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의 지상중계(13)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
정미연 박사(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크게 5가지로 분류하였다. 그가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설명하였기에 한인 사회에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는 부적합한 면도 있다. 그러나 문화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의 유형론을 바탕으로 우리의 견해를 비춰볼 수는 있다.
1.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Christ against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 즉 인간의 역사 내에서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취는 대립한다고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 속에 내제되어 있는 모든 긍정적 가치들을 부정한다. 이러한 유형에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문화의 가치를 부정적으로 여긴다. 문화는 반기독교적이고 비성서적으로 여긴다. 신약성경을 보면 유대문화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문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잘못된 여러 부분을 비판하셨다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책망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서 부패한 유대의 제사 문화 때문이었다.
역사속의 대표적인 예로 중세기 수도원이나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볼 수 있는 아미쉬 (Amish) 공동체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세속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분리된 삶의 형태를 추구한다.
사도 요한이 밧모스 섬에 갇혀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이 계시록을 읽을 때 1세기 역사를 배제해서 읽어도 문제가 되지만, 너무나 추상적으로만 읽어도 안된다. 1세기 사람들은 이 계시록을 매우 실질적으로 읽었다. 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적 단어들도 당시 사람들은 그 실제적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바벨론’을 우리는 상징적으로 이해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로마제국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면, 그것은 곧 ‘반역’ 내지 ‘반정부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666;이란 숫자도 우리는 상징적으로 이해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인들은 자신들과 절대 융화될 수 없는 타락한 문화를 가졌다고 여겨졌다. 기원후 1-2세기 대다수의 로마 황제들은 매우 잔인했고 타락했다. 절대 군주들이었기에 그들의 타락상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런 황제들이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음을 계시록은 나타내고 있다.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계시록은 관심 밖의 책이었으나, 핍박받는 성도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책이었다.
따라서 계시록은 기록될 당시의 핍박과 억압의 상황을 동일하게 경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현실을 이해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일들에 소망을 갖도록 한다. 예를 들어, 일제 때 일본을 바벨론으로 인식한다거나, 냉전 시대(Cold war) 때 중국과 러시아를 바벨론으로 인식하는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은 많은 나라들이 미국이나, EU (유럽연합), 때로는 중동 국가들을 바벨론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처럼 교회는 역사적 상황(context)을 바탕으로 요한 계시록을 이해해왔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묵시인 동시에 예언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계시록에서 언급된 바벨론을 한 나라로 규정하여, 마치 그 나라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계시록을 통하여 혼란과 억압으로 가득 찬 역사 속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시며 재림하시는 그날 모든 악을 멸절하신다는 데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그리스도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식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목회자들 가운데 현 시대의 부패와 타락을 치우치게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자신의 교회 외에 모든 교회가 타락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있다. 또한 말세가 다가왔다며 자신의 교회 외에는 거룩한 교회가 남지 않았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위험하다. 어찌 자신의 교회만 거룩하겠는가?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목회자와 교회가 결국 이단으로 빠지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가 타락했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신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전도를 통해 교회는 계속 개척되고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타임즈(The Times) 나 BBC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런던에서 문을 닫는 교회보다 새롭게 개척되는 교회가 더 많다고 한다. 물론 백인중심의 교회 중 교인의 수가 줄어들어 결국은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부흥을 경험하고 성장하는 있는 교회들도 있다. 또 아프리카 이민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교회들이 매주 개척되고 있다. 북부유럽의 교회 역시 ‘죽었다’고 한탄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북한을 위하여 수십 년 간 기도하고 있다는 북유럽 신앙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을 통하여 적어도 그들의 교회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Christ in(of) culture)
이 유형은 앞서 말한 ‘문화에 대립되는 유형’과 반대되는 유형이다. 니버는 이 유형에 속한 자들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에나 예수를 자기 사회의 메시아로, 자신의 소망과 열망의 성취자로, 참된 신앙의 완성자로, 가장 거룩한 영의 근원으로 칭송하는 자들이 있다”라고 밝혔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 국가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국가로 인식했다. 유럽은 곧 기독교 국가이며 그리스도의 통치를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그들의 문화역시 기독교 문화라 생각했다.
그러나 중세 교회를 살펴보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십자군전쟁, 계급주의 사회적 구도, 왕권신수 등의 제도는 결코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에도 노예무역, 인종 차별, 성차별, 식민정책 등은 결코 기독교적 문화라 할 수 없다. 어찌 이러한 제도에서 예수님의 삶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꾸준히 발전한 독일은 18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개신교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문화도 기독교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고, 유명한 신학자, 철학자, 음악가, 건축가, 예술가 등을 무수히 배출했다. 독일은 기독교 국가로 자타가 인정하는 바였다. 따라서 독일 문화는 ‘기독교적’이라 여겼다. 그러나 역사적 예를 보건대, 엄밀히 말해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적, 제도적 악을 기독교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 쉬워진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말살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을 때, 독일 루터교는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 침례교회와 디트리히 본회퍼 등 나치와 히틀러를 공적으로 저항하고 반대하여 핍박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수가 나치 체재를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조용히 받아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소위 종교개혁의 근원지인 독일에서 세계전쟁과 유대인 학살 같은 만행이 벌어진 것이다. 기독교 문화와 일반 문화를 동일시 여겨, 국가나 일반 문화를 기독교의 그것으로 인식하고 따라서 세속적인 국가, 문화, 가치관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잘못 인식하여 십자군이나 히틀러의 주장들이 정당화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선교할 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한국이나 호주의 문화 전체가 기독교적 문화라고 잘못 전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인간으로 창조해나가는 문화에는 분명 간격이나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3.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이 유형은 그리스도 혹은 교회와 문화를 다 긍정적으로 보지만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문화보다 위에 있다고 본다. 문화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가 문화를 통해 많이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유형은 1번보다는 2번에 가깝다. 나는 여기까지는 비교적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국가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교회의 권위와 권력을 정부나 일반 문화의 권위나 가치 혹은 영향력보다 더 높게 여김으로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간과하거나 정당화 시킬 위험이 있다.
이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으로써, 이 때문에 교회가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기도 했다. 중세 로마 교황청은 각 국가의 왕들과 귀족들보다 위에 위치하여 그들을 다스리려 했다. 심지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영토를 빼앗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전쟁을 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일에도 교황청에서 관여하고 다스린 예도 있다. 영적 권위가 정부의 권위보다 더 높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개신교에도 나타난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국가의 문화의 가차를 동일시 여김으로 인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의 문화를 미개하게 여기고, 기독교 세력이 강한 국가의 문화를 우월하게 보는 경우가 그렇다. 이것은 단편적이고 단순한 사고로 결국은 그리스도를 빙자로 교회의 거룩하지 못한 면마저 정당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4. 문화와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이 시각에 상당히 호응이 가는 부분이 있다. 즉, 그리스도와 문화는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동시에 공존하기도 어려운 역설적 관계(파라독스)라고 보는 관점이다. 3번과는 달리, 그리스도와 문화를 각각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문화에 대한 책임을 각각 구별하여 인정하는 시각이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지만, 로마의 법에 다 동의하지는 않았다. 유대법에 반대했지만 모두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매우 멋진 사람이었다.
5.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Christ transformed culture)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 뿐 아니라, 문화를 개혁하고 변화를 일으켜야할 의무가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청교도 사상이나 부흥운동은 영국이나 미국문화의 많은 부분에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노예제도 폐지, 흑인이나 여성 투표권, 아동노동 금지법, 문맹퇴치, 각종 인권보호를 위한 헌법, 배심원 제도, 주일을 휴일로 정하는 기준,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사용되는 성경, 구제사업, 자원봉사, NGO 등은 교회가 사회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을 나타낸다(계속).
정미연 박사 (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미국 이민 1.5세 출신의 차세대 신학자.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여러 신학교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몰링 칼리지 전임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여름과 겨울방학기간 동안에는 콩고, 인도, 케냐, 말레이시아, 미얀마, 네팔, 르완다. 우간다 등지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사역한다. 세계침례교연맹, 아태침례교연맹, 로잔회의 세계선교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