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발명가 · 사업가, 토머스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1847~ 1931)
토머스 앨바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1847년 2월 11일 ~ 1931년 10월 18일)은 미국의 발명가 및 사업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사람으로 1,093개의 미국 특허가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토머스 에디슨은 후에 제너럴 일렉트릭을 건립하였다.
미국 오하이오 주 출신의 사업가이자, 발명가이며 제너럴 일렉트릭의 전신인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의 설립자 에디슨은 가장 성공한 근성가 중 한 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에디슨이 과학자라는 것이다. 사업적인 발명가와 연구공학자는 분명 다른 개념이다. 간혹 에디슨을 훌륭한 과학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묘사인 셈이다.
하지만 근대사회에 관련된 물품으로 한정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제품을 개발해 내놓았으며 그 숫자만 해도 2,332개에 이른다. 그 업적을 기려서 보통 ‘발명왕 에디슨’이라 불린다. 다만 실제 에디슨이 뭔가를 처음으로 발명해낸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문제가 많았던 기존의 시판품을 뜯어 고쳐 실용화시킨 것 또한 발명”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개량이라는것은 기존 제품을 베이스로 에디슨 본인만의 기술적 시스템과 알고리즘을 수정, 추가 개발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발명가라는 말이 틀린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그의 대표적인 발명품은 전기와 관계된 것들이다. 특히 직류전기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니콜라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해 제작한 전기 의자는 그의 일생일대의 오점으로 남으며 현재에 와서도 에디슨의 오점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화두가 되었다. 그 외에도 흔히 읽는, 에디슨을 그저 뛰어난 창의력, 불굴의 의지와 착한 심성만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는 에디슨 전기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어둡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들이 속속 드러났다. 하지만 비록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어도, 그가 역사에서 이룩한 업적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 에디슨이 최초로 만든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전구 또한 기존의 전구를 ‘개량’했지, 전구라는 물건을 발명하지 않았다. 에디슨의 ‘발명품’의 절반 이상이 개량품이며 에디슨이 남의 발명품을 상용화하기만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발명왕’이라고 칭송을 듣는 이유는 바로 원시적이고 조잡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것들을 일상생활에 사용가능, 판매가능할 정도로 개량했기 때문에 ‘발명왕’이라고 불린다고 할 수 있겠다.

– 토머스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출생: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주 밀란
.사망: 1931년 10월 18일 (84세), 미국 뉴저지주 웨스트오렌지
.국적: 미국
.학력: 無 (3개월 공부, 이후 독학)
.직업: 발명가, 기술자, 사업가
.종교: 무종교 (무신론)
.배우자: 메리 스틸웰 (1871 ~ 1884), 미나 밀러 (1886 ~ 1931)
.주요 업적: 에디슨 효과
.설립 조직: 제너럴 일렉트릭, 토마스 에디슨 국립역사공원, Edison Records, 영화특허권회사
.자녀: 4남2녀, 찰스 에디슨, 토마스 알바 에디슨 주니어, 테오도르 밀러 에디슨, 마리온 에스텔 에디슨
○ 생애
– 출생 및 성장 과정
1847년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나 미시간주 포트 휴런에서 자랐다. 에디슨은 어린 시절부터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당시의 주입식 교육에 적응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3개월 뿐 이었으나, 결혼하기 전에는 교사로 일했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 덕에 점차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중앙교육연구원에서 펴낸 에디슨 전기 (영국 엑스터 출판사 원전)에 따르면,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생각해서 직접 실험을 할 수 있는 과학책을 사 주었다.

전신기 특허로 큰 돈을 번 그는 1876년 세계 최초의 민간연구소로 알려진 멘로파크연구소를 세워 발명을 계속하였다. 그의 발명은 굉장히 많아서 특허의 수효만도 1,300여 개나 된다. 에디슨의 발명품으로는 1874년 자동 발신기 개발, 1877년 축음기, 1879년 전화 송신기개발, 1880년 신식 발전기와 전등 부속품개발, 1881년 전차의 실험을 했고, 1882년 발전소를 건설했고, 1888년 영화의 제작방법을 알아냈고, 1895년 광물을 가려내는 방법, 1900년 시멘트 공업의 개량, 1909년 엔진형 개발, 축전지개발 등이 있다. 흔히 노력형 천재라고 알고있으나 의외로 상당히 틀린 부분이 많다. 이 중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문은 역시 도시의 밤을 환하게 했다는 것이다. 전구의 발명은 발전, 송배전 부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고 각 가정마다 전기가 들어가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 전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경복궁 전체에 전기가 들어왔다(경복궁 향원정에서 시작).
1929년 82세 때 백열 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고 난 뒤 병을 앓게 되었다. 에디슨은 그 이후 미국 뉴저지주 웨스트오렌지 자택에서 병상에 누워서 지내다가, 1931년 10월 18일에 총 1,033개의 발명품을 남기고 향년 84세의 나이로 멋지고도 멋지게 세상을 떠났다.
○ 제너럴 일렉트릭
제너럴 일렉트릭은 1878년 토머스 A. 에디슨(Thomas A. Edison)이 설립한 전기조명회사를 모태로 한다. 1879년에 전기 선풍기와 첨단 의료용 기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1892년 에디슨 종합전기회사와 톰슨휴스톤전기회사가 합병하여 제너럴 일렉트릭 (GE)이 탄생했다. 제너럴 일렉트릭 사명의 유래는 남북전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 개발에 엄청난 돈을 투자한 나머지 개발에는 성공하였으나 그에 따른 채무도 엄청났다. 그래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도중에 남북전쟁 당시 남측의 동부사령관이었던 크리스토퍼 장군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와 기꺼이 투자를 하였다. 그는 전쟁전에 전구가 개발이 되었더라면 우리는 야간기습을 당했을 때 그토록 심한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튼 그의 지원으로 회사의 채무를 청산하고 회사를 설립하게 된 에디슨은 감사의 표시로 장군의 이름을 넣어 ‘General Christopher’s Electric’이라고 회사명을 지었으나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북쪽 출신의 권력층에 의해 허가가 나지 않아 결국 크리스토퍼 장군의 이름만 빼고 ‘General Electric’으로 명명하였다. 우연히 ‘general’이란 단어가 ‘장군’이란 뜻 이외에도 ‘보편적인’ 등의 뜻도 가지고 있어서 현재는 원래 의미는 거의 사라져버리고 단지 ‘모두를 위한 전기회사’로 기억하고 있다.
○ 에디슨과 테슬라

•테슬라와의 만남
1884년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미국에서 에디슨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에디슨의 발전소 중 미국 펄가에 있던 발전소는 뉴욕에 있는 수백 개의 부유한 개인 저택과 도시 전체에 퍼져 있던 제분소나 공장, 극장 등에도 전기를 보내고 있었다. 에디슨은 점점 더 많은 전기 조명 설비 요청을 받고 있었는데 직류 전기 장치로 인한 문제로 많은 고장 문의가 들어와 누전, 화재 등의 일을 수습해야만 했다.
이때 테슬라는 에디슨과 만나게 되었고 그는 고장난 설비를 고치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테슬라는 그 일자리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에디슨에게 인정을 받아 자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작업을 하던 테슬라는 에디슨이 만든 원시적인 발전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발전기를 다시 만들 것을 요구하여 스물 네 개의 발전기를 다시 설계하였고, 자동 조절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발전기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다.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이 프로젝트의 대가로 보너스 5만 달러를 약속했었으나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것은 테슬라가 회사에 사표를 내는 계기가 되었다.
기술자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테슬라는 일단의 투자가들로부터 테슬라에게 회사를 차려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고 이를 수락하였다. 테슬라는 당시에 사용하고 있던 것보다 더 안전하고, 단순하며, 경제적인 아크등을 개발하여 특허를 내는 등의 일을 하였으나 회사로부터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테슬라는 경제 침체로 1886년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다가 웨스턴 유니온 전신회사의 경영자 A. K. 브라운 (A. K. Brown)을 만나게 되어 테슬라의 이름을 딴 또 다른 회사가 세워졌다.
•전류전쟁

1887년 4월 테슬라 전기회사가 새로이 창립되어 테슬라는 매우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많은 발명품들이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많은 특허를 따낼 수 있었다. 코넬 대학교의 전기공학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윌리엄 앤터니 (William Anthony)는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바로 지지하기를 시작했다.
때마침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을 바탕으로 수많은 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의 발명품의 가치를 눈여겨 보게 되었고, 테슬라는 2천 달러의 월급을 받으며 웨스팅하우스의 설비를 자신의 교류 시스템으로 바꾸는 직업을 갖게 된다.
에디슨은 테슬라가 웨스팅하우스와 교류와 관련된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이때부터 전류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에 위협을 느낀 에디슨은 곧바로 교류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를 담은 자료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교류 전기를 이용해 애완동물들을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죽인 장면들이 포함된 전단지들을 배포하고 웨스팅하우스가 소유하게 된 특허들에 소송을 거는 등 끊임없이 웨스팅하우스의 교류시스템을 비난했다. 이를 지켜보고만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에 대항하기 위해 교류에 대한 교육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설, 기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두 회사가 모두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전류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에디슨은 교류를 막기 위해 알바니에서 전압을 800볼트로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웨스팅하우스는 법에 위반되는 음모를 꾸민 죄목으로 에디슨을 고소했다. 뿐만 아니라 에디슨은 죄수들의 사형에 교류 전기 충격을 사용하자는 주장도 하였으며, 웨스팅하우스는 계속해서 교류의 실상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세는 점점 직류에서 교류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이를 직감한 에디슨의 많은 직원들은 에디슨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디슨은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최종적으로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여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웨스팅하우스는 사업 영역을 확장시켜 끝내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을 이용한 발전소를 세웠다. 이는 1891년 광산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 에디슨 효과
3극 진공관 발명의 기초가 되어 라디오 발명의 길을 열어 준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을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에디슨 효과를 에디슨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 가족 관계

에디슨은 한평생 발명/사업에 힘써왔지만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홀했다. 첫째 부인은 쓸 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구박했고 대학교육에 대한 컴플렉스 탓에 자식들을 공과대학을 제외한 그 어떤 대학에도 보내지 않았다.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이 죽었을 때 그는 일이 바쁘다며 장례식도 가지 않았다고 하며, 그 후 한동안 적적하게 지내다 두 번째 부인이 된 미나 밀러에게 모스 부호로 프로포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족에 소홀했던 탓인지 자식들의 삶도 좋지 못했다. 첫째 아들 토머스 주니어는 ‘전기 활력 회복기’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이었고, 둘째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주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윌리엄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았는지 주 40달러 가지고 어찌 사냐고 시도때도없이 편지를 보내 에디슨을 닦달했다는 것이다.
다만 셋째 아들 찰스 에디슨은 정계로 진출해 훗날 뉴저지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 공헌
당시의 미국의 과학기술은 유럽에 비해 내세울게 없었다. 특히 유럽의 물리학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퀴리 부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 천재적인 학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비약적인 발전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변방이었다.

비록 에디슨은 학자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실험과 호기심을 통한 발명으로 미국을 응용기술면에서 유럽을 압도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
○ 어록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이 말은 1929년 한 기자회견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으며 1932년 하퍼스 매거진에 원래 올라온 이 문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None of my inventions came by accident. I see a worthwhile need to be met and I make trial after trial until it comes. What it boils down to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내 발명 중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애쓸 가치가 있는 요구를 발견하고, 이뤄질 때까지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 땀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