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미얀마(1)
최근 몇일 사이에 “미얀마”에 관한 뉴스가 각종 매스컴에 쏟아지고 있다. 지난 12일 밤에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2018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에서 미얀마를 4-0으로 꺾었다. 미얀마는 1966년, 1970년 아시안 게임에서 두 번이나 우승도 하던 축구 강국이었고 경제적으로도 한국보다 잘 나가던 나라였다. 그 당시에는 한국축구가 미얀마를 꺾기가 벅찬 상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미얀마가 최근에 뉴스의 촛점이 되며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필자에게 우연한 기회로 미지의 나라 미얀마를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미얀마를 가려면 비자를 받아야 한다. 미얀마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을 찾았다. 호주 캔베라에 있는 호화스러운 각국의 대사관 건물을 상상하던 필자는 가난한 나라라고 하지만 너무나 초라한 대사관 건물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남초등학교를 지나서 골목길로 올라가니 한 나라의 대사관 건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난 초라한 건물이 미얀마 대사관이라고 한다. 연립주택같은 4층 건물이 미얀마 대사관이다. 반쪽짜리 현관 물을 열고 들어서니 전당포를 연상시키는 철제 창살로 차단된 안쪽에 한국인 인듯한 여자 직원 2명이 앉아서 방문객을 맞고 있다. 비자신청서 양식을 받아 들고 놀란 것은 기재란에 머리색깔[color of hair], 신장[身長-height], 눈동자 색깔[color of eyes], 안색[顔色-complexion]을 기재하라는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말하겠지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당국이 금강산 관광객들에게 사진찍는 것을 일일이 감시하는 것과 같은 상식이하의 통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양식을 갖추어 여권과 함께 제출하니 내용을 별로 점검하지 않고 접수하였으며 3일 만에 방문 비자스탬프를 받았다.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지난 11월 8일 치뤄진 미얀마 총선거에 세계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인 대부분은 버마[현 미얀마]의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이 이끄는 방문단이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랑군[현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버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폭탄 테러 사건이다. 테러를 감행한 혐의자 3명중 1명은 사살되고 생포한 2명중 1명은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1명은 수사에 협조한 점을 고려해 집행유예 사형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5월 18일 간암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2008년에 옥중에서 사망한 강민철은 북한 정찰국 소속의 육군 대위로 당시 28세[1955년생]의 팔팔한 청년이었다. 그는 미얀마에서 무기수[無期囚]로 25년간 복역하다가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에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관계와 남북한의 정권에게도 큰 파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1970~1980년대는 남북한의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남북한 양국은 자기들과 수교하라고 조르는 한편 있는 돈 없는 돈 퍼주고 온갖 선물공세로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소리없는 공방전을 펼치던 시기다. 북한과 가까운 사이인 버마를 끌어 들이는 것은 정통성이 없는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전두환은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욕심에서 반대의견을 뒤로 한 채 무리하게 순방을 추진하다가 테러에 이골이 난 북한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이다.
“미얀마”라는 국가 명칭에는 미얀마의 근대사[近代史]가 함축되어 있다. 미얀마는 대한민국과 유사한 근대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과 다른 것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반면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로서 탄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도 받아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후에 미얀마가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일본식 군사교육을 받은 군 장성인 네윈은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악명 높은 독재를 계속했다. 그는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우누 대통령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독재권력으로 미얀마를 마음껏 주무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비슷하게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국민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다. 그 후에도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총을 가진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무지비하게 무력으로 탄압하여 왔다. 독재자 네윈은1987년, UN이 버마를 “최빈국”으로 선언과 국민들의 저항하에 밀려서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의 당수에서 사임하게 된다. 네윈군사 정권은 “버마”라는 국호[國號]가 영국식민지 시대의 잔재인 데가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을 아우르지 못한다면서 135개의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명칭이라며 미얀마[Myanmar]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미얀마의 군부세력
그 후에 버마는 미얀마로 불리어 지고 있으나 미얀마의 야권[野圈]은 인정하지 않고 버마로 부르고 있다. 절대 권력자였던 네윈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하여야 할까? 권력의 누수 현상이 누적 되면서 그의 새까만 후배격의 군부실력자들에 의하여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93세 때인 2002년 12월 5일 사망했다. 양곤에 있는 그의 호수주변 자택에서였다. 그의 죽음은 버마 언론과 군부에 의해 발표됐다. 그의 죽음에 대한 부고기사는 일부 버마어로 된 관변언론에서만 볼 수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네윈에게 국가 차원의 장례식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전직 관료들이나 대학 동료들이 급조된 장례식에 참석해 낙담했을 뿐이다. 겨우 30여명 정도가 참석했던 것으로 전한다. 네윈은 죽었으나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한 너무나 견고한 기득권세력이 있다. 이와 같이 권력에 중독된 세력들은 국민들의 저항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이와 같은 패턴[pattern]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는 1962년 쿠데타 이후, 1987년까지 네윈의 사회주의 정부가 철권 정치로 다스려 졌다.
미얀마의 “8888” 민주항쟁
미얀마에는 한국의 광주항쟁과 유사한 “8888” 항쟁이 있었다. 1988년 8월 8일에 랑군(양곤)의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군부 민중항쟁이다. “8”자 4개가 겹쳐져 “8888”항쟁이라고 한다. 이 항쟁의 진압과 군세력의 정권찬탈 과정은 한국의 5.18 광주민주항쟁과 너무나 유사하다. 한국의 12.12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전두환 세력이 초법적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약칭 국보위)라는 기구를 만들어 국가권력을 행사하였으며, 미얀마신군부도 “8888”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잠재웠다. 미얀마의 군부세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인 “국가평화발전위원회”나 전두환 세력의“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어쩌면 그렇게 붕어빵처럼 닮을 수가 있을까?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미얀마의 신 군부는 저항하는 시민, 대학생, 승려 등을 포함 수천 명을 희생시켰다. 결국 “8888” 미얀마의 민중항쟁은 1988년 9월 18일 종료됐다. 아웅 산 사건과 맞물려 1988년 미얀마 신군부가 집권하고 2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들 세력이 미얀마를 콘트롤[control]하고 있는 것이다.
박광하(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2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