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墨子, BC 470? ~ BC 391?)
묵자(병음: Mòzǐ: 기원전 470?~391?)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송 허난 성에서 탄생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다. 초기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 중 묵가를 대표하는 위인이다.
핵심 사상은 겸애이고 ‘묵자’에 전한다. 유교와 도교와 대립하였다. 그 사람의 사상은 제국에서 채택됐으나 진이 집권하자 선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농성의 달인이어서 초나라의 공격을 아홉 번이나 방어하였었다. “굳게 지킨다”는 뜻인 묵수가 여기서 유래했다.

○ 사상
묵자는 참사랑이 부족하여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판단하고 사람들이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고 남에게 이롭게 하면 하늘의 뜻과 일치하여 평화롭게 된다는 겸애를 주장했다.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빈부 격차가 없는 경제상 평등(문리)을 강조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예악을 가볍게 생각하라고 주장하고 정치설로서는 비전론이 있다. 겸애 사상은 유가의 인, 불가의 자비와 유사하고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상 색채는 민간 신앙을 계승한 듯하며, 신분이나 관등이나 직책의 상하 관계에 의거한 서열을 존중하여 전통과 예악을 숭상하는 유가와 상대하였으나 겸애의 개념은 기득권층의 정치상 이유 탓에 역사상·철학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묵가는 진 이후에 쇠퇴하여 소멸하였다. 그 사람이 한 주장과 제자들의 설을 모은 책 ‘묵자’에 그 사람의 사상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묵적이 사회적인 계급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 맡은 일에 따라 나뉜 사회의 계급을 인정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왕 밑에는 신하들이 있듯이 만인을 대표하여 그들의 일을 다루는 자 밑에는 그를 보필하여 국정을 보살피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사회의 구성에 필요한 계급은 인정하였다.
○ 철학
공자와 묵자의 사상과 이론은 존비친소에 토대한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전체 맥락에서는 꼭 반대되지는 않는다. 정치가 백성을 이로운 방식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는 점은 공자의 철학과 통하는 부분도 있다.
묵자는 유가의 존비친소에 기초한 사랑을 비판하면서, 다른 사람의 가족도 자신의 가족을 대하듯 하라고 주장하는 겸애를 주장하였다. 이 겸애는 유가에서 ‘아비도 몰라보는 집단’이라고 비난받는다. 묵자는 유교의 허례허식이 백성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유교의 예를 맹렬히 비판하였다(유가의 삼년상의 비판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예이다). 공자를 포함한 사상가 대부분은 통치자가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묵자는 그런 사람들과 달리 통치자도 백성처럼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관습화한 예를 소모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묵자의 사상을 보면, 상현은 유가의 주장을 반박하여 관리의 임용에는 신분이나 직업에 구애하지 않고 문호를 넓게 개방하여 등용하라고 말하였다. 묵자의 겸애는 자국과 타국, 자가와 타가의 차별을 없애고 사람은 널리 서로 사랑하라는 설로서 묵자 사상의 결정체인데 공자가 통치자 처지에서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 일정부 통하므로, 반드시 배치된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비공은 전쟁이 불의이고 백성을 해친다고 주장하여, 현대 평화주의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절용과 절장은 군주의 의례적인 사치에 반대한 것이다. 비악에서는 궁정음악이 백성의 이익에 배반됨을 말하였다. 천지에서는 하늘이 뜻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정의가 되며, 모든 사람이 본받고 따라야 할 규범이 된다고 하였다. 상동은 나라의 상하가 일치해야 하고 천자가 행하는 것이 하늘의 뜻과 부합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 출신 및 생애
묵자의 묵은 검다는 뜻이다. 여기서 묵은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첫 번째는 묵자의 살이 검었다는 것, 두 번째는 묵자가 이마에 먹을 새기는 형벌인 묵형을 받았다는 것이다. 살이 검다는 것은 해석하면 햇볕에 살갗이 탔다는 것인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묵자는 직접 노동하는 위치, 즉 농민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묵형을 받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당시 묵형 받은 범죄자들은 하층민이거나 하층민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묵자는 하층민의 신분으로서 살아갔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묵자라는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묵자는 직접 노동하는 하층민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묵자가 통치자도 백성처럼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 맞아떨어진다.
(고대의 중국 은허 유적에서 태평양계 흑인종의 유골이 나온 점을 생각하면, 짙은 피부색을 가져 묵자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기록에 묵씨는 여성 강씨로 되어 있는데 묵자와의 관련성은 알 수 없다. (묵자가 여성일 가능성도 있다) 일부 묵으로 발음하는 복성을 줄여서 묵씨가 되었다고 예상하는 때도 있으나 기원전에는 거의 단성화가 진행하지 않았다. 공자, 노자, 순자, 장자는 당대에 성이 없었고 발음과 성씨을 연결해서 연원이 만들어진 것은 후대에 일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묵자가 그가 겨우 관직에 오른 하급 장인 계급의 일원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그에게 다정하지 않았고 사랑을 거의 주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묵자는 비록 그가 송 지방에서 잠시 관직을 하였지만 루 지역(오늘날의 산둥 지방의 텅저우)의 사람이었다. 공자와 같이, 묵자는 전국시대에 서로 다른 통치국에서 관리가 되고 싶어한 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묵자는 목수였고, 기계를 만드는 데 기계를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기계적 새부터 성곽을 에워싸기 위해 사용된 바퀴달리고 이동식의 “구름 사다리”까지 모든 것을 설계하였다. 비록 그는 높은 관직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묵자는 방어 시설에 대한 전문가로써 다양한 통치자들에 의해 찾아졌다. 그는 그의 초년기 때 유교를 배웠지만 그는 유교가 너무 운명론적이고 축하와 장례식에 너무 많은 공을 들여 서민들의 생계와 생산성에 해를 끼친다고 보았다. 그는 그의 일생 동안 공자와 견줄 만한 큰 추종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대부분 기술자들과 장인들-은 철학적, 기술적인 저술을 모두 공부한 숙련된 질서 속에서 조직되었다. 그 당시에 묵자의 대중적인 이해의 몇몇 설명들에 따르면, 그는 많은 사람들이 허난으로부터 온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 받았다. 개인적인 이득이나 심지어 그 자신의 삶이나 죽음에 관계없이 그의 열정은 사람들의 선을 위해 있다고 하였다. 사회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공헌은 공자의 제자인 맹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다. 맹자는 진신에서 묵자는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은 믿었다고 저술하였다. 무언가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한, 묵자는 비록 그것이 거의 머리나 그의 발을 다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할 것이다. 장태안은 도덕적 선함의 관점에서 공자와 노자 조차도 묵자와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자는 전국시대의 폐허에서 한 위기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다니며 통치자들의 정복 계획을 만류하였다. 묵자의 “Gongshu” 장에 따르면 그는 송 지역에 대한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주 지방으로 십 일동안 걸었다. 주 정부에서 묵자는 추의 전술가인 Gongshu Ban과 9개의 모의 전쟁 게임에 참여하였고 Gongshu Ban의 모든 책략이 뒤집혔다. Gongshu Ban이 그에게 죽음으로 위협하자, 묵자는 왕에게 그의 제자들이 이미 송 군의 군대를 훈련시켰으므로 자신을 죽이는 것은 쓸모없을 것이라고 알렸다. 주왕은 전쟁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묵자는 돌아오는 길에 그를 알아치리지 못한 송의 병사가 묵자가 그들의 도시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몹시 차가운 비를 맞으며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이 이야기 후에 그는 Qi 지방이 루 지방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는 도시에 대한 방어가 단지 축성, 무기, 식량 공급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재능있는 가까이 두고 그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 묵자의 출신과 행적
묵자은 전국시대의 사상가이자 기술자, 묵가의 창시자. 성은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이다.
그의 생존 연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그의 사상에 대해 그의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책인 묵자와 전후의 다른 사상가들과 선비들의 언급으로 그는 아마도 공자 사망 전후에 태어났고 맹자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출신
이름 외의 출신에 대한 신상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송나라의 대부이라는 설과 고죽국(孤竹國) 왕족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고, 오형 중 죄인의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묵형을 받은 인물이라 墨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고, 혹은 피부가 검은 즉 노동자(하층민)출신 또는 외국인이라는 주장, 이외에 먹줄을 긋는 데 쓰는 도구를 묵이라 했으니 목수 등 장인이 아니었겠느냐는 말도 있다. 또는 묵가 학파 사람들이 검고 거친 옷을 입으며 강력한 규율을 가진 집단이었다는 일면에서 협사(俠士)나 멸망한 나라의 군인 출신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 행적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의 열전이 실려있기는 하지만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라서 그의 실존여부조차 의심받고 있다. 실존 인물라고 가정한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유력한 국가는 송(宋)나라인데 그 나라에서 대부로 지낸적이 있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논리는 개혁적으로, 그 근본은 유가에 있다. 묵자는 유교를 공부하였으나, 묵자는 유교가 기득권세력들의 권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통치를 맡겼던 것과 묵가가 생각하기에는 유가의 비현실적인 요소 몇가지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이를 혁파하고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현실에 기반하여 묵자가 성립한 학파이다. 그러나 그런 묵자가 평등이라는 가장 비현실적인 걸 연구했다는 건 역설적이다.
그의 사상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 중국에서 유가보다 훨씬 성행했던 학문이자 종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약자의 편에 서는 이미지도 있었다. 게다가 전국시대 당대의 천재들은 사상가가 되거나 장군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의 길밖에 없었는데, 묵자는 사상가에다가 전쟁도 하는 둘다 였으니 그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스타였다. 때문에 후대의 유학 사상가 맹자는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묵자)에게로 돌아간다.”며 한탄한 바 있다.
묵가의 가르침은 다름 아닌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겸애;兼愛)이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공자보다 유능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가족관계나 과거는 묻지않고 사람들을 모여살게 해서 그 지방을 관리했을 때는 꽤 효율적으로 관리했고, 송나라를 침략하려던 초나라의 왕을 10일 동안 걸어서 만나 설득하여 전쟁을 그만두게 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묵자는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고 한탄했다.” _ 공수
묵자의 사상 중 특히 미학에 대한 논설 중에서 가장 후대에 의해 거론 되는 것은 ‘예악의 무용성’일 것이다. 이를 ‘비악(非樂)’이라고 한다.
“오늘날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은 악기를 만드는 것을 국가에 필요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 악기들은 단순히 땅에 괸 물을 퍼 담고, 허물어진 흙담을 빚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백성들로부터 거둔 많은 세금으로 큰 종과 북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 더하여 피리와 생황 등의 악기를 만드는 것이다. 옛적에 성황들 역시 백성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어 이로 배나 수레를 만든 적이 있다. 그들은 그것들을 다 만든 후에 말하였다.
“내 장차 어느 곳에다 이것을 쓸 것인가? 배는 물에다 쓰며, 수레는 뭍에서 쓴다. 그리하여 군자(君子)는 그의 발을 쉬게 하고, 소인(小人)들은 어깨와 등을 쉬게 하리라!” 그런 까닭에 백성들은 많은 재물을 내어 나라에 바치고도 감히 그 일에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이 오히려 백성들의 이익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악기의 경우에도 백성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또한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니, 나는 감히 그르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_ 비악 상(非樂 上)
묵자는 ‘비악’을 통해 사회의 심미와 예술적 활동 영역에서 현실 생활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부귀의 대립이나 착취자와 피착취자들 간의 첨예한 모순 등을 폭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묵자의 ‘비악’은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한편에는 묵자의 ‘비악’은 고대 소생산자 계층의 극단적인 공리주의에서 출발하여 심미와 예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비악 상'(非樂 上)편에서 이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묵자는 말했다. “인자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천하의 이익을 도모하고 천하의 폐해를 제거하도록 힘써 구하는 것이니, 장차 그것으로써 천하에 법을 세워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일이면 하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면 하지 않는다. 무릇 어진 사람이 천하를 위해 일을 도모하는 것은 눈에 아름다운 것, 귀에 즐거운 소리, 입에 맞는 맛, 그리고 자기 몸의 안락 등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 백성들이 입고 먹는 데 필요한 재물을 빼앗는 것은 어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묵자는 ‘비악’과 일체의 심미 활동을 반대하였지만, 미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으며, 음(音), 색(色), 감(甘), 미(美)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며, 이들은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는 물건의 실용적인 디자인에 대해서 굉당히 긍정적이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묵자는 생황을 잘 불었으며,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또한 묵자는 논리학의 개념을 논하며, 미(美)와 추(醜)는 객관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미의 존재를 부정한다기보다 위정자들이 그 미를 향유하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허례허식으로 인한 사회 역량의 낭비를 비판하는 쪽에 가깝다.
묵자의 특이한 점은 사상가라기보다 기술자나 과학자에 가까운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묵자에 대한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가 삼년에 걸처 나무로 새를 만들었더니 날기는 했지만 하루만에 부서졌다는 것이며, 카메라의 원리(카메라 옵스큐라)를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묵자의 주장을 가리키는 말 중 하나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흠좀무 또한 위에 나온 초의 송 공격을 포기시키려는 유세 도중 초의 기술자 공수반과 서로 나무 모형 병기를 만들어 모의 공성전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고 사상가로서의 그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점은 이 사람은 처음으로 노동의 중요성과 분업에 대하여 설파한 사람이다. 짐승들이야 털가죽 있고 풀 뜯어 먹으면 되므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인간은 노동이 없으면 빈곤하게 살 것이며, 나라가 어지러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랫 사람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바느질하고 농사짓고 있으니 지도층도 열심히 정무를 봐서 그들에게 할당된 노동을 하라는 내용이 있다. 비공, 비악, 절장 등등 묵자 텍스트 내에서 등장하는 주제들마다 기반으로 깔리는 게 바로 이 논리이다.
제자백가들이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한 것과는 달리 묵자는 말솜씨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묵가 쪽에서는 “말솜씨가 너무 훌륭하면 말 자체에 정신이 팔려서 그 내용에 신경쓰지 않게 되기 때문에, 본질이 잊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알아듣기 힘들게 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묵가의 논리는 예시와 비유를 이용한 변증법적이다. 이는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것은 기득권층이 아니었던 두 사상이 공통으로 가진 분모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묵자가 하층민인 기술자 출신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그의 출신성분에 대한 인식이다.
묵가 교단은 종교적인 비밀결사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자들 스스로의 재산도 교단 공동체와 공유하고 개인적인 명리를 탐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교리를 어기는 자는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주저없이 죽여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중 일부는 그를 최초의 마르크스라고도 부른다.
진나라의 복돈이 거자를 맡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 복돈은 나이도 많은 데다가 대를 이을 사람이라곤 그 아들 하나뿐이었다. 진나라 혜왕이 복돈에게 말했다.
“당신은 늙었고 또 외아들이니 죄를 감해 주겠소.”
“묵가의 법에 따르면 남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고, 남을 해친 자는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대의입니다. 나는 묵가 사람이니 묵가의 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복돈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 아들을 처형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_ 거사
이는 한편으로는 묵가의 사상을 높이는 요인이기도 했지만 묵가 사상이 널리 인정받는 데 있어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에는 그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하층민 및 기술자 계층의 지지를 널리 받은 것으로 보이며, 맹자도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양묵지도'(楊墨之道. 양주와 묵적의 도)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특히 맹자는 양자 항목에서도 언급하듯이 인이 가족에 대한 애정을 기초로 다른 대상에 대해 차등적으로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과 반대로 가족 등 집단의 해체까지 주장한 묵자에 대해선 ‘무부(無父)’, 즉 아버지도 없는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쉽게 말해서 묵가는 ‘남의 부모자식도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해라’라고 주장했는데, 맹자는 이에 대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부모랑 자기 부모랑 같냐’라는 식으로 나온 것.
그러나 맹자나 양자도 자신들의 사상에 배치되는 묵자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는 진실로 천하를 사랑하였다”며 그를 인정했다. 그런데 의외로 맹자와 묵자가 서로 통하는 부분도 있는데, 위정자들이 나라 통치를 개판으로 하면 하늘의 뜻을 받아 그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한 부분이다. 다만 이 부분이 정작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계층의 입장에선 굉장히 껄끄러운 내용인지라 상당히 박해를 받았는데, 묵가는 이 외에도 사상이 전반적으로 지배계층 입장에서 반국가적인 내용이 많은지라 이미 진나라 대부터 상당한 공격을 받아서 한나라 대에 이르면 아예 묵가 학파 자체가 절멸될 정도였고, 맹자의 경우는 후대 왕조들이 이 부분만 쏙 빼놓고 말한다던지 아예 주희는 성리학을 집대성하면서 이 부분을 없애버리고 형이상학적인 내용까지 더해서 유가를 마개조시키기까지 한다.
– 기타
묵공의 혁리는 묵자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묘사되며 묵자가 주창한 ‘겸애’를 실천하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양성을 지키러 오는 것이다. 많이 왜곡되고 과장되었지만 묵공에서는 묵자 사후 묵가가 어떻게 분열되고 사라져 갔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노동의 가치에 관한 얘기라던지, 잉여생산물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등 공산주의와 통하는 부분도 있고, 심지어 공동체의 초소화, 반강권주의, 반전주의 등 아나키즘과도 통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또한 청조 말기와 민국 시기에 열강들의 침략으로 개판 5분전이 된 중국에서 제자백가 사상가들 중 상당히 재조명된 학파이며, 양계초 등의 지식인들이 주석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공산주의 중국에서도 배척받았다. 이는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대에는 다시 ‘제자백가들 중에서는’ 이라는 단서를 달아서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높이 평가하는 추세이다.
사상의 주가 되는 “겸애” 때문에 천주교(=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 역시 묵자의 일파로서 인식되어지기도 했다. 얼핏 보면 묵가의 겸애와 기독교의 박애는 비슷해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전혀 같다 할 수 없다. 기독교의 아가페는 보다 정신적이고 희생적, 무조건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반면 묵가의 겸애는 ‘내가 남을 사랑해야 남도 나를 사랑하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된다’라는 논지로 철저히 세속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부분을 강조하기에 혹자는 이를 이타적 이기주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겸애든 박애든 현실적으로는 매우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만 제외하면 묵가의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한 겸애(兼愛)는 사실상 ‘집단이 극초분할화되어 나라도 가족도 구별짓지 않는 절대평등 및 공유의 세상’이라는데, 이것이 가히 후세에 나타날 공산주의같이 2500~3000년을 앞서간 사상가인지는 일단 그런 세상이 성큼 다가오고 나서야 논할 만하다. 그리고 이상적 공산주의도 그의 이상에는 미치지 못할 정도인지는 묵적과의 정교한 비교가 필요한 작업이나 원전의 보존이 문제다.
묵가의 기술혁신을 고평가하는 의견도 있으나 오히려 제자백가 사상들 자체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했으므로 혁신을 반대한 학파를 찾기 어렵다. 다만 다른 제자백가 학파들의 경우는 주로 사회구조나 정치구조에 대한 개혁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묵가는 그 뿐만 아니라 공학, 기하학, 물리학 등에도 시대에 비해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여담이지만 오기와 관련된 책자에서 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러한 기록문물에서 묵가의 사람들은 좋은 방어술을 널리 알려 모두가 방어술만 익히면 전쟁이 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기에 방어에 매우 뛰어난 자들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묵가 사상의 기본인 겸애를 실천하는 방법들이 비전과 비공인 관계로 그는 공격법은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묵자 편명을 봐도 제목이나 내용이 대부분 방어전술 위주로 쓰여져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치는 것을 악하게 보고 반대로 약한 자가 방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는 이들로서 전쟁 자체를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봤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방어를 통해 공자(攻者)를 지치게 해 회담장으로 이끌어 화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備)로 시작되는 일련의 편들을 보면(비성문,비고림,비수 등등…) “진정한 방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묵가의 전쟁에 대한 시각은 비공(非攻)편에서 잘 드러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치면, 공격당한 작은 나라의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 대신 병졸이 되어 싸워야 합니다. 또한, 큰 나라의 백성들 역시 농사를 짓는 대신 병졸이 되어 싸워야 합니다.”
군주들이 전쟁을 통해 패권을 쥐어봤자, 승전국 백성이나 패전국 백성이나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없고, 천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을 할 수가 없게 되니, 애초에 전쟁은 하지 말아야하며, 설령 누가 전쟁을 일으키면 공격자를 방어로 꺾어버려서 최대한 전쟁을 하지 않게끔 만들라는 게 요점이다.
한편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발사한 퀀텀 통신 위성(Quantum-Communications Satellite)에 묵자(Micius)라는 이름을 붙였다.

○ 서적 ‘묵자'(墨子)
.묵자의 사상을 기록한 책
묵자의 사상이 담긴 저서로 묵자와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묵가학파의 학설을 정리한 묵자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문장들이 엉키고 설켜서 내용이 중복되거나, 오탈자 등이 많아서 내용의 해설이 생략되고, 전국시대 당시의 저술이 맞는지도 의심되는 등 현재 묵가의 사상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유감스럽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묵가가 소멸한 후에 중국에서도 사실상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책이었다. 왜냐하면 묵자 판본은 오랜 세월에 방치되었고 1894년에 이르어서야 묵자의 복원이 완성되고 이후 량치차오(양계초)의 연구를 거친 뒤 현대적인 의미의 연구도 후스의 중국철학사대강(1919년)부터 시작되었을 정도로 묵가의 연구는 매우 더딘 편이었다. 더욱 중국 공산혁명 이후에는 묵자의 전쟁반대론을 계급투쟁을 반대했다는 논리로 폄하하면서 더더욱 연구가 더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묵자는 도교의 경전인 도장(道藏)에 편입되었고, 원래 71편 중 53편 밖에 남아 있지 않고 제대로 판본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현존하는 내용 중에 묵자가 직접 저술했다고 하는 《경상(經上)》, 《경하(經下)》, 《경설상(經說上)》, 《경설하(經說下)》, 《대취(大取)》, 《소취(小取)》 등 6편은 따로 《묵경(墨經)》혹은 《묵변(墨辯)》으로 불리는데 논리학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故, 所得而後成也
小故, 有之不必然, 無之必不然
大故, 有之必然, 無之必無然 若見之成見也
조건, 그것을 얻으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요조건, 그것이 있다 해도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충분조건, 그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고, 그것이 없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나타나면 그것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力, 刑之所以奮也
힘, 형체가 움직이는 원인이다.
圜 一中同長也
圜, 規寫交也
원, 하나의 중심에서 같은 거리다.
원, 그림쇠로 그리면 겹친다.
논리학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역학의 힘, 기하학의 원의 정의와 합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묵경의 문체가 일반적인 한문의 문체와는 다르게 방행독법(旁行讀法)으로 읽어야 하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묵경이 방치되어 오랜 시간이 흘러서 방행독법으로 읽어야 하는 문장이 한 줄로 잘못 적혀있고, 연문(衍文)과 오자(誤字)도 있어서, 한문에 익숙한 중국 전통사회의 학자들도 글에 적혀있는 연문과 오자를 제대로 구분해야, 글의 문맥을 제대로 해독할 수 있는 정도였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리 영어를 잘 한다 하더라도 전문가가 알아보는 학술적 전문용어가 잔뜩 포함되어 있는데다 오타와 오류가 많이 포함된 물리학 논문을 읽는 것이 전공자가 아니면 읽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근대와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연문과 오자를 걸러내고 묵경 부분의 해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양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는 대단히 다르고 오히려 현대의 형식논리학이나 자연과학의 사고방식과 유사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중국 전국시대의 공돌이들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을까에 대해 알고 싶다면 묵경 부분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국내의 묵자의 번역본들은 전체 본문이 난해한 부분이 많아서 대부분에 번역하기 쉬운 부분만을 발췌 번역하거나, 특정한 부분을 번역하여 자기의 의견을 담은 번역본 등이 상당수가 있으며, 완역이 아니지만 해독하기 힘든 문장을 빼고 대부분 문장을 번역하여 완역본에 가까운 번역본이 있지만, 그중에 진짜 완역본은 신동준의 번역본이 유일하다. 다만 본문/직역 외에 여러 다른 번역본들의 해석도 같이 실어놓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