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 세가 :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사마천 사기 – 세가의 첫 번째 기록.
주문왕의 아버지이자 자신들의 아우 계력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겨 남방 오랑캐 땅으로 들어간 태백, 중옹 형제가 세운 오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자손이 없던 태백의 뒤를 이은 중옹부터 부차까지의 오나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오(吳)

太伯避歷(태백피력), 태백이 계력을 피해
江蠻是適(강만시적); 강수를 넘어 남만으로 달아났다.
文武攸興(문무유흥), 이어 주나라는 주문왕과 주무왕의 치세에 힘입어 흥기하여
古公王迹(고공왕적). 고공단보가 꿈꾸었던 왕업을 세웠다.
闔廬弑僚(합려시료), 한편 태백의 후예들이 세운 남만의 오나라에서는 합려가 왕료(王僚)를 시해하여 그 군주를 차지하고
賓服荊楚(빈복형초); 초나라를 복종시켰으며
夫差克齊(부차극제),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겨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子胥鴟夷(자서치이); 오자서를 죽여 말가죽 부대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
信嚭親越(신비친월), 부차는 백비(伯嚭)의 간사스러운 말을 믿고 월나라와 친해진 결과
吳國旣滅(오국기멸). 오나라는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嘉伯之讓(가백지양), 태백이 주족의 족장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한 미덕을 기리어
作<吳世家>第一(작<오세가>제일). <오세가> 제일을 지었다.
오태백(吳太伯)과 그의 동생 중옹(仲雍)은 모두 주나라 태왕(太王)의 아들이고 왕 계력(季歷)의 형이다. 삼 형제 중 계력이 제일 어질고 또한 그의 아들 창(昌)이 성덕(聖德)이 있어 태왕은 계력을 자기의 후사로 세워 주족(周族)의 수장 자리가 창에게 잇도록 했다. 그래서 태왕의 뜻을 알게 된 태백과 중옹 두 사람은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그들의 습속에 따라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에 단발을 하여 자기들은 결코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뜻을 보이고 계력을 피했다. 계력이 과연 태왕의 뒤를 이어 주왕의 자리에 오르고 이어서 창에게 전해졌다. 창이 주문왕(周文王)이다. 형만으로 도망간 태백은 스스로 구오(句吳)라 칭했다. 태백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형만 사람들은 천여 호가 넘게 귀의해 와서 그를 오태백(吳太伯)으로 받들었다.
태백이 죽었으나 자식이 없어 그 자리를 동생 중옹이 이어 받아 오중옹(吳仲雍)이 되었다. 중옹이 죽고 그 아들 계간(季簡)이 뒤를 잇고, 다시 계간이 죽자 그 아들 숙달(叔達)이 이었다. 숙달이 죽고 아들 주장(周章)이 이었다. 그 당시 은나라를 멸하고 형만으로 달아난 태백과 중옹의 후예들을 찾고 있었던 주무왕(周武王)은 주장(周章)을 찾게 되었다. 그때 주장은 이미 오나라의 왕 자리에 있었음으로 그 자리에 그냥 두고, 그의 동생 우중(虞仲)을 주나라의 북쪽의 옛 하나라 유지(遺址)인 우(虞) 땅에 봉하여 제후의 반열에 들게 했다. 주장이 죽고 아들 웅수(熊遂)가 그 뒤를 이었다. 웅수가 죽고 아들 가상(柯相)이 그 뒤를 이었다. 가상이 죽고 아들 강구이(强鳩夷)가 이었다. 강구이가 죽고 아들 여교의오(餘橋疑吾)가,. 여교의오가 죽고 아들 가로(柯盧)가, 가로가 죽고 아들 주요(周繇)가 뒤를 이었다. 주요가 죽고 아들 굴우(屈羽)가, 굴우가 죽고 아들 이오(夷吾)가, 이오가 죽고 아들 금처(禽處)가, 금처가 죽고 아들 전(轉)이, 전이 죽고 아들 파고(頗高)가, 파고가 죽고 아들 구비(句卑)가 이었다.
이때 당진의 헌공(獻公)이 순식(荀息)을 시켜 주나라의 북쪽에 있었던 우나라를 멸하고 이어서 괵(虢)나라를 정벌함으로 해서 당진이 대외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해가 기원전 655년의 일이다.
구비가 죽고 아들 거제(去齊)가 그 뒤를 있고 다시 거제가 죽고 아들 수몽(壽夢)이 이었다. 수몽이 군주자리에 오르자 오나라는 그 국세가 크게 신장되었고 왕호를 칭하기 시작했다.
태백이 오나라를 세운 후 5대가 지난 시점에서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그 후손에게 두 개의 나라에 봉했다. 그 하나는 우(虞)나라인데 중원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오나라인데 만이의 땅에 있었다. 12대에 이르자 당진이 중원에 있던 우나라를 멸했다. 중원의 우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2대 만에 만이의 오나라가 흥성하기 시작했다. 태백에서 수몽까지는 모두 합해 19대다.
오왕 수몽 2년 기원전 584년에 초나라의 대부 신공(申公) 무신(巫臣)이 초나라 장수 자반(子反)에게 원한을 품고 당진으로 망명하자 당진은 다시 무신을 오나라에 사절로 보내 오나라 군사들에게 중원 제후국의 선진 문물과 전차전에 대한 전술을 가르쳤다. 이어서 무신은 그 아들 굴호용(屈狐庸)을 오나라에 남겨 행인(行人)의 자격으로 오나라의 객경이 되었다. 오나라는 이때부터 중원의 제후국들과 통할 수 있었다. 이 해에 오나라 가 초나라를 공격했다. 수몽 16년 기원전 570년 초공왕(楚共王)이 오나라에 원정하여 형산(衡山)에 이르렀다.
수몽 25년 기원전 561년 오왕이 수몽이 죽었다. 수몽은 네 아들을 두었다. 장자는 제번(諸樊), 둘째는 여제(餘祭), 셋째는 여매(餘昧), 막내는 계찰(季札)이다. 그 중 계찰이 가장 현능하여 수몽이 그 후사로 세우려고 했으나 계찰은 불가하다고 하며 왕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자인 제번을 세워 계찰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게 함으로써 나라를 맡겼다.
오왕 제번 원년, 기원전 560년, 제번이 그 부왕의 복상기간을 끝내자 오왕의 자리를 계찰에게 넘기려고 했다. 계찰이 사양하며 말했다.
「옛날 조선공(曹宣公)이 죽자 각국의 제후들은 모두가 조나라의 새로운 군주인 조성공(曹成公)이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재위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선공의 또 다른 아들 장(臧)을 세워 조나라 군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장이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달아났음으로 조성공이 계속해서 조나라 군주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군자들이 그에 대해 말하기를 ‘ 능히 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라고 했습니다. 형님은 선왕의 장자로 이 나라의 후계자이십니다. 누가 감히 그 자리를 넘보겠습니까? 왕이 되는 것은 저의 일이 아니니 저는 절의를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오나라 사람들이 한사코 계찰을 왕의 자리에 올리려고 하자, 그는 그 집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농민이 되어 밭을 갈며 살았다. 오나라 사람들이 할 수 없이 그 일을 그만 두었다. 그해 가을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싸움에서 패했다.
제번 4년 기원전 557년 당진국에서는 도공(悼公)이 죽고 평공(平公)이 그 뒤를 이었다.
제번 13년 기원전 548년 제번이 죽을 때 그의 동생 여제(餘祭)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겨, 형제들의 순서대로 왕위가 전해져 반드시 오나라의 국권이 계찰에 이르러 머물도록 만들어 선왕 수몽의 유지를 받들려고 했다. 또한 형제들은 계찰이 왕위를 사양한 높은 인격과 굳은 절개를 칭송하며, 모두가 왕의 자리를 다음 동생에게 양보한다면 점차적으로 국군의 자리를 계찰에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계찰은 연릉(延陵)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에는 연릉계자(延陵季子)로 불리게 되었다.
오왕 여제(餘祭) 3년 기원전 545년, 제나라의 상국이었던 경봉(慶封)이 죄를 짓고 오나라로 도망쳐 들어왔다. 오왕이 주방(朱方)을 경봉에게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하고 다시 그의 딸을 주어 혼인시켰다. 경봉은 이로써 그 부가 제나라에 있을 때보다 더 커졌다.
여제 4년 기원전 544년, 오나라의 수문을 시키던 혼(閽)이 여제(餘祭)를 죽였다. 여매가 그 뒤를 이어 오왕의 자리에 앉았다.
오나라가 계찰을 친선사절로 노나라에 보냈다. 계찰은 노나라 악사들에게 주나라의 음악을 청해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듣더니 말했다.
「아름답도다! 주왕조의 기초가 이미 다져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가 없구나! 그러나 곡 중에는 백성들이 근면하며 애쓰나 원망하는 마음이 없구나!」
다시 <패풍(邶風)>, <용풍(鄘風)>, <위풍(衛風)>를 부르자 말했다.
「아름답고 깊고 그윽하도다! 근심에 차 있으나 곤궁하지 않다. 내가 들으니 위강숙(衛康叔)과 위무공(衛武公)의 덕행이 이와 같다고 하더니 이 노래는 아마도 위나라의 노래가 아닌가?」
악사들이 <왕풍(王風)>을 노래했다.
「아름답다! 그 마음은 비록 근심하나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것은 동쪽으로 옮겨 온 주나라의 노래가 아닌가?」
악사들이 계속해서 <정풍(鄭風)>을 노래했다.
「노래의 성색이 매우 쇠약하니 국가의 정령이 까다로워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겠다. 아마도 이 나라가 제일 먼저 망하지 않겠는가?」
다시 악사들이 <제풍(齊風)>을 노래했다.
「참으로 아릅답구나! 음조가 넓고 웅장하니 깊고 멀구나! 진실로 대국의 기풍이 있구나! 동해에 있는 나라를 나타내니 아마도 강태공의 유풍이 아니겠는가? 국가의 앞날을 감히 뭐라고 예측할 수 없도다!」
<빈풍(豳風)>을 듣고 말했다.
「도량이 넓고 크며 마음을 편하고 거리낌 없이 만들어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으니 이것은 아마도 주공이 동쪽을 정벌할 때의 노래이겠다.」
악사들이 <진풍(秦風)>을 노래했다.
「이것은 중화의 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 중국화할 수 있다면 나라는 날이 갈수록 창대해지겠다. 창대하게 되면 지극한 경지까지 이르게 되어 능히 주왕조처럼 창업을 할 수 있겠다.」
<위풍(魏風)>을 노래했다.
「아름답구나! 가락의 곡조가 넓고 크구나! 또한 너그럽고 평화롭구나! 소박하고 평이하니 이와 같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 군주는 능히 명군이 되겠다.」
<당풍(唐風)>을 노래했다.
「사려하는 바가 깊구나! 이것은 아마도 도당씨(陶唐氏)의 유풍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이 그 생각하는 바가 깊고 앞날을 멀리 내다보겠는가? 아름다운 덕을 갖은 사람의 후손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진풍(陳風)>을 연주하자 계찰이 듣고 말했다.
「나라에 좋은 군주가 없으니 어찌 능히 오래도록 망하지 않겠는가?」
계속된 <회풍(鄶風)> 이하 다른 지방의 노래에 대해서는 더 이상 평론을 하지 않았다.
이어서 악사들이 <소아(小雅)>를 노래했다.
「아름답도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 맺혔구나! 그러나 반역하지 않고 떠나지 않으며, 원망하나 말하지 않으니 그것은 주나라의 덕이 쇠미해졌을 때의 노래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주나라 초기의 유풍들이 남아서일 것이다.」
악사들이 계속해서 <대아(大雅)>를 연주하자 계찰이 말했다.
「관대하며 화목하다! 곡조가 잘 어울려 마음이 편안하다. 완곡하나 또한 강건하니 아마도 문왕의 덕행이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송(頌)을 연주했다.
「노래가 지극한 경지에 달했다. 곧고 힘차나 거만하거나 불손하지 않다.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지나치지 않으며 복잡하지 않다. 박자가 긴밀하나 절박하거나 다급하지 않다. 곡조는 느릿하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변화가 풍부하나 어지럽지 않다. 곡조가 반복되어 싫증이 나지 않고 애달프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즐겁지만 지나치자 않아 방종하지 않다. 그 소리는 마치 성인의 지혜와 같아 아무리 사용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겠고, 소리가 잠시 쉬어가더라고 아주 멈추지 않는다. 오성(五聲)과 팔풍(八風)이 조화를 이루어 어울리면서도 박자에는 절도가 있고 선율에는 법도가 있으니 이 음악들은 모두가 성인들의 덕이 배어 있구나!」
이어서 계찰이 상소(象箾)와 남약(南籥)이라는 무곡(舞曲)을 감상하고 나서 말했다.
「아름답구나! 그러나 어딘가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구나!」
계속해서 대무(大武)를 보고 말했다.
「참으로 아름답도다! 주나라의 번성함은 마치 이와 같았으리라! 」
소호(箾濩)가 계속해서 연주되자 계찰이 그 감상을 말했다.
「그렇게 홍대(弘大)한 덕을 베푼 탕임금과 같은 성인도 여전히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성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겠다.」
계찰은 계속해서 대하(大夏)를 보고 말했다.
「아름답도다! 백성을 위해 그렇게 고생을 했음에도 스스로는 덕을 베푼 바가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우임금이 아니고서 그 누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초소(招箾)를 보고 말했다.
「덕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도다! 참으로 위대하도다! 마치 모든 세상을 덮는 하늘과 같고, 모든 세상을 감싸 안는 땅과 같도다! 비록 지극한 덕이 있다하나 이보다 더한 덕은 없을 것이다! 이제 춤과 음악을 더 볼 필요가 없구나! 설사 다른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내가 어찌 감히 더 이상의 음악을 구할 수 있으리오!」
계찰이 노나라를 떠나 사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나라로 갔다. 안평중(晏平仲)을 만나 권고의 말을 했다.
「그대는 빨리 그대의 봉읍과 관직을 내놓으시오. 봉읍과 관직이 없어야만 그대는 앞으로 다가올 환난에서 몸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오. 제나라의 정권은 장차 귀속되는 데가 따로 있을 것이오. 귀속되기 전까지는 환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오.」
안자(晏子)는 진환자(陳桓子)를 통해 그의 봉읍과 관직을 돌려주어 후에 일어난 란씨와 고씨 사이에 일어난 환란에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계찰이 다시 제나라를 떠나 사자로 정나라에 갔다. 자산(子産)을 보자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이 말했다.
「지금 정나라의 집정(執政)이 사치하고 방종하니 장차 내란이 일어나고 그 결과 정나라의 정권은 그대의 손에 들어갈 것이오. 그대가 정나라의 집정 자리에 오르게 되면, 부디 예에 따라 신중한 마음으로 임해야 하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나라는 망하게 되오.」
계찰이 정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들어가, 거원(蘧瑗), 사구(史狗), 사추(史鰌), 공자형(公子荊), 공숙발(公叔發), 공자조(公子朝) 등을 만나 기뻐하며 말했다.
「위나라에 이렇듯 군자가 많으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이 없겠구나!」
계찰이 다시 위나라를 떠나 당진국(唐晉國)으로 가던 중에 숙읍(宿邑)에 이르러 역사에 머무는데 종으로 연주하는 음악소리를 듣고 말했다.
「참으로 괴이하도다! 내가 듣기에 재주가 있으나 덕이 없으면 그 화가 반드시 그 몸에 미친다고 했다. 이곳의 대부 손문자(孫文子)는 군주에게 죄를 얻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도 부족한 처지일텐데 오히려 음악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손문자가 이렇듯 근신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마치 제비둥지가 언제 뜯길지 모르는 막사 위에 있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군주의 시신이 담긴 관이 아직 안장도 되지 않았는데 어찌 음악을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계찰은 말을 마치고 곧바로 그곳을 떠났다. 손문자가 그 말을 듣고 죽을 때까지 금(琴)과 슬(瑟)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계찰이 당진국에 들러 조문자(趙文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을 만나자 말했다.
「당진국의 정권은 아마도 당신들 세 가문에 돌아갈 것이오.」
이어서 계찰이 당진국을 떠나려고 하면서 숙향(叔向)을 만나 말했다.
「그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고 행하시오. 당진국의 국군은 사치하고 방종하나 좋은 신하들이 밑에 많고 또한 대부들은 부유하니 장차 나라의 국권은 한(韓), 조(趙), 위(魏) 삼가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오. 당신은 사람됨이 강직하니 반드시 사려 깊게 행동하여 그 화를 면하시오.」
계찰이 중원의 제후국으로 사신의 임무를 띠고 북쪽으로 출발할 때 맨 처음 서국(徐國)의 군주를 만났다. 서국의 군주가 계찰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표현을 하지 못했다. 계찰이 마음속으로 서군의 뜻을 알았으나 중원의 제후국을 들려 사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 검을 서군에게 주지 못했었다. 다시 귀국길에 올라 서국을 지나가게 되었으나 그 때는 서군이 이미 죽고 난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군(徐君)의 무덤을 찾아가 허리에 찬 보검을 풀어 무덤 주위의 나무 가지 위에 걸어 놓고 오나라로의 귀국 길에 올랐다. 계찰의 종자가 말했다.
「서군이 이미 죽었는데 그 보검을 누구에게 주신 것입니까?」
계찰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이미 보검을 서군에게 주기로 마음속으로 허락했는데 지금 비록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느냐?」
오왕 여매(餘昧) 3년 기원전 541년 초공자 위(圍)가 그의 왕 겹오(郟敖)를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여매 4년 기원전 540년 초영왕이 제후들을 소집한 다음 그 군사들과 함께 오나라의 주방(朱方)을 쳐들어와 제나라에서 망명해와 그곳의 수장을 하고 있던 경봉을 잡아가 죽였다. 오나라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세 읍을 빼앗았다.
여매 5년 기원전 539년 초나라가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여 우루(雩婁)에 이르렀다.
여매 6년 기원전 538년 초나라가 다시 쳐들어와 건계(乾谿)에 이르러 주둔하다가 오군의 반격을 받아 패주했다.
여매 15년 기원전 529년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그 군주인 영왕(靈王)을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여매 17년 기원전 527년 여매가 죽자 오나라의 국인들은 오왕의 자리에 여매의 동생 계찰을 앉히려고 했으나 계찰이 사양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래자 오나라 국인들이 말했다.
「선왕이신 수몽께서 유언을 하시기를 형이 죽으면 동생에게 물려주어 오왕의 자리가 반드시 계찰에 넘어가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계자(季子)가 지금 도망가고 없으니 형제간의 상속은 여제가 마지막으로 행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여제가 죽으니 마땅히 오왕의 자리는 그의 아들이 이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여매의 아들 요(僚)가 오왕의 자라에 앉았다.
오왕 요(僚) 2년 기원전 525년 공자광(公子光)이 초나라를 공격했으나 싸움에서 패하고 왕의 전용선인 여황(餘皇)이라는 배를 빼앗겼다. 공자광이 그 죄를 추궁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초군의 진영은 기습하여 여황을 다시 빼앗아 돌아왔다.
오왕 요 5년 기원전 522년 초나라의 망명객 오자서(伍子胥)가 오나라로 들어왔다. 공자광이 오자서를 맞이해서 손님으로 대했다. 공자광은 원래 오왕 제번(諸樊)의 아들이었다. 그는 평소에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의 부친에게는 형제가 네 사람이었는데 형제가 차례로 왕위를 이어나가 마지막으로 계자의 차례가 되도록 했으나 계자가 왕의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광의 부친께서 먼저 오왕의 자리에 앉았으나 마지막으로 계자가 앉지 않았으니 마땅히 왕의 자리는 나에게 돌아와야 되지 않겠는가?」
공자광은 평소에 아무도 몰래 어진 선비와 무사들을 문객으로 받아들여 언젠가는 왕료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오왕 요(僚) 8년 기원전 519년, 공자광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초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초나라 거소(居巢) 땅에 머물고 있던 태자건(太子建)의 모후(母后)를 데리고 개선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초나라의 위성국 진(陳)과 채(蔡) 두 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쳤다.
오왕 요 9년 기원전 518년, 공자광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거소(居巢)와 종리(鍾離) 두 고을을 함락시켰다. 처음에 초나라의 국경마을 비량(卑梁)의 처녀들과 오나라의 국경마을 처녀들이 중간에 있던 뽕나무를 가지고 다투곤 했었다. 처녀들이 속한 두 마을의 종족들이 노하여 서로를 공격했다. 두 고을의 수장(守長)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서로 공격을 감행했다. 비량의 수장이 오나라의 국경마을을 쳐들어가 전멸시키자 오왕이 대노하여 대군을 일으켜 출정하여 거소와 종리를 함락시키고 개선했다.
오자서가 처음에 오나라로 도망쳐와 오왕 요에게 초나라를 정벌하는 데 이로운 점을 유세했다. 공자광이 듣고 오왕에게 말했다.
「오자서가 초나라를 정벌하자고 한 목적은 초왕에게 죽임을 당한 그 부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초나라를 정벌하는데 무슨 이득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자서는 이에 공자광이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어서 용사 전제(專諸)를 구해 공자광에게 천거했다. 공자광이 기뻐하며 오자서를 여전히 손님으로 대하며 공경했다. 오자서는 공자광의 집에서 나와 들판으로 나가 농사를 지으며 전제의 일이 성사되기를 기다렸다.
오왕 요 12년 기원전 515년 겨울, 초평왕(楚平王)이 죽었다. 13년 봄 오나라가 초나라에 국상이 난 틈을 타서 쳐들어가려고 했다. 공자 개여(盖餘)와 촉용(燭庸)이 대군을 이끌로 원정을 나가 초나라의 육(六)과 잠(潛) 두 고을을 포위했다. 이어서 계찰을 당진에 사자로 보내 중원 제후국들의 정세를 살펴보게 했다. 그러나 초나라가 군사를 내어 오나라 군사들의 퇴로를 끊으니 오나라 군사들은 본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에 공자광이 말했다.
「이런 좋은 기회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광이 용사 전제에게 말했다.
「이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겠는가? 나야말로 오나라 왕위의 진정한 계승자다. 나는 마땅히 오왕의 자리에 앉았어야 했던 사람이라, 이 번 기회에 오왕의 자리에 올라야겠다. 계자가 비록 돌아온다 할지라도 결코 나를 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제가 듣고 말했다.
「제가 왕료를 죽이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모친은 늙고 아들은 나이가 어립니다. 하지만 오왕의 두 아들이 군사를 모두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나라 밖에 있으면서 그 퇴로가 끊겨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오왕이 의지하는 두 공자와 군사들은 밖에서 초나라에 의해 곤궁한 처지에 빠졌고, 안에서는 정직하고 강건한 신하들이 없으니 오왕은 절대로 우리들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몸은 곧 그대의 몸이라! 그대의 모친은 나의 모친이고 그대의 아들은 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윽고 그 해 4월 병자(丙子) 일에 공자광은 자기 집의 지하실에 갑사를 매복시켜 놓고 음식을 대접한다고 왕료(王僚)를 초청했다. 왕료가 군사들을 보내 궁궐에서 공자광의 집에 이르는 도로에는 모두 군사들로 도열시키고 이윽고 공자광의 집에 당도하자 대문, 계단, 내실로 통하는 문, 그리고 연회석의 의자까지 모두 왕료의 측근과 친위대로 가득 채우고 그들의 손에는 짧은 칼을 들고 호위하게 했다. 공자광은 거짓으로 발을 다쳤다고 왕료에게 고하고 자기 집의 지하실로 내려가 몸을 피하면서 전제를 시켜 뱃속에 비수를 넣은 구운 생선을 바치도록 했다. 전제는 생선의 뱃속에서 비수를 꺼내어 왕료를 찌르자 오왕의 좌우에 시립해 있던 호위병들이 짧은 칼로 전제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왕료의 숨이 넘어간 뒤였다. 공자광이 마침내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오왕 합려(闔閭)다. 합려는 전제의 어린 아들을 오나라의 대신으로 임명했다.
계자가 사자의 임무를 마치고 오나라에 돌아와 말했다.
「선군의 제사나마 끊어지지 않고 백성들에게 그 군주가 계속 이어지며, 사직이 봉양을 받게만 된다면 그가 누구든 바로 나의 군주다. 내가 누구를 감히 원망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은 사람을 애통해 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기니 그것은 바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이다. 란을 일으킨 사람은 내가 아니니, 누가 왕이 되던 나를 따를 것이며 그것은 또한 선인들의 도가 아니던가?」
계찰이 왕료의 무덤으로 가서 당진에 사신으로 갔다온 일을 복명하고 이어서 곡을 올린 다음에 다시 조정의 자기 자리에 돌아와 새로운 왕의 명을 기다렸다. 초나라 군사들에게 퇴로가 끊겨 갇혀있던 왕료의 두 아들 개여와 촉용은 공자광이 왕료를 시해하고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그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초나라에 항복했다. 초나라는 두 사람을 서(舒) 땅에 봉했다.
오왕 합려(闔閭) 원년 514년 오자서를 불러 행인(行人)으로 삼아 오나라의 국사를 의논했다. 초나라가 백극완(伯郤宛)을 살해하자 그 아들 백비가 오나라로 망명해 왔다. 오나라는 백비를 대부로 삼았다.
오왕 합려 3년 기원전 512년 합려와 오자서, 백비 등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 서(舒)를 함락시키고 초나라에 항복했던 개여와 촉용을 붙잡아 죽였다. 합려가 내친 김에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까지 진격하려고 했으나 장군 손무가 간하며 말렸다.
「백성들이 잦은 원정으로 피로해 있어 영도로 진격할 수 없습니다. 좀 더 기다려야합니다.」
오왕 합려 4년 기원전 511년, 초나라를 공격하여 육(六)과 잠(潛) 두 고을을 빼앗았다.
오왕 합려 5년 기원전 510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그 군사를 파했다.
오왕 합려 6년 기원전 509년, 초나라가 자상(子常) 낭와(囊瓦)를 시켜 오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오나라가 예장(豫章)의 땅에서 초군을 크게 물리치고 거소(居巢)를 점령한 다음 돌아왔다.
오왕 합려 9년 기원전 506년, 합려가 오자서와 손무에게 말했다.
「예전에 두 장군이 말하기를 초나라 영도로 진격하기에는 시기상조라 했는데 지금은 어떠하오?」
두 사람이 합려에게 말했다.
「초나라의 영윤 자낭은 그의 탐욕으로 인하여 당(唐)과 채(蔡) 두 군주의 원한을 사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초나라를 크게 정벌하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당과 채 두 나라를 얻으셔야 합니다.」
합려가 두 사람의 의견을 쫓아 나라의 군사를 모두 일으켜 당과 채 두 제후와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여 한수(漢水) 강안에 이르렀다. 초나라 역시 군사를 보내어 한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쳐 오군을 막게 했다.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출전을 청했으나 합려가 허락하지 않았다. 부개가 말했다.
「왕께서는 이미 군사들을 그 신하인 나에게 맡기셨고, 또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 있는데, 구태여 내가 왕의 명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이어서 부개는 휘하의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초나라 진영으로 돌격을 감행하자 초군은 대패하고 도망쳤다. 오왕이 전군을 휘몰아 초군의 뒤를 추격했다. 이윽고 영도로 진격한 오군은 초군과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모두 이겼다. 초소왕(楚昭王)은 영도를 빠져나가 운(鄖) 땅으로 도망쳤다. 운공(鄖公)의 동생이 초왕을 죽이려고 하자 소왕은 운공과 함께 수나라로 달아났다. 마침내 오나라 군사들이 영도로 입성했다. 자서와 백비는 평왕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채찍으로 때려 그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
오왕 합려 10년, 기원전 505년 봄, 오왕이 초나라의 영도에 머물자 오나라의 도성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들은 월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는 별도의 군사를 보내 월나라의 군사들을 막게 했다. 오나라에 도성을 빼앗긴 초나라는 섬진(陝秦)에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병을 청했다. 섬진이 초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 군사들을 공격해서 패주시켰다. 섬진과 월나라가 동시에 오나라 군사들을 공격하고, 오왕은 영도에 머물며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본 오왕의 동생 부개는 자기가 오나라에 돌아가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 합려가 듣고 군사를 수습하여 오나라로 회군하여 부개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합려와의 싸움에서 진 부개는 초나라로 도망쳤다. 초소왕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 해 9월에 영도로 입성하고 이어서 부개를 당계(堂谿)에 봉했다. 부개는 그 성씨를 당계씨로 바꾸었다.
오왕 합려 11년 기원전 504년, 오왕의 명을 받은 태자 부차(夫差)는 초나라를 공격하게 반읍(番邑)을 점령했다. 초왕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영성을 버리고 약(鄀)으로 천도했다.
오왕 합려 15년 기원전 505년 공자가 노나라 재상의 직무를 대행했다.
오왕 합려 19년 기원전 496년 여름,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왕 구천(句踐)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취리(檇里)에서 맞이해서 싸웠다. 월나라가 결사대를 오나라 진영 앞으로 보냈다. 그 결사대는 세 열로 늘어서서 오나라 병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 다음 자기 목을 찔러 죽었다. 그때까지 그와 같은 기이한 장면을 보지 못한 오나라 군사들은 정신이 혼미해져 월나라 군사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그 틈을 탄 월군이 오군에 대해 공세를 취하여 고소(姑蘇)에서 오병을 대파하고 오왕 합려의 발가락을 잘랐다. 오군은 싸움에 패하여 7리를 뒤로 후퇴했다. 마침내 발가락 상처가 악화되어 죽게 된 합려가 태자 부차를 불러 오왕으로 세우고 당부의 말을 했다.
「너는 너의 부친을 살해한 구천을 절대 잊지 말아라!」
부차가 대답했다.
「어찌 제가 감히 부친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3년이 지나자 부차는 월나라에 원수를 갚았다.
오왕 부차 원년 기원전 495년, 대부 백비를 태재로 삼았다. 부차는 군사들에게 활쏘기를 훈련시키며 항상 월나라에 원수를 갚을 생각만 했다.
오왕 부차 2년 기원전 494년, 부차는 나라 안의 정예병들을 모두 이끌고 월나라 군사들과 부초(夫椒)에서 싸워 크게 이겨 고소에서의 패배한 원수를 갚았다. 월왕 구천은 중무한 갑병 5천 명을 이끌고 회계산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리다가 대부 문종(文種)을 태재 백비에게 사자로 보내 강화를 청하면서 월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오나라를 섬기겠다고 했다. 오왕이 월왕이 청한 강화를 허락하려고 하자 오자서가 반대하며 말했다.
「옛날 유과씨(有過氏)가 짐관(斟灌)의 군주를 죽이고 다시 짐심(斟尋)을 공격하여 하후제(夏后帝) 상(相)을 살해했습니다. 제상(帝相)의 왕비 후민(后緡)은 그때 마침 애을 배고 있었는데, 유잉국(有仍國)으로 달아나서 소강(小康)을 낳았습니다. 소강이 장성하매 유잉국은 그를 목정(牧正)에 임명했습니다. 유과씨(有過氏)가 다시 소강을 살해하려고 하자 그는 다시 유우국(有虞國)으로 달아났습니다. 유우국 군주는 하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해서 두 딸을 소강에게 시집보내고 그에게 윤읍(綸邑)을 하사하여 사방 10리의 전답과 500명의 민호를 거느리게 했습니다. 이것을 기반으로 삼아 소강은 하나라 백성들을 다시 규합하고 그 관리제도를 정돈했습니다. 이어서 소강은 사람을 유과씨(有過氏) 내부로 침투시켜 마침내 유과씨를 멸망시키고 하우(夏禹)의 업적을 부흥시켰습니다.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하나라의 선조도 함께 모심으로써 원래 하나라가 잃어 버렸던 그 전장(典章) 및 제도(制度)와 강역을 회복했습니다. 오늘 오나라는 유과씨처럼 강하지 못한 반면 구천은 소강보다 세력이 더욱 큽니다. 현재 이 기회를 이용하여 월나라의 역량을 철저하게 소멸시키지 않고 오히려 관대하게 용서한다면 그들은 후에 우리 오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구천이란 위인은 능히 고난을 잘 견디는 성품을 갖고 있으니 지금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오왕 부차가 자서의 간함을 듣지 않고 태재 백비의 말대로 결국은 싸움을 멈추고 월나라와 강화를 맺고 군사를 물리쳐 오나라로 돌아갔다.
오왕 부차 7년 기원전 489년, 부차는 제나라에서 경공(景公)이 죽자 그 대신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고 이어서 어린아이가 새로 군주로 서서 아무 세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오자서가 다시 부차에게 간했다.
「월왕 구천은 식사를 할 때는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먹지 않으며, 옷을 입을 때는 두 가지 색 이상의 채색 옷을 입지 않으며, 백성들의 집에 상을 당하면 일일이 다 방문하여 조상을 가고 병자가 있는 집은 문안을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구천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서 쓰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천을 죽이지 않는다면 필시 오나라의 큰 우환 거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오나라의 뱃속의 큰 우환은 월나라이온데 대왕께서는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나라의 온 힘을 기우려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그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북벌을 감행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오군은 애릉(艾陵)에서 제군을 대파했다. 오왕이 군사를 이끌고 증읍(繒邑)에 이르러 노소공을 불러 자기를 접대하기를 백뢰(百牢)의 예로 행하라고 강요했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을 백비에게 사자로 보내 주례(周禮)를 들어 오왕의 요구가 잘못 되었음을 말하고 오왕을 설득하도록 권하자 오왕은 비로소 자기의 요구를 철회했다. 오왕은 그 곳에 잠시 머물며 제와 노 두 나라의 남쪽 영토를 빼앗아 오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오왕 부차 9년 기원전 487년 오나라가 추(鄒)나라를 위해 노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오군이 노나라 국경에 당도하여 노나라와 맹약을 맺고 물러갔다.
오왕 부차 10년 기원전 486년, 오군이 오나라로 귀로에 올랐다가 제나라를 정벌하고 개선했다.
오왕 부차 11년 기원전 485년 다시 북쪽으로 출정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월왕 구천이 그 신하들을 대거 대동하고 오나라에 들려 오왕 부차에게 조현을 드리고 많은 재물을 바치자 부차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오사서가 매우 두려워하며 오왕에게 말했다.
「그것은 오나라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월나라는 뱃속의 근심이나 대왕은 단지 자갈밭에 불과하여 아무 소용에 닿지 않은 제나라만을 얻기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한 <반경지고(盤庚之誥)>에도 이르기를 위험한 사람을 살려두어 화근을 남기면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상나라는 반경지고의 원칙을 따랐기 때문에 중흥할 수 있었습니다. 」
오왕은 오자서의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제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자서는 그의 아들을 데리고 제나라에 가서 포씨(鮑氏)에게 맡겨 살게 한 다음 오나라에 돌아와 부차에게 복명했다. 오왕이 듣고 대노하여 오자서에게 촉루검(屬鏤劍)을 내려 스스로 자결을 하게 만들었다. 오자서가 죽기전에 말했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 앞에 가래나무를 심어 그것이 자라게 되면 오왕을 위한 관을 짜도록 해라! 그리고 나의 시신에서 두 눈을 떼어내어 오성(吳城)의 동문 위에 걸어라, 내가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리라!」
제나라의 대부 포씨(鮑氏)가 그 군주 도공(悼公)을 시해했다. 오왕이 듣고 군문 밖에서 3일 동안 곡을 했다. 이어서 바다로 나가 제나라를 공격했으나 제나라의 반격을 받고 싸움에서 패했다. 오왕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돌아왔다.
오왕 부차 13년 오왕이 노애공을 탁고(橐皐)로 불러 회맹하고, 다시 위출공을 운(鄖) 땅으로 불러 회견했다.
오왕 부차 14년 오왕은 북쪽으로 나아가 제후들을 황지(黃池)에 소집하여 주실을 등에 업고 패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6월 병자 (丙子) 날에 월왕 구천은 오왕이 원정을 나간 틈을 이용하여 오성(吳城)을 공격하기 시작해서 9일만인 을유(乙酉) 날에 오나라의 5천 군사들과 월군의 선봉대가 전투를 벌렸다. 이어서 다음날인 병술(丙戌) 날에 오나라의 태자우(太子友)를 포로로 잡았다. 다시 다음날인 정해(丁亥) 날에 오성에 입성했다. 오나라 사람들이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패전한 일을 부차에게 고했으나 그는 그 사실이 제후들 사이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군사들 중 그 사실을 누설하자 오왕이 노하여 장막 안에서 7명의 군사들을 살해했다. 신축일(辛丑日)에 오왕과 진정공(晉定公)이 맹주의 자리를 놓고 다퉜다. 진정공이 말했다.
「희성 제후국들 중 나만이 패주가 될 수 있다.」
진나라의 대부 조앙(趙鞅)이 화를 내며 오왕의 군대를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비로소 오왕이 양보하여 진정공이 맹주가 될 수 있었다. 오왕은 맹약을 맺고 진정공과 헤어져 귀국하던 길에 송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태재 백비가 말했다.
「싸움에 이길 수는 있으나 그것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오왕이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는 망하고 태자는 죽어 성은 텅 비어 있어 오왕은 성밖에서 오래 머물러야 했다. 병사들은 모두 지쳐있어 많은 예물을 월나라에 바쳐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오왕 부차 15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 군주 제간공(齊簡公)을 시해했다.
오왕 부차 18년 기원전 478년 국세가 더욱 강성해진 월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여 입택(笠澤)에서 오군을 대파했다. 이 해에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하고 그 군현으로 삼았다.
오왕 부차 20년 기원전 476년, 월왕 구천이 다시 오나라를 공격했다.
21년 월군이 오성을 포위했다.
23년 11월 정묘일(丁卯日)에 월왕 구천은 부차를 동해의 용동(甬東)으로 옮겨 100호의 민가를 주어 살게 해주려고 했다. 오왕이 거절하며 말했다.
「나는 이미 늙어 대왕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오자서의 간언을 쓰지 않아 스스로 이 지경에 처하게 된 처지를 후회할 뿐입니다.」
말을 마친 부차는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월왕은 오나라를 멸하고 태재 백비에게 그 군주에게 불충한 죄를 물어 죽이고 월나라로 돌아갔다.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태백은 참으로 지고의 덕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천하를 세 번이나 양보하여 백성들은 그를 어떻게 칭송해야 할 지 알 바를 몰랐다.」라고 했다. 내가 고문으로 된 <춘추(春秋)>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중원의 우(虞)나라와 형만(荊蠻)의 구오(句吳)는 형제의 나라인줄 알게 되었다. 연릉계자(延陵季子)의 어질고 의를 숭상하는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 조그만 것만 보아도 곧 사물의 맑고 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호라! 어찌 그가 견문이 넓은 박물군자(博物君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