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漢書) – 본기(本紀)
9. 원제기(元帝記)
반고의 한서-본기 아홉 번째 기록.
원제기(元帝記)는 한 고종 효원황제 유석(漢 高宗 孝元皇帝 劉奭, 기원전 76년~기원전 33년)으로 중국 전한의 제11대 황제(재위 기원전 48년~기원전 33년), 자는 성(盛)이다. 선제의 장남이며 공애왕후의 소생이다.
○ 원제기(元帝記)

효원황제는 선제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공애(共哀) 허황후(許皇后)인데, 선제가 미천할 때 민간에서 (원제를) 낳았다. 나이 2살 때, 선제가 즉위하였다. 8 살 때, 위에 올라 태자가 되었다. 장성하게 되자, 부드럽고 인자하여 유학을 좋아하였다. 선제가 법조문에 능한 관리를 많이 등용해, 형명(刑名)으로 아랫사람을 엄히 다스리며, 대신인 양운(揚橒)·개관요(蓋寬饒) 등이 질책하고 비방하는 말이 죄가 되어 연좌돼 주살당하는 것을 보고, 일찍이 연회에서 시종하다 조용히 말하길, “폐하께서 형벌을 집행하심이 너무 심하니, 마땅히 유생을 기용하십시오”라 했다. 선제가 안색을 바꾸어 말하길, “우리 한가(漢家)엔 나름대로 제도가 있어, 본래 패도(覇道)와 왕도를 번갈어 썼는데, 어찌 순전히 덕의 교화에만 맡겨서 희주(姬周)의 정치를 쓰겠는가! 또한 속유들은 시정의 사정을 모르고, 옛것이 옳고 지금은 그르다는 설(設)만 좋아해서 사람들이 명실(名實)에 혼란스럽게 만들고, 자신이 지켜야 할 바를 모르니, 어찌 족히 그들에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라 하며 탄식하길 “우리 집안을 어지럽힐 자는 태자로구나!”라 했다. 이로 말미암아 태자와 소원해지고 회양왕(淮陽王)을 좋아하여, 말하길 “회양왕은 명찰(明察)하고 법을 좋아하니, 마땅히 내 자식이 될 만하다”라 했다. 그래서 (회양)왕의 어미인 장첩여를 더욱 총애했다. 상에게 회양왕을 써서 태자를 바꿀 뜻이 있었으나, 어릴 적 허씨에 의지하였고 함께 미천한 곳에서 일어났기에, 끝내 배신치 않았다.
황룡(黃龍) 원년(BC 49) 12월, 선제가 붕어하였다. 계사일 태자가 황제의 위에 즉위하고 고묘에 알현했다. 황태후(상관후)를 높여 태황태후라 하고, 황후(공성 왕황후)를 높여 황태후라 했다.
초원(初元) 원년(BC 48) 봄 정월, 신축일 효선황제를 두릉(杜陵)에 장사지내고, 제후왕·공주·열후에 황금을, 2천석 관리이하에겐 돈과 비단을 각자 차등있게 하사했다.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3월, 황태후의 오라비인 시중 중랑장 왕순(王舜)을 봉해 안평후(安平侯)로 삼았다. 병오일, 황후 왕씨를 세웠다. 삼보(三輔)·태상(太常)·군국의 공전(公田) 및 원(苑) 중에서 줄일 만한 것을 빈민들에게 개방해 경작하게 하고, 재산이 1천전이 차지 못하는 자에겐 종자와 음식을 빌려주었다. 외조부 평은대후(平恩戴侯)의 아우의 아들인 중상시 허가(許嘉)를 봉해 평은후로 삼아 대후의 뒤를 잇게 했다.
여름 4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선제의 성스런 뒤를 이어 종묘를 얻어 받들게 되어서, 걱정이 되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요사이 수차례 지진이 일어나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천지의 경계를 두려워하지만,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바야흐로 밭갈 때 인지라, 짐은 뭇 백성들이 제 생업을 잃을까 우려해 광록대부 포(褒) 등 12인을 친히 얼굴을 대하고 파견해 천하를 순행하며, 기로나 환과고독 및 곤핍하고 생업을 잃은 백성의 안부를 묻고, 현명한 준재를 등용하고 재덕이 있지만 미천한 지위에 있는 자를 불러 드러내어 이로 인하여 풍속의 교화를 살피게 했다. 군수와 2천석 관리들이 능히 제 몸을 바르게 해 힘쓰고 교화를 분명히 밝히며 만 백성에 친할 수 있다면, 천지 사방안이 화친하고 근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서경’에도 이르지 않았던가? ‘신하들이 어질면 뭇 일들이 편안하다.’ 천하에 널리 알려, 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고 했다. 또 이르길 “관동은 올해 곡식이 여물지 않아 많은 백성들이 곤핍하다. 군국에 영을 내려 재해를 입은 사람은 조부(租賦)를 내지 말게 하라. 강과 바다에 있는 제방·호수·원지(園池) 중 소부(少府)에 속한 것을 빈민들에게 빌려주고, 조부를 거두지 말라. 종실의 적에 속한 자에게 말 1필에서 8필까지 하사하고, 삼로와 효자에겐 비단 5필, 우애(弟)한 자와 역전에겐 3필, 환과고독에겐 2필, 이민들에겐 50호마다 소와 술을 하사하라”고 했다.
6월, 백성들이 역질에 시달리니, 태관(太官)에게 영을 내려 찬선을 덜고 악부의 인원을 줄이며 원마(苑馬)를 줄여 곤핍한 자를 진휼하게 했다.
가을 8월, 상군(上郡)의 속국에 있던 항복한 호(胡)인 1만 여명이 흉노로 도망해 갔다.
9월, 관동의 군국 11곳에서 홍수피해가 나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혹 서로 잡아먹으니, 인근 군에 곡식과 돈을 옮겨놓고 서로 구원하게 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요사이 음양이 조화롭지 못해 백성들이 기한(飢寒)에 시달리니, 이는 편안히 다스림이 없는 것이다. 덕이 천박함을 생각해보니, 선제의 거처에 들어가지도 못하겠다. 여러 궁관(宮館)에 영을 내려 행차하는 일이 적은 곳은 보수를 하지 말고, 태복은 곡식으로 먹이는 말을 줄이고, 수형(水衡)은 고기를 먹이는 짐승을 없애라”고 했다.
초원 2년(BC 47) 봄 정월, 감천(甘泉)으로 행차해 태치에서 교제를 지냈다. 운양(雲陽)의 백성들에게 작 1급씩, 여자에겐 1백호 마다 소와 술을 하사했다.
아우 경(竟)을 세워 청하왕(淸河王)으로 삼았다.
3월, 광릉 여왕(廣陵 王)의 태자 패(覇)가 왕이 되었다.
조칙을 내려 황문(黃門)의 수레와 개·말을 파하고, 수형의 금유(禁?)·의춘하원(宜春下苑)과 소부 차비(?飛)의 바깥 못, 활쏘기 터의 지전(池田)을 빈민들에게 임시로 주게 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듣자하니 어진 성인께서 제위에 있을 때는 음양이 화합하고 비바람이 때를 맞추며, 일월은 빛이 나고 성신은 고요해, 뭇 백성들은 편안하여 늙은이는 제 천수를 다하였다 한다. 지금 짐이 공손히 천하를 이어, 공후(公侯)의 윗자리에 이 몸을 맡기게 되었지만, 명석함은 능히 밝히지 못하고 덕은 능히 편안하게 하지 못해, 재난과 이변이 아무러 닥쳐서 해를 연이어 그치지 않는다. 이전에 2월 무오일, 농서군(??西)에선 땅이 흔들리고, 태상황묘 전각의 벽과 나무장식이 훼손되어 떨어지며, 완도현(?道縣)의 성곽과 궁실 및 백성들의 가옥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이 무수하였다. 산은 무너지고 땅은 갈라지며, 물과 샘은 치솟아 올랐다.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려보내는 것은 짐의 무리들을 놀래켜 경계시키려는 것이다. 다스림에 큰 어그러짐이 있어 그 허물이 여기에 이른 것이다. 밤낮으로 전전긍긍하지만, 큰 변화에 통달치 못하고 깊이 생각해도 답답할 뿐, 그 순서를 알지 못하겠다. 요즘 여러해 동안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은 곤핍하여 기한(飢寒)을 이겨내지 못하고 형벌에 빠지는 경우가 있으니, 짐은 이를 매우 애닲아 여긴다. 군국 중 지진의 피해를 심하게 입은 곳은 조부(租賦)를 내지 말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라. 유사는 없애서 줄여서 만 백성들을 편히 할만 한 것을 조목조목 주청하되 피하는 바가 없이 하라. 승상·어사·중2천석관리들이 무재(茂材)·이등(異等)[현량방정 같은 관리 천거조건]으로 직언극간하는 선비를 천거하면, 짐이 장차 친히 살펴 보리라”고 했다.
여름 4월 정묘일, 황태자를 세웠다. 어사대부에게 관내후의 작을, 중2천석 관리에게 우서장의 작을 하사하고, 천하에 응당 아비의 후사가 되는 자에게 작 1급씩, 열후에겐 20만 전, 오대부에게 10만전을 하사했다.
6월,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어 제(齊) 지역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기까지 했다.
가을 7월, 조칙을 내어 이르길 “올해 자주 재해가 있어 백성은 나물만 먹어 안색이 나쁘게 변하니, 마음속으로 애통하다. 이미 관리에게 조칙을 내려 창름(倉?)을 비우고 부고(府庫)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여 구제케 하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 의복을 하사하게 했다. 지금 가을이지만, 벼와 보리가 많이 상하였고, 한 해중에 지진이 거듭 일어났다. 북해(北海)군에서는 강물이 넘쳐 흘러 백성들을 죽였다.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니,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공경들은 장차 이를 어찌 걱정하려 하는가? 자기의 모든 뜻을 다해 짐의 과실을 진언하되, 피하는 바가 없이 하라”고 했다.
겨울, 조칙을 내려 가로되 “나라가 장차 흥성하려면 사부(師傅)를 존중해야 한다. 옛 전장군 소망지는 짐을 8년이나 가르치면서, 경서로 인도하였으니, 그 공이 아름답도다. 그에게 관내후의 작을 하사하고, 식읍을 8백호로 하며,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만 입조케 하라”고 했다.
12월, 중서령 홍공(弘恭)·석현(石顯) 등이 소망지를 참소하니, 영을 내려 자살하도록 했다.
초원 3년(BC 46) 봄, 영을 내려 제후·상(相)의 지위를 군수(郡守) 아래에 두도록 했다.
주애(珠厓)군 산남(山南)현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군신들과 대책을 널리 모의했다. 대조(待詔) 가연지(賈捐之)가 마땅히 주애군을 포기하고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제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주애군을 파했다.
여름 4월 을미일, 날이 어두워졌고, 무릉(茂陵)의 백학관(白鶴館)에서 불이 났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이번에 화재가 효무원(孝武園)의 관(館)에 내려 짐이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했다. 이런 변이에 밝지 못하니, 그 허물이 짐 자신에게 있다. 여러 유사(有司)들은 아직도 짐의 허물을 극언하니 못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 깨닫겠는가! 백성들은 거듭 흉액(凶厄)을 만났는데, 서로 진휼해주는 것은 없고 번다하고 걱정스런 일만 더하는가! 가혹한 관리들이 미묘한 법조문에 구애되어 끌어 늘여서, (백성들은 자신의) 성명(性命)조차 길게 마치지 못하게 되니, 짐은 매우 민망히 여긴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라”고 했다.
여름, 가물었다. 장사 양왕(長沙 煬王)의 아우인 종(宗)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옛 해혼후(海昏侯) 하(賀)의 아들 대종(代宗)을 봉하여 후로 삼았다.
6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무릇 듣자하니 백성을 편안케 하는(安民)의 도는 본래 음양(陰陽)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요사이 음양이 어그러지고 비바람이 때에 맞지 않다. 짐이 부덕하여 여러 공(公)들 중 감히 짐의 허물을 극언하는 자가 있기 바랬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구차하게 영합하여 제 몸이나 보전하여 극언하지 않으니, 짐이 매우 걱정스럽다. 오랫동안 백성들이 기한(飢寒)에 시달리고 부모와 처자가 멀리 이별해 사는데, 급하지도 않은 일(非業)을 하느라 고생하고 살지도 않는 궁(宮)을 지키는 것을 생각해보니, 음양의 도는 돕는 까닭이 아닐까 두렵다. 감천(甘泉)·건장(建章)궁의 위병을 파하고 농사에 종사케 하라. 백관들은 각기 비용을 줄여라. 그것을 조목조목 주청하되 피하는 바가 없게 하라. 유사는 이에 힘써서 사시(四時)에 금하는 바를 범하지 말라. 승상·어사는 천하에서 음양과 이재(異災)에 밝은 자를 각각 3인씩 천거하라”고 했다. 이에 그 일을 말하는 자가 많으니, 혹은 나아가 발탁되고 불려서 알현하니, 사람마다 상의 뜻을 얻었다고 여겼다.
초원 4년(BC 45) 봄 정월, 감천으로 행차해 태치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3월, 하동(河東)에 행차해 후토(后土)에 제사지냈다. 분음(汾陰)의 형도(刑徒)들을 사면했다. 백성들에게 작 1급씩, 여자에겐 1백호마다 소와 술을, 환과(鰥寡)와 고년(高年)한 자에게 비단을 하사했다. 행차한 곳마다 조부를 내지 말도록 했다.
초원 5년(BC 44) 봄 정월, 주자남군(周子南君; 주나라 왕실 후손. 무제때 주자남군으로 봉해져 주의 제사를 받들게 된 적이 있습니다)을 주승휴후(周乘休侯)로 삼고, 그 지위는 제후왕 다음으로 했다.
3월, 옹(雍)으로 행차해 오치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헤성이 참(參) 자리에 나타났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명민치 못하고 (관리들의) 서열과 지위가 명확치 않아, 여러 관직들이 비어 있지만 그에 적당한 사람을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 많은 백성들이 실망하니, 위로는 황천(皇天)에 감응하여 음양이 변하고 허물은 만 백성들에게 흘러들어가니, 짐은 이를 이를 매우 두려워한다. 이전에 관동에서 연이어 재해를 만나고 기한과 역질에 시달리다 요절하여 제 명을 다하지 못한다. ‘시경’에 이르지 않았던가? “무릇 백성들이 상을 당하면, 힘을 다해 그를 구제한다” 태관(太官)에 영을 내려 날마다 (고기를) 잡아 죽이지 말고 갖추는 음식은 각각 반으로 줄여라. 승여(乘輿)로 쓰는 말을 기르되 원래 목적(正事)에 핍박하지 않게만 하고 그치라. 각저 놀이와 상림(上林)의 궁관 중 잘 행차하지 않는 곳, 제(齊) 지역의 삼복관(三服官; 특수 의복을 공급하는 관), 북가(北假)의 전관(田官), 염철관, 상평창을 파하라. 박사(博士) 제자(弟子)0엔 정원을 두지 말고 학자를 늘려라. 종실의 자식 중 (종실에) 속하여 적에 오른 자에겐 말을 1필에서 8필까지 하사하고, 삼로(三老)·효자에겐 비단을 1인당 5필씩, 제(第)한 자와 역전(力田)에겐 3필, 환고고독에겐 2필, 이민(吏民)들에겐 50호당 소와 술을 하사하라”고 했다. 형벌 중 70여 가지 일을 줄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 이하로 낭중(郎中)에 이르기까지 부모와 형제를 보증하게 하는 형을 없앴다.[여기서 제가 보증이란 표현을 썼는데, “상보(相保)”라 하여 한사람이 죄를 지으면 부모형제가 연좌당하는 죄를 말합니다] 종관(從官; 천자의 시종관) 중 궁의 사마문(司馬門)에서 직무를 받드는 자에겐 대부모·부모·형제가 적(籍)에 통할 수 있게 하였다.
겨울 12월 정미일, 어사대부(御史大夫) 공부(貢禹)가 죽었다.
위사마(衛司馬) 곡길(谷吉)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영광(永光) 원년(BC 43) 봄 정월, 감천(甘泉)으로 행차해 태치(泰畤)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운양(雲陽)의 형도들을 사면했다. 백성들에게 작 1급씩, 여자에겐 1백호마다 소와 술을, 고년(高年)한 자에겐 비단을 했다. 지나온 곳마다 조부를 내지 말게 했다.
2월, 승상․어사에게 조칙을 내려 질박(質樸)․돈후(敦厚)․손양(遜讓)․유행(有行)한 자를 천거케 하고, 광록(光祿)대부는 매년 이 과목에 따라 살펴 낭관(郎官)․종관(從官)의 차례를 정하게 했다.
3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오제삼왕(五帝三王)은 현자에게 맡기고 능한 자에게 시키니 그들을 등용함에 지극히 공평하였는데, 지금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어찌 그 백성이 달라서이겠는가? 그 허물은 짐이 불명(不明)하여 현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간사한 사람(壬人)이 지위에 있고 좋은 선비는 가리워져 막혀있다. 주(周)와 진(秦)을 폐단을 거듭하니 백성들이 점차 풍속이 각박해지고, 예의가 없으며, 형법에 저촉되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백성들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여정자신(勵精自新)케 하여, 각자 농사일에 힘쓰게 하라. 밭이 없는 자에겐 임시로 주고, 종자와 음식을 주되 빈민에게 하는 것처럼 하라. 6백성 이상 관리에 오대부(五大夫)의 작을, 제 직무에 부지런한 관리에겐 작 2급씩, 아비의 뒤를 잇는 자에겐 작 1급씩, 여자는 1백호 당 소와 술을,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고년(高年)한 자에겐 비단을 하사하라”고 했다.
이 달에 비와 눈이 내리고 서리가 내려, 보리와 뽕나무가 상하니, 가을이 되자 거둘 것이 없었다.
영광 2년(BC 42) 봄 2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듣자하니 당우[唐虞=요와 순임금]는 상형(象形)을 하였으나 백성들이 (법을) 범하지 않았고, 은주(殷周)의 법이 행해지니 안팎에서 난을 일으킨 자들(姦軌)한 자들이 복종하였다. 지금 짐이 고조(高祖)의 대업을 이어 공후의 윗자리에 의탁하였으나, 아침저녁으로 두려워 떨며, 오래동안 백성들의 급한 일을 생각하여 일찍이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고 삼광[三光=日․月․星]은 어두울 뿐이다. 많은 백성들이 큰게 곤핍하여 길에 유망(流亡)하여 흩어져 있고, 도적떼가 아울러 일어나고 있다. 유사(有司)들 또한 잔적(殘賊)들을 기른(長) 꼴이 되어, 목민(牧民)의 방법을 잃었다. 이는 모두 짐이 불명하고 정사에 어그러짐이 있어서이다. 허물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짐은 스스로 매우 부끄럽다.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이같이 은혜가 박하니, 백성들에게 무어라 이르겠는가!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백성들에 작 1급씩, 여자는 1백호 당 소와 술을, 환과고독이나 고년한 자, 삼로(三老)․효제역전(孝弟力田)에게는 비단을 하사하라”고 했다. 또 제후왕․공주(公主)․열후에게 황금을, 중(中) 2천석 관리에게 오대부의 작을, 제 직무에 부지런한 관리에게 각각 작 2급씩 하사하라“고 했다.
3월 임술일, 일식이 있었다. 조칙을 내려 가로되 “짐이 전전율율(戰戰栗栗)하고 아침 저녁으로 짐의 과실을 생각해보니, 감히 일을 폐하고 스스로 편안해 하지 않았다. 음양이 조화되지 못함을 생각하나, 아직도 그 허물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러 번 공경들에게 경계시켰더니, 해와 보름달에 (일식․월식이 일어나지 않는) 효험이 있었다. 지금에서는 유사가 정사를 잡아 행하는데, 아직 그 중용됨을 얻지 못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치우치고 옅어, 금령(禁令)은 번거롭고 가혹해, 인심과 합치되지 못하고 있다. 난폭하고 사나운 풍속은 더욱 자라는데, 화목(和睦)의 도는 날로 쇠하니, 백성들은 근심하고 고통스러워 제 몸 둘 곳조차 없다. 이것은 사악한 기운이 해마다 증가해 태양[太陽=日]을 침범하고, 바른 기운이 가리워져 침몰하고, 해는 오래동안 그 빛을 빼앗겼다. 이에 임술일, 일식이 있었다. 하늘이 대변이(大變異)를 보여주어 짐 자신을 경계시키니, 짐은 매우 애석하도다. 내(內)군국에 영을 내려 무재(茂才)․이등(異等)․현량(賢良)․직언(直言)하는 선비 각 1명씩 천거케 하라”고 했다.
여름 6월, 조칙을 내어 이르길 “요사이 해를 이어 (곡식을) 거두지 못해, 사방이 다 곤핍하다. 보통 백성들은 농삿일에 힘쓰지만, 또한 이룬 공이 없어 기근에 곤란을 당해 서로 구제하지도 못한다. 짐은 백성의 부모된 자이나 덕이 능히 그들을 덮어주지 못하는데, 형벌은 있으니, 스스로 다치게 하는 꼴이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려라”고 했다.
가을 7월, 서강(西羌)이 반란을 일으키니, 우장군 풍봉세(馮奉世)를 보내 이들을 치게 하였다.
8월, 태상(太常) 임천추(任天秋)를 분위(奮威)장군으로 삼고, 별장(別將)들은 따로 오교(五校)의 병사를 통솔해 (우장군 풍봉세와) 함께 진격하게 하였다.
영광 3년(BC 41) 봄, 서강이 평정되니, 군대를 파했다.
3월, 황자 강(康)을 세워 제양왕(濟陽王)으로 삼았다.
여름 4월 계미일, 대사마 거기장군 왕접(王接)이 훙어했다.
겨울 11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전일 기축일 지진이 일어나고 한 겨울에 비가 내리며 큰 안개가 끼었으며, 도적떼가 아울러 일어났다. 관리들은 어찌 월령(月令)에 맞춰 금하지 않는가? 각자 뜻을 다하여 (일을) 대하라”고 했다.
겨울, 염철관(鹽鐵官)과 박사 제자(博士 弟子)의 정원을 회복시켰다. 국용(國用)이 부족한데 백성들은 부역을 면하는 이가 많아, 중외(中外)의 요역을 지급하는 것이 없게 하였다.
영광 4년(BC 40) 봄 2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지존의 중한 자리를 이었으나,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능히 밝지 못하여, 여러번 재앙을 만났다. 더욱이 변경은 불안하여, 병사들은 외방에 있기에 부세를 거두어 운송하게 하느라, 백성들은 불안해 소동을 일으키고 곤궁한데도 힘입을 바가 없어 범을 범하여 죄에 빠졌다. 무릇 위로는 도를 잃었고 심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붙잡으니, 짐이 매우 애통해 하는 바이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빈민들에게 대여해줬던 것은 거둬들이지 말라”고 했다.
3월, 옹(雍)으로 행차해 오치(五畤)에 제사지냈다.
여름 6월 갑술일, 효선원(孝宣園) 동쪽 궁궐에 불이 났다.
무인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무릇 듣자하니 명철한 왕이 윗자리에 있고 충현(忠賢)한 자가 관직에 베풀어져 있으면, 뭇 생명들이 화락(和樂)하고 방외(方外)에서도 그 은택을 받게 된다고 한다. 지금 짐이 왕도(王道)에 어두워 아침저녁으로 걱정하고 애써보지만 그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여, 현란하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음이 없고 미혹하지 않은 바를 듣는 것 또한 없어서, 이 때문에 정령(政令)을 돌이킨 일이 많아 민심을 아직 얻지 못했고 사특한 말은 헛되이 진언되니 일은 공을 이룬 것이 없다. 이는 천하가 널리 들은 바이다. 공경대부들의 호오(好惡)가 같지 않아, 혹 간사함을 따라 사악한 일을 저지르고 미천한 백성들 침탈하니, 평범한 백성들이 제 명(命)을 돌려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에 6월에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시경』에도 ‘지금 우리 백성들이 또한 심히 슬퍼하고 있네(今此下民, 亦孔之哀)!’ 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지금 이후로 공경대부들은 하늘의 경계 생각하는데 힘써서, 자신을 삼가고 수양하길 오래토록 하여 짐이 미치지 못한 바를 보필하라. 직언하여 제 뜻을 다 펴고, 피하는 것이 없이 하라”고 했다.
9월 무자일, 위사후헌(衛思后園=여태자 모친) 및 여원(戾園)을 파했다.
겨울 10월 을유일, 조종(祖宗)의 묘 중 군국(郡國)에 있는 것을 파했다. 여러 능을 나누어 삼보(三輔) 지역에 분속(分屬)시켰다. 위성(渭城)의 수릉정부(壽陵亭部) 들판 위를 초릉(初陵)으로 삼았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땅에 안착하여 옮기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이 뭇 백성들의 성정(性情)이요, 골육(骨肉)이 서로 의지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원하는 바이다. 나중에 유사가 신자(臣子)의 의리에 따라 군국의 백성들을 옮겨 원릉(園陵)을 받들도록 주청하기에,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조상의 분묘를 멀리 버리고 생업을 파하여 자산을 잃으며, 친척들이 이별하여 사람들은 사모하는 마음이 무너져, 집안마다 불안한 마음이 있게 하였다. 동쪽 변방에서는 텅비고 손모(損耗)하는 피해를 입고, 관중(關中)에서는 어디 힘입을 바 없는 백성들이 있으니, 이는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 ‘시경’에도 ‘백성들이 또한 노역이 그치면, 마침내 작게나마 편안할 수 있고, 이 중국에 은혜를 베푼다면 사방에까지 미치네(民亦勞止 迄可小康, 惠此中國 以綏四方)’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지금 초릉을 삼고자 했던 곳에 현읍(縣邑)을 두지 말고, 천하가 모두 땅에 안착하여 제 생업을 즐겨서, 동요하는 마음이 없게 하라”고 했다. 또 선후(先后) 부모의 봉읍(奉邑)을 파했다.
영광 5년(BC 39) 봄 정월, 감천(甘泉)으로 행차해 태치(泰畤)에서 교사(郊)를 지냈다.
3월, 상이 하동(河東)으로 행차해 후토(后土)에 제사지냈다.
가을, 영천(潁川)의 물이 흘러 넘쳐 사람들이 죽었다. 관리와 종관(從官)으로 자기 본현이 피해를 입은 곳이 있는 자에게 휴가를 주고, 사졸(士卒)들을 돌아가게 했다.
겨울, 상이 장양(長楊)의 역웅관(射熊館)에 행차해, 수레와 말을 내어 크게 사냥했다.
12월 을유일, 태상황(太上皇)과 효혜황제(孝惠皇帝)의 침묘원(寢廟園)을 무너뜨렸다.
건소(建昭) 원년(BC 38) 봄 3월, 상이 옹으로 행차해 오치에 제사지냈다.
가을 8월, 나방(蛾) 무리가 날라 해를 가리는데, 동도문(東都門)에서 지도(枳道)에까지 이르렀다.
겨울, 하간왕(河間王) 원(元)에게 죄가 있어, 폐하여 방릉(房陵)으로 옮겼다. 효문태후(孝文太后)와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원(寢園)을 파했다.
건소 2년(BC 37) 봄 정월, 감천으로 행차해 태치에서 교사를 지냈다.
3월, 하동으로 행차해 후토에 제사지냈다. 삼하(三河)[대大]군 태수의 봉록(秩)을 더해주었다. 12만호를 대군(大郡)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6월, 황자 여(輿)를 세워 신도왕(信都王)으로 삼았다.
윤 6월 정유일, 태황태후 상관(上官)씨가 붕어했다.
겨울 11월, 제와 초에 지진이 일어나고, 큰 눈비가 내려 나무가 꺾이고 가옥이 무너졌다.
회양왕(淮陽王)의 장인인 장박(張博)과 위군태수 경방(京房)이 사악한 의도로 제후왕들을 인도함을 엿보고, 성중(省中=금중禁中)의 일을 누설한 죄에 연좌되니, 장박은 요참되고 경방은 기시(棄市)되었다.
건소 3년(BC 36) 여름, 영을 내려 삼보의 도위(都尉)와 대군(大郡)의 도위의 질을 모두 2천석으로 하라고 했다.
6월 갑신일, 승상 위현성(韋玄成)이 훙어했다.
가을, 사호(使護) 서역(西域) 기도위(騎都尉) 감연수(甘延壽)와 부교위(副校尉) 진탕(陳湯)이 상명(上命)을 가탁하여 무기(戊己)교위가 둔전하는 곳의 관리와 병사 및 서역의 오랑캐 병사들을 내어 질지선우(郅支單于)를 공격했다.
겨울, (질지선우의) 그 목을 베어 경사로 보내 전하니, 만이저(蠻夷邸)에 걸어 놓았다.
건소 4년(BC 35) 봄 정월, 질지선우를 주살한 것을 사당에 고하고 묘당에 교사지냈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여러 신하들이 장수를 빌며 주연을 베풀었다. 질지선우에 대한 도서(圖書)를 후궁과 귀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여름 4월, 조칙을 내려 이르길 “짐이 선제의 아름다운 성업을 잇게 되어 전전긍긍하며, 맡은 바를 당해내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요사이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행(五行)은 그 차례를 잃으니,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린다. 많은 백성들이 제 생명을 잃은 것을 생각해 보고는 (그 일에) 간대부(柬大夫) 박사 상(賞) 등 21명을 보내 천하를 순행하게 하는데 임하여, 기로(耆老)와 환과고독, 곤핍하고 생업을 잃은 자를 존문(存問)하고, 무재(茂才)로 특별히 세울만한 선비를 천거하게 했다. 장상(將相) 구경들은 뜻에 태만함이 없도록 통솔하며, 이 교화의 흐름을 잡아 보게 하라”고 했다.
6월 갑자일, 중산왕(中山王) 경(竟)이 훙어했다.
염전(鹽田) 지역의 모래와 돌이 패수(覇水)를 막았고, 안릉(安陵)의 강둑이 무너져 경수(涇水)를 가리니, 물이 거꾸로 흘렀다.
건소 5년(BC 34) 봄 3월, 조칙을 내려 가로되 “무릇 듣자하니 명철한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좋고 나쁨을 분명히 하고 버리고 취할 것 정하며, 공경과 겸양을 높이니, 백성들의 행실이 흥성하고 그래서 법이 설치되어 있어도 백성들은 범하지 않으며, 영을 내리면 백성들이 따랐다고 한다. 지금 짐이 종묘를 잡아 보존하게 외거서, 삼가며 두려워하여 감히 해이하게 태만히 하지 않았으나, 덕은 옅어 밝지 못하고 교화는 미천할 따름이다. ‘논어’에도 ‘백성에게 허물이 있다면, 나 한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百姓有過 在予一人)‘ 이르지 않았던가?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여자는 1백호 당 소와 술을 하사하고, 백성들에겐 작 1급씩, 삼로(三老)와 효제 역전(孝弟 力田)에겐 비단을 하사하라”고 했다. 또 이르길 “바야흐로 봄이 되어 농상(農桑)이 흥하여 백성들은 힘을 모아 스스로 다하는 때라서, 이 달에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이 때를 뒤로 미루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 지금 어질지 못한 관리들이 작은 죄라도 반복해 조사하고 불러다가 증거를 살피며, 급하지 않은 일을 일으키니,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 한 때의 작업을 잃어 한 해의 공을 끝내지 못하게 하니, 공경들은 밝게 살피고 무거이 신칙(申飭)하게 하라”고 했다.
여름 6월 경신일, 여원(戾園)을 복원했다.
임신일, 어두워지며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경자일, 태상황(太上皇)의 침묘원(寢廟園)과 원묘(原廟; 혜제때 위수 북쪽에 다시 지은 고조의 묘), 소령후(昭靈后; 고조의 모친), 무애왕(武哀王; 고조의 형), 소애후(昭哀侯; 고조의 누나), 위사후(衛思后=여태자의 모친)의 원(園)을 복원했다.
경녕(竟寧) 원년(BC 33) 봄 정월, 흉노의 호한야(虖韓邪) 선우가 내조(來朝)했다. 조칙을 내려 이르길 “흉노의 질지선우는 예의를 배반하였다가 이미 복죄(伏罪)되었다. 호한야 선우는 은덕을 잊지 않고 예의를 향모(向慕)하여, 다시 조하(朝賀)의 예를 닦아서와 (변방) 요새와 역참(塞傳)이 무궁하도록 보존하길 원하니, 변방이 오랫동안 병혁(兵革)의 일이 없었다. 개원하여 경녕이라고 하고, 선우에게 대조(待詔) 액정(掖庭) 왕장(王檣; 자[字]가 소군[昭君]으로 이가 왕소군이다)을 내려주어 알지(閼氏; 선우의 왕비)로 삼게 하라”고 했다.
황태자가 관례를 치뤘다. 열후의 후사에게는 오대부(五大夫)의 작을, 천하의 부친의 후사에겐 작 1급씩 하사했다.
2월, 어사대부 번연수(繁延壽)가 훙어했다.
3월 계미일, 효혜황제(孝惠皇帝)의 침묘원과 효문태후(孝文太后),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원을 복원했다.
여름, 기도위 감연수를 봉해 열후로 삼았다. 부교위 진탕에게는 관내후(關內侯)의 작과 황금 5백근을 하사했다.
5월 임진일, 황제가 미앙궁(未央宮)에서 붕어했다.
태상황, 효혜황제, 효경황제의 묘를 무너뜨렸다. 효문태후, 효소태후, 소령후, 무애왕, 소애후의 침원을 파했다.
가을 7월 병술일, 위릉(渭陵)에 장사지냈다.
찬(贊)하길 “신(‘성제기’와 ‘원제기’는 반고(班固)의 부친 반표(班彪)가 쓴 것으로 여기서 신은 반표 자신을 가리킴)의 외조(김창, 金敞)형제는 원제의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신에게 말하길 원제는 재예(才藝)가 많고 사서(史書)를 좋아했다고 하였다. 금슬을 튕기고 통소(洞簫)를 불며 스스로 악곡을 지었고, 그 노래소리를 들으면 능히 구절을 절도있게 쪼개니, 현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어려서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는데, 즉위하자 유생을 불러 등용하고 그들에게 정사를 맡기니, 공우(貢禹), 설광덕(薛廣德), 위현(韋賢), 광형(匡衡)이 서로 번갈아 재상이 되었다. 상이 문의(文義)에 견제되어 우유부단하였으나, 선제(宣帝)의 왕업이 쇠하였다. 그러나 관대하게 아랫사람도 극진히 대하고, 공검(恭儉)함에서 나오며, 호령(號令)이 온아(溫雅)하니, 옛 유풍(遺風)이 있었다.
* 참고할 내용
– 효원황제(孝元皇帝)
.성: 유(劉)
.휘: 석(奭)
.생사: 기원전 76년~기원전 33년 5월 9일
.재위: 기원전 48년~기원전 33년 5월 9일
전한의 제11대 황제. 묘호는 고종(高宗)이다. 효원황제(孝元皇帝).
선제의 장남으로 이름은 유석(劉奭). 선제는 황태자 석의 지나치게 감상적인 성격과 유교에 심취해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공애황후의 아들인데다 자신의 세번째 황후인 효선황후와 중상시 허가의 후원을 받았고, 나중에 후계자가 될 아들을 뒀다는 것 때문에 폐위하진 않았다.
○ 전한 원제(元帝)
현실주의자였던 선제와 달리 유교를 중시한 정책을 실시했다. 선제는 황태자가 죽은 애첩인 사마씨(司馬氏)를 그리워해 한탄하고, 슬퍼하고, 이상주의적인 유교에 심취하는 등 너무나 서정적인 성격이어서, 장래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가져 한때는 황태자의 폐위도 검토했다. 그러나, 조강지처인 허황후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는 선제의 생각이나, 생모의 사촌동생인 중상시 허가와 계모 왕황후에 의해, 왕씨(왕황후=왕정군)와의 사이에 태어난 성제를 이유로 폐립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에 즉위 하면 황태자 시대의 학사인 소망지 등 유생을 등용했지만, 선제시대부터 측근으로서 중용 되고 있던 환관인 홍공, 석현과 대립해 실각했다. 이후 원제의 치세는 환관에 의해 마음대로 결정되었다.
원제는 원정을 앞에 두고, 세금을 경감해, 어려운 형법을 개정하는 등의 정책을 채용하여, 민중의 생활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 외 원제는 대규모 연회를 금지, 수렵용의 별장이나 황실 소유지의 경비를 억제하여 종묘 등 제사에 걸리는 경비를 삭감하고 재정의 건전화를 도모했지만, 재정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 이르지 않았다.
그 한편으로 유교에 심취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에 근거하는 정책도 실시되어 전매제를 폐지해 재정을 악화시키는 등 국정을 혼란시켰다. 선제에 의해 중흥 된 국세는 다시 쇠약해져 원제의 황후 왕씨 일족으로부터 나온 왕망의 찬탈의 요인을 만들어 냈다. 후한의 역사가 반표(班彪)는 그 치세를 “우유부단으로 하여 선제의 업적 쇠약해졌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 연호
초원(初元) 기원전 48년 ~ 기원전 44년
영광(永光) 기원전 43년 ~ 기원전 39년
건소(建昭) 기원전 38년 ~ 기원전 34년
경녕(竟寧) 기원전 33년
○ 원제의 유교정치
원제는 태자 시절부터 유교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원제의 성향이 즉위 후 통치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원제 즉위 후 유학을 공부한 이들이 고위 관료로 대거 등용되어 유학의 법도에 맞게 여러 제도가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주요한 것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군국묘의 폐지.
본래 군국묘란 황제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지방에 설치한 것이다. 각지의 군국묘에서 지방관들이 제사를 주재하였다. 원래 고조시에 군국묘제를 실시했던 이유를 보면 황제는 백성의 아버지라는 관념에서 황제의 묘를 지방의 군국에 설치하고 지방관의 주재하에 제사를 지냈던 것인데 이것은 황제를 아버지로 하는 한 가족의 울타리 속에 황제 통치의 지방침투를 의도하였던 것이다. 즉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에 대한 지배를 국가유교를 이용해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방식은 원래의 유교 이념에 위배된 것으로 이 시기 유학을 공부한 이들이 고위관직에 오르자 이 제도의 폐지가 논의되고 시행된 것이다.
둘째, 구묘제(九廟制)의 개정.
군국묘 폐지에 대한 논의가 구묘제로 옮겨갔다. 본래 천자묘(天子廟)에서는 한 고조의 부친인 태상황묘까지 포함해 아홉묘였는데, 이것이 유가의 천자칠묘제(天子七廟制)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평제까지 이어졌으며 왕망의 상주에 의해 칠묘제(七廟制)로 변경되었다.
○ 전한 원제의 실각과 환관들
즉위 직후에 학사인 소망지(蕭望之) 등 유생을 등용했지만, 이들이 선제 때부터 측근으로서 중용되고 있던 환관인 홍공(弘恭), 석현(石顯)과 대립해 실각한 뒤로는 환관 중심의 정치가 계속되었다.
세금을 경감하고, 어려운 형법을 개정하고, 대규모 연회를 금지하고, 제사부터 별장, 황실 소유지 등의 경비를 절약했지만, 재정은 근본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전매 제도를 폐지했다가 재정만 더 망가졌다. 그의 이런 행보는 결국 왕씨 가문의 세도와 지나친 유교 숭배로 왕망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이 많다. 왕망은 원제의 황후인 효원황후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왕소군은 원래 이 황제의 치세 때 궁녀로 있었다.
아들로 성제, 정도왕 유강, 중산효왕 유흥이 있었으나, 성제의 아들들은 어려서 효성황후 조비연에게 살해당해 장성하지 못했고 정도왕의 외아들 애제와 중산효왕의 외아들 평제 모두 아들이 없어 후손이 끊겼다.
○ 전한 원제와 왕소군(고대중국의 4대 미인)
한고종 전한 원제 유석(漢高宗 元帝 劉奭, 기원전 76년~기원전 33년)은 중국 전한의 제11대 황제(재위 기원 전 48년~기원전 33년)이다. 전한 선제의 장남이며 허평군(許平君) 소생이다. 전한 원제는 다재다능한 황제였다. 그는 태자로 있을 때 역사를 두루 섭렵했고 거문고와 퉁소도 잘 다루었다.
왕소군은 고대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전한 원제의 궁녀였으나 흉노 선우와 정략결혼을 하고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놓고 살다가 몽고땅에 묻혔다. 왕소군은 전한 원제(前漢 元帝)조정 후궁의 몸으로 삭풍이 휘몰아치는 흉노의 땅에 시집가 그곳에서 생을 마친 비운의 여인이다. 전한(前漢)시대 원제가 통치하던 시절, 흉노의 호한야(呼韓耶) 선우(單于)는 한족 여인 왕소군(王昭君)를 아내로 맞았다. 뇌물에 놀아난 궁중 화가 덕이었다.
왕망은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皇后) 일족이었다가 서기 8년 황위를 빼앗아 신(新)을 건국하였다. 제갈량은 전한 원제 때 부폐한 황실과 대비되게 강직하기로 이름을 떨친 제갈풍의 10대 후손이다.
한나라 원제 때의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중국의 ‘4대 미녀 ’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원제의 궁녀로 있다가 후에 흉노의 선우 였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 처가 된다.
이름은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이며, 훗날 태조 문황제인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불리기도 했다.
– 생애 (한궁추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원제는 모연수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모집한다. 왕소군이 궁녀로 발탁되었으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내내 냉궁에 있다가 우연히 원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하라고 명한다. 모연수가 흉노에 투항하여 왕소군의 미인도를 선우에게 바치자 선우는 왕소군을 요구하며 화친을 제안한다. 원제는 전쟁을 불사하지만 신하들이 화친을 주장하여, 결국 왕소군은 흉노 땅에 보내진다. 원제와 이별한 왕소군은 원제를 위해 술을 뿌리고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호한야선우는 충절에 감동하여 장례를 치를 후 모연수를 한나라로 보내고, 원제가 끝내 그를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러한 왕소군의 생애는 대중적인 이야기일 뿐 사실과 거리가 있는데 이는 왕소군에 대한 역사와 왕소군에 대한 리텔링을 통해 알 수 있다.
– 역사기록 속의 왕소군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라는 점에서 ‘한서’라고 할 수 있다.
경녕(竟寧) 1년(33년) 선우는 다시 입조하였다. 예우와 [물품] 하사는 처음과 같았으나 의복과 비단, 명주솜을 더 주었는데, 모두 황룡 시기에 [추가로 사여한 양보다] 곱절이었다. 선우는 한 종실의 사위가 되어 자신이 [한의] 친족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원제 때 이후 궁에 있던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하사하였다. 선우가 매우 기뻐하였다. (한서-‘흉노전’)
앞서 말했듯이 정말 간결하다. 텍스트의 주체는 원제, 선우 두 명으로 왕소군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물론, 왕소군 그녀가 흉노로 감으로써 한과 흉노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이것은 그녀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뒤의 -‘후한서’는 그 양상이 상이하다.
왕소군은 자가 장으로 남군사람이다. 이전 원제의 치세(BC 43-33)에 양가자로 선발되어 액정으로 들여졌다. 당시 호한야선우가 내조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궁녀 다섯 명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몇 년이 지났건만 황제를 보지 못하여 슬픔과 원망에 싸여 이에 액정령(직책)에게 흉노로 가고 싶다고 청구하였다. 호한야선우가 큰 연회에 참석하여 연회를 마치고 떠날 즈음 황제는 다섯 여인을 불러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왕소군은 풍려한 외모에다가 단장을 하고, 치장을 하니 한궁에서도 빛나게 돋보였고 그녀가 뒤돌아볼 때는 옷이 치렁치렁하게 돌아가는 광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움직일 정도였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서 크게 놀라서 속으로는 그녀를 궁중에 남겨두고 싶었으나 신뢰를 잃을까 걱정하여 마침내 그녀를 흉노에게 주었다.(後漢書-‘南匈奴列傳’)
반면, ‘후한서’에는 왕소군이 주체가 되며, 그녀의 의지로 흉노에 간 것으로 제시된다. 이는 ‘양가자(良家子,’라는 어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양가자’는 ‘청빈한 농민 집안의 자제’라는 뜻으로 왕소군이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역사서인 ‘후한서’는 평민이라는 지위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여성의 지위는 높아졌으나, 아직도 왕소군이라는 여성이 한과 흉노 사이의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여성학적으로 높게 평가될 변화는 아니다. 그리고 따라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서’, ‘후한서’와 같은 문학 작품이 아닌 역사서들이 그 내용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한서’가 후한 시대에 쓰였고, ‘후한서’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송(宋)에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혹은 사(史)관의 개인적 의견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왕소군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텍스트라 볼 수 있는 ‘한서’와 왕소군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다른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왕소군에 대한 리텔링
다음은 문학작품에서의 ‘리텔링’이다. 리텔링(retelling)이란 말 그대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이유는 많겠지만 주된 이유는 이야기의 긴장감, 참신함을 얻거나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은 수업 시간에 다룬 ‘의고파-고힐강’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史(기록)’란 하나의 텍스트로서 당대의 역사가에 의해 쓰이거나,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에서 역사가, 혹은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고힐강의 주장이 리텔링된 문학 작품에도 다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대중성에는 독자와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위 목차에서는 수업의 ‘의고파’에 초점을 맞춰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왕소군의 리텔링 과정을 서술하겠다.
그리고 왕소군이 문학작품으로서 갖는 의의는 왕소군에 대한 문학이 ‘한서’, ‘후한서’의 내용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위에 제시한 왕소군의 생애는 ‘한궁추’가 현재 세상에 알려진 왕소군의 이미지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텍스트이므로 ‘한궁추’에 그 바탕이 있다. 하지만 ‘한궁추’는 리텔링된 것이고 문학 작품이라는 점에서 허구성이 있다.)
– 서경잡기에서의 리텔링
왕소군에 대한 초기의 문학은 ‘서경잡기([西京雜記])’로 추정된다.
왕소군은 16세의 나이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했다. (원제 때인 BC38년에 전국의 미녀를 선발하여 후궁으로 보충토록 명을 내렸기 때문에 아마 왕소군도 이 시기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궁녀가 많아 황제는 화공의 그림을 통해 궁녀들의 외모를 평가했다. 하지만 왕소군은 가난한 출신으로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고, 그녀의 얼굴은 못나게 그려져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후에 흉노의 선우인 호한야선우가 입조하여 한나라의 미녀를 구해 그 비로 삼겠노라고 요구했고, 원제는 그림(그림을 그린 화공은 모연수라는 설이 있다.)에 의거하여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소군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원제는 그녀의 미모가 후궁 가운데 제일이며, 행동거지 또한 한아함을 알게 되었다. 원제는 후회스러웠지만 흉노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터라 다른 궁녀로 바꿀 수 없었다. 이에 그 일을 철저히 따져 화공들 모두 기시(죄인의 목을 베어 죽이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형벌)에 처하고 화공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그 재산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그녀가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떨어지고,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호한야 선우의 처로서 살았다고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왕소군에 대한 역사에 제시된 한서, 후한서의 내용과 다른 점은 화공이라는 관료층이 등장하고, 왕소군(평민층)이 보다 주체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나라 사회의 계층 간 장벽이 두껍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료층인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왕소군(평민)은 평민층에게 희열의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서경잡기([西京雜記])’가 유학자인 유흠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직 종이의 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저자인 유흠이 대중성을 위해 ‘서경잡기([西京雜記])’를 지었다고 추측할 수 없다.
반대로 이는 당시의 지식인·지배층을 위한 문학으로 보이는데, 흉노에 대한 한의 거부 이데올로기라 볼 수 있다.(이민족은 한나라 이전의 춘추시대. 전국시대, 진나라부터 거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왕소군이라는 평민 출신의 여성은 흉노에 대한 거부감을 은연중에 내포하기 위해 나약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또한 유교 프레임에 맞게 뇌물을 받은 관료를 ‘악’으로 지정하며, 그에 대한 명군(원제) 의 처벌을 정당화한다.
– 한궁추에서의 리텔링
“왕소군에 대한 대표적인 인식은’한궁추’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궁추’는 영향력이 있는 문학 작품이다.(위에 제시한 왕소군의 생애도 ‘한궁추’가 대중적이기에 ‘한궁추’를 요약하여 제시하였다.)
漢 원제는 毛延寿(모연수)의 의견에 따라 후궁을 모집한다. 王昭君이 궁녀로 발탁되었으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내내 냉궁에 있다가 우연히 원제를 만나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고, 그 결과 원제는 모연수를 참수하라고 명한다. 모연수가 흉노에 투항하여 왕소군의 미인도를 선우에게 바치자 선우는 왕소군을 요구하며 화친을 제안한다. 원제는 전쟁을 불사하지만 신하들이 화친을 주장하여, 결국 왕소군은 흉노 땅에 보내진다. 원제와 이별한 왕소군은 黑水(흑수)에서 漢王(한왕)을 위해 술을 뿌리고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다. 呼韩邪單于(호한야선우)는 충절에 감동하여 장례를 치른 후 모연수를 한 나라로 보내고, 원제가 끝내 그를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중략)
선우: 나는 호한야선우요. 어제는 사신을 한나라로 보내어 공주를 내게 시집보내라고 했는데, 한나라 임금은 공주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거절해 와서 내 마음이 얺짢소! 한나라 궁중에는 수많은 궁녀가 있다니, 그 중에서 한 사람쯤 내게 준대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오. 그런데도 사신을 곧장 쫓아 들여보내다니! 군대를 동원하여 남침을 하자니 몇 년 동안의 평화를 잃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 형편 돌아가는 것을 보아 달리 도리를 강구하도록 해야겠소.
모연수: 어제는 성도(成都) 자귀현(秭歸縣)에 가서 한 사람을 뽑았는데, … 외모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서 진실로 천하의 절색이라 할 만합니다. … 나는 그들에게 돈 백 냥만 내놓으면 첫째로 뽑아 올려주겠다고 했는데도, 살림이 가난한데다가 자신의 용모가 출중한 것을 믿고 전혀 말을 듣지 않더군요.
(중략)
원제: 내 이제껏 군사를 길러온 것은 유사시에 쓰기 위함이다! 공연히 조정엔 문무백관이 잔뜩 있단 말이오? 누가 나를 위해 오랑캐 군사를 물리쳐 주겠소? 모두들 칼과 화살이 무서워 이렇게 맥을 못추고 있는 거요? 어찌 명비를 내주고 오랑캐와 화친을 한단 말이오?
(중략)
원제: 명비가 연약하고 착하다 하여 업신여기는 모양인데, 만약 옛날 여태후가 계시던 시절이라면, 누가 감히 한마디 명령인들 거역하였겠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왕소군이 한 번 더 리텔링 되어 내용이 전과 상이하다는 것이다. 우선 ‘서경잡기’에서 뇌물을 받은 화가인지 아닌지 모호했던 모연수는 뇌물을 받은 악덕 화공의 모습으로 변하고 흉노로 도망가는 비열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고급관료가 아니었던 작가 마치원이 어느 정도 계급·신분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원나라 시대의 한족이었는데, 따라서 그는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왕소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킨다. 또한 한과 흉노 간의 화친정책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세력이 비교적 약했던 흉노를 ‘흉노가 원하는 여인을 한나라에서 취할 정도로’ 강하게 묘사한 것은 흉노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키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원제의 “옛날 여태후가 계시던 시절이라면, 누가 감히 한마디 명령인들 거역하였겠나?”라는 말은 당시에 여태후가 흉노에게 타협적인 정책을 펼친 사실과 모순된다. 이는 흉노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했다고 본다.
– 현대에 리텔링된 왕소군
‘현대에 리텔링된 왕소군’의 대표적인 예로 조우의 ‘왕소군’을 들 수 있다. 조우의 역사극 ‘왕소군’은 1978년에 발표되었지만, 작품 구상은 주은래 총리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조우에게 임무(리텔링)를 맡겼다. 조우가 고백하길 이 연극은 경애하는 주총리가 생전에 나에게 맡긴 임무였다. 그것은 1960년대 이전의 일로, 주총리는 우리에게 대한족주의를 가지지 말고, 함부로 잘난 체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말은 몽고족과 한족간의 혼인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총리는 한족 여성들이 소수민족들에게 시집을 가도록 제창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왕소군을 거론하면서 주총리는 …. 나에게 왕소군 극본 창작을 권유하였다.
이는 모택동의 여섯 가지 표준 중에서 첫 번째 조항인 ‘민족 단결에 유리하고, 민족적 분열을 조장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과 어울린다. 또한 그는 내몽골에 가서 왕소군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몽골 사람들은 왕소군을 온화한 여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무덤에 가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고, 아이를 갖지 못한 부부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미신까지 생긴 것이다. 즉, 그녀는 몽고족 여인들이 좋아하는 한족 여성이었고, 이는 주총리의 소수 민족을 존중하는 사상과 연관되기 충분했다. 즉 당대의 이데올로기 혹은 당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가 ‘왕소군’에 개입되어 리텔링된 것이다.
정리하면, ‘왕소군’이라는 역사서에 나온 인물은 각 시대마다 그 시대, 혹은 작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변화한 양상을 볼 수 있다.
○ 왕망의 등극과 전한의 몰락
왕망에게 선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영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왕망은 다섯 살의 유영을 감금시킨 채 어느 누구와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25년, 갱시제 유현의 승상 이송(李松)에게 죽임을 당한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기원전 54년, 태자가 가장 사랑하던 여인이 병사한다. 여인이 죽으면서 남긴 말, “신첩의 죽음은 천명이 아니옵니다. 다른 첩들이 저주하여 저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태자 유석(劉奭)은 꽃다운 나이에 죽은 사마양제가 가련하다. 그녀를 저주한 여인들에게 화가 난다. 여자라면 꼴도 보기 싫다. 아버지 선제는 태자가 여자를 멀리하는게 영 불안하다. 황실의 대를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선제는 황후에게 서둘러 태자의 짝을 맺어주라고 했다. 황후는 다섯 여인을 부른 뒤 태자에게 한 사람을 선택하게 한다. 태자가 무심하게 지목한 한 여인, 그저 태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기에 선택된 이 여인은 왕정군(王政君)이다. 그녀는 태자와의 하룻밤 동침으로 임신한다. 감로(甘露) 3년(기원전 51년), 그녀는 아들을 낳는다. 너무도 기쁜 선제는 손자 유오에게 태손(太孫)이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 태어나자마자 황위를 보장해준 것이다.
기원전 49년, 선제가 세상을 뜨고 원제(유석)가 뒤를 잇는다. 기원전 33년, 원제가 재위 16년 만에 마흔둘로 병사한다. 그 뒤를 이은 성제(유오)는 재위 26년 만인 마흔다섯에 세상을 뜬다. 아들 성제가 먼저 세상을 떠난 그해(기원전 7년)에 왕정군의 나이 예순다섯, 혼인하던 날 이후로 남편 원제는 왕정군을 다시 찾지 않았다.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아들은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뜬 것이다. 사실 성제에게 자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들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황실의 후사가 끊어진 건 조비연(趙飛燕) 때문이다. ‘환비연수(環肥燕瘦)’라는 말이 있는데, 양옥환(양귀비)은 통통하고 조비연은 말랐다는 뜻이다. 두 미인의 상반된 신체미를 표현한 말이다. 제비가 날 듯 사뿐히 춤출 수 있었다던 조비연은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가녀린 몸매였다고 한다. 성제는 허황후를 쫓아내고 조비연을 황후로 삼을 정도로 조비연을 총애했다. 그런데 조비연은 임신을 하지 못했고 후궁이 낳은 아이를 죄다 죽였다. 이렇게 해서 황실의 후사가 끊기게 된다. 성제 때의 동요 중에 “제비가 날아와 황손을 쪼니, 황손은 죽고 제비는 화살(矢)을 쪼리라”(<한서>, 오행지)라는 노랫말이 있는데, 바로 이 일을 빗댄 것이다.
앞의 동요에서 시(矢)는 시(屎, 똥)를 의미한다. 황손을 쪼아 죽인 제비가 똥을 쪼는 신세가 되리라는 것은 조비연의 비참한 말로를 암시한다. 성제가 세상을 뜬 뒤 성제의 조카 유흔(劉欣)이 애제(哀帝)로 즉위하게 되는데, 조비연은 그의 즉위를 지지한 덕분에 한동안은 황태후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애제가 세상을 뜬 뒤 조비연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인으로 강등된 조비연은 결국 자살로 생을 끝내고 만다.
선제·원제·성제 이후 방계로 황위에 오른 애제는 재위 6년 만인 스물다섯에 갑자기 세상을 떴다. 애제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 방계로 황위에 오른 아홉 살의 평제, 불과 열넷에 죽고 만다. 평제의 후계자로 정해진 유영은 겨우 두 살이었다. 너무 어려서 황제로 즉위하지 못한 채 황태자로 지내던 유영은 결국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그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은 바로 왕망(王莽).
유영은 왕망이 황제가 되기 전 완충지대로서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다. 왕망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어린 유영을 황태자로 삼았던 것이다. 혈통이 정권의 정통성을 담보하던 시절, 설령 방계일지라도 유씨 혈통이 이어져야 하거늘 왕씨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야말로 ‘찬탈’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시에 왕망의 황제 등극은 천명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관리와 백성이 왕망에 환호했다. 왕망이 ‘자연스럽게’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던 데는 음양오행설과 천인감응설에 휩싸였던 전한 시대의 사회 분위기가 한몫했다. 몇 가지 사례로 그 분위기를 엿보기로 한다.
원제 때는 “우물물이 넘쳐 밥 짓는 연기가 꺼지며, 옥당(玉堂)에 흘러들어가고 금문(金門)에 흐르네”(한서, 오행지)라는 노랫말이 전해지기도 했다. 우물물은 음(陰), 밥 짓는 연기는 양(陽)에 해당한다. 궁전인 옥당과 궁문인 금문은 황제의 거처를 상징한다. 물이 불을 끄고 옥당과 금문에 흐른다는 것은 음이 성하여 양을 소멸시킨다는 의미다. 이는 황위가 찬탈될 징조로, 화덕(火德)의 한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원제 초원(初元) 4년(기원전 45)에는 왕정군의 증조부 왕백(王伯)의 묘문(墓門) 가래나무(梓) 기둥에 갑자기 나뭇가지와 잎이 생겨나더니 사방으로 무성히 자라났다고 한다. 이 일은 왕씨가 창성해져서 한나라를 대신할 징조로 여겨졌다. 훗날 왕망은 이 일을 두고 ‘문’은 연다는 뜻이고 ‘가래나무’는 자손을 의미(재(梓)와 자(子)는 중국어 발음이 ‘쯔’로 동일하다)하니, 기둥 같은 대신(大臣)의 지위에서 흥기해 천명을 받고 왕이 될 길조였다고 풀이했다.
초원 4년은 바로 왕망이 태어난 해다. 왕망은 왕정군의 조카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성제가 즉위하자마자 왕정군의 오빠 왕봉(王鳳)이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게 되는데, 왕망이 바로 왕봉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이다. 왕망은 중병에 걸린 백부 왕봉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고, 이를 계기로 왕봉의 추천을 받아 성제로부터 황문랑(黃門郞)이라는 관직을 하사받는다. 이때가 기원전 22년, 왕망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한편 성제 때는 “계수나무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황작(黃雀)이 그 꼭대기에 둥지를 트네”(한서, 오행지)라는 노랫말이 전해졌다. 계수나무는 붉은색으로 한나라를 상징하는데, 그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후사가 끊어질 것을 의미한다. 황작은 왕망을 상징하는데, 훗날 왕망이 세우게 되는 신(新)이라는 나라가 바로 황색을 숭상했다.
왕망은 관직에 나간 이후로도 겸손함과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 외척 왕씨 집안에서 그에 대한 신임은 날로 두터워졌다. 기원전 8년에는 당시 대사마이던 왕근(王根)이 중병에 걸리자 자신의 후임으로 조카인 왕망을 추천한다. 이렇게 해서 왕망은 서른여덟에 대사마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황작이 계수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틀 날이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평제가 황위에 오른 원시(元始) 원년 정월(서기 1년 음력 1월), 남쪽 변방 바깥의 나라에서 한나라에 흰 꿩을 바쳤다. 일찍이 주나라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무왕의 동생 주공이 어린 성왕을 도와 섭정하자 천하가 태평하여 이웃나라에서 앞을 다투어 조공을 바쳤는데, 월상씨(越裳氏, 베트남 일대에 있던 나라)에서 흰 꿩을 바쳤다고 한다. 이번에 한나라에 흰 꿩을 바친 나라도 바로 월상씨다. 이는 아주 특별한 역사적 상징이었다. 대신들은 왕정군에게 상주하여, 새 황제를 옹립하여 조정을 안정시킨 공로에 걸맞은 상을 왕망에게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공 때 먼 나라에서 흰 꿩을 바쳐온 상서로움이 왕망의 공덕으로 인해 다시 생겼다면서, 주나라의 국호를 주공(周公)의 칭호로 하사했듯 왕망에게도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원시 4년에는 안한공 왕망에게 재형(宰衡)이라는 직함이 더해진다. 재형은 주나라 성왕을 보좌한 태재(太宰) 주공과 상나라 탕왕을 보좌한 아형(阿衡) 이윤의 칭호를 합한 것이다.
이윤과 주공처럼 평제를 잘 보좌했어야 하는 안한공 재형 왕망, 그런데 평제는 열넷에 죽고 만다. 일설에 의하면 왕망이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 왕망이 자신의 사위인 평제를 정말 작정하고 죽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왕망은 평제가 죽은 뒤 황위 계승 후보자들 가운데 두 살배기 유영을 황태자로 옹립했다. 그 저의는 분명했다. 평제가 죽고 유영이 황태자로 옹립된 달, 매우 공교로운 징조가 나타났다. 맹통(孟通)이라는 자가 우물을 파다가 흰 돌을 얻었는데 그 돌에 붉은 글씨로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안한공 왕망에게 고하니 황제가 되라.” 하필(혹은 마침) 바로 그때 이런 징조가 나타난 것이다. 왕망은 ‘가(假)황제’ 즉 대리 황제가 되었다. 다들 왕망을 섭(攝)황제라 불렀고, 연호는 거섭(居攝)으로 정해졌다.
거섭 3년(8년), 왕망이 황위에 올라야 한다는 징조를 알리는 소식이 곳곳에서 전해졌다. 천제(天帝)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섭황제가 진짜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말에 대한 증거로 다음날 우물이 생겨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다음날 아침 백 척 깊이의 우물이 생겨났다는 소식이 제군(齊郡)에서 전해졌다. 이어서 석우(石牛)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파군(巴郡)에서 전해지고, 선석(仙石)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부풍(扶風)에서 전해졌다. 이는 모두 천명을 받들어 왕망이 황위에 올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징조였다. 당시 장안으로 공부하러 온 애장(哀章)이라는 자는 왕망이 진짜 천자이니 황태후(왕정군)는 하늘의 뜻에 따르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위조하기도 했다. 애장은 위조한 문서를 구리 궤짝에 넣은 뒤 고제(高帝, 유방)의 사당으로 가져가 복야(僕射)에게 전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왕망은 고제의 사당으로 가서 그것을 갖고 돌아온 뒤 미앙궁 전전(前殿)에서 조서를 발표한다. 천명이 신령한 계시를 내려 천하 백성을 자신에게 맡겼으니 어찌 감히 그 명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천자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新)으로 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연호는 시건국(始建國)으로 정해졌다. 왕망은 어린 황태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일찍이 주공은 왕위를 대신하다가 마침내 권력을 성왕에게 돌려줄 수 있었거늘, 지금 저는 하늘의 엄한 명령을 받아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왕망은 슬픔에 잠긴 채 오래도록 탄식했다고 한다. 일찍이 주공이 되길 자처했던 왕망은 황제로 즉위할 즈음에는 요(堯)가 순(舜)에게 선양한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 순을 조상으로 둔 자신이 요를 조상으로 둔 한나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선양의 근거는 천명이고, 천명의 근거는 제왕의 덕이다. 사실 제왕이 되기까지 왕망의 삶은 유가적 덕의 실천 그 자체였다.
왕망에게 선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영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왕망은 다섯 살의 유영을 감금시킨 채 어느 누구와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유영은 결국 육축(말·소·양·돼지·개·닭)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만다. 그리고 25년, 갱시제 유현의 승상 이송(李松)에게 죽임을 당한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왕망은 유영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23년, 녹림군이 장안으로 쳐들어와 미앙궁을 불태우고 왕망을 죽인 것이다. 평제가 죽은 뒤 홀로 지내던 왕망의 딸은 당시에 의연히 궁전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왕망의 최후는 어땠을까? 반란군이 장안을 쳐들어왔을 때도 왕망은 “하늘이 나에게 덕과 사명을 주셨으니 저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일찍이 공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한 바 있다)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반란군을 진압할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병사들과 함께 미앙궁 점대(漸臺)로 가서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두오(杜吳)라는 장사꾼의 손에 죽게 된다. 반란군은 왕망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었다. 왕망의 머리는 갱시제에게 보내져 길거리에 내걸렸다. 왕망의 혀를 잘라 먹는 사람까지 있었다.
왕망의 일생을 보면, 그가 유가의 성인을 모델로 삼고 유가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유가적 유토피아를 추구했던 그는 토지의 겸병을 막고자 정전(井田)제도를 시행했고,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는 등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은 그의 정책에 반대했고, 당시의 생산력으로는 그의 정책을 현실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뚜기 떼와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잇달았고 기근은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왕망은 철저히 실패했다. 역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위군자(僞君子), 난신적자(亂臣賊子)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왕망이 건국한 ‘신’은 유씨 왕조인 전한과 후한 사이에 끼어 있다. 혈통이 정통성을 담보하던 시대의 프레임이 그를 찬탈자·위군자·난신적자로 규정한 게 아닐는지. 후스(胡適)는 이제껏 그 누구도 왕망에게 공평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며 그를 중국의 첫 번째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왕망은 분명 오늘날 우리에게도 문제적인 인물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고자 하는 이라면 한 번쯤 꼼꼼히 들여다봐야 할 인물임에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왕망의 시대를 지배했던 천인감응이나 음양오행이 우리에게는 미신으로 여겨지겠지만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당시로서 가장 ‘합리적’인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 시대의 믿음이 또 다른 시대 사람들에게는 미신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의심의 자유와 의심의 능력을 지닌 사회만이 건강할 수 있다. _ 이유진(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