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漢書) – 본기(本紀)
12. 평제기(平帝記)
반고의 한서-열두 번째 기록 .
평제기(平帝記)는 한 원종 효평황제 유간(漢 元宗 孝平皇帝 劉衎, 기원전 9년 ~ 기원후 5년, 재위 기원전 1년 ~ 기원후 5년)으로 전한의 14대 황제이다. 본래 휘는 기자(箕子)였으나, 간으로 고쳤다. 중산효왕 유흥의 아들로 어머니는 위희(衛姬)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중산왕이 되었으며 애제의 죽음으로 아홉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기원후 4년 왕망의 딸을 황후로 맞았고 이듬해에 왕망에 의해 독살당했다.
○ 평제기(平帝記)

효평황제(孝平皇帝)는 원제(元帝)의 서손(庶孫)으로 중산효왕(中山孝王)의 아들이다. 모친은 위희(衛姬)이다. 3살 때 후사로 세워져 왕이 되었다.
원수(元壽) 2년(BC 1) 6월, 애제(哀帝)가 붕어하니, 태황태후가 조칙을 내려 이르길 “대사마(大司馬) 동현(董賢)은 나이가 젊고, 민심에 합치되지 못하고 있다. 인수를 올리게 하고 파직시키라.”고 했다. 동현이 그 날로 자살하였다. 신도후(新都侯) 왕망(王莽)이 대사마가 되어 상서(尙書)의 일을 통솔했다.
가을 9월, 거기장군(車騎將軍) 왕순(王舜), 대홍려(大鴻臚) 좌함(左咸)을 보내 부절을 갖고 중산왕을 영접하게 했다. 신묘일, 황태후 조씨(趙氏)를 폄출(貶黜)하여 효성황후(孝成皇后)로 삼아 북궁(北宮)에 물러나 거처하게 하고, 애제의 황후는 계궁(桂宮)에 물러나 거처하게 했다. 공향후(孔鄕侯) 부안(傅晏), 소부(少府) 동공(董恭) 모두 관작을 파면하고, 합포(合浦)로 옮겼다.
9월 신유일, 중산왕이 즉위하여 고묘에 알현하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황제 나이가 9살이라, 태황태후에 조정에 임하고 대사마 왕망이 정사를 겸하니, 백관들이 자기 직무를 총합해 왕망의 명을 들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무릇 사면령이란 것은, 장차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해, 진실로 백성들의 행실을 고치고 자신을 수양하게 하여, 그 성명(性命)을 보존코자 하는 것이다. 지난 번 유사가 사면한 예전 일도 들추어 주달함이 많아지니, 죄가 누차 더하져 주살됨에 빠져 죽는 허물이 생기니, 이는 거의 신의를 중시하고 형벌을 삼가 마음을 씻어 자신(自新)하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뽑아 천거함에 미쳐서는, 직사(職事)를 거쳐 지냄에 명망이 있는 선비들도 스스로 보전하게 어려워, 폐하여 천거하지 않으니, 작은 허물을 사면하고 현재(賢才)를 천거하려는 뜻에 심히 어긋난다. (재화를) 감추어 두거나 나쁜 짓이 있으나 아직 발각되지 않아 천거된 여러 사람에 대해서는 증거를 조사하지(按驗) 말라. 선비들에게 영을 내려 성정(性情)을 연마해 나가고, 작은 병통 때문에 큰 재주를 막지 않게 하라. 지금 이후로 유사는 사면한 이전 일에 대하여 개진하거나 주문(奏文)을 세워 위로 올릴 수 없게 하라. 조서가 은혜를 망친 것만 못한 게 있으면, 말하여 논하지 말라. 여러 영을 정하여 천하에 포고해 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고 했다.
원시(元始) 원년(AD 1) 봄 정월, 월상씨(越常氏)가 흰 꿩 1마리, 검은 꿩 2마리를 누차 말을 번역해 전하면서 헌상하니, 조칙으로 삼공(三公)에게 종묘에 드리게 했다.
여러 신하들이 대사마 왕망의 공덕이 주공(周公)에 비견된다고 주청하니, 안한공(安漢公)이란 칭호를 내리고, 또한 태사(太師) 공광(孔光) 등을 모두 더 봉해주었다. 이 말이 『왕망전』에 있다. 천하의 백성들에게 작 1급씩, 관리도 그 지위가 2백석 이상이면 일체 모든 녹질을 진관의 녹봉으로 하사했다.
옛 동평왕(東平王) 유운(劉雲)의 태자인 유개명(劉開明)을 세워 왕으로 삼고, 옛 도향경후(桃鄕頃侯)의 아들인 유성도(劉成都)를 세워 중산왕으로 삼았다. 선제(宣帝)의 이손(耳孫=현손의 증손, 혹 현손의 아들)인 유신(劉信) 등 36인 모두를 봉해 열후로 삼았다.
태복(太僕) 왕운(王惲) 등 25명이 이전에 정도(定陶) 부태후(傅太后)의 존호를 의논함에, 경법(經法=常道)을 지켜 지시에 아부하거나 간사한 것에 따르지 않았고, 우장군 손건(孫建)은 조아(爪牙)같은 대신이며, 대홍려(大鴻臚) 함(咸)은 이전에 바르게 의논하고 아붙이 않아, 후에 부절을 받들고 사신으로 중산왕을 영접하였고, 또 종정(宗正) 유불악(劉不惡), 집금오(執金五) 임잠(任岑), 중랑장 공영(孔永), 상서령(尙書令) 요순(姚恂), 패군(沛郡)태수 석후(石詡)는 모두 이전에 같이 대책을 세우고 동쪽으로 나가 즉위함을 영접해, 일을 받들어 두루 치밀하게 하고 힘써 부지런하였으니, 관내후의 작을 하사하고 식읍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황제가 불려와 즉위하기 전에 지나간 현마다 2천석 관리 이하로 좌사(佐史)에게 작을 각자 차등있게 하사했다. 또한 제후왕, 공, 열후, 관내후에게 영을 내려 자식이 없고 손자가 있거나 만약 형제(同産)의 자식을 자식으로 삼은 것이 있으면 모두 후사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 공과 열후의 후사가 되는 자식에게 죄가 있으면, 내죄(耐罪) 이상을 먼저 청하게 하였다. 종실에 속하였지만 (친척관계가) 다하지 않았는데, 죄 때문에 끊어진 자는 그 속함을 회복시켜주고, 관리로 되었는데 염결(廉潔)로 천거되어 좌사가 된 자는 4백석 관직에 보임케 하였다. 천하의 관리중 2천석 관리이상 관리에 비견되나 나이가 늙어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자는, 옛 녹봉을 3분하여 그중 1/3을 주되 , 종신토록 주도록 하였다. 간대부(柬大夫)를 보내 삼보(三輔)지역을 순행하며, 부렴(賦斂)을 바친 명부에 오른 이민들을 천거하고, 원수(元壽) 2년 갑작스러웠을 때여서 부렴을 맘대로 거둬었던 것은 그 값을 보상을 해주었다. 의릉(義陵)의 백성들의 무덤이 전중(殿中)을 방해하지 않은 것은 파헤치지 말도록 했다. 천하의 이민들이 십(什) 대오의 기물을 두어 쌓아두고 갖추지 말게 하였다.
2월, 희화관(羲和官)을 두고, 관질을 2천석으로 했다. 외사(外史), 여사(閭師)의 관질은 6백석으로 했다. 교화를 펴고, 음란한 제사를 금하고, 정(鄭) 나라 음악을 내쳤다.
을미일, 의릉에 침묘(寢廟)에 신의(神衣)가 궤(柙) 속에 있었는데, 병신일 아침 그 옷이 바깥의 상(床) 위에 있으니 침묘에서는 급변(急變)으로 보고 했다. 태뢰(太牢)를 써서 제사지냈다.
여름 5월 정사일 초하룻날, 일식이 있었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공경, 장군, 중2천석 관리에게 영을 내려 돈후(敦厚)하고 능히 직언할 수 있는 자를 각 1명씩 천거하게 했다.
6월, 소부(少府) 좌장군 풍(豊)을 시켜 황제의 어머니인 중산효왕희(中山孝王姬)에게 새서(璽書)를 하사하고, 배수하여 중산효왕후로 삼았다. 황제의 외숙인 위보(衛寶)와 위보의 아우인 위현(衛玄)에게 관내후의 작을 하사했다. 황제의 여동생 4명에게 호칭을 하사하여 모두 군(君)이라 하고, 식읍을 각각 2천석 하사했다.
주공(周公)의 후손이 공손상여(公孫相如)를 봉해 포로후(褒魯侯)로, 공자의 후손인 공균(孔均)은 포성후(褒成侯)로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했다. 공자의 시호를 추존해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 했다.
천하의 여자 죄수(女徒) 중 이미 죄가 정해졌으며 귀가시키고, 고산(顧山)으로 돈 3백전으로 했다. 정부(貞婦)에게 부역을 면제하되, 향(鄕)마다 1인씩으로 했다. 소부에 해승(海丞)과 과승(果丞) 각 1인씩 두고, 대사농에 부승(部丞) 13명을 두되, 한 사람이 한 주를 맡아 농상을 권하게 했다.
태황태후가 (황실에서) 식읍으로 삼는 탕목읍(湯沐邑) 10현을 줄여 대사농에 속하게 하고, 항상 따로 계산하는 조세수입으로 빈민들을 진휼하게 했다.
가을 9월, 천하에 죄수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중산(中山)의 고형현(苦陘縣)을 중산효왕후의 탕목읍으로 삼았다.
원시 2년(AD 2) 황지국(黃支國)에서 무소(犀牛)를 헌상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황제의 이름은 2가지인데, (그 중 하나가) 기물(器物)과 통하니, 지금 이름을 고쳐 옛 제도에 부합하게 하라. 태사 광(光)을 시켜 태뢰를 받들어 고묘(高廟)에 고하여 제사지내라”고 했다.
여름 4월, 대효왕(大孝王)의 현손(玄孫)의 아들인 여의(如意)를 세워 광종왕(廣宗王)으로, 강도이왕(江都易王)의 손자인 우이후(旴台侯) 궁(宮)을 광천왕(廣川王)으로, 광천혜왕(廣川惠王)의 증손인 륜(倫)을 광덕왕(廣德王)으로 삼았다. 옛 대사마 박륙후(博陸侯) 곽광(霍光)이 종부의 형제의 현손인 곽양(霍陽), 선평후(宣平侯) 장오(張敖)의 현손인 경기(慶忌), 강후(絳侯) 주발(周勃)의 현손인 주공(周共), 무양후(無陽侯) 번쾌(樊噲)의 현손의 아들인 번장(樊章)을 모두 봉하여 열후로 삼고 작을 회복시켰다. 옛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 등의 후손이나 현손인 역명우(酈明友) 등 113인에게 관내후의 작과 식읍을 각자 차등있게 하사했다.
군국(郡國)이 크게 가물고, 황충이 날아들었는데, 청주(靑州)가 가장 심하니, 백성들이 유망(游亡)하였다. 안한공(=왕망), 사보(四輔), 삼공, 경대부, 이민들로써 백성들의 곤핍함을 위해 전택(田宅)을 헌상한 자가 230명이 되니, 호구수를 계산해 빈민들에게 주었다. 사자를 보내 황충을 잡게 하였고, 백성들이 황충을 잡아 관리에 보내면 석두(石㪷)로 재어 돈을 받았다. 천하의 백성들 중 재산이 2만전이 되지 못하거나 재해를 입은 군에서 (백성들의 재산이) 10만전이 되지 못하면 조세를 내지 말게 했다. 백성들중 역질을 앓는 자로 집을 버리고 비운 자를 위해 의약을 베풀었다. 죽은 자가 한 집에 6구 이상이면 5천전을, 4구 이상이면 3천전을, 2구 이상이면 2천전을 하사했다. 안정(安定)의 호지원(呼池苑)을 파하여, 안민현(安民縣)으로 삼고, 관사와 시장, 마을을 일으키며, 죄수와 빈민을 모집해 옮기고, 현에서 먹을 것을 차등있게 주었다. 죄수들이 이른 곳에서는, 전택과 일상물품을 하사하고, 쟁기와 소, 종자, 음식을 임시로 빌려 주었다. 또 장안성 중에 5리를 일으켜 집 2백 곳을 만들어 빈민들이 거처하게 했다.
가을, 용맹한 무인으로 절개있고 병법에 밝은 자를 군마다 1인씩 천거하게 하고, 공거(公車)를 보내주었다.
9월 무신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알자(謁者) 대사마연(大司馬掾) 44인을 시켜 부절을 지니고 변방의 병사들을 순행하게 했다. 집금오후(執金五候) 진무(陳茂)를 보내 임시로 정고(鉦鼓)로써 여남, 남양의 용감한 관리와 무사 3백명을 모집해 강호(江湖)의 도적인 성중(成重) 등 2백여 명을 구슬려 설득하자, 모두 스스로 나오니, 제 집에 돌려 보내 (본읍의) 부역을 따르게 했다. 성중을 운양(雲陽)으로 옮기고 공전(公田)과 저택을 하사했다.
겨울, 중2천석 관리로 옥사를 다스림에 공평하게 한 자를 해마다 1명씩 천거했다.
원시 3년(AD 3) 봄, 유사에게 조칙을 내려 황제를 위해 안한공 왕망의 딸을 납채(納采)하도록 했다. 이 말이 『왕망전』에 있다. 또 광록대부 유흠(劉歆) 등에게 조칙을 내려 혼례를 잡정(雜定)하게 했다. 사보, 공경, 대부, 박사, 낭, 리의 가속(家屬)들은 모두 예로써 장가들 때, 작은 수레에 병마(倂馬)를 세워 친영(親迎)했다.
여름, 안한공이 수레와 복장의 제도를 주청하였는데, 백성들의 양생(養生), 송종(送終), 혼취(婚娶), 노비, 전택, 기계의 품격을 주청했다. 관직(官稷) 및 학관(學官)을 세웠다. 군국(郡國)에선 학(學)이라 하고, 현(縣), 도(道), 읍(邑), 후국(侯國)에서는 교(校)라 했다. 교와 학에는 경사(經師) 1명을 두었다. 향(鄕)에서는 상(庠)이라 하고, 취(聚)에서는 서(序)라 했다. 서와 양에는 『효경』사(師) 1인을 두었다.
양릉(陽陵)의 임횡(任橫) 등이 자칭 장군이라 하며 창고의 병기를 도적질하고, 관사를 공격하여 죄수들을 풀어줬다. 대사도 연이 감독하여 (그들을) 쫓아내니, 모두 죄를 자복했다.
안한공의 세자 우(宇)와 황제의 외가인 위씨(衛氏)에게 모의가 있었다. 우는 하옥되어 죽었고, 위씨는 주살했다.
원시 4년(AD 4) 봄 정월, 고조(高祖)에 교사(郊祀)를 지내고 하늘(天)에 배향하였으며, 효문(孝文)에 종사(宗祀)하고 상제(上帝)에 배향했다.
은소가공(殷紹嘉公)을 고쳐 송공(宋公)이라 하고, 주승휴공(周承休公)을 정공(鄭公)이라 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부부가 바르면 부자가 친(親)하고, 인륜이 정해진다고 한다. 이전에 유사에 조칙을 내려 정희(貞姬)를 회복시키고 여죄수들을 돌려 보내어, 진실로 간사함을 막아 피하여 곧은 믿음을 보존하고자 했다. 노약자인(眊悼) 사람들에겐 형벌을 가하지 않는 것은 성인들이 제정한 바이다. 가혹하고 난폭한 관리들이 범법자의 친속(親屬)들을 잡아둬, 부녀자나 노약자들은 원한이 맺히고 교화는 상해서, 백성들이 이를 고통스러워 한다. 여러 관료들에게 분명히 경계해 주어, 부녀자가 자신이 범법한 것이 아니고 남자 나이가 80세 이상 7세 이하는 그 집안이 부도(不道)의 죄라도 연좌되지 않도록 하며, 조칙을 내려 특별히 체포한 것으로써 다른 모두를 잡아들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증거에 해당하는 것은 곧장 그 곳에 가서 심문하라. 여러 영들을 정하라.
2월 정미일, 황후 왕씨를 세우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태복(太僕) 왕운(王惲) 등 8인에게 부(副)를 두어 보내 부절을 임시로 지니고 천하를 순행하며 풍속을 살피게 했다.
구경 이하부터 6백석 관리나 종실 중 호적에 속한 자에게 작을 하사하되, 오대부(五大夫) 이상의 작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천하의 백성들에게 작 1급씩, 환과고독이나 고년한 자에겐 비단을 하사했다.
여름, 황후가 고묘에 알현했다. 안한공의 칭호를 더하여 재형(宰衡)이라 했다. 공태부인(公太夫人)의 칭호를 공현군(功顯君)이라 했다. 공의 아들 왕안(王安), 왕림(王臨)을 봉해 모두 열후로 삼았다.
안한공이 명당(明堂)과 벽옹(辟廱)을 세울 것을 주청하였다. 효선묘(孝宣廟)를 높여 중종(中宗), 효원묘(孝元廟)를 고종(高宗)이라 하고, 천자가 세세토록 제사드리게 했다.
서해군(西海郡)을 두고, 천하의 범금자(犯禁者)를 옮겨 살게 했다.
양왕(梁王) 유립(劉立)에게 죄가 있으니 자살했다.
경사(京師)를 나눠 전회광(前輝光), 후승열(後丞烈) 2 군을 두었다. 공경, 대부, 81원 사관(士官)의 명칭, 위차(位次) 및 12주의 이름을 고쳤다. 군국에 속한 바를 나누고 경계짓고, 파하고 두고 고치고 바꾸는 등 천하에 일이 많아져 관리들이 능히 다스릴 수 없었다.
겨울, 큰 바람이 불어 장안성 동문 가옥의 기와를 다 날려 버렸다.
원시 5년(AD 5) 봄 정월, 명당에서 협제(祫祭)를 지냈다. 제후왕 28인, 열후 120인, 종실의 자제 9백여 명이 불려와 제사를 도왔다. 예가 끝나자 모두 식호를 더해주고, 작과 금, 비단을 하사하며 관리들에게는 질을 더해주었는데, 각자 차등있게 하였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듣자하니, 제왕은 덕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그 다음 친한 이를 친하게 해 서로 미치게 된다고 한다. 옛날 요임금은 구족(九族)과 화목하고, 순임금도 그들과 돈독히 질서를 잡았다. 짐이 황제는 어린데 또 국정을 통괄하게 되어, 종실의 자식이 모두 태조 고황제의 자손이거나 형제인 오경왕(吳頃王), 초원왕(楚元王)의 후손으로, 한의 원년부터 지금까지 10만 여명인데, 비록 왕후의 친속에 있다 해도 서로 능히 살펴줄 수 없어, 혹 형죄(刑罪)에 빠져드니, 죄에 이르지 않게 가르치고 훈계해야 한다. 전(傳)에도 이르지 않았던가? ”군자가 친한 자에게 돈독하면, 백성들이 인에서 흥한다“ 종실이 된 자 중 태상황 이래로 각각 세씨(世氏)가 되니, 군국에 종사(宗師)를 두어 그들을 살피어 교화하여 가르치게 하라. 2천석 관리로 덕의(德義)가 있는 자를 종사로 삼고, 교령(敎令)을 따르지 않는 자를 살려 원통히 생업을 잃은 자가 있으면, 종사가 전언을 글로 써서 종백(宗伯)에게 말하고, 청하여 듣게 하라. 늘 해마다 정월에 종사에게 비단을 각자 10필씩 하사하라”고 했다.
희화(羲和)인 유흠 등 4인을 시켜 명당과 벽옹을 수리하게 하여, 한나라가 문왕(文王)의 영대(靈臺)나 주공이 지은 낙읍(洛邑)과 같이 부합하게 하였다. 태복 왕운 등 8인에게 풍속을 살피어 덕의 교화에 선명하게 하고, 만국이 가지런히 같아지게 했다. 모두 봉하여 열후로 삼았다.
천하에 산일(散逸)된 경전이나 옛 기록, 천문, 역산, 종률(鍾律), 소학, 『사편(史篇)』, 방술(方術), 『본초(本草)』에 통하여 알거나 『오경』, 『논어』, 『효경』, 『이아(爾雅)』를 교수해줄 만한 자를 부르는데, 그가 있는 곳에서 수레 1대를 초전(軺傳)으로 봉인해 경사로 보내게 했다. 이른 자가 수천명이었다.
윤월, 양효왕(梁孝王)의 현손의 이손(耳孫)인 유음(劉音)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병오일, 황제가 미앙궁에서 붕어하였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유사가 의논해 아뢰길 “예에 신하는 임금을 죽이지 못한다 합니다. 황제의 나이가 14세이시니, 의당 예로써 염하여 원복(元服)을 더해야 합니다”고 했다. 강릉(康陵)에 장사지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황제는 인혜하셨으니, 돌이켜 보면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 매양 병이 한번 나면 기운이 빨리 위로 거슬러 올라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래서 유조(遺詔)조차 남기지 못했다. 잉첩을 (궁 밖으로) 내보내 모두 귀가시켜 시집보내게 하여, 효문제때의 고사처럼 하라”고 했다.
찬(贊)하여 이르길 “효평의 세상은 정치가 왕망에게서 나와 선(善)과 공(功)을 드러내어 스스로 높이어 융성하였다. 그 문사(文辭)를 보니, 외방(外方)의 온갖 오랑캐가 복종치 않은 생각이 없었다. 아름다운 징험에 보응이 있고, 칭송하는 소리가 아울러 지어졌다. 위로 변이(變異)가 나타나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원망하게 이르러서는, 왕망 또한 능히 다시 문식(文飾)할 수 없었다.”
* 참고할 내용
– 전한 평제
.재위: 기원전 1년 ~ 기원후 5년
.전임: 애제
.후임: 유자 영
.휘: 유간(劉衎)
.시호: 효평황제
.매장지: 강릉(康陵)
.부친: 중산효왕
.모친: 위희
.배우자: 왕황후
전한의 제14대 황제. 묘호는 원종(元宗)이었으나 후한 때 폐지됐다. 시호는 효평황제(孝平皇帝).
원제의 손자이자 성제의 조카이자 애제의 사촌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원제의 삼남 중산왕 유흥으로 소의 풍씨의 소생이다.
○ 전한 평제(平帝)
사촌형 애제가 일찍 죽자 왕실 최고 어른인 효원황후가 인망 높던 자신의 조카 왕망에게 권력을 맡겼고, 이 왕망이 중산왕 유간을 추대해 9살 나이로 즉위했다. 사실 성제, 애제가 모두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원제의 후손으로 당시 왕통에 가장 근접했던 이는 유간 밖에 없었다.
이후 기원후 4년에는 왕망의 장녀를 황후로 맞이했다. 이 사람이 효평황후 왕씨. 이 시절 권력은 왕망의 손에 있었으며, 선대 황제들처럼 그도 16살에 죽었다. 왕망이 애제 시절 애제의 외척들에게 밀려났던 경우를 생각해, 평제의 외가를 박해하고 수도에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평제가 그것에 대해 원망하자 왕망이 두려워해 평제를 독살해 버렸다. 이렇게 유간이 이렇게 죽으면서 원제의 후대는 끊어지게 되었다. 후에 전한의 마지막 황제인 유자영이 즉위하고, 얼마 안 있어 왕망이 선양을 빌미로 찬탈하며 황제가 되어 전한은 멸망한다.
한편 왕망(王莽)은 평제를 독살하고 꼭두각시, 허수아비 황제였던 유자영에게 형식적인 선양을 받아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이미 그는 유자영이 즉위했을 때 가황제와 섭황제를 칭하고 그렇게 부르게 했으며 결국 신나라를 세워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결국에는 각지에 세력들이 난립하게 만들었다. 결국에는 경시제 유현의 공격을 받아 장안 점대에서 죽음을 당하고 시신은 수천 갈래로 찢어졌으며 머리는 완에 효수되었다. 더 비참한 것은 백성들이 머리를 때리고 혀를 잘라 베어먹었다. 여담으로 평제의 황후였던 왕망의 딸 황황실주(효평황후 왕씨)는 33살 나이에 불타는 건물 속에 들어가 자살했고 왕망의 조상들과 친척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졌으며 일족들은 모두 몰살되는 등 끝이 매우 좋지 못했다.
– 평제 가족
아버지: 중산효왕 유흥
어머니: 위희
황후: 효평황후 왕씨
여동생: 수의군 유알신(修義君 劉謁臣)·승례군 유재피(承禮君 劉哉皮)·존덕군 유격자(尊德君 劉鬲子)
장인: 왕망
처남: 왕우
– 평제기 연호
원시(1년 ~ 5년)
○ 참고 : 왕망의 생애
– 초기 생애
황후의 자리에 오른 백모 왕정군에 의해 백부들이 제후에 봉해지고, 고위 관리로서 유복한 생활을 보내는 가운데, 아버지 왕만과 형 왕영이 일찍 사망하여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다. 왕망은 공손하고 검소함을 가지고, 패군의 진참(陳參)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고, 유생의 복장을 입고, 어머니와 형수를 시중들었다. 또 조카의 왕광(王光)을 양자를 삼아 친자식 이상으로 양육하여(뒤에 살해), 왕망의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 권력을 장악하다
백부 대장군 왕봉이 병이 들자, 간병을 하였고,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왕봉이 죽은 이후, 왕상(王商)과 왕근(王根)의 추천과 백모인 황태후의 후원으로 왕망은 순조롭게 출세한다. 친척 순우장을 실각시켜, 대사마가 되면서, 왕망의 기세는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로 되었다. 애제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정계 복귀의 탄원이 계속 올라오자 그는 정계 복귀를 한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애제가 붕어하자 애제로부터 황제의 옥새를 맡고 있던 대사마 동현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하여, 중산왕 유간(劉衎)을 옹립하고(평제) 대사마가 되었다. 이어 고문경학의 대가였던 유흠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많이 끌어들여 유학과 서상(瑞祥), 부명(符命, 일종의 예언서)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남 왕획을 잡아 노복(奴僕)을 죽인 죄를 묻는가 하면 장남 우(宇)의 모략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가 모두 자결하게 했다. 딸을 평제의 황후로 책봉하고, 재형(宰衡),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5년에 14살이 된 평제가 사망하고(왕망에 의한 독살), 광척후 유현의 아들 유영을 후계자로 추대하여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 · 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하며 조정의 만기를 집전하였다.
– 황제가 되다
천하를 노리고 있던 왕망은 고문을 전거로 자신의 제위 계승을 정당화하려 했다. 마침 애장이라는 인물이 고조의 예언이라며 「금궤도(金匱圖)」와 「금책서(金策書)」를 위조해 바쳤는데, 이를 전거로 거섭 3년(8년), 왕망은 고조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신 왕조를 열었다.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선양이었지만 실상은 찬탈과 다름이 없었다. 태황태후로서 전국새(全國璽)를 맡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은 사자로서 옥새를 받으러 온 왕망의 사촌형제 순(舜)에게 왕망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순이 옥새를 내어줄 것을 재촉하자 옥새를 내던지며 “너희 일족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라 저주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주 시대의 치세를 이상으로 삼은 왕망은 《주관(周官)》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국가 정책을 실시했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각종 정책은 단기간에 파탄나고, 화폐 유통과 경제 활동도 정지되어 민중의 생활은 한조 말기 이상으로 곤궁해졌다. 또한 흉노나 선비 등 주변 민족과 고구려 등의 국가의 지도자의 칭호를 제멋대로 고치고, 특히 고구려왕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와 충돌하였으며, 이는 이민족들의 반발과 관계 악화로 이어져 이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또한 전매제 강화도 실패하여 신의 재정은 빈곤해졌다.
– 반란과 최후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농민들은 마침내 신 왕조에 맞서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18년에 적미의 난이 일어났고, 남양에서 옹립된 유현을 토벌하러 보낸 신의 100만 군대도 곤양(昆陽)전투에서 경시제 휘하의 유수에게 패배하여, 이것으로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대혼란에 빠진다. 그의 신하도 배신하고, 장안에는 경시제의 군대가 입성, 왕망은 그 혼란 중에서 두오(杜吳)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수급은 경시제가 있던 성으로 보내졌으며, 몸은 공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찢어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왕망의 죽음으로 신은 멸망하였다.
○ 망탁조의(莽卓操懿)
망탁조의(莽卓操懿)는 중국 한나라부터 위진 시대까지 대표적인 4대 역적을 일컫는 말로,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 4인의 이름을 따와 만들어진 말이다. 송사 등 중국 고대문헌에 역적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로 자주 등장한다.
당나라 사람 조인(趙璘)의 저서 ≪인화록(因話錄)≫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으로, ≪송사(宋史)≫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 네 사람 모두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봉록을 먹던 국가를 무너뜨리려 한 자들로, 왕망은 선양의 시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찬탈(簒奪)의 시조’로 이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 동탁은 제위를 노렸으나 헌제의 선양이라는 미끼에 걸려 죽음을 맞았고, 조조와 사마의는 생전에 황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 자손들이 황제가 되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아예 조조는 ‘나는 오히려 주문왕을 따르겠다’는 말을 자주 하며 자신 스스로가 천자가 되지는 않겠으나 후대에 결국 조씨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노골적으로 하였다. 역심이 없는 순수한 발언이라고 보기엔 이미 조조가 헌제를 수없이 겁박하였고, 순욱이라는 희대의 명신이자 조조 자신이 “나의 장자방”이라 스스로 불렀던 인물을 숙청하면서까지 왕위에 오르는 야욕을 보였으므로 의도는 명확했다고 볼 수 있다. 애당조 황제의 자식을 밴 후궁을 죽이고 황후를 죽이고 황제 아들들까지 죽이는 행위는 결코 신하의 행위라 볼 수 없다. 또한 왕망과 조조는 구석까지 하사받아 최강의 권신으로 군림했던 바 있다.
원술은 뽑히지 않았다. 다른 네 명의 경우 중앙 정부를 장악하고 황제를 압박하여 선양을 받아냈으며, 이를 통하여 이전까지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왕조를 교체한 데 비해, 원술은 지방 군벌로서 자의로 황제를 참칭하였기에 자기 지배 지역 바깥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망탁조의 4명은 후세 사람들에게 역적에 대한 기준이자 대명사가 되어서, 누군가가 역모를 꾸미거나 혹은 맘에 안드는 누군가를 디스할 때 반드시 튀어나오는 말이 되었다. 이 구성에서 실제 찬탈은 못한 동탁을 빼고, 실제 찬탈을 도모한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을 추가하여 ‘망조의온(莽操懿溫)’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마이너하지만 홍공과 석현이라는 한나라 시절의 환관을 넣어서 망탁공현이라는 한나라 역적 라인을 호칭하는 경우도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