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의 지상중계(9)
하나님의 성품(1)
정미연 박사(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우리가 삶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가장 대표되는 표현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거룩
하나님의 대표적 성품 중 하나가 바로 ‘거룩’이다.
그런데 이 거룩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 하나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이 하나님의 사랑과는 상반된 의미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인자하심으로 인식되는 반면, 하나님의 거룩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쉽다.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완전하시고, 온전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거룩은 둘 다 100% 완전하다.
‘거룩’의 어원은 ‘완전히 구별되었다’(set apart)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곧, ‘하나님은 유일하고, 같은 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거룩성은 하나님의 이름 ‘I am who I am’에 포함되어 있다. 존재적으로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는 완전히 구별된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거룩을 요구하신다.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레위기 21:8).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11:45).
이 말씀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흉내 낼 수 없듯이 너희도 그렇게 구별된 존재가 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룩’은 구약윤리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즉, 하나님의 존재적 구별성은 선악을 판단할 때에 하나님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선악의 판단에서 하나님을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곧 선이고,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악이다.
광야에서의 거룩성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광야로 인도하셨다. 광야에는 이정표 하나 없는 곳이다. 별을 보고 이동해야하는 막막한 곳이다. 음식과 물도 부족하다. 문명을 이룰 수 없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과 율례와 율법, 각종 절기 등을 주셨다. 문명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거룩한 것’이라 하셨다.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문화가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여기에서 애굽이나 가나안 문명과 구별되는 이스라엘의 도덕적 거룩성이 시작된다. 이는 온전한 거룩성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도덕성을 추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도덕성을 타인과 혹은 타문화와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거룩’성은 이런 일반적 도덕성을 초월한다.
예언서를 보자. 이스라엘은 국가가 번영하고 평화로웠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해 근심하고, 책망하시며,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던 이스라엘에 심판의 날이 선포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거룩성은 하나님과 그들의 구별성에서 비롯되었기에, 이방국가와 비교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작은 죄도 허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러한 거룩성에 대하여 로마서에서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안식일의 거룩성
하나님과 그 백성의 거룩성은 제 7일에 지켜야하는 안식일에도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 7일인 안식일에 (1)‘복’을 주시고; (2)‘거룩’하게 하시고; (3) ‘안식’ 하셨다. 곧 그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복을 누리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율법적으로나 제도적인 의미에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안식은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우주라는 공간에 담아두신 피조물 속에서 일하고 물질을 소유하고 정복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쉼’이 곧 진정한 안식임을 말한다.
우리는 6일 동안 시간의 억압과 지배 속에 쫒기며 산다. 그러나 제 7일에는 여기서 해방되어 공관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쉴 수 있는 특별한 복을 받았다. 그래서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고통과 멍에를 대신 메어주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이다. 그분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공급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믿음 없이는 안식일을 거룩하고 복되게 지킬 수 없다. 적어도 안식일에는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만끽하라(fully enjoy)는 특권을 주신 것이다. 노동의 수고와 물질적인 염려에서 벋어나 교회와 하나님이 하나 되어 교제하는 가운데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기위 해 구별된 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아브라함 헤셀(Abraham J. Heschel)은 “안식일 지키는 것은 건축가가 하늘에 아름답고 거대한 궁전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다. 안식일은 또 한 우리가 현재에서 미리 맛볼 수 있는 천국과도 같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은 피조물을 담고 있는 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시간을 초월하여 경험하는 것에 있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하루를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존재적 구별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가를 보면 도움이 된다. 안식일에 어머니는 구별된 음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누룩을 집 안에 숨겨놓고 아이들에게 찾아오도록 시킨다. 그리고 숨긴 누룩은 ‘숨겨진 죄’를 의미 한다. 아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숨겨진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작은 숨겨진 죄도 모두 회개하여 온전히 거룩하여 진 상태로 안식일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음식을 준비하고 주변의 이방인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며 안식하는 것이다.
2. 사랑
사랑은 하나님 자체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에서 이미 증명된다. 삼위일체의 관계 안에서 사랑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은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헤세드의 사랑
‘사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헤세드’(Hesed)이다. 사실 이 ‘헤세드’란 단어는 너무 많은 뜻을 포함하여 한 가지로 번역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인애하심, 자비하심, 신실한 사랑’(loving-kindness, mercy, loyal love) 등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성경으로는 룻기와 호세아서를 들 수 있다. 룻이라는 이방 여인을 다윗의 조상으로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을 보여준다. 호시야서는 타락하고 부정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저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대표적으로 표현된 성경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신들이나 존재들의 사랑과는 완전히 구별됨을 나타낸다.
십자가의 사랑
이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십가가의 사랑은 복음에 근거하여 타인을 위하여 스스로를 내어주는 ‘희생과 죽음’을 전제한다. 갈등과 다툼이 있을 때에는 누군가 희생하고 죽어야한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우리의 불순종과 게으름으로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
신학교 교수로서 매년 졸업생들을 배출할 때에 마음이 한없이 기쁘기도 하지만 무겁기도 하다. 과연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할 만큼 잘 준비되었는가에 대해 자신이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종종 신학생들의 장학금과 학회의 기금을 모금해야할 때가 있다. 이럴 때 많은 어려움이 있다.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스스로 되뇌인다.
‘너 왜 자존심 상해하니? 너 십자가에서 죽었잖아!’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 내 안에 사는 것도 그리스도고 나에겐 죽는 것도 유익하다”를 내가 고백하고 실천한다면 내 자존심이나 명분이 사역에 걸림돌이 될 필요가 없는 것이 정상이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사역하는가에 있다. 설령 헌금을 하는 이들이 미성숙함을 보여주어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복음을 전하고, 사역자를 키우는 일에 동참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핵심이기에 나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미연 박사 (몰링 칼리지 교수_조직신학, 윤리학)
미국 이민 1.5세 출신의 차세대 신학자.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여러 신학교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몰링 칼리지 전임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여름과 겨울방학기간 동안에는 콩고, 인도, 케냐, 말레이시아, 미얀마, 네팔, 르완다. 우간다 등지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사역한다. 세계침례교연맹, 아태침례교연맹, 로잔회의 세계선교글로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