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열전
중니제자열전 (中尼弟子列傳)
사마천 사기-열전의 일곱 번째 기록.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은 춘추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가운데 ‘유가'(儒家)의 시조인 ‘공자'[孔子: 자(字)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와 제자들이 나눈 대화와 그 들이 남긴 업적들을 기록한 것이다.
바로 공자의 제자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편에 의하면 당시 그에게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배운 제자들이 3000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들만 72명(공자세가)에 이른다고 한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공자 집안에서 보존하고 있던 문헌등과 논어(論語)에 나오는 제자들의 명칭, 그리고 그 들이 공자와 나눈 대화와 행적을 기반으로
중니제자열전 (仲尼弟子列傳)을 엮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 (孔子: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본명은 공구(孔丘)이며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유교의 시조(始祖)이다. 춘추시대의 정치가 · 사상가 · 교육자이고,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공자는 제자 중 육예에 통달한 자는 77명(중니제자열전)이라고 하였으며, 사마천은 논어(論語) 및 공자세가(孔子世家),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을 인용하여 제자들을 낱낱이 설명하여 장문의 형식을 취하였다.
사마천은 “나는 공자의 제자들의 이름과 언행을 모두 ‘논어’에 나오는 사제 사이의 문답에서 취한 뒤 이를 차례로 정리하여 중니제자열전을 만들었다. 의심나는 것은 싣지 않았다.”라고 기술하였다.
○ 중니제자열전 (仲尼弟子列傳)
공자는 ‘나에게서 수업을 받고 몸소 통달한 자가 77인에 달한다’라고 말했으니 모두 특출한 재능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덕행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정사에는 염유(冉有), 계로(季路), 언어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뛰어났다.
사(師: 子張)는 편벽됨이 있고 삼(參: 曾子)은 노둔하며 시(柴: 子羔)는 어리석으며, 유(由: 子路)는 거칠고 회(回: 顔淵 )는 자주 집안이 궁핍하였고, 사(賜: 子貢)는 천명을 받지 않고도 재산을 잘 불렸으며 예측하는 것이 자주 적중했다.
공자가 존경한 인물들은 주(周)나라의 노자(老子), 위(衛)나라의 거백옥(蘧伯玉 ), 제(齊)나라의 안평중(晏平仲), 초(楚)나라의 노래자(老萊子), 정(鄭)나라의 자산(子産), 노(魯)나라의 맹공작(孟公綽)이었으며 장문중(臧文仲: 노나라의 大夫), 유하혜(柳下惠), 동제백화(銅鞮伯華 ), 개산자연(介山子然 )을 자주 칭찬했다. 공자는 이들보다 후대에 태어났으며 동시대 인물은 아니었다.
안회(顔回)는 노(魯)나라 사람이며, 자(字)는 자연(子淵), 공자보다 30세 연하였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자신의 사욕을 물리치고 예(禮)로 돌아간다면 천하 모든 사람들이 너의 인(仁)을 인정할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어질구나 회(回)는. 한 대그릇의 밥을 먹고 표주박의 물을 마시며 지저분한 거리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자신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도다”
“회는 마치 어리석어 보였는데 물러나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니 그는 나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현해내었다. 회는 어리석지 않다.”
“등용되면 자신의 뜻을 실천하고 버려지면 은둔해서 자신의 뜻을 감추는 것은 오직 나와 너 만이 이러한 점이 있다.”
안회(顔回)는 나이 29세에 머리가 모두 백발이 되었고 일찍 죽었다. 공자가 통곡하며 말했다.
“나에게 안회(顔回)같은 제자가 있은 뒤부터 문인(門人: 문하 제자)들과 더욱 친근하게 되었다.”
노애공(魯哀公: 재위 BC 494~468)이 물었다. “제자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안회(顔回)라는 제자가 있는데 화가 났다고 해서 그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번 되풀이 하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일찍 죽었으니 지금은 그와 같이 배우기를 좋아하는 제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민손(閔損)은 字가 자건(子騫)이며 공자보다 나이가 15살 아래다.
공자가 말하였다.
“효성스럽다, 민자건(閔子騫)이여! 사람들은 그의 부모 형제들이 칭찬하는 말에 트집 잡지 못하는구나.”
자건은 대부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옳지 못한 군주의 녹을 받는 것을 싫어하여 말하였다.
“만일 다시 나를 부르는 일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의 문수가에 있을 것이요.”
염경(冉耕)은 字가 백우(伯牛)이다. 공자는 그가 덕행이 뛰어났다고 생각했다.
백우가 못된 병에 걸리자 공자는 그의 집에 문병을 가서 창 너머로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천명이야!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천명이야!”
염옹(冉雍)은 字가 중궁(仲弓)이다. 중궁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문을 나갔을 때에는 큰 손님을 뵈온 듯이 하며,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여야 한다. 제후의 나라에서도 원망하는 자가 없고, 대부의 집에서도 원망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공자는 중궁의 덕행이 뛰어나다고 여겨 말하였다.
“옹은 가히 임금 자리에도 앉힐 만 하다.”
중궁의 아버지는 미천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중궁을 논평하여) 말하였다.
“얼룩소 새끼가 빛깔이 붉고 또 뿔이 제대로 났다면 비록 쓰지 않고자 하나 제사를 받는 산천 신령이야 어찌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염구는 字가 자유(子有)이며, 공자보다 스물아홉 살 아래다.
노나라 대부 계씨(季氏)의 총관리인이 되었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물었다. “염구는 인(仁)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천 호의 고을과 백 승(乘)의 대부 집안의 총관리인을 맡길 만하나 그가 인(仁)한지는 모르겠소.”
계강자가 다시 물었다. “자로(子路)는 인(仁)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염구와 마찬가지로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소.”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다. “(옳은 일을) 들었을 때에는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들으면 실행해야 한다.”
자로가 물었다. “(옳은 일을) 들었을 때에는 그대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부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상의도 없이 그대로 행할 수 있겠는가!”
자화(公西赤)가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감히 여쭙건대, 질문은 같은데 어찌해서 대답은 다른 것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염구는 사람이 소극적이기 때문에 나아가게 한 것이요, 자로는 남보다 앞서가는 까닭에 뒤로 물러나게 한 것뿐이다.”
중유의 자는 자로이며, 노나라 변(卞) 사람이며 공자보다 9살 아래다.
자로는 천성이 거칠고 용맹을 좋아했으며 자존심이 강했다.
수탉의 꼬리로 관을 만들어 쓰고 수퇘지의 가죽 장식의 검을 허리에 차고서 공자를 업신여기며 난폭하게 굴었다.
그러나 공자가 항상 예로서 대하며 조금씩 바른 길로 이끌었으므로 얼마 후엔 자로가 유자(孺子)의 옷을 입고 제자의 예물을 올린 다음 문인을 통해 공자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자로가 정사(政事)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솔선할 것이며 부지런히 해야 한다”
더 가르쳐 줄 것을 청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지금 말한 것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했다.
자로가 또 묻기를 “군자도 용맹을 숭상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의(義)를 으뜸으로 삼는다. 군자가 용기만을 좋아하고 의리를 모르면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소인이 용기만을 좋아하고 의리를 모르면 도둑질을 할 것이다.”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실천에 옮기지 않았는데 또다시 다른 좋은 말을 듣게 될까봐 걱정했다.
공자가 말하였다.
“일방적인 말로서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자는 중유(由)가 아니겠는가!.”
“중유(由)는 용맹을 좋아함은 나보다 나으나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부족한 것이 흠이다.”
“중유와 같은 사람은 제 명에 죽기가 어렵다.”
“헤진 베옷을 입고 여우나 담비 옷을 입은 사람과 같이 있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아마 중유일 것이다!”
“중유의 학문은 대청에까지 올라와 있으나 아직 방안에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계강자가 물었다. “중유는 인(仁)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천승의 나라 군정(軍政)을 다스릴 수 있지만 그가 인(仁)한지는 알지 못하겠소.”
자로는 공자를 수행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장저(長沮), 걸익(桀溺), 하조장인(荷蓧丈人) 등을 만났다.
자로가 노나라 계씨의 총관리인이 되었을 때 계손씨가 공자에게 물었다.
“자로는 대신이라고 이를 만 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숫자만 채우는 신하라고 말할 수 있지요.”
자로가 위나라 포읍(蒲邑)의 대부(大夫)가 되어 공자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포 지방은 장사들이 많아 다스리기가 힘든 곳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잘 들어 두어라 :
몸가짐을 공경하게 하면 장사들을 거느릴 수 있을 것이다.
너그럽고 올바르면 백성들이 따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손하고 바른 자세로 정사를 펼쳐 편안히 지내게 하면 그곳의 윗사람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초 위 영공(衛 靈公)에게 총애를 받는 부인이 있었는데 남자(南子)라고 하였다.
영공의 태자 괴외(蕢聵)는 남자(南子)에게 죄를 범하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영공이 죽자 부인인 남자(南子)는 공자 영(郢)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다.
영이 듣지 않고 말했다. “망명한 태자의 아들 첩(輒)이 있습니다.”
이에 위나라에서는 첩(輒)을 임금으로 세웠으니 그가 출공(出公)이다.
출공이 즉위한 지 12년이 되도록 그의 아버지인 괴외는 망명지에서 위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무렵 자로(子路)는 위나라 대부 공회(孔悝)의 읍재(邑宰)로 있었다
괴외(蕢聵)는 공회(孔悝)를 협박하여 반란을 일으킬 생각으로 몰래 공회의 집으로 숨어 들어가
마침내 그 무리들과 함께 출공(出公)을 습격했다.
출공은 노나라로 달아나고 괴외가 임금 자리에 오르니 그가 장공(莊公)이다.
공회가 난을 일으켰을 때 자로는 성 안에 없었는데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위나라 성문으로부터 나오는 자고(子羔)와 마주치자 자고가 자로에게 말했다.
“출공은 이미 달아나고 성문도 이미 닫혔으니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겠소, 공연히 화를 당하게 되오.”
자로가 대답했다. “녹봉을 받는 자로서 난리를 피할 수는 없다.”
자고는 그대로 떠나 버렸다.
마침 성 안으로 들어가는 심부름꾼이 있어 성문이 열렸으므로 자로는 성안으로 들어갔다.
괴외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괴외는 공회와 함께 누대에 올라가 있었다.
자로가 말하였다.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공회를 이용하려 하십니까? 청컨대 그를 죽이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나 괴외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자로는 누대를 불태우려 하자 괴외는 겁이 나서 곧 석기(石乞)와 호염(壺黶)을 내려보내 자로를 공격하게 했으며 그들의 칼이 자로의 갓 끈을 잘랐다.
그러자 자로가 말하였다.
“군자는 죽을지라도 관은 벗지 않는다.” 하고는 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슬프다, 중유는 죽고 말리라!” 얼마 안 되어 과연 자로의 죽음이 전해졌다.
그래서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중유를 제자로 둔 뒤로 세상 사람들의 험담을 듣지 않았다.”
당시 자공(子貢)은 노나라를 위해 제나라에 사자로 가 있었다.
재여는 字가 자아(子我)이다. 언변에 능했다.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이렇게 물었다.
“부모의 상을 3년이나 치르는 것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군자가 3년 동안이나 예(禮)를 행하지 않으면 예는 반드시 무너지고, 3년 동안이나 음악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1년이 지나면) 묵은 곡식이 다 없어지고 새 곡식이 익으며, 불씨를 만드는 나무도 바꾸어야하니 1년이면 그칠 만한 것입니다.”
공자는 반문하였다. “그것으로 네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재여가 “편안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라. 군자는 부모의 상을 치르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으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다. 그래서 그리하지 않는 것이다.”
자아가 물러가자 공자는 말하였다.
“재여는 참으로 인(仁)하지 않다! 자식은 태어나 3년이 지난 뒤라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 무릇 3년상은 온 천하에 두루 적용되는 의리이다.”
하루는 재여(宰予)가 낮잠을 잤다.
공자가 말하였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에는 흙손으로 고쳐 바를 수 없다.”
재아가 오제(五帝)의 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너는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 뒤 재아는 제나라 임치(臨菑)의 대부가 되었는데 전상(田常)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멸족의 화를 당하고 말았으므로 공자는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단목사(端木賜)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자공(子貢)이며, 공자보다 31세 아래였다.
자공은 언변이 뛰어났으나 공자는 항상 그의 언변을 경계시키곤 하였다.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너와 안회와 비교해서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제(賜)가 어떻게 안회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자공은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 공자에게 물었다.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너는 쓰임이 있는 그릇이다.”
(자공이 거듭) 물었다. “어떤 그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호련(瑚璉)과 같다.”
진자금(陳子禽)이 자공에게 물었다. “중니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도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소. 현명한 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현명하지 못한 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하고 있소. 문왕과 무왕의 도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소. 선생께서 어디선들 (문왕과 무왕의 도를) 배우지 못했을 리 있겠소? 또한 어찌 일정한 스승이 계시겠는가!”
진자금이 또 물었다. “공자께서 방문하는 나라마다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관해 듣습니다. 이는 공자께서 청해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그 나라가 청해 그런 것입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선생님은 온화, 선량, 공경, 절제, 겸양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 부자(夫子)께서 구하심은 일반인의 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가난한데도 아첨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
그 당시 제(齊)나라 대부 전상(田常)이 제나라에서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제나라의 세족인 고(高)씨, 국(國)씨, 포(鮑)씨, 안(晏)씨의 세력이 두려워하여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나라를 치려했다.
공자는 그런 사실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무릇 노나라는 우리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부모의 나라인데 노나라가 이처럼 위기에 놓였는데 너희들은 어찌해서 나서지 않는가?”
자로가 나서 보겠다고 청했으나 공자는 그를 말렸다.
자장(子張)과 자석(子石)이 나가 보겠다고 청했으나 공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자공이 나가겠다고 청하자 공자는 비로소 허락했다.
자공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제나라로 가서 전상에게 유세하였다.
“상공께서 노나라를 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무릇 노나라는 치기 힘든 나라입니다. 그 성벽은 얇고 낮으며 그 해자는 좁고 얕으며 군주는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며, 대신들은 거짓되고 무능하며, 그 군사와 백성들은 전쟁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나라는 싸울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군주께서는 오나라를 치느니만 못합니다. 무릇 오나라는 성벽은 높고 두터우며 해자는 넓고 깊으며 무기는 튼튼하고 새것이며 병사들은 정예이고 식량도 충분하며 중무기와 정병이 모두 그 성안에 있으며 또 훌륭한 대부들이 그곳을 지키니 이런 나라는 치기가 쉽습니다.”
전상은 벌컥 성을 내어 상기한 채 말했다.
“그대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쉽다고 하는 것이며, 그대가 쉽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인데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나를 가르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자공이 말하였다.
“신은 듣기를 ‘우환이 내부에 있는 사람은 강한 나라를 치고 우환이 밖에 있는 사람은 약한 나라를 친다.’고 했습니다. 지금 상공의 우환은 내부에 있습니다. 제가 듣건대 제나라 왕이 상공을 세 번이나 군에 봉하려 했으나 세 번 다 실패했다고 하는데 제나라 대신들 가운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상공께서 노나라를 치고 제나라 영토를 넓히면 제나라 군주는 승리로 인하여 더욱 교만해질 것이고 노나라를 깨뜨린 것으로 대신들의 위세는 더욱 높아질 것이며, 상공의 공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군주와의 거리만 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군주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군신들을 방자하게 만들면 상공께서 뜻하는 바를 이루기 어려울 뿐입니다. 무릇 군주가 교만해지면 방자한 일을 하고 신하가 교만하면 권력을 다툽니다. 그러면 상공은 위로는 군주와 사이가 벌어지고 아래로는 대신과 맞서 다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상공께서 제나라에서 설 곳이 더욱 좁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기를 오나라를 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나라를 쳐서 패배하면 백성들은 밖에서 싸우다 죽고 대신들은 나라 안에서 그 세력을 잃게 되니 곧 상공으로서는 위로는 강한 적이 없어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며
군주를 고립시켜 오직 상공만이 제나라를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전상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군대는 벌써 노나라로 향했소. 노나라에서 오나라로 가게 하면 대신들은 나를 의심할 테니 어찌하면 좋소?”
자공이 말하였다. “상공께서 군대를 멈추고 노나라를 공격하지 마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오나라 왕에게 가서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치도록 하면, 상공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맞아 싸우면 됩니다.”
전상은 이를 허락하고 자공을 남쪽으로 보내 오왕을 만나게 하였다.
유세하기를 “신은 듣건대, 왕자는 다른 나라의 후손을 단절시키지 않고 패자는 강한 적을 두지 않습니다. 천 균(鈞: 30근)의 무게도 약간의 무게를 더하면 상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만승(萬乘)의 제(齊)나라가 사사로이 천승(千乘)의 노(魯)나라를 탐하여 오나라와 힘을 겨룬다면 아마도 왕께서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장차 노나라를 구하여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고 제나라를 제압한다면 오나라에게 크나큰 이득이 될것입니다. 사수(泗水)의 여려 제후들을 어루만지고 포악한 제나라를 주벌하여 강한 진(晉)나라를 복종시킨다면 그보다 더 큰 이득은 없을 것입니다. 명분은 망한 노나라를 보존하는 것이되, 실상은 제나라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니 지혜로운 자라면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오왕이 “좋소 그런데 내가 일찌기 월나라와 전쟁을 벌여 회계산에 주둔했을 때 월왕이 힘겹게 장사들을 길러내어 나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소 그대는 내가 월나라를 정벌하여 그대의 말을 따를 때까지 기다리시오.” 라고 말하자,
자공은 “월(越)나라의 힘은 노(魯)나라만 못하고 오(吳)나라의 국력은 제(齊)나라에 미치지 못합니다. 왕께서는 제나라는 제쳐두고 월나를 치려고 하신다면 제나라는 이미 노나라를 평정한 뒤가 될 것입니다.
또 왕께서 망한 나라를 보존해주고 세대를 이어준다는 명분을 가지고 작은 월나라를 친다면, 강한 제나라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이는 진정한 용기가 아닙니다. 무릇 용감한 자(勇者)는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이(仁者)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智者)는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며 왕자는 세대를 단절시키지 않아 그 의로움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금 월나라를 보존하여 제후들에게 왕의 어짐을 보여주시고 노나라를 구하여 제나라를 친다면 그 위엄은 진(晉)나라에도 가해질 것입니다. 제후들은 서로 오나라에 조회를 할 것이니 이로 인해 패업이 달성될 수 있습니다.
왕께서 혹 월나라가 걱정되신다면 제가 동쪽 월나라 왕을 만나 군사를 동원하여 왕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로 월나라 안은 비게 되고, 명분상 제후들을 거느리고 정벌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오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공을 월나라에 보냈다.
월왕(越王)이 길을 닦고 교외에서 자공을 맞아 친히 말을 몰아 객사로 찾아가서 말했다. “오랑캐의 나라에 대부께서 는 무슨 일로 친히 오셨습니까?”
자공이 말했다. “지금 제가 오왕에게 노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공격하라고 설득했는데 오왕은 제나라를 치고 싶긴 하지만 월나라가 걱정되어 「내가 월나라를 친 다음에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소.」 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다면 월나라를 망하게 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한다면 이는 졸렬한 것이오,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알게 만든다면 위태로운 것이 되고, 일을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먼저 그 일이 알려진다면 그것은 위험합니다. 이 세 가지는 일을 도모할 때 가장 큰 걱정거리입니다.”
구천(句踐)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 절하며 “제가 일찎이 저의 능력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고 오나라와 전쟁을 벌여 회계산(會稽山)에서 곤혹을 치렀습니다. 그 때문에 뼈저림이 골수에 사무쳤고 밤 낮으로 입술과 혀가 바짝 타들어갈 지경입니다. 다만 오왕과 싸우다가 죽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라고 말하며 자공에게 조언을 구했다.
자공은 “오왕은 사람됨이 포악하여 여러 신하들도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고 나라는 빈번한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어 군사들은 견디기 힘들어 하고 있으며 백성은 윗 사람들 원망하고 대신들은 안에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자서(伍子胥)가 간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태재 비(嚭)는 정사를 맡고 있어 임금의잘못을 방치하고 제 사욕만을 챙기고 있으니 이는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진실로 군사들을 뽑아 지원하고 오왕의 뜻에 따라 귀한 보물들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겸양의 말로 예를 갖춰 존귀하게 대햐먼 그는 반드시 제나라를 치게 될 것입니다. 오왕이 전쟁에 지게 된다면 왕의 복이요, 전쟁에서 이긴다면 반드시 군대를 몰아 진(晉)나로 향할 것입니다. 제가 북쪽 진나라 군주를 만나 함께 제나라를 치도록 하게 해주신다면 오나라를 반드시 약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나라의 정예병은 모두 제나라에서 가 있고 진(晉)나라에서 곤경을 당하고 있을 때 왕께서 피로해진 오나라 군대를 제압한다면 오나라를 반드시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오왕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했다. 자공을 떠나보낼 때 금 100 일(鎰) 검 한 자루, 좋은 창 두 자루를 주었으나 자공은 받지 않고 바로 떠났다.
자공은 오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이 삼가 대왕의 말을 월왕에게 전했더니 월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제가 불행히도 젊은 혈기로 선대의 업적에 누를 끼치고 안으로는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고 오나라에 죄를 짓고 군대는 패하고 몸은 치욕을 받았으며 회계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나라는 공허해졌었는데 대왕(吳王)의 은혜에 힘 입어 제기를 올려 조상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주셨으니 죽어도 감히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찌감히 일을 도모하려는 마음을 갖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5일이 지난 뒤, 월나라에서 대부 종(種)을 보내 오나라 왕에게 말했다 “동해 미천한 신하 구천(句踐)의 사자인 저 종(種)이 감히 신하들과 교유하고 좌우에 묻고자 합니다. 지금 듣자니 대왕께서 앞으로 대의를 가지고 강한 나라를 주벌하고 약소국을 구원하기 위해 강포한 제나라를 제압하여 주 왕실을 보호하려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라 안의 사졸 3천 명을 모두 선발하여 스스로 갑옷과 병기로 무장하여 선발대에서 적군의 화살과 돌을 맞고자 합니다. 월나라 미천한 신 종(種)이 선대 조상들의 병기과 갑옷 20여벌과 굴로(屈盧)가 만든 창, 보광(步光)의 검을 바쳐 군대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합니다.”
오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공에게 “월왕이 몸소 과인을 따라 제나라를 치고자 한다고 하니 어떻소?”라고 말하니, 자공은 “안됩니다. 대저 다른 나라를 비게 하고 그 나라의 인민을 모두 거두어 가고 또 그 임금까지 따르게 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왕께서는 그 가 바치는 폐물과 군사만 받으시고 그 임금이 몸소 따르는 것은 사양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오왕은 자공의 말에 따라 월왕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사양했다. 이에 오왕은 바로 9군(郡)의 병사들을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러 떠났다.
자공이 바로 진(晉)나라에 가서 진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생각을 먼저 정해놓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할 수 없고, 병사는 미리 훈련시켜놓지 않으면 적을 이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제(齊)나라와 오(吳)나라가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저들이 전쟁에 승리한다면 월(越)나라가 위험해질 것이 분명하고, 오나라가 제나라를 이기게 되면 반드시 그 군대를 몰아 진(晉)나라로 향할 것입니다.”
진나라 군주가 크게 두려워하여 “어떻게 해야 좋겠소?”라고 묻자
자공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잘 쉬게 해주면서 기다리소서.”라고 말했다.
진나라 군주가 그 말을 따랐다.
자공은 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오왕은 과연 제나라와 애릉(艾陵)에서 제나라와 싸워 제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일곱 장군의 병사들을 획득하였으나 돌아가지 않고 과연 군대를 몰아 진(晉)나라로 향했다. 진나라 군대와 황지(黃池)에서 대치했다 오와 진이 힘 겨루기를 다투었고 진나라가 공격하여 오나라 군사를 크게 패배시켰다. 월왕이 그 소식을 듣고 강을 건나 오나라를 습격하였고 성과의 7리 정도의 사이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오왕이 그 소식을 듣고 진나라를 떠나 돌아왔다. 월나라와 오호(五湖)에서 격돌했는데 세번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여 성문을 지키기 못했다 월나라는 드디어 왕궁을 에워쌌고 오왕 부차(夫差)를 죽이고 재상을 도륙했다. 오나라를 격파한지 3년 뒤 동쪽으로 향했고 패자가 되었다
자공(子貢)이 한 번 움직임에 노(魯)나라가 보존되고 제(齊)나라는 혼란에 빠졌으며 오(吳)나라가 멸망하고 진(晉)나라는 강대해졌으며, 월(越)나라는 패자(覇者)가 되었다.
자공이 한 번 사신으로 간 일로 여러 나라의 형세를 싸움으로 번지게 하였고 10년 동안 다섯 나라가 각자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공은 장사를 좋아하여 때에 따라 재화를 잘 운용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추켜세우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감춰주지도 않았다.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의 부를 축적하였고 마침내 제(齊)나라에서 인생을 마쳤다
언언(言偃)은 오(吳)나라 사람이며 자(字)는 자유(子游)이다 . 공자보다 45세 연하이다
자유(子游) 수업을 마친 후, 무성(武城)의 재(宰)가 되었다.
공자가 그 고을을 지나다가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 것인가?”
자유(子游)가 말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군자는 도를 배우면 사람들을 사랑하게되고 소인들이 도를 배우면 다스리기 쉽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자는 “얘들아, 언(偃)의 말이 맞다. 좀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다”라고 말했다
공자는 자유(子游)가 문학(文學)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복상(卜商)은 자(字)가 자하(子夏)이며, 공자보다 44세 연하이다.
자하(子夏)가 물었다. “「 아름다운 미소에 어여쁜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에 선명한 눈동자여, 하얀 천에 그림으로 수를 놓았네 」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 위에 한다는 것이다.”
자하가 “그럼 예(禮)는 나중이 되겠군요.”라고 말하자,
공자는 “상(商)아 비로소 너와 시(詩: 육경(六經)의 중의 하나인 ‘詩經’을 말함)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사(師: 子張)와 상(商: 子夏)은 누가 더 낫습니까? “
공자가 말했다. “사(師)는 너무 지나치고, 상(商)은 미치치 못한다.”
자공이 “그렇다면 사(師)가 더 나은 것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공자는 자하(子夏)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어야지 소인유(小人儒)가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공자가 죽은 뒤, 자하(子夏)는 서하(西河)에 살면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다.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너무 슬퍼한 나머지 시력을 잃었다.
전손사(顓孫師)는 진(陳)나라 사람으로 字는 자장(子張)이다. 공자보다 48세 아래였다.
자장이 벼슬하는 자의 녹봉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많이 듣고서 의심나는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어지며, 많이 보고서 위태로운 것을 빼버리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녹(祿)이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훗날 공자 일행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욕을 겪을 때 자장(子張)이 행(行)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였다. “말을 충직하고 믿음직하게 말하고(忠信), 행실을 돈독하고 경건(篤敬)하게 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라 하더라도 행해질 수 있다. 말이 충신(忠信)하지 못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지 못하면 중원의 주리(州里)라 하더라도 행해질 수 있겠는가! 수레에서 일어서면 끌채 끝의 멍에를 메는 부분을 볼 수 있고, 수레에 앉으면 여러 멍에의 가로 나무 연결 부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뒤에야 비로서 치도가 능히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자장(子張)이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해 허리띠에 적어두었다.
자장은 또 공자에게 물었다. “선비는 어떻게 해야만 통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반문했다. “어떤 것이냐? 네가 말하는 그 통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자장이 대답하였다.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것은 소문이지 통달함이 아니다.
무릇 통달이란 질박하며 정직하고 의(義)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며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이니, 나라나 집안에 있어서도 반드시 통달이 되는 것이다. 무릇 소문이란 얼굴빛은 인(仁)을 취하나 행실은 실제 위배되며 그대로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나라나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난다.”
증삼(曾參)은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字가 자여(子輿)이다. 공자보다 46세 아래다.
공자는 증삼이 효도에 능통하다고 여겼으므로 그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효경(孝經)을 짓게 했다. 증삼은 노나라에서 죽었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은 무성(武城) 사람으로 字가 자우(子羽)이다. 공자보다 29세 아래이다. 얼굴이 아주 못 생겼다.
공자를 모시러 오자 공자는 그가 재능이 보잘 것 없을 것으로 여겼다.
수업을 마친 뒤 물러나와 행동을 조심했는데, 길을 갈 때에도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경대부를 만나지 않았다.
남쪽을 떠돌다 장강에 이르렀을 무렵 따르는 제자가 300명에 이르렀다.
주고받는 것과 나아가고 물러남이 분명하여 그의 명성이 제후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공자는 그러한 그의 평판을 듣고 말했다. “내가 말로 사람을 평가했다가 재여(宰予)에게 실수를 했고 얼굴로서 사람을 평가했다가 자우(子羽)에게 실수를 했다.”
복부제(宓不齊)는 자가 자천(子賤)이다. 공자보다 30세 아래였다.
공자가 자천(子賤)을 두고 평하셨다. “군자(君子)답다, 이 사람이여! 노(魯)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德)을 취했겠는가?”
자천이 단보의 읍재로 있을 때 하루는 공자에게 들러 말하였다. “이 곳에는 저보다 현명한 자가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이들은 저에게 치도(治道)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를 듣고 공자가 탄식하였다. “아까운 일구나, 네가 다스리는 곳은 작구나. 만일 다스리는 곳이 컸더라면 이상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을 터인데.”
원헌(原憲)은 字가 자사(子思)이다. 자사가 수치스러운 일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녹만 먹으며,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 녹만 먹는 것 모두 수치스러운 일이다.”
자사가 물었다.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 남을 원망하는 것, 탐욕스러운 것을 행하지 않으면 인(仁)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어렵다고 할 수는 있으나 인(仁)인지는 내 알지 못하겠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원헌(原憲)은 풀이 우거진 늪지대에 숨어 살았다.
자공(子貢)이 위나라 재상으로 있으면서 사두마차를 타고 기마 호위병과 함께 명아부와 콩잎을 헤치고 빈궁한 집에 들어와 자사에게 들려 인사했다.
원훤은 헤어진 옷과 의관을 단정히 차려 입고 자공을 맞이했다.
자공이 부끄럽게 여겨 말하였다. “선생은 어찌 병들어 보이십니까?”
원훤이 말하였다.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말하고 도를 배우고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병든 것이라고 한다.’고 들었소.
지금 저는 가난한 것일지언정 병든 것은 아닙니다.”
자공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언짢은 표정으로 떠났다. 이후 평생토록 자신의 말이 지나친 것을 부끄러워했다.
공야장(公冶長)은 제나라 사람으로 字가 자장(子長)이다.
공자가 이렇게 평하였다. “자장은 사위를 삼을 만하다. 비록 포승으로 묶여 옥중에 있었으나 그의 죄가 아니었다.” 하고 그를 자기 사위로 삼았다.
남궁괄은 字가 자용(子容)이다.
자용이 공자에게 물었다. “예(羿)는 활을 잘 쏘았고 오(奡)는 힘이 세어 육지에서 배를 끌고 다녔지만 모두 제대로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禹)임금과 주나라 후직(后稷)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도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용(子容)이 물러간 뒤에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로구나, 저 사람은! 덕을 숭상하는구나, 저 사람이여!”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버려지지 않을 것이요,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는 형벌을 면할 것이다.”
자용은 시경(詩經) 백규(白珪)의 시를 세 번 반복해 외우니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공석애(公皙哀)는 字가 계차(季次)이다.
공자가 말하였다. “천하 사람들은 도를 행하지 않고 대부분 대부집 가신이 되어 도성에서 벼슬을 하며 지내건만 오직 계차만은 지조를 지키며 벼슬하지 않는다.”
증점(曾蒧)은 字가 석(皙)이다.
증점이 공자를 모시는데 공자가 말하였다. “너의 뜻을 말해 보아라.”
증점이 대답하였다.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童子) 6~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대(臺)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가 아! 하고 감탄하시며 “나는 점(點)의 뜻과 같다!” 하였다.
안무요(顏無繇)는 자가 로(路)이다.
로는 안회(顏回)의 아버지인데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다른 시기에 공자를 섬겼다.
안회가 죽자 안로는 가난하여 공자의 수레를 팔아 그것으로 외관(槨)을 만들어줄 것을 청했다.
공자가 말하였다. “재주가 있거나 재주가 없거나 간에 각각 자기의 아들을 위한다. <내 아들> 이(鯉)가 죽었을 때에 관(棺)만 있었고 곽(槨)은 없었다. 내가 수레를 팔아 도보로 걸어 다니며 곽(槨)을 만들어주지 못함은 내가 대부(大夫)의 뒤를 따르기 때문에 도보로 걸어 다닐 수 없어서이다.”
상구(商瞿)는 노나라 사람으로 字가 자목(子木)이다. 공자보다 29세 아래다.
공자는 주역(周易)을 상구(商瞿)에게 전했고, 상구는 초나라 사람 한비자홍(馯臂子弘)에게 전했고, 자홍(子弘)은 강동 사람 교자용자(矯子庸疵)에게 전했으며 용자(庸疵)는 연나라 사람 주자가수(周子家豎)에게 전했으며, 가수(家豎)는 순우 사람 광자승우(光子乘羽)에게 전했고, 승우(乘羽)는 제나라 사람 전자장하(田子莊何)에게 전했고, 장하(莊何)는 동무 사람 왕자중동(王子中同)에게 전했고, 중동(中同)은 또 치천 사람 양하(楊何)에게 전했다.
양하(楊何)는 원삭(元朔) 연간에 주역에 능통하여 한나라 중대부가 되었다.
고시(高柴)는 字가 자고(子羔)이다. 공자보다 30세 아래이다.
자고는 신장이 5척에 미치지 못했으며,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공자는 그를 우직하다고 생각했다.
자로(子路)가 자고(子羔)를 계씨의 근거지인 비읍(費邑)의 읍재(邑宰)로 삼자 공자가 말했다.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
자로가 말하였다.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만 잘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다.”
칠조개(漆彫開)는 자가 자개(子開)이다.
공자가 자개(子開)에게 벼슬길에 나서라고 권하니 자개가 대답하였다. “저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공자가 기뻐하셨다.
공백료(公伯繚)는 字가 자주(子周)이다.
자주(공백료)가 계손씨에게 자로(子路)를 참소하자 자복경백(子服景伯)이 (분개하여) 공자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계손께서 진실로 공백료의 말에 마음에 의혹됨이 있었으니, 공백료는 내 힘으로도 죽여 시체를 시장바닥에 버릴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도가 장차 행하여지는 것은 천명이고 도가 장차 없어지는 것도 천명이다.
공백료 따위가 천명에 어떻게 할 것인가!”
사마경(司馬耕)은 자가 자우(子牛)이다. 자우는 말이 많고 성질이 조급했다.
공자에게 인(仁)을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하였다. “인자(仁者)는 그 말을 참아서 하는 것이다.”
사마우가 다시 물었다. “말하는 것을 참아서 하면 인(仁)이라 이를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행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말하는 것을 참아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마우가 군자(君子)에 대해 공자에게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근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마우가 물었다. “근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군자라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스스로 자신을 살펴 조그마한 허물도 없는데 어찌 근심하고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번수(樊須)는 字가 자지(子遲)이다. 공자보다 36세 아래다.
번지(樊遲)가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는 익숙한 늙은 농부만 못하다.”
채소 농사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자 공자가 대답했다. “나는 오랫동안 채소를 가꾼 늙은 농부만 못하다.”
번지가 물러가자 공자가 말했다.
“소인이구나, 번수여!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실정대로 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방의 백성들이 포대기로 아이를 싸서 업고 올 터인데 어찌해서 직접 농사를 지으려는 것인가!”
번지가 인(仁)에 관해 묻자 공자는 대답하였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번지가 지(智)를 묻자 대답하였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유약(有若)은 공자보다 43세 아래이다.
유약은 말하였다. “예(禮)를 운용하는 데는 조화를 귀하게 여기며, 선왕(先王)의 도(道)는 이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다.작은 일과 큰일에 모두 이를 따르는 것이나 예가 행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조화의 취지만 알아 조화 자체에만 힘쓰고 예로써 이를 절제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이 의(義)에 가까우면 약속한 말을 실행할 수 있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여기에 친근함을 잃지 않으면 가히 받들어 모실만하다.”
공자가 죽은 뒤에도 제자들은 공자를 사모하여, 유약(有若)의 얼굴이 공자를 많이 닮아
제자들은 서로 상의한 끝에 그를 스승으로 추대하고 마치 공자를 모시듯이 그를 위했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나아가 유약에게 물었다. “옛날에 공자께서는 외출하실 때 제게 우산을 준비시킨 적이 있었는데, 얼마 뒤 과연 비가 내렸습니다.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비가 올 것을 미리 아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선생님께서 이르시기를 시경(詩經)에 ’달이 필성(畢星)에 걸리면 큰 비가 내린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제 밤에 달이 필성에 걸리지 않았느냐?’하셨습니다.
하루는 달이 필성에 걸려 있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았소.”
상구(商瞿)는 나이 많도록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의 어머니가 재혼을 권했소.
공자께서 상구를 제나라로 심부름을 보내려고 하셨으므로 상구의 어머니는 그런 사정을 말하고 연기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조금도 걱정할 것 없소. 구는 마흔이 넘어서야 다섯 아들을 둘 것입니다.’라고 했소. 그 뒤 과연 그대로 되었소. 묻건대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을까요?”
유약은 대답할 수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질문한 제자가 일어나 이같이 힐난했다.
“유자(有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시오. 그 자리는 그대가 앉아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니오!”
공서적(公西赤)은 字가 자화(子華)이다. 공자보다 42세 아래다.
자화가 제나라로 심부름을 가게 되었을 때 염유(冉有)가 자화의 어머니를 위해 그가 없는 동안 먹을 양식을 청했다.
공자는 말했다. “부(釜)를 주어라.”
염유가 더 주면 좋겠다고 청하자 공자는 말했다. “유(庾)를 주어라.”
그런데도 염자(염유)는 곡식 다섯 병(秉)을 자화의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였다. “공서적이 제나라로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듣기를 ‘군자는 궁박한 자를 돌봐주고 부자에게는 보태주지 않는다’고 했다.”
무마시(巫馬施)는 자가 자기(子旗)이다. 공자보다 30세 아래였다.
진(陳)나라 사패(司敗)가 공자에게 물었다. “노나라 소공(昭公)은 예(禮)를 알았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예를 아셨다.”
공자가 떠나자 사패는 무마기(巫馬旗)에게 읍하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군자는 편당(偏黨)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군자도 편당을 하는가? 소공(昭公)께서 오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다음 부인을 오맹자(吳孟子)라고 불렀소. 그것은 맹자의 성이 희(姬)였으므로 동성인 것을 꺼리어 바꾸어 부른 것이오. 그런 노나라 임금이 만일 예를 안다고 한다면 세상에 누가 예를 모르겠소!”
무마시(巫馬施)가 공자에게 그런 말을 고하자 공자가 말하였다. “나(丘)는 다행이다. 실로 나에게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알아채는구나. 그러나 신하는 군주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법이니, 숨겨주는 것이 예이다.”
양전은 자가 숙어이다. 공자보다 29세 아래다.
안행은 자가 자류이다. 공자보다 46세 아래다.
염유는 자가 자로이며, 공자보다 50세 아래다.
조휼은 자가 자순이다. 공자보다 50세 아래다.
백건은 자가 자석으로 공자보다 50세 아래다.
공손룡은 자가 자석이다. 공자보다 53세 아래다.
이상 안회에서 자석까지 35인은 나이와 성명이 분명하며 대부분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문답한 내용이 글로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 42명은 나이도 분명하지 않고 글로 전해진 것도 볼 수 없어 아래와 같이 적는다.
염계는 자가 자산이다. 공구조자는 자가 자지이다.
진조는 자가 자남이다.
칠조치는 자가 자렴이다.
안고는 자가 자교이다. 칠조도보.
양사적은 자가 자도이다. 상택. 석작촉은 자가 자명이다.
임부제는 자가 선이다. 공량유는 자가 자정이다. 후처는 자가 리이다.
진염은 자가 개이다. 공하수는 자가 승이다. 해용잠은 자가 자석이다.
공견정은 자가 자중이다. 안조는 자가 양이다. 교단은 자가 자가이다.
구정강. 한부흑은 자가 자색이다. 진상은 자가 자비이다.
신당은 자가 주이다. 안지복은 자가 숙이다. 영기는 자가 자기이다.
현성은 자가 자기이다. 좌인영은 자가 행이다. 연급은 자가 사이다.
정국은 자가 자도이다. 진비는 자가 자지이다. 시지상은 자가 자항이다.
안쾌는 자가 자성이다. 보숙승은 자가 자거이다. 원항적.
악해는 자가 자성이다. 염혈은 자가 용이다. 숙중회는 자가 자기이다.
안하는 자가 염이다. 적흑은 자가 석이다. 방손은 자가 자렴이다.
공충. 공서여여는 자가 자상이다. 공서침은 자가 자상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세상의 학자들로서 공자의 70여 명의 제자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칭찬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혹자는 실제보다 지나치고 비방하는 사람들 가운데 혹자는 사실보다 더 나쁘게 평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나 모두 참된 내용을 알지 못한 채 말하는 것으로, 제자들의 명부는 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의 기록에 따른 것이므로 거의 옳을 것이다.
나는 제자들의 성과 이름과 말을 모두 <논어>에 있는 공자와 제자의 문답에서 취한 뒤 함께 엮어 이 편을 만들었는데 의심나는 것은 싣지 않았다.”고 했다.
○ 사자성어
1) 이모취인(以貌取人)
.이모취인[以貌取人-以(써 이) 貌(모양 모) 取(취할 취) 人(사람 인)]은 “용모(容貌)로 사람을 평가(評價)하거나 고름”이라는 뜻이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은 무성(武城; 지금의 산동성 비현) 사람으로 자(字)를 자우(子羽)라 하였으며, 공자보다 29세 연소하였다. 그는 얼굴이 못 생겨서 공자의 문하에 들어왔을 때에 공자는 그의 재능이 모자라지 않는가 의심하였다.
그런데 그는 가르침을 받은 뒤로는 물러 나와 행실을 닦고, 외출할 경우에는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큰길로만 다녔으며, 공무(公務)가 아니면 대부들을 만나는 일이 없었다.
그가 남쪽 양자강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의 제자들이 300명에 달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물건을 주고받거나 벼슬자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의(義)에 따라 하라고 가르쳐서, 제후들 사이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평판을 들은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 잘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재여(宰予)를 잘못 보았고, 생김새로만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를 잘못 보았다(以貌取人, 失之子羽).”
2) 서하지통(西河之痛)
.西(서녘 서), 河(물 하), 之(어조사 지), 痛(아플 통)은 ‘서하(西河)에서의 아픔’이라는 말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있을 때 자식을 잃고, 너무 슬피 운 나머지 소경이 된 옛일에서 온 말이다.
3) 단표누항(簞瓢陋巷)
.단표누항(簞瓢陋巷 – 簞 대광주리 단, 瓢 표주박 표, 陋 좁을 루, 巷 거리 항)은 ‘대광주리와 표주박과 누추한 거리’란 뜻으로, 소박한 시골 생활을 이르는 말. 도시락 밥과 표주박 물을 먹으며 거리를 누빔.안빈낙도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 유래는 공자(孔子)의 언행록(言行錄)이라 할 수 있는 동양의 최고 경전인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이나 ‘맹자(孟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가 말씀하시되 ‘어질도다 안회여! 한 도시락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심으로 좁고 더러운(누추한) 집에 있음을 사람들이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회는 그 속에서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니 어질도다, 회여!’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