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열전
관안열전 (管晏列傳)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관안열전’은 춘추시대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 포숙과 함께 지냈으며, 널리 알려져 있는 “관포지교”의 기록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출신지인 영상의 특성과 관포지교의 내용 중 상업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관중과 포숙은 각각 제나라의 공자인 규와 소백을 모셨다. 제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에게 시해당하고 제나라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되자, 관중과 포숙은 각기 규와 소백을 모시고 제나라를 향했다. 포숙의 신속한 대처로 소백이 먼저 군주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관중이 모시던 규가 죽고, 노나라로 망명했던 자신 역시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나, 포숙의 천거로 그는 하루아침에 제나라의 재상에 오르게 된다.
한편 포숙은 중국 춘추시대의 제환공을 섬기던 정치가이다. 그의 친구이자 제나라의 명재상인 관중과의 우정을 나타낸 고사성어 관포지교로 유명하다. ‘포숙아(鮑叔牙)’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어릴 적 부터 관중과 깊이 교류하며 우정을 쌓아 왔는데 관중의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포숙은 관중이 혼자 장사를 했다 망하자 운이 없는 거라 위로했고 관중이 관리가 되었다가 3번이나 쫒겨나자 마찬가지로 “자네는 운이 없는 것이지 자네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닐세.”라며 위로 했다. 또한 관중이 군인이 되겠다며 전쟁터에 나갔다가 3번이나 탈영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맹비난 했는데 자신만은 관중이 노모를 모시고 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감싸주었다.
○ 관안열전 (管晏列傳)
管仲夷吾者(관중이오자) : 관중 이오는
潁上人也(영상인야) : 영상 지방 사람이다
少時常與鮑叔牙游(소시상여포숙아유) : 젊어서 포숙아와 사귀었다
鮑叔知其賢(포숙지기현) : 포숙은 그가 현명한 사람인줄 알았다
管仲貧困(관중빈곤) : 관중은 가난해서
常欺鮑叔(상기포숙) : 항상 포숙을 속였으나
鮑叔終善遇之(포숙종선우지) : 포숙은 끝까지 그를 좋게 대해주고
不以爲言(불이위언) : 그것을 말 내지 않았다
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이이포숙사제공자소백) : 얼마 지난 뒤, 포숙은 제나라 공자 소백을 섬기고
管仲事公子糾(관중사공자규) : 관중은 소백의 형인 공자 규를 섬기게 되었다
及小白立爲桓公(급소백입위환공) : 소백이 환공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자
公子糾死(공자규사) : 경쟁자인 공자 규는 싸움에서 죽고
管仲囚焉(관중수언) : 그의 부하인 관중은 잡히어 갇히었다.
鮑叔遂進管仲(포숙수진관중) : 그러나 마침내 포숙은 관중을 밀어주어
管仲旣用(관중기용) : 관중이 등용되어
任政於齊(임정어제) : 제나라에서 국정을 맡았다.
齊桓公以霸(제환공이패) : 제 환공은 패자의 지위로서
九合諸侯(구합제후) : 제후들을 규합하여
一匡天下(일광천하) : 천하를 한번에 바로잡았으니
管仲之謀也(관중지모야) : 모두가 관중의 지모 때문이었다
管仲曰(관중왈) : 관중이 이르기를,
吾始困時(오시곤시) : 내가 처음 어려웠을 때
嘗與鮑叔賈(상여포숙가) : 일찍이 포숙과 장사를 하여
分財利多自與(분재리다자여) : 재물의 이익을 분배함에 나에게 더 많이 주었으나
鮑叔不以我爲貪(포숙불이아위탐) :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知我貧也(지아빈야) : 그가 나의 가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吾嘗爲鮑叔謀事而更窮困(오상위포숙모사이갱궁곤) : 내가 일찍이 포숙을 위해 사업을 경영하였으나 다시 더욱 곤궁해졌으나
鮑叔不以我爲愚(포숙불이아위우) :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안았으니
知時有利不利也(지시유리불리야) : 사업할 때에 이롭과 이롭지 않음이 있음을 그가 알았음이라
吾嘗三仕三見逐於君(오상삼사삼견축어군) : 내가 일찍이 세 번을 벼슬하여 세 번을 임금에게 쫓겨났으나
鮑叔不以我爲不肖(포숙불이아위불초) :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知我不遭時也(지아불조시야) :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吾嘗三戰三走(오상삼전삼주) : 내가 일찍이 세 번을 싸워서 세 번을 달아났으나
鮑叔不以我爲怯(포숙불이아위겁) : 포숙은 나를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知我有老母也(지아유노모야) :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公子糾敗(공자규패) : 공자규가 패하여
召忽死之(소홀사지) : 동료이던 소흘이 죽고
吾幽囚受辱(오유수수욕) : 나는 갇히어 욕된 몸이 되었는데
鮑叔不以我爲無恥(포숙불이아위무치) :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知我不羞小節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지아불수소절이치공명불현우천하야) :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生我者父母(생아자부모) :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요
知我者鮑子也(지아자포자야) :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니라
鮑叔旣進管仲(포숙기진관중) : 포숙은 관중을 천거한 연후에
以身下之(이신하지) : 그 자신은 관중의 아랫자리에 들었다
子孫世祿於齊(자손세록어제) :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제의 녹봉을 받고
有封邑者十餘世(유봉읍자십여세) : 봉읍을 가지기를 십여대가 되도록
常爲名大夫(상위명대부) : 항상 이름 있는 대부이었다
天下不多管仲之賢(천하불다관중지현) :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몀함을 칭찬하기보다는
而多鮑叔能知人也(이다포숙능지인야) : 포숙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을 더 칭찬하였다
管仲旣任政相齊(관중기임정상제) :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나라의 정치를 맡으니
以區區之齊在海濱(이구구지제재해빈) : 변변치 못한 제나라가 바다에 있어
通貨積財(통화적재) : 재화을 유통하고 재물을 쌓아
富國彊兵(부국강병) :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강하게 하여
與俗同好惡(여속동호악) : 민중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故其稱曰(고기칭왈) : 그래서 그가 칭하여 이르기를
倉廩實而知禮節(창름실이지례절) : 창고가 가득 차야 백성은 예절을 알고
衣食足而知榮辱(의식족이지영욕) :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
上服度則六親固(상복도칙육친고) : 위에 있는 자가 법도를 지켜야 육친이 굳게 결집되고
四維不張(사유불장) : 사유(예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아니하면
國乃滅亡(국내멸망) :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下令如流水之原(하령여류수지원) : 명령을 내림이 흘러내리는 물의 근원 같아서
令順民心(령순민심) : 명령이 민심을 순응하게 했다
故論卑而易行(고론비이역행) : 그래서 아래에서 의논한 정책이 쉽게 이행되었다
俗之所欲(속지소욕) : 민중이 원하는 것
因而予之(인이여지) : 그것에 따라서 잘 해주고
俗之所否(속지소부) : 민중이 원하지 않는 것
因而去之(인이거지) : 그것에 따라 없애주었다
其爲政也(기위정야) : 그가 정치를 함에는
善因禍而爲福(선인화이위복) : 화로 인한 것을 잘하여 복으로 만들고
轉敗而爲功(전패이위공) : 실패를 돌이켜 공으로 만들고
貴輕重(귀경중) : 일의 경중을 귀중히 여기고
愼權衡(신권형) : 저울질의 균형을 신중히 하여야 한다
桓公實怒少姬(환공실노소희) : 예를 들면, 환공이 실은 소희의 일에 성을 내어
南襲蔡(남습채) : 남으로 소희 고향인 채 지방을 습격하였었다
管仲因而伐楚(관중인이벌초) : 관중은 그일로 초나라를 치면서
責包茅不入貢於周室(책포모불입공어주실) : 포모가 주왕실에 조공하지 않아서 꾸짖었다고 했다
桓公實北征山戎(환공실북정산융) : 또 환공은 실은 북은 산융을 치게 되었으나
而管仲因而令燕修召公之政(이관중인이령연수소공지정) : 관중은 그로 인하여 연에게 명하여 소공의 정사를 부활하게 한다고 했다
於柯之會(於柯之會 ) : 또 환에서 모인 회합에서
桓公欲背曹沫之約(환공욕배조말지약) : 환공은 노의 과객 조수의 약속을 어겼으나
管仲因而信之(관중인이신지) : 관중은 그로 인해 그를 믿게 한 것이라 했다
諸侯由是歸齊(제후유시귀제) : 이로 인하여 제후는 제나라오 귀의했다
故曰(고왈) : 그러므로 이르기를
知與之爲取(지여지위취) : 주는 것이 취하는 것이 됨을 아는 것이
政之寶也(정지보야) : 정치의 보배이니라
管仲富擬於公室(관중부의어공실) : 관중이 가진 부는 공실과 비슷해
有三歸反坫(유삼귀반점) : 삼귀와 반점이 다 갖춰있었으나
齊人不以爲侈(제인불이위치) : 제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사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管仲卒(관중졸) : 관중이 죽자
齊國遵其政(제국준기정) : 제나라는 관중의 정책을 준수하여
常彊於諸侯(상강어제후) : 항상 제후들보다 강했다
後百餘年而有晏子焉(후백여년이유안자언) : 그 후 백여년이 되어서 안자가 그곳에 나타났다
晏平仲嬰者(안평중영자) : 중평 안영은
萊之夷維人也(내지이유인야) : 내국 이유 지방 사람이었다
事齊靈公莊公景公(사제령공장공경공) : 제나라 영공․장공․경공을 섬기를
以節儉力行重於齊(이절검력행중어제) : 제나라에서 절약과 검소함으로 힘써 행하였다
旣相齊(기상제) : 제나라의 제상이 되어서는
食不重肉(식불중육) : 식사에는 고기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먹지 않았고
妾不衣帛(첩불의백) : 아내에게는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고
其在朝(기재조) : 조정에서는
君語及之(군어급지) : 임금의 묻는 말에 나아가
卽危言(즉위언) : 바른 말로 대답하고
語不及之(어불급지) : 말로 묻지 않으면
卽危行(즉위행) : 스스로 조심해서 행동하였다
國有道(국유도) : 나라에 도가 있으면
卽順命(즉순명) : 임금의 명에 따르고
無道(무도) : 도가 없으면
卽衡命(즉형명) : 명령을 잘 가누었다
以此三世顯名於諸(이차삼세현명어제후) : 이 때문에 삼 세에 걸쳐 제후 사이에서 이름을 드러내었다
越石父賢(월석부현) : 월석부는 어질었으나
在縲紲中(재류설중) : 죄를 범하여 죄수들 속에 있었다
晏子出(안자출) : 안자가 외출하여
遭之塗(조지도) : 길에서 그를 만나
解左驂贖之(해좌참속지) : 말을 풀어 그의 죄값을 치루고
載歸(재귀) : 싣고 돌아왔다
弗謝(불사) : 그러나 감사의 인사도 하지 않고
入閨(입규) : 내실로 들어갔다
久之(구지) : 한참 시간이 지나갔다
越石父請絶(월석부청절) : 월석부가 절교하기를 청하니
晏子戄然(안자확연) : 안자가 놀라서
攝衣冠謝曰(섭의관사왈) : 의관을 바루어 입고 사과하기를,
嬰雖不仁(영수불인) : 나 안영이 비록 어질지는 못해도
免子於戹(면자어액) : 그대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는데
何子求絶之速也(하자구절지속야) : 그대는 절교를 요구함이 이렇게 빠르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石父曰(석부왈) : 석부가 이르기를
不然(불연) : “그렇지 않습니다
吾聞君子詘於不知己而信於知己者(오문군자굴어불지기이신어지기자) : 제가 듣기로는, ‘군자는 자기를 몰라주는 사람에게는 굽히나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알아주리라 믿는다’고 하였으니
方吾在縲紲中(방오재류설중) : 내가 죄수가 되어 있는 동안
彼不知我也(피불지아야) : 나를 죄준 사람은 나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夫子旣已感寤而贖我(부자기이감오이속아) : 그러나 선생이 나를 풀어 준 것은
是知己(시지기) : 곧 나를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知己而無禮(지기이무례) : 지기로서 예가 없다면
固不如在縲紲之中.” 굳이 그대로 죄수로 있는 것만 못합니다.”하니
晏子於是延入爲上客(안자어시연입위상객) : 안자는 이에 불러들여 상객으로 삼았다.
晏子爲齊相出(안자위제상출) : 안자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외출하려는데
其御之妻從門閒而闚其夫(기어지처종문한이규기부) : 모시는 하인의 아내가 문 틈으로 자기 남편을 엿보았다.
其夫爲相御(기부위상어) : 남편은 재상의 하인이므로
擁大蓋(옹대개) : 큰 일산을 바쳐들고
策駟馬(책사마) : 사두마를 책찍질하며
意氣揚揚(의기양양) : 의기 양양해여
甚自得也(심자득야) : 매우 흐뭇한 얼굴이었다
旣而歸(기이귀) : 얼마 뒤에 남편이 돌아오자
其妻請去(기처청거) : 그의 아내가 이혼하여 떠나기를 청하니
夫問其故(부문기고) : 남편이 그 까닭을 물었다
妻曰(처왈) : 아내가 이르기를
晏子長不滿六(안자장불만육척) : “안자는 키가 육척이 다 못되는데
身相齊國(신상제국) : 그 몸은 제나라의 재상으로서
名顯諸侯(명현제후) : 이름은 제후에게 날리고 있습니다
今者妾觀其出(금자첩관기출) : 그러나 지금 제가 외출하는 것을 보니
志念深矣(지념심의) : 뜻과 생각이 깊었고
常有以自下者(상유이자하자) : 항상 스스로 낮추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今子長八尺(금자장팔척) : 그런데 당신은 신장이 팔척인데도
乃爲人僕御(내위인복어) : 남의 말부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然子之意自以爲足(연자지의자이위족) : 그러면서도 당신의 마음은 스스로 만족한 모양이었습니다
妾是以求去也(첩시이구거야) : 제는 이러한 이유로 이혼을 요구합니다” 하니
其後夫自抑損(기후부자억손) : 그 후로 남편은 스스로 마음을 눌렀다
晏子怪而問之(안자괴이문지) : 안자가 이상히 여기고 물으니
御以實對(어이실대) : 하인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晏子薦以爲大夫(안자천이위대부) : 안자는 그를 대부로 삼았다
太史公曰(태사공왈) : 태사공이 이르기를
吾讀管氏牧民山高乘馬輕重九府及晏子春秋(오독관씨목민산고승마경중구부급안자) : 나는 관씨의 목민․산고․병마․경중․구부와 안자춘추를 읽었는데
詳哉其言之也(상재기언지야) : 그 말한 내용이 생세하였다
旣見其著書(기견기저서) : 이미 저서를 보았으므로
欲觀其行事(욕관기행사) : 사적을 알고자 하는 생각에서
故次其傳(고차기전) : 전기를 정리한 것이다
至其書(지기서) : 저서에 대해서는
世多有之(세다유지) :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是以不論(시이불논) : 논하지 않고
論其軼事(논기질사) : 다른 문헌에 빠져있는 것만 기록하였다.
管仲世所謂賢臣(관중세소위현신) : 관중은 세상에서 말하는 바 어진 신하이나
然孔子小之(연공자소지) : 공자는 그를 소인으로 여겼다
豈以爲(개이위) : 어찌해서 그렇게 생각했을까
周道衰微(주도쇠미) : 주나라의 도가 쇠미해지져 있는데
桓公旣賢(환공기현) : 제나라 환공은 어진 임금이었는데도
而不勉之至王(이불면지지왕) : 그를 어진 임금이 되게 힘쓰지 않았고
乃稱霸哉(내칭패재) : 다만 패자로만 일컫게 했음인가
語曰(어왈) : 옛말에 이르기를
將順其美(장순기미) : “그 좋은 점을 더욱 길러주고
匡救其惡(광구기악) : 결점은 바루어 준다
故上下能相親也(고상하능상친야) : 그래야 상하가 서로 친숙해지는 것이다.”고 했으니
豈管仲之謂乎(개관중지위호) : 관중을 말한 것어었던가
方晏子伏莊公尸哭之(방안자복장공시곡지) : 안자는 제나라의 장공이 반역한 신하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그 시체 앞에서 엎드려 곡하고
成禮然後去(성례연후거) : 예를 하였는데 예를 마친 다음에는 그대로 가버렸으니
豈所謂見義不爲無勇者邪(개소위견의불위무용자사) : 이것이 이른바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은 비겁한 사람’이었던가
至其諫說(지기간설) : 그러나 그가 간언하여 말함에 이르러서는
犯君之顔(범군지안) : 임금의 얼굴빛을 범하였으니
此所謂進思盡忠(차소위진사진충) : 이것이 이른바,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退思補過者哉(퇴사보과자재) : 물러나서는 허물을 기울 것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假令晏子而在(가령안자이재) : 가령 안자가 오늘날 살아있다고 하면
余雖爲之執鞭(여수위지집편) : 나는 비록 그를 위해 말 채찍을 잡아도
所忻慕焉(소흔모언) : 그 일은 내가 기뻐하고 흠모하는 바가 될 것이다
○ 관중과 포숙의 일화
“내가(관중) 예전에 곤궁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벌이다가 (실패해 그를) 더욱 곤궁하게 했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시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 번 모두 군주에게 내쫓기고 말았으나,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번 싸움에 나가 세 번 모두 도망쳤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하자, 소홀(召忽)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했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사소한 일에는 수치를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 이것이 고사성어 ‘관포지교’의 유래이다.
관중의 정치에 힘입어 제나라는 강국이 되어 제환공은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리고 훗날 관중은 “날 낳아준 사람은 어머니이지만 날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명언을 남긴다.
훗날 관중과 포숙아가 서로 적이 되어 싸워, 포숙아가 승리하게 되자 왕은 관중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포숙아는 왕을 설득해서 관중을 재상으로 삼게 했고, 제나라는 열국의 패자로 발돋움했다.
세상을 떠나는 날에 관중은 제환공에게 자신의 후사를 맡기면서 후임으로 자신과 친구사이인지라 포숙아는 추천하지 않았지만, 포숙아는 오히려 이를 들으며 몹시 기뻐하였다.
“역시 관중이다! 그는 사사로운 인연으로 대업을 망치지 않는 사람이구나!”
관중이 죽고 습붕이 재상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죽으면서 제환공이 재상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포숙은 재상에 오르는 대신 수초, 역아, 개방 등의 간신들을 임용하지 말 것을 이야기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을 임용하자 여러 차례 간했다가 제환공이 듣지 않자 분사한다. 죽은 뒤에 그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봉읍을 받고 고관을 지내, 후에 사람들이 “관중의 현명함은 몰라도 포숙의 지혜는 안다.”라고 하는 등 그를 칭송한 것을 보면 죽은 후에도 많이 유명했고 존경을 받았던 듯 보인다.
○ 줄거리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후에 관중은 명재상(名宰相)으로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가 명재상이 되기까지는 친구였던 포숙의 공이 지대했다. 관중이 말년에 포숙에 대한 칭송의 말을 남겼는데, 그 표현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어릴 적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할 때, 이익의 분배를 내가 포숙보다 더 많이 가져갔는데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아주었기 때문이었고, 벼슬 길에 올라 많은 실수로 사람들은 나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고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아주었다. 또한 내가 포숙아와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내가 세 번이나 도망을 치자 사람들은 나를 비겁하다고 질책했지만 포숙아는 내가 집에 연로한 어머님이 게시기 때문이라고 알아 주었고, 또 나와 포숙아가 제나라의 두 공자인 규(糾)와 소백(小伯)의 사부가 되었다가 내란에서 공자 규를 모시던 내가 공자 소백에게 패하여 참수형의 위기에서 포숙아의 설득으로 목숨을 구하고 오히려 재상의 자리까지 나에게 물려주어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나를 알아주었다.
결국 나를 나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管仲 曰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 多自與, 鮑叔 不以我爲貪 知我貧也. 吾嘗爲鮑叔 謨事 而更窮困, 鮑叔 不以我爲愚 知時有利不利也. 吾嘗三仕 三見逐於君, 鮑叔 不以我爲不肖 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 鮑叔 不以我爲怯 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 召忽 死之 吾幽囚受辱, 鮑叔 不以我爲無恥 知我不羞小節 而恥功名 不顯於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ㅡ《史記, 管晏列傳》
○ 사자성어
1) 삼불후(三不朽)
.삼불후(三不朽 = 三: 석 삼, 不: 아니 불, 朽: 썩을 후)는 세 가지 영원히 썩지 않을 일. 불후(不朽)는,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이름은 남아 영원하리라’는 뜻.
‘썩지 않는 세 가지’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서 덕(德)과 공(功), 말(言)을 세우는 일의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학자 좌구명(左丘明)이 공자(孔子: BC 552∼BC 479)의 춘추(春秋)를 해석한 좌씨전(左氏傳) ‘양공(襄公) 24년조’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세 가지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일은 덕을 세우는 것이고, 그 바로 다음에 공을 세우고 말을 세우는 일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음에 이르지만, 나라를 위해 도덕과 공을 세우고 뛰어난 작품으로 말을 세워서 이루어 놓은 업적은 썩지 않고 끝없이 남아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도덕과 공, 후세에 교훈을 주는 말은 언제까지나 계속 남아 있는 중요한 세 가지이다.
2)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과 포숙아(鮑)의(之) 사귐(交)을 말하는데 관포지교의 속뜻은 ‘매우 친한 사이의 사귐’을 이른다.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이 매우 친한 사이를 이뤘다 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관포지교의 유래
중국 춘추 시대 때 제(濟)나라에 관중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관중과 포숙은 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어려서부터 포숙아는 관중의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관중은 포숙아를 이해하고 불평 한마디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두 사람은 벼슬길에 올라 관중은 공자(公子) 규(糾)를 섬기게 되고 포숙아는 규의 아우 소백(小白)을 섬기게 되었다. 얼마 안가서 두 공자는 왕위를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하게 되어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적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소백이 승리했다. 그는 제나라의 새 군주가 되어 환공(桓公)이라 일컫고, 형 규를 죽이고 그 측근이었던 관중도 죽이려 했다.
그때 포숙아가 환공에게 진언한다.
“관중의 재능은 신보다 몇 갑절 낫습니다. 제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관중을 기용하셔야 하옵니다.”
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政事)를 맡겼다.
재상(宰相)이 된 관중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마음껏 수완을 발휘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했다.
성공한 후 관중은 포숙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젊고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면서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에게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 번씩 벼슬에 나갔으나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래도 그는 나를 무능하다고 흉보지 않았다. 내게 아직 운이 안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쳐 온 적도 있으나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공자 규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하여 동료 소홀(召忽)은 싸움에서 죽고 나는 묶이는 치욕을 당했지만 그는 나를 염치없다고 비웃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기 보다 공명을 천하에 알리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을 포숙아다.”
이처럼 친한 친구 사이를 일컬어 관포지교라고 한다.
3) 안자이어(晏子之御)
안자이어(晏子之御, 늦을 안, 아들 자, 어조사 지, 마부 어)는 변변치 못한 지위를 믿고 우쭐대는 것을 말한다.
옛 중국 齊(제)나라 명재상 晏嬰(안영)을 모시던 마부가 눈에 보이는 것 없이 의기양양했다는 晏子之御(안자지어)란 성어도 있다. 여기에 남들의 주의를 끌려고 허풍을 떨며(招搖) 시장바닥을 지나간다(過市)는 이 말도 같은 뜻이다. 허장성세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春秋時代(춘추시대, 기원전 770년~403년)때 魯(노)나라의 孔子(공자)는 자신의 학문을 전파하고 정치에 접목하기 위해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13년 동안이나 周遊列國(주유열국) 했지만 가는 곳마다 냉대를 받아 별 실속이 없었다. 심지어 鄭(정)나라에선 길을 잃어 초라한 모습에 喪家之狗(상가지구) 취급도 받고, 陳(진)과 蔡(채)나라의 대부들이 국경을 막는 바람에 제자와 함께 굶주렸던 陳蔡之厄(진채지액)도 당했다. 공자가 제일 처음 방문한 나라가 衛(위)였다. 당시의 靈公(영공)은 어리석어 임금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宋(송)나라에서 시집온 부인 南子(남자)가 총애를 믿고 국정을 좌우하여 국정이 어지러웠다. 공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남자가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전해 왔다. 몇 번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만나러 갔을 때 휘장을 사이에 두고도 남자의 허리에 찬 구슬장식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공자를 유혹하려는 남자의 행위에 같이 갔던 제자 子路(자로)는 분노했지만 공자가 말렸다.
위나라에 머문 지 한 달이 지나 영공이 남자와 함께 수레를 타고 궁문을 나섰을 때다. 공자가 뒤의 수레를 타고 가면서 보니 영공과 남자는 화려한 장식에 거드름을 피우며 시장바닥을 지나갔다(使孔子爲次乘 招搖過市之/ 사공자위차승 초요과시지). 공자는 위나라의 정치수준에 실망하여 曹(조)나라로 향했다. ‘史記(사기)’ 공자세가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 관중과 포숙
– 관중
관이오(管夷吾, 기원전 725년? ~ 기원전 645년)는 중국 춘추 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자는 중(仲)이며 영상(潁上) 사람이다. 보통 성씨와 자를 합쳐 관중(管仲)으로 불리며,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첫번째 패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사상은 한서 예문지에서는 도가로, 수서 경적지에서는 법가로 분류되나, 이는 직하하파에 의해 편집된 관자를 후대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중의 사상이 후대의 제자백가에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저서로는 《관자》가 있으나, 후학에 의해 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생애
.청년기
관중은 기원전 725년 제나라 영상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상은 영수 근처에 위치한 상업의 중심지로, 수운을 통해 교류하기 쉬운 곳이다. 경제를 중요시 했던 관중의 사상은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포숙과 함께 지냈으며, 널리 알려져 있는 “관포지교”의 기록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출신지인 영상의 특성과 관포지교의 내용 중 상업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관중과 포숙은 각각 제나라의 공자인 규와 소백을 모셨다. 제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에게 시해당하고 제나라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되자, 관중과 포숙은 각기 규와 소백을 모시고 제나라를 향했다. 포숙의 신속한 대처로 소백이 먼저 군주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관중이 모시던 규가 죽고, 노나라로 망명했던 자신 역시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나, 포숙의 천거로 그는 하루아침에 제나라의 재상에 오르게 된다.
.관료시절
관중이 제환공에게 중용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는 기원전 686년.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주왕실의 통제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제(齊), 초(楚), 진(晉), 진(秦), 연(燕), 노(魯) 등을 비롯한 제국(諸國)들이 차츰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국의 실리를 취하며 군웅할거하던 시절이다.
관중이 재상이 된 후 기원전 681년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화의를 하던 과정에서 노나라의 장수 조말이 단도로 제환공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조말은 제나라에서 가져갈 노나라 영토를 돌려달라고 했고, 위협에 못이긴 제환공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영토를 돌려주지 않고 그를 죽이려 했다. 관중은 제환공을 말리며 군주가 한번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제후도 이후에 제나라를 믿고 따르지 못할 것이라며 “신의”에 대해 설명했다. 결국 노나라의 영토는 다시 돌려줬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제환공의 명성은 중원에 퍼졌다.
제환공 재위 7년(기원전 679년)에 위(衛)의 견(甄)에서 회맹을 열고 패자의 지위에 오른다.
.사망
제환공 재위 41년 (기원전 645년)에 관중이 병이 나자 환공이 물었다.
“뭇 신하들 가운데 재상을 시킬 만한 이는 누구인가?” 관중이 말했다.”임금보다 더 신하를 잘 알 사람은 없지요.” 환공이 물었다. “역아(易牙)는 어떤가?” “제 자식을 죽여 임금에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안 됩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개방(開方)은 어떤가?” “부모를 배반하고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수도(豎刀)는 어떤가?” “제 생식기를 갈라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친애하기 어렵습니다.” 관중이 죽고 나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 세 사람을 가까이 두어 중용했고, 이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정권을 전횡하게 되었다.
관중이 죽자 제환공은 예전의 명석한 군주가 아니었다. 제환공은 관중의 유언을 따르지 않아 사후 5명의 공자가 군주 계승권을 놓고 싸웠으며, 이 때문에 제환공의 시체는 67일간이나 방치되었고, 구더기가 우굴거려 문밖으로 팽개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관중의 도움으로 제환공 재위 43년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2년) 제나라는 북쪽으로 하북성 북부, 서로는 태행산맥, 남은 하남성 중앙부 근처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철학
관중의 사상은 사기(史記) 관안열전과 그의 저서로 알려진 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관중이 직접 작성한 부분과 후학들이 그가 했던 말을 집대성한 책으로, 엄연히 말하자면 온전히 그가 작성한 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유물론적 사상
관중의 사상은 기초적인 유물론적 개념을 갖고있다. 관자(목민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날의 생활이 즐거워지면 자연히 예의를 분별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만 하면 도덕의식은 저절로 높아진다.” 또 (칠법편)에서 “물질이 풍부하기가 천하에서 제일이 아니면 정신적으로 천하를 이끌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2] 이는 물질적 기초가 뒷받침이 되어야 사람의 정신,의식 또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목민(牧民)
관중은 유물론적 개념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 정치체제를 구축한다. 이른바 목민이다. 백성을 기른다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 바로 관중이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의 목민도 관중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목민의 주요내용은 “사유(四維)”로 설명할 수 있다. 사유는 예(禮),의(義),염(廉),치(恥)로 각각 예절, 의로움, 곧음, 수치심을 의미한다. 관중은 사유가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을 때 지켜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경제적/물질적만으로 백성을 다스리려 하면, 예기치 못한 상황(흉년,전쟁 등)이 발생하였을 때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관중은 목민의 안전장치로써 “제사”를 권장했다.
고대의 사후세상은 현재와는 다르게 현실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다. 살아서 농민계층이었다면 죽어서도 농민계층이고, 살아서 귀족계층이었다면 죽어서도 귀족계층인 것이다. 관중은 이러한 “제사”,”조상신”의 개념을 활용하여, 만약 후손들이 자신의 신분/직업을 지키지 않는다면 조상신들은 사후세계에서 고생을 하게되고 이는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화로 돌아오게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시각에서는 폐쇄적이고 일면 잔인한 사상이지만, 당시 귀족계층을 제외한 백성의 대우는 매우 낮았던 시절이다. 오히려 관중의 목민으로 인해 비록 그것이 정치체제의 안정화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백성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사야 할 것이다.
자발적 복종의 논리편집주는 것이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보배다.
제환공은 제후들을 지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관중은 오히려 주라고 말했다. 제나라는 이미 관중의 정책으로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개개의 국가들과의 경쟁에서는 우위에 있었지만, 모든 제후국을 아우를만큼의 국력은 없었다. 아직 전국시대 이전이고 아무리 강국이라 한들, 국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따라서 관중은 제후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다 보면 다른 제후국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중은 “주라고” 했다. 빼앗은 땅을 제후국에게 돌려주고, 예물을 보내게 했다. 이는 제환공의 명성을 높이고 다른 나라들에게 제나라에 대한 신뢰를 주었다. 또한 천자를 받든다는 존왕양이를 바탕으로 한 “예(禮)”를 내세워 명분을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제나라가 주도하는 질서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게 된다.
-영향
사후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계속 제나라의 통치이념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제나라가 전국시대까지 전통적인 강국의 위치에 있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훗날 등장하는 도가는 물론 제자백가에 영향을 주었다.논어 헌문편에서 공자는 관중의 사람됨이 인(仁)하지 못하다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관중이 아니었다면, 오랑캐로부터 주나라를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관중의 존왕양이의 과정이 옳다고 볼 순 없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화하족의 문명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관중에 대해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의 평을 내렸다 볼 수 있다.
-일화
“내가 예전에 곤궁할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벌이다가 (실패해 그를) 더욱 곤궁하게 했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시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 번 모두 군주에게 내쫓기고 말았으나,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번 싸움에 나가 세 번 모두 도망쳤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하자, 소홀(召忽)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했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사소한 일에는 수치를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
이것이 고사성어 “관포지교”의 유래이다.
-저서
.관자(管子)
– 포숙
포숙은 중국 춘추시대의 제환공을 섬기던 정치가이다. 그의 친구이자 제나라의 명재상인 관중과의 우정을 나타낸 고사성어 관포지교로 유명하다. ‘포숙아(鮑叔牙)’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일생
어릴 적 부터 관중과 깊이 교류하며 우정을 쌓아 왔는데 관중의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포숙은 관중이 혼자 장사를 했다 망하자 운이 없는 거라 위로했고 관중이 관리가 되었다가 3번이나 쫒겨나자 마찬가지로 “자네는 운이 없는 것이지 자네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닐세.”라며 위로 했다. 또한 관중이 군인이 되겠다며 전쟁터에 나갔다가 3번이나 탈영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맹비난 했는데 자신만은 관중이 노모를 모시고 있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감싸주었다.
.제환공을 옹립
후에 커서 정치계로 나가 관중은 공자 규(糾)를 섬기고 자신은 공자 소백을 섬겼다. 그러다가 관중이 소백을 활로 쏘아 죽인 후 공자 규를 모셔와 군위에 앉히려 했으나 소백은 화살을 허리띠에 맞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길로 도성으로 가서 공(公)으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제환공이다.
.관중을 천거
그 일로 관중은 감옥에 갇히고 제환공은 포숙을 재상에 임명하려 했다. 하지만 포숙은 제환공이 작은 나라를 다스리려면 자신을 재상으로 삼아도 충분하지만,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려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야 한다며 관중을 천거했다. 이에 제환공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포숙은 관중의 밑에 있길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관중의 정치에 힘입어 제나라는 강국이 되어 제환공은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리고 훗날 관중은 “날 낳아준 사람은 어머니이지만 날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라는 명언을 남긴다.
.죽음과 사후
관중이 죽고 습붕이 재상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죽으면서 제환공이 재상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포숙은 재상에 오르는 대신 수초, 역아, 개방 등의 간신들을 임용하지 말 것을 이야기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을 임용하자 여러 차례 간했다가 제환공이 듣지 않자 분사한다. 죽은 뒤에 그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봉읍을 받고 고관을 지내, 후에 사람들이 “관중의 현명함은 몰라도 포숙의 지혜는 안다.”라고 하는 등 그를 칭송한 것을 보면 죽은 후에도 많이 유명했고 존경을 받았던 듯 보인다.
그러나, 손자인 포국, 포목 등 후손들은 포숙과 정반대로 나라 말아먹는 막장 간신배가 되고 만다! 포국은 높은 전공을 세운 사마양저를 모함하여 내쫓아 그를 잉여 상태에서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다. 이어 손자 포목은 다른 대가문인 진=전씨와 영합하여 다른 제나라의 대가문들과 내전을 벌인다. 덕분에 그 안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나라 꼴은 말도 안되게 돌아갔고, 이 내전에서 승리하긴 하였으나 나라는 망가지고 결과적으로 전상의 전씨가 제나라의 최대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를 다시 견제하기 위해 포목은 전씨가 세운 왕을 죽이고 제도공을 옹립.. 하였으나 전상에게 다시 역공을 당하고 결국 전상이 제나라를 먹어치워 포가 일족들은 전상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해외로 도망치고, 포씨 가문도 망하고, 나라 (강씨 제나라 → 전씨 제나라)도 망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