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漢書) – 본기(本紀)
1. 고제기(高帝記)
고제기(高帝記)는 반고의 한서-본기의 첫 번째 기록.
본기(本紀)는 책 전체의 강령으로서, 제왕(帝王)이 재위한 기간 동안에 있었던 정치, 경제, 군사, 민족과 관련된 모든 일들과 함께, 학술과 문화에 관련된 중대한 사건들까지도 연대순에 따라 배열함으로써, 역사 발전의 줄거리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여기에는 제왕의 성격 특징도 기록했고, 그가 실행했던 정책의 좋고 나빴던 점들에 대해 평가하기도 했다.
‘한서’의 단대사 체제는 한나라의 처음과 끝(반고가 역사를 기록하던 시점)을 모두 구명하여, 유씨(劉氏) 왕조의 흥망성쇠를 모두 포괄하여 한 권의 완전한 역사서로 묶었다.
‘사기’에서는 항우를 본기에 포함시켜 ‘고조본기’의 앞에 두었는데, ‘한서’에서는 고조 유방을 기록한 ‘고제기'(高帝記)를 맨 앞에 두고, 항우에 관련된 내용은 열전(列傳)에 포함시킴으로써 격을 낮추었다.
○ 고제기(高帝記)

고조(高祖)는 패풍읍(沛豊邑) 중양리(中陽里)사람으로 성은 유(劉)씨이다. 고조의 어머니가 일찍이 큰 못가에서 쉬다가 꿈에서 귀신을 만났다. 이 때 천둥 번개가 치고 날이 어두워지니, 아버지 태공(太公)이 길을 가다 본 즉, 하늘에서 교합(交合)하고 있는 용을 보았다. 그 뒤에 임신을 하매, 마침내 고조를 낳았다.
고조가 사람됨은, 코가 오똑한 용안(龍顔)에다 아름다운 수염이 있고, 왼 팔뚝에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관대하고 인자하며 남을 사랑하고 그 뜻이 넓었다. 늘 큰 도량을 지녀, 집안 사람들의 생업엔 신경쓰지 않았다. 장년(壯年)이 되자, 관리가 되어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이 되었지만, 군부(君府)의 관리들이 업신여기는 바가 없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 늘 왕(王)씨네 할멈과 무(武)씨네 할멈의 술집을 좇아 다니며 외상으로 술을 마시고, 때로는 술에 취해 누워버리니, 무씨 할멈과 왕씨 할멈은 그 위에 괴이한 게 있는 것을 보았다. 고조가 매양 술을 팔아주며 (거기서) 머물러 마시지만, 술로 (외상 술값을) 여러 배로 갚았다.
급기야 그런 괴이한 모습을 본지 여러 해가 되자, 이 두 집은 늘 (외상값을 적은) 장부(券)를 없애고 외상빚마저 포기했다.
고조가 일찍이 함양(咸陽)에 요역(繇役)에 끌려갔다, 나와 진시황(秦始皇)을 보고서는 크게 탄식하며 이르길, “아,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라 했다.
선보(單父)사람 여공(呂公)은 패(沛)의 현령과 친했는데, 원수를 피해 그를 따라 손님으로 머물다가, 이 일로 인해 거기서 가정을 가졌다. 패 현의 호걸과 관리들이 현령에게 중요한 손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하례(賀禮) 드리러 갔다.
소하(蕭河)는 주리(主吏)로서 진상하는 예물을 주관했는데, 여러 대부(大夫)들에게 영을 내리길, “진상하는 예물이 천 전(錢)을 채우지 못하면, 당 아래에 앉힐 것이다.”라 했다. 고조가 정장이 되어선 예전부터 여러 관리들은 가벼이 여겼는데, 이에 알현하기 위해 속여 말하길, “하례드릴 재물 만 전이요.”라 했으나, 실제로는 일 전도 지니지 않았다. 들어가 뵈니, 여공이 크게 놀라 일어서서, 그를 문에 나와 영접했다. 여공은 남의 관상보기를 좋아했는데, 고조의 용모를 보고서는 이로 인해 그를 중히 공경하고, 끌어다 들어가 윗자리에 앉혔다.
소하가 이르길, “유계(劉季;고조의 이름)는 본래 큰 말은 많지만, 이룬 일은 적습니다.”라 했다. 고조가 이에 여러 손님들을 없신여기고, 마침내 윗자리에 앉아서 굽혀 두려워함이 없었다. 술이 얼마 남지 않자, 여공이 눈을 고조에게 고정시키고 바라보았다. 뒤에 술이 다 떨어졌다. 여공이 말하길, “신이 어릴 적부터 관상보길 좋아하여 남의 관상본 것이 많은데, 그대와 같은 관상은 없었으니, 원컨대 자애(自愛)하소서. 신에세 여식이 있으니, 원컨대 아내로 삼아 주십시오,”라 했다. 주연이 파하자, 여씨의 아내가 여공에게 화내며 말하길, “공께서는 첨부터 이 얘를 기이하게 여겨 귀인에게 주고자 했습니다. 패령이 공과 친하여, 이 얘를 구해도 주지 않더니, 어찌 스스로 망령되게 유계에게 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까.”라 하자, 여공이 “이는 아녀자가 알 바 아니오.”라 대답하고는 끝내 고조에게 주었다. 여공의 딸은 곧 여후(呂后)이니, 효혜제(孝惠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았다.
일찍이 고조가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고 있었다. 여후와 두 자식은 밭 가운에 살았는데, 한 노부(老父)가 지나가다 마실 것을 청하니, 이에 여후가 노부를 배불리 먹였다. 노부가 여후의 상을 보고 말하길, “부인께서는 천하의 귀인입니다.”라 했다. 두 아이의 상(相)을 보게 하자, 효혜제를 보고 말하길, “부인께서 귀하신 까닭은 바로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라 했다. 노원공주의 상을 보고도 또한 모두 귀하다 했다. 노부는 이미 가버렸고, 고조는 마침 집근처를 따라 왔는데, 여후가 과객이 우리 모자의 상을 보고 크게 귀하다란 얘길했다고 말했다. 고조가 그 말을 듣고는 “멀리 가진 않았으리라.”라 하며, 이에 뒤쫓아가서, 노부에게 물었다. 노부가 말하길, “시골사람인 부인과 두 자식들은 모두 공(公) 때문에 귀하니, 공의 상이 귀함은 말할 수 조차 없습니다.”라 했다.
고조가 이에 사례(謝禮)하며 이르길, “진실의 노부의 말처럼 된다면, 감히 그 은덕은 잊지 않겠습니다.”라 했다. 나중 고조가 귀해졌지만, 끝내 노부가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고조가 정장일 때, 오래된 대껍질로 관을 만들고, 구도(求盜;정장 밑의 관직)에게 설(薛) 땅에 가서 관을 다듬게 하고, 때때로 이것을 썼는데, (나중에) 귀하게 되어 항상 이 관을 쓰니, 소위 유씨관(劉氏冠)이라는 것이다.
고조가 정장으로 현의 형도(刑徒)들을 여산(驪山)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많은 형도들이 도망하였다. 스스로 이를 헤아려 보고는 모두 도망가게 하고, 풍(豊)현 서쪽 택중정(澤中亭)에 이르러 멈추어선 물을 마셨다. 밤에 현에서 보낸 형도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말하길, “그대들이 다 가버리니, 나 또한 따라 도망가야겠다.”라 했다. 형도들 중의 장사 10여인이 고조를 따르길 원했다.
고조가 술을 더 마시고는, 밤에 못 가운데 작은 길을 가면서 한 사람을 앞서 가게 했다. 앞에 가던 자가 돌아와 보고하길, “앞에 큰 뱀이 마침 작은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원컨대 돌아가소서.”라 했다. 고조가 취하여 가로되, “장사(壯士)가 가는데, 무엇이 두려운가!”라 하고 이에 앞으로 가,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 뱀이 갈라져 두 개가 되니, 길이 열렸다. 수 리를 가다 취하고 노곤하여 누워잤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뱀이 있던 곳에 이르니, 한 늙은 함멈이 밤중에 곡(哭)을 했다.
사람들이 할멈에게 어째서 곡을 하는가라 물으니, 할멈이 말하길, “사람이 내 아들을 죽였소.”라 했다. 사람들이 “누가 할멈의 아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소?”라 물으니, 할멈이 말하길, “내 아들은 백제(百帝)의 아들로, 변해서 뱀이 되어 마침 길에 있었는데, 지금 적제(赤帝)의 아들이 내 아들을 죽였기에 곡한 것이오.”라 했다. 사람들이 이에 할멈이 거짓말을 한다 하여 욕보이려 하자, 할멈이 이 때문에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뒤에 오던 사람들이 이르르자, 고조가 깨어났다.
(이를) 고조에게 알리니, 고조가 이에 마음속으로 홀로 기뻐하며 스스로 믿었다.
여러 따르는 사람이 날이 갈수록 그를 경외하였다.
진시황제가 일찍이 말하길, “동남쪽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라 하고, 이에 동쪽으로 순수(巡狩)하며 이것을 막으려 했다. 고조는 망(芒)과 탕( )의 산과 못사이에 숨어있었는데, 여후와 사람들이 모두 (고조를) 찾고자 하면 늘 찾았다.
고조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여후가 말하길, “당신이 머무는 곳 위엔 항상 운기(雲氣)가 있어서 이를 따라 가보면 늘 당신을 찾죠.”라 라 하니, 고조가 또한 기뻐했다. 패(沛)중의 자제들이 혹 이를 듣고, (고조에게) 귀부(歸附)하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진 이세(二世) 원년(元年;BC 209년) 가을 7월, 진섭(陳涉=진승陳乘)이 기( )땅에서 봉기(蜂起)해 진(陳)에 이르러 자립(自立)하여 초왕(楚王)이 되고, 무신(武臣)·장이(張耳)·진여(陳餘)를 보내 조(趙) 땅을 빼앗게 했다.
8월, 무신이 자립하여 조왕(趙王)이 되었다. 많은 군현(郡縣)들이 장리(長吏)들을 죽이고 진섭에게 호응했다.
9월, 패령(沛令)이 패에서도 이에 호응하고자 했다. 연( )인 조참(曹參)과 주리(主吏)인 소하가 말하길, “그대(君)는 진(秦)의 관리이면서 지금 진을 배반하고 패의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자 하니, (그들이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원컨대 도망가서 (현) 밖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부르신다면, 가히 수백명을 얻을 수 있는데, 이로서 패의 자제들을 위협한다면, 그들이 감히 듣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라 했다.
이에 번쾌(樊快)에게 고조를 불러 오게 했다. 고조의 무리는 이미 수백명이었다.
이에 번쾌가 고조를 따라 왔다. 패령은 후회하며 변란이 있을까 두려워해, 성문을 닫고 성을 지키며, 소하와 조참을 죽이고자 했다. 소하와 조참이 두려워서, 성을 넘어 고조에게로 가 몸을 보존하였다. 고조가 이에 비단에 글을 써서 성 위로 쏘아 보내어 패의 부로(父老)들에게 이르길, “천하가 같이 진(秦)에게서 괴로워한 지 오래되었다. 지금 부로들이 패령을 위해 (성을) 지키고 있지만, 제후들이 아울러 일어나고 있으니, 이제 패를 도륙(屠戮)할 것이다. 패의 사람들이 지금 같이 패령을 주살(誅殺)하고 가히 세울 만한 자를 가려 세운다면, 제 집을 보존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같이 죽더라도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다.”라 했다.
부로들이 이에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 같이 패령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 고조를 맞이해, (그를) 패령으로 삼고자 했다. 고조가 말하길, “천하가 바야흐로 어지러워지고 제후들이 아울러 일어나는데, 지금 장수를 둠이 좋지 않으면 일패도지(一敗塗地)하게 될 것이오. 나는 감히 자애(自愛)하지 못하고, 재주가 옅음이 두려우니, 부형과 자제를 보존할 수 없소. 이렇듯 큰 일이니, 원컨대 다시 합당한 자를 택하시오.”라 했다. 소하와 조참은 모두 문리(文吏)로 자애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훗날 진이 제 집안을 주살할까 두려워, 진심으로 고조에게 사양하였다. 여러 부로들이 모두 말하길, “평생동안 유계는 뛰어나고 괴이하여 당연히 귀해지리라고 들었는데, 또한 점을 쳐보니 유계만큼 가장 길(吉)한 자가 없다.”라 했다. 고조가 수차례 사양하였다.
사람들이 (사양을) 인정하지 않자, 고조가 이에 위에 올라 패공(沛公)이 되었다.
황제(黃帝)에게 제사지내고, 패(沛)의 현정(縣廷)에서 치우(蚩尤)에게 제사지내고, 희생(犧牲)을 죽인 피로 북과 깃발에 제사지냈다. 깃발은 모두 붉었는데, 뱀인 백제(百帝)의 아들을 죽인 것에 유래한 것으로, (백제의 아들을) 죽인 자가 적제(赤帝)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젊은 호걸과 관리들이 소하 조참 번쾌 등이 한 것처럼 패의 자제들을 거두어 들여, 3천명을 얻었다.
이 달(진이세 원년 9월) 항량(項梁)과 그 조카 항우(項羽)가 오(吳)에서 봉기했다. 전담(田 )이 사촌 아우인 전영(田榮) 전횡(田橫)과 더불어 제(齊)에서 일어나고, 자립(自立)하여 제왕이 되었다. 한광(韓廣)이 자립하여 연왕(燕王)이 되고, 위구(魏咎)가 자립하여 위왕(魏王)이 되었다. 진섭(陳涉)의 장수 주장(周章)이 서쪽으로 관(關;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 희(戱)에 이르렀는데, 진의 장수 장한(章邯)이 그를 파했다.
진이세 2년(BC 208) 10월, (진나라는 10월을 정월로 삼아서 한해의 시작, 즉 세수는 10월에 시작한다.. 요것이 무제때까지 계속됩니다.. 윤달이 생기면 마지막달이 9월 다음에 한달을 집어 넣어서 후9월이라고 칭했습니다.) 패공(沛公)이 호릉(胡陵)과 방여(方與)를 공격하고, 돌아와 풍(豊)을 지켰다. 진의 사천(泗川) 감(監)인 평(平)이 병사를 이끌고 풍을 포위했다. 2일, (풍을) 나와 평과 싸워 그를 격파했다. 옹치(雍齒)에게 풍을 지키게 했다.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설(薛)로 갔다. 진의 사천 수(守)인 장(壯)의 군대가 설에서 패하여 달아나 척(戚)에 이르렀으나,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득(得)이 그를 죽였다. 패공이 항보(亢父)로 환군하여 방여에 이르렀다. 조왕
무신(武臣)이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감이나 수나 모두 郡의 관리입다. 군의 관리에는 군수, 군감, 군위가 있고, 현에도 현령, 현위가 있습니다. 이하 수나 감, 위 등으로 생략한 관직은 이런 종류입니다.)
12월, 초왕 진섭이 수레끄는 자인 장가(莊賈)에게 살해되었다. 위(魏)나라 사람 주시(周市)가 풍패의 땅을 빼앗고, 사람을 시켜 옹치에게 이르되 “풍은 옛날에(위가 도읍을) 양(梁)에서 옮기었던 곳으로, 위의 땅 중에 이미 평정된 곳이 수십 성입니다. 옹치 그대가 위에 항복하면, 위는 그대를 제후로 삼아 풍을 지키게 할 것이나, 항복치 않으면, 또한 풍을 도륙할 것이요.”라 했다. 옹치는 본래 패공에게 속하고자 하지 않았는데, 위가 그를 부르자, 곧 배반하고 위를 위해 풍을 지켰다.
패공이 풍을 공격하였으나, 취할수 없었다. 패공이 돌아와 패로 가서, 옹치와 풍의 자제들이 그를 배반한 것을 원망하였다.
정월, 장이(張耳) 등이 조나라의 후손인 조헐(趙歇)을 세워 조왕으로 삼았다.
동양(東陽)현 사람인 영군(영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를 세워 초왕으로 삼아, 유(留)에 머물렀다. 패공이 그를 따라가다, 길에서 장량(張良)을 얻고, 마침내 같이 경구를 알현하고, 병사을 청해 풍을 공격했다. 이 때에 장한이 진섭(陳涉)의 장수를 추격했는데, (장한의) 별장(別將) 사마(司馬)인 이(이)가 병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초의 땅을 정벌해 상(相)현을 도륙하고 탕에 이르렀다.
동양 땅의 영군과 패공이 병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 소(蕭)현 서쪽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자, 병사를 거두어 돌아와 유(留)현에 모였다.3일만에 빼앗았다.
2월, 탕현을 공격해 3일만에 빼앗았다. 탕의 병사를 거두어 6천명을 얻으니, 옛 병사와 합치니 9천명이 되었다.
3월, 하읍(下邑)을 공격해 취했다. 돌아와 풍을 쳤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4월, 항량이 경구(景駒)와 진가(秦嘉)를 공격해 죽이고 설(薛)현에서 멈추니, 패공이 가 뵈었다. 항량이 패공에게 병졸 5천명, 오대부(五大夫;작위 이름)인 장수 10명을 더해 주었다. 패공이 돌아와 병사를 거느리고 풍을 쳐서 취했다. 옹치는 위(魏)로 달아났다.
5월, 항우가 양성(襄城)을 쳐 빼앗고 돌아왔다. 항량이 별장들을 다 불렀다.
6월, 패공이 설로 가서 향량과 더불어 초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을 같이 옹립하여 초회왕으로 삼았다. 장한이 임제(臨濟)에서 위왕 구(咎)와 제왕 전담(田담)을 격파해 죽였다.
7월, 큰 장마비가 내렸다. 패공이 항보 땅을 공격했다. 장한이 전영(田榮)을 동아(東阿)에서 포위했다. 패공이 항량과 더불어 함께 전영을 구원하고 장한을 전영에서 크게 격파했다. 전영은 (자기 땅으로)돌아가고 패공과 항우가 북쪽으로 추격해 성양(城陽)에 이르러 그 성을 공격해 도륙했다. 복양(복陽) 동쪽에서 진을 치다가 다시 장한과 싸워서 또 격파했다. 장한이 다시 떨쳐 일어나 복양을 수비하며, 강뭏을 (성 주위에) 둘렀다. 패공과 항우가 가서 정도(定陶)를 공격했다.
8월, 전영이 전담의 아들 시(市)를 세워 제왕으로 삼았다. 정도가 아직 항복치 않자, 패공과 항우가 서쪽으로 땅을 공략하며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秦)의 군대와 싸워 크게 격파하고 삼천(三川)의 수(守)인 이유(李由)를 베어 죽였다.
돌아와 외황(外黃)을 공격하였으나 외황은 항복치 않았다. 항량이 재차 진의 군대를 격파하매, (향량에게) 교만한 기색이 있었다. 송의(宋義)가 이를 간언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진이 장한에게 병사를 더 주었다.
9월, 장한이 밤에 전군(全軍)에 막대기(枚)를 물리고 향량을 정도에서 공격해, 크게 파하고 항량을 죽였다. 이 때 연이어 비가 내리매 7월부터 9월까지 내렸다.
패공과 항우가 막 진류(陳留)를 공격하려다 항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들이 두려워하였다. 이에 장군 여신(呂臣)과 더불어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회왕을 모시고 도읍을 우태(旴台)에서 팽성을 옮겼다.
후(後) 9월, 회왕이 여신과 항우의 군대를 합쳐 스스로 이를 거느렸다. 패공을 탕군(탕郡)의 장(長)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하여 탕군의 병사를 거느리고 하였다. 항우를 노공(魯公)으로 삼아 장안후(長安侯)에 봉하고, 여신을 사도(司徒)로 그의 아버지 여청(呂靑)은 영윤(令尹)으로 삼았다.
장한이 이미 항량을 격파하여 초의 병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자, 이에 하수(河水)를 건너 북으로 조왕 헐(歇)을 공격해 대파했다. 헐이 거록성(鉅鹿城)을 보존하니 진의 장수 왕리(王離)가 이를 포위했다. 조나라가 여러번 구원을 요청하니, 회왕이 이에 송의를 상장(上將)으로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북으로 가서 조를 구원하게 했다.
처음에 회왕과 여러 장수들이 약속하길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가 평정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되기로 했다. 마침 이 떄 진의 군대가 강해져 늘 승세를 타고 북으로 추격하니, 여러 장수들에겐 먼저 관중에 들어가는 것이 불리했다. 항우가 홀로 진이 항량을 격파한 것을 원망하며 분격하여, 패공과 더불어 서쪽으로 관중에 들어가길 원했다. 회왕의 여러 노장(老將)들을 모두 말하길, “항우의 사람됨은 급하고 사나우며 적을 해치길 좋아하여, 일찍이 양성(襄城)을 공격하였는데 양성엔 살아남은 자가 없었고, 지나가는 곳마다 잔멸(殘滅)시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또한 초가 여러번 진격해 취하였으나 전에 진왕(陳王=진섭)과 항량은 모두 패하였으니, 장자(長者)를 보내어 의로움으로 스스로를 도와, 서로 가서 진의 부형들을 타이르는 게 낫습니다. 진의 부형들은 그 임금에게 오랫동안 고생하였으니, 지금 진실로 장자가 가서 사납게 침범치 않는다면 의당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항우를 보낼 수는 없고, 오직 패공만이 본디 관대한 장자입니다.”라 했다. 병졸들이 항우를 허락치 않으니, 패공을 보내 서쪽으로 가 진왕과 항량의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게 했다. 이에 탕에서 시작되는 길을 가다 [성양(城陽)과] 두리(두里) 사이에 이르러 진나라 군의 성벽을 공격하여 2개의 군대를 격파했다.
진 3년(BC 207) 10월, 제의 장수 전도(田都)가 전영의 곁에 붙어, 병사를 거느리고 항우를 도와 조나라를 구했다. 패공이 성무(成武)에서 동군(東郡)의 도위를 공격해 파했다.
11월,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그의 병사를 병합해 하수를 건너 스스로 상장군이 되니, 여러 장수들과 경포( 布)등이 모두 (그에게) 속했다.(경포의 원래 성은 英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 얼굴에 경형 즉 묵형(墨刑;얼굴에 먹을 새겨 자자하는 형벌) 을 당했기 때문에 별명처럼 경포라 부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묵자이죠.)
12월,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속(粟)현에 이르러, 강무후(剛武侯;?)와 마주치자 그의 군사 4천명을 빼앗아 병합하고, 위의 장수 황흔(皇欣)·무만(武滿)의 군대와 합쳐 진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했다. 옛 제왕 건(建)의 손자 전안(田安)이 제북(濟北) 지역을 항복시키고 항우를 따라 조를 구했다. 항우가 진의 군대를 거록 아래서 대파하여 왕리를 사로잡고 장한을 패주시켰다.
2월, 패공이 탕( )을 따라 북으로 창읍(昌邑)을 공격하다 팽월(彭越)을 만났다.
팽월이 창읍을 공격하는 것을 도왔으나, 항복시키지 못했다.
패공이 서쪽으로 고양(高陽)을 지나는데,역이기( 食其)는 그 고장의 감문(監門)이었다. (역이기가) 이르길, “여러 장수가 여길 지나간 자가 많았지만, 나는 패공처럼 도량이 큰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패공을 알현하길 청하였다. 패공이 마침 침상에 걸터앉아 두 시녀에게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다. 역생( 生=역이기)은 절(拜)은 하지 않고 길게 읍(揖)하며 가로되, “족하께서 반드시 무도한 진을 주살코자 하신다면, 걸터 앉아서 장자를 뵈는 일은 마땅히 해서 안됩니다.”라 했다. 이에 패공이 일어나 옷을 입고 사과하며 윗자리에 앉혔다. 역이기가 패공에게 진류(陳留)를 기습하라고 말했다.
패공이 (역이기를) 광야군(廣野君)으로, 그의 아우 상(商)을 장수로 삼고, 진류의 병사를 거느렸다.
3월, 개봉(開封)현을 공격했으나, 취하지 못했다. 서쪽으로 진의 장수 양웅(楊熊)을 만나 백마(白馬)현에서 전투를 벌이고, 또 곡우(曲遇)의 동쪽에서 싸워 크게 격파했다. 양웅이 형양(滎陽)으로 도망가니, 2세 황제가 사신을 보내 참수하여 (사람들에게) 보였다.
4월, 남쪽으로 영천(潁川)을 공격하여 도륙하였다. 장량으로 인하여 마침내 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 때, 조나라의 별장 사마앙(司馬 )이 바야흐로 하수를 건너 관(關)으로 들어가고자 하니, 패공이 이에 북쪽으로 평음(平陰)을 공격하여 하수의 나루를 끊었다. 낙양(洛陽)의 동쪽에서 전투를 싸웠으나, 군세가 불리하자 환원(轅)을 따라 양성(陽城)에 이르러, 군중의 말과 기병을 거둬들였다.
6월, 남양(南陽) 수(守)인 의(의)와 주( )현 동쪽에서 전투를 벌여 격파했다.
남양군을 빼앗으니, 남양의 수는 달아나 완(宛)성을 보전하여 지켰다.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완의 서쪽을 통과했다. 장량(張良)이 간하길, “패공께선 급히 관에 들어가고자 하시지만, 진의 병사는 아직도 많고, 험한 지형을 의지하여 막아서고 있습니다. 지금 완을 항복시키지 못하면, 완의 군대가 따라와 배후를 칠 것이고 또 강한 진의 병사가 앞에 놓여 있으니 이는 위험한 길입니다.”라 했다.
이에 패공이 밤에 군대를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돌아와, 깃발을 뉘여놓고 아직 밝지 않은 새벽에 완성을 세 방향에서 둘러 포위했다. 남양의 수가 제 목을 찔러 자살코자 했으나, 그의 사인(舍人)인 진회(陳恢)가 말하길, “죽기엔 아직 이릅니다.”라 했다.
이에 성을 넘어 패공을 알현하고 가로되, “신은 족하께서 먼저 함양에 입성한 자가 왕이 되기로 약속하였다고 들었는데, 지금 족하께서는 완에 머무르면서 여길 지키십시오. 완의 군현에는 수십개의 성이 연이어 있는데, (그 성의) 관리와 백성들은 스스로 항복하면 반드시 죽게된다 여겨 모두 성에 올라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족하께선 날이 저물어 공격을 멈추었는데, 병사들 중 죽거나 다친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요, 병사를 이끌고 완으로 가신다면, 완성은 반드시 족하에게 떨어질 것입니다. 족하에겐 앞에선 함양의 약속을 잃게 되고, 뒤에선 강한 완(의 군대)이 있다는 우환이 있으니, 족하의 계책 중엔 항복을 약속하시는 것 만한 게 없습니다. (남양) 수를 (제후에) 봉하시어 여길 지키게 하시고, (족하께선) 갑졸(甲卒)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십시오. 여러 성들 중에 아직 항복치 않은 곳은 다투어 성문을 열고 족하를 기다릴 것이니, 족하께선 가시는데 누환(累患)이 없을 것입니다.”라 했다. 패공이 “좋다”라 했다.
7월, 남양 군수 의가 항복하자 그를 봉하여 은후(殷侯)로 삼고, 진희는 1천호에 봉하였다.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니, 항복치 않은 곳이 없었다. 단수(丹水)에 이르자, 고무후(高武侯) 새( )와 양후(襄侯) 왕릉(王陵)이 항복했다. 되돌아서 호양(胡陽)을 공격하고, 번군(番君=오예吳芮)과 만나서 함께 석(析)현과 역(역)현을 공격하니 모두 항복했다. 지나는 곳마다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니, 진의 백성들이 기뻐했다. 위나라 사람 영창( 昌)을 진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 달에 장한이 군대를 들어 항우에게 항복하니, 항우가 그를 옹왕(雍王)으로 삼았다.
하구(瑕丘)사람 신양(申陽)이 하남(河南)에서 항복했다.
8월, 패공이 무관(武關;진의 남쪽 관문)을 공격해 진으로 들어갔다. 진의 재상 조고(趙高)는 두려워 이에 2세 황제를 살해하고, 사신을 보내 관중을 나눠 다스리길 약속하려 했으나, 패공이 이를 허락치 않았다.
9월, 조고가 2세 황제의 형의 아들인 자영(子孀)을 세워 진왕으로 삼았다. 자영이 조고를 주살하고 장차 장병을 보내어 요관(嶢關)을 막고자 했다. 패공이 이를 공격코자 했으나, 장량이 “진의 병사는 여전히 강성하니 가벼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원컨대 먼저 사람을 보내 산 위에 진 깃발을 꽂아 적에게 (많은 병사가 있는지) 의심스럽게 하고, 역이기와 육가(陸賈)를 보내 진의 장수를 달래고 이로운 것으로 유혹해 함락시키십시오.”라 했다.
진의 장수가 과연 서로 화해하려 하니, 패공이 이를 허락코자 했다. 장량이 말하길, “이 장수 혼자 배반하려 하는 것인데, 그의 부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되니, (기다렸다 적이) 해이해질 때 공격하는 게 낫습니다.”라 했다.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요관을 둘러싸고 괴산(괴山)을 넘어 진군을 공격해 남전(藍田) 남쪽에서 이를 크게 격파했다. 남전에 이르러 또 그 북쪽에서 싸우니, 진의 병사가 크게 패하였다.
한 원년(BC 206) 겨울 10월, 오성(五星)이 동정(東井)에 모였다. 패공이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진왕 자영이 흰 수레와 흰 말을 타고, 인수 끈을 목에 매어 황제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를 봉하여 지도(枳道)곁에서 항복했다.
여러 장수들이 혹 진왕을 주살하자고 말했으나, 패공이 이르길. “처음에 회왕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내가) 흔들리지 않고 관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항복하였는데 그를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라 했다. 이에 (그를) 관리들에게 맡겼다. 드디어 서쪽으로 함양에 입성하니, 궁에서 멈추고 쉬고자 했다, 번쾌와 장량이 간언하니, 이에 진의 중요한 보배와 재물을 창고에 봉해놓고, 돌아와 패상에 진을 쳤다. 소하(蕭何)가 진의 승상부의 도적(圖籍)과 문서를 모두 거두어 들였다.
12월, 여러 현의 호걸(豪傑)들을 불러 이르길, “부로(父老)들께서 진의 가혹한 법률 아래서 고생하신지 오래되었는데, (진의 법에) 비방한 자는 그 족속을 주살하고, 모여 얘기하는 자는 기시(棄市)하였습니다. 제가 제후들과 약속하길, 먼저 관중에 들어간 자가 왕이 되기로 하였으니, 제가 당연히 왕이 됩니다.
부로들에게 법 3장만 약속하겠습니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죽이고,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 한 것은 당연히 죄가 됩니다. 나머지 진의 법은 살펴 없애겠습니다. 관리와 백성들은 예전처럼 하고 편안히 바꾸지 않겠습니다. 무릇 제가 여기온 까닭은 부형(父兄)들을 해로움을 없애는 것이며, 사납게 해치는 일은 없을 터이니 두려워 마십시오”라 했다. 이에 사람들과 진의 관리들을 여러 현 향 읍에 보내어 이를 알리게 했다.
진의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소와 양을 잡고 술과 음식을 장만해 군사들에게 바치었다. 패공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이르길, “창고에 식량이 많으니 백성들의 것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라 했다. 백성들은 더욱 기뻐하며 오직 패공이 진왕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혹자가 패공에게 말하길, “진의 부유함은 천하의 열 배이며, 지형은 강성합니다.
지금 들으니 장한이 항우에게 항복하자, 항우가 (그에게) 옹왕(雍王)이란 칭호를 주어 관중을 다스리게 했다 합니다. 머지않아 패공이 여기 계실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급히 함곡관(函谷關)을 지키게 하여 제후의 군사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하시고, 관중의 병사를 조금씩 거두어 저절로 많아지게 하신다면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라 했다. 패공이 그렇다하며 그 계책을 따랐다.
12월, 항우가 과연 제후의 병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관으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관문이 닫혀 있었다. 패공이 이미 관중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항우가 크게 노하여, 경포 등에게 함곡관을 공격해 파하게 하고 드디어 희하(戱下)에 이르렀다.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毋傷)이 항우가 노하여 패공을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항우에게 보내 이르길, “패공은 관중이 왕이 되고자 하여 자영을 상(相)으로 삼게 하며, 진기한 보물을 다 가졌습니다.”라 하고 (자기가 제후에) 봉해지려 하였다. 아부(亞父)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일러 가로되, “패공은 산동(山東)에 살 때부터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했는데, 지금 그가 관중에 들어가서는 진기한 재물을 가지지 않고 부녀자는 총애하는 자가 없다 하니, 이것은 그 뜻이 작지 않음입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그의 기상을 보게 하니, 모두 용의 기상이며 오색을 이루었다 하니, 이것은 천자의 기운입니다. 급히 그를 공격하여 (이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라 했다.
이에 군사들을 먹이고 다음날 아침 전투를 벌여다. 이때 항우의 병사는 40만이었는데, 백만이라 불렀다. 패공의 병사는 10만이었는데 20만이라 칭했지만, 힘으론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항우의 계부(季父)인 좌윤(左尹) 항백(項伯)은 본디 장량을 좋아하여 밤에 말을 달려 장량을 보고, 그 실상을 모두 알리면서 자기와 함께 도망가 헛되이 (패공과) 같이 죽지 말라고 했다. 장량이 말하길, “신은 한왕(韓王)께서 패공에게 보낸 몸이니,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고, 도망가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라 했다. 이에 항백과 더불어 함께 패공을 뵈었다.
패공이 항백과 혼인을 맺기로 약속하고, 말하길 “내가 관중에 들어온 이후, 추호도 감히 손댄 물건이 없고, 관리와 백성들을 위무하며 창고를 봉해놓고 장군(항우)를 기다렸는데, 관(함곡관)을 지킨 이유는 다른 도적을 막기 위함이오.
밤낮으로 장군이 도착하길 바랬는데, 어찌 감히 배반하겠소! 원컨대 그대가 (나는) 감히 은덕을 배반치 않는다고 분명히 말해주길 바라오”라 했다. 항백이 이를 허락하고, 그날 밤으로 다시 돌아갔다. (항백이) 패공에게 깨우쳐 주길, “내일 아침 일찍이 오시어 사과드리지 않으시면 안됩니다.”라 했다.
항백이 돌아와 패공의 말을 모두 항우에게 고하고, 이로 인하여 이르길 “패공이 먼저 관중의 병사를 파(罷)하지 않았는데, 공이 오히려 어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남에게 큰 공이 있는데, 그를 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고, 이로 인해서 그를 좋게 여기는 게 낫습니다”라 하니, 항우가 허락했다.
패공이 다음날 아침 백여 기(騎)를 따라 홍문(鴻門)에서 항우를 뵙고, 사과하며 말하길, “신과 장군은 힘을 모아 진을 공격하였는데, 장군께서는 하북(河北)에서 싸우고 신은 하남(河南)에서 싸워, 본의 아니게 먼저 관에 들어가 진을 격파할 수 있어서, 장군과 더불어 다시 서로 뵐 수 있게되었습니다. 지금 소인들이 말을 하여, 장군과 신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항우가 이에 말하길, “이것은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한 말이니, 그렇지 않다면 이 항적(項籍;항우의 이름. 적籍은 이름이고 羽는 자(字)이다)이 어찌 여기에 왔겠소?”라 했다. 항우가 이로 인해 패공을 머무르게 하고 같이 술을 마셨다.
범증이 여러 차례 항우에게 눈짓으로 패공을 치라고 했으나, 항우가 응하지 않았다. 범증이 일어나 항장(項莊;항우의 사촌동생)에게 일러 가로되, “군왕의 사람됨이 (패공을 죽이는 것을) 용인치 않으시니, 너는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패공을 쳐서 죽여라. 그렇지 못하면 네 또한 (후에 패공에게) 사로잡힌 신세가 될 것이다”라 했다.
항장이 들어가 헌수(獻壽)를 올렸다. 헌수가 끝나자 말하길, “군중이라 음악이 될만한 게 없으니, 청컨대 칼춤이라도 추어 볼까 합니다”라 했다” 그리곤 칼을 뽑아 춤을 췄다. 항백 또한 일어나 춤을 추며, 늘 제 몸으로 패공을 보호하고 막았다.
번쾌가 일이 급하게 되었음을 듣고,곧장 들어와 심하게 화를 내었다. 항우가 그를 장사(壯士)라 여기고 술을 하사했다. 번쾌가 인하여 항우에게 불평을 했다.
(이 부분은 번쾌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항우가 그를 보고 누구인지 물었다. 장량이 “패공의 참승이 번쾌입니다”라 했다. 항우가 “장사로다. 그에게 술과 고기를 주라”고 했다. (번쾌가) 술을 마시는데, 칼을 뽑아 고기를 잘라 먹었다. 항우가 “더 마실 수 있겠느냐?”라 하자 번쾌가 “신은 죽음조차 사양하지 않았는데 술이겠습니까! 또 패공께서는 먼저 입관하여 함양을 평정하고 패상에 진을치며 대왕을 기다렸습니다. 대왕께서 지금 오셔서 소인들의 말을 듣고 패공과 틈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신은 천하가 마음을 풀어해치고 대왕을 의심할까 두렵습니다”라 했다]
잠시 후에 패공이 일어나 측간에 가서 번쾌를 불러 나오게 하고, 수레는 관속에 두고, 혼자 말을 타고 번쾌`근강(근彊)`등공(등公)`기성(紀成)등은 걸어서 사잇길로 따라 (자기) 군대로 달아나고, 장량은 머물러 항우에게 사과하게 했다.
항우가 “패공은 어디 있는가?”라 묻자, 답하길 “장군께서 패공의 허물을 탓하시려는 뜻이 있단 말을 듣고, 몸만 간신히 벗어나 도망가 그 사이에 (패공의) 군영(軍營)에 이르른 까닭에, 신을 보내 벽(璧;옥)을 바치게 하셨습니다”라 했다.
항우가 그것을 받았다. 또한 범증에게 옥두(玉斗;옥으로 된 술잔)를 바쳤다.
범증이 노하여 옥두를 깨뜨리며 일어나 말하길 “나는 이제 패공에게 사로잡히게 되었구나!”라 했다.
패공이 수일만에 돌아오고, 항우는 서쪽으로 병사를 이끌고 가 함양을 도륙하고, 진의 항복한 왕 자영을 죽이며 진의 궁실을 불태우니,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진의 백성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항우가 사람을 돌려보내 회왕에게 보고케 하였더니, 회왕이 “약속과 같이하라” 했다. 항우가 회왕이 패공과 함께 서쪽으로 관으로 들어가고 북으로 조를 구한 후 천하를 약속하겠다는 영을 인정치 않았다며 원망하였다. 이에 말하길, “회왕이란 자는 우리 집안에서 세워준 자로 아무런 공벌(攻伐)도 없는데, 어찌 전주(專主)로서 약속을 할 수 있겠는가! 본래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수들과 내가 했다”라 했다.
봄 정월, 회왕을 높이어 의제(義帝)가 되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의 명을 쓰지 않았다.
2월, 항우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양(梁)과 초의 땅 9군(郡)의 왕이 되고, 팽성에 도읍했다. 약속을 어기고, 다시 패공을 세워 한왕(漢王)으로 삼아, 파(巴) 촉(蜀) 한중(漢中)의 41현을 다스리고 남정(南鄭)에 도읍케 했다.
관중을 셋으로 나눠 진의 세 장수를 세우니, 장한은 옹왕(雍王)으로 삼아 폐구(廢丘)에 도읍케 하고, 사마흔(司馬欣)은 새왕(塞王)으로 삼아 역양(?陽)에 도읍케 하고, 동예(董峠)를 적왕(翟王)으로 삼아 고노(高奴)에 도읍케 했다. 초의 장수인 하구(瑕丘)사람 신양(申陽)을 하남왕(河南王)으로 삼고, 낙양(洛陽)에 도읍케 했다. 조의 장수 사마앙(司馬 )을 은왕(殷王)으로 삼고 조가(朝歌)에 도읍케 했다. 당양군(當陽君) 영포(英布; 경포 布)를 구강왕(九江王)으로 삼아 육(六)에 도읍하게 했다. 회왕의 주국(柱國=상국, 재상)인 공오(共敖)를 임강왕(臨江王)으로 삼고 강릉(江陵)에 도읍케 했다. 번군(番君) 오예(吳芮)를 형산왕(衡山王)으로 삼고 주(주)에 도읍케 했다. 옛 제왕 건(建)의 손자인 전안(田安)을 제북왕(濟北王)으로 삼았다. 위왕 표(豹)를 옮겨 서위왕(西魏王)으로 삼고 평양(平陽)에 도읍케 했다. 연왕(燕王) 한광(韓廣)을 옮겨 요동왕(遼東王)으로 삼았다. 연의 장수 장도(臧도)를 연왕으로 삼고 계(계)에 도읍하게 했다. 제왕 전시(田市)를 교동왕(膠東王)으로 삼았다. 제의 장수 전도(田都)를 제왕으로 삼고 임치(臨치)에 도읍하게 했다. 조왕 헐(歇)을 옮겨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조의 상(相)인 장이(張耳)를 상산왕(常山王)으로 삼았다.
한왕은 항우가 약속을 배반한 것을 원망하여 그를 공격코자 했으나, 승상 소하가 간하니 이에 그만두었다.
여름 4월, 제후들이 대장기 아래서 파하고, 각자 (봉해진) 나라로 갔다. 항우가 병졸 3만명에게 한왕을 따라가게 했는데, 초나라 사람들과 각 제후국의 사람들이(한왕을) 사모하여 따라간 자가 수 만명이었고, 두(杜)를 따라 남쪽으로 식중(蝕中)으로 들어갔다. 장량이 사양하며 한(韓)나라로 돌아가는데, 한왕이 그를 보내주며 유중( 中)에 이르자, 이로 인해 한왕에게 (남정으로 가는) 잔도(棧道=험한 벼랑 끝에 둘려맨 길)를 불태어 끊어버려 제후들의 첩자를 방비하고, 항우에게 동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보여라 말했다.
한왕이 이미 남정에 이르자, 여러 장수 및 군사들이 모두 제나라 노래(謳)를 부르며 동쪽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도망가 되돌아 간 자가 많았다.
한신(韓信)은 치속도위(治粟都尉)였었는데 또한 도망가 버리자, 소하가 그를 쫓아가 데려와서, 한왕에게 그를 천거하며 이르길,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시면, 이 한신이 아니고선 더불어 일을 도모할 자가 없습니다” 라 했다.
이에 한왕이 재계(齋戒)하고 단을 설치하고, 한신을 배(拜)하여 상장군으로 삼아 계책을 물었다. 한신이 대답하길, “항우가 약속을 저버리고 남정에서 왕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왕을 귀양보낸 격입니다. 관리와 병졸들은 모두 산동(山東) 사람이라 밤낮으로 돌아가길 기대하며 바라고 있으니, 그 예봉(銳鋒)을 쓰신다면 가히 큰 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천하는 이미 평정되고, 백성들은 제 사는 곳에서 편안하니, (백성을) 다시 쓸 수는 없습니다. 동쪽으로 향하는 계책으로 결정하시는게 낫습니다”라 하며,항우를 도모할 수 있고 삼진(三秦=장한이 옹왕, 사마흔이 새왕, 동예는 적왕으로 진의 땅을 나누어 왕이 되어, 이 셋을 삼진이라 한다)을 쉽계 병합하는 계책을 설명했다. 한왕이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한신의 계책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을 나눠 두었다. 소하는 (이곳에) 머물러, 파촉(巴蜀)의 조세를 거두어 군량을 공급하게 했다.
5월, 한왕이 병사를 이끌고 고도(故道)현을 따라 나와, 옹왕(雍王)을 습격했다.
옹왕 장한이 진창(陳倉)에서 한군을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는, 돌아서 도망가 호치(好 )에서 싸웠으나 또 크게 패하자 폐구(廢丘)로 달아났다. 한왕이 마침내 옹(雍) 땅을 평정했다. 동쪽으로 함양으로 가서, 병사를 이끌고 옹왕을 폐구에서 포위해 놓고, 여러 장수들을 보내 땅을 빼앗게 했다. 전영(田榮)은 항우가 제왕 전시(田市)를 교동(膠東)으로 옮기고 전도(田都)를 제왕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제나라 병사로 전도를 맞서 공격하였다. 전도가 도망가 초에 항복했다.
6월, 전영이 전시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제왕이 되었다. 이 때, 팽월(彭越)이 거야(鉅野)에 있었는데, 그 무리가 만여 명이나 되지만 어디에 속한 바가 없었다. 전영이 팽월에게 장군의 인(印)을 주고, 이로 인하여 양(梁)나라 땅을 뒤엎으라고 명령했다. 팽월이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을 기습하여 죽이니, 전영이 드디어 삼제(三齊=제齊,제북濟北,교동膠東)의 땅을 병합했다. 연왕(燕王) 한광(韓廣) 또한 요동(遼東)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인정치 않았다.
가을 8월, 장도(臧 )가 한광을 죽이고, 그 땅을 병합했다.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 모두 한(漢)에 항복했다. 처음에, 항량이 한(韓)나라의 후손인 공자(公子) 성(成)을 세워 한왕(韓王)으로 삼고, 장량을 한의 사도(司徒)로 삼았었다. 항우가 장량이 한왕을 따르고, 한왕(韓王) 성에게도 또한 별다른 공적이 없자, 그를 제 봉국으로 보내지 않고 같이 팽성에 데리고 와서 그를 죽였다.
이즈음 한왕(漢王)은 관중을 병합하고, 제와 양나라가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노하여, 이에 옛 오(吳)의 영(令)인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한(漢)에 대적하게 했다. 소공각 (蕭公角=소 땅의 영令(=공公)인 角)에게 영을 내려 팽월을 치게 하였지만, 팽월이 각의 병사를 패배시켰다. 이때 장량은 한(韓)의 땅을 순행(巡行)하고 있었는데, 항우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길 “한(漢)은 관중을 얻고자 했는데, (예전의) 약속처럼 된다면 곧 그치고, 감히 동쪽을 넘보지 않을 것입니다”라 했다. 항우는 이 때문에 서쪽으로 갈 뜻이 없어져, 북으로 제(齊)를 쳤다.
9월, 한왕이 장군 설구(薛歐)와 왕흡(王吸)에게 무관(武關;남양南陽으로 통하는 진秦의 남쪽 관문)을 나가 왕릉(王陵)의 병사로 남양을 따라 패(沛)에서 태공과 여후를 맞이하게 했다. 항우가 이를 듣고 병사를 내어 양하(陽夏)에서 그들을 막고자 했으나, 전진할 수 없었다.
한왕 2년(BC 205년) 겨울 10월, 항우가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에게 침( )현에서 의제(義帝=초 회왕)을 죽이게 했다. 진여(陳餘) 또한 항우가 자기만 혼자 왕으로 삼지 않은 것을 원망해, 전영(田榮=제왕)을 따라 그의 병사를 도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쳤다. 장이가 패주하여 한(漢)에 항복하니, 한왕이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진여가 대왕(代王) 헐(歇)을 맞이하여 조나라로 돌아가니, 헐이 진여를 세워 대왕으로 삼았다. 장량이 한(韓)의 사잇길로 한(漢)으로 돌아오니, 한왕이 그를 성신후(成信侯)로 삼았다.
한왕이 협(陜)현으로 가서, 관외(關外;함곡관 바깥)의 부로들을 진무했다.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이 항복하니, (그 땅에다) 하남군을 두었다. 한(韓)의 태위(太尉) 한신(韓信; 상장군 한신과 다른 사람이다. 이사람은 한신과 구별해서 韓王 信이라고 부른다.)에게 한(韓)을 공격하게 하니, 한왕(韓王) 정창(鄭昌)이 항복했다.
11월, 한의 태위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삼았다. 한왕(漢王)이 되돌아와서 역양(?陽)에 도읍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땅을 공략하게 하여 농서( 西)를 빼앗았다. 만 명 혹은 1 군(郡)으로 항복한 자는 1만 호에 봉했다. 하상(河上;하수위쪽)의 요새를 보수했다. 옛 진의 동식물을 기르던 동산(원문은 苑 園이다. 새나 짐승을 기르는 곳을 원苑, 원에 담장이 있는 것을 유 , 식물을 심은 곳을 원(園)이나 못에서 백성들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다.
봄 정월, 항우가 성양(城陽)에서 전영을 공격하니, 전영이 패하여 평원(平原)으로 달아나니, 평원의 백성들이 그를 죽였다. 제나라가 모두 초에 항복하였으나, 초가 그 성곽(城郭)을 불태우자, 제나라 사람들이 다시 초를 배반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북지(北地)를 공략하고, 옹왕(장한)의 아우 장평(章平)을 사로잡았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2월 계미(癸未)일,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진의 사직(社稷)을 없애고, 한의 사직을 세우게 했다. 은덕(恩德)을 베풀고 백성들에게 작(爵)을 하사하였다. 촉한(蜀漢)의 백성들이 군대 일에 노역(勞役)을 제공하기에 2년간 조세(租稅)를 거두지 말게 했다. 관중의 군졸로서 종군한 자에게 그 집안에 1년간 부역(賦役)을 없애주었다.
백성들 중에 나이가 50세 이상으로 인품이 뛰어나 능히 뭇 사람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를 천거해, 이들을 삼로(三老)로 삼아 각 향(鄕)에 1명씩 두었다. 여러 향의 삼로 중에 1명을 택해 현(縣) 삼로로 삼아, 각 현의 영(令),승(丞),위(尉)들과 더불어 서로 (백성을) 교화하는 일을 섬기게 하고, 요역(繇役=부역)과 수역(戍役=일정 기간 변경을 수비하는 군역軍役)을 면해 주었다. 10월이면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
3월, 한왕이 임진(臨晉)에서 하수를 건너가자, 위왕(魏王) 표(豹)가 항복하고, 그 장수와 병사들이 따랐다. 하내(河內)를 항복시키고, 은왕(殷王) 사마앙(司馬 )을 사로잡아, (그 땅에) 하내군을 두었다.
수무(脩武)에 이르자, 진평(陳平)이 초에서 도망하여 항복하여 왔다. 한왕이 같이 얘기를 나눠보고 크게 기뻐하여[예전에 홍문鴻門의 연회 때, 한왕이 항우에게 사과하러 오자, 범증이 그를 술 취하게 하여 죽이려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진평이 한왕의 잔에 술을 조금만 따라주어 구해주는 일이 있다], (그를) 수레에 동승시키고 여러 장수들을 감독케 하였다.
남쪽으로 평음진(平陰津)을 건너 낙양(洛陽)에 이르니, 신성(新城)의 삼로인 동공(董公)이 한왕을 막고선 말하길, “신이 듣기에 ‘덕을 따르는 자는 번창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 하였고, ‘병사를 명분이 없는 곳에 내면,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항우는 무도(無道)하여 그 주인(의제)를 내쫓고 시해하였으니, 천하의 적입니다. 무릇 인(仁)에는 용맹(勇)을 쓰지 않고, 의로움(義)에는 힘(力)을 쓰지 않으니, 삼군의 무리가 의제를 위해 소복을 입고, 이를 제후들에게 알려서, 이 일을 위해 동쪽으로 정벌한다면, 사해(四海; 온 천하) 내에서 그 덕을 우러르니 않는 자가 없을 겁니다. 이것은 삼왕(三王; 하夏, 은殷, 주周)를 쫓는 것입니다”라 했다. 한왕이 말하길 “옳다. 무릇 사내로서 이를 듣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한왕이 의제를 위해 발상(發喪)하고 웃옷을 벗어 크게 곡(哭)하였고, 여러 사람들도 3일간 곡을 하며 슬퍼했다. 사신을 제후들에게 보내 고하길 “천하가 함께 의제를 세워, 북면하고 섬겼다.
지금 항우가 의제를 강남(江南)에서 시해하였으니, 대역무도하다. 과인은 친히 발상을 하고, 병사들은 모두 소복을 입었다. 관중의 병사를 모두 내고, 삼하(三河; 하동, 하남, 하내) 군사를 모두 거두어, 남으로 장강, 한수(漢水)이하로 내려갈 것이니, 원컨대 제후 및 왕들을 따라서 초에서 의제를 시해한 자를 치기 바란다”고 했다
여름 4월, 전영(田榮)의 아우 전횡(田橫)이 수 만명을 거두어 얻고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세워 제왕으로 삼았다.(이전의 제왕 전영은 2월 항우에게 패하여 죽었다) 항우가 비록 한이 동쪽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이미 제를 쳤는지라 제를 끝까지 격파한 후에 한을 치고자 하여, 한왕이 이 때문에 다섯 제후(상산常山, 하남河南, 위魏, 한韓, 은殷)의 병사를 빼앗아 동으로 초를 정벌했다. 외황(外黃)에 이르니, 팽월이 3만 병사를 거느리고 한에 귀의했다.
한왕이 팽월을 배(拜)하여 위(魏)의 상국(相國)으로 삼고, 영을 내려 양(梁)의 지역을 평정하게 했다.
한왕이 마침내 팽성에 들어가서, 항우의 미인(美人=궁녀, 후궁)과 재물을 거두어 들이고, 큰 주연을 베풀었다. 항우가 이를 듣고 휘하의 장수에게 제를 치게 하고, 스스로는 정병(精兵) 3만 명으로 노(魯)로부터 호릉(胡陵)을 나와 소(蕭)에 이르러 새벽에 한군을 치니, 팽성의 영벽(靈壁) 동쪽, 수수( 水) 위에서 큰 전투를 벌여 한군을 대파하고 많은 병사들을 죽이매, 수수가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항우가) 한왕을 3면을 둘러 포위했다. 큰 바람이 서북쪽에서 일어나 나무가 꺾이고 가옥이 뽑히며 모래와 돌이 날라가고 날이 어두워지니, 초군은 크게 혼란스러워져 한왕은 수십 기와 더불어 달아날 수 있었다.
패(沛)를 지나다, 사람을 시켜 (자기) 집안 사람들을 찾게 했으나, 집안 사람들이 또한 이미 도망가서 서로 만날 수 없었다. 한왕이 길에서 효혜(孝惠; 2대 황제인 효혜제이다)와 노원(魯元) 두 자식을 만나 데리고 갔다. 초의 기병이 한왕을 추격하니, 한왕이 급하여 두 자식을 (말에서) 밀쳐 내렸다. 등공(?公; 하후영夏侯孀)이 아래서 거두어 태워, 마침내 (추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심이기(審食其)는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를 따라 사잇길 가다 도리어 초군과 마주치게 되니, 항우는 항상 그들을 군중에 두고 인질로 삼았다. 제후들은 한이 패하는 것을 보고 모두 도망갔다.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는 초에 항복하고, 은왕 사마앙은 죽었다.
여후의 오빠인 주여후(周呂侯)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하읍(下邑)에 머물렀는데, 한왕이 그를 쫓아 갔다. (한왕은) 병사를 점차로 거두어 들여 탕( )에 진을 쳤다.
한왕이 서쪽으로 양(梁)의 지역을 지나 우(虞)에 이르러, 알자(謁者)인 수하(隨下)에게 이르길, “공이 능히 구강왕 영포가 병사를 일으켜 초를 배반토록 설득시켜 준다면, 항왕(項王;항우)은 반드시 머물면서 그를 칠 것이다. (항우가) 몇 달만 거기에 머무른다면, 나는 반드시 천하를 취할 것이다”라 했다. 수하가 영포에게 가 설득하여, 과연 초를 배반하게 했다.
5월, 한왕이 형양(滎陽)에 주둔하매, 소하는 관중의 노(老)나 약(弱)으로 군적(軍籍)에 들어있지 않은 자를 모두 내어 군에 나가게 했다. 한신 또한 병사를 거두어 한왕과 합치니, 군세(軍勢)가 다시 크게 떨쳤다. 초와 더불어 형양 남쪽 경(京)과 색(索) 사이에서 싸워 격파했다. 길에 담을 쌓아 하수(河水)에 잇고, 오창(敖倉)의 곡식을 취杉? 위왕 표가 고향에 돌아가 어미의 병을 살피길 청했다.
(표가 고향에) 이르러 하수의 나루를 끊어 버리고, 배반하여 초의 편에 붙었다.
6월, 한왕이 역양(?陽)으로 돌아왔다. 임오(壬午)일, 태자(효혜제)를 세우고 죄인을 사면했다. 제후의 자식 둥 관중에 있는 자는 모두 역양에 불러모아 호위하게 했다. 물을 끌어다 폐구(廢丘)에 물을 대니, 폐구는 항복하고, 장한(章邯)은 자살했다. 옹(雍) 땅이 평정되니, 그 80여 현에 하상(河上), 위남(渭南), 중지(中地), 농서( 西), 상(上)군을 두었다.(장한은 옹왕으로 도읍이 폐구였다)
사관(祠官)에게 영을 내려 천지사방과 상제(上帝), 산천(山川)에 제사지내게 하되, 때에 맞춰 제사지내게 했다. 관중의 병사를 일으켜 변경의 요새를 수비하게 했다. 관중이 크게 굶주리매, 쌀 한 휘(斛; 10말)에 1만 전(錢)이나 되고, 사람들이 서로 작아먹기에 이르렀다. (관중의)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촉한(蜀漢)에 가서 먹게(기아를 해결하게) 하였다.
가을 8월, 한왕이 형양으로 가서 역이기에게 이르길, “위왕 표에게 가서 천천히 비유로 그를 설복시켜 능히 그를 항복시킬 수 있다면, 선생을 위의 땅 만 호(戶)에 봉할 것이오”라 했다. 역이기가 갔으나, 표가 듣지 않았다. 한왕이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고, 조참(曹參), 관영(灌孀)과 함께 표를 쳤다. 역이기가 돌아오니, 한왕이 묻기를 “위의 대장이 누군가?”라 하니, 대답하길 “백직(柏直)입니다”라 했다. 왕이 “입에서 아직도 젖비린내가 나니(口尙乳臭), 한신을 당해낼 수 없다.
기병장군은 누군가?”라 물으니, “풍경(馮敬)입니다”라 했다. 말하길 “그는 진의 장수 풍무택(馮無擇)의 아들인데, 비록 현명하다 해도 능히 관영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보병장군은 누군가?”라 하니, “항타(項 )입니다”라 답했다. 왕이 말하길 “그는 능히 조참을 당해낼 수 없다. 내겐 아무런 걱정이 없구나”라 했다.
9월, 한신 등이 위왕 표를 사로잡고 (그를) 형양으로 옮겨 보냈다. 위의 땅을 평정하고, 거기에 하동(河東), 태원(太原), 상당(上黨)군을 두었다. 한신이 사람을 보내 3만 병사를 청하면서, 북으로 연과 조를 일으키고, 동으로 제를 치며, 남으로 초의 보급로를 끊을 것을 원하였다. 한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한왕 3년(BC 204) 겨울 10월, 한신과 장이가 동쪽으로 내려가 정형(井 )에서 조를 쳐서, 진여 (陳餘)를 참살하고 조왕 헐을 사로잡았다. (조 땅에) 상산(常山), 대(代)군을 두었다.
11월 갑술(甲戌)일, 날이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수하가 이미 경포를 설득시켜서, 경포가 병사를 일으켜 초를 공격했다. 초가 항성(項聲)과 용저(龍且)에게 경포를 공격케 하니, 경포가 싸웠지만 이기지못했다.
12월, 경포가 수화와 더불어 사잇길로 와서 한에 귀의했다. 한왕이 그에게 병사를 나눠주고, 더불어 같이 병사를 거두어 성고(成皐)에 이르렀다.
항우가 여러차례 한군의 길목을 침입하여 빼앗으니, 한군은 군량이 모자르게 되어 (한왕은) 역이기와 더불어 초의 힘을 약하게 할 모의를 했다. 역이기는 육국(六國; 전국시대의 칠국 중 진(秦)을 제외한 초, 제, 위, 조, 한, 연나라)의 후손들을 세워, 그 무리들을 거두고자 하니, 한왕이 인(印)을 새겨 장차 역이기를 보내 그들을 세우고자 했다. (이 계책을) 장량에게 물으니, 장량이 여덟 가지 어려움을 들었다. 한왕이 밥숟가락을 놓고 입안의 음식물을 토해내며 말하길, “물정 모르는 유생이 그대와 나의 일을 망칠 뻔했구나!”라 했다. 급히 그 인을 도로 녹이게 했다. 또 진평에게 물어 이에 그의 계책을 따라, 진평에게 황금 4만근을 주며 초의 군신(君臣) 사이를 소원하게 했다.
여름 4월. 항우가 형양에서 한을 포위하니, 한왕이 형양을 중심으로 나눠 그 이서(以西) 지역을 한에 속하게 하자고 화해를 청했다. 범증이 항우에게 급히 공격하라고 권하였으나, 항왕은 이를 부정했다. 진평의 반간계(反間計)가 이미 행해져, 항우는 과연 범증을 의심했다. 범증이 크게 노하여 떠나버리고, 병이 나 죽었다.
5월, 기신(紀信) 장군이 말하길, “일이 급하옵니다. 신이 초를 속이고 있는 사이에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진평이 밤에 여자 2천명을 동문으로 내보내니, 초가 이 때문에 사면에서 그들을 공격했다. 기신이 왕의 수레를 타고, (수레에) 누런 비단을 씌우고 왼쪽에 깃발을 매달아 놓고, 이르길 “식량이 다하여 한왕이 초에 항복한다.”라 했다. 초의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의 동쪽으로 가 (그 모습을) 바라보니, 이로 인해서 한왕이 수십 기(騎)와 더불어 서문을 나와 달아날 수 있었다.
어사대부 주가(周苛), 위표(魏豹), 종공(索公)에게 형양을 지키게 했다. 항우가 기신을 보고 “한왕은 어디 있는가?” 라 물으니, “이미 성을 빠져나가셨소”라 답했다. 항우가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주가와 종공이 서로 말하길 “(위표는 이미 한번) 나라를 배반한 왕이었으니, 같이 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이에 위표를 죽였다.
한왕이 형야에서 나와 성고에 이르렀다. 성고로부터 관에 들어가 병사를 거두어 다시 동쪽을 치고자 했다. 원생(轅生)이 한왕에게 말하길 “한과 초가 서로 여러 해 동안 형양에서 겨루었으나, 한이 늘 곤란하였습니다. 원컨대 군왕(君王)께서 무관을 나오시면, 항왕은 반드시 병사를 이끌고 남으로 달려 올 것이니, 왕은 성벽을 깊이 파고, 형양과 성고 사이에서 또 (병사들을) 쉬게 하십시오. 한신 등에게 하수 북에서 조의 땅을 화평하게 하고, 연과 제를 연결케 하신 후, 군왕께서 다시 형양으로 가십시오. 일이 이와 같이 된다면, 초는 막아야 할 곳이 많아져, 힘이 나눠집니다. 한은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초와 싸우면, 반드시 초를 격파할 것입니다.”라 했다. 한왕이 그 계책을 따라 완(宛)과 섭(葉) 사이에서 진을 치며, 경포와 더불어 가면서 병사를 거두었다.
항우가 한왕이 완에 있다는 것을 듣고, 과연 병사를 이끌고 남으로 오니, 한왕은 성벽을 견고히 하여 싸우지 않았다. 이 달(5월)에 팽월이 수수(수水)를 건너, 항성(項聲) 설공(薛公)과 하비(下비 )에서 싸워 격파하고 설공을 죽였다. 항우가 종공(終公)에게 성고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동으로 팽월을 쳤다. 한왕이 병사를 이끌고 북으로 가, 종공을 파하고 다시 성고에 진을 쳤다.
6월, 항우가 이에 팽월을 격파하고 패주시켰는데, 한이 다시 성고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주가를 사로잡았다. 항우가 주가에게 말하길 “나의 장수가 되어 준다면, 공을 상장군으로 삼고, 3만호에 봉하겠다.”라 했다. 주가가 꾸짖어 말하길 “네가 빨리 한에 항복치 않아서, 지금 내가 포로가 된 것이다. 너는 한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라 했다.
항우가 주가를 삶아 죽이고, 아울러 종공을 죽였고, 한왕(韓王) 신(信)을 사로잡고는 드디어 성고를 포위했다.
한왕이 달아나면서, 홀로 승공(勝公)과 더불어 같이 수레를 타고 성고의 옥문(玉門)을 나와, 북으로 하수를 건너 소수무(小修武)에서 잤다. (한왕이) 사자라고 자칭하고, 새벽에 장이와 한신이 있는 성벽으로 들어가 그들로부터 군대를 빼앗았다. 이에 장이에게 북쪽에서 조나라 지역의 병사를 거두게 했다.
가을 7월, 혜성이 대각(對角)자리에 나타났다. 한왕이 한신의 군대를 얻어 다시 크게 떨쳤다.
8월, 하수에 임하여 남쪽으로 향하여, 소수무에 진을 치며 다시 싸우고자 했다.
낭중 정충(鄭忠)이 한왕에게 (전투는) 그치고, 보루를 높이 쌓고 참호를 깊이 파고 싸우지 말라고 했다. 한왕이 그 계책을 듣고는, 노관(盧관)과 유가를 보내 군졸 3만 명과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백마진(白馬津)을 건너 초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니, (노관과 유가가) 팽월을 도와 초가 모아놓은 군량을 불지르고, 다시 초군을 연(燕) 현의 성곽 서쪽에서 격파하고, 수양(수陽)과 외황(外黃)의 70성을 공격해 항복시켰다.
9월, 항우가 해춘후(海春侯)인 대사마 조구(曹咎)에게 이르길 “삼가하여 성고를 지켜라. 곧 한왕이 도전코자 하면, 삼가 같이 싸우지 말고, (한왕이) 동쪽으로 갈 수 없게 하라. 내가 보름 안으로 반드시 양(梁) 지역을 평정하고, 다시 장군에게 오리라”고 했다. 항우가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팽월을 쳤다. 한왕이 역이기에게 제왕 전광(田廣)에게 수비병을 파하고 한과 화친하도록 설득하게 했다.
한 4년(BC 203) 겨울 10월, 한신이 괴통의 계책을 써서 제를 기습하여 격파했다.
제왕은 역생(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동으로 고밀(高密)로 달아났다. 항우가 한신이 제를 격파하고 또 초를 치고자 한다는 것을 듣고, 용저(龍且)에게 제를 구원하게 했다.
한이 과연 여러번 성고를 도발하였으나, 초군이 나오지 않자 군졸을 시켜 수일 동안 성고에 욕설을 하게 했다. 대사마 조구가 노하여, 병사들에게 사수(사水)를 건너게 했다. 병사들이 반쯤 건넜을 때, 한이 초를 쳐서 초군을 크게 격파하고, 초의 금과 옥, 재물을 모두 얻었다. 대사마 조구와 장사(長史;관명) 흔(欣)이 사수 위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한왕이 병사를 이끌고 하수를 건너 다시 성고를 취하고, 광무(廣武)에 진을 치며, 오창(敖倉)에 나아가 군량을 해결했다.
항우가 양 지역의 10여 성을 항복시켰는데, 해춘후(조구)가 격파되었단 소식을 듣고, 이에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한군은 마침 형양 동쪽에서 종리매(鍾離昧)를 포위했는데, 항우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자, 모두 험준한 곳으로 달아났다. 항우 또한 광무에 진을 치고, 한과 서로 대적했다. 장정들은 군역(軍役)에 고달파하고, 노약자들은 먹을 것을 찾아 옮겨갔다. 한왕과 항우가 서로 광무 사이에 사이에 임해서 말을 했다.
항우가 한왕과 더불어 단신으로 싸우고자 하니, 한왕이 항우를 꾸짖으며 말하길 “나는 처음에 너와 더불어 회왕의 명을 받았는데, (회왕이) 먼저 관중을 평정한 자가 왕이 된다고 말하였다. 너는 약속을 저버리고, 나를 촉한의 왕으로 삼았으니, 그 죄가 하나다.
너는 (왕명을) 핑계삼아 경대부인 공자(公子)들과 장수들을 죽이고 스스로를 높였으니, 그 죄가 둘이다.
너는 마땅히 조를 구하고 돌아서는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으나, 제 마음대로 제후와 병사들을 위협해 관으로 들어왔으니, 그 죄가 셋이다.
회왕께서는 진(秦)에 들어가 약탈과 폭력이 없게 한다고 약속하였는데, 너는 진의 궁실을 불태우고, 진시황의 무덤을 파해쳐, 사사로이 그 재물들을 거두어 들였으니, 그 죄가 넷이라.
또 진의 항복한 왕인 자영(自孀)을 억지로 죽였으니, 그 죄가 다섯이다.
신안(新安)에서 진의 자제 20만 명을 속여 파묻어 버렸으면서도, 그 장수(장한)를 왕으로 삼으니, 죄가 여섯이라.
모든 왕과 제후들이 제 땅을 잘 다스리는데, 옛 주인을 옮겨 쫓아내고 (그들의) 신하들이 다투어 반역하게 했으니, 그 죄가 일곱이다.
의제(회왕)를 팽성에서 내쫓고는 스스로 거기에 도읍하였으며, 한왕(韓王)의 땅을 빼앗고 아울러 양과 초의 왕이 되어서, 스스로에게 준 것이 많은 많으니, 그 죄가 여덟이다.
사람을 시켜 몰래 의제를 강남에서 시해하였으니, 그 죄가 아홉이다.
무릇 신하된 자로서 그 주인을 죽이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다스림은 공평하지 않아 주인의 약속이 믿지 못하게끔 되니, (이는) 천하가 용납하지 못하는 바이며, 대역무도(大逆無道)하니 그 죄가 열이라.
나는 의로운 병사를 이끌고 제후들을 따라서 잔적(殘賊)들을 주살하였는데, 형(刑)이 남은 죄인들에게 그대를 치게 하였으니, 이에 그대와 더불어 싸운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라 했다.
항우가 크게 노하여 엎드려 쇠뇌를 쏴서 한왕을 맞추었다. 한왕이 가슴에 상처를 입었으나 다리를 어루만지며 말하길 “저 오랑캐 같은 놈이 내 발가락을 맞추었다”라 했다. 한왕이 병이 심해져 드러누웠으나, 장량이 한왕이 일어나 군대를 위로하며 병사들을 안정시켜, 초가 승세를 타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청했다. 한왕이 군사들 사이로 나와 다녔지만, 병이 심해지니, 이 때문에 성고로 들어갔다.
11월, 한신이 관영(灌孀)과 더불어 초군을 격파하고, 초의 장수 용저를 죽이고는, (패잔병을) 추격하여 성양(城陽)에 이르러, 제왕 전광을 사로잡았다. 제의 상(相)인 전횡(田橫)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제왕이 되어, 팽월에게 달아났다. 한이 장이를 세워 조왕으로 삼았다.
한왕의 병에 차도가 있자, 서쪽으로 관으로 들어가 역양(?陽)에 이르러선 부로들의 안부를 묻고, 술을 베풀었다. 옛 새왕(塞王) 사마흔의 머리를 역양의 저자거리에 효수(梟首)하였다. 나흘을 머물고, 다시 군진으로 가, 광무에 진을 쳤다. 관중의 병사들이 더욱 많이 나오고, 팽월과 전횡이 양에 땅에 머물면서, 오가며 초군을 괴롭히고 그 보급로를 끊었다.
한신이 이미 제를 격파하고 사람을 보내 말하길 “제는 초와 경계하고 있는데, 신의 권한은 가벼워, 임시로라도 왕이 되지 못하면, 능히 제를 안정시킬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한왕이 노하여 그를 공격하고자 하니, 장량이 말하길 “(차라리) 이로 인해서 그를 왕으로 세우는 것만 한 게 없으니, 스스로 (왕이 되어) 지키게 하십시오”라 했다.
봄 2월, 장량에게 인(印)을 가지고 보내, 한신을 세워 제왕으로 삼았다.
가을 7월, 경포를 세워 회남왕(淮南王)으로 삼았다.
8월, 처음으로 산부(算賦)를 내게 했다. 북맥(北貊)과 연나라 사람들이 와서 용맹스런 기병으로 한을 도왔다. 한왕이 영을 내려 군사들 둥 불행히 죽은 자는 관리가 옷을 지어 관(棺)에다 시체를 염습해서 그 집에 보내주게 했다. (이 때문에) 사방의 민심이 (한에) 귀의했다
항우가 스스로 (주위의) 도움은 적고, 군량이 다했음을 알고 있는데, 한신이 또 병사를 진군시켜 초를 치니, 항우가 이를 걱정했다. 한왕이 육가(陸賈)에게 항우를 설득해 태공(太公;한왕의 아버지)을 청해 데려오고자 했으나, 항우가 듣지 않았다.
한이 다시 후공(侯公)에게 항우를 설득케 하니, 항우가 이에 한과 더불어 약속하길, 천하를 가운데로 나누어 홍구(鴻溝)를 나눠 그 이서를 한이 되게 하고, 그 이동은 초가 되게 했다.
9월, 태공과 여후(呂后)가 돌아오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에 후공을 봉하여 평국군(平國君)으로 삼았다. 항우가 병사를 풀고 동으로 돌아갔다. 한왕이 서쪽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장량과 진평이 간언하길 “지금 한에는 천하의 태반이 있고, 제후들은 모두 귀부(歸附)했으며, 초의 병사들은 피곤하고 식량이 다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초를) 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이 (초의) 위태로움을 말미암아 끝내 (초를) 취하시지 않으면, 이것은 소위 범을 길러 우환을 남기는 것입니다”라 했다. 한왕이 이 간언을 따랐다.
한(漢) 5년(BC 202), 겨울 10월, 한왕이 항우를 추격해 양하(陽夏) 남쪽에 이르러 군대를 멈추고, 제왕(齊王) 한신(韓信) 위(魏) 상국 팽월(彭越)과 만나 초를 치기로 기약했는데, 고릉(固陵)에 이르렀으나 만나지 못했다. 초가 한군을 쳐서 크게 격파했다. 한왕이 다시 성벽으로 들러가, 참호를 깊이 파고 수비했다.
장량에게 이르길 “제후들이 따르지 않으니 어찌하오?”라 하자, 장량이 대답하길 “초의 병사는 또한 크게 격파되었고 (그들에겐) 더 이상 분봉받은 땅이 없으니, 따르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군왕께서 능히 천하를 같이 가지시려면, 그들을 제왕(帝王)의 위에 세우셔야 합니다. 제왕 한신이 왕위에 오른 것은 군왕의 뜻이 아니었기에, 스스로 견고히 (약속을 따르지) 않습니다. 팽월은 본래 양(梁)의 땅을 평정했는데, 군왕께서는 처음에 위표(魏豹)의 일 때문에 팽월을 배(拜)하여 상국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위표는 죽었고, 팽월 또한 왕위를 바라고 있는데, 군왕께서는 일찍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수양(수陽) 이북부터 곡성(穀城)에 이르는 땅 전부로 팽월을 왕으로 삼으시고, 진(陳)이동부터 바다까지 땅을 제왕 한신에게 주십시오. 한신은 (자기의 옛) 집이 초에 있기에, 자기의 옛 고을을 다시 얻으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땅을 내어 주며 두 사람에게 허락하셔서, 각자가 싸우게 하신다면 초는 쉽게 패할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한왕이 사신을 한신과 팽월에게 보냈다. (사신이)이르니, 모두 병사를 이끌고 왔다.
11월, 유가(劉賈)가 초의 땅에 쳐들어가 수춘(壽春)을 포위했다. 한이 또한 사람을 보내 초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유혹했다. 주은이 초를 배반하고, 서(舒)의 군대로 육(六)현을 도륙해 격파하고, 구강(九江)의 병사를 들어 경포를 맞이하니, 같이 행군해 성보(城父)를 도륙하고, 유가를 따라 모두 모였다.
12월,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포위했다. 항우가 밤에 한군의 사면에서 모두 초나라 노래소리가 나는 것을 듣자(四面楚歌), (한이) 초의 땅을 다 얻었음을 알고 수백 기(騎)와 더불어 달아니, 이에 초군이 크게 패하였다. 관영(灌孀)이 항우를 추격해 동성(東城)에서 베어 죽였다.
초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직 노(魯)나라 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한왕이 천하의 병사를 이끌고 노를 도륙하고자 하였으나, (노가 항복치 않은 까닭은) 예의의 나라로 절개를 지키기 위함이(라 하)니, 이에 항우의 머리를 들어 노의 부형(父兄)들에게 보이니, 노가 그제야 항복했다. 처음에 회왕(懷王)이 항우를 노공(魯公)에 봉했었는데, (항우가) 죽기에 이르자, 노 또한 항우를 위해 굳게 지킨 것이어서, 항우를 노공으로서 곡성(穀城)에 장사지냈다. 한왕이 발상을 하고 곡을 한 후에 떠났다.
항백(項伯) 등 4명을 열후(列侯)에 봉하고, 유씨 성을 하사했다. 여러 백성들이 초를 약탈하고 (아직) 초에 있는 자는 모두 돌아가게 했다. 한왕이 돌아와 정도(定陶)에 이르러 제왕 한신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 그의 군대를 빼앗았다. 처음 항우가 왕으로 세운 임강왕(臨江王) 공오(共敖)가 전일에 죽었는데, 그의 아들 공위(共尉)를 후사(後嗣)로서 세워 왕으로 삼았으나, (공위는) 항복하지 않았다.
노관(盧 )과 유가를 보내 공위를 쳐서 사로잡게 했다.
봄 정월, 형인 유백(劉伯)을 추존해 호(號)를 무애후(武哀侯)라 했다. 영을 내려 이르길, “초의 땅은 이미 평정되었고, 의제(義帝)는 돌아가신 후라 초의 백성들을 보존하고 진무(賑撫)하기 위해 그 주인을 정하고자 한다. 제왕 한신은 초의 풍속을 익혔으니, 다시 그를 세워 초왕으로 삼으니, 회북(淮北)을 다스리고 도읍을 하비(下비)로 하라. 위의 상국 건성후(建性侯) 팽월은 위의 백성과 휘하의 군사들을 위해 힘써 애썼고, 늘 적은 군대로 많은 무리를 쳐서 수차례 초군을 격파하였으니, 위의 옛 땅에 그를 왕으로 삼고, 호칭을 양왕(梁王)이라 하며, 정도(定陶)에 도읍하라”고 했다. 또 가로되 “병사들은 8년이나 쉬지 못했고, 만백성들은 심하게 고생을 함께 하였는데, 이제 천하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천하의 사죄(死罪) 이하의 죄수는 사면하라”고 했다.
이에 제후들이 상소(上疏)하여 이르길 “초왕 한신, 한왕(韓王) 신(信), 회남왕(淮南王) 영포 (英布), 옛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조왕 장오(張敖), 연왕 장도(臧 )는 몽매하여 감히 죽을 죄를 범하여 거듭 절하며(昧犯死罪 ; 진(秦)나라 때 신하가 왕에게 말할 때 쓰는 일반적인 수식어 비슷한 것인데, 한나라도 이런 표현을 따른 것이다) 말씀드리니.. 대왕폐하 이전에 진이 도(道)를 잃자 천하가 진을 주살하였습니다. 대왕께선 먼저 진왕을 얻고 관중을 평정하였으니, 천하에 공이 가장 많으십니다. 망한 것을 보존하고 위급한 것을 안정시켰으며, 쇠패(衰敗)함을 구제하시고 끊어진 것을 이으시며, 만백성을 편안케하셨으니, 그 공은 융성하고 덕은 두텁습니다. 또한 제후와 왕 중 공이 있는 자에게 은혜를 더하시어, 사직을 세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천하의) 땅은 분봉되어 이미 정해졌으나, 그 지위와 호칭을 견주어 본 즉(한왕 자신이나 제후왕이나 다 같이 왕이라 칭하고 있음을 말한다) 상하의 본분을 잃었으니, 대왕의 공덕은 저명하나 후세에는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몽매하여 감히 죽을 죄를 범하며 거듭 절하며 황제(皇帝)란 존호를 올립니다”라 했다.
한왕이 가로되 “과인은 황제는 어진 자 중에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대들이) 헛되이 실상을 잃은 이름을 말하니, 취할 바가 아니다. 지금 제후왕들이 모두 과인을 높이 밀어 올리니, 장차 과인이 어찌 처신하겠는가?”라 했다.
제후왕들이 모두 이르길 “대왕께서 작고 미천한 곳(細微)에서 일어나, 어지러운 진을 멸하셨으니, 그 위엄은 해내(海內 ; 천하)를 진동시킵니다. 또한 편벽되고 누추한 땅인 한중(漢中)에서부터 위의(威儀)와 덕을 행하시고, 의롭지 않은 자를 주살하시며, 공이 있는 자는 세우고, 해내를 평정시키어, 공신들이 모두 땅과 식읍(食邑)을 받았으니, 이는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사해(四海 ; 천하)에 덕을 베푸셨는데, 제후왕들이 이런 것을 말하기조차 족하지 않습니다.
황제의 위에 오르심이 매우 실로 마땅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천하를 다행케 해 주십시오”라 했다.
이에 제후왕 및 태위(太尉) 장안후(長安侯)인 신하 노관(盧 ) 등 3백인과 박사(博士) 직사군(稷嗣君) 숙손통(叔孫通)이 삼가 길일로 2월 갑오일을 택해 존호를 올렸다. 한왕이 범수 (氾水)의 북쪽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왕후(呂后)를 올려 황후(皇后)라 하고, 태자를 올려 황태자라 하였으며, (돌아가신) 모친을 추존해 소령부인(昭靈夫人)이라 했다.
조칙(詔勅)을 내려 가로되 “옛 형산왕 오예와 그의 두 아들, (오예) 형의 아들 한 명은 백월(白越 ; 여러 오랑캐(百蠻)라는 뜻이지, 특별한 지명은 아니다<– 이것은 한서에 딸려 있던 주이다. 근데 오예가 주로 활동하던 지역이 옛 월나라 지역과 겹치므로 굳이 이것이 지명이 아니라고 볼 수도 없다.)의 병사를
따라, 제후를 돕고 난폭한 진을 주살하는데 큰 공이 있으니, 제후들이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항우가 그의 땅을 침입해 빼앗고는, 그를 번군(番君)이라 일렀다.
장사(長沙) 예장(豫章) 상군(象郡) 계림(桂林) 남해(南海)의 땅에 번군 오예를 세워 장사왕으로 삼으라” 고 하고, 또 이르길 “옛 월왕(越王) 망제(亡提)는 대대로 월나라의 제사를 받들었는데, 진이 그 땅을 침입해 빼앗아, (월나라의) 사직이 날고기(血食 ; 제사때 음식)를 얻지 못하게 했다. 제후들이 진을 정벌하매, 망제는 스스로 민중(민 中)의 병사를 거느리고 진을 멸하는 것을 도왔는데도, 항우는 그를 폐(廢)하여 (왕위에) 세우지 않았다. 지금 그를 민월왕(민越王)으로 삼아, 민중 땅의 왕이 되게 하고, 다시는 그 직위를 잃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황제가 이에 서쪽 낙양(洛陽)에 도읍했다.
여름 5월, 병사들이 모두 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제후의 자식으로 관중에 있는 자는 12년간 요역( 役)을 면하게 하고, 돌아간 자는 그 반만 면하게 하라. 백성들이 이전에 (난을 피해) 혹 산이나 못(山澤)에 모여 살며 (목숨을) 보존하다 명수(名數 ;호적戶籍)에 기록되지 못하였는데, 이제 천하는 이미 안정되었으니, 영을 내려 각자 제가 살던 현(縣)으로 돌아가게 하고, 옛 작위(爵)와 전택(田宅)을 돌려주며, 관리들은 법조문으로 그들을 깨우쳐 알려주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백성들이 굶주림 때문에 스스로를 팔아 남의 노비가 된 자는 모두 면(免)하여 서인으로 삼아라. 군대의 관리나 병종들은 모아 사면하되, 죄는 없지만 제 작위를 잃은 자 및 (작위가) 대부에 미치지 못한 자는 모두 작을 하사하여 대부로 삼으라. 예전에 대부 이상이던 자는 각각 작 1급(級)씩 하사하되, 칠대부(七大夫 ; 공대부公大夫와 같고 7번째 작위이다) 이상이면, 모두 식읍을 주고, 칠대부가 아닌 그 이하인 자에게는 모두 자신과 제 집안의 요역을 면하게 해주고, 사역(使役)을 시키지 말라” 고 했다.
또 이르길 “칠대부 공승(公乘 ; 8번째 작위) 이상은 모두 그 작을 높여주라.
제후의 자식 및 종군(從軍)하다 돌아간 자는 그 관직을 그 작을 매우 많이 높여주라. 내가 수차례 관리들에게 먼저 전택을 주라고 조칙을 내렸으니, 관리 중(전택을) 구하는 것에 해당하는 자에겐 급히 주라. 관작이 혹 인군(人君 ; 작위가 높아 국읍(國邑)이 있어, 그 나라 사람들의 임금이 되는 자라 해서 인군이라 부른다)인 자는 상(上 ; 천자)이 예를 존중하는 바인데, (그 인군들 중 송사나 청할 것이 있는 자가) 오래동안 관리 앞에 서 있는데도 빨리 결정치 않으니, 심히 뭐라 할 말도 없다. 지난 날, 진의 백성 중 작이 공대부(=칠대부) 이상인 자에게는 영승(令丞)이 합당한 예로 대해 주라. 지금 내가 작위에 있어서 가벼이 여김이 없는데, 관리들은 어찌 독단적으로 작위의 법을 가벼이 여기는가! 또한 법에 공로가 있는 자에겐 전택을 주었고, 지금 작은 관리들이 일찍이 종군하지 않은 자는 대가 스스로 만족하고 마는데, 공이 있는 자가 (자신은) 얻지 못했음을 돌이켜 보고는 공(公)을 배반하고 사사로움을 세우니, 각 군수(郡守)와 군위(郡尉) 및 장리(長吏 ; 현의 영장令長)들은 그 옳지 못함을 깨우쳐 주어라. 여러 관리에게 영을 내려 높은 작위에 잘 합치해, 짐의 뜻에 부합되게 하라. 또한 살펴 물은 즉, 내 조칙과 같게 하지 않은 자가 있다 하니, 그를 무겁게 논죄하라”고 했다.
황제가 낙양궁( 陽宮)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상이 “통후(通侯 ; 그 공덕이 왕실에 통(通)하는 제후라는 의미이다. 옛날에는 철후(撤侯)라 했으나 무제(武帝)의 휘(諱; 이름)가 철(徹)이라서 ‘철’이란 글자를 피해서 ‘통’이라 했다. ‘통’이나 ‘철’이나 ‘통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황제의 휘를 피하는 것을 기휘(忌諱)라 한다.
나중에 고쳐 열후列侯라 불렀다.)나 여러 장수들은 감히 짐(朕 ; 황제가 자신을 이를 때 쓴다. 제후나 왕은 과인(寡人)이라 표현한다)에게 숨김없이, 모두 제 생각을 말하라. 내가 천하를 가진 까닭은 무엇인가?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라 물었다.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대답하길 “폐하(신하가 황제를 말할 때 폐하(陛下)라 하고, 제후나 왕을 말할 때는 전하(殿下)라 한다)께서는 남을 가벼이 없신여기시지만, 항우는 남을 인자하게 공경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사람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아(攻城略地) 항복하게 만든 자에게는, 그로 인하여 땅을 주고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함께 하십니다. 항우는 어진 자를 시샘하고 능력있는 자를 질시하며, 공이 있는 자를 해치고, 어진 자를 의심하며, 전투에 이기면 남에게 공을 주지 않고, 땅을 얻으면 남에게 그 이로움을 주지 않으니, 이것이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라 했다.
상이 말하길 “공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른다. 무릇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運籌) 천리 밖의 싸움을 이기게 하는 것은 내가 자방(子房 ; 장량)만 못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보급해 보급로가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며, 백만의 군대를 이끌어,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것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인데, 나는 능히 이들을 쓸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취한 까닭이다. 항우에겐 오직 범증(范增) 한 사람만 있었는데, 그를 제대로 쓰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항우가) 내게 사로잡힌 꼴이 된 까닭이다” 라 했다.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며 그 말에 복종했다.
처음에 전횡(田橫)이 팽월에게 귀의(歸依)했다. 항우가 이제 망하니, 전횡은 주살될까 두려워, 빈객(賓客)들과 더불어 바다로 도망쳐 들어갔다. 상이 그 일이 오래되면 난(亂)이 될까 염려하여, 사자를 보내 전횡을 사면하며 이르길 “전횡이 온다면 크게는 왕이요 작게는 제후로 삼을 것이나, 오지 않는다면 병사를 내어 주살하리라”고 했다. 전횡이 무서워 수레를 타고 낙양으로 향하는데, (낙양까지) 30리에 채 못 미쳐 자살하였다. 상이 그 절개를 장하게 여겨, 눈물을 흘리며 병졸 2천 명을 내어 왕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수졸(戍卒 ; 의무적인 국경수비인 군역(軍役)을 수(戍)라 한다) 누경(婁敬)이 알현하길 원하여 상에게 말하길 “폐하께서 천하를 취하셨지만, 주나라와 달리 낙양에 도읍하시니(주의 도읍인 호경(鎬京), 진의 도읍인 함양(咸陽), 나중에 도읍한 장안(長安)등은 모두 같은 곳으로 관중에 있는데, 지금은 관중 동쪽, 특히 함곡관 동쪽 낙양에 도읍했음을 말한다), 불편하고 (차라리) 관중에 들어가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진의 견고함에 의지하소서”라 했다. 상이 장량에게 물은 즉, 장량이 이로 인하여 상에게 (천도遷都)를 권했다. 이 날, 거가(車駕 ; 천자가 타는 수레)를 서쪽으로 향하여 장안(長安)에 도읍했다. 누경을 배(拜)하여 봉춘군(奉春君)으로 삼고, 유씨 성을 하사했다.
6월 임진일,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가을 7월, 연왕 장도(臧 )가 반란을 일으키니, 상께서 스스로 장차 그를 정벌하려 했다.
9월, 장도를 사로잡았다. 제후왕에게 영을 내려 공이 있는 자 중에서 세워 연왕으로 삼을 만한 자를 살펴 보게 했다. 형왕(荊王=초왕楚王) 신 한신 등 열명이 모두 이르길 “태위 장안후(長安侯) 노관(盧관)이 공이 가장 많으니, 청컨대 그를 세워 연왕으로 삼으소서”라 했다. 승상 번쾌에게 병사를 이끌고 대(代)의 땅을 평정하게 했다.
이기(利幾)가 반란을 일으키니, 상이 직접 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기는 항우의 장수였다. 항우가 패망할 때, 이기는 진(陳)의 영(令)이었는데 항복하니, 상이 그를 영천(穎川)의 후(侯)로 삼았었다. 상이 낙양( 陽)에 이르러 통후(열후)의 명부(籍)를 들어 그를 소환하니, 이기가 두려워하다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후(後) 9월(윤閏 9월), 제후의 자식들을 관중으로 옮겼다. 장락궁(長樂宮)을 수리했다.
한 6년(BC 201) 겨울 10월, 영을 내려 천하의 현과 읍에 성을 쌓게 했다.
사람들이 초왕 한신이 모반한다고 고하자, 상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좌우의 신하들이 다투어 그를 치고자 했다. 진평(陳平)의 계책을 써서 거짓으로 운몽(雲夢)에 놀러갔다.
12월, 제후들을 진(陳)에 모이게 하니, 초왕 한신이 (상을) 영접하여 알현하매, 이로써 그를 잡았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천하가 이미 안정되어서, 호걸로서 공이 있는 자는 제후에 봉하거나 새로이 세웠지만, 아직도 그 공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제 몸이 군중(軍中)에 9년이나 있어서, 혹 아직 법령을 익히지 못하고, 혹 그 때문에 법을 범하여 크게는 사형을 당하니, 나는 이를 매우 가련히 여긴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라”고 했다.
전긍(田肯)이 상에게 하례(賀禮)드리며 이르길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폐하께선 한신을 잡으셨고, 또한 진중(秦中=관중)에 도읍하셨습니다. 진의 형세는 이기기 편한 나라로, 하수(河水=황하)를 두르고 험한 산이 있고, (다른 제후들의) 현과는 천리나 떨어져 있어, 창을 쥐면 백만을 당해내니, 진은 1백만 명에 대해서 2만명만 얻어도 됩니다.(秦得百二) 지세가 편리하고 제후들에게 병사를 내는 것이, 비유컨대 높은 집 위에서 병에 찬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무릇 제나라는 동쪽으로 낭야(琅邪) 즉묵(卽默)의 풍요로움이 있고, 남으론 태산(泰山)의 견고함이 있으며, 서쪽엔 탁하(濁河)의 경계가 있으며, 북으로는 발해(勃海)의 이로움이 있는데다, 땅은 사방 2천리요, 창을 쥐며 백만을 당해내고, 다른 현과는 천리 밖에 떨어져 있으니, 제는 1백만 명에 대해서 20만만 얻으면 됩니다. 이것은 동서(東西)의 진(秦)입니다(제나라를 동쪽의 진나라라고 표현한 말이다). 친자제가 아니면 제의 왕이 되게 하시면 안됩니다”라 했다. 상이 “옳도다”라 하고, 황금 5백근을 하사했다. 상이 돌아와 낙양에 이르러 한신을 사면하고, 그를 봉하여 회음후(淮陰侯)로 삼았다.
갑신일, 비로소 부절(符節)을 쪼개고 공신 조참(曹參) 등을 봉하여 통후로 삼았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제는 옛날에 세워진 나라였으나, 지금은 군현(郡縣)이 되었으니, 다시 제후국으로 삼아라. 장군 유가(劉賈)는 여러차례 큰 공이 있고, 또한 관대함과 은혜를 가리고 고결(高潔)함을 수양한 자이니, 제와
형(荊) 땅의 왕이 되게 하라”고 했다.
봄 정월 병오일, 한왕(韓王) 신(信) 등이 옛 동양군(東陽郡) 장군( 郡) 오군(吳郡)의 53개현에 유가를 세워 형왕(荊王)으로 삼고, 탕군(탕郡) 설군(薛郡) 담군( 郡)의 36현에 아우인 문신군 (文信郡) 교(交)를 세워 초왕(楚王)으로 삼도록 주청했다.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군(代郡)의 53현에 형인 의신후(宜信侯) 희(喜)를 세워 대왕(代王)으로 삼고, 교동(膠東) 교서(膠西) 임치(臨淄) 제북(濟北) 박양(博陽) 성양군(城陽郡)의 73현에 아들 비(肥)를 세워 제왕으로 삼으며, 태원군(太原郡) 31현을 한국(韓國)으로 삼고 한왕 신을 옮겨 진양(晉陽)에 도읍케 했다.
상께서 이미 큰 공신 20여 명을 봉하였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공을 다투며, 봉해지지 못하였다. 상이 남궁(南宮)에 거처했는데, (위 아래로)왕복하는 길로부터 위쪽으로 가다 여러 장수들이 이따금씩 마주보며 얘기하는 것을 보고 장량에게 물었다. 장량이 말하길 “폐하께서 이들과 함께 천하를 취하시어 이제 천자(天子)가 되셨는데, 봉해진 자들은 모두 상께서 예전에 사랑하시던 자들이요, 주살당한 자들은 모두 (페하의) 평생의 원수였습니다. 지금 군대의 관리들이 공을 헤아리고는 있지만, 천하에 (그들을) 두루 봉하기에는 충분치 않으니, 제 허물이나 주살당할까를 두려워해, 서로 모여서 모반(謀反)하는 것입니다”라 했다. 상이 말하길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라 하니, 장량이 답하길 “상께서 본디 불편하게 여기시던 자를 취하되, 여러 신하들이 다 아는 자 중에서 가장 심한 자 한 명을 헤아리시고, 먼저 그를 봉하여 이를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십시오” 라 했다.
3월, 상께서 주연을 베풀고 옹치(雍齒)를 봉하였고, 이로 인하여 승상에게 급히 공을 정하고 봉작을 행하게 했다. 주연이 파하자, 여러 신하들이 다 기뻐하며 말하길 “옹치같은 자 또한 제후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걱정이 없다!” 라 했다.
상이 역양(역陽)에 돌아와, 5일에 한번 태공(太公)을 뵈었다. 태공의 가령(家令)이 태공을 설득함며 이르길 “하늘엔 두 해가 없고, 따에는 두 왕이 없습니다. 황제께서 비록 자식이오나 인주(人主 ; 천주(天主) 즉 하늘의 상제에 대비되는 의미로, 하늘의 임금이 아니라 사람들의 임금이란 의미다)가 되시며, 태공께서는 비록 아버지이지만 인신(人臣)이옵니다. 어찌 임금이 신하에게 절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와 같다면, 위엄이 무겁더라도 행해지지 않습니다”라 했다.
이후에 상에 아침문안을 드리자, 태공이 비로 쓸고 문에 마중나가 물러나 있었다.
상이 크게 놀라, 내려와 태공을 붙들었다. 태공이 말하길 “황제께서는 인주인데, 어찌 나 때문에 천하의 법을 어지럽히십니까!”라 했다. 이에 상이 마음속으로 가령의 말을 좋아하여 (그에게) 황금 5백근을 하사했다.
여름 5월 병오일, 조칙을 내려 가로되 “사람의 지친(至親) 중에 아비와 자식보다 친한 것이 없으니, 아비에게 천하가 있으며 이를 자식에게 전하여 돌아가게 하고, 자식에게 천하가 있으면, 아비를 높이어 돌아가게 하니, 이는 사람된 도리의 극치니라. 전일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병혁(兵革)이 아울러 일어나니, 만백성들이 재앙에 고통받는지라, 짐이 몸소 갑옷을 입고 예리한 병기를 들고, 스스로 사졸들을 거느리고는, 위태한 재앙을 이기고, 폭란(暴亂)을 평정하여서, 제후들을 세우고, 병사와 백성들을 쉬게 하여 천하 크게 편안해졌으니, 이는 다 태공의 가르침이다. 여러 왕들과 통후 장군 경대부들이 이미 짐을 높여 황제라 하였는데, 태공께는 아직 호칭이 없다. 이제 태공을 높이 받들어 태상황(太上皇)이라 하라”고 했다.
가을 9월, 흉노(匈奴)가 마읍(馬邑)에서 한왕 신을 포위하니, 신이 흉노에 항복했다.
한 7년(BC 200) 겨울 10월, 상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동제(銅제)에서 한왕 신을 공격하고, 그의 장수를 베었다. 한왕 신은 도망가 흉노로 달아나고, 그의 장수인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이 함께 옛 조나라의 후손인 조리(趙利)를 세워 왕으로 삼고, 한왕 신의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흉노와 같이 한에 항거했다. 상이 진양(晉陽)에서 연달아 싸우며 북으로 쫓아갔는데, 누번(樓煩)에 이르러 큰 추위를 만나니, 병사 중 손발이 얼어 떨어진 자가 열에 둘 셋이나 되었다. 마침내 평성(平城)에 이르러서는 흉노에게 7일간이나 포위되었다가, 진평의 밀계(密計)를 써서 탈출할 수 있었다. 번쾌(樊 )에게 (이곳에) 머물며 대(代)의 땅을 평정하게 했다.
12월, 상이 돌아오면서 조(趙)를 지나치면서도, 조왕에게 예를 표하지 않았다. 이 달에, 흉노가 대를 공격하자, 대왕 희(喜)가 나라를 버리고 스스로 낙양으로 돌아오니, (그를) 사면하고 합(合)의 양후(陽侯)로 삼았다. 신묘일, 아들 여의(如意)를 세워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봄, 낭중(郞中)에게 영을 내려 죄가 있는 자 중 내죄(耐罪 ; 수염만 깎고 머리는 깎지 않고 그대로 두어 일반인과 구별하게 하여 죄인에게 치욕감을 주는 형벌) 이상인 자가 먼저 청하게 했다. 백성이 아들을 낳으면, 2년간 사역(使役)을 시키지 말게 했다.
2월, 장안에 이르렀다. 소하가 미앙궁(未央宮)을 수리하는데,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대창(大倉)을 세웠다. 상이 그 장려함을 보고 심히 노하여, 소하에게 일러 가로되 “천하는 흉흉하고, 노역에 괴로워한 지가 여러 해나 되어, 그 성패(成敗)는 아직 알 수 없는데, 어찌 궁실을 이렇듯 과도하게 다스리는가!” 라 하니, 소하가 말하길 “천하는 바야흐로 아직 평정되지 않았기에, 이로 인하여 궁실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무릇 천자께선 사해(四海; 천하)를 한 집안으로 삼으시는데, 장려함이 위중함을 망치게 해서는 안되며, 또한 후세에 더할 게 있도록 해서는 안됩니다”라 하니, 상이 기뻐했다. 낙양에서 장안으로 도읍을 옮겼다. 종정관(宗正官)을 두어, (황실) 9족의 서열을 매기게 했다.
여름 4월 낙양으로 행차했다.
한 8년(BC 199) 겨울, 상이 동쪽에서 한신의 잔당을 동원(東垣)에서 쳤다.
돌아가다 조나라를 지나치는 데, 조의 상(相)인 관고(貫高)가 상이 자기 왕에게 예를 차리지 않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은밀히 상을 시해하고자 모의하였다.
상이 잠 자려하자 가슴이 뛰는지라, 묻기를 “(여기) 현 이름이 무었인가?”라 하니, 대답하길 “백인(栢人)현입니다”라 했다. 상이 말하길 “백인이란 것은 남(人)에게 핍박(迫)받는다는 것이다”라 하고 자지 않고 떠났다.
11월, 영을 내려 종군하다 죽은 자에겐 작은 관을 만들어 (그 자가 살던) 현에 보내주고, 현에서는 옷과 이불, 관과 장례도구를 주어 소뢰(小牢)로써 제사지내게 하고, 장리(長吏)가 장례를 살피게 했다.
12월, 동원에서 돌아왔다.
봄 3월, 낙양으로 행차했다. 영을 내려 관리나 병졸로 종군하여 평성(平城) 및 (평성 주위) 서읍을 굳건히 지킨 자는 모두 평생 부역(賦役)을 면하게 했다.
관작이 공승(公乘; 8번째 작위) 이상이 아닌 자는 유씨관을 쓰지 못하게 했다.
장사치가 금(錦; 무늬있는 비단) 수(繡; 오색 빛깔로 수 놓은 비단) 기(綺; 무늬넣은 가는 비단) 곡(곡 ; 가는 주름 비단) 치(치 ; 가는 갈포(葛布) 저(紵 ; 모시로 짜서 만든 베나 성근 옷) 계(계 ; 융단, 모직)의 비단옷을 입거나, 병기를 지니거나, 수레나 말에 탈 수 없게 하였다.
가을 8월, 관리로서 죄가 있으나 아직 발각되지 않은 자를 사면했다.
9월, 낙양에서 행차하여 (장안에) 이르니, 회남왕 양왕 조왕 초왕이 다 따랐다.
고제 9년(BC 198) 겨울 10월, 회남왕(淮南王) 양왕(梁王) 조왕(趙王) 초왕(楚王)이 미앙궁 (未央宮)에서 조회하니, 전각(殿閣) 앞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상이 옥으로 된 잔을 받들고 태상황 (太上皇)에게 장수를 비는 헌수(獻壽)를 올렸다. 태상황이 이르길 “처음에 대인은 항상 신에게는 무뢰하고 능히 집안 일은 잘 못해서, 중(仲 ; 고조의 형,)만 못하였다. 지금 모(某;감히 황제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게 황제 아버지라고 해도… 이 자리는 연회이기 때문에 고조 아버지가 이름을 불렀을 수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길 때는 당연히 이름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모라고 쓴 것이다)의 일이 이뤄놓은 바를 보니, 중이 집안일을 많이 했지만 누구와 같겠는가”라 했다. 전각 위에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고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11월, 제와 초의 큰 씨족인 소씨(昭氏) 굴씨(屈氏) 회씨(懷氏) 경씨(景氏 전씨(田氏)의 다섯 성을 관중으로 옮기고, 전택의 편리를 봐 주었다.
12월, 낙양으로 갔다.
관고(寬高) 등이 역모를 모의하다 발각되니, 관고 등을 체포하고, 아울러 조왕 공오(共敖)를 하옥시켰다. 조칙을 내려 감히 (조)왕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삼족(三族 ; 부족, 모족, 처족 ; 중국형법사에서 9족의 개념이 좀 애매한데… 일반적으로 아비-자기-자식의 3대의 각 3족을 9족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그렇다 뿐이지 실제로는 개념혼동이 많고, 구족의 9가 많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을 죄 주도록 했다. 낭중(郎中) 전숙(田叔)과 맹서(孟舒) 등 10인이 스스로 머리를 빡빡 깎고, 쇠로 된 형구를 목에 차고 왕의 가노(家奴)가 되어, 왕을 쫓아 감옥에 들어갔다. 왕은 실제로 그런 모의를 알지 못했다.
봄 정월, 조왕 공오를 폐하여 선평후(宣平侯)로 삼았다. 대왕 여의(如意)를 옮겨 조왕(趙王)으로 삼아, 조나라의 왕이 되게 했다. 병인일, 이전에 죄가 있으되, 사죄 이하인 자는 모두 사면했다.
2월, 낙양에서 행차하여 (장안에) 이르렀다. 어진 조의 신하인 전숙 맹서 등 10을 불러 보고 애기를 나누니, 한(漢) 조정의 신하중 능히 오른쪽에 나오는 자가 없었다.(오른쪽을 존귀尊貴한 것으로 여겼다) 상이 기뻐하며, 모두 배(拜)하여 군수 제후 상으로 삼았다.
고제 10년(BC 197) 겨울 10월, 회남왕 연왕(燕王) 형왕(衡王) 초왕 제왕 장사왕(長沙王)이 내조했다.
여름 5월, 태상황후(太上皇后)가 붕어(崩御)했다.(태상황후라면 고조의 어머니가 되는데, 고조의 어머니인 이미 죽어 소령부인이라 추존했었다. 이는 잘못된 기사다)
가을 7월 계묘일, 태상황이 붕어하니, 만년(萬年)에 장사지냈다. 낙양의 죄인 중 사죄 이하를 사면했다.
8월, 제후왕 모두 국도(國都; 수도)의 태상황묘에 조알(朝謁)하라고 영을 내렸다.
9월, 대(代)의 상국인 진희(陳稀)가 모반했다. 상이 이르길 “희는 일찍이 나의 관리가 되었었기에, (그에 대한) 신의가 매우 있었다. 대 땅은 나에게 위급한 곳인지라, 희를 봉하여 열후로 삼아, 상국으로서 대를 지키게 했는데, 지금 왕황(王黃) 등과 더불어 대 땅을 빼앗았다! (대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니, 능의 진희와 왕황을 떠나 와서 귀의하는 자는 모두 사면하라”고 했다.
상이 동쪽으로부터 한단(邯鄲)에 이르렀다. 상이 기뻐하며 가로되 “진희가 남으로 한단에 웅거하여 장수(장水)를 막지 않으니, 나는 그가 능히 (일을) 이룰 수 없음을 알겠노라”라 했다. 조의 상(相) 주창(周昌)이 상산(常山)의 25성 중 패망한 20성의 군수(郡守)와 군위(郡尉)를 주살하도록 주청했다. 상이 말하길” 군의 수나 위가 반역하였는가?” 라 하니, “아닙니다”라 답했다. 상이 이르되 “이는 힘이 부족해서이니, 죄가 없다”라 했다.
상이 주창에게 영을 내려 조의 장사(壯士) 중 가히 장수라 될 만한 자를 뽑게 하여, 4명을 불러 알현케했다. 상이 (그들을) 업신여기며 꾸짖길 “이런 더벅머리 아이가 장수가 될 수 있겠는가?” 라 하니, 네 사람이 부끄러워 모두 땅에 엎드렸다. 상이 각자에게 1천 호(戶)를 봉하고, 장수로 삼았다. 좌우에서 간언하길 “촉한(蜀漢) 땅에서부터 따라 들어가, 초를 정벌하였음에, 한편에선 아직 상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데 지금 이와 같이 봉하시니, (그들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 했다. 상이 이르길 “그대들이 알 바 아니다. 진희가 반역하자, 조와 대의 땅이 모두 진희의 소유가 되었다. 내가 우격(羽檄 ; 급한 격문檄文)을 돌려 천하의 병사를 징발하였지만, 아직 이르지 않은 자가 있어, 이제 오직 한단의 병사만으로 해야한다. 내가 어찌 4천호를 아끼려다, 조의 자제들을 위로치 못하겠는가!” 라 하니, 모두 말하길 “맞습니다”라 했다.
또 (장수를) 구하여 “악의(樂毅 ; 전국시대 때 연나라의 용맹한 장수)에게 후손이 있는가?”라 했다. 그의 후손 숙(叔)을 얻어, 악향(樂鄕)에 봉하고, 화성군(華成君)의 호를 내렸다. 진희의 장수에 대해 물으니, 모두 예전에 장사꾼이었다. 상이 이르길 “내가 그와 같을 줄 알았다” 라 했다. 이에 많은 금으로 진희의 장수를 매수하니, 진희의 장수들이 많이 항복했다.
고제 11년(BC 196) 겨울, 상이 한단에 있었다. 진희의 장수 후폐(侯폐)가 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왕황은 기병 1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곡역(曲逆)에 진을 쳤다. 장춘(張春)의 장졸(將卒) 만여 명이 하수를 건너 요성(聊城)을 공격했다. 한의 장군 곽몽(郭蒙)이 제의 장수들과 더불어 쳐서 그들을 대파하였다.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태원(太原)의 길로 들어가, 대의 땅을 평정하고 마읍(馬邑)에 이르렀으나, 마읍이 항복치 않으니 공격하여 잔멸(殘滅)시켰다. 진희의 장수 조리(趙利)가 동원(東垣)을 지키니, 고조가 이를 공격했으나 항복시키지 못했다. (적의) 병졸들이 욕을 하자, 상이 노하였다. 성이 항복하자, 병졸 중 욕을 한 자를 참수했다. 여러 현 중에서 굳게 지키고 (반역한 진희의 군대에) 항복치 않으며 도리어 노략질 한 곳에는 3년간 조부(租賦)를 면해주었다.
봄 정월,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장안에서 모반하니, 삼족을 멸했다. 장군 시무(柴武)가 참합(參合)에서 한왕(韓王) 신(信)을 참수했다.
상이 낙양으로 돌아왔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대의 땅은 상산(常山)의 북쪽에 있고, 오랑캐와 변경을 접하고 있으니, 조(趙)는 이에 산 남쪽부터 대 땅을 가지고 있어 멀고, 여러번 오랑캐의 노략질이 있어서, 이 땅을 나라로 삼기 어렵다.
점차로 산 남쪽의 태원의 땅을 취해 대(代)에 더해주어 속하게 하고, 대의 운중(雲中) 이서 지역은 운중군으로 삼으면, 대가 변경에서 노략질 당하는 일이 더욱 적을 것이다. 왕 상국(相國) 통후(通侯) 2천석 관리들은 가히 세워 대왕(代王)으로 삼을 만한 자를 고르라” 고 했다.
연왕 노관(盧관), 상국 소하(蕭何) 등 33명이 모두 이르길 “(폐하의) 아들 항(恒)은 어질고 지혜로우며 온량(溫良)하니, 청컨대 그를 세워 대왕으로 삼으시고, 진양(晉陽)에 도읍케 하소서” 라 했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2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부세 징수를 매우 줄이고자 한다. 지금 (부세를) 바치는 데 일정한 규범이 없어, 관리들이 혹 부세를 많이 거두며 제후왕들은 더욱 심하니, 백성들이 이에 괴로워 한다. 제후왕과 통후들은 항상 10월에 입조할 때(거둔 부세를) 바치게 하고, 군에서는 각각 그 호구 수를 헤아리되, 1인당 해마다 63전(錢)씩 부세를 바치게 하라”고 했다.
또 가로되 “무릇 듣자하니, 왕 된 자로서 주 문왕(文王)보다 높은 자가 없고, 백자(伯子 ; 패자覇者) 중엔 제(齊) 환공(桓公)보다 높은 자가 없다 하니, 모두 현인(賢人)을 기다려 명성을 이룬 것이다. 지금 천하의 현자들이 어찌 (자신이) 옛날의 그런 현인임을 능히 알 수 있겠는가? 우환이 인주(人主)에게 있어 옛 고사와 어울리지 못하니, 선비들이 이 때문에 어찌 진사(進仕)하겠는가? 지금 나는 하늘의 영험(靈驗)함으로 인해 현사 대부들이 천하를 평정하여 소유하고 이로써 일가(一家를 이루니, 장구(長久)히 세세토록 종묘를 받들어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한다. 현인들이 이미 나와 같이 함께 천하를 평정시켰지만, 나와 같이 편안히 그 이로움을 누리지는 못하니, 어째서인가?
현사 대부들 중에서 나를 따라 다니길 좋아했던 자가 있으면, 나는 능히 그를 우러러 드러낼 것이다. (이를) 천하에 널리 알려, 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어사대부(御史大夫) 주창(周昌)은 (제후의) 상국(相國) (자리로)으로 내려가고, 찬후(찬侯 ; 소하)는 제후왕에게로 내려가고, 어사 중집법(中執法 ; 중승中丞)은 군수에게로 내려가, 제 뜻이 밝은 덕에 부합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몸소 삼가히 (그들에게) 권하여 수레에 태워, 상국부(相國府)로 보내되, 그의 행장(行狀)과 연기(年紀)를 써 보내라, 만약 현자가 있는데 말하지 않고 있다가 발각되면, 면직시켜라. 현자 중 나이가 많고, 병이 들어거든 보내지 말라”고 했다.
3월, 양왕(梁王) 팽월(彭越)이 모반하니, 그의 삼족을 주살하였다. 조서를 내려 가로되 “가히 양왕과 회양(淮陽)왕으로 삼을 만한 자를 택하라”고 했다. 연왕 노관(盧관), 상국 소하 등이 태자 희(희)를 세워 양왕으로, 태자 우(友)를 세워 회양왕으로 삼길 청했다. 동군(東郡)을 파하여 양(梁)에 조금 더하고, 영천군(領川郡)을 파하여 회양에 조금 더하였다.
여름 4월, 낙양에서 행차하여 돌아왔다. 영을 내려 풍(豊)현 사람 중 관중으로 옮겨 온 자에게 종신토록 부역을 면해주게 했다.
5월,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월(越)나라 사람들의 풍속은 서로 공격하길 좋아하여, 이전 때 진(秦)이 중부 지역 현의 사람들을 남방 3군(계림桂林군, 상象군, 남해南海군)으로 옮겨, 백월(白越)과 섞여 살게 했다. 천하가 진을 주살할 때, 남해의 군위(郡尉)인 타(타)는 남방에 머물며 오래 그곳을 다스리렸는데, 매우 엄격한 법조문으로 다스리니, 이 때문에 중현(中縣 ; 중부 지역의 현)의 사람들도 줄지 않고, 월나라 사람들의 서로 공격하는 풍속도 점차 그치니, 모두 그의 노고에 힘입은 것이다. 지금 타를 세워 남월왕(南越王)으로 삼으라”고 했다. 육가(陸賈)를 보내 옥새와 인수를 주었다. 타가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에 대하여) 신하라 칭했다.
6월, 영을 내려 사졸(士卒) 중 촉(蜀) 한(漢) 관중(關中)으로 따라 들어간 자에게 종신토록 부역을 면하게 했다
가을 7월, 회남왕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다. 상이 여러 장수들에게 물으니, 등공(등公)이 옛 초의 영윤(令尹)인 설공(薛公)에게 계책이 있다고 말했다. 상이 [불러 보니], 설공은 영포의 형세를 얘기한 즉, 상이 기뻐하며 그를 1천 호(戶)에 봉했다. 왕과 상국들에게 조칙을 내려 가히 회남왕으로 세울 만한 자를 택하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이 태자 장(長)을 세워 왕으로 삼을 것을 청했다.
상이 이에 상군(上郡) 북지(北地) 농서(농西)의 수레와 기병과, 파(巴) 촉(蜀)의 재관(材官) 및 중위(中尉)의 군졸 3만 명을 내어 황태자를 호위하게 하고, 패상(覇上)에 진을 치게 했다. 영포가 돠연 설공의 말처럼 동으로 형왕(荊王) 유가(劉賈)를 죽여 그 병사를 빼앗고, 회수(淮水)를 건너 초를 치니, 초왕 교(交)가 설(薛)로 달아났다. 상이 천하의 사죄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여 모두 종구네 하고, 제후의 병사를 불러 모아, 상이 스스로 (그들을) 거느려 영포를 쳤다.
고제 12년(BC195) 겨울 10월, 상이 회부(會缶)에서 영포를 군대를 격파하니, 영포가 달아나거늘 별장(別將)에게 그를 추격하게 했다.
상이 돌아오다, 패(沛)를 지나다 머물고, 패궁(沛宮)에서 주연을 베풀되, 옛 사람들과 부로, 자제들을 모두 다 불러 술을 돋우었다. 패 중의 아이 2천명을 뽑아, 그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술이 얼큰해지자, 상이 축(筑 ; 악기 이름)을 치며, 스스로 노래부르길 “큰 바람이 일어 구름이 날리우고, 위엄이 해내에 더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니, 편안히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리로다!”라 했다.
아이들에게 모두 이 노래를 화응(和應)하며 익히게 했다. 상이 이에 일어나 춤을 추고, 가슴아픈 회한을 강개(慷慨)하니, 눈물이 여러번 떨어졌다. 패의 부형들에게 말하길 “떠도는 나그네는 고향을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내가 비록 관중에 도읍하였으나, 만세 후의 내 혼백은 오히려 패를 생각할 것입니다. 또 짐은 패공(沛公)에서 시작하여 난폭한 역적(暴逆)들을 주살하여 마침내 천하를 가졌으니, 이 패현을 짐의 탕목읍(湯沐邑; 말 그대로 현에서 거두는 조세는 따로 황실에 보내 황제의 목욕비용으로 쓴다고 하여 탕목읍이라 한 것이다)으로 삼고, 여기 백성들의 부역을 종신토록 면해주고, 세세토록 조부(租賦)를 부과함이 없게 할 것입니다”라 했다. 패의 부로들과 할멈들(母), 옛 지인(知人)들이 날마다 술마시기 좋아하고 매우 기뻐하며, 옛 일을 얘기하며 웃고 즐겼다. 10여 일이 되어 상이 떠나고자 하니, 패의 부형들이 (더 머무르길) 완고히 청하였다. 상이 이르길 “나에게는 다른사람들도 많아, 부형들과 넉넉히 지낼 수 없습니다”라 하며, 이에 떠났다. 패 중의 현이 텅비게 되니, 모두 읍의 서쪽으로 가서 (다투어) 헌상하였다. 상이 머물며 쉬니, 장막(장幄)에서 3일간 술을 마셨다. 패의 부형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이르되 “패는 다행이 부역을 면하게 되었지만, 풍(豊)현은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으니, 폐하께서 가여이 여기소서”라 했다. 상이 말하되 “풍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니,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특별히 이곳으로 옹치(雍齒)를 위했는데, 그는 나를 배반하고 위(魏)에 붙었습니다”라 했다. 패의 부형들이 간곡히 청하니, 이에 아울러 풍도 부역을 면하게 하되, 패에 비견되게 했다.
한의 별장들이 조수(조水)의 남북에서 영포의 군대를 치니, 모두가 이를 대파하고, 영포를 추격해 번양(番陽)에서 참수했다.
주발(周勃)이 대(代)를 평정하고, 당성(當城)에서 진희(陳 )를 참수했다.
조서를 내려 가로되 “오(吳)는 오래전에 세워진 나라다. 예전에는 형왕(荊王)이 그 땅을 겸하여 가졌으나, 지금 죽어 후사(後嗣)가 없다. 짐이 다시 오왕을 세우고자 하니, 가히 왕으로 삼을 만한 자를 의논하라”고 했다. 장사왕(長沙王) 신(信 ; 오예吳芮의 아들이다) 등이 말하길 “패후(沛侯) 비(비)는 중후(重厚)하니, 청컨대 그를 세워 오왕으로 삼으소서”라 했다. (비를 오왕으로) 배(拜)하고 난 후, 상이 비를 불러 이르길 “너의 모습에 반역의 상(相)이 있다”라 하였다. 그러곤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르길 “우리 한에 50년 후 동남에서 난(亂)이 있을 것이지만, 어찌 너이겠느냐? 그러나 천하가 같은 성으로 한 집안을 이루고 있으니, 너는 삼가 반역치 말라”고 했다. 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길 “감히 그러지 않겠나이다”라 했다.
11월, 회남(淮南)에서부터 행차하여 돌아왔다. 노(魯)를 지나다, 대뢰(大牢 ; 대뢰는 삼생[三牲] 즉 소, 양, 돼지를 제물로 갖추어 제사지내는 것인데, 이런 제사는 제후나 왕에게 한다 공자에게 대뢰로 제사지냈다는 것은 공자를 제후 이상급으로 대우했다는 뜻이자, 앞으로 유교를 그런 식으로 대우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로서 공자에게 제사지냈다.
12월, 조서를 내려 가로되 “진시황, 초 은왕(楚 隱王), 위 안회왕(魏 安僖王), 제 민왕(齊 愍王), 조 도양왕(趙 悼襄王)은 모두 그 후사가 끊어졌다. 진시황의 무덤지기(수총 守塚)로 20집을, 초 위 제는 각각 10집을, 조 도양왕 및 위의 공자 망기(亡忌)에겐 각각 5집을 주어, 그 무덤을 살피고, 그 일을 (다른 이에게) 맡겨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진희의 항장(降將)이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연왕(燕王) 노관(盧관)이 사람을 진희에게 보내 은밀히 모의했다고 말했다. 상이 벽양후(酸陽侯) 심이기(審食其)에게 노관을 영접토록 했으나, 노관이 병을 칭하였다. 심이기가 노관에게 모반의 조짐이 있다고 말했다.
봄 2월, 번쾌와 주발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노관을 치게 했다. 조서를 내려 이르길 “연왕 노관과 나는 옛 인연이 있어 그를 아들처럼 사랑했는데, 진희와 반역을 모의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없는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사람을 시켜 노관을 맞이하게 하였다. (그런데) 노관이 병을 칭하고 오지 않으니, 모반하였음이 분명하다. 연의 관리나 백성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니, 관리로 6백석 이상인 자에겐 각각 작 1급씩 하사하라. (처음엔) 노관과 같이 있었지만, 그를 떠나 귀부하는 자에겐, 그들을 사면하고 또 작 1급씩 하사하라”고 했다. 초서를 내려 제후왕들에게 가히 세워 연왕으로 삼을 만한 자를 의논하케 하니, 장사왕 신(信) 등이 태자 건(建)을 세워 연왕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르되 “남무후(南武侯) 직(職)은 또한 월(越)나라의 후손이니, 그를 세워 남해왕(南海王)으로 삼으라”고 했다.
3월, 조서를 내려 가로되 “내가 천자의 위에 올라 황제로서 천하를 얻은 지 오늘로 12년째이다. 천하의 호걸 대부들과 같이 천하를 평정시키고, 같이 펀하를 편안히 얻었다. 공이 있는 자들은, 위로는 왕에 이르고 다음으로 열후가 되며 아래로는 식읍을 가졌다. 중신(重臣)의 친지도 혹 열후가 되어, 모두 스스로 관리를 두고, 부세를 거두며, 여자는 공주(公主)가 되었다. 열후가 되어 식읍을 얻은 자는 모두 패옥(佩玉)의 인을 차고, 가장 큰 집을 하사하였다. 2천석 관리는 장안으로 옮겨 다음으로 작은 집을 받게 하였다. 촉한(蜀漢)으로 들어갔다 삼진(三秦)을 평정한 자들은 모두 세세토록 부역을 면하였다. 나는 천하의 현사(賢士)와 공신들에게는 부역을 없이 하라고 일렀다. 그들 중 의롭지 못하여 천자를 거역하고 독단으로 병사를 일으킨 자는 천하가 더불어 그를 정벌하여 주살할 지어다. 천하에 이를 포고(布告)해, 짐을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고 했다.
상이 영포(英布)를 칠 때, 유시(流矢)에 맞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병이 들었다.
병이 심해지자, 여후(呂侯)가 좋은 의원을 불렀다. 의원이 들어가 알현하니, 상이 의원에게 묻길 “병이 치료될 수 있겠는가? (의원이 치료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라 했다. 이에 상이 그를 꾸짖어 욕하며 이르길 “나는 한갓 포의(布衣 ; 베옷, 즉 미천한 신분)로서 3척 검을 빼어들고 천하를 취하였으니, 이는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수명(壽命)이란 하늘에 있는 것이니, 편작(扁鵲 ; 유명한 의사)이라도 어찌 더 (명을) 더할 수 있겠는가!” 라 했다. 끝내 병을 치료하지 못하게 하고, 황금 50근을 하사하고, (치료받는 것을) 파했다.
여후가 묻길 “폐하의 백년 후면, 소상국(蕭相國 ; 소하)도 이미 죽었을 터 인데, 누구로 그를 대신하게 합니까?”라 하니, 상이 말하길 “조참(曹參)이 좋소”라 했다.
그 다음을 물으니, 말하길 “왕릉(王陵)이 가하나 조금 우직하니, 진평(陳平)이라면 그를 도울 수 있을 것이오. 진평은 너무 똑똑해, 홀로 일을 맡기기 어렵소.
주발(周勃)은 중후하고 꾸밈(문식文飾)이 적으니, 우리 유씨를 편안히 해줄 자는 반드시 주발일 것이니, (그를) 태위로 삼으시오” 여후가 다시 그 다음을 물으니, 상이 말하길 “이 이후는 내 알 바 아니오”라 했다.
노관(盧관)과 수천명이 변방 아래 머물며, 조짐을 살폈는데, 다행히 상의 병환이 나아지매, 스스로 들어가 사죄하고 했다.
여름 4월 갑신(甲辰)일, 황제가 장락궁(長樂宮)에서 붕어(崩御)했다. 노관이 이 소식을 듣고, 끝내 흉노에게로 도망쳐 들어갔다.
여후가 심이기(審食其)와 같이 모의하여 말하길 “여러 장수들이 옛날에 황제와 같이 편호(編戶 ; 서열을 적은 명적名籍, 명부)에 백성이었지만, 지금은 북면(北面)하여 신하가 되었으니, 마음속에선 항상 앙앙불락(앙앙不樂 ; 불만스런 모습)하였는데, 지금 어린 주인을 섬기게 되매, 이들을 모두 주살치 않으면, 천하가 불안할 것이다”라 했다. 이 때문에 발상(發喪)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이런 말을 역상( 商)에게 말했다.
역상이 심이기를 보고 말하기를 “황제폐하께서 이미 붕어하셨다고 들었는데, 나흘이 지나도록 발상하지 않고, 여러 장수들을 주살한다 하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천하가 위태로워지오. 진평과 관영(灌孀)은 10만을 거느리고 형양(滎陽)을 지키며, 번쾌와 주발은 20만을 거느리고 연과 대를 평정하고 있는데, 이들이 황제께서 붕어하셨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주살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군대를 연합해 돌아서 관중을 공격할 것이오. 대신들은 안에서 배반하고, 여러 장수들은 밖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발 뒤꿈치를 들고 기다릴 처지가 아니오”라 했다. 심이기가 들어가 여후에게 고하니, 이에 정미(丁未)일 발상을 하고,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5월 병인(丙寅)일, 장릉(長陵)에 장사지냈다. 관을 내린 후, 황태자와 군신들이 돌아와 태상황묘에 이르렀다. 여러 신하들이 이르길 “황제께서 작고 미천한 곳에서 일어나, 난세(亂世)를 다스려 바른 것으로 돌리시고, 천하를 평정하여, 한의 태조(太祖)가 되셨으니, 그 공이 가장 높습니다(高)”라 했다. 존호(尊號 =시호諡號)를 올려 고황제(高皇帝)라 하였다.
처음에 고조는 학문을 닦지 않았으나, 성품이 밝고 활달하였으며, 모의하길 좋아하고, 남의 얘길 잘 들어주니, 감문(監門)이나 수졸(戍卒)부터도 그를 알현하기를 예전처럼 했다. 처음 민심에 순응하여 3장의 약법(約法)을 지었다.
천하가 이제 평정되자, 소하에게 율령을 차례짓게 하고, 한신에게 군법(軍法)을 펴게 하며, 장창(張蒼)에게 역법(曆法)과 도량형을 정하게 하고, 숙손통(叔孫通)에게 의례를 제정케 하고, 육가(陸賈)에겐 <신어(新語)>를 짓게 하였다. 또한 공신들과 부절을 쪼개 서약하여, 철판에 붉은 글씨로 적어, 금궤석실(金櫃石室)에 넣어 이를 종묘에 묻었다. 비록 하루도 쉴 겨를이 없었으나, 모범을 세워 제정함은(規摹) 넓고도 멀리까지 내다보았다.
* 참고할 내용 – 한 고조 유방 (劉邦)
한 고조 유방 (劉邦, BC 247 ~ BC 195)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황제로, 진(秦) 말기의 대혼란에서 거병하여, 최대의 호적수이자 압도적인 항우(項羽)와의 초한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한(漢)나라를 건국한다.
○ 생애
– 출생
유방은 지금의 강소성 패현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공(太公),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다. 태공은 노인장, 유온은 유씨 어멈이라는 뜻이므로 부모의 이름도 확실치 않다. 유방이라는 이름도 황제가 된 이후에 비로소 붙여진 것이다. 그의 자(字)는 계(季)라고 하는데 이것도 아들 중에 막내란 뜻이다. 그러므로 유방의 집안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평민 이상은 못된다. 하루는 유온이 호숫가에서 잠들었을 때 꿈속에서 신선과 교합했다. 당시 천둥 벼락이 요란하게 치며 주위가 어두워졌다. 태공이 유온을 찾았을 때는 유온의 몸에 용이 앉아 있었다. 그 후 유온은 임신을 하여 유방을 낳는다.
– 외모
유방은 코가 높고 앞이마가 돌출하였다. 이른바 용안(龍顏)이었다. 또한 수염이 멋있게 났으며 좌측 허벅지에 72개 점이 있었다.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을 만들어 오게 하여 외출 할 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넓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 젊은 시절
사람됨이 관대하고 좋아 남에게 잘 베풀었으며 항상 희희낙락했다. 배포가 커서 농사짓는 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사수(泗水) 정장(亭長)이 되었다. 진제국의 행정제도에 따르면 군(郡) 아래에 현(縣), 현(縣) 아래에 향(鄕)이 있으며, 향 아래는 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여 치안과 소송을 담당케 했다. 그 정의 책임자가 정장이다. 유방은 정장이면서도 진중하지 못하여 관리들을 놀려먹기 일쑤였다. 동네 술집에서 외상술을 즐겨 마셨는데 취해 잠들면 그 위에 항상 용이 나타났다. 괴이한 현상에 놀란 술집 주모들은 연말이 되면 외상 술값을 탕감해주었다. 유방은 한때 함양에 강제노동으로 불려간 적이 있었다. 마침 진시황의 거창한 행차를 목격한 유방은 자기도 모르게 장탄식을 했다.
“사내대장부라면 저 정도는 해먹어야지!”
패현의 현령과 절친한 친구였던 여공이 원수를 피해 패현으로 도망와 정착했다. 현령에게 귀한 친구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관리들이 다투어 인사를 왔는데 유방도 그 틈에 끼었다. 당시 명함에 부조 액수를 적어 올리는 관례가 있었다. 현령의 인사팀장 소하가 선포했다. “1천 전(錢) 이하는 마당에 앉으시오.” 유방은 천방지축이었기 때문에 대뜸 “1만 전이오!”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실제로는 땡전 한 푼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1만 전이란 소개에 여공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유방을 맞이했다. 여공은 관상을 즐겨 보았는데 유방의 얼굴을 보고는 공손하게 좌석으로 안내했다. 소하가 쏘아붙였다. “유계라는 작자는 본래 큰소리만 잘 치지 일을 이루는 건 드뭅니다.” 유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님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당당하게 상석에 앉았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이 되자 여공은 유방에게 눈짓을 했다. 술자리가 파하고 유방에게 따로 말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관상을 즐겨 보았지요. 그간 숱하게 관상을 봤지만 유계만한 사람이 없었다오. 부디 자중자애하시기 바라오. 저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유계에게 시집보내 집안 청소라도 시키고자 하오이다.” 여공의 부인이 다그쳤지만, 여공은 무시하고 유계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 딸은 후에 여태후가 되고, 유방과의 사이에 아들 효혜제(孝惠帝), 딸 노원(魯元) 공주를 낳는다.
– 거병
진시황릉 공사의 노동력 징발에 따라 유방은 죄수들을 역산으로 이송했다. 하지만 지금의 강소성 풍읍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적잖은 죄수들이 탈주하여 역산까지 가고 말 것도 없었다. 유방은 풍읍 서쪽 호숫가에 이르렀다. 술을 마시며 쉬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죄수들을 풀어주며 일렀다. “다들 알아서 살 길을 찾아가시오. 나도 이제 초야에 숨을 것이외다.” 죄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개중에 십여 명 장정은 유방의 배짱에 반하여 두목으로 모시겠다며 따라왔다. 이때부터 유방은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 부근에 해당하는 망(芒)과 탕(碭) 산록에 은거하며 도피생활을 했다. 한번은 유방이 술에 취한 채 늪지대를 걷다가 앞을 가로막은 큰 뱀을 칼로 토막 낸 적이 있었다. 이를 사람들은 적제(赤帝)의 아들이 백제(白帝)의 아들을 처단한 것으로 소문을 내면서 이곳저곳의 죄수들이 유방에게 몰려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진제국의 이세황제 호해가 즉위하던 기원전 209년 10월, 진승·오광이 진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이후로 폭정에 견디지 못한 각지의 백성들과 전국시대 제후국의 후손들도 앞 다투어 의거에 참여했다. 유방은 수백 명을 이끌고 패현으로 돌아와 소하, 조참, 번쾌 등과 내통하여 현령을 죽이고 패현을 장악했다. 모두들 유방을 리더로 추대했다. 진승은 그 당시 이미 초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초나라 구제도에 따르면 현령을 공(公)이라 불렀으므로 유방은 패공이 되었다. 유방은 패현에서 이미 3,000여 명의 병사를 규합하여 주변 고을을 공략하면서 반진(反秦)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참모 장량을 휘하로 끌어들였으며 지금의 산동성 조장(棗莊)에 해당하는 설현(薛縣)에서 옛 초나라 귀족인 항량 및 항우의 군대와 합류한다.
– 반진(反秦)전쟁
진승·오광이 거사한 이후로 반군의 세력은 전국으로 퍼졌다. 반군 세력은 전국적으로 10여 개 집단이 있었지만 전투 경험과 리더십 부족으로 진승·오광은 부하나 배신자에게 살해되었고, 반군의 기세는 한풀 꺾인다. 이때 항량은 각지의 반군 수장들을 설현으로 초청하여 향후 전략을 구상한다. 그 결과 옛 초나라 마지막 군주 회왕의 손자 웅심을 정신적인 리더로 옹립하고 투쟁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존칭도 초회왕(楚懷王)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동시에 지금의 안휘성 우이(旴台)에 도읍지를 정하고 군웅을 통솔하여 조직적인 전략으로 진제국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진제국 이세황제 호해 2년 기원전 208년 9월, 계속되는 승전에 교만해지기 시작한 항량은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에서 진제국의 백전노장 장한에게 참패당해 전사한다.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에 해당하는 진류(陳留)를 포위 공격하던 유방과 항우는 즉시 철군하여 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에 해당하는 팽성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아울러 초회왕을 팽성으로 피신시킨다. 장한은 항량을 대파한 후 다시 군대를 이동시켜 옛 조나라 지역으로 진공하여 반군 집단의 하나인 조헐(趙歇)을 포위했다. 고립된 조헐의 세력은 팽성의 반군 총사령부에 긴급 구조를 요청했다. 초회왕은 송의와 항우에게 북상하여 조헐을 구조하도록 명하고 그와 동시에 유방에게 관중을 돌파하여 함양을 점령하도록 명했다. 출정에 앞서 초회왕은 장수들에게 약속했다.
“관중을 먼저 공략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된다.”
진 제국의 전투력은 여전히 막강했기 때문에 반군 장수들은 함양공략에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유독 항우만은 숙부 항량이 전사한 탓에 적개심에 불타 유방과 함께 관중을 돌파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초회왕의 측근 노장들이 반대했다.
“항우는 사람됨이 포악하여 가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진제국을 공략하려면 관대하고 마음씨 좋은 장수가 나서야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이 환영하고 관리들이 투항할 것입니다. 적임자는 유방입니다.”
유방은 진승과 항량의 패잔병을 정비하여 의용군의 이름을 내걸고 진제국 치하의 민심을 얻으며 서쪽으로 진격했다. 유방은 지금의 하남성 하읍(夏邑)에 해당하는 율현(栗縣)을 점령하고 팽월의 도움으로 지금의 산동성 금향(金鄕) 서북쪽 창읍(昌邑)을 공략했다. 또한 소문지기 소졸 역이기의 건의로 진류(陳留)를 수중에 넣어 군량미를 확보하고, 장량의 계략으로 지금의 남양(南陽)에 해당하는 완성(宛城)을 포위했다. 그리고 진회(陳恢)의 전략을 채용하여 남양 군수를 투항하게 했다. 남양 군수가 투항하자 유방은 곧바로 그곳을 봉읍지로 책정했다. 투항하면 바로 그곳을 봉읍지로 하사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진제국의 지방관들은 앞 다투어 유방에게 투항했다. 유방의 군대는 군기가 삼엄하여 노략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무혈 진공을 계속하던 유방의 군대는 호해황제 3년 기원전 207년 8월 무관을 돌파하여 관중의 동남방 대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이때 항우도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대장군에 올라 진제국의 주력부대를 차례로 격파하고, 40만 대군을 통솔하여 관중으로 치닫고 있었다.
반군 주력부대가 압박해오자 진제국은 내분이 일어났다. 환관 우두머리 조고가 이세황제 호해를 살해하고 유방에게 밀사를 보내 관중을 나눠 갖자고 제의한 것이다. 유방은 음모로 간주하여 거절했다. 조고는 호해의 조카 자영을 황제롤 내세웠다. 자영은 조고의 음모를 눈치채고 기회를 틈타 조고를 살해한다. 진제국이 내홍으로 갈팡질팡할 때 유방은 진제국의 장수를 매수하고 효산을 우회하여 지금의 섬서성 남전(藍田)에서 진제국 방어망의 허를 찔러 대파했다. 그 뒤 지금의 섬서성 서안에 해당하는 패상(覇上)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쪽으로 함양을 눈앞에 두게 된다.
기원전 206년 10월, 진제국의 마지막 황제 자영은 소복 차림으로 황제의 옥새와 군대 통솔권 병부(兵符)를 손수 들고 대신들과 함께 유방에게 투항했다. 진제국이 정식으로 멸망한 이 해를 역사책은 고조원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영이 투항하자 장수들은 살해하려고 했다. 유방이 말렸다. “초회왕께서 나를 파견한 뜻은 관대하게 처리하라는 것이었소. 투항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길하오.” 유방은 자영을 간수에게 넘겼다.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뒤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이며 수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보고는 욕심이 생겨 궁실에 눌러앉으려 했다. 이때 번쾌와 장량이 극구 말리자 유방은 흔쾌히 받아들여 궁실과 창고를 봉쇄하고 패상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각 현의 장로와 호걸들을 소집한 유방은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포한다.
“그동안 진제국의 가혹한 형벌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판하면 삼족을 멸하고, 수군거리면 공개 처형을 당하셨지요. 이제 저는 제후들과 약속한바 그대로 먼저 관중 땅을 밟았으므로 이곳의 왕이 됩니다. 여러분들께 바라는 것은 법조문 단 석 줄입니다. 살인한 자는 죽이고, 상해를 입히거나 도둑질 하면 그에 상응하는 징벌을 받습니다. 진제국의 기존 엄형준법은 폐지합니다. 관리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업무를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살리려고 온 것이지 괴롭히려고 온 것이 아니오니 절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유방은 위와 같이 민심을 수습하였다. 관중의 관리들과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앞 다투어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유방의 군대에게 바쳤다. 유방은 사양했다. “창고에 곡식이 충분하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관리들과 백성들은 더욱 기뻐했다. 모두들 유방을 지지했으며 혹시나 유방이 관중의 왕이 안 되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였다. 이즈음 항우가 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접근하면서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 홍문지연(鴻門之宴)
기원전 206년 12월, 항우는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 동북방에 위치한 함곡관에 당도했다. 유방의 군대가 관문을 열어주지 않자 항우는 진노하여 경포 등에게 명하여 관문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밀고나가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 동북방 희정(戱亭)에 진을 쳤다. 유방 군대와는 불과 40리를 거리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이때 유방 휘하의 조무상이 항우의 환심을 사려고 사람을 보내 고자질을 했다. “패공은 자신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을 승상으로 삼은 다음 진제국 궁실의 금은보화를 독차지하려는 속셈이 있답니다.” 참모 범증도 경고했다. “유방이 관중 땅을 밟기 전에는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밝혔는데 지금은 일체 손도 안 대고 있다 하오. 야심이 있는 자가 분명하니 급히 공격해야 하오. 절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오.” 항우는 전군을 배불리 먹이고 이튿날 새벽 총공세를 펴기로 결정했다. 유방은 10만 병사, 항우는 40만 대군, 중과부적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항우의 작은아버지 항백이 심야를 틈타 장량을 찾아갔다. 예전에 목숨을 구해줬던 은혜를 갚기 위해 장량을 구출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장량은 유방에게 사실대로 말해버렸고 유방의 계략에 말려든 항백은 교묘한 사탕발림으로 항우를 설득했다. 이튿날 유방은 홍문으로 달려가 항우에게 비굴한 언사로 사과를 했다. 범증의 살해 기도를 모면한 유방은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해 호랑이 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홍문지연의 긴장된 분위기는 「항우본기」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초한대전의 시작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진제국의 궁실을 모두 불사르고 지나는 곳마다 도륙을 일삼았다. 진제국의 관리와 백성들은 실망하고 공포에 떨었지만 위세에 눌려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항우는 사람을 보내 초회왕에게 함양 점령을 보고했다. 초회왕은 “약속대로”하라고 지시했다. 항우는 초회왕을 원망했다. 당초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진격하여 관중 땅을 공략하려 했으나 초회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북상하여 조나라 지역을 구원하라고 명해 항우는 뒤늦게 함양에 입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우는 선포했다.
“회왕은 우리 항씨 집안이 얼굴마담으로 세워놓았을 뿐이다. 한 것도 없는 사람이 명령을 내릴 작격이나 있겠는가.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군들과 본인이다. 천하를 평정한 것은 여러 장군들과 본인이다.”
그리고는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추대하면서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항우는 곧 자신을 서초패왕으로 임명하고, 전국시대의 양(梁)나라·초(楚)나라 일대 9개 군을 봉읍지로 거느리며 팽성을 도읍지로 삼았다. 이어서 17명의 장군들을 각각 연고지의 제후왕으로 임명한다. 그 과정에서 특별히 유방을 한중왕(漢中王)으로 깎아내리고 파촉 및 한중의 변두리 지역을 봉읍지로 내린다.
유방은 항우가 당초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을 변두리로 내몬 처사에 분개하여 즉시 반기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막료 소하가 말려서 일단 참았다. 유방은 도읍지 남정으로 부임하면서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외나무다리를 불사르며 행군했다. 기타 제후왕들이 배후에서 공격하는 것도 차단할 겸 동진하지 않을 것임을 항우에게 일부러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남정으로 행군하는 도중 유방의 병사들은 동쪽에 두고 온 고향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너도나도 탈영했다. 한신도 수차례 탈주했는데 그때마다 소하가 뒤쫓아가 달래서 데려왔다. 유방은 소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이어서 한신의 전략을 받아들여 장병들이 동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항우와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소하에게 파촉의 세금을 거둬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명하고, 한신에게 명하여 외나무다리를 복구하는 척하면서 진창(陳倉)을 습격하여 일거에 관중 세력을 제압해버렸다. 이제 유방은 한중왕에 임명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항우와 천하를 놓고 겨루는 초한지쟁(楚漢之爭)에 접어든 것이다.
– 팽성대전
유방이 관중지역으로 치고 올라올 때 항우는 전국시대 제나라 지역에서 제후왕 임명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든 전영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방이 관중을 탈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항우는 즉시 회군하여 유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장량은 서신을 보내 유방은 단지 처음 약속대로 관중 땅을 차지하면 만족할 것이며 더 이상 동진할 생각이 없다고 알렸다. 이에 항우는 안심하고 계속 전영을 공략하게 된다.
한편 유방은 관중으로 올라온 뒤 진제국의 왕실 전용 수렵장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짓도록 하는 등 민심을 회유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듬해 유방은 병사를 이끌고 동진하여 낙양을 점령하면서 항우의 세력권에 바짝 다가갔다. 낙양에서 마을 장로 동공(董公)의 건의를 받아들인 유방은 ‘의제를 살해한 항우의 죄악상’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의제를 위해 대성통곡하는 쇼맨십까지 연출했다. 그런 다음 각지의 제후왕들에게 통보하여 ‘의제를 살해한 죄인’을 토벌하자고 선동했다. 항우의 불공정한 제후왕 임명에 불만을 품었던 제후들이 적극 가담하면서 유방의 연합군은 56만 대군으로 성장했고 여세를 몰아 항우의 도읍지 팽성까지 함락했다.
팽성을 공략한 유방은 일시적으로 득의양양하여 초패왕의 금은보화 및 미녀들을 차지하고 연일 음주가무에 빠져들었다. 제나라 지역에 발이 묶여 있던 항우가 소식을 듣고 회군하여 유방을 기습했다. 유방은 참패를 당하고 기병 10여 명만 이끌고 팽성을 탈출하지만 부친과 처자식은 항우에게 생포되었다. 항우의 기세에 놀란 제후왕들은 유방과 결별하고 모두 항우 편으로 붙었다. 유방은 후퇴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재기에 성공한다. 유방은 한신 등에게 명하길 북상하여 위표와 조헐을 공략해서 측면의 위협을 제거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팽월에게 명해 남쪽에서 항우의 세력을 교란시키도록 했다. 또한 수하(隨何)를 파견하여 구강왕 경포를 회유하여 항우를 배반하도록 부추겼다. 유방의 작전이 이처럼 교묘하긴 했지만 여전히 항우의 상대가 안 되었다. 형양에서 포위당한 유방은 군량미마저 끊기자 휴전을 제의했다. 항우는 범증의 지시대로 휴전 제의를 거절하고 유방의 군대를 계속 몰아붙였다. 겹겹 포위망에 갇힌 유방은 자신으로 위장한 장군기신(紀信)의 도움으로 기병 수십 명을 대동하고 탈주에 성공한다.
– 광무대치
유방은 항우의 예봉을 피해 지금의 하남성 획가현 동쪽 소무산(小武山)에 진을 치고 항우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된다. 이때 항우는 단독으로 붙어 결판을 내자고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유방은 항우의 10대 죄악을 열거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극악무도한 못된 항우를 처단하러 왔는데 감히 이 어르신네께 도전하겠다고?” 항우가 분노하여 활을 당겼다. 화살은 유방의 가슴을 정통으로 맞춰버렸다. 유방은 즉각 발가락을 부여잡으며 고함을 질렀다.“저 놈이 내 발가락을 맞췄네.” 유방은 가슴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쓰러졌다. 장량은 쓰러진 유방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유방이 여전히 건재함을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다.
– 해하의 결전
고조 4년 기원전 203년 8월, 항우는 유방의 포위 전략에 빠지면서 군량미가 바닥났다. 어쩔 수 없이 유방에게 휴전을 제의해 천하를 양분하기로 합의했다. 항우가 군대를 해산하고 동쪽으로 귀환할 때 유방 역시 서쪽으로 귀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은 피폐해진 항우 군대를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진언했다. 유방은 즉각 마음을 바꾸었다. 한신과 팽월에게 사신을 보내 함께 항우를 제거하자고 제의했다. 장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신과 팽월에게 제후왕을 약속하자 그제서야 한신과 팽월이 움직였다. 유방은 사신을 보내 초나라 대사마 주은(周殷)과 경포를 설득하여 북쪽으로 진군하여 지금의 안휘성 와양(渦陽) 동쪽 성보(城父)를 함락시켰다. 유방은 유방대로 주력 부대를 이끌고 항우를 추격하여 지금의 안휘성 영벽(靈壁) 남쪽 해하까지 밀고 나갔다. 한신, 팽월, 경포, 주은 등이 대군을 이끌고 뒤쫓아오자 도합 30만 대군이 항우를 겹겹이 포위해버렸다. 항우의 군대는 지치고 굶주렸는데 한풍이 몰아치는 깊은 밤 사방에서 초나라 고향 노래가 울려퍼졌다. 항우는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깨닫고는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안휘성 화현 동북방 오강진에 이르러 자결하고 만다. 장장 4년에 걸친 초한지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 정치
– 군국제의 실시
한 제국 통일 유방은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 데 공이 컸던 신하들과 유씨 일족들을 제후(諸侯)와 열후(列侯)로 봉하였다. 제후(諸侯)가 분봉된 곳은 30여 郡 이상이었고 전국의 2/3에 가까운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에 반해 황제는 수도 장안과 그 근기지역을 군현제로 통치하였을 뿐이었다. 초한대전 당시 보여주었던 이성제후(異姓諸侯)들의 뛰어난 역량은 통일 후 황제에게 잠재적인 위험요소가 되었다.
– 이성제후 제거
유방은 제후들에 의해 황제 권력이 위협받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성제후를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楚王 한신을 제거하였다. 초한대전 때 보여준 한신의 능력은 통일 후 유방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이 때문에 유방은 거짓으로 순행을 발표한 뒤 한신을 체포했다. 한신은 회음후(淮陰候)로 강등당하고 후에 여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韓王 신(信)은 흉노에게 포위되자 항복했는데, 이를 계기로 황제는 國을 폐하였다. 趙王 장이(張耳)가 죽은 다음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중앙정부에 죄를 지어 열후列候로 강등당하였다. 梁王 팽월(彭越)은 모반의 혐의로 죽음을 당하였다. 이성제후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淮南王 영포(英布)는 먼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 당하였다. 燕王 노관(盧綰)은 이렇게 이성제후들이 제거되는 것을 보고 흉노에게 항복해버렸다. 長沙王은 후계가 없어 화를 면하였지만 그가 죽은 후 나라는 해체되었다. 이렇게 모든 이성제후를 제거한 유방은 그 자리에 동성제후를 봉하였다.
– 흉노와의 관계
유방이 중원을 통일했을 때에는 흉노의 모돈단우(冒頓單于)가 몽고 만주 중앙아시아지역을 모두 통일하여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여러 방면으로 한을 침략하여 진대에 빼앗겼던 하남지역을 회복하였다. 이에 유방은 흉노를 직접 정벌하고자 하였다. 모돈단우의 40만 기마병사와 유방의 32만 보병부대가 지금의 산서성 대동현 부근에서 맞붙었다. 유방은 모돈단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평성에서 포위당하였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백등지위)
이후 유방은 흉노와 화친을 맺었는데 종실의 여자를 모돈단우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많은 비단과 쌀 등을 넘겨주어야하는 불공정한 조건을 떠안아야 했다. 하지만 화친조약을 맺은 후에도 흉노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으며 그들의 강한 군사력 때문에 뚜렷한 해결방법도 없었다.
○ 유방에 대한 평가
“항우가 포악할 때 유방은 덕정을 베풀었다. 파촉 한중에서 분발하여 관중 땅을 수복했다. 항우를 죽이고 황제에 올라 천하가 안정되면서 제도와 풍속을 일신했다.” — 사마천, 고조본기
함양을 공략할 장수를 선정할 때 반란군의 정신적인 영수였던 초왕 및 초왕의 군신들은 관대하고 마음씨 좋은 유방을 택했다.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후 약법삼장을 선포하여 진제국의 백성 및 관리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비해 항우는 함양에 들어서기도 전에 투항한 진제국의 병사 20만 명을 생매장시켜버렸다. 그리고 정작 함양에 입성해서는 항복한 진제국의 황제 자영을 살해하고 궁실을 불사르고 금은보화를 약탈했다. 진제국의 백성들이 크게 실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뒤 항우와 유방이 대결 국면으로 치달으면서 유방의 군대가 항우에게 수차례 격파 당했지만 그때마다 소하가 관중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속속 지원해줄 수 있었던 것도 유방이 그 지역의 민심을 이미 얻어놓은 덕분이었다.
항우는 서초패왕에 오른 뒤 반군 장수들을 제후왕으로 임명했다. 그 과정에서 항우는 유방을 견제하여 파촉 지역으로 좌천시켜버렸다. 한편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품은 전영 등 제나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항우는 이들을 토벌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이때 유방은 슬그머니 위로 올라가 관중지역을 수복한다. 당초 약속대로라면 관중 땅은 유방의 몫이었기 때문에 수복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유방은 장량·진평 등 측근의 계략 및 역이기·수하 등 유세객의 건의를 채용하고 한신, 팽월, 경포 등과 연합하여 마침내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그 후 유방은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개국공신들을 제거하면서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부세를 경감하고 형벌을 관대하게 하고 재야의 인재를 발탁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또한 소하, 한신, 장창 및 숙손통 등에게 명하여 법령, 군법, 역법 및 의례를 정비토록 하였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제도와 풍속’을 일신했다는 뜻이다.
“애초에 고조는 문학(유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닦지 못했지만 품성[成]이 밝고 매사에 통달했으며 계책을 좋아하고 능히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아 문지기나 말단 병사라도 옛 친구를 대하듯이 했다.” — 반고, 한서
유방은 용인술의 대가였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그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유방이 황제가 된 뒤 낙양 남궁에서 잔치를 열면서 신하들에게 자신이 황제가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막사에 앉아서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재주는 내가 장량을 못 따라간다. 후방에서 백성을 안정시키며 군량미를 대고 공급로를 유지하는 재주는 내가 소하만 못 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백전백승 하는 재주는 내가 한신을 따라갈 수 있겠나. 이 세 사람은 인걸들이다. 나는 그들을 기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항우에게는 범증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가 내게 붙잡힌 까닭이다.”
유방은 사람을 대할 때 예의가 없고 막가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일단 타당한 소리를 들으면 즉각 받아들였다. 또한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여 바로 고쳤다. 예를 들어, 역이기의 계책을 받아들여 장량에게 소개했을 때 장량은 여덟 가지 이유를 들어 악수(惡手)라고 진단했다. 이때 유방은 먹던 밥을 뱉어내며 욕설을 퍼부었을지언정 즉각 자신의 실착을 인정하고 원래 계획을 당장 취소해버렸다. 처음 함양에 입성했을 때 호화로운 궁전과 금은보화 및 미인을 차지하고 안주하려 했지만 번쾌와 장량의 권고를 듣고 즉각 막사로 돌아온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에 대하여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전한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자는 계(季)이다.
– 태조 고황제
.지위: 전한의 초대 황제
.재위: 한왕-기원전 206년~기원전 202년(4년)
황제-기원전 202년~기원전 195년(7년)
.후임: 혜제
.출생: 기원전 247년, 진 사천군 패현 풍읍 중양리
.사망: 기원전 195년, 전한 내사 장안현 장락궁
.배우자: 고황후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진나라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 항우에 의거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 고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 생애
– 탄생
유방은 패군(沛郡) 풍현(豊縣)의 중양리(中陽里),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강소 성(江蘇省) 서주 시(徐州市) 패현(沛縣)에서 아버지 유태공(劉太公)과 어머니 유온(劉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유백·유희가 있었고 아래로 이복 동생 유교가 있었다. 유방의 출생년을 두고서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유방의 어머니 유온이 유방을 낳기 전에 어느 연못 옆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몸 위에 붉은 용이 올라오는 꿈을 꾸고서 유방을 낳았다고 한다.
유방의 이름인 ‘방(邦)’은 《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후한의 학자 순열(荀悅, 148년 ~ 209년)이 지은 편년체 역사서 《한기(漢紀)》에 된 기록을 후세 학자들이 《사기》, 《한서》에 주석하면서 한 인용으로, 발굴된 유물 자료들로써 대체로 옳다고 간주되며, 자(字)인 계(季)는 ‘막내’라는 뜻이다.
유방은 코가 높고 수염이 아름다워 소위 ‘용안’이라 불리는, 긴 얼굴에 코가 돌출된 듯한 얼굴이었으며 넓적다리에는 반점 72개가 있었다고 한다(72라는 숫자는 1년 360일을 오행사상의 5로 나눈 숫자로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길한 수였다)
– 초기 생애
진 말기 농민 반란에 가담하기 전의 유방은 소위 ‘협객(狹客)’으로서, 가업은 뒷전이고 주색에 빠져 살고 있었다. 연고지인 패동(沛東)에 있던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지금의 파출소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성실하게 임무에 임하지는 않았다. 이때 유방과 함께 일했던 패의 관인 중에는 휴일 유방의 패업(覇業)을 도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도 있었지만, 이들도 아직까지는 유방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는데도 유방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고 하는 일이 실패해도 주위에서 옹호해 주었으며, 술집에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 가게가 가득 찼고 이 시기에 장이(張耳)의 식객(食客)으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부역 문제로 함양에 간 유방은 그곳에서 시황제(始皇帝)의 행차를 보게 되는데 “흠, 이 세상에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은 항우가 똑같이 시황제의 행렬을 보며 “저 자리를 언젠가는 내가 대신해 주겠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와 곧잘 대비되어 유방과 항우의 성격의 차이를 나타내는 사례로서 인용된다.
한번은 선보(單父, 산동 성) 사람인 여공(呂公)이 자신의 원수를 피해서 유방이 있는 패로 왔는데 당대 명사였던 여공을 환영하는 연회가 열리고 소하가 이 연회를 관리하게 되었다. 패의 사람들이 각각 선물과 돈을 갖고 모였는데 아주 많은 사람이 모여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 되자 소하는 가지고 온 선물이 1천 전(錢) 이하인 사람은 땅에 앉도록 했다. 이에 유방이 와서 자신은 전 1만 전의 선물을 가져왔다며 여공에게 전했고 여공이 놀라 문까지 나아가 유방을 맞이하고 상석에 앉혔지만, 유방이 그런 돈이 없는 형편을 잘 알았던 소하는 “유방은 원래 허풍이 심한 사람으로 큰소리나 칠 줄 알았지 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그러니 진심으로 대하지 말라)”라고 여공에게 전했지만, 여공은 유방을 환대하면서 그 관상을 보고 자신의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이가 바로 여치이다.
아내를 맞은 뒤에도 유방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고 여치는 친가에서 1남 1녀의 아이를 기르며 살았다. 어느 날 여치가 논에서 김매는데 지나가던 한 노인이 여치의 인상과 그 여자의 아들(후일 한 혜제)과 딸(후일 노원공주)의 고귀한 얼굴을 보고서 놀랐다. 돌아온 유방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노인에게 관상을 보게 했더니 노인은 “당신이 있어서 부인과 아이들의 인상이 고귀합니다. 당신의 고귀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라고 일러주었고 유방은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사기》에는 이 밖에도 유방이 천하를 잡을 것을 암시한 몇 가지의 일화를 수록하는데 이 중 유방을 붉은 용의 자식이라고 전한 일화는 한이 화덕(火德)으로 일어났다고 칭한 것과도 연결된다.
○ 농민 봉기
–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봉기와 거병
유방은 정장으로서 황릉 공사에 동원될 인부를 함양으로 데리고 가지만, 진의 가혹한 노동과 형벌을 두려워한 인부들은 차례차례로 도망쳤고 난처해진 유방은 술을 퍼마시고 만취한 상태로 남은 모든 인부들까지 도망치게하고서 자신도 다른 갈 길이 없는 인부들과 함께 소택(沼澤)에 숨었다.
진시황제 사후인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봉기하고 그 세력은 점차 강대해져, 유방이 있던 패의 현령(縣令)도 반군에 협력할지를 놓고 동요하는 가운데 소하와 조참이 “현령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으니 인기 있는 유방을 내세워 반란에 가담하자!”고 외쳤다. 현령은 일단 그 진언을 수용했지만, 유방에게 사자를 보내놓고 생각이 바뀌어 성문을 닫고 유방을 내쫓으려 했다. 유방은 꾀를 내어 비단에 쓴 편지를 성내에 던졌다. 편지에는 “지금 이 성을 필사로 지키는데 제후(반란군)가 머지않아 패를 공락하면 패 사람들에게도 재앙이 미치니 지금 현령을 죽여서 의지가 될 인물(유방)을 수장으로 세워야 한다”고 써 있었고 성내 사람들은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결국 맞았다. 유방은 처음에는 “천하는 흐트러지고 군웅이 싸운다. 나 같은 사람을 선택했다가는 한 번에 패하리라. 다른 사람을 택해야 한다”며 사퇴했지만, 소하와 조참까지 나서서 유방을 현령으로 추천했으므로, 유방은 이를 수용했다. 현령이 된 이후 패공(沛公)으로 불린 때 유방이 모은 병력은 2천 명에서 3천 명을 웃돌았고 부하로는 소하나 조참 말고도 개고기 도살업자이자 유방의 동서였던 번쾌(樊噲), 유방의 어릴 적 친구로서 동일에 태어난 노관(盧綰), 현의 마구간지기 하후영(夏侯嬰), 방직업자 주발(周勃) 등이 있었다. 이 군단으로 주변 현을 공격하면서 옹치(雍齒)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풍의 수비를 맡겼는데 옹치는 구 위(魏) 땅에 할거하던 위구(魏咎)의 회유에 넘어가 유방을 저버리고 위구에게 가담했다. 격노한 유방은 풍을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한 채 하는 수 없이 패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진승은 진의 장수 장한(章邯)의 군에 패하고 도망치다가 피살되고 진승의 부하 경구(景駒)가 영군(甯君)과 진가(秦嘉)에 의거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풍을 차지하려면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유방은 경구에게 군사를 빌리러 간다.
기원전 208년, 유방은 영군과 연합해 진군과 싸웠으나 패했지만, 새로이 공격해 함락시킨 탕(碭, 지금의 안후이 성 탕산碭山. 탕이란 돌벽)에 주둔하던 군사 5천 명에서 6천 명을 수합해서 하읍(下邑, 현재 하남 성 녹읍)을 함락시켰으며, 이 병력으로써 풍(豊)을 재공격해 겨우 떨어뜨렸지만, 풍을 차지하기에 앞서 유방은 풍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중요한 것을 손에 넣었다. 책사 장량이다. 시황제 암살에 실패하고서 구 한(韓) 땅에서 병사를 모아 진과 싸우려 했으나 실패하고 유(留, 패의 동남) 땅의 경구에게 가담하려고 했다. 자신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장량은 자신의 병법을 다양한 인물에게 말하고 다녔지만 아무도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 가운데 유방만은 자신이 한 말을 경청하자 감격해 “패공께서는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영웅호걸이십니다”라며 유방을 칭송한 후 유방의 작전 대부분을 입안했고 장량이 한 말을 유방은 거의 무조건 들어주어 천하를 결국 잡는 유방과 장량은 생각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간주되는 군신 관계의 표상으로 후세인에게 추앙받는다.
그 무렵 경구는 항량(項梁)에게 살해되고 항량이 새로운 반란군의 두령이 되었으며, 구 초 회왕(懷王)의 손자를 데려다 초왕(楚王)으로 앉히고 조부처럼 회왕이라 부르게 했다〔후일 항우에게 칭호 의제(義帝)를 받았다〕. 유방은 항량의 세력하에 들어가 항량의 조카인 항우와 함께 진군과 싸웠다. 진군을 수차 물리친 항량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진군을 얕보다가 그만 장한에게 피살됐다. 유방 은 군을 돌려 새로 반군 거점이 된 팽성[彭城, 현재 강소 성 서주 시]로 집결했다. 항량을 죽인 장감은 북으로 조(趙)를 공격해 조왕의 거성인 거록(鉅鹿)을 포위했고 조는 초에 구원을 요청했다. 회왕은 송의(宋義)·항우·범증(范增)을 장군으로 하는 주력군을 보내 진군을 격파하고사 함양으로 즉시 진격하면서 따로 유방을 별동대로 서부를 돌아 함양을 치게 한다는 작전을 세웠으면서 “가장 먼저 관중[함양 일대]에 들어간 자를 그 땅의 왕으로 봉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조로 향했던 항우는 도중에 행군을 의도로 늦추던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총지휘관이 되어 도강하고서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3일치 식량만을 남긴 채 나머지 물자를 모두 없애고 퇴로를 끊어 병사들을 필사로 싸우게 한다는 굉장한 전술로 진군을 격파하여 용맹을 진작하고서 함양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진의 포로 20만 명을 생매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일 항우를 다룬 악평 중 하나로서 항우의 발목을 잡는다.
– 함양 입성
유방이 이끄는 별동대 기세는 항우군에 비하면 질과 양이 뒤떨어졌고 군기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병사들을 이끌고 간신히 고양〔高陽, 하남 성 기현杞縣〕이라고 하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유생 역이기(酈食其)가 유방을 찾아왔다. 평소 유학자라면 질색했던 유방은 역이기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했고 역이기를 만난 자리에서도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어서 여자들에게 다리를 주무르게 하는 유방의 태도를 두고 역이기가 일갈하자 유방은 무례를 사과하고 역이기에게 의견을 묻자 역이기는 유방의 군대를 까마귀떼처럼 무질서한 군대[오합지졸]라고 지적하면서 “여기서 멀지 않은 진류(陳留)는 교통의 요지로 식료를 아낄 수 있으니 이를 얻어야 한다. 성주는 반군을 위협스럽게 생각하는데 항복해도 신변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기만 하면 유방에게 귀순하게끔 설득하겠다”고 제안했다. 유방은 이를 수용했고 진류성 성주는 설득에 좇아 항복했으며, 유방은 교통의 요지와 막대한 자금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에 넣었다. 유방은 병력을 정돈하여 진군해 개봉(開封)을 공락하고서 한에 들러서 소수 병력으로 고전하던 한의 왕성과 장량을 구원하고 진군을 내쫓아 한을 재건했고 그 은의를 내세워 장량을 객장(客將)으로서 빌린다.
나아가 남양(南陽)을 공략하고 성주가 도망치고 없는 완[宛,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남양南陽]을 포위해 항복시켜서 진의 영역에 더욱 바짝 다가간 때 유방은 진류에서 했듯이 항복만 하면 성주의 지위는 보전해 주었기에 쓸데없이 전투할 필요도 없었고 진군 속도도 항우보다 빨랐다. 유방은 관중 남부 관문인 무관(武關)까지 결국 이르렀다. 이 무렵 항우도 조에서 진군 주력을 격파했고 진 내부는 크게 동요했다. 시황제 사후 2세 황제를 내세워 전권을 장악한 환관 조고(趙高)는 패전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이 책임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나머지 2세 황제를 죽이고는 기원전 207년에 이르러 유방에게 관중을 둘로 나누어 각자 왕이 되자는 밀서를 보내지만, 이를 가짜라고 판단한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무관의 수비대장을 장량의 계책으로 속이고 무관을 차지한다[이후 조고는 왕으로 세우려던 자영에게 피살].
요관(嶢關)은 진의 마지막 요새로서 죽음을 각오한 군대가 버티고 있었다. 이에 장량은 군사인 수비대장이 상인 출신으로 타산적인 인물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수많은 기치를 세우고 대병력이 온 듯이 꾸미는 계책으로 항복을 받아낸다. 유방의 군은 성에 들어오자마자 불시에 수비대를 공격해 제압하고 요관마저 차지했다[대장이 항복해도 결사한 관문의 병사들은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장량은 이미 간파한 것이다]. 이렇게 유방은 관문에 입성했고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 패상(覇上)까지 진군한 유방 앞에 진 왕 자영(子嬰)이 목에 끈을 묶고 백의 차림으로 나타나서 황제의 옥새를 바치면서 항복한다. 부하들은 자영을 죽여야 한다고 외쳤지만 유방은 이를 듣지 않고 자영의 목숨을 보증했다. 함양에 입성한 유방은 궁 내의 여자와 금은보화에 눈이 멀어 오래 머물며 즐기고 싶었지만 번쾌나 장량의 간언으로 패상으로 물러났다. 시골 한량이었던 유방에게 함양의 재보와 후궁의 여자들은 극락으로까지 여겨졌지만, 부하의 충고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유방의 도량과 부하를 향한 신뢰는 항우와 상이해 대비되며, 그 후 천하통일에도 매우 크게 작용한다. 덧붙여 이때 소하는 진의 기록 보관소에 들어가 법령 등의 서적을 모두 거두어 돌아왔는데 이것은 후일 한 왕조의 법률 제정과 지방 통치에 유익했다.
– 한왕에 책봉
패상으로 물러난 유방은 그곳에서 관중 땅의 부로(父老)들을 모아서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언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통제와 제재로 일관한 진의 가혹한 법률을 “사람을 죽이면 사형하고, 다치게 한 자는 처벌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처벌한다.”는 세 가지 조항만을 남기고 모두 폐지하여 관중 땅에서 유방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오르게 되었고 유방이 왕이 되지 않는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 이 ‘약법삼장’은 후일 ‘간편한 법률’을 가리키는 법률의 격언이 되었다.
그 무렵 항우는 동부에서 관중으로 진격했다. 유방은 어떤 사람의 “당신이 먼저 관중에 들어왔지만, 항우가 오면, 그 공적을 가로채리라. 관중을 봉쇄하면, 당신이 그대로 관중의 왕이다”라는 진언을 듣고 관중의 동부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에 병사를 파견해 지키게 했다. 유방이 관중에 들어올 수 있었던 최대의 요인은 어려운 상대인 진의 주력군을 대부분 항우가 맡았던 사정에 있었는데도 이미 관중 왕이 듯이 행세하면서 함곡관을 닫아버린 행위에 격노한 항우는 영포(英布)를 시켜 이를 쳐부수게 했다. 함곡관에 들어온 항우는 40만 군세를 몰아 유방을 멸하려고 했고(여기에는 참모 범증의 진언도 있었다), 유방의 부하인 조무상(曹無傷)도 이에 영합하느라 “패공은 관중의 왕위를 노리고 진왕 자영을 재상으로 하여 관중의 보물을 독점하려 하고 있다”고 중상모략하며 항우의 분노를 부채질하기에 이르렀다. 병력도 용맹도 유방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던 항우와 맞서야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때마침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이 유방군의 진중에 있었다. 일찍이 장량에게 은혜받은 일이 있었던 항백은 장량에게 보은하고자 항우의 공격을 앞둔 유방군 진영에서 장량을 구원하려고 했으나 장량은 유방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지 않겠다며 거절하면서 항백을 유방에 소개시키고 어떻게든 항우에게 항변해야 한다며 간절히 부탁했다. 항백의 중개로 유방은 항우가 주재한 홍문(鴻門)에서 변명하고자 참석하여 목숨을 수차 위협받았으나 장량이나 번쾌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홍문의 회). 진중으로 돌아온 유방은 변절자 조무상을 죽이고 그 목을 군문에 내걸었다.
그 후 항우는 함양에 들어와 항복한 자영을 위시해 진의 왕족이며 관리 4천 명을 몰살시키고 진의 모든 보물을 거두어 돌아오면서 아방궁을 비롯해 진의 화려한 궁전을 다 태워 버렸으며,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된 여러 보물을 훔친 행동은 유방의 관대한 행동과 대비되어 관중 백성의 민심이 항우에게서 유방에게로 기우는 한 요인이 된다. 나아가 팽성으로 돌아온 항우는 ‘서초패왕(西楚覇王)’을 자칭하면서 이름뿐인 왕이었던 회왕을 ‘의제’로 높여서 변경으로 보냈다가 길에서 죽였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제후들에게 진나라 이전의 봉건제를 실시한다. 공적보다는 항우와의 친소(親疏)관계를 기준으로 성립했던 이 봉건제는 제후들의 원성을 샀고 봉건제 시행 직후에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유방에게도 약속된 관중 땅이 아닌 그 서부의 한 지방으로 당시로서 벽지이자 변경에 불과했던[통일 이전에 진 영토이기도 했던] 한중(漢中)과 파촉(巴蜀, 중국 사천 성의 옛 호칭)이 주어졌는데 ‘좌측[서부]으로 옮긴다’고 한 데서 후일 ‘좌천(左遷)’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단, 당시 ‘관중’이란 단순히 ‘관중 분지’만을 가리키는 때와 ‘통일 이전 진의 영토’ 전역을 가리키는 용법이 있었고 양방 모두 용법이 병용됐다. 즉 후자를 좇으면, ‘관중을 준다’고 했던 약속은 지켜졌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유방이 동부로 진입을 방어하고자 관중은 장한, 사마흔, 동예 등 구 진의 장군 삼 명에게 분배된다. 당시 한중은 유배지로 여겨질 정도로 변경이었다. ‘촉의 벼랑길’이라 불리는, 사람 일 명이 겨우 통과할 길 말고는 한중으로 통하는 어떤 길도 없었고 유방이 데리고 있던 병사 3만 명은 도중에 대부분이 도망쳐서 남은 병사들도 동부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다.
○ 초한전쟁
– 항우와 대결
이때 유방 진영에 가담한 또 한 사람이 바로 한신(韓信)이다. 원래 항우군에 속했지만, 재능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자 울분을 품고 유방에게 돌아선 한신은 처음에는 일개 병졸에 불과한 하급장교였지만, 한신의 재능을 알아본 소하가 천거하여 대장군(大將軍)으로 기용된 때 한신은 “항우는 강하지만, 항우의 힘은 무르다. 특히 부하 장수들이 처우에 불만이 팽배해 있으니 동으로 갈 기회는 반드시 온다. 유방은 항우와 반대로만 행동하면 인심을 장악할 수 있다.”라며, “관중의 삼왕은 항우에게 병사 20만 명을 잃은 구 진의 장군으로, 인심은 따르지 않겠고 관중은 간단히 함락되리라. 유방의 병사들은 동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니 이런 귀향의 정을 잘 이용하면 강력이 되리라.”라고 진언했고 유방은 한신의 진언을 전면으로 이용했다.
한신의 말대로 항우를 대상으로 한 반란이 잇따르자 항우는 진압하고자 도처로 출정해야 했는데 자신을 의심하는 항우의 눈을 피하고자 유방은 장량의 계책대로 파촉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부수어 자신이 한중을 벗어날 의지가 없다고 천명하는 한편, 항우에게 온화하고 공손한 어조의 편지를 보내며 반항할 뜻이 없다고 현로했다. 안도한 항우는 반란한 제의 전영(田榮)을 토벌하러 나섰고 유방은 자신이 부순 길 이전에 쓰던 길로 관중으로 출격해 장한을 단번에 격파하고 관중을 장악하여 여기에 사직(社稷)을 세웠다. 원정지인 제에서도 변함없이 함락된 성의 주민을 몰살하는 강경한 진압을 거듭하는 항우에게 제의 백성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제에서 항우가 고전하는 사이에 유방은 제후왕들을 항복시키거나 정복하면서 동으로 동으로 항우의 본거지 팽성을 향해 진격해 왔다.
– 거듭되는 패배
기원전 205년, 유방은 아군으로 끌어들인 제후들과 함께 연합군 56만 명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들어왔다. 승리에 도취된 한군은 성에서 주야로 주연을 즐기면서 여자나 쫓아다니는 등 군기가 느슨해졌다. 이 소식을 접한 항우는 자신의 군에서 정예병 3만 명을 뽑아 서둘러 귀환해, 방심해 있던 팽성의 한군을 급습했다. 팽성전투로 유방군의 사상자는 10만에 달했고 강에 시체가 쌓여 물이 흐르지 못했을 정도였다. 유방은 황망히 도망해 겨우 목숨을 구한 와중에 유방의 아버지 유태공과 부인 여치는 초군에 포로가 되고 유방에 가세했던 제후들까지 일제히 초로 선회했다. 《사기》에는 유방이 항우를 피해 도망치던 때의 에피소드 하나가 기록되어 있는데 유방이 아들 영(盈)과 딸을 데리고 함께 마차에 올랐고 하후영이 마부가 되어 초군의 추격에 필사로 도망치는 가운데 초군에 따라잡히게 되자 유방은 마차를 가볍게 하고자 자신의 아이들을 마차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마차를 몰다 당황한 하후영이 다시 주워 왔지만, 그 후로도 유방은 계속 떨어뜨렸고 그때마다 하후영이 거듭하여 주워왔다(‘부모는 자식을 낳지만, 자식은 부모를 낳지 않는다’는 것으로 부모인 유방을 지키고자 자식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유교 윤리에 비추어 볼 때 그렇게 비난당할 일은 아니었다).
탕에 도착하여 유방은 군사를 모았지만, 항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음이 자명해지자 수하(随何)를 시켜 영포를 아군으로 끌여들이려는 계책이 성공했으나 영포는 초의 무장인 용저(龍且)에게 패하고 유방에게 도망쳐 왔다. 유방은 도중에 병사를 정비해 군을 형양〔滎陽,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하남 성 형양〕에 모으고 주위에 용도〔甬道, 벽에 둘러싸인 길〕를 쌓아 올리고 식료를 옮겨 농성을 준비했다. 이 시기 유방의 막료로 모략가인 진평(陳平)이 가담하는 한편, 한신을 별동대로 파견하여 위와 조를 공격하게 하여 항우를 배후에서 견제하려고 했으며, 도적 출신의 팽월(彭越)을 시켜 항우군의 배후를 덮치게 했으나 기원전 204년, 초군의 격렬한 공격에 용도가 파괴되고 한군의 식량마저 바닥을 보일 때, 진평이 항우군에 이간계를 써서 항우와 그 책사인 범증과 종리매(鍾離昧) 사이를 갈라놓는 데 성공한다. 범증은 군을 떠나 귀향하는 도중에 화병으로 등창이 생겨 죽었다. 이 이간계는 성공했지만, 식량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장군 기신(紀信)을 유방으로 가장해 항우에 항복시키고 그 틈을 노려 유방 자신은 서부로 도주하고서 형양은 어사대부(御史大夫) 주가(周苛)가 잠시 지켰지만 이마저 항우에게 격파되어 함락된다.
서부로 도망친 유방은 관중에 있는 소하에게 돌아와 소하가 준비한 병사를 데리고 형양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정면승부로는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남부의 무관에서 항우를 유인하는 편이 낫다는 원생(袁生)의 진언을 좇아 남하하니 예측대로 항우도 그 쪽으로 향했다. 팽월을 시켜 항우의 후방을 공격하게 하자, 참을성 없는 항우가 팽월을 공격하는 틈에 유방은 항우와의 전면전을 피해 북진해서 성고〔成皋, 하남 성 범수氾水〕로 들어갔다. 항우는 다시 돌아와 이 성을 포위했고 유방은 버티지 못하고 물러난다. 하후영만을 데리고 패주하던 유방은 한신이 주둔하던 수무〔修武, 하남 성 획가獲嘉〕로 가서 한신의 군대를 차지하고 한신에게 제를 공격하라고 명하면서 조참(曹參)과 관영(灌嬰)을 한신의 지휘하에 두는 한편, 노관과 사촌형제 유가(劉賈)를 시켜 항우의 본거지인 초로 파견해 후방을 교란하게 했다. 제에서 한신은 자신이 가진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시원스럽게 제를 함락시키고 초에서 온 근세 20만과 장수 용저도 쳐부수었다〔이때, 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제에 한과 동맹해야 한다고 설득하러 갔던 역이기가 살해당한다〕.
기원전 203년 유방은 항우군에 맞서 수비로 일관하고, 항우의 후방으로 팽월을 보내 초군의 병참기지를 공격하게 했다. 항우는 부하 조구(曹咎)에게 “15일간 굳게 지키고만 있어라. 그 안에 내가 반드시 팽월을 주살하고 다시 돌아오리라.”고 말하며 팽월을 치러 나섰지만, 조구는 한군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출진했다 대패했고 항우가 돌아오자 방어전으로 다시 선회한 한군은 항우가 몇 번을 공격해도 응하지 않았다. 이 무렵 제를 완벅히 제압한 한신은 사자를 보내어 제 땅의 진무를 배려해서 자신을 임시 제왕(齊王)에 봉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유방은 격노했지만, 장량과 진평의 간언 “한신이 돌아서면 한에게 불리하다”는 말의 뜻을 깨닫고 한신을 정식 제왕으로 임명한다.
한과 초, 양 군은 오랫동안 계속 대치한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항우는 포로가 된 유태공을 끓는 솥에 넣을 것처럼 하여 “네 아버지가 삶겨 죽는 꼴을 보기 싫으면 항복하라”고 유방을 협박했지만, 유방은 일찍이 항우와 의형제를 맺은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내 아버지는 네게도 아버지다. 기왕 삶는 거 의리없게 혼자 다 먹지 말고 나도 좀 그 고기를 나눠줘라.”고 받아쳤다. 다음에 항우는 “둘이 1대 1 대결로 결판 내자”고 했지만 유방이 웃으며 수용하지 않자 항우는 쇠뇌를 잘 다루는 부하를 숨겨두었다가 유방을 저격하게 했고 화살 한 발이 유방의 가슴에 명중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전군이 붕괴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유방은 순간 다리를 문질러, “그 놈이 내 발을 맞혔다”고 한 후 유방은 가슴 통증으로 병상에 눕지만, 장량은 유방을 무리하게 일으켜 세워 군중을 돌게 하면서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했다. 한편, 팽월의 후방 교란에 힘입어 초군도 식량이 많이 줄어 있었고, 초한 모두 전투로 지쳐있던 때라 천하 양분을 결정하고 조약을 맺는 한편 항우는 유태공과 여치를 유방에게 송환한다.
○ 천하통일
화친으로 항우는 동부로 물러났으나, 장량과 진평은 퇴각하는 항우의 군대를 공격하자고 진언한다〔여기서 양군이 물러나면 초군은 기세를 회복하겠고 한은 이에 맞서지 못하리라고 간주한 것이다〕. 유방은 이를 수용해 항우군의 후방을 치면서 한신과 팽월에게도 병사를 거느리고 항우 공격에 참가하라고 요청했는데 유방에게 은상을 약속받지 못하자 누구도 오려 하지 않았고, 장량이 유방에게 이를 지적하자 유방은 과감히 한신과 팽월에게 큰 영지를 은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한다. 한신과 팽월의 군이 가세한 유방군은 단번에 세력이 커져 항우를 상대로 유리한 처지에 서게 되었고 사태의 추이를 파악한 다른 제후들도 유방에게 가담하면서 항우를 해하까지 결국 몰아붙였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항우와 초 병사들의 저항은 거세었고 한군은 연일 크게 희생했으므로, 장량과 한신은 무리하게 공격하는 대신 포위한 상태에서 보급을 차단하는 공격으로 초군을 서서히 붕괴시켰다. 항우는 남은 소수 군사를 데리고 포위망을 돌파했지만, 초로 도망치기 보다 한의 대군과 싸우다 자결한다(해하전투). 항우를 쓰러뜨린 유방은 최후까지 저항하던 노(魯)의 항복도 받아내고 잔당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항우를 후하게 장사지냈다.
기원전 202년, 유방은 군신에게 추대받으면서 황제에 등극한다.
논공행상에서 전장에서 공이 있는 조참을 제일로 삼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유방은 듣지 않고 소하를 제일 공신으로 세운다〔실패만 거듭했던 유방은 소하가 늘 준비한 병력과 물자가 없었으면, 옛적에 멸망했을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한신을 초왕(楚王)에, 팽월을 양왕(梁王)에 봉했다. 장량에게도 영지 3만 호를 주려 했지만 장량은 이를 사양했으며, 유방을 배반하고 위구에 가담하는 등 거병 때부터 유방을 계속 방해하다 마지막에 또다시 태연히 한중 진영에 가담하는 등 유방의 눈에 죽이고 싶은 만큼 미웠던 옹치를 맨 먼저 십방후(什方侯)로 삼았다. 이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누르고 반란하지 않게 하려는 장량의 계책으로, 다른 제후들에게는 ‘(유방이 그토록 미워하는) 옹치에게도 상이 주어졌으니 나에게도 제대로 된 은상이 내려지리라’라고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유방은 처음에는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으려 했지만, 유경(劉敬)이 장안(長安)을 수도로 할 때의 이점을 말하고 장량도 찬동하자 장안에 즉시 행차하여 그곳을 수도에 정했다.
어느 날 유방이 가신들과 함께한 주석에서 “짐은 천하를 잡고 항우는 천하를 잃은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고 이것에 대답해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항우는 오만하고 사람을 경시하지만 황제는 인자하게 사람을 사랑했으며 폐하는 공이 있으면 아낌없이 영지를 주어 천하 사람들과 이익을 나누었고 항우는 현명한 자를 시기하며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은상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잃은 이유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유방은
“귀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짐은 장량 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 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또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에 있어서는 한신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짐은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아는데 항우는 단 한 사람, 범증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짐이 천하를 잡은 이유다.”
라고 대답해 군신들이 감복했다고 한다.
– 통일 이후 숙청
역사학자들은 출신 성분이 비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재를 중용할 줄 알았던 유방이 출신 성분도 좋고 출중한 전투 능력을 앞세웠으나 백성에게 무자비했던 항우를 이긴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봉건제와 군현제를 조화시킨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그 해 7월,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반란하자 유방은 이를 친정하고 친구 노관을 연왕으로 삼은 때 유방의 신하들 중에서 한신과 팽월, 영포 세 사람은 영지도 넓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전투를 경험한 노련한 무장으로 유방에게는 특히 위험한 존재였다. 한신이 반란을 기도한다는 중상모략이 들어오자, 마침 한신을 질투하던 신료들은 이를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진평은 군사를 다루는 데 귀재인 한신과 정면승부는 위험하다면서 꾀로써 잡자고 제안했다. 유방은 이를 수용해 자신의 순행을 핑계로 한신도 오게끔 하고서 숨어 있던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온 한신이 온 곳에서 한신을 붙잡아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이듬해 흉노(匈奴)의 공격으로 항복했던 한왕(韓王) 신(信)이 그대로 반란했다. 유방은 이것을 또다시 친정해 항복시켰다. 그 이듬해인 기원전 200년, 흉노의 묵돌 선우(冒頓單于)를 토벌하고자 더욱 북으로 군을 움직였으나 묵돌 선우는 약한 병사를 전방에 배치해 패배한 척 후퇴를 반복했고 추격을 서두른 유방군의 전선이 길어진 가운데 유방은 그만 소수의 군사와 함께 백등산(白登山)에서 묵돌 선우에게 포위된다. 7일간 음식도 없이 궁지에 빠졌던 유방은 진평의 책략으로 묵돌 선우의 연지(왕비)에게 뇌물을 주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백등산의 싸움). 그 뒤 유방과 묵돌 선우는 흉노를 형, 한을 제로 하는 형제 맹약하고 매년 조공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이후 한이 흉노를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기원전 196년, 여후는 한신이 반역을 계획한다는 누명을 씌우고 소하의 계책으로 그를 잡아 처형한다. 원정 중이던 유방은 한신이 처형된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했다. 같은 해에 팽월도 붙잡혀 촉으로 유배되었으나 여치의 책모로 도중에 주살되고 한 명 남은 영포는 반란한 때부터 몸이 불편해진 유방은 태자 영[혜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치가 한 간언을 채택해 영포를 친정하러 나선 원정에서 돌아가는 도중에 고향 패에 들러 연회를 열었고 현지 백성의 아이 120명을 모아 ‘대풍가(大風歌)’를 노래하게 했다.
“큰 바람 불고 구름은 높이 나는데(大風起兮雲飛揚)위엄을 해내(海內)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威加海内兮歸故鄕)어찌 맹사(猛士)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런가(安得猛士兮守四方)?”
그리고 패에 영구히 조세 면제 특전을 주었고 패 백성이 한 요청으로 고향 풍에도 같은 특전을 주었다.
군대 20만 명으로 반란했던 회남왕 영포는 조카 오성에게 살해당했지만, 영포를 칠 때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한 유방은 기원전 195년, 여치에게 향후 누구를 승상(丞相)으로 세울지에 인사책을 남기고서 죽은 때 자신의 최후를 깨달은 유방은 “사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 묻는 여치에게 “(승상이자 상국인) 소하에게 맡기면 좋겠다. 그 다음은 조참이 좋으리라.”라고 대답하고 거듭 몇 번을 “그 다음은요?” 하고 묻는 여치에게 “그 다음은 왕릉이 좋겠지만, 왕릉은 너무 우직하니 진평을 보좌로 삼으면 되겠지만, 진평은 너무 두뇌가 명석하니 모두 맡기면 위험하다.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은 분명히 주발이리라.”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은요?” 라고 더욱더 묻는 여치에게 “대체 너는 언제까지 살 생각이냐? 그 다음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쏘아버렸다(이 유언은 사후에 모두 적중하는데 여기서 유방의 사람 보는 안목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많은 공신과 제후왕이 숙청된 공석에 유방은 자신의 유씨 일족을 왕작에 모두 봉했다. 가장 공이 크던 번쾌도 죽을 위기를 맞았지만, 귀양 가는 도중에 유방이 죽자 번쾌는 참형을 면한다. 유방의 사후 태자 영이 혜제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모두 태후의 일가인 여씨 일문이 쥐었고 강대한 제후들도 모두 유방에게 숙청된 상태에서 태후에게 맞설 사람은 없었으나 여치 사후 주발과 진평에 의거해 여씨는 숙청되어 문제(文帝)가 옹립된 후 한은 문경(文景)의 치(治)라는 번영을 맞는다.
– 논공행상
고조는 천하통일 이후 공이 있는 자와 성이 같은 유씨 등을 제후왕에 봉했는데, 다음과 같다.
연왕(燕王) 장도 회남왕(淮南王) 영포 대량왕(大梁王) 팽월 초왕(楚王) 한신 한왕(韓王) 한신(동명이인) 장사왕(長沙王) 오예 조왕(趙王) 장이 임강왕(臨江王) 공오 남월왕(南越王) 위타 강후(降侯) 주발 유후(留侯) 장량 갱힐후(羹頡侯) 유신 대왕(代王) 유중 오왕(吳王) 유비 형왕(荊王) 유가 위 보다 제후왕에 봉해진 자들이 더 있다.
관련 사자성어
1) 관인대도(寬仁大度)
.마음이 너그럽고 어질며 도량이 크다는 뜻으로, 남에게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마음씨가 넉넉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관대하고 어질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뜻이 탁 트였었다. 항상 큰 도량을 지녀 집안사람들이 하는 생산 작업에 종사하지 않았다.(寬仁而愛人喜施, 意豁如也. 常有大度, 不事家人生産作業.) _ 한서(漢書) 고제기(高帝記)
우문(宇文) 승상은 관인대도하며, 패왕의 책략을 지니고 있다.(宇文丞相寬仁大度, 有覇王之略.) _ 주서(周書) 설선전(薛善傳)
제(齊)나라 왕은 관인대도하여 다른 사람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며, 과거의 악행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齊侯寬仁大度, 不錄人過, 不念舊惡)
2)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이직 젖내가 가시지 않았다.
.상대를 얕잡아 볼 때 쓰는 말이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어 언행이 유치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_사기 고조본기(史記 高祖本記) /한서 고제기(漢書 高帝記)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후 도처에서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초(楚)나라의 귀족 출신인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과 항우(項羽)도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재건하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항우가 최종적으로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접수하자 진나라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지 십육 년 만에 완전히 막을 내렸고 천히는 항우의 손아귀로 떨어진 듯 보였다. 초패왕 항우는 모사 범증(范增)의 계책에 따라 위험인물인 유방(劉邦)을 중원에서 영원히 쫓아내기 위해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하고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 해당하는 한중 땅으로 보냈다.
힘이 약한 유방은 한중 땅과 중원 땅의 유일한 통로로 알려진 잔도(棧道)를 불태워 중원으로 다시 돌아갈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한중에 들어간 유방은 한신(韓信)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병사를 모으고 말을 사들여 힘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수년의 준비 끝에 군사가 강해지자 유방은 잔도를 보수하는 척하여 적의 주의력을 잔도 쪽에 집중시킨 후 옛길인 진창(陳倉)을 통해 진격하였다. 순식간에 관중 땅을 점령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올라가 항우의 휘하제후들을 정벌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항우의 수도 팽성(彭城)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하지만 항우의 공격을 받아 팽성의 전투에서 대패하자 유방을 따랐던 제후들이 하나 둘씩 그를 배반하고 항우 쪽으로 붙었다. 유방이 이처럼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이번에는 위왕(魏王) 표(豹)가 유방을 배반하고 초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유방은 위나라 사정에 정통한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위왕을 달랬으나 위왕은 역이기의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유방은 오만하여 부하들을 무례하게 대하며 신하들을 노비 부리듯 하니 나는 그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전해들은 유방은 몹시 분노하며 한신(韓信) 관영(灌嬰) 조참(曹參)을 시켜 위왕를 치려고 하면서 역이기를 불러 물었다.
“위나라의 대장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백직(柏直)이라는 자입니다.”라고 답했다.
유방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더니 말했다. “이 자는 입에서 아직 젖내가나서 한신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이어서 “위나라의 기병대장은 어떤 자인가?”라고 물으니 “풍경(馮敬)”이라고 답하자, “이 자는 비록 현명하고 덕이 있다고는 하지만 관영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어 “위나라의 보병대장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항타(項佗)라는 자입니다.”라 하니 “이 자는 조참과 비교할 수가 없으니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유방은 한신, 관영, 조참을 보내 위왕 표(豹)를 공격하였다. 위표(魏豹)는 전투 도중 포로로 잡혔다. 유방은 그를 죽이지 않고 형양에 남겨 그곳의 수비를 맡겼다.
그 후에 항우가 한나라 군대를 포위하자 유방 휘하의 장군인 주가(周苛)가 “표(豹)는 두 차례나 한나라 왕을 배반하고 항우에게 귀순한 자이니 믿을 수 없다”면서 그를 죽여 버렸다. 구상유취는 젖 냄새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뜻의 유취미건(乳臭未乾)이라고도 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