의 현명한 임금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 진나라에 투항해 스스로 진나라의 속국이시라고 한다면, 이는 치욕입니다. 신하들 중에서 진나라에 복종하자는 사람들은 모두 간신이지 충신이 아닙니다. ‘주서’에서 이르길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덩굴이 기다랗게 얽히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작을 때 베지 않으면 장차 도끼를 사용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지 않다가 나중에 큰 화가 생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왕께서 저의 의견을 받아들이셔셔 여섯 나라가 합종해 전심전력으로 뜻을 통일하면 진나라는 결코 침입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라 왕께서 저의 어리석은 계책을 위나라에 전하고 대왕의 뜻을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위나라 왕 역시 소진의 의견에 따랐고 이어서 제나라의 선왕(宣王)을 찾아가 설득하기를
“제나라는 남쪽의 태산, 동쪽의 낭야, 북쪽의 발해, 서쪽의 청하 등으로 둘러 싸여진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토는 종횡으로 2천리에 달하며 수십만의 갑병들은 천하에 이름이 높습니다. 거기에 수도인 임치는 백성이 부유하며 성곽은 튼튼하며 백성들의 수는 많고 그 뜻을 높은 곳에 두며 의기양양합니다. 그리고 대왕의 어진 마음과 제나라의 강성함은 천하의 어느 나라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왕께서 서쪽을 바라보며 진나라를 받들려고 하니 신은 가만히 대왕을 위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한나라와 위나라가 진나라를 두렵게 생각하는 것과 제나라가 진나라를 두려워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연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뒤로 하고 양진의 길과 항보의 험지를 지나야 하는데 이 두 곳은 10명의 군졸이 요해처를 지키면 1000명의 군졸이라도 감히 통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더군다 진나라가 비록 제나라 깊숙이 침입하려고 하나 한나라와 위나라가 후방을 교란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런 까닭에 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진나라를 섬기자는 신하들의 계책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국의 면모를 갖고 있는 제나라가 오히려 진나라에 신하로써 받드는 것은 오명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에 대왕께서 그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나라 역시 합종을 성사시킨 소진은 마지막으로 초나라 위왕(威王)을 찾아갔다.
“무릇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나라로 천하를 집어삼킬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진나라는 곧 천하의 원수입니다. 연횡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라의 토지를 나누어 진나라에 바치려고 하는데, 이것은 원수를 존경하고 적을 공경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개 신하된 사람으로서 포악한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진나라와 교섭을 벌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의 국가가 갑자기 진나라의 침입을 받았을때에는 오히려 자기 나라의 재앙을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종하게 되면 모든 나라가 초나라를 섬길 것이고, 연횡하면 초나라는 진나라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책략은 그 계책의등급이 확연히 다릅니다. 이 둘 중 대왕께서는 과연 어느 쪽에 서시겠습니까?”
이에 위왕역시 소진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을 이루고 굳게 단결하였으며 소진은 합종의 책임자가 되었고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였다. 조나라로 돌아간 소진에게 숙후는 무안군(武安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여섯 나라의 합종 이후 진나라는 감히 함곡관 밖으로 군대를 보내지 못하였으며 그런 상태는 1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 장의(張儀) ; 연횡가
장의(張儀, ? ~ 기원전 309년)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秦)의 정치가 · 외교가이다.
친구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 선생(鬼谷 先生)에게서 수학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진나라에 등용되기 전까지 갖은 수모를 겪다가 마침내 진 혜문왕을 만나 정치 고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재상으로 승진되었는데, 촉나라를 평정하고 위나라의 일부를 차지하는 공을 세웠다.
6년 뒤에 진나라와 짜고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위나라로 하여 진을 섬기게 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아니 하자 진에게 몰래 연락해 위나라가 크게 지도록 만들었다. 이듬 해 제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고 마침내 진나라가 위를 공격할 목적으로 먼저 한나라를 쳐, 8만 명을 몰살시켰다. 이에 장의는 위나라 왕을 설득하여 소진이 이룩해낸 합종책의 약속을 깨고 진나라와 화친했으며, 장의는 다시 진으로 돌아가 재상이 되었다. 3년 뒤 위는 진을 배반하고 합종에 재가담했으나, 진이 공격하자 다시 화친했다.
장의는 강대국 초나라로 달려가 초를 망국의 위기에 몰아넣고, 다시 한나라로 가 그 왕을 협박, 한 역시 진을 섬기도록 했다. 진나라로 돌아간 그는 혜문왕으로부터 무신군(武信君)이라는 칭호를 받고 다시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 왕 또한 장의의 설득을 듣고 진을 섬기게 되었으며, 조나라로 간 장의는 또한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연나라까지 설득하여, 진나라와의 연횡책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는 진나라로 돌아갔으나 왕이 혜문왕의 아들 무왕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 무왕은 어릴 적부터 장의를 싫어하였을뿐더러, 이를 눈치챈 신하들이 비방을 하기 시작했다. 장의와 왕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퍼져 다시 모든 나라는 연횡책을 버리고 다시 합종책을 택하였다. 이후 장의는 자원해서 위나라로 간 뒤 1년 동안 재상으로 있다가 죽었다.
○ 음양가의 사상(陰陽家-思想)
음양가(陰陽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중 한 파로, 음양이원(陰陽二元)과 5행(五行)을 조합하여 신비적인 종교철학을 주창한 학파이다.
음양과 5행을 조합하여 하나의 철학 체계로 만든 사람은 제나라(齊: 기원전 1046~221)의 추연(鄒衍: 기원전 305~240)이라고 한다. 그와 더불어 역시 제나라(齊)의 추석(鄒奭)이 음양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음양가는 복잡한 자연현상을 관찰하여 이를 음(陰)과 양(陽)의 운동으로 설명하고자 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유파로, 음양가의 사상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두드러지게 발달한 우주·자연에 관한 음양(陰陽)·5행(五行)의 체계를 종합하여 이룬 일종의 자연철학이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추연(鄒衍)·장창(張蒼)·추석(鄒奭) 등을 음양가로 들고, 그 저작으로 ‘추자 鄒子’ ‘추자종시 鄒子終始’ ‘추석자 鄒奭子’ 등이 있다고 했다. 음양가의 사상은 음양의 개념이 도(道)·5행 등의 개념과 결합하면서 철학적으로 체계화되고 다른 사상체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5행이란 음양이 여러 가지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가져오는 자연의 변화를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와 같은 5가지 유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리학에서도 음양오행설을 수용하여 우주만물의 법칙과 원리를 규명하고 있다. 음양가의 사상은 한국에도 전래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삼국시대의 설화나 벽화 또는 관직의 명칭 등에서 음양사상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승려인 도선(道詵)에 의해 참위설(讖緯說)과 풍수지리설이 결합된 도참설(圖讖說)이 크게 유행했는데, 그 바탕은 음양사상이었다. 이는 조선의 건립을 정당화하고 천도문제를 정착시키는 데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정감록 鄭鑑錄’도 이러한 음양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끊임없이 민중들의 정서를 지배하면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비롯한 많은 난과 민중 항쟁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음양사상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추연(鄒衍)
기원전 3세기경의 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사람이며 한편 추연(鄒衍)이라고도 쓴다. 맹자보다 조금 뒤의 사람이다. 제나라 땅은 전통적으로 미신적·주술적·신비적 사상의 경향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중국 재래의 5행사상(五行思想)과 음양2원론(陰陽二元論)을 교묘하게 조합하여 소위 음양5행사상을 구축하였다. 추연의 저서라고 하여 추연(鄒衍) 49편, 추자종시(騶子終始) 56편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추연의 철학으로 유명한 것은 소위 ‘5덕종시설(五德終始說)’과 ‘적현신주설(赤縣神洲說)’이다. ‘5덕종시설’이라 함은 왕조(王朝)는 그 왕조에 부여(附與)된 5행의 덕의 운행논리(運行論理)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흥폐가 교체된다고 하는 일종의 신비적 역사철학이다. 진(秦)을 수덕의 왕조(水德王朝)라 하고, 그 이전의 4조(四朝)를 황제(黃帝)=토덕(土德), 하(夏)=목덕(木德), 은(殷)=금덕(金德), 주(周)=화덕(火德)에 배치하여 5행상극의 이론대로 각 왕조는 다음에 나타난 왕조에게 타도될 운명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물은 5행상극의 최후의 것으로서 왕조순환은 수덕(水德)의 구유자(具有者)인 진(秦)에 그친다고 하여 진왕조의 정통성 및 절대성을 말하였다. 적현 신주설(赤縣神洲說)이라 함은 전우주는 81주(洲)인데 그 중의 9분의 1인 9주를 점거하고 있는 것이 적현신주(赤縣神洲)라고 이르는 중국의 토지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신비적인 우주철학이다. 9주설(九洲說)은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에 쓰인 것이다. 9(九)는 궁(窮)으로 통한다. 그 9(九)와 9(九)를 승(乘)하여 우주를 설명하려는 단순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하는 바는 역시 신비적 주설(呪說)이다. 추연(鄒衍)이 말한 5덕종시설(五德終始說)은 얼마 안 되어 진(秦)이 망하고 한왕조(漢王朝)가 출현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또 새로운 한대(漢代)의 왕조론에 의하여 권력의 교체를 설명, 역사의 예언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추연(鄒衍)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는 음양과 5행의 조합은 한대에 더욱 복잡·세밀해져서 자연현상이나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 심지어 정령(政令)의 방식에까지 그 논리가 이용되게 되었다.
– 추석(鄒奭)
추석(鄒奭)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음양가(陰陽家)로 추연(鄒衍)의 학술을 배웠는데, 추연의 글을 수식한 것이 용의 문채를 아로새긴 것 같다고 하여 ‘조룡석(雕龍奭)’이라 일컬어진다.
사기-맹자순경열전에 “하늘을 말하는 자는 추연(騶衍)이요, 용을 새기 듯 문장이 고상한 것은 추석(騶奭이요, 지혜가 끝없이 넘치는 것은 순우곤(淳于髡)이다.”라고 했다.
○ 잡가의 사상(雜家-思想)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제설(諸說)을 절충 해설하여 집대성한 것이 소위 잡가(雜家)라는 것이다.
잡가(雜家)는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의 하나이다.
잡가(雜家)는 자신만의 창의성을 띤 사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제자백가의 주장과 이론을 절충[雜]하고 해설하여 집대성[雜]하기에 잡가라 부른다. 다른 사상과 주장의 장점을 모으되 그 단점을 피했다. 잡가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저술은 여씨춘추(呂氏春秋)와 회남자(淮南子)이다.
잡가의 학자들은 잡가라고 자칭하지 않았다. 잡가라는 명칭은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서 처음 나온다. 반고는 여러 가지 사상을 종합[雜]하고 절충[雜]한 것이 잡가의 특징이자 장점이지만, 이것이 잡가의 단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雜家者流,蓋出於議官. 兼儒 墨,合名 法,知國體之有此,見王治之無不貫,此其所長也. 及盪者為之,則漫羨而無所歸心.
잡가의 사상가들[流]은 대개 의관(議官: 간쟁하는 벼슬, 현대의 자문역)에서 나왔다. 유가와 법가를 겸하고 명가와 묵가를 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의 근본이 이것에 (즉, 이들 네 학문을 종합[雜]한 것에) 있다고 주장[知]하며 군주의 통치가 (이들 네 학문의 종합에 의거하게 된다면) 관통치 못하는 곳이 없다고 보는[見]데 이것이 그들의 장점이다. (그러나) 또한, 방종한 이가 자기 편할대로 [이들 네 학문을 종합하여 해석]하게 되면[為之] 넘치고 삐뚤어져서 (이들 네 학문의 본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그 어디에도) 돌아갈 바의 마음이 없게 된다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단점이다) _ 한서 예문지
또한, 한서 예문지를 보면, 잡가의 저명한 저작으로는 20종 403편[二十家 四百三篇]이 있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잡가 저작이 97부 2720권이 있다고 되어 있다. 기윤(紀昀)은 잡가유서(雜家類敍)에서 “잡가는 뜻이 넓어서,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봤다. 후스(胡適)는 “잡가는 도가의 전신으로서, 도가는 잡가의 새 이름이다. 한나라 이전의 도가는 잡가라 부를 수 있고 진나라 이후의 잡가는 마땅히 도가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우가 함양에 입성해 진나라 궁전을 불사를 때 수많은 사상 경전이 불타서 본래의 경전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게 됐기에 많은 사상가가 제자백가의 설을 각기 상이하게 취해서 원래의 본류를 다시 찾아보기 어렵게 됐으니 한나라 이후 구류십가를 정할 때 이 모든 것을 잡가에 합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있다.
– 여씨춘추(呂氏春秋)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사실상의 아비 여불위(呂不韋)가 많은 학자를 집합하여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절충·통합시키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령(政令)의 참고서로 한 것이 ‘여씨춘추’이다.
26권이 있는데 12기(十二紀) 8람(八覽)·6론(六論)으로 나누어진다. 취급한 학설 중에는 도가(道家)의 것이 가장 많고 유(儒)·병(兵)·농(農)·법가의 설도 섞여 있다. 이것을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은 이 12기(十二紀)의 요약이라고 한다.
○ 소설가의 사상(小説家-思想)
소설가(小説家)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학파 중 하나이다.
고사(故事, 세상의 사건, 설화 등)를 이야기로 전하고 서적으로 남겼다. 반고는 한서 제30권 예문지에서 “소설가는 패관(稗官), 즉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政事)를 살피기 위해 가설 항담을 모아 기록하는 일을 하던 벼슬아치로부터 발생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주된 학자, 사상가 또는 서적은 육자(鬻子) · 청사자(青史子) 등이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