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오르페우스(Orpheus)
귀스타브 모로 / 유화 / 1865년 / 154×99.5cm / 오르세이 박물관(파리)

○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4.6~1898.4.18)
귀스타브 모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성서의 이야기나 신화를 많이 그려 이름을 날렸다. 매우 화려한 기교로 시적·환상적 표현을 하였다.
귀스타브 모로는 1826년 파리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22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1848년 이후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들라크루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모로는 그림의 주제를 역사와 신화에서 찾기 시작하며 이는 후에 모로의 화풍을 대변하게 된다. 1857년에서 1859년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신화적 주제를 모음과 동시에 그림기술을 향상시켰다. 파리로 돌아와 당시의 미술계에 유행하던 살롱 초대전에 약 20년간에 걸쳐 수시로 작품을 출품한다. 1864년 외디푸스와 스핑크스를 그려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에 그려지는 대다수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과 일화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모로는 의식적으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인간의 번민과 고통, 이상적인 영웅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나는 표현주의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게 된다.
1892년 파리의 예술학교의 미술과 교수로 초빙되어 마티스, 루오, 마르케 등의 화가들을 길러낸다. 특히 모로는 자상함과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교수 방법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898년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후 유언에 따라 모로가 살던 파리의 9구 로슈푸코 거리 (프: rue de la Rochefoucauld) 14번지의 집은 현재 모로 박물관(프: Musée Moreau)으로 되어 있다.
대표 작품으로 살로메(1871), 에루로페와 황소(1869), 레다(모로 박물관), 오르페우스(1865) 등이 있다.

○ 귀스타브 모로의 오르페우스(Orpheus)
이 그림의 주제인 오르페우스는 모로를 시작으로 세기말의 상징주의를 매혹한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로에게서 음악을 배운 음악의 창시자인 동시에 신비주의 종교의 사제였다. 그의 죽음은 예술가의 자기 희생 혹은 예언자의 순교로 해석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오르페우스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모로 역시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두고 이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로의 예술적 경향에 대해 상징주의(Symbolism)라는 표현을 쓰는데 상징주의자들은 리얼리즘이 그리는 사물의 단순 명백한 사실을 넘어 사물이 가진 이면의 의미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무릇 예술가는 이러한 특별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만이 가능하며 따라서 예술가는 사물에게 내재되어 있는 신의 뜻을 이해하는 예언자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상징주의 화가들은 스스로를 히브리어의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Nabis)라고 불렀는데 상징주의 화가들을 특별히 ‘나비 파’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로가 그린 화면은 매우 정교하기로 유명하다. 화면에 서 있는 트라키아 여성의 모습은 섬세한 무늬로 짜인 옷감으로 치장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보석 장신구를 걸치고 있다. 이것은 모로 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 그림의 표면 자체를 보석이 박힌 듯한 마티에르(matière – 질감)를 보여주기 위해 물감을 덧칠하는 임파스토와 심지어 캔버스를 긁고 문지르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 오르페우스(Orpheus)
오르페우스(그: Ὀρφεύς, 영: Orphe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인이자 악사이다. 전설적인 리라의 명수였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비코스나 핀다로스는 오르페우스(Orpheus)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한다.
– 오페우스의 유년시절
오르페우스는 오이아그루스와 서사시의 뮤즈 칼리오페의 아들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인간 오이아그루스가 아니라 음악을 관장한 신 아폴론이었다고도 한다. 또 오르페우스의 아버지는 트라키아의 왕이었다고도 하며 그레이 부스는 오이아그루스를 트라키아 왕이라 말한다. 하프의 기술은 아폴론에게 전수되었다고도 말한다. 그 기술은 매우 교묘해 그가 하프를 연주하면 숲의 동물들 뿐만이 아니라 나무들이나 바위까지도 그의 주위에 모여 귀를 기울였다고 말해진다.
– 아르고호 원정참가
오르페우스는 이아손이 이끈 아르고호 원정에 참가하여 하프를 타서 폭풍을 잠재우고, 안테모에사 섬에서 마녀 세이렌들의 요사스런 노래를 하프 연주로 물리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곳의 위험을 피했다. 이 때 단 한 명 테레온의 아들 브테이스만이 유혹에 져 생명의 위기에 빠졌지만 아프로디테가 그를 빼앗아 리류바이온에 살게 했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아내다.
– 오르페우스의 죽음
지상에 나온 오르페우스는 여성과 접촉을 일체 멀리하고 대신 소년하고만 관계 맺으며 오르페우스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디오니소스가 트라키아에 방문했을 때 오르페우스는 새로운 신을 존경하지 않고 단지 헬리오스(오르페우스는 이 신을 아폴론이라고 불렀다)가 가장 위대한 신이라고 말했다. 이에 화난 디오니소스는 마케도니아의 데이온에서 마이나스(광란하는 여자)들에게 오르페우스를 덮치게 해 마이나스들은 오르페우스를 여덟 조각으로 찢어 죽였다. 또는 마이나스들이 분노한 이유는 오르페우스가 여성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오르페우스의 죽음을 동성애자에게 떨어진 천벌의 예로 들었다.
마이나스들은 오르페우스의 목을 헤브로스 강에 던졌다. 그러나 목은 노래를 부르면서 강을 흘러 바다에 나가 레스보스 섬 해안에 당도했다. 주민들은 예를 갖추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묻었고 그 후 레스보스 섬은 오르페우스의 가호에 의해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또 뮤즈들은 그의 리라를 하늘에 안치했다. 이것이 거문고자리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