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 칼럼
내가 본 6.25 (2)
지금 생각해 보면 피란 길에서 더 남하[南下]하기를 포기하고 2월 초순에 꽁꽁 얼어 붙은 한강을 건너 복귀 한 것은 위험천만 한 일이었었다. 필자의 마을은 폭격은 받지 않았지만 상황 전개에따라 전투권 중심에 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70대후반의 할머니를 모시고 가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피란 길을 중단한 것이다. 홀로 집을 지키시던 할머니는 별 다른 위해[危害]는 받지 않았으나 이따금씩 중공군이 마을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하셨다. 양평군 지평리는 필자의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10km 정도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이다. 포성이 끊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인가 폭격소리와 함께 지평리 쪽으로 야광탄의 불빛이 환하게 하늘을 덮었으며 멀리서도 굉장한 전투가 전투가 벌러 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에 전투상황을 확인 하여보니 이 날이 지평리 전투가 최고조에 달 했던 날이었던 것 같다. 수집된 자료를 통해 지평리 전투를 정리 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3박 4일 동안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벌렸던 전투이다. 지평리는 사방에 280m 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특이한 지역이다. 강원도 홍천-양평, 지평리- 곡수리- 여주, 대신면 으로 연결 되는 전략상 중요 요충지다.
유엔군이 파죽지세의 중공군에게 밀리면서 홍천군과 횡성군사이의 삼마치 고개를 내주고 한강을 저지선으로 전략을 펼치려고 할 즈음에 지평리에는 미국보병여단 23연대와 학국군 100명이소속되어 있는 프랑스대대, 미37포병대대. 미503포병대 등 총 병력 5000여명의 대부대가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산악을 타고 밀고 오는 중공군을 방어 하기에는 가장 불리한 지역이지만 유엔군을 이를 역이용한 것이다. 중공군이 지평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한강을 돌파 하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평리를 고수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일부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사수 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중공군이 이 요충지를 공격하기 위해 모든 병력을 집중 시킬것이며 이 기회에 중공군을 섬멸 하겠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지평리 남쪽으로 통하는 하우고개 주변 산악 지역까지 장악하고 지평리에 주둔하는 유엔군을 고립 상태로 만들었으며 유엔군은공중투하로 공급하는 보급품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때 크롬베즈 대령이 이끄는 구조대가 지평리에 포위 되여 위급한 상황에 있는 유엔군의 포위망을 뚫는 임무를 띄고 출동한 것이다. 크롬베즈 대령의 5기변연대는 기본보병3개 대대에,의무중대, 전투공병대, 야전포병대대, 전차대대 등으로 편성된 최정예부대였다.
대신면 초현리에서 곡수-지평으로 통하는 341지방도 좌우의 낮은 산악 지역에 중공군을 토벌하며 곡수 지평쪽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전개 하였다.
이 작전 중에 일어난 일 일 것으로 추측되는 일화가 있다. 윤촌리[거치라리]에 거주하던 홍[洪]씨는 야간에 중공군이 마을 앞 341지방도에 지뢰를 매설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이른 아침에 유엔군 탱크부대가 진입하려는 것을 보고 적이 내려다 보고 있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뛰쳐나가 탱크를 가로 막고 지뢰가 매설된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이 일로 탱크부대가막대한 타격을 받게 될 수 있었던 것을 사전에 예방하고 순조로운 진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그분은 표창도 받고 전쟁사의 일화를 남겼다.
크롬베즈 부대가1951년 2월 15일 새벽에 341번 지방도로 진입하면서 좌우의 산악지역 수색전이 전개 되면서 저항하는 적과 악전고투하며 진격을 계속하여 탱크부대가 하우고개를 돌파하고지평리 유엔군과 합세하면서 승기를 잡게 된 것이다. 중공군은 4개 사단 병력, 약50,000여명으로, 수적으로 유엔군 병력5000여명의 10배가 되는 병력이었다. 유엔군 에게는 중과부적의 상황이었으나 지평리 사방에 4개의 견고하게 구축된 진지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리며 버티고 있었다. 교전 중에 한쪽 방어선이 뚫리면서 아수라장의 백병전으로 맞서야 했다 지원부대가 합세 하면서 사기충천, 끝내 적의 공격을 저지 시킨 것이다.
지평리 전투에서 특기 할만한 사실 들이 있다. 하나는 그 당시에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전술이다. 누가 보아도 적진 속에 진지를 구축하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고 싸우는 것은 불리 할것이라는 생각을 뒤집고 역 발상으로 중공군을 지평리로 끌어 들여 전투를 벌린 것이다. 중공군은 차량이고 통신 장비도 변변히 갖추지 못하고 신호 수단으로 징과 꽹과리, 호각 등으로 부대간의 통신을 하였지만 유엔군은 요란한 싸이렌 소리로 그들의 통신을 마비 시켰다. 중공군과 비교도 안 되는 우수한 화력과, 최첨단 통신장비와 공중지원으로 적을 섬멸 할 수 있다고 판단 한것이다. 중공군은 리지웨이 장군이 던진 미끼에 말려 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군 대대장 몽끌레르 중령을 기억해야 한다. 프랑스군 대대장인 몽클레르는 제1,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3성 장군’출신의 노장으로 대대규모를 파견하는 프랑스군을 지휘하기 위해서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하며 참전해 몸소 백병전에 뛰어드는 등 병사들을 독려하여 지평리를 사수 했다. 상식을 뛰어 넘은 그의 행위는 군인의 참모습을 보여 준 것이라고 평가하고있는 것이다..
지평리 전투 양측피해 상황 자료를 보면 유엔군이 사망52명, 실종42명, 부상259명이며 중공군은 사망5000여명에 포로 79명이다. 한동안 전투가 벌어졌던 산등성이 진지 속에 유골들이 여기저기 목격 할 수 있었다.
군사전문가들은 지평리가 중공군에게 함락되었다면 한국전쟁의 국면은 천양지차로 달라 졌을 것 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지평리가 돌파되는 것은 서울을 내주는 꼴이 되고 서부전선이나 동부전선이 함께 위협받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전략적인 핵심을 간파 하였으며 지평리 전투가 벌어지기 몇 일 전에 횡성전투에서 한국군8사단이 해체될 정도로 참패를 해서 한국군이나 유엔군이 사기가 저하될 때로 저하된 시기에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승전 밖에 없다고 판단 하였었다고 한다. 중공군도 서울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지평리의 유엔군을몰아 내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4개사단의 5만 병력을 집중시켜 지평리의 유엔군을 섬멸 하려고 한 것이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로 사기 충천한 아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전의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그 후에 중공군은 1951년 4월. 춘계 대공세를 펼치며 국면을 다시 전환 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한국군 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 118사단은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통해 서울-춘천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연합군의 전선을 갈라놓으려 했으나 가평군 북면 목동리504고지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던 호주군 3대대의 공격을 받으며 유엔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이틀간의 전투에서 산더미 같은 시체를 남기고 패퇴 하면서 유엔군의 완전한 승기를 잡게 된 것이다.
60여년전에 작은 마을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의 6.25의 단편적인 모습을 정리 한 것이지만 전쟁의 축소판일 수 도 있다. 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가 61년이 지나긴 하였지만 현 상황이 종전[終戰]이 아니라 휴전[休戰]상태 이다.
이 전투의 최고의 훈장을 받아야 할 첫 번째 대상은 상관 명령에 목숨을 걸고 싸운 전사자, 부상자, 참가자 전원이고 그 다음이 탁월한 전략을 펼친 지휘관 들이다. 리지웨이 장군이나 프랑스의몽끌레르 대대장도 자랑스러운 훈장을 받았겠지만 그 공을 부하들에게 돌렸을 것이다.
훈장을 가슴에 단 역전[歷戰]의 용사들이 사회의 추앙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만이 전쟁의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터에는 무명[無]용사들의 피가 서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6.25에서 되 새겨야 할 교훈으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이구동성으로 내세운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유지와 이권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여 말로만 반공을 외치고 북쪽의 적을 대비하는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대한민국을 송두리 채 내 주었다. 부정부패의 표본이다 싶은 이승만 정권은 무비유환[無備有患]의 산 증거를 보여 준 꼴이다. 국가 안보는 군비강화에 앞서 부정과 부패가 없는 깨끗한 사회 건설이 우선 되어야 한다. 부정 부패로 불만세력이 형성되고 빨갱이가 생기는 것이다. 공산주의 자들이 신출귀몰하는 전략을 가진 것처럼 떠들며 위기의식과 적대감 조성에만 열을 올리는 일부 부정부패 세력이 상존하는 한 안보체제는 사상누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박광하 (전 여주 대신고 교감, 전 수원 계명고 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