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 칼럼
스승과 교사[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5월은 한국의 스승의 날이 있는 달이다. 스승의 날은 충남의 한 여자고등학교의 적십자청소년회[RCY- Red Cross Youth ]단원들이 병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선생님이나 은퇴한 선생님을 위문하는 데서 시작된 행사가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게 된 것이며, 그 후 국민교육헌장이 선포 되면서 1973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폐지 시켰다가 그의 서거 후인 1982년에 다시 부활된 기념일이다. 이날을 맞는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작은 꽃송이 선물을 받으며 교육자로서의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교사의 호칭[呼稱]을 “선생”이라 하고 여기에 “님”까지 더해서 “선생님”이 되기 까지는 진화[進化]역사가 있다.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선생(先生)이란 표현은 학식과 덕이 높은 자에게만 붙이는 칭호였다. 현대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김선생”, “이선생” 하는데 당시에는 아무에게나 이런 표현을 쓰면 큰 실례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퇴계 이황은 대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이란 칭호를 꺼려왔는데, 임종시 후손들이 묘지명에 멋대로 “퇴계선생”이란 칭호를 쓸까 봐, 두려워서 죽기 전 스스로 묘비명을 썼다고 한다. 초연한 삶과 심오한 학문체계를 구축[構築]한 퇴계의 12줄로 된 묘비명의 마지막 구절이 자주 인용된다. 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근심속에 낙이 있었고 즐거움 속에 근심 있었네. 조화를 쫓아 사라짐이요,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이조 시대에 선생 칭호는 아무 에게 나 할 수 없는 존칭[尊稱]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의정 셋 나온 가문이 대제학 하나 나온 가문과 맞먹고 대제학 셋은 선생 하나 나온 가문과, 선생 셋은 처사[處士] 하나 나온 가문과 맞먹는다고 하였다는 비유도 있다. 영의정, 대제학, 선생, 처사, 이들 네[4] 직함[職銜]중에 처사가 최존칭[最尊稱]이었다고 한다. 이조 시대에 존경의 대상으로 꼽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남명[南冥] 조식[曺植]같은 대학자들을 처사라고 하였다. 이분들은 당시 유학의 거두였었으며, 임금의 부름도 수없이 받았지만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선생은 곳곳에 있었으나 처사는 많지 않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저서[著書] ‘학교모범'[學校模範]에서 제자가 선생에게 대하는 태도를 임금님 이상으로 모셔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쳐다볼 때 목 위에서 봐서 안 되고, 선생 앞에서는 개를 꾸짖어서도 안 되고, 웃는 일이 있더라도 이빨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스승과 겸상할 때는 7푼만 먹고 배부르게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선생”이란 호칭이 요즘처럼 남발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로, 일본인들이 멋대로 선생이란 호칭을 아무한테나 같다 붙여서 생긴 결과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선생이 “xx씨”이상으로 흔한 용어라 한문을 폄훼[貶毁]하는 시각으로는 선생[先生]의 훈독[訓讀]으로 “먼저 태어나신 이”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선생”이라고만 하지 “님”이라는 접미사[接尾辭]를 붙이지는 않는다. 이미 “선생”이라는 단어가 존칭[尊稱]이기 때문이다. ”선생”의 남용으로 가벼운 느낌이 드는 것 같으니 “님”자가 덧붙여 지게 되었다.
“선생” 대신에 “스승”이라는 호칭을 하자는 주장도 있다. 스승은 원래 중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옛날에는 중을 존경해서 부를 때 ‘사승(師僧)’ 혹은 ‘사(師)님’이라는 호칭을 썼던 것이다. 사(師)의 중국 발음이 ‘스’란 점으로 미루어 사승(師承)이 스승의 어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사승’이 변해서 ‘스승’이 되었고, ‘사(師)님’이 ‘스님’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스승은 중을 높여 부르는 ‘사승(師僧)’에서 온 말이다. 사회의 변천과 함께 “선생”이나 “스승”의 개념이 바뀔 수 밖에 없다. 인격자를 키우려던 과거에는 지식과 교양,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사회의 본[本]이 될만한 자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현 사회는 학생들의 성적을 획기적으로 향상 시켜 주는 자가 최우수교사로 칭송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 표현으로 지식전달의 달인[達人]이 환영 받는 시대에 “스승”을 운위[云謂]하기는 어색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호칭”에 관해서 자유스러운 서구인들은 “선생”, “스승”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냥 이름으로 족[足]하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다. 그의 이름은 “Geoff”이다. 호칭으로 “Geoff”, “Geoff, thank you !”로 족[足]하다. 그는 외국어 교육을 전공한 영어교육의 전문가다. 그는 영어로 말하고 듣게 하기 위해 온갖 교재, 온갖 방법을 동원 해서 학생들을 변화 시키려고 한다. 그는 복장이나 행동거지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스승님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 는 설명과 함께 그에게 “스승님”하면 기절초풍[氣絶一風] 할 것 같다.
스승님들이 심혈을 기우리던 인성교육 못지 않게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학력을 향상 시켜야 하는 책무가 있다. 학생들이 배우는 즐거움을 갖고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기다려 지게 한다면 이런 선생님은 우수교사이며, 우수교사들이 많은 학교는 좋은 학교이다. 학교 환경도 좋아야 하지만 선생님들의 질은 학교의 수준을 가름하게 된다. 선생님들의 질은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연수 나 훈련 보다는 스스로의 자기연수에 의해서 지속적인 혁신을 추구할 때 높아 지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스승은 스승이 되기 위한 전문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학업수행을 통해 지식과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연마하여 사회로부터 공인된 자가 스승이 되었지만, 현시대의 교사는 소정의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소지 한 자가 교단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교사자격증으로 전문직 인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교사를 전문직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 비판도 있다. 전문직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전문직이라면 상당한 지식을 요구하는 활동으로서 장기간의 교육과 훈련을 요구 되는데, 교사 직은 미흡하다는 것이다. 교사자격증 취득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오랜 기간의 수련을 거치지도 않는 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전문직의 기준으로 공히 지적인 성격, 애타주의, 봉사, 복지 향상, 업무수행의 자유와 함께 사회적 책임 등을 강조하는데 교사 직도 이에 합당한 일을 하는 직종임에 틀림 없다.
교사는 과거의 스승과 다르게 자신의 생계를 위한 경제적 수단으로서의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교직의 특수성이라면 머리로 하는 일이라 직무수행의 성과 여부를 판단하기가 모호 하며, 스스로 일감을 찾고 만들어서 효과를 극대화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는 직업인으로서 생활의 안정과 함께 교육목표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자질을 향상 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자기연수가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사가 움직이지 않으면 사실상 교육에서 이루어 지는 것은 미미[微微] 할 수 있다. 국가 지도자나 교육정책 추진 자 들이 교육을 획기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교사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내지 못하면 공염불에 그치고 만다. 과거 지도자가 바뀔 적마다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처럼 교육개혁을 역설 하였으나 크게 바뀐 것이 없다. 입시제도의 부분적인 개선에 그치고 말았다. 학교교육은 교사로부터 시작되며 그 중심에는 교사가 있다. 교사가 신바람 나게 움직이면 학교가 달라지고 교육이 개혁될 수 도 있다. 최근에 개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교사들이 수업활동 하는데 소비하는 시간보다 잡무로 일과를 마치기가 일 수 이었다. 잡무만 덜어 줘도 신바람이 날 것이다.
금년의 스승의 날은 한국의 선생님들에게 비명[非命]으로 간 학생들을 생각하며 무한한 책임감과 함께 부담스럽고 슬픔에 잠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스승을 그리워하지 말고 선생님들을 격려 해야 한다.
박광하 (전 여주 대신고 교감, 전 수원 계명고 교장)
![박광하 칼럼 – 스승과 교사[스승의 날에 즈음하여]](https://chedulife.com.au/wp-content/uploads/자연.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