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漢書) – 본기(本紀)
8. 선제기(宣帝記)
반고의 한서-본기의 여덟 번째 기록.
선제기(宣帝記)는 한 중종 효선황제 유순(漢 中宗 孝宣皇帝 劉詢, 기원전 91년 ~ 기원전 49년)에 대한 기록으로 전한의 제 10대 황제(재위 : 기원전 73년 ~ 기원전 49년)이다. 자는 차경(次卿)으로 본래 휘는 병이(病已)였으나, 피휘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즉위할 때 순(詢)으로 바꾸었다.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고, 곽광(霍光)에게 옹립되어 황제로 즉위했다.
○ 선제기(宣帝記)

신작(神爵) 원년 (BC 61) 봄 정월, 감천에 행차해 태치에 교사를 지냈다.
3월, 하동에 행차해 후토에 제사지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종묘를 잇게 되어, 걱정되고 두려워하며, 만사의 실마리(統)을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그 이치에 밝지 못하다. 그러던 차 원강 4년에 가곡현직(嘉穀玄稷; 상서로운 검은 기장)이 군국에 내리고, 신작이 여러 번 모여들었으며, 아홉줄기 달린 금빛 지초가 함덕전(函德殿)의 동지(銅池) 가운데서 났고, 구진(九眞)에선 기이한 짐승을 헌상하고, 남군(南郡)에선 백호와 위봉(威鳳)을 잡아 바치니 이를 보물로 여겼다. 짐은 불명하나, 그 진기한 보물에 감동되어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재계하여 백성을 위해 빌었다. 동으로 대하(大河)의 물길을 다스리니, 천기가 청정해지고, 신묘한 물고기가 하수에서 춤추었다. 만세궁(萬歲宮)에 행차하니, 신작이 빙빙돌며 모여들었다. 짐이 부덕해 그 소임을 능히 맡지 못할까 두렵다. (원강)5년을 신작 원년으로 하라. 천하의 제 직무에 부지런한 관리들에게 작 2급씩, 백성들에겐 작 1급씩, 여자에겐 1백호마다 술과 소를 하사하고, 환과고독이나 고년(高年)한 자에겐 비단을 하사하라. 진대하였던 물건은 거둬들이지 말라. 행차하며 지나간 곳에선 전조를 내지 말게 하라”고 했다.
서강(西羌)이 반란을 일으키니, 삼보와 중도관(中都官; 경사의 여러 관부)의 형도 중 차꼬 등을 풀고 노역하던 자들을 징발하고, 차비사사(차飛射士) 및 우림고아(羽林孤兒)를 모집하였고, 호(胡)와 월(越)의 기병, 삼하(三河) ·영천(潁川) · 패군(沛郡) · 회양(淮陽) · 여남(汝南)의 재관(材官), 금성(金城) ·농서 · 천수 · 안정 · 북지 · 상군의 기사(騎士) 및 강(羌)족의 기병을 금성으로 가게 했다.
여름 4월, 후장군 조충국(趙充國) · 강노(彊弩)장군 허연수(許延壽)를 보내 서강을 치게 했다.
6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주천(酒泉)으로 가 태수 신무현(辛武賢)을 배하여 파강(破羌)장군으로 삼고, 두 장군과 함께 진격하게 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군대는 찬 이슬을 그대로 맞고,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 번거롭고 고되다. 제후 · 왕과 열후· 만이의 왕후(王侯)나 군장(君長)으로 마땅히 2년마다 내조해야 하는 자는 모두 입조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가을, 옛 대사농 주읍(朱邑)의 아들에게 황금 1백근을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했다. 후장군 조충국이 둔전(屯田)의 계책을 말하였는데, 이 말이 <조충국전>에 있다.
신작 2년(BC 60) 봄 2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이전에 정월 을축일, 경사에 봉황이 모여들고 감로가 내리니, 뭇 새들 수만 마리가 따라왔다. 짐이 부덕하나, 여러번 천복(天福)을 얻어, 공경하고 섬김에 게으르니 않았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라”고 했다.
여름 5월, 강족이 포로가 되어 항복하니, 그 수괴인 양옥(揚玉)과 추비(酋非)의 목을 베었다. 금성군에 속국을 두어 항복한 강족이 거처하게 했다.
가을, 흉노의 일축왕(日逐王) 선현전(先賢전)이 만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항하였다. 도호(都護)인 서역 기도위 정길(鄭吉)에게 일축왕을 영접하고, 거사(車師)를 격파케 하고, 모두 열후에 봉하였다.
9월, 사례교위 개관요(蓋寬饒)에게 죄가 있어 유사에게 내려보냈더니, 자살하였다.
흉노의 선우가 이름있는 대왕(名王)을 보내 봉헌하고, 정월을 하례하니, 비로소 홍노와 화친하게 되었다.
신작 3년(BC 59) 봄, 낙유원(樂游苑)을 세웠다.
3월 병오일, 승상 위상(魏相)이 훙했다.
가을 8월, 조칙을 내리길 “관리들이 청렴하고 공평하지 못하면 치도(治道)가 쇠퇴하는 법이다. 지금 작은 관리들이 직무에 부지런하나, 봉록이 박하여, 백성들을 침탈치 않으려 해도 그러기 어렵다. 1백석 이하 관리의 봉록을5/10씩 더해 주어라”고 했다.
신작 4년(BC 58) 봄 2월, 조칙을 내려 “이전에 경사에 봉황이 모여들고 감로가 내려서, 아름다운 상서가 아울러 나타났다. 태일(泰一) · 오제 · 후토의 사당을 일으키고 수리하여, 백성들이 복을 받도록 빌었다. 수만을 헤아리는 난봉(鸞鳳)이 날라 올라 도읍을 바라보다, 그 곁에서 멈추곤 모여들었다. 재계한 날 저녁 신광(神光)이 나타났다. 향주(香酒)를 천신한 저녁이 신광이 섞여 비추었다. 혹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혹은 땅에서 올라오며, 혹은 사방에서 제단으로 모여들었다. 상제가 흠향을 기꺼워 하시니, 해내가 복을 잇게 되었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 1급씩, 여자들에겐 1백호마다 소와 술을, 환과고독이나 고년한 자에겐 비단을 하사하라”고 했다.
여름 4월, 영천태수 황패(黃覇)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서 중 2천석의 질을 주고, 관내후의 작과 황금 1백근을 하사했다. 또한 영천의 이민들 중 의를 행한 자가 있으면, 1인당 작 2급씩, 역전에겐 1급씩, 정부(貞婦)·순녀(順女)에겐 비단을 하사했다.
군국에 영을 내려 현량하여 가히 백성과 친할 수 있는 자 각 1명씩 천거하게 했다.
5월, 흉노의 선우가 그 아우인 호류약왕(呼留若王) 승지(勝之)를 보내 내조하게 했다.
겨울 10월, 봉황 11마리가 두릉에 모여들었다.
11월, 하남태수 엄연년(嚴延年)에게 죄가 있어 기시형에 처했다.
12월, 봉황이 상림에 모여들었다.
오봉(五鳳) 원년 (BC 57) 봄 정월, 감천에 행차하여 태치에 교사지냈다.
황태자가 관례를 치루었다. 황태후가 승상·열후·중 2천석 관리에게 1인당 비단 1백필씩, 대부인(大夫人)에겐 80필씩, 부인에겐 60필씩 하사했다.
또한 열후의 후사가 되는 자식에겐 오대부의 작을, 남자(男子)로 아비의 뒤를 잇는 자에겐 작 1급씩 하사했다.
여름, 형도 중 두릉을 지은 자를 사면했다.
겨울 12월 을유 초하룻날, 일식이 있었다.
좌풍익(左馮翊) 한연수(韓延壽)에게 죄가 있어 기시형에 처했다.
오봉 2년(BC 56) 봄 3월, 옹으로 행차해 오치에 태치에 교사지냈다.
여름 4월 을축일, 대사마 거기장군 한증(韓增)이 훙했다.
가을 8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혼인의 예는 인륜 중의 큰 것이며, 주식(酒食)의 연회는 예악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군국의 2천석 관리들이 혹 마음대로 가혹하게 금하여, 백성들이 시집가고 장가드는데 술과 음식을 갖추어 서로 축하하며 부를 수 없도록 금하니, 이로 말미암아 향당(鄕黨)의 예가 폐해지고, 백성들이 즐기지 못하게 하니, 이것은 백성을 인도하는 소이가 아니다. 시경에 이르지 않았던가? ‘백성이 덕을 잃은 것은 음식대접이 변변치 못해서이다(民之失德, 乾후以愆)’ 가혹한 정치를 행하지 말라”고 했다.
겨울 11월, 흉노의 호속루(呼속累) 선우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항하니, 봉하여 열후로 삼았다.
12월, 평통후(平通侯) 양운(楊운)이 전일 광록훈일 때 저지른 되에 연좌되니, 파면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양운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원망하니, 대역부도하여 요참되었다.
오봉 3년(BC 55) 봄 정월 계묘일, 승상 병길이 훙했다.
3월, 하동으로 행차하여 후토에 제사지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예전에 흉노가 변방에서 노략질을 해, 백성들이 그 해를 입었다. 짐이 지존의 자리를 이었지만, 흉노를 능히 안정시키지 못했다. 허려권거(虛閭權渠) 선우가 화친을 구하려 청하였으나, 병들어 죽고 말았다. 우현왕 도기당(屠耆堂)이 그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다. (그의) 골육과 대신들이 허려권거 선우의 아들을 호한야(呼韓邪) 선우로 삼고, 도기당을 쳐서 죽였다. 여러 왕들이 아울러 선우 자리에 올라, 나뉘어져 5선우가 되어서 다시 서로를 공격하니, 죽은 자가 수만 명이고, 기르던 가축중 10중 8, 9는 손실되니, 백성들은 굶주려 서로 불지르며 먹을 것을 구하게 되니, 이로 인해서 크게 어지러워졌다. 선우 알지(閼氏)의 자손이나 사촌 동생 및 호속루 선우 · 이름있는 큰 왕(名王) · 우이질자(右伊秩 ;관호) · 저거(且渠) · 당호(當戶) 이하가 5만 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항하여 귀의하였다. 선우가 신하라 칭하고, 그의 아우를 사신으로 보내 보물을 봉헌하고 입조하여 정월을 하례하게 되니, 북쪽 변방은 편안해져 병혁(兵革)의 일이 없게 되었다. 짐이 스스로 가다듬고 재계하여, 상제에 교사하고, 후토에 제사지내니, 신묘한 광채가 아울러 보여, 혹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재궁(齋宮)을 비춘 것이 10여 각(刻)이나 되었다. 감로가 내리고, 신작이 모여들었다. 이미 유사에 조칙을 내려 상제와 종묘에 고하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3월 신축일, 난봉이 또 장락궁 동쪽 궁궐 안의 나무 위에 모여들어, 날다가 땅으로 내려왔는데, 그 빛깔은 오색이며, 10여 각이나 머물러 있어, 이민들이 모두 보았다. 짐이 불민하여, 능이 소임을 맡지 못할까 걱정하였지만, 누차 아름다운 상서를 입고, 그 큰 복을 얻게 되었다. <서경>에도 ‘(자기에게) 아름다운 덕이 있더라도 아름답다 여기지 말고, 일을 공경함에 게으리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공경대부들은 부지런할지어다. 천하의 구부전(口賦錢)을 줄여라. 사죄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라. 백성들에게 작 1급씩, 여자는 1백호마다 소와 술을 하사하라. 5일간 크게 먹고 마시게 마라. 환과고독이나 고년한 자에게 비다을 더 하사하라”고 했다.
서하·북지군에 속국을 두어 흉노의 항복한 자들이 거처하게 했다.
오봉 4년(BC 54) 봄 정월, 광릉왕 서(胥)에게 죄가 있었는데, 자살하였다.
흉노의 선우가 신하라 칭하며, 아우인 녹려왕(谷 王)을 보내 입시케 하였다. 변새에 노략질이 없어지니, 수졸의 2/10를 줄였다.
여름 4월 신축일, 어두워지고 일식이 있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하늘(皇天)이 이변을 보여 짐에게 직접 경계시키니, 이는 짐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관리들은 그 소임에 부합치 못해서이다. 이전에 사자를 보내 백성들이 고통스럽고 괴로워 하는 바를 묻게 했는데, 다시 승상과 어사의 연(연; 속관) 24인을 보내 천하를 순행하며 원통한 옥사를 보고하고, (관리들이) 마음대로 가혹하게 금하고 심히 각박하게 정치를 하면서 고치지 않는 자를 감찰하라”고 했다.
감로(甘露) 원년(BC 53) 봄 정월, 감천에 행차하여 태치에 교사하였다.
흉노 호한야 선우가 아들인 우현왕(右賢王) 수루거당(銖婁渠堂)을 보내 입시케 하였다.
2월 정사일, 대사마 거기장군 허연수가 훙했다.
여름 4월, 황룡이 신풍(新豊)에 나타났다.
병신일, 태상황묘에 불이 났다. 갑신일, 효문묘에 불이 났다. 상이 5일간 소복을 입었다.
겨울, 흉노 선우가 동생인 좌현왕을 보내 내조하여 하례하게 했다.
감로 2년(BC 52) 봄 정월, 황자 효(효)를 세워 정도왕(定陶王)으로 삼았다.
조칙을 내어 이르길 “이전에 봉황이 모여들고 감로가 내리며, 황룡이 날아 오르고, 단술(醴)의 샘이 흘러 넘치고, 마른 나무가 무성해지며, 신광이 아울러 보여 그 바른 복을 모두 받았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라. 백성들이 내는 산부에서 30전을 줄여라. 제후·왕·승상·장군·열후·중 2천석 관리에게 금과 돈을 각각 차등있게 하사하라. 백성들에게 작 1급씩, 여자는 1백호마다 소와 술을, 환과고독이나 고년한 자에겐 비단을 하사하라”고 했다.
여름 4월, 호군도위 녹(祿)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주애(珠崖)를 치게 했다.
가을 9월, 황자 우(于)를 세워 동평왕(東平王)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배양궁(배陽宮)의 속옥관(屬玉觀)으로 행차했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오원새(五原塞)의 관문을 두드리며, 나라의 보물을 봉헌하고 (감로) 3년 정월에 입조하길 원했다. 유사에 조칙을 내려 의논케 했다.
모두 다 말하길 “성왕(聖王)의 제도엔, 덕을 베풀고 의를 행함에 경사를 먼저하고 제하(諸夏)를 나중으로 하며, 제하를 먼저하고 이적(夷狄)을 나중에 한다 했습니다. <시경>에 이르길 ‘예법을 따라 법도를 넘지 않으니, 교령이 두루 행해졌다. 상토(相土)의 위엄이 있으니, 해외가 복종하였다’고 했습니다. 폐하의성덕은 천지를 가득 채워, 사표(四表)까지 그 위광을 입었습니다. 흉노의 선우가 풍교(風敎)를 향해 의를 사모하여, 온 나라가 한마음이 되어 보물을 봉헌하고 입조하여 하례드리려 하니, 이는 자고로 없던 일입니다. 선우는 정삭(正朔)이 반포된 곳이 아니며, 왕자(王者)에겐 빈객이 되니, 그 의례는 마땅히 제후왕과 같이 하여 칭신(稱臣)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거듭 절한다(昧死再拜; 신하가 말할 때 쓰는 관용어구)고 말해야 하며, 지위는 제후왕 아래로 해야 합니다”고 했다.
조칙에 “무릇 듣자 하니, 오제삼왕때는 예가 베풀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형정(刑政)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 흉노의 선우가 북쪽에서 번신(藩臣)이라 칭하며 정월에 내조하려 하는데, 짐은 사려가 미치지 못하고 덕은 능히 널리까지 덮지 못하였다. 빈객의 예로써 그를 대우하되, 지위는 제후왕 위에 두라”고 했다.
감로 3년(BC 51) 봄 정월, 감천에 행차해 태치에 교사를 지냈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 계후산(稽侯산)이 내조하여, 알현함을 고하고 번신이라 칭하였으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옥새와 인수 · 관대(冠帶) · 의상(衣裳) ·안거(安車) · 사마(駟馬) · 황금 · 수놓은 비단(錦繡) · 비단 솜(繒絮)을 하사했다.
유사를 시켜 선우를 인도해 장안의 저(邸)에 먼저 가서, 장평(長平)에 묵게했다. 상이 감천에서 출발하여 지양궁(池陽宮)에서 잤다. 상이 장평판에 올라선 선우에게 조칙을 내려 배알치 않아도 되게 하였다. 그 좌우의 당호의 무리들이 모두 열지어 바라보고, 만이의 군장과 왕후로 영접나온 자가 수만명이어서, 좁은 길에 쭉 펼쳤다. 상이 위교(渭橋)에 오르니, 모두 만세를 불렀다. 선우가 저로 갔다. 건장궁에서 주연을 베풀어, 선우를 크게 대접하고, 진기한 보물을 보여주었다.
2월, 선우가 파하고 돌아갔다. 장락궁 위위 고창후(高昌侯) 동충(董忠)과 거기장군 한창(韓昌)·기도위 호(虎)에게 1만 6천여기를 거느리고 선우를 환송하게 했다. 선우가 사막 남쪽에 머무르며 광록성(光祿城)을 지켰다. 북변에 조칙을 내려 곡식을 진휼하게 했다. 질지선우가 멀리 달아나니, 흉노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조칙에 이르길 “예전에 봉황이 신채(新蔡)현에 모여드니, 뭇 새들이 사면에서 줄지어 모두 봉황이 서 있는 곳을 향하니, 그 수가 수만 마리였다. 여남(汝南)태수에게 비단 1백필을, 신채현의 장리(長吏) 및 삼로 · 효제역전 · 환과고독에게 (비단을) 각각 차등있게 하사하라. 백성들에게 작 2급씩 하사하라. 금년의 조세를 내지 말게 하라”고 했다.
3월 을축일, 승상 황패가 훙했다. 여러 유자(儒者)들에게 조칙을 내려 <오경>의 같고 다름을 강론케하고, 상이 친히 명하고 임하여 그 가부를 처결했다. 이에 양구하(梁丘賀)를 <역경>박사로, 대소하후(大小夏侯; 하후승(勝)과 하후건(健))을 <상서>박사로, 곡량숙(穀梁淑)을 <춘추>박사로 삼았다.
겨울, 오손공주(烏孫公主; 초왕의 딸)가 돌아왔다.
감로 4년(BC 50) 여름, 광천왕(廣川王) 해양(海陽)에게 죄가 있어, 폐하고 방릉으로 옮겼다.
겨울 10월 정묘일, 미앙궁의 선실각(宣室閣)에서 불이 났다.
황룡(黃龍) 원년(BC 49) 봄 정월, 감천에 행차해 태치에 교사를 지냈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내조하니, 예로써 하사하는 것을 처음과 같이 했다.
2월, 선우가 귀국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듣자하니, 상고에 다스릴 때는 군신이 한 마음이 되고, (시비)곡직을 들어 두니, 각자 그 소임을 얻었다 한다. 이로써 상하가 화합하여, 해내가 평안하니, 그 덕이 미칠 수 없었다.(其德弗及已) 짐이 불명하여, 수차례 공경대부에게 관대히 행함에 힘써, 백성의 고통스러운 바를 알아 그 민심을 따르라는 조칙을 펴서, 장차 삼왕의 융성함에 배하고, 선제의 덕을 밝히고자 하였다. 지금 관리들이 혹 간사함을 금하지 않은 것을 관대히 한다고 여기고, 혹 혹악(酷惡)함을 어질다고 여기니, 모두 중용을 잃은 것이다. 조칙을 받들어 교화를 펴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그릇되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지금 천하의 작은 일이라도 요역을 줄이고 군대를 동원하지 않는데, 많은 백성들이 빈곤하여 도적떼가 그치지 않으니,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계부(計簿)를 올리지만, 문장만 갖추고 기만하는데 힘써 그 과업을 피하기만 한다. 삼공은 그 의도를 알지 못하니, 짐이 장차 어찌 맡기겠는가? 조칙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나간 관리가 그 휘하의 사람(卒徒)을 줄여 (그에 소용되는 비용을) 관인 자신에게 지급토록 하자고 청한 것은 모두 그만두게 하라. 어사는 계부를 감찰하고, 실제가 아닌 것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이를 살펴서, 진위가 서로 어지럽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3월, 혜성이 왕량(王良)·각도(閣道)자리에 나타났다가, 자궁(紫宮; 자미궁) 자리로 들어갔다.
여름 4월, 조칙을 내리길 “청렴한 관리(廉吏)를 천거해, 실로 그에 진실된 자를 얻고자 한다. 6백석 관리 중 작위가 대부로서 죄가 있어도 그 이전에(천거하길) 청했던 자라면, 그의 녹질을 위로 통하게 하여, 그 현재(賢材)를 본받을 수 있게 하되, 지금 이후로는 다시는 천거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겨울 12월 갑술일, 황제가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계사일, 황태후를 높여 태황태후라 했다.
찬(贊)하여 가로되 “효선의 정치는 신상필벌하고, 그 명성과 실제를 모아 자세히 밝히니, 정사(政事)나 문학 · 법리(法理)의 선비들이 모두 그 재능을 정예롭게 하여, 기교있는 공장이 만든 기계(器械)에까지 그런 풍조가 이르러서, 원제와 성제 사이부터는 능히 이런 수준에까지 미치는 것이 드물었으며, 또한 관리들이 제 직임에 부합하였는지, 백성들이 생업을 평안해 했는지 족히 알 수 있다. 흉노가 크게 어지러워지는 난을 바로 만나자, 무도한 자를 멸하게 하고, 도를 보존한 자를 굳건히 도와서(推亡固存), 위엄을 북이(北夷)에 펴니, 선우가 그 의로움을 사모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번신이라 칭하였다.
공은 종묘에 빛나고, 대업은 후사에 드리웠으니, 가히 중훙(中興)이라 이를 만 하고, 그 덕은 은의 고종(高宗)이나 주의 선왕(宣王)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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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할 내용
– 전한 선제(宣帝)
.지위: 전한의 제10대 황제
.재위: 기원전 73년 ~ 기원전 49년
.전임: 폐제
.후임: 원제
.부친: 도제
.모친: 도황후
.배우자: 공애황후 허씨/폐후 곽씨/효선황후 왕씨
전한의 제10대 황제.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효선황제(孝宣皇帝). 휘는 순(詢). 자는 차경(次卿).
전한 무제의 증손자로, 소제 유불릉은 그의 작은할아버지가 된다. 원래 이름은 병이(病已), 즉 병이 그치라는 뜻(病已 :여기서 已는 그칠이. 보통은 이미已로 쓰이지만), 유아 시기에 병이 잦아서 지어준 이름이다. 피휘를 위해 즉위 후에는 순(詢)으로 개명했다. 할아버지는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 아버지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태손(史太孫) 유진(劉進)으로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소제 사망 후 그 뒤를 이었지만 결국 폐제가 된 창읍왕 유하를 이어 황제가 된 사람이다.
○ 전한 선제(宣帝)
– 생애
전한 무제의 증손이자 여태자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황손(史皇孫) 유진이다.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기원전 91년, 무고의 옥에 의해, 증조모 황후 무사황후·여태자·조모 사씨(史氏)·유진·왕씨·형과 누나가 처형되었다. 갓난아이였던 유병이는 투옥되었지만 병길에 의해 양육되어 은사에 의해 석방되어 민간에서 자랐다. 액정령(掖廷令) 장하가 유병의 후견인이 되고, 장팽조와 학우가 되어, 장안 교외의 상관리에 주거하였다.
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자, 창읍왕이 즉위하지만 품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곽광 등의 추천에 의해 상관황태후(上官皇太后)의 조를 받아, 양무후(陽武侯)에 봉작되었고 머지 않아 즉위하였다.
소제의 사망으로부터 창읍왕의 폐위를 거쳐 선제의 즉위에 이르는 일련의 움직임은 곽광이 주도한 것이어서, 정권은 계속되어 대사마 대장군 곽광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기원전 69년 곽광이 사망하자, 선제는 곽씨 일족의 권력을, 특히 군사의 지휘권을 서서히 박탈하여, 외척인 허씨(許氏) 등의 자제에게 주었다. 이것에 반발한 곽광의 유아가 반란을 계획하였고, 그것을 이유로 곽씨 일족은 처형되었다. 이 외, 반란 성공 후에 제위를 찬탈할 예정인 대사마 곽우(霍禹)는 요참형에 처했고, 황후 곽씨(곽광의 딸)도 폐위하여 유폐하였고, 곽광의 죽음으로부터 2년 후에 친정을 개시하였다.
– 정책
선제는 법가 주의적 정치 신조에 준거하여, 감세나 상평창을 설치하고, 국민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을 개혁하고, 범죄 예방을 위해 형벌을 강화하고, 국민의 경제력을 휴양하면서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도모하는 내정 중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무제 이후의 국내의 피폐한 경제를 완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것들은 민간에서 성장하여 민중의 실정을 아는 선제만이 가능한 시책이었다.
한편, 외교면에서는 오손과 제휴해 서역에 진출, 본시 3년(기원전 71년)에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흉노를 침공했다. 이 원정 자체는 흉노가 재빨리 달아나 한나라가 직접적으로 얻은 소득은 적었으나, 흉노가 달아나는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에 흉노를 약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큰 타격을 받은 흉노는 자연재해가 겹치고 오손 외에도 정령과 오환에까지 공격을 받아 전한으로 쳐들어올 여력이 없었고, 얼마 못 가 산산조각으로 분열됐다. 이런 상황의 도움으로, 기원전 51년에는 분열된 흉노의 선우 중 호한야 선우를 항복시키는 등, 약체화되고 있던 한왕조의 국력을 부흥시키는 것에 노력했다. 이 외에 내외 정치에 있어서의 성과로부터, 선제는 한나라 중흥의 선조라고 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중서(中書)를 통한 직접적인 통치는 중서의 역할에 해당한 환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원인이 되어, 원제의 시대에는 환관과 외척이 제휴하여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 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하여, 유교에 심취하는 황태자(후의 원제)와는 뜻이 맞지 못하고 폐위도 생각했지만, 원제에게 후손이 태어난 것을 이유로 폐위를 보류했다.
사망 후 두릉(杜陵)에 안장되었다.
○ 연호
본시(本始) 기원전 73년 ~ 기원전 70년
지절(地節) 기원전 69년 ~ 기원전 66년
원강(元康) 기원전 65년 ~ 기원전 61년
신작(神爵) 기원전 61년 ~ 기원전 58년
오봉(五鳳) 기원전 57년 ~ 기원전 54년
감로(甘露) 기원전 53년 ~ 기원전 50년
황룡(黃龍) 기원전 49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