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즈번에서
브리즈번에서 살아가기
매주 목요일이면 이 곳의 한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노인병동의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다. 공식명칭은 Chaplain이지만 서툰 영어가 항상 문제인지라 고민을 하다가 기타를 들고 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에도 입에도 익숙한 찬송가를 부르다가 팬(?)들의 요구가 있어서 점점 레파토리를 확장해 가다보니 이제는 오래 된 팝송이나 동요 같은 것들을 주로 부른다.
솔직히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미 중병에 걸려 거동조차 할 수 없는 노인들, 때로는 나의 노래를 듣는지 못 듣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그냥 초점 없는 시선으로 천장만 향하고 있는 환자의 방을 들어갈 때면 가끔씩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가 생길 때도 있었다. 성찬을 원하는 몇 환자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메시지를 줄 때는 더욱 그랬다. 그 때는 짧은 영어로 설교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측은함보다,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설교를 들어야 하는 그 분들의 고충이 더 컸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요인들이 겹치다 보니, 그걸 핑계 삼아 괜히 다른 이유를 내세워서 빼 먹은 적도 있었다.
하루는 유난히 병원사역이 가기 싫어지는 아침이었다.
그 날은 순전히 의무감 때문에 갔다. 일부러 늑장을 부리고 왔기 때문에 Staff 주차장을 몇 바퀴 돌았지만 주차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잘됐다’ 싶어서, 한 바퀴만 더 돌고 주차를 핑계 삼아 빼먹기로 하고 주차장을 돌고 있는데, 병동 코디네이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어디쯤 왔냐는 전화였다. 주차할 곳을 찾고 있다고 하자, 한 할머니가 30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얼마나 게으르고 나태한 존재인가를 거울에 비쳐보는 듯했다. 간신히 주차를 하고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 가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90이 넘은 할머니는 휠체어에 기대 앉아 에델바이스를 다섯 번도 더 불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를 때 눈가가 촉촉히 젖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노래소리를 듣고 하나 둘씩 모여든 환자들이 20여명이 되었다. 어떤 분은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이동용 침대에 누운채 나온 분들도 있었다. 노래를 몇 곡 불러주고 성찬기를 들고 원하는 분들께 성찬을 베풀었는데, 한 할머니의 얼굴에서 파킨슨씨 병을 앓아 오다가 2년 전부터 요양원에 입원하신 한국의 어머니가 겹쳐졌다.
어머니, 6년 전에 먼 객지로 장남을 떠나보낸 이후로 어머니는 그 아들 걱정에 단 하루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목회 현장에서 힘들고 지쳐있을 때, 포기하고 싶은 절망감에 몸서리를 치고 있을 때, 가끔씩 울먹이며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으니 주님만 바라보라’는 목소리를 들려주셨던 그 어머니는 이제 전화기의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 언제부턴가는 사진 속의 내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실 때가 있다고 한다.
흐려져 가는 기억 속에 그나마 강하게 머물고 있는 아들을 그리워하며 중환지실과 요양원을 오가는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나의 병원 사역은 정말 그래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성찬식을 마쳤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한국 노래를 하나 들려줄 수 없냐고 물어왔다.
한 참을 고민하다가 불러 준 노래가 어이없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였다.
2절을 부르면서는 나도 모르게 울면서 불렀다. 그런 나를 보면서 뜻도 모르고 병동의 노인들도 따라서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시 한 줄을 적었다.
멈춘 시간
어머니의 기억은
벽에 걸린 달력 속에 멈춰있다
호박 껍질 같은 생애가
할퀴고 지나간 손등에는
나무뿌리가 드러나고
흰머리 가득한 아들이 그 뿌리에 입을 맞추어도
어머니는 삼십 년 전 군대 간 아들을
여전히 기다린다
동구 밖, 같이 놀던 느티나무는 고목이 되었고
섬진강 장구목을 게으르게 흐르는 물도
가끔씩은 쉬어 간다는데
멈춰버린 어머니의 시간은 움직일 기미가 없다
목포시 석현동 치매노인 요양소,
천정에 테이프로 붙인 야광별과
아슬아슬 매달린 초승달을 보고
어머니, 웃으신다.
‘하늘 차암 파랗다’.
김웅재 목사(브리즈번 서림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