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미얀마(2)
“아웅산 수치”는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 처럼 “미얀마”라는 한 국가의 상징적 인물이다. 상당기간 아웅산 수치를 제쳐 놓고 미얀마를 언급한다는 것은 “김빠진 맥주” 격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떠 밀려서 미얀마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녀의 부친인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인물이긴 하지만 아웅산 수치가 그의 부친의 후광으로 미얀마의 정치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정치, 경제, 철학을 공부한 그녀는 계속 영국에서 생활하며 영국인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나 결혼했고, 두 명의 아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의 주부로 살아가며 평범한 일상을 가꾸어 나가던 시기에 미얀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독재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그 시기가 한국에서는 88올림픽을 한다고 법석을 떨던 때이고 미얀마에서는 불법적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으며 이에 저항하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중항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때다.
미얀마의 “8888항쟁”
미얀마의 이 항쟁은 한국의 “광주민주항쟁”과 유사하며 1988년 8월 8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8888”항쟁이라고 한다. 1988년인 그 해에 수치의 어머니가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영국에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에 군부 독대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을 직접 목도하면서 민주화운동가로서의 삶으로 예기치 않게 바뀌게 된 것이다. 미얀마의 “8888항쟁”을 목격한 그녀는 더 이상 미얀마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국민들도 국민영웅 아웅 산의 딸인 그녀가 전면에 나서주길 바랐다. 그녀는 그해 8월 26일 양곤의 쉐다곤 사원 인근 공원에서 50여 만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녀는 “권력자들이 부패하게 되는 이유는 권력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권력자들은 부패하게 되고, 권력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권력의 앞잡이들이 부패하게 되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민주화 투사로서의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민주주의민족동맹[NCD]”을 창설하고, 군부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군부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아웅산 수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하며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다당제 정치와 선거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가 전국을 돌며 미얀마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수만명의 국민들이 환호하자 당황한 군부는 1989년 7월, 그녀를 가택 연금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항의하는 국민들을 잔혹하게 탄압한다.
이후 야당인 “민족민주동맹[NLD]”의 당수였던 수치 여사는 1990년 5월 국민들이 직접 몰아준 표로 총선에서 압승을 했다. 하지만 민심에 놀란 군사정권은 이를 무효화 시키고 가택연금을 시킨 것이다. 이를 지켜본 국제사회는 미얀마의 군부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에 못이긴 군부는 약속했던 다당제 선거를 실시한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가 결성한 ‘민주주의민족동맹’이 82%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승리하자 선거를 무효화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의 속성은 변함이 없다. 민중들의 아우성 따위는 잠꼬대로 돌리고 모든 가치가 그들의 권력과 무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주저 없이 밀어 부치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헌법 조항이나 법조문은 단순한 문자일 뿐이다. 2008년 민주화를 기초로 한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통과하였으며, 2010년 총선 후 이듬해 민정으로 이양하여 형식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종식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얀마의 국회의원 의석의 25%를 군부에게 할당하도록 하며, 배우자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대통령 피선거권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 조항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수치여사의 대통령 피선거권을 차단하려는 노골적인 법 조문이다. 지난 8일에 실시한 미얀마 총선은 국제감시단이 참관한 미얀마 총선은 수치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압승으로 끝났다. 상원 135석, 하원 255석으로 명목상 60.27%, 57.95%의 의석을 차지하게 됐다. 임명직을 제외하면, 그 비율은 각각 80.35퍼센트와 77.27퍼센트에 이르는 수준이다. 군부세력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의석의 25%[166석]를 자동적으로 차지할 수 있으며 영국인[외국인]과 결혼한 경력이 있는 수치여사는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게 하는 헌법조항을 만들어 놓고 있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없을 헌법 조문이지만 북한보다는 훨씬 앞선 상황이라고 하여야 할까?
군부세력의 횡포[橫暴]
문제는 총선이후 수치여사가 이끄는 NLD가 과연 총을 가지고 있는 군부세력을 설득해서 그들의 권력을 잠재울 수 있느냐? 에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군부세력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영구적인 지권장치인 헌법조항을 군부의 동의없이 고칠 수 없게 해놓은 것이다. 군부가 의원수의 25%[상하의원 166석]를 임명할 수 있는 조항은 아무리 압승을 하여도 개헌선인 75%[498석]를 넘을 수 없는 것이다. 득표율 기준으로 하면 수치가 이끄는 NLD가 이번 선거에서 390석을 차지함으로써 총의원수 498석의 78.31%라는 계산이 나오지만 군복입은 의원 166은 선거와 관계없이 이미 국회의석 앉아 있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NLD의 승리는 명목상 개헌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개헌선을 넘는 의석수를 확보한 절대적 압승이다. 1991년 10월 14일, 아웅산 수치는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가택 연금 중이던 그녀는 수상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남편과 아들들이 그녀의 사진을 들고 대신 수상하였다. 이후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그녀는 가택 연금에서 6년 만에 풀려나게 된다. 그녀는 풀려난 후에도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99년에는 남편이 영국에서 암으로 사망하였지만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면 군부가 그녀를 다시 미얀마로 못 들어오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출국을 포기하기도 했다. 2007년에 일어난 시위 역시 무력으로 진압됐다, 이러한 인권탄압은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경제제재까지 당해야 했다. 2008년엔 강력한 태풍으로 14만 명이나 희생됐는데도 이를 돕겠다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거부했다. 이런 미얀마가 지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변화와 자유, 민주주의를 바라는 미얀마 인민들의 강력한 열망이 지금의 변화를 만들어 냈다냈다. 미얀마 인민들은 군사독재의 강력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수천 명이 학살되는 비극도 있었지만 인민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다시 일어났다. 만일 인민들이 독재의 총칼이 두려워 계속 숨죽여 지냈다면 지금과 같은 변화는 없었을 것이며, 여기에 국제사회의 압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미얀마의 군사독재 세력에게 민주화의 구심점인 아웅산 수치 여사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수치 여사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면서 군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냈다. 아무리 군사독재라 해도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하는 수치 여사를 맘대로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얀마를 탈출해 나온 젊은 활동가들을 선진국에서 받아들여 민주주의 인권 교육을 시키고 제3국에서 미얀마 난민들을 위한 지원과 교육도 체계적으로 진행해 왔다.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은 민주인사들은 미얀마 인민을 위한 라디오와 TV 방송을 제작해 송출했고 체계적인 시민교육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얀마”하면 “가난한 나라”, “수치여사” 정도의 단편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박광하(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2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