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 칼럼
내가 본 6.2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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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때 필자는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이었다. 졸업 사은회[謝恩會] 때 쓰게 될 것이라며 학교 실습지 한 귀퉁이의 축사[畜舍]에, 돼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학생들이 당번제로 번갈아 가며 사료를 가져다가 애지중지 키우는 중에 6.25가 났다. 6.25가 발발하자 연락이 있을 때까지 학교에 오지 말라는 지시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학교에서 가깝게 살던 필자는 돼지가 굶는 것이 마음에 걸려 집의 쌀겨를 퍼다가 몇 끼를 먹였다. 포성이 점점 가까워 지더니 5km정도에 면소재지에 인민군이 들어 왔다는 소문이 들리고 어느 날 오전에 마을 앞으로 내다 보이는 국도에 북한군이 모습을 들어 낸 것이다. 깃발을 단 삼륜 오토바이를 선두로 인민군을 가득 실은 트럭 몇 대가 뒤를 따랐으며 곧바로 학교에 주둔 하였다.
사람들은 그 동안 대충 짐을 싸서 산속으로 피신을 하고 전투가 벌어 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공포감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호기심에 인민군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겁도 없이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놀란 것은 북한군 에 여자 군인이 있는 것이었으며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 간편하게 접을 수 있는 군용 우비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그걸 자랑하고 다녔는데 오후에 인민군 2인조가 총을 메고 동네에 나타나더니 여자 북한군이 주었던 우비를 빼앗고 집안 세간사리를 샅샅이 뒤졌다.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뒤뜰에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많이 달렸던 자두를 알뜰하게 다 따 갖다. 6.25만 되면 자두가 익어가는 시기라고 생각하게 된다. 학교에 주둔한 인민군들은 몇 시간 후에 학생들이 키우던 돼지를 총으로 사살하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이 몇 달 동안, 돼지 한 마리를 정성 드려 키워서 인민군을 대접한 꼴이 되었다.
학교에 주둔하였던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7월로 들어서면서 북한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였다. 평소에 별 볼일 없어 보이던 사람들이 무슨 완장을 차고 으스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집회를 하였는데 면의 책임자라는 여자가 나와서 북한 국가와 김일성 찬양 노래를 가르쳤으며 이런 집회는 여러 날 계속 되었다, 전쟁은 날이 갈수록 고조 되여 전투기, 폭격기 등에 의한 공습이 잦아 졌다. B29라고 하는 폭격기가 높은 상공을 나르다가 7-8km 떨어진 군청소제지 위에서 폭탄을 쏟아 내며 폭격을 하였는데 공기를 가르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줄을 지어 떨어 지는 폭탄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으며 치솟은 화염이 하늘을 가렸다.
서울의 친척들이 가족들을 이끌고 피란을 오고 북한 체제가 본격화 되어 갔다. 전투기의 공습이 자자 지는 것을 보고 전쟁 양상이 역전 되어 가고 있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으며 전투에 대비한다고 진지 구축을 위해 매일 노동인력을 동원 하였는데 작업하는 날에는 에누리 없이 폭격이 있었다. 이웃동네 한 사람이 진지 구축 작업을 하다가 전투기의 기관총 사격에 오른팔 총상을 입고 불구가 되여 평생 고생을 하였다. 8월로 접어들며 공습이 잦아지고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 왔고 인민군에게 처형 될 예정자 명단이 작성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공무원, 이장 등 이런 저런 일을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산속으로 피신을 하였다. 북한공산당은 좁쌀 알갱이까지 세어서 농작물 수확 한 것을 빼앗아 간다고 하더니 3-4명의 무슨 위원들이라는 사람들이 논밭으로 돌아다니며 수확량 조사를 하였다. 이 자료에 의해서 과세를 하고 수확물의 대부분을 거둬 드리려고 하였으나 수확이 시작되기도 전에 패퇴 하고 말았다. 9월말에, 어느 날 마을 청년 한 사람이 동네로 황급이 달려와 군청소재지인 읍내에 유엔군이 들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천에서 여주로 들어오는 국도에 먼지가 뽀얗게 일며 유엔군 차량이 들어 오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환영하러 가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마을은 잔치 분위기였다. 군청 소재지에 유엔군이 들어 온지 하루 만에 마을 앞, 국도에 완전 무장한 UN군 대열이 나 타 났다.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가 만세를 부르고 그들을 환영하였다. 완장 차고 설치던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고 임시 치안대가 설치대면서 북한체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부역자들 색출에 열을 올렸다. 총소리가 나며 빨갱이를 붙잡았다고 해서 학교에 가보니 꽤 건장해 보이는 중년의 사나이를 묶어 놓고 사람들이 구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면 치안대로 끌려 가 처형되었다고 한다. 혐의가 있으면 즉결 처분까지 하는 무법천지가 얼마간 계속 된 것이다.
나의 외삼촌은 해방 전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었던 분인데 6.25가 나자 새 세상 만났다고 면 인민위원장으로 활동 하다가 인민군들과 함께 월북한 후에 행방이 묘연 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외숙모는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으며 외사촌들은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였다. 옆의 마을에 공산당원으로서 주민들을 괴롭히던 사람이 있었는데 북한군이 퇴각 한 후에 숨어 지내다가 경찰관인 그의 매부의 덕분으로 살아 날 수 있었다. 유엔군이 북진을 계속 해서 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투명해지고 다시 어수선해 졌다. 같은 마을에 4형제중에 둘째 아들인 S씨가 결혼한지 얼마 안돼서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징집 되여 인민군이 되었다가 패퇴하는 북한군에서 탈출하여 돌아 왔다.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국군으로 입대하여 전투에 참가 하는 중에 행방불명으로 전사자로 처리 되었다. 딸 하나를 둔 신혼가정에 청천병력이었으며 유가족들은 험난 하게 살아가야 했다. 바로 옆집의 K씨도 젊은 부부였는데 국군으로 징집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전사 통지가 와서 마을 전체가 슬픔에 쌓여야 했으며 임신 중이던 그의 부인은 딸을 낳았으나 불행한 일생을 보내야 했다.전사한 K씨는 6형제의 아들 중에도 부모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분이다. 그는 서울에 유학 하여 공부를 한 인테리 이었다. K씨의 노모는 매일 국도가 내다 보이는, 모이잔등에 앉아서 혹시나 아들이 오나 하고 기다리다 돌아 가셨다. 전사한 두분 외에도 두 사람이 전투 중에 부상으로 상이군[傷痍軍]인으로 제대 하여 돌아 왔다.
마을전체가 10집에, 40여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인데, 2명의 전사자와 2명의 상이군인이 발생하였다. 10월 하순에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 하면서 산악전과 인해전술로 유엔군을 혼란에 빠뜨리며 파죽지세로 몰려 내려 왔다. 12월말에는 서울 마저 내주는 바람에 모두들 피란 길을 나서야 했다. 우리 가족도 1951년 1월초에 집에서 키우던 소잔 등에 양식과 짐 보따리를 싣고 피란 길을 나 섰다. 70대 후반의 할머니는 노약한 탓으로 함께 떠나지 못하였다. 안성을 거쳐 충북 진천까지 가서 1개월여 머물다가 복귀 하였다. 복귀한 시점이 1951년 2월 초쯤이었던 같다. 양평군 지평리쪽에 친척들이 큰 전투가 벌어진다고 우리 집으로 피란을 왔으며 연일 지평 쪽에서 포성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학교와 마을 앞의 국도변엔 유엔군이 수시로 임시 주둔하다가 떠나기도 하고 군용차량의 왕래가 빈번 하여 졌다. 어린이들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유엔군이 던져 주는 검이나 쵸코렛 등을 얻어 먹으려고 국도변에 나가 지키고 앉아 있었다.하루는 군복과 워카가 신 켜져 있는 시체를 가득 실은 GMC 추럭 몇 대가 지나는 것을 보며 놀란 일이 있다. 그 후에 전투상황 자료를 찾아 보니 지평전투에서 희생된 유엔군의 유해전송 차량이었던것 같다. <다음호에 계속>
박광하 (전 여주 대신고 교감, 전 수원 계명고 교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