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열전
노자한비열전 (老子韓非列傳)
노자한비열전 (老子韓非列傳) 편은 도가와 법가의 학술원류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로 하나라 초기에 겉은 도가요 안은 법가이며, 무제도 겉은 유가요 안은 법가였으니 진나라와 일관된 맥락을 보인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흔히 도가사상 또는 노장사상이라고 한다. 도가사상은 끊임없는 전쟁과 불안정 및 권력과 지위 다툼으로부터 벗어나 은둔과 도피를 일삼는 철학이다. 그래서 도가 사상은 군주 권력의 전제정치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저항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한다.
법치를 내세운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韓)나라 명문 귀족의 후예로서 눌변이지만 논리력을 필요로 하는 글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 가장 작고 약했다.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약소국의 비애와 고통, 모욕과 굴욕, 굶주림 등은 한비자에게 가혹한 고통이었다. 그래서 한비는 한나라 왕에게 해결책을 자주 간언했으나 불행히도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노.장.신.한 열전’이라고도 하는 이 편은 사마천이 법가와 도가를 같은 위치에 두고 신불해와 한비 두 사람의 사상을 황로사상에 귀착시킨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 노자한비열전 (老子韓非列傳)
-노자열전 (老子列傳)
공자는 떠나가 제자들에게 “나는 새는 잘 날면 되고, 물고기는 헤엄 잘치면 되고 짐승은 잘 달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로 잡을 수 있으며 날아가는 것은 주살이면 잡을 수 있는데 용에 이르러서는 내가 알 수가 없으니, 그 용이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구나.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노자는 도덕을 수련하였고 그의 학문은 스스로 은거하여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주나라에서 오래도록 살았는데 주나라가 쇠해지는 것을 보고 주나라를 떠났다.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 윤희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은거하려 하시니 억지로라도 저를 위해 저서를 만들어 주십시오.”하고 말하니 노자는 마침내 도덕을 논하는 의미를 지닌 5천여 자로 지어진 저서 상하편을 지어주고 떠나갔는데 그 후로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알지 못하였다.
주고 떠나갔는데 그 후로 아무도 그의 마지막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노래자(老萊子) 역시 초나라 사람인데 저서 15편을 지어 도가에서 사용하였다고 말하며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노자가 160여세, 혹은 200여세였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도를 닦고 양생하여서라고 한다.
공자의 사후 129년 역사의 기록에 주나라 태사 담이 진헌공을 알연하고 말하기를.,
“처음 진나라는 주나라와 합하였다가 합해진지 500년 후에 분리되었고 분리된 지 70년이면 패왕이 출연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어떤 이는 담이 즉 노라자고 말하고 혹자는 아니라고 말하는데 세상에선 그런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다. 노자는 은둔한 군자였다.
노자(老子)의 아들의 이름은 종(宗)인데 종은 위나라 장수로 단간(段干)을 봉읍으로 받았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고 주의 아들은 궁(宮)이고 궁의 현손은 가(假)라고 하는데 가는 한(漢) 효문제 때 벼슬했다.
가(假)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 앙(卬)의 태부가 되었기 때문에 집이 제(齊)에 있었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자는 유학을 배척하고, 유학은 또 노자를 배척했다.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했는데 어찌 이것을 말함인가? 이이(李耳)는 무위로서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청정하여 자연히 바르게 되도록 하였다.
장자(莊子)는 송(宋)나라 몽인으로. 이름은 주(周)이다, 주는 일찍이 몽 칠원의 관리였다. 양혜왕, 제선왕과 동시대인이다.
그 학문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 요점은 본래 노자의 학문으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 십여 만언은 거의 우언(寓言)에 의거한다.「어부(漁夫)」,「도척(盜跖)」,「거협(胠篋)」을 지어 공자의 문도를 비방하고 노자의 학술을 천명하였다.
「외루허(畏累虛)」,「항상자(畏累虛)」등속은 모두 허구이며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글의 분석과 정황에 대한 비유를 잘하여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였으니 비록 경력이 많고 인망이 있는 학자라 하더라도 자연히 장주의 비난을 면할 방도가 없었다.
그의 말은 광대하고 심원하여 자기 마음대로였기에 왕공대인으로부터 인재가 될 수 없었다.
초나라 위왕이 장주가 현(賢)하다는 소리를 듣고 사신을 보내 후한 예물로 재상으로 맞아들이도록 허락받게 하였다.
장주는 웃으면서 초나라 사신에게 말했다., “천금은 큰 재물이고 재상은 존귀한 자리지요.
그대는 다만 교제 지낼 때 희생제물인 소를 보지 못하였소? 몇 년 동안 음식으로 길러져 수놓은 옷을 입혀 태묘로 들어가는데 이때는 비록 새끼돼지가 되려하여도 어찌 그리 할 수 있겠소? 그대는 급히 돌아가 나를 더럽히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도랑에서 스스로 즐겁게 놀지언정 나라를 소유한 자에게 억매이지는 안겠소,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음으로 나의 뜻을 즐겁게 할 셈이라오.”
신불해는 경읍(지금 하남성(河南省) 형양현(滎陽縣) 남동 20리)사람으로 정나라 하급관리였다. 법가의 학술로 한소후에게 유세하여 한소후가 재상으로 삼았다.
신불해는 15년간 안으로 정치와 교육을 정비하고 밖으로 제후들에게 응대하였다. 마침내 신불해의 능력으로 부국강병하게 되어 한(韓)나라를 침략하는 자가 없었다.
신불해의 학문은 황노(黃老: 황제와 노자의 학문으로 도가학파의 한 유파)를 근본으로 하고 형명(刑名: 형은 형체, 사실을 가르키고 명은 언론, 주장을 의미하며 법가(法家의 법치사상)을 주장하였다. 저서 2편이 있는데 《신자(申子)》라고 일컬어진다.
-한비열전 (韓非列傳)
한비자는 한나라의 공자로 형명과 법술의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그 학설의 근본은 황노(黃老)에 귀의한 것이다.
비는 사람됨이 말을 더듬고 변론은 잘하지 못하였지만 저서는 뛰어났다. 이사와 함께 순자(荀子)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스스로 한비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한비는 한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여러 번 한왕에게 간언의 글을 올렸으나 한왕은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
한비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힘쓰고 그 법제를 정비하고 권세를 장악하여 신하를 통제하며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현자를 등용시키지 않고 도리어 허황된 간신을 등용시켜 실질적인 공로의 윗자리를 보태주는 것을 괴로워하였다.
유학자들은 경전으로 국가 법제를 어지럽히고 협사는 무력으로 국가의 금령을 범하고 국가가 안정되면 명예로운 유사들을 총애하고, 국가가 위급하면 갑주를 두른 병사를 등용한다.
지금 기르는 자들은 위급할 때 쓸 자가 아니기에 위급할 때 쓸 자로 기를 자가 아니라고 여겼다.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들이 사악한 신하들에 의해 등용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였다.
지난 일들의 득실의 변화를 보아서「고분(孤憤)」,「오두(五蠹)」,「내외저(內外儲)」,「세림(說林)」,「세난(說難)」편 등의 십여 만언을 저술 하였다.
그러나 한비는 유세(遊說)의 어려움을 알아서「세난(說難)」편을 상세하게 지었어도 끝내 진나라에서 죽었으며 스스로 벗어나질 못했다.
세난(說難)에 이르기를., 모든 유세의 어려움이란 내 지식이 유세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내 구변의 어려움이 내 뜻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또 내가 거침없이 언변을 모두 구사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모든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의 마음을 잘 알아서 나의 유세를 합당하게 하는데 있다.
명성을 높이려는 군주를 설득할 때에 큰 이익을 얻고자 하는 유세를 한다면 품위 없이 비천한 일에 뜻을 맞춘다고 천시할 것이며, 반드시 쓰이지 못하고 멀리 버려질 것이다.
큰 이익을 얻고자하는 군주에게 명성을 높이는 유세를 한다면 계획이 없고 실제 사정에 어둡다고 느껴서 반드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유세하는 군주가 실제로는 높은 이익을 바라면서도 겉으로 명성을 높이려는 것처럼 하는데도 명성을 높이는 유세를 한다면 외관상 유세를 용납하지만 실제로는 멀리할 것이다.
만약 높은 이익에 대한 유세를 한다면 속으로는 그 말을 용납하지만 겉으로 그를 버릴 것이니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일은 비밀리 성사되고 말이 누설되면 실패한다. 반드시 자신이 누설하려하지 않아도 말하다가 은닉(隱匿)한 일에 미치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자는 신변이 위험해진다.
귀인(군주)에게 실수가 있는데 유세자가 명확한 언사와 정당한 의론으로 그 잘못된 것을 추궁한다면 신변이 위험해진다.
군주의 은택이 아직 두텁지 않은데도 아는것을 모두를 말해버리면 유세가 실행되어 공이 있어도 군주는 공을 잊을 것이다.
유세가 실행되지 않거나 실패한다면 의심을 살 것이니 이러한 자는 신변이 위험하다.
무릇 군주가 계책을 얻어 스스로 공을 삼고자 하는데 유세자가 알아차리면 신변이 위험하다.
그(군주)가 겉으로는 일을 하는척 하면서 속으로는 일을 꾸미는 다른 연고가 있는데 유세자가 알아차린다면 신변이 위험해진다.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억지로 시키거나 그만 둘 수 없는 것을 중지시킨다면 신상이 위험하다.
그러므로 군주와 더불어 대인(대신)에 대해 논하면 자기에게 이간질 한다고 여기며, 더불어 지위 낮은 자에 대해서 담론하면 권세를 부린다고 여겨 오해를 살 것이다.
군주가 총애하는 자를 담론하면 그를 발판으로 삼는다고 여기게 되고 미워하는 자에 대해 담론하면 자기를 떠본다고 여길 것이다.
핵심만 말하면 무지하다고 업신여기고 장황하게 학문을 말하면 말을 오래도록 많이 한다고 할 것이다.
사실에 따라 의견을 진술하면 소심하고 겁이 많아 할 말을 다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고 생각한 일들을 거침없이 다 말해버리면 거칠어 촌스럽고 오만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유세의 어려움이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유세에서 권장하는 것은 상대의 장점은 미화시키고 상대의 단점이나 과오를 제거할 줄 아는데 있다.
그 자신이 그 계책을 안다면 그의 잘못을 추궁하지 말아야 하고, 스스로 단점을 용맹하다 하면 그를 적대하여 노하지 않게 하여야 하며., 자신이 능력이 많다고 느낀다면 곤란하다 생각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직분은 다르나 동일한 계획을 도모하고 다른 사람이 군주와 같이 행하면 장점은 칭찬해주고 단점은 상처받지 않도록 덮어주어야 한다.
군주와 같은 과오가 있는 자면 명확히 다스려 과실이 없다고 하여야 한다.
크게 충성되어 반감이 없어지고 언사의 배척이 없어진 이후에야 그(유세자)의 언변과 지식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친근하여 의심받지 않고 지식을 다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군신이 도가 합치되어 오랜 시일이 지나 군주의 은택이 두루 두터워지면 심원한 계책도 의심받지 않게 되고, 서로 논쟁하여도 죄가 아닐 것이니 곧 이익과 해악을 명백하게 계획하여 그 공이 군주에게 이르도록 하며, 바로 시비를 지적하여 군주 신변을 다스리는데 이것이 서로 유지된다면 이 유세는 성공인 것이다.
이윤(은나라 탕왕의 재상)이 요리사가 되고, 백리해(춘추 虞나라 대부)가 포로가 된 것은 모두 군주에게 등용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은 모두 성인으로 자신을 수고롭게 하여 세대를 건너 이처럼 천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능력 있는 선비라도 수치스러워 하지 않아야 한다.
송나라에 부자가 있었는데 비가 와서 담장이 무너졌다.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다시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것입니다.’하였다.
그 이웃사람도 역시 말했는데 해가 저물고 과연 재물을 많이 잃었다. 그 집은 아들을 매우 지혜롭다고 여기면서 이웃집 주인은 의심하였다.
옛날 정무공이 호나라를 정벌하려 하면서도 바로 그의 딸을 오랑캐 군주에게 시집을 보냈다.
군신들에게 묻기를 “내가 병사를 일으키려 하는데 어디를 정벌하면 되겠소?” 하니 관기사가 아뢰기를 “호 나라면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관기사를 죽이고 말하기를., “호는 형제의 나라인데 그대가 정벌하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라고 하였다.
호나라 군주가 듣고 정나라가 자신을 친밀한 국가로 여긴다고 하여 정나라에 대해 방비하지 않았다.
정나라 사람들이 호 나라를 습격하여 패망 시켰다. 이 두 사람을 말한 것은 그 앎이 모두 합당했지만 그러나 심한 자는 죽음을 당하였고 가벼운 자는 의심을 받았다.
안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처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주군과 과수원에 놀러가서 미자는 복숭아를 먹어보니 달아서 먹던 것을 주군에게 바쳤다.
주군이 말하기를 “나를 사랑해서, 자기 입도 잊고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라고 하였다.
미자의 용모가 쇠하고 총애가 식었을 때 미자는 주군에게 죄를 지었다.
주군이 말하기를 “이 자는 군명을 빙자해 내 수레를 타고 나갔으며, 또 나에게 먹던 복숭아를 먹였던 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미자의 행위는 처음보다 변한 것이 없었지만, 앞에는 어질다고 하고 뒤에는 득죄한 자가 되었으니 애증이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 총애 받으면 지혜가 합당하여 친밀이 더해지고 주군에게 미움을 받으면 죄가 타당해져 더욱 홀시된다.
그러므로 유세로 간언하려는 선비라면 불가불 주군의 애증을 살핀 후에 유세를 해야 한다.
대저 용이란 동물은 길들여 친해지면 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목 아래에 거꾸로 돋아난 한자나 되는 비늘이 있어 사람이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
인주에게도 또한 거꾸로 돋은 비늘이 있는데 유세자가 주군의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지 않으면 거의 성공이다.
어떤 사람이 한비의 저서를 전하여 진나라에 이르렀다. 진왕이「고분」,「오두」의 책을 보고 말하기를 “아!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더불어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이사가 말하기를 “이 책은 한비가 지은 저서입니다.”라고 하였다. 진나라는 인하여 한나라를 급히 공격하였다.
한나라 왕이 처음에 한비를 쓰지 않더니 급해지니 곧 한비를 진의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진왕은 그렇다 여겨 옥리에게 넘겨 한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사는 사람을 보내 한비에게 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한비는 스스로 진언하고자 하여도 왕을 알현할 수가 없었다. 진왕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사면하였는데 한비는 이미 죽고 없었다.
신자, 한비는 모두 저서를 지어 후세에 전해져 배우는 자들이 많이 있다.
나는 유독 한비가「세난」편을 저술하고도 스스로 화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슬플 뿐이다.
태사공(사마천)이 말하기를., 노자가 귀히 여긴 도는 존재치 않는 곳이 없으나 형체가 없어 보이지 않고 무위하여 만물의 변화에 따라 순응하는 것이므로 그의 저서의 언사는 미묘하여 인식하기 어렵다고 일컫는다.
장자는 도덕경을 풀이하여 자유분방하게 논의하였는데 요지는 역시 자연으로 귀의하였다.
신자는 부지런히 힘써 법술(법치사상으로 신하를 통솔하는 용인술[用人術])을 시행하였다.
한비는 먹줄을 당기듯 사정을 결단하고 시비를 명확히 하였으나 그는 지극히 참혹하고 각박하여 은덕이 적었다.
모두 도덕의 의미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노자가 가장 심원하다.
○ 참고 : 노자 (老子, 공자보다 나이가 약간 많았다고 함)
노자의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자(字)는 백양(伯陽)이고 시호는 담(聃)이라고 한다. 노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대철학자이며 도가(道家)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주도옥(朱韜玉)의 <신선전(神仙傳)>에는 노자(老子)는 주(周)나라 제후국이던 초(楚) 나라 고현(苦縣)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으로 주나라 경왕(景王 BC 544-520) 때 수장실(守藏室)의 관리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노자 :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둔다
노자(老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禮)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 데 힘썼다. 오랫동안 주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락해 가는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가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 윤희의 말을 듣고 도덕경 상,하편을 지어 도와 덕의 의미를 500여자로 말하고 떠나갔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여생을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공자가 죽은 지 129년 되던 해 사서(史書)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태사 담(儋)이 진 나라 헌공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처음에 주나라와 합쳤다가 500년이 지나면 나뉘고, 나뉜 날로부터 칠십 년이 지나면 패왕(覇王)이 나올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담이 바로 노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아는 이가 없다. 노자는 숨어 사는 군자이다.
.노자와 공자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겸손이라는 덕목은 동양 문화의 독특한 점인 것 같다. 진정한 겸손은 장점인 것 같다. 위에 인용한 노자의 말은 ‘허무’, ‘무위’의 깊은 사상적 배경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역시 겸손에 대해서 배울 점이 있어서 인용했다. 노자가 공자를 꾸짖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돈이나 육체의 욕망보다는 권력이나 명예쪽을 선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추구할 대상도 많은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다.
.장자와 초나라 사신
초나라 위왕은 장주(장자)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 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지요. 그대는 어찌 교제(고대 제왕이 하늘에 올린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 참고 : 한비자 (韓非子 약 BC 280 – BC 233)
한비자는 한(韓) 제후의 공자(公子)로 태어났고 황노(黃老)사상에 근본을 둔 형명(刑名), 법술(法術)의 학문을 좋아했다. 언어장애가 있어서 <한비자>같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한비는 이사와 함께 순자(荀子 BC 315 – BC 238)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순자의 유가사상 성악설에 근거를 두는 예(禮)의 외형인 규제(規制)를 배워 법치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법가는 전국시대 중요학파이다. 춘추시대의 관중(管仲 BC ? – BC 645), 자산(子産 BC ? – BC 522)에 의해 기원하였다. 전국시대 이리(李悝 BC 455 – BC 399), 상앙(商鞅 약 BC 390 – BC 338), 신도(愼到 약 BC 395 – 약 BC 315), 신불해(申不害 약 BC 385 – BC 337)등에 의하여 발전하였다.
한비는 선진(先秦) 법가철학의 집대성자이다. 법령(法令)을 중시한 상앙(商鞅), 신하를 통솔하는 용인술(用人術)을 중시한 신불해(申不害), 통치 권력을 의미하는 세(勢)를 중시한 신도(愼到)의 주요이론을 받아들여 법(法), 술(術), 세(勢)가 서로 결합하는 법치사상체계를 건립하였다.
-한비자 : 용의 비늘을 건드리지 마라
한비(韓非)는 한(韓)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형명과 법술(法術)의 학설을 좋아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황로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한비는 날 때부터 말을 더듬어 우세는 잘못하였으나 글을 잘 지었다. 한비는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사는 자신이 한비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비는 유세의 어려움을 알고 세난 편을 매우 자세하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진나라에서 죽어 자신은 정작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세난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상 이윤(伊尹)이 요리사가 되고, 백리해(百里奚)가 포로가 된 것은 모두 군주에게 등용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성인이면서도 이처럼 자기 몸을 수고롭게 하고 천박한 일을 겪은 뒤에 재상에 나왔다. 그러므로 재능 있는 인재라도 이러한 일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진(秦)나라가 급히 한나라를 쳤다. 한나라 왕은 다급해지자 즉시 한비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나라 왕은 한비를 좋아하기는 하나 믿고 중용하지 않았다. 이때 이사와 요고가 한비를 해치려고 모함하여 왕에게 간언하였다. 이사는 관리에게 시켜 한비에게 독약을 보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다. 진나라 왕이 뒤늦게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한비를 놓아주게 하였으나, 한비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 사자성어
1) 양고심장(良賈深藏)
.얀고이신(良:어질 량, 賈:상인 고, 深:깊을 심, 藏:감출 장)은 ‘어진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긴다’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학덕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 날 공자(孔子)가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대하여 논했다. 노자는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나 예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 속에 침잠해 있었다. 공자는 고서 등을 인용하며 자기 생각을 피력하고 노자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이야기는 옛 선인들이 써서 남긴 말이오. 그것이 산 인간에게 그대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오? 군자는 때를 얻으면 풍운을 타 세상에 나가고, 때를 얻지 못하면 쑥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오. 어진 상인은 창고에 물건을 숨겨두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良賈深藏若虛), 군자는 덕이 있으면서도 용모는 어리석은 자와 같이 보이오(君子盛德容貌若愚). 그대도 그 교만함과 욕심과 겉치레와 산만한 뜻을 버리시오.”
공자는 제자들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는 화살로 쏘아 떨어뜨릴 수 있고, 물고기는 낚을 수 있으며, 달리는 짐승은 잡을 수 있지만, 용은 알 수조차 없느니라. 출몰변화가 자유롭고 풍운을 타고 하늘로 오르며, 연못에 잠기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용처럼 정체를 알 수 없고 학덕은 심원하고 넓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다.”
이처럼 학덕이 깊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2) 식여도(食餘挑)
.식여도(食:먹을 식, 餘:남을 여, 挑: 복숭아 도)는 ‘먹다 남은 복숭아’라는 뜻으로 ‘말을 하거나 논의를 할 때에는 군주의 애증을 미리 살핀 다음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란 의미로 “말을 올리거나 논의를 펼칠 때는 군주의 애증을 미리 살핀 다음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옛날 위나라에 ‘미자하’라는 미소년(美少年)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다.
어느날 깊은 밤, 미자하는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 밤중이라 임금에게 보고하지 않고 임금의 명이라 속여 임금이 타는 수레를 타고 나가 어머니를 보고 왔다.
위나라 법에 따르면 임금이 타는 수레를 몰래 타는 자는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은 많은 대신들 앞에서 “이 얼마나 효성스러운가! 어머니를 위해 발이 잘리는 형벌을 무릅쓰다니”라며 되려 미자하를 칭찬했다.
어느날, 미자하가 임금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다가 복숭아 하나를 따서 맛을 보니 무척 달았다.
미자하는 한 입 베물어 먹고 남은 복숭아를 임금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임금은 매우 기분 좋다는 듯이 “아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가! 자신의 입맛은 잊고 나를 생각하다니” 라며 미자하를 칭찬했다.
하지만 세월은 사람을 봐주지 않는다.
미자하의 용모가 시들어가면서 임금의 귀여움도 점점 시들해졌다.
미자하가 무슨 일로 잘못을 범해 위왕에게 죄를 짓자
임금은 “너는 그 옛날 내 수레를 멋대로 탔고, 또 내게 먹다 남은 복숭아를 주기도 했지”라고 하면서 큰 벌을 내렸다.
‘먹다 남은 복숭아’라는 뜻의 ‘식여도(食餘桃) 또는 여도지죄(餘桃之罪)는 지나친 총애가 도리어 큰 죄의 원인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이 ‘먹다 남은 복숭아’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여도지죄(餘桃之罪)는 한비자(韓非子)의 세난편(說難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세상을 살아가기가 그리 마음대로 되지 않음은
너와 내가 함께 함에 있서 선입견이나 주관이 작용함이라.
누군가를 좋아하면 콩깍지가 씌여 결점도 장점으로 보이며,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미워하게 되면, 과거 자신이 좋아했던 상대의 장점마저 결점으로 보이게 된다
‘첫인상 밑천이 10년은 간다’ 라는 말이 있지만 인간의 애증(愛憎)은 참으로 변덕스럽다.
흔히 여자의 마음을 갈대라고 하지만 갈대에 비유되는 변덕스러운 마음은 인간 전체의 마음에 해당 될 것이다.
변덕스런 마음의 변화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상대방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인지하여 그 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적어도 상대의 변덕에 휘둘려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 김영수,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중에서
3) 세난(說難)
‘세난'(說難)은 ‘유세(遊說)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韓非子(한비자)에 나오는 篇名(편명)으로 군주 설득의 어려움을 여러 각 도에서 말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지략가들이 제후나 유력자들 밑에 모여 세상을 얻는 전략을 궁리했다. 흔히 유세객(遊說客)으로 불렸던 이들은 자신의 사상이나 전국통일의 방안을 통해 제후나 유력자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능력은 설득의 기술이었다. 잘하면 단숨에 높은 벼슬로 직행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일부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한비자 ‘세난(說難)편’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설득의 어려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무릇 유세의 어려움이란 나의 지식으로 상대편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또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언변이 능숙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자신의 말을 상대방의 심정에 잘 맞추어 끼우는 데 있다.
.세난(說難) : 상대의 속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설득이 어려운 것은 남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또 나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언변이 뛰어나기 어렵다는 뜻도 아니다. 또 말을 거리낌없이 자유자재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기 어렵다는 뜻도 아니다. 설득의 어려움은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나의 말을 그에게 맞추어야 하는 데 있다.
설득해야 할 상대가 명예를 좋아하는데 이익이 많음을 가지고 설득한다면, 절조가 낮고 비천한 자를 만났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멀리 할 것이다.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가 이익을 소중히 여기는데 명예를 높이는 일을 가지고 설득한다면, 생각이 없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설득하려고 하는 상대가 속으로는 이득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명예를 높이 여기는 척하는데, 명예를 높이는 일을 가지고 설득하려 하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할 것이다.
반대로 이익이 많이 생기는 일을 가지고 설득을 하면 속으로는 그 말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척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을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 한비자 제12편 세난(韓非子 第12篇 說難)
凡說之難: 非吾知之有以說之之難也, 又非吾辯之能明吾意之難也, 又非吾敢橫失而能盡之難也. 凡說之難: 在知所說之心, 可以吾說當之.
所說出於爲名高者也, 而說之以厚利, 則見下節而遇卑賤, 必棄遠矣. 所說出於厚利者也, 而說之以名高, 則見無心而遠事情, 必不收矣. 所說陰爲厚利而顯爲名高者也, 而說之以名高, 則陽收其身而實疏之 說之以厚利, 則陰用其言顯棄其身矣. 此不可不察也.
○ ‘노자’ 이해
노자(老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노자
.이름: 이이(李耳)
.출생: 기원전 604년(추정) 중국 초나라 허난성
.사망: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5세기 초로 추정
.시대: 춘추시대
.지역: 동양 철학
.학파: 도가의 창시자
.연구 분야: 윤리학, 사회철학
.주요 업적: 무위
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물소를 타고 주나라를 떠났다.
-생애
허난 성 루이 현 사람으로 주왕을 섬겼으나, 뒤에 관직을 버렸다.
그는 중국에서 우주의 만물에 대하여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도'(道)라고 이름지었다. 그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고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곧 ‘도’라고 설명하였다.
.노자의 실체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노자로 상정되는 인물이 3인이 있다고 하였다. (老子 韓非列傳). 첫째로 이이(李耳, 자는 담(聃=老聃)를 들었다. 그는 초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예(禮)를 배운 사람이며, 도덕의 말 5천여 언(言)을 저작한 사람인데 그의 최후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다음에 든 사람은 역시 공자와 동시대의 노래자(老萊子)로서 저서는 15편 있었다 한다. 세 번째 든 것은 주(周)의 태사담이라는 사람으로 공자의 사후 100년 이상 경과한 때에 진(秦)의 헌공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은군자(隱君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노자라고 하는 이는 은자로서 그 사람됨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후세에 노자라고 하면 공자에게 예를 가르쳤다고 하는 이이(李耳)를 생각하는 것이 상례이나, 이이라고 하는 인물은 도가의 사상이 왕성하던 시기에 그 사상의 시조로서 공자보다도 위인(偉人)이었다고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설일지도 모르겠다.
펑유란(馮友蘭)은 노자가 전국시대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에 근거하여 노자가 실존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최소한 도덕경 죽간본(BC 300년경) 이전일 수밖에 없으며 한비자(BC 280~BC 233)가 도덕경을 인용하였으므로 한비자보다 앞선다. 또 도덕경에는 유가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는 백서본(갑본은 전국시대 말기, 을본은 한나라 초기) 이후가 반유가적인 것이며 죽간본은 덜하다.
-사상
도는 성질이나 모양을 가지지 않으며,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항상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우주 만물은 다만 도가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우주 만물의 형태는 그 근본을 따지면 결국은 17가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 <노자 도덕경> 속에 있는 ‘무위 자연’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이 우주의 근본이며, 진리인 도의 길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무위 자연’ 사상이다. 즉, 법률·도덕·풍속·문화 등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갈 때 비로소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후세에 ‘도교의 시조’로 불리고, 그 사상은 ‘노장 사상’ 또는 ‘도가 사상’으로 발전하여 유교와 함께 중국 정신 사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노자 도덕경
노자의 말이라고 하여 오늘날 《노자》(老子道德經이라고도 한다) 상·하 2권 81장이 남겨져 있다. 거기서 기술되고 있는 사상은 확실히 도(道)의 본질, 현상계의 생활하는 철학이다. 예컨대 도를 논하여 이렇게 말한다.
‘도(道)’는 만물을 생장시키지만 만물을 자신의 소유로는 하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형성시키지만 그 공(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성장시키지만 만물을 주재하지 않는다'(10장). 이런 사고는 만물의 형성·변화는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예정된 목적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유래되었다.
노자의 말에 나타난 사상은 유심론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펑유란은 도에 대해서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유물론으로서 무신론에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해는 뛰어난 것이다. 또 ‘도(道)는 자연(自然)의 순리를 따른다(法)'(55장)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이론은 유가(儒家)의 천인감응(天人感應)적 생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자가 보인 인생관은 “유약한 자는 생(生)의 도(徒)이다” (76장). “유약은 강강(剛強)에 승한다.”(36장)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흘러서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때문에 도에 가깝다”(8장), “천하의 유약하기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78장) 등의 구절에서 보듯이 어디까지나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 세상과 함께 사는 일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겸하부쟁(謙下不爭) 이라고 하는 말로써 환언(換言)하고 있다.
노자는 또 “도(道)는 일(一)을 생하고 일은 이(二)를 생하고 이는 삼(三)을 생하고 삼은 만물을 생한다.”(42장)고 하는 식의 일원론적인 우주생성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 ‘한비’ 이해
한비(韓非, 기원전 280년? 한 ~ 기원전 233년 진)는 ‘한비자’를 저술한 전국 시대 중국의 정치철학자, 사상가, 작가이다. 한비의 생애는 불분명하다. 알려진 정보의 거의 전부가 실린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그는 한(韓)의 공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일찍이 형명과 법술을 익혀 중앙집권적 제국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창도한 법가 이론의 집대성자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비자로도 불리나 한비자는 보통 그의 저서로만 불리고 있다. 순자의 문인이다.
-생애
.초년기 삶
정확한 생년은 전해지지 않으나 기원전 281년 경에 전국 시대의 한나라(韓)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한나라의 공자였던 한비는 순자의 문인이던 학자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순자의 성악설에 심취하여 뒤에 그의 문인이 되었다. 그는 한에서 섬기던 군주인 안에게 법<술<세를 핵심으로 하는 그의 이론을 끊임없이 진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그가 그의 저작에 썼던 것처럼 군주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이론에 흥미를 갖고 직접 활용하려고 한 사람은 한의 이웃 강국이었던 진왕 정, 미래의 시황제였다고 한다.
.학문 활동과 최후
공자의 문인인 자궁(子宮)의 문도였던 스승 순자로부터 사서육경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자를 사숙하였으며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강력한 법질서가 필요하다 확신하였다. 또한 스승 순자의 영향을 받아 노예 제도에 대한 폐지를 주장하였는데 이 때문에 하늘의 질서(天理)를 어지럽히는 궤변론자로 몰리기도 했다. 전국 열국의 왕공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일찍이 산으로 들어가 서실을 열고 문하생들을 가르쳤다. 동문이기도 했던 이사와 절친했던 한비는 이사를 통해 진왕 영정을 소개받게 되고, 그의 달변에 매료된 진왕 정은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노력하였다.
정은 그를 얻기 위해 한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고, 한비는 진의 침략을 막기 위한 사신으로 진에 파견되었다. 정은 한비를 만나보고 그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순자 문하에서 함께 배웠던 이사가 질투 때문에 꾸민 음모에 휘말려들어 투옥당했고, 결국 음독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사상과 학문
그는 스승인 자궁과 순자의 견해를 계승하여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이며 강력한 법과 형벌로 사회를 통제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인과 각국의 제왕들에게 공자의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사후 그의 제자들은 법가를 이루어 육가의 하나를 이루었다.
그의 문도들은 다른 유학자들과는 달리 법치주의와 실용주의를 강조하였고 후대에 송나라 때에 가서는 성리학자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고 유교 내에서도 극소수로 전락하게 된다.
-저작 : 한비자
한비자(韓非子)는 중국 전국 시대 한비 등이 쓴 책으로 법가 사상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 고전시대 다른 많은 책처럼 집단적 저작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편장은 어느 정도의 일관성 아래에 포괄될 수 있는 부분들임이 명백하다.
이 책은 총 55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편장들은 몇 가지의 특색 있는 종류들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편장은 한비가 군주에게 부여하는 권력의지의 지향점인 절대적 군주권의 수립 및 현실에서 출발하는 국가 전체의 질서 정립이라는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편장의 대략적 분류
.다른 사상들의 흔적이 담긴 편장 : 한비자 속에는 다양한 다른 사상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에는 서술하는 주체의 판단 기준이 된 것도 존재하고 반대로 비판 대상이 된 것도 존재한다. 판단 기준이 된 다른 사상은 도가와 법가의 혼합을 이룬 황로파나 법가의 사상가들인 상앙, 신불해 등의 것이 있다. 상앙의 경우에는 법을 이야기 할 때, 신불해의 경우는 술을 이야기 할 때 그 전거로서 매우 많이 사용된다.
.황로파의 시각 아래서 서술된 편장: 5편〈주도〉, 8편〈양권〉, 20편〈해로〉, 21편〈유로〉, 27-29편〈용인〉〈공명〉〈대체〉. 여기서 한비는 특히 그가 구상하는 정치체제의 근거를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낸다. 법, 술, 세를 작동시키는 군주의 행위는 결국 초월적인 척도를 행성하므로 법술지사의 도움을 받아 객관적 척도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 군주는 더이상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즉 무위하고서도 국가를 통치할 수 있게 된다.
.상앙의 시각 아래에서 서술된 편장 : 53편 〈칙령〉, 54편 〈심도〉, 55편 〈제분〉.
.상앙과 신불해 모두를 인용한 편장43편 : 〈정법〉. 흩어져 있던 법가의 개념들을 집대성해서 하나의 체계로 만든 사람이 한비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밝힐 수 있다.
.타 학파에 대한 비판 : 49-51편 〈오두〉,〈현학〉,〈충효〉. 주된 비판 대상은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실천과는 유리된 모습을 보여주는 유가와 묵가이며, 종횡가의 합종책에 대해서도 단일 군주권의 원리를 통해 비판이 시도된다. 비판 역시 한비의 권력의지가 어디로 향해 있었는지를 살피는 데 있어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다.
.독자를 짐작할 수 있는 편장 : 군주에 대한 상주문이거나 한비 학파의 교과서로 쓰였을 법한 편장들이 다수 발견된다.
.군주에 대한 상주문들 : 1-4편이 명확하다. 물론 이론적 논문의 대부분은 군주를 잠재적 독자로 삼고 있다.
.한비 학파의 교과서들 : 23, 24편 〈설림〉30-35 〈내/외저설〉. 특히 이것이 교과서로 뽑힐 만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수많은 사례들을 포함하고 있는 편장이기 때문이다. 군주를 설득하기 위한 변설의 자료를 공부해야 했던 당시 학자 지망생들의 교육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36-39편 〈난〉1-4도 비슷한 성격으로 보인다.
.추가로 〈고분〉편처럼 특별히 상주문 형식이 아니면서 신하의 유형과 군주의 설득에 대해 언급하는 편장도 그 상정된 독자는 한비 학파의 학생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군주의 설득에 대한 분석은 결국 법술지사의 승리를 위한 조건을 탐구한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장 구성
각 편장들의 제목과 간략한 내용은 다름과 같다.
- 초진견初秦見. 한비가 진왕에게 상주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지만 실제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그의 저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존한存韓. 한의 보존을 위해 진왕에게 상주한 글이다. 역시 한비의 저술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 난언難言. 역시 군주에게 올리는 상주문이며, 설득의 어려움을 군주에게 알리는 형식이다.
- 애신愛臣. ‘총애받는 신하’라는 머릿글자를 딴 편이다. 신료를 통제하고 군주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법으로 명확한 관계를 세워야 함을 역설한다.
- 주도主道. ‘군주의 길’. 《노자》와 흡사한 운문으로 이뤄져 있으며, 무위의 치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담고 있다. 《노자》에 대한 독후감인 편장과 더불어 노자와 법가를 혼합한 황로파의 사상이 한바와 멀지 않은 진/한시기에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문헌이다.
- 유도有度. ‘법도의 존재’. 신료에게 법을 철저히 적용시킬 것을 이야기한다.
- 이병二柄. 상·벌권을 함께 손에 쥐어야만 군주로서 군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편장이다.
- 양권揚權. 5편 〈주도〉와 함께 운문으로 이뤄진 편장이다. 여기서는 군주의 자율성을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전개된다.
- 팔간八姦. 군주권을 침해하는 요소들을 여덟가지로 유형화하며 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 십과十過. 군주가 나라를 잃는 원인으로 저지를 수 있는 과오들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다양한 옛 이야기들이 인용되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옛 이야기의 내용 자체는 다른 문헌과 그리 다르지는 않다.
- 고분孤憤. 법술지사가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부분으로, 핵심적인 편장 가운데 하나다.
- 세난說難. 3편과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 화씨和氏. 편장 제목은 화씨의 옥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법술에 의한 통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 대한 한탄이 있다.
- 간겁시신姦劫弑臣. 군주를 해치는 신하들의 유형을 분석한 편장이다. 매우 치밀한 모습을 보여준다.
- 망징亡徵. 말 그대로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징조가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분석해 낸 장이다. 역시 대단히 치밀하다.
- 삼수三守. 군주권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를 서술했다. 핵심은 정보와 결정권의 불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
- 비내備內. 부인 및 자식들 역시 군주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냉정한 분석이 이뤄진다.
- 남면南面. 편장의 제목은 군주가 마주하는 방향을 통해 군주의 군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낱말이다. 신료들을 상호 견제시키고, 스스로의 발언에 책임을 묻게 하는 방법 등의 군림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 식사飾邪. 미신을 타파하자는 ‘합리주의적’ 성향이 드러나 있다. 한비는 여기서 어떠한 것도 법 이상의 기준일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 해로解老. 《노자》에 대해 쓴 편장 가운데 하나. 노자 자체보다는 법가와 도가의 절충적 지점 즉 황로파에 가까운 해석을 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되는 《노자》의 문구들은 문헌학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 유로喩老. 《노자》에 대해 쓴 편장 가운데 하나. 좀 더 독자적인 비유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22·23. 설림說林 상/하. 옛 이야기들이 다수 포함된 자료집으로 보인다. - 관행觀行. 행동의 관찰에도 역시 법술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논지다.
- 안위安危. 국가를 잘 보존하는 원칙과 위기에 빠지는 길에 대한 유형화. 법에 대한 존중은 역시 그 핵심이다.
- 수도守道. 나라를 지켜나가는 방법에 대하여 서술한다. 역시 객과적 기준에 대한 강조가 눈에 듼다.
- 용인用人. 하늘(天)이 언급되는 등 그 형이상학적 근거에서 황로파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역시 법술과 신상필벌의 원리가 무위의 치와 결합되어 있다.
- 공명功名. 역시 황로파의 저작 같다. 군주가 공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언급된 요소들은 천시, 인심, 재능, 세이며 이 가운데 재능을 제외하면 모두가 황로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들이다.
- 대체大體. 역시 황로파의 저작같다. 군주와 신하 상하간의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는 동력은 바로 도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다.
- 내저설內儲說 상, 칠술七術. 경經과 전傳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경에서는 군주가 취해야 할 일곱가지 방법을, 전에서는 그 구체적 사례를 해설하고 있다.
- 내저설 하, 육미六微. 역시 경과 전으로 나뉘어 있다. 경에서는 군주가 감지해야 할 나쁜 징조들을에 대해 이야기하며 전에서는 그 구체적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32·33·34·35. 외저설外儲說 좌상/좌하/우상/우하. 역시 경/전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한비 사상의 핵심적 주제인 객관적 법法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인 술術, 초월적 권위인 세勢 등을 확보하는 것이 군주권을 지키는 데 있어 핵심적인 것으로 경에 소개된다.
36·37·38·39. 난難 1-4. 한비가 스스로의 관점에서 가한 역사 비평들이다. 제목은 비판의 의미이다. - 난세難勢. 세勢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곳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현명함과 세 개념 사이의 관계다. 한비는 세는 현명하다고 쓸 수 있다고 어리석다고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유효한 지점은 중질정도의 군주가 군림할 때라는 점 또한 밝힌다.
- 문변問辯. 변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묻는다. 한비는 변론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해 강하게 비판한다.
- 문전問田. 서술은 논어나 맹자에서처럼 대화를 받아 적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한비자를 ‘한자(韓子, 한 선생님)’라고 표현하는 것 때문에 약간 후대에 쓰인 것일 수도 있다는 설이 있다.
- 정법正法. 역시 문답 형식이다. 법과 술의 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 설의說疑. 사이비를 가려내어 명확하게 밝힌다는 뜻이다. 군주에게 해만 입히는 걷만 뻔지르르한 경우에 대한 비판과 군주의 경계를 촉구한 편장이다.
- 궤사詭使. 당시의 실제 정치가 법과 술에 의한 통치의 성격과는 크게 다르게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한비가 우려와 울분을 토해내고 있는 편장이다.
- 육반六反. 군주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인간형이 민의 칭송을 받고, 민의 비난 대상이 군주에게 도리에 존숭되는 모순을 여섯 가지 유형으로 정리했다.
- 팔설八說. 법치에 반하는 여덟 종류의 인간상을 비판한 편장이다.
- 팔경八經. 여덟 가지의 통치 원칙을 들고 있다.
- 오두五蠹. 혼란을 조장하는 다섯 가지 벌레들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주로 유가, 묵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들을 뜻한다. 타 학파에 대한 평론이 성행하던 전국시대 말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 현학顯學. 유가와 묵가에 대한 상당히 공격적인 비판이 이뤄져 있다.
- 충효忠孝. 유가의 충효에 기반을 둔 질서나 정통 도가적 지식인 · 합종가 · 연횡가의 주장이 비판을 받는다.
- 인주人主. 군주로서 신하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논한다.
- 칙령勅領. 한길사판 번역자 이운구에 따르면 상앙의 <근령>을 발췌한 부분이라고 한다. 법을 확립하고 명령을 확실히 하는 것이 정치를 안정시키는 길이라고 한다.이하 편장에는 상앙의 영향이 드러나 있다.
- 심도心度. 민의 심리를 고려한 상·벌을 통해 민이 군주에게 복종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요지다.
- 제분制分. 상·벌의 명확한 구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효과를 분석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