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 본기
5. 진본기(秦本紀)
사마천 사기-본기의 다섯 번째 기록.
진본기(秦本紀)는 선조인 전욱부터 이어지는 가계 및 1대 양공에서 30대 장양왕까지의 진의 역사를 기록. 진시황 이후는 ‘진시황본기’로 따로 편찬했다.
○ 진본기(秦本紀)

섬진(陝秦)의 선조는 제(帝) 전욱(顓頊)의 후예로써 여수(女修)라 했다. 여수가 베를 짤 때 검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여수가 그 알을 받아먹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대업이 소전(少典)의 딸 여화(女華)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여화가 아들 대비(大費)를 낳았다. 대비는 우(禹)가 치수공사를 할 때 곁에서 도왔다. 우가 치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순(舜)임금이 현규(玄圭)를 하사하였다. 우가 현규를 받으면서 순임금에게 고했다.
「저 혼자서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비가 곁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순임금이 듣고 말했다.
「아! 그대 비(費)여 우(禹)를 도와 공을 세웠구나! 내가 너에게 조유(皂游)를 내리노라. 너의 후손들은 장차 크게 번성하리라!」
순임금이 요성(姚姓)의 옥녀(玉女)를 대비에게 주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 조유(皂游)를 하사 받은 대비(大費)는 순임금 곁에 있으면서 날짐승과 들짐승들을 조련하며 도왔다. 많은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대비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가 백예(伯翳)다. 순임금이 백예에게 영씨(嬴氏) 성을 하사했다.
대비가 아들 둘을 낳았다. 장자는 대렴(大廉)이라 했는데 조속씨(鳥俗氏)의 선조가 되었으며 차자는 약목(若木)으로써 비씨(費氏)의 선조가 되었다. 약목의 현손 중에 비창(費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자손들 중 일부는 중국(中國)에 살았고 일부는 이적(夷狄)의 땅에 살았다. 하조(夏朝)의 걸왕(桀王) 때 비창은 하나라를 떠나 상나라에 귀의하여 탕(湯)임금을 위해 수레를 몰고 출전하여 명조(鳴條)의 땅에서 걸왕과 싸워 이겼다. 또한 맹희(孟戱)와 중연(中衍)은 대렴의 현손이다. 그들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사람의 말을 했다. 상나라의 임금 태무(太戊)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말을 몰고 달리게 하고 점을 쳐보게 하였다. 점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들에게 임금의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를 시키고 여인을 구해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상나라의 태무 임금 이후로 중연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공을 세우고 은(殷)나라를 도왔다. 영씨(嬴氏)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스스로 빛나게 만들어 마침내 제후의 대열에 설 수 있었다.
중연의 현손 중에 중휼(中潏)이라고 있었다. 그들은 서융(西戎)의 땅에 살면서 서수(西垂)의 땅을 지켰다. 중휼이 비렴(非廉)을 낳고 비렴은 오래(惡來)를 낳았다. 오래는 힘이 장사였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였다. 부자가 재능과 용력을 갖추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섬겼다.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오래를 같이 잡아서 죽였다. 그때 비렴은 주왕을 위하여 북방에 사자로 나가 있었다. 비렴이 북방에서 임무를 행하고 돌아왔으나 주왕이 이미 죽어 보고할 사람이 없자 곽태산(霍太山)에 제단을 쌓고 자기가 다녀온 일을 고하였다. 그때 비렴은 석관(石棺)을 하나 얻었다. 그 석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상제께서는 처보(處父-비렴의 자)로 하여금 은나라가 입은 재난을 피하게 하시고 석관을 내려 그 종족을 번성하게 하려고 함이라!』
비렴이 죽자 그를 곽태산에 장사 지냈다. 비렴의 막내아들에 계승(季勝)이라고 있었다. 계승이 맹증(孟增)을 낳았다. 맹증은 주성왕(周成王)의 총애를 받았다. 이가 택고랑(宅皐狼)이다. 고랑(皐狼)이 형보(衡父)를 낳고 형보(衡父)는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수레를 잘 몰아 주목왕(周穆王)의 총애를 받았다. 목왕은 이름이 적기(赤驥), 도려(盜驪), 화류(驊騮), 록이(騄耳)등 여덟 마리의 명마를 얻어 사마(駟馬)로 삼아 서쪽으로 순수(巡狩)를 나가 그 즐거움에 돌아올 줄 몰랐다. 서(徐)나라의 언왕(偃王)이 란을 일으키자 조보(造父)가 목왕을 위해 수레를 번개 같이 몰아 삽시간에 주나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주목왕은 하루에 천리를 달려 주나라에 돌아와 서(徐)나라의 란을 진압했다. 목왕이 조보를 조성(趙城)에 봉했다. 비렴(非廉)이 계승(季勝)을 낳은 이후로5세인 조보(造父) 때에 이르러 조성(趙城)에 모여서 살게 되었으며 후에 진문공(晉文公)을 따라 유랑하다가 당진(唐晉)의 대부가 된 조쇠(趙衰)가 그의 후손이며 다시 조쇠의 자손들은 당진을 삼분한 조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오래혁(惡來革)은 비렴의 아들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오래혁(惡來革)은 여방(女防)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여방은 방고(旁皐)를 낳고 방고(旁皐)는 태궤(太几)를 낳고 태궤는 대락(大駱)을 낳았다. 대락은 다시 비자(非子)를 낳았다. 이들은 조보가 주왕의 총애를 받아 조성에 봉해 졌기 때문에 모두가 조성(趙城)에서 살게 되었고 성씨를 조(趙)로 삼았다.
비자가 견구(犬丘)에 살면서 말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말을 잘 길렀다. 견구에 살던 사람들이 주효왕(周孝王)에게 비자(非子)에 대한 말을 전하자 효왕이 불러 그에게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의 땅에서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말은 크게 번식하였다. 효왕이 비자를 대락(大駱)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였다. 대락의 부인이 된 신후의 딸이 아들 성(成)을 낳아 적자로 삼았다. 성이 대락(大駱)의 뒤를 이었다. 신후가 효왕에게 말했다.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여산(驪山)에서 살 때 그 딸을 융주(戎主) 서헌(胥軒)의 부인으로 보내 중휼(中潏)을 낳았습니다. 이로써 융족들과 친하게 되어 주왕실에 귀의하게 되고 서수(西垂)를 지킬 수 있어 그곳은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우리가 다시 대락에게 딸을 주어 적자 성(成)을 낳았습니다. 신(申)과 락(駱)의 두 번에 걸친 중혼(重婚)으로 되어 서융은 모두 복종하게 되어 왕께서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효왕이 대답했다.
「옛날 백예(柏翳)가 순임금을 위해 가축을 길러 번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순임금께서 백예에게 토지를 주어 제후로 봉하고 영(嬴)이란 성을 내렸다. 오늘 그 후손이 다시 짐(朕)을 위하여 말을 길러 번식시켜공을 세웠기 때문 짐이 땅을 나누어 부용(附庸)에 봉하노라!」
효왕은 비자(非子)를 진읍(秦邑)의 부용에 봉한 후에 영씨(嬴氏)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진영(秦嬴)이라고 불렀다. 또한 신후의 딸도 폐하지 않고 적자인 성으로 하여금 대락의 뒤를 잇게 하여 서융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였다.
진영(秦嬴)이 진후(秦侯)를 낳았다. 진후가 재위 10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백(公伯)이 뒤를 이었다. 공백이 아들 진중(秦仲)을 낳고 3년 만에 죽었다. 진중3년에 주려왕(周厲王)이 무도하여 제후들 중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서융이 주나라에 반기를 들고 쳐들어와 견구(犬丘)에 살던 대락의 후손들을 모두 전멸시켰다. 주선왕(周宣王)이 즉위하자 즉시 진중을 주나라의 대부로 삼아 서융을 정벌하게 하였다. 서융이 쳐들어와 진중을 죽였다. 진중은 공백의 뒤를 이어 23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서융의 반격을 받고 싸움 중에 죽은 것이다. 진중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장자는 장공(庄公)이다. 주선왕이 장공과 그 형제들에게 군사 7천 명을 주어 서융을 정벌하도록 명했다. 장공과 형제들이 서융으로 출정하여 융족들을 크게 물리쳤다. 그래서 다시 선왕은 진중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선조들이 살았던 견구와 대락(大駱)의 땅을 주고 서수(西垂)의 대부로 삼았다.
장공이 서견구(西犬丘)에 살면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의 이름은 세보(世父)라 했다. 세보가 말했다.
「융족이 우리의 조부이신 진중님을 죽였다. 내가 융왕을 죽여 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한 다면 나는 결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군사를 이끌고 융족을 공격하러 떠나면서 그의 장자 자리를 동생인 양공(襄公)에게 양보하였다. 양공이 태자가 되었다. 장공이 선지 44년만에 죽자 태자 양공이 뒤를 이었다.
양공 원년 기원전 777년 그의 여동생인 목영(穆嬴)을 풍읍(豊邑)에 살던 융족의 왕에게 시집보냈다.
양공 2년 기원전 776년 융족이 쳐들어와 견구를 포위하였다. 세보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이해서 싸웠으나 오히려 융족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세보는 융족에게서 풀려나 돌아왔다.
양공 7년 기원전 771년 봄에 주유왕(周幽王)이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소생인 백복(伯服)을 대신 세웠다. 또한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기만하자 제후들은 유왕에게 등을 돌렸다. 서융의 일족인 견융과 신후(申侯)가 주나라를 침범하여 유왕을 여산(驪山) 밑에서 죽였다. 진양공이 주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끌고 가서 힘껏 싸워 주왕실에 공을 세웠다. 주나라가 견융의 난을 피해 그 도읍을 락읍(駱邑)으로 옮겼다. 진양공은 주평왕(周平王)이 락읍으로 천도하는데 군사를 동원하여 호위하였다. 평왕이 그 공에 보답하기 위해 진양공을 제후에 봉하고 기산(岐山)의 서쪽 지역의 땅을 모두 진나라에 주면서 말했다.
「융족이 무도하여 우리에게서 기풍(岐豊)의 땅 을 모두 빼앗아 갔다. 섬진(陝秦)이 능히 융족을 물리쳐 공을 세운다면 그 땅은 모두 섬진의 소유가 될 것이다. 」
평왕이 맹세를 행하고 진양공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렸다. 진나라는 양공 때에 이르러 비로소 제후국이 되어 주변의 제후국들에게 사절을 보내고 빙향(聘享)의 예를 행할 수 있었다. 이어서 유구(騮驅)와 황소, 숫양을 각각 3 마리씩을 희생으로 잡아 서치(西畤)의 사당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양공 12년 기원전 766년 서융을 정벌하여 기산(岐山)에 이르러 그곳에서 싸움 중에 죽었다. 아들 문공(文公)이 뒤를 이었다.
진문공(秦文公) 원년 기원전 765년, 서수궁(西垂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공 3년 기원전 763년, 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다음 해인 문공4년에 견수(汧水)와 위수(渭水)가 합류하는 곳에 당도하여 말했다.
「옛날 주나라가 이곳을 우리의 선조인 진영(秦嬴)에게 봉읍으로 하사했고 후에 결국은 우리는 이곳에서 제후가 되었다.」
진문공이 거북점을 치게 하여 그곳에 머물어 살게 될 경우 길흉을 점쳐보게 했다. 점괘가 길하게 나와 그 곳에 성읍(城邑)을 축조하였다.
문공 10년 기원전 756년, 부치(鄜畤)에 제단을 쌓고 소, 양 및 돼지 등을 희생으로 사용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문공 13년 기원전 753년, 처음으로 사관(史官)을 두어 나라의 큰일을 기록하게 하고 백성들의 대부분이 교화(敎化)를 받아들였다.
문공 16년 기원전 750년, 문공이 군사를 동원하여 융을 정벌했다. 융이 패하여 달아났다. 그래서 문공은 주나라의 유민을 수습하여 섬진에 복속 시키고 그 영토는 기산에 이르게 되었다. 문공이 기산 이동의 땅을 주 천자에게 바쳤다.
문공 19년 기원전 747년, 문공이 진보(陳寶)를 얻었다.
문공 20년 기원전 746년, 처음으로 법을 만들어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정했다.
문공 27년 기원전 739년, 종남산(終南山)의 큰 가래나무를 배어 궁전을 지을 때 기둥으로 삼았으나 가래나무에서 청우(靑牛)가 튀어 나와 풍수(豊水)로 뛰어 들자 가래나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노특사(怒特祠)를 지었다.
문공 48년 기원전 718년, 문공의 태자가 죽어 시호(諡號)를 정공(靜公)이라 했다. 정공의 장자를 태자로 세우니 문공의 손자였다. 문공이 재위 50년 만에 죽어서 서산(西山)에 장사지내고 정공의 아들이 뒤를 이었다. 이가 영공(寧公)이다.
영공 2년 기원전 714년, 영공이 평양(平陽)으로 천도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탕사(蕩社)를 정벌했다.
영공 3년 기원전 713년, 박(亳)과 싸워 이기고 박왕(亳王)은 융족이 사는 땅으로 도망쳤다. 이어서 탕사를 멸하고 진나라에 복속시켰다.
영공 4년 기원전 712년, 노(魯)나라 공자휘(公子翬)가 노은공(魯隱公)을 시해하고 노환공(魯桓公)을 세웠다.
영공 12년 기원전 704년, 탕씨(蕩氏)를 정벌하여 그 땅을 취했다. 영공은 태어난 지 10년만에 보위에 올라서 다시 재위 12년만에 죽어 역시 서산(西山)에 안장되었다. 영공은 아들을 셋을 두었는데 장남 무공(武公)을 태자로 삼았다. 무공의 동생 덕공(德公)과는 동모형제이고 남은 아들 한 명은 노희(魯姬)의 소생으로 이복형제간이다. 대서장(大庶長) 불기(弗忌)와 위루(威壘) 그리고 삼보(三父)가 태자를 폐하고 출자(出子)를 섬진의 군주로 삼았다. 출자 6년 기원전 698년에 삼보 등이 공모하여 사람을 시켜 출자를 죽이고 태자 무공을 다시 세웠다. 출자는 출생하여5살에 재위에 오르고 재위에 오른 지 6년만에 살해 되었다.
무공 원년 기원전 697년, 팽희씨(彭戱氏)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나가 화산(華山) 밑에 이르러 평양성(平陽城)의 봉궁(封宮)에 머물렀다.
무공 3년 기원전 695년, 삼보 등의 무리들을 출자를 시해한 죄를 물어 삼족을 멸했다. 같은 해 정나라의 고거매(高渠眛)가 그의 군주인 소공(昭公)을 시해했다.
무공 10년 기원전 688년, 규(邽)와 기융(冀戎)을 정벌하여 섬진 최초로 현(縣)을 설치했다.
무공 11년 기원전 687년, 두(杜)와 정(鄭)을 정벌하여 현으로 삼고 소괵(小虢)을 멸했다.
무공 13년 기원전 685년 제나라의 관지보(管至父)와 연칭(連称)이 그의 군주 양공(襄公)을 시해하고 공손무지(公孫无知)를 옹립했다. 당진(唐晉)이 곽(霍), 위(魏), 경(耿)을 멸하고 그 영토를 합쳤다. 같은 해 제나라의 옹름(雍廩)이 무지(無知)와 관지보 등을 죽이고 제환공(齊桓公)을 세웠다. 이 해부터 제(齊)와 당진(唐晉)이 강국(强國)의 대열에 올라섰다.
무공 19년 기원전 679년, 당진의 곡옥백(曲玉伯)이 민후(緡侯)를 죽이고 그 군주 자리를 대신했다.
무공 20년 기원전 678년, 무공이 죽자 옹성(雍城)의 평양(平陽)에 장사 지냈다. 그때부터 섬진에서는 순장(旬葬)의 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무공과 같이 순장된 사람은 모두 66 명이었다. 무공에게는 백(白)이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백은 군주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평양(平陽)에 책봉되었다. 섬진의 군주 자리에는 무공의 동모제인 덕공(德公)이 앉았다.
덕공 원년 기원전 677년, 처음으로 섬진의 군주가 옹성(雍城) 대정궁(大鄭宮)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300 뢰(牢)의 희생(犧牲)을 바쳐 부치(鄜畤)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 옹성을 도성으로 삼게 될 경우에 대한 길흉을 점친 결과 영씨(嬴氏)의 자손들은 장차 황하로 나가 말에 물을 먹일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양백(梁伯)과 예백(芮伯)이 내조하였다. 이 해에 처음으로 복날에 대한 규정을 두어 개를 잡아 제사를 지내 열독(熱毒)과 사기(邪氣)를 없애고자 하였다. 덕공(德公)이 33세에 즉위하여 재위 2년만에 죽었다. 덕공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다. 장자는 선공(宣公)이고 차자는 성공(成公)이며 막내는 목공(穆公)이었다. 장자 선공이 덕공의 뒤를 이었다.
선공 원년 기원전 675년, 위(衛)와 연(燕)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주나라를 공격하여 주혜왕(周惠王)을 쫓아내고 왕자퇴(王子頹)를 옹립하여 왕위에 앉혔다.
선공 3년 기원전 673년, 정려공(鄭厲公)이 괵공(虢公)과 힘을 합하여 왕자퇴를 잡아서 죽이고 주혜왕을 복위시켰다.
선공4년 기원전672년, 섬진(陝秦)이 밀치(密畤)36)에 성을 축조하고 하양(河陽)에서 당진(唐晉)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선공 12년 기원전 664년, 선공이 죽었다. 선공은9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그 중 아무도 군위(君位)에 오르지 못하고 선공의 동생인 성공(成公)이 군위에 올랐다.
성공 원년 기원전 663년, 양백(梁伯)과 예백(芮伯)이 내조하러 왔다. 제환공이 산융(山戎)을 정벌하기 위해 북방으로 원정을 나가 고죽국(孤竹國)에 들어가 주둔했다.
성공이 재위 4년 만인 기원전 660년에 죽었다. 성공도7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그 중 아무도 그 뒤를 잇지 못하고 그 동생인 목공(穆公)이 군주 자리에 앉았다.
목공(穆公) 임호(任好) 원년 기원전 659년, 스스로 원정군을 이끌고 모진(茅津)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목공 4년 기원전 656년, 당진(唐晉) 헌공(獻公)의 딸이며 태자 신생(申生)의 누이인 진녀(晉女)를 데려와 부인으로 삼았다. 그 해에 제환공이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제후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소릉(召陵)에 이르렀다.
목공 5년 기원전 655년, 당진(唐晉)의 헌공(獻公)이 순식(荀息)의 가도멸괵(假道滅虢)의 계책을 취하여 벽옥과 명마를 우나라 군주에게 뇌물로 바쳐 우(虞)나라에서 빌린 길을 통하여 괵(虢)을 정벌했다. 이어서 회군하던 길에 다시 우나라도 같이 멸하여 당진)의 영토로 삼았다. 우나라 군주와 그의 대부 백리해(百里奚)는 당진의 포로가 되었다. 당진은 포로가 된 백리해를 진목공의 부인으로 시집가는 진녀(晉女)의 몸종으로 딸려서 섬진으로 보냈다. 백리해가 섬진으로 호송되어 가던 중 도망쳐 초나라의 완(宛) 땅으로 갔다. 초나라의 변경을 지키던 관리가 백리해를 붙잡았다. 한편 진목공은 백리해가 재주를 갖춘 현인(賢人)이라는 소문을 듣고 많은 재물을 초나라에 주어 데려오려고 하였으나 초나라가 백리해의 재주를 알아보고 보내주지 않을까 걱정하여 사자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우리 섬진(陝秦) 군주 부인의 몸종인 백리해가 도망쳐 귀국에 살고 있습니다. 청컨대 숫양가죽 5장으로 그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우리나라에 데려가려고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초나라가 허락하였다. 당시 백리해의 나이는 이미70여세가 되어 있었다. 목공이 백리해를 호송해 온 함거에서 풀어주며 그에게 국사에 관한 일을 물었다. 백리해가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망한 나라의 신하인데 어찌 국사에 대해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목공이 대답했다.
「우공(虞公)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우나라가 망했으니 그대의 책임이라 말할 수 없소.」
목공이 계속해서 묻자 백리해가 대답하여 3일 밤낮을 계속했다. 목공이 크게 기뻐하여 백리해를 숫양가죽 5장을 주고 모셔온 대부라는 뜻에서 오고대부(五羖大夫)라 부르며 국정을 맡기려고 하였다. 백리해가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사실은 나의 친구인 건숙(蹇叔)에 비해 그 재주가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건숙은 재주가 뛰어난 현인이나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신이 제(齊)나라에서 곤궁하게 되어 유랑하여 질(銍)이란 고을로 흘러가 걸식을 하며 지낼 때 건숙이 신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신이 제나라의 무지(無知)를 섬기려 하자 건숙이 제지하여 신은 제나라의 내란에 말려들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주나라에 가서 왕자퇴(王子頹)가 소를 사랑한다고 해서 신이 가서 소를 기르는 일을 맡아서 하려 했으나 건숙이 다시 저를 말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나라를 떠나게 되어 후에 왕자퇴가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할 때도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우공을 섬기려고 하자 건숙은 다시 신을 말렸습니다. 우공이 신의 간언을 듣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신은 마음속으로 사사로이 녹과 작위를 탐내어 우나라에 머물러 후에 우나라는 망하고 저와 우공은 당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제가 건숙의 말을 두 번 따라서 모두 화를 면했고 한 번은 듣지 않아 우나라 군주와 함께 난을 당했으니 그것으로써 그가 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공이 사자에게 많은 폐백을 주어 보내 건숙을 모셔오도록 해서 상대부로 삼았다.
같은 해 가을 목공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당진을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하여 하곡(河曲)에서 싸웠다. 당진에서는 여희(驪姬)가 내정을 어지럽혀 태자 신생(申生)은 신성(新城)에서 자결하고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는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목공 9년 기원전 651년, 제환공이 제후들을 규구(葵丘)에 불러 회맹 하였다.
같은 해 당진의 헌공(獻公)이 죽었다. 여희(驪姬)의 소생인 해제(奚齊)를 당진의 군주 세웠으나 그의 신하인 리극(里克)이 시해하였다. 순식(荀息)이 여희의 동생 소생인 탁자(卓子)를 대신 세웠다. 그러 리극이 다시 순식과 함께 탁자를 다시 시해했다. 이오(夷吾)가 사람을 목공에게 보내 자기를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려 달라고 청했다. 목공이 허락하고 백리해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오를 호송하게 하여 당진에 들어가서 군주 자리에 앉히도록 했다. 이오가 목공에게 말했다.
「만약에 제가 당진에 들어가 군주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당진의 하서(河西) 지방에 있는 여덟 개의 성을 떼어서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이오가 섬진의 도움으로 당진에 들어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당진의 혜공(惠公)이다. 혜공이 비정(丕鄭)을 섬진에 보내어 도와준 은혜에 감사의 말만 전하고 목공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하서의 성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리극을 죽였다.
비정이 섬진에 있다가 리극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목공에게 계책을 말했다.
「당진의 백성들은 원래 이오보다는 중이가 군주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금일에 이르러 이오가 군주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또한 자기를 추대한 리극을 죽인 것은 모두가 려생(呂甥)과 극예(郤芮)의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원컨대 군주께서 이(利)로써 두 사람을 부른다면 그들은 부름의 응하여 이곳에 당도할 것입니다. 두 사람을 죽이고 중이를 귀국시켜 당진의 군주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목공이 비정이 올린 계책을 허락하고 비정과 함께 사자를 당진에 보내어 려생(呂甥)과 극예(郤芮)를 불렀다. 비정의 계획을 눈치 챈 려극(呂郤) 두 사람은 이오에게 고해 비정을 죽였다. 비정의 아들 비표(丕豹)는 죽음을 피해 섬진으로 도망쳐서 목공을 보고 말했다.
「당진의 군주가 무도하여 백성들이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정벌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목공이 대답했다.
「백성들이 진정으로 그 군주를 따르지 않는데 어찌 군주가 능히 그 대신들을 죽일 수 있었겠는가? 군주가 그 대신을 죽일 수 있었음은 백성들이 협조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목공이 비표의 계책을 따르지는 않았으나 비표를 가까이 두고 중용 하였다. 이것은 목공은 마음속으로는 당진을 정벌할 생각이 있었으나 겉으로는 비표의 계책을 물리치는 척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진목공 12년 기원전 648년, 제나라의 관중(管仲)과 습붕(隰朋)이 잇달아 죽었다. 당진에 한발(旱魃)이 들어 섬진에 양식의 대여를 청해 왔다. 비표가 목공에게 당진에 양식을 보내주지 않으면 그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게 되어 그 틈을 타서 쳐들어가면 정벌할 수 있다고 했다. 목공이 공손지(公孫支)에게 의견을 물었다. 공손지가 말했다.
「흉년과 풍년은 어느 나라이건 간에 번갈아 일어나는 일이라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목공이 다시 백리해에게 물었다. 백리해가 말했다.
「이오가 주군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나 그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공은 백리해와 공손지의 간언을 받아들여 양식을 당진에 빌려주었다. 양식을 실어 나르는 배와 거마가 줄을 이어 섬진의 옹성에서 당진의 강주성(絳州城)까지 늘어섰다.
목공 14년 기원전 646년, 이번에는 섬진에 기근이 들어 당진에 식량을 청했다. 당진의 혜공이 섬진에 식량을 보내 도울 것인가에 대해 군신들과 의논했다. 괵석(虢射)가 의견을 말했다.
「섬진에 기근이 든 틈을 이용하여 공격하면 큰공을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당진의 혜공(惠公)이 괵석의 말을 쫓아 섬진에 양식을 빌려주지 않았다.
목공 15년 기원전 645년, 당진의 혜공이 군사를 일으켜 섬진을 공격하였다. 목공이 비표를 대장으로 삼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당진의 군주를 맞이하여 싸우기 위해 출전하였다. 그해 9월 임술(壬戌) 일에 당진 혜공과 섬진의 목공이 한원(韓原)의 들판에서 회전에 들어갔다. 당진의 혜공이 자기 부대와 떨어져 단기로 앞서나가 섬진의 진영에 접근하여 재물을 빼앗은 다음 자기가 탄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오다가 수레를 끄는 전마가 무거운 짐을 이기지 못하고 진흙 구덩이에 깊숙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섬진의 목공과 휘하의 장병들이 혜공의 뒤를 추격했으나 잡지 못하고 오히려 혜공을 구하러 온 당진군에 의해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당진군이 섬진군을 공격하여 목공의 몸에 부상을 입혔다. 목공은 바야흐로 위험에 빠져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옛날에 기산(岐山) 밑에서 목공이 애지중지하던 말을 잡아먹었던 야인(野人)들 300명이 나타나 죽음을 무릅쓰고 당진군과 싸워 결국은 포위망을 풀고 목공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당진의 혜공까지도 사로잡았다. 옛날에 섬진의 목공이 사랑하는 말을 잃어 버렸는데 확인해 본 결과 기산 밑에 살던 야인들이 훔쳐가서 잡아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목공의 말을 잡아서 같이 먹은 자가 300명에 달했다. 섬진의 관리가 뒤쫓아가서 그들을 붙잡아 법을 집행하려고 했다. 목공이 듣고 말했다.
「군자는 원래 축생(畜生)으로 인하여 사람을 해치는 법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말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사람이 상한다고 했다.」
목공은 즉시 야인들에게 술동이를 하사하고 그 죄를 사하여 주었다. 3백의 야인들이 목공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다가 섬진이 군사를 동원하여 당진으로 원정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야인 모두가 목공을 돕기 위해 싸움터로 향해 달려온 것이다. 야인들이 싸움터에 당도하여 위험에 처한 목공을 발견하고 모두가 다투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목공이 베푼 덕에 보답하려고 했다. 300인의 야인들이 힘껏 싸워준 덕분으로 목공은 혜공을 포로로 잡아 개선할 수 있었다. 목공이 귀환하여 령을 내렸다.
「내가 목욕재계한 후에 당진의 군주를 제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리라!」
주천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말했다.
「당진국은 우리 왕실과 동성의 나라다.」
그리고 당진 군주에 대한 용서를 목공에게 청했다. 혜공의 누이인 목공의 부인도 역시 그 소식을 듣고 맨발에 상복을 입고 나와서 그가 지은 죄의 용서를 청하며 말했다.
「신첩이 친동생을 구하지 못하여 군주님으로 하여금 그 신하들에게 그를 죽이라는 령을 내리게 하는 경우에 이르게 한다면 실제로는 제가 군주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됩니다.」
목공이 대답했다.
「내가 애써 당진의 군주를 사로잡았으나 천자가 사면을 청하고 또한 부인이 애타하는데 죽일 수가 없구나!」
이어서 목공이 혜공을 풀어주고 맹세하게 한 다음 그의 귀국을 허락했다. 또한 혜공이 묶고 있던 관사를 좋은 곳으로 옮겨 주고 칠뢰(七牢)의 예로써 전별연을 베풀었다. 그해 11월에 당진의 군주 이오가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원래 목공에게 주기로 약속한 하서의 땅을 바쳤다. 또한 태자 어(圉)를 인질로 섬진으로 보냈다. 목공은 섬진 종실의 여인을 어에게 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이로서 섬진의 영토는 황하까지 이르게 되었다.
목공 18년 기원전 642년, 제환공이 죽었다. 목공 20년 기원전 640년, 섬진이 양(梁)과 예(芮)나라를 멸하고 현(縣)으로 삼았다.
목공 21년 기원전 639년, 당진의 태자 어가 부군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양나라는 나의 외가인데 섬진이 멸망시켰다. 또한 우리 형제들은 수가 많아 부군이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섬진은 필시 나를 계속 억류시키킬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나라에서는 나를 가볍게 보고 나의 다른 형제들 중 한 사람을 골라 군주의 자리에 앉히지 않겠는가?」
당진의 태자 어(圉)가 즉시 도망쳐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목공 23년 기원전 637년, 당진의 혜공이 죽고 어(圉)가 뒤를 이었다. 목공은 몰래 도망친 당진의 태자에 대해 노하여 즉시 초나라에서 중이(重耳)를 데려와서 어의 부인을 중이에게 주어 그의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중이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강권하자 할 수 없이 혼인을 허락했다. 목공이 중이를 예를 갖추어 극진히 대했다. 목공24년 봄 섬진이 사신을 당진에 보내어 그 대신들에게 중이를 귀국시켜 당진의 군주로 세우겠다고 통고했다. 당진의 대신들이 동의했다. 그래서 목공이 군사들에게 중이를 호송하게 하여 당진으로 보냈다. 그해 2월 중이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문공이 사람을 시켜 태자어를 죽였다. 태자어의 시호는 회공(懷公)이다. 그해 가을 주양왕(周襄王)의 동생 대(帶)가 적주(翟主)의 도움으로 왕을 공격했다. 왕이 당하지 못하고 도망쳐 정나라로 피신했다.
목공 25년 기원전 635년 주왕(周王)이 사자를 보내 주나라의 내란을 당진과 섬진 두 나라에 알렸다. 진문공은 주양왕을 환국 시키고 왕자 대(帶)를 잡아서 죽였다. 섬진의 목공도 군사를 보내어 당진의 문공을 도왔다.
목공 28년 기원전 632년, 당진의 문공이 초나라 군사를 성복(城濮)에서 크게 파했다.
목공 30년 기원전 630년, 섬진의 목공이 원군을 보내 당진의 문공을 도와 정나라를 포위했다. 정나라 사자가 목공을 찾아와 말했다.
「정나라가 망하게 되면 강국이 된 당진에게는 득이 되겠지만 섬진에게는 유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세가 강해진 당진은 섬진의 우환입니다.」
목공이 정나라 사자의 말을 듣고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왔다. 당진 역시 정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목공 32년 기원전 628년, 진문공이 죽었다.
같은 해 정나라 사람이 나라를 팔아 자기의 영달을 꾀하려고 사람을 보내 목공에게 말했다.
「군주께서 군사를 보내어 몰래 기습하시기 바 랍니다. 우리가 성문을 열어 안에서 호응하면 정나라는 쉽게 얻으실 수 있습니다.」
목공이 건숙과 백리해에게 그 의견을 물었다. 두 사람이 대답했다.
「여러 나라를 지나 수천 리를 행군하여야 함으로 성공하기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또한 이것은 정나라 사람 중에 자기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듯이 우리나라라고 해서 어찌 우리의 정세를 정나라에 알려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목공이 대답했다.
「그대들은 나의 마음을 모르오, 나는 이미 결심했소!」
목공은 즉시 군사를 일으켜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孟明視)와 건숙의 아들 백을병(白乙丙) 그리고 서걸술(西乞術) 세 사람을 장군으로 삼아 정나라를 정벌군을 일으켜 출정하도록 했다. 군사들이 출정하는 날이 되자 백리해와 건숙 두 사람이 나와서 통곡을 하였다. 목공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켜 출정시키는 마당에 그대 들이 우리 군사들 앞을 막고 통곡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두 노인들이 고했다.
「신 등은 군사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이번에 군사들이 출정을 하게 되면 신의 자식들도 같이 갈텐데 신의 나이 이미 늙어 이제는 다시 상면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울었습니다.」
두 사람이 목공의 앞에서 물러 나와 출정을 앞둔 그들의 아들들에게 당부하였다.
「너희들의 군사들은 반드시 싸움에서 패하고 그곳은 필시 효산(殽山)의 험지일 것이다.」
목공 33년 기원전 627년, 세 장군이 이끄는 섬진의 군사들이 행군을 하다 당진의 영토를 통과하여 주나라 도성의 북문에 이르렀다. 주나라 왕손만(王孫滿)이 섬진의 군사들이 행군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섬진의 군사들의 행군하는 모습이 무례하기 그지 없습니다. 싸우면 어찌 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섬진군이 주나라를 통과하여 활국(滑國)에 이르렀다. 그 때 마침 정나라의 현고(弦高)라는 사인이 소 12마리를 끌고 주나라로 가는 길에 섬진군을 만나게 되었다. 현고는 섬진의 군사들에게 잡혀 죽거나 혹은 사로잡히게 될 까봐 두려워하여 자기의 소를 모두 섬진군에게 바치고 말했다.
「우리나라 군주께서 대국이 군사를 보내 정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나라 도성의 성곽을 수리하고 굳게 방비를 하시면서 신을 시켜 소 12마리를 보내 대국의 군사들을 호군(犒軍)하라고 하셨습니다.」
섬진의 세 장수 장수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했다.
「정나라를 기습하려 했는데 그들이 이미 알고 방비를 하고 있으니 가봐야 공을 이루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어서 섬진군은 활국을 기습하여 멸했다. 활국은 당시 당진의 변경에 있엇던 부용국(附庸國)이었다..
그때 당진은 아직 진문공의 상을 마치지 못하고 있어 태자가 정식으로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기 전이었다. 당진의 태자 양공(襄公)이 노하여 말했다.
「섬진이 우리가 상을 당한 틈을 이용하여 우리의 부용국인 활국(滑國)을 공격하여 멸망시켜 우리를 능멸하였다.」
이어서 양공은 상복을 검게 물들여 입고 군사를 일으켜 효산(殽山)의 험지에 매복시켜 섬진군을 요격하여 궤멸시켰다. 500승에 달한 섬진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양공은 섬진의 세 장수를 사로잡아 당진국의 도성 강성(絳城)으로 데리고 갔다. 양공의 모친이며 문공의 부인은 섬진국의 종실출신이었기 때문에 당진에 사로잡힌 세 장수를 위해 양공에게 청했다.
「섬진의 군주는 이들 세 장수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음에 틀림없다. 원컨대 이 세 사람을 돌아가게 하여 진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가마솥에 삶아 죽여 스스로 원한을 풀게 해주면 서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당진의 양공(襄公)이 허락하여 세 장수를 풀어주어 섬진으로 돌려보냈다. 세 장수가 섬진에서 돌아오자 목공이 소복을 입고 교외에 나와서 맞이하며 곡을 하며 말했다.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하는 간언을 듣지 않고 군사를 출동시켜 장군들이 욕을 당했으니 장군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대 장군들은 부디 온 마음을 다하여 오늘 당한 치욕을 갚을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 바랄 뿐이노라!」
목공은 세 사람의 관직과 봉록을 회복시키고 예전보다 더욱 후대하였다.
목공 34년 기원전 626년, 초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부왕인 초성왕(楚成王)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같은 해 목공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맹맹시를 장군으로 삼아 당진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진과 섬진 양군이 팽아(彭衙)에서 회전했으나 섬진군의 세가 여의치 않아 군사를 물리쳐 돌아왔다.
역시 같은 해 융왕(戎王)이 유여(由余)를 섬진에 사자로 보냈다. 유여의 선조는 당진 사람이었다. 융국으로 망명한 유여는 당진의 말을 할 줄 알았다. 목공이 현군이라는 소식을 들은 융왕이 유여를 시켜 섬진의 정세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진목공이 유여에게 궁궐의 장엄함과 산더미 같이 쌓인 재물들을 보여주며 과시하였다. 유여가 보고 말했다.
「군주님이 자랑하시는 궁궐과 저 많은 재물을 귀신을 시켜 만들라고 해도 귀신은 힘들다고 할 터인데 그 것을 사람에게 시켜 만들게 했으니 백성들의 고초야 오죽했겠습니까?」
목공이 괴이하게 여기고 다시 물었다.
「중화의 나라들은 시서예악(詩書藝樂)과 법도로써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는데 아직까지 그 혼란함이 멈추지 않고 있소. 오늘에 이르기까지 융이(戎夷)의 나라에는 시서예악과 법도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소? 융이를 다스리기가 매우 어렵지 않소?」
유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중화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무릇 상고시대의 성인이신 황제(黃帝)께서 예악과 법도를 만드신 이래 몸소 모범을 보이시어 겨우 중화를 다스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자 날이 갈수록 백성들을 다스리는 윗사람들은 더욱 교만해지고 음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법도의 위엄만에 기대어 그 아랫사람들을 책하며 감시만을 해왔습니다. 또한 밑의 사람들은 그들대로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져 윗사람들에게 인의를 요구하며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상하가 모두 다투고 원망하며 서로의 자리를 빼앗고 시해하여 멸종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모두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위의 다스리는 사람들은 순박한 덕으로써 그 밑의 사람들은 대한다면 어찌하여 아랫사람들이라고 해서 충성스러운 마음과 신의로써 그 윗사람을 대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사람이 자기 한 몸을 다스리는 이치와 같아서 다스림의 도리를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다스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공이 궁궐로 돌아와 내사(內史) 요(寥)를 불러 물었다.
「내가 듣기에 이웃나라에 성인이 살고 있으면 그것은 그 나라의 걱정거리라고 하는데 오늘 유여가 현인이라 과인이 장차 그로부터 해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오.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소?」
내사 요(寥)가 대답했다.
「융왕이 멀리 떨어진 벽지에 숨어살고 있어 아직까지 중원의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군께서 한번 들어보라고 보내셨다가 그들을 계속 그곳에 머물게 하여 융왕의 마음을 빼앗기 바랍니다. 또한 유여를 우리나라에 계속 머물게 해 달라고 융왕에게 청하여 그 둘을 떼어놓아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하고 또한 보낸다는 날짜에 보내지 말고 그 약속한 기일을 어기게 하면 융왕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반드시 유여를 의심할 것입니다. 군신 간에 틈이 벌어지면 그들은 우리의 포로가 되고 또한 융왕이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 틀림없이 정사에 태만할 것입니다.」
목공이 훌륭한 계책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목공이 유여와 자리를 나란히 하고 앉아서 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 식사를 같이 하며 융국의 지형과 그 군사들의 수를 물어 정세를 파악했다. 이어서 내사요에게 명하여 여자 악사(樂士) 16명을 융왕에게 보냈다. 융왕이 미녀들을 받자 매우 기뻐하며 그해가 다 가도록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 그래서 융족들이 기르던 소와 말이 초지를 바꾸어 주지 않아서 그 중 반수가 굶어 죽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섬진은 유여에게 융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아름다운 여자 악사에 빠져 정사을 태만히 하고 있던 융왕에게 유여가 여러 번에 걸쳐 간했지만 융왕은 듣지 않았다. 목공이 다시 여러 번에 걸쳐 사자를 보내어 아무도 몰래 유여를 초빙하고자 하는 뜻을 전했다. 유여가 결국은 융국에서 도망쳐 섬진에 귀의하였다. 목공이 유여를 손님을 맞는 예로써 대하고 융국을 정벌하기 위한 지형을 물었다.
목공 36년 기원전 624년 목공이 다시 맹명시 등을 더욱 후하게 대하고 당진에 대한 정벌군을 일으켜 하수를 건넌 후에 다리를 불태워 전의를 굳게 했다. 이어서 당진군을 크게 무찌르고 왕관(王官)과 호(鄗) 두 고을을 취해 효산(殽山)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섬진군의 기세에 눌린 당진군은 모두 성만을 굳게 지킬 뿐 감히 나와서 싸움을 걸지 못했다. 그래서 목공이 모진(茅津)에서 황하를 다시 건너 효산의 계곡에 널려져 있던 시신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고3일 동안 곡을 하며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위로했다. 이어서 군사들을 향하여 맹세했다.
「군사들이여, 엄숙한 마음으로 들어라! 내가 너희들에게 맹세하며 고하노라! 옛 사람들은 일을 도모할 때 노인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실수함이 없었다. 내가 백리해와 건숙 두 노인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되었으니 이 모든 일은 나의 잘못이로다!」
목공이 이렇게 장병들 앞에서 자기가 건숙과 백리해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하며 맹세한 목적은 자기의 과실을 후세에 전하여 기억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군자들이 듣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 진목공의 사람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용의주도하도다! 그래서 결국은 맹명시 등이 당진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취할 수 있게 되었음이다!」
목공(穆公) 37년 기원전 623년, 섬진이 유여의 계책을 써서 융왕을 정벌하여12나라를 멸하고 모두 섬진의 영토에 복속시켰다. 이로써 섬진의 영토는 천리의 땅을 새로 개척되어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천자가 소공(召公) 과(過)를 파견하여 쟁이와 고(鼓)를 하사하며 축하의 말을 전하게 했다.
목공 39년 기원전 621년, 목공이 죽어 옹읍(雍邑)에 장사를 지낼 때 같이 순장되어 따라 죽은 사람이 177명에 달했다. 그때 섬진의 어진 신하라고 해서 삼량(三良)이라고 불렀던 세 사람의 자여(子輿) 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 자여씨의 이름은 엄식(奄息), 중항(仲行), 침호(鍼虎)다. 진나라 백성들이 이를 슬퍼하여 『황조(黃鳥)』라는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군자(君子)들이 이 일을 두고 말했다.
「진목공이 영토를 넓히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힘써 동쪽으로는 강국인 당진을 굴복시키고 서쪽으로는 서융을 정벌하여 패자가 되었으나 중원의 제후들의 맹주까지는 이를 수 없었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죽음에 임해 자기 백성들을 함부로 방기하여 그의 어진 신하들을 모두 거두어 같이 순사 시켰다.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되기를 바라며 도덕과 법도를 물려준 선왕들의 본을 받지 않고 오히려 착하고 어진 신하들을 빼앗아 가서 백성들로 하여금 슬퍼하게 만드니 이것 때문에 섬진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맹주가 되지 못했다.」
목공의 아들은 40명에 달했는데 태자 앵(罃)이 뒤를 이었다. 이가 진강공(秦康公)이다.
강공 원년 기원전 620년, 목공이 죽은 다음 해에 당진의 양공(襄公)도 죽었다. 양공의 동생은 이름이 옹(雍)이라 했는데 진녀(秦女) 소생으로 양공과는 동모형제로써 그때는 섬진에 머물고 있었다. 당진의 상경 조돈(趙盾)이 공자옹을 옹립하기 위해 수회(隨會)를 섬진에 보내 모셔오도록 했다. 섬진이 군사들을 보내 옹을 호송하여 영호(令狐)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진은 계획을 바꾸어 양공의 아들을 군주로 세우고 오히려 섬진군 불의에 습격하였다. 섬진군은 대패하여 회군하고 공자옹은 싸움 중에 죽었다. 수회는 섬진군과 함께 돌아가 그의 몸을 섬진에 의탁했다.
강공 2년 기원전 619년, 섬진이 당진을 정벌하여 무성(武城)을 취함으로써 영호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강공 4년 기원전 617년, 이번에는 당진이 섬진을 공격하여 소량(少梁)을 빼앗아 갔다.
강공 6년 기원전 615년, 섬진이 당진을 공격하여 기마(羈馬)를 취했다. 섬진군이 계속 진격하여 하곡(河曲)에서 당진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당진의 국인들은 수회가 섬진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면 당진의 우환이 된다고 걱정했다. 이에 위수여(魏讎余)로 하여금 거짓으로 당진을 배반하고 섬진에 항복하게 한 후에 수회를 만나 설득하여 당진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수여는 결국 수회를 섬진에서 빼내어 당진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강공이 재위 12년 만인 기원전 609년에 죽고 그의 아들 공공(共公)이 뒤를 이었다.
공공(共公) 2년 기원 607년, 당진의 조천(趙穿)이 그의 군주인 영공(靈公)을 시해하였다.
공공 3년 기원전 606년 초장왕(楚庄王)의 초나라가 강대해져서 군사를 일으켜 북정하여 락읍 부근에 주둔하며 구정(九鼎)에 대해 주왕에게 물었다.
공공이 재위 5년 만인 기원전 604년에 죽고 그의 아들 환공(桓公)이 뒤를 이었다.
환공 3년 기원전 601년, 섬진의 장수 한 명이 당진과 싸워 패하여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
환공 10년 기원전 594년, 초장왕이 정나라를 복속 시키고 북쪽으로 나아가 하상(河上)에서 당진군과 회전하여 그 군사들을 패퇴 시켰다. 이후로 초나라는 중원의 패자가 되어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주재하였다.
환공 24년 기원전 580년, 당진의 려공(厲公)이 새로 서자 섬진의 환공과 하수를 사이에 두고 회맹을 행했다. 그러나 섬진의 환공은 진성(秦城)으로 돌아오자마자 회맹에서의 맹약을 어기고 적주(翟主)와 힘을 합하여 당진을 습격하였다.
환공 26년 기원전 578년, 당진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섬진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섬진의 군사들이 싸움에 패하여 달아나자 당진군은 그 뒤를 추격하여 경수(涇水)까지 쫓아갔다가 되돌아왔다. 환공이 재위 27년 만인 기원전 577년에 죽고 그의 아들 경공(景公)이 섰다.
경공 4년 기원전 573년, 당진의 란서(欒西)가 그의 군주인 려공을 시해했다.
경공 15년 기원전 562년, 섬진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하여 력성(櫟城)에서 회전하여 당진군을 패주 시켰다. 그때는 당진의 도공(悼公)이 제후들의 맹주였다.
경공 18년 기원전 559년, 도공의 당진은 국세가 더욱 강해져 여러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행한 후에 제후들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섬진군을 물리쳤다. 섬진군이 싸움에서 져서 패주하기 시작하자 당진군이 뒤를 추격했다. 이어서 경수(涇水)를 건너 역림(棫林)에 이르자 군사를 물리쳐 회군하였다.
경공 27년 기원전 550년, 섬진의 경공(景公)이 당진의 도성을 방문하여 평공(平公)과 회맹을 하였으나 귀국하자 다시 맹약을 어겼다.
경공 36년 기원전 541년, 초나라의 공자위(公子圍)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가 초영왕(楚靈王)이다. 경공(景公)의 동모제인 후자침(后子鍼)이 경공의 총애를 받고 또한 부유했으나, 어떤 자가 참소하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즉시 당진으로 달아났다. 후자침의 재물을 실은 수레가 천 대나 되자 당진의 평공이 물었다.
「경은 이렇듯 부유한데 어찌하여 스스로 도망쳐 살려고 하는가?」
후자침이 대답했다.
「섬진의 군주가 무도하여 제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입니다. 그가 죽게 되면 다시 돌아갈까 합니다.」
경공 39년 기원전 538년, 초영왕의 초나라가 다시 강대해져서 중원의 제후들을 신(申)으로 불러 회맹을 하고 스스로 맹주가 되어 제나라의 군주를 시해한 경봉(慶封)을 잡아다가 죽였다.
경공이 재위 40년 만인 기원전 537년에 죽고 그의 아들 애공(哀公)이 섰다. 후자침은 다시 섬진으로 돌아갔다.
애공 8년 기원전 529년, 초나라의 공자 기질(棄疾)이 초영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평왕(楚平王)이다.
애공 11년 기원전 526년, 초평왕이 섬진 애공의 누이 동생을 태자 건(建)의 부인으로 청했다. 진녀(秦女) 백영(伯嬴)이 초나라의 영도에 당도하자 초평왕이 그녀의 자색에 혹하여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
애공 15년 기원전 522년, 초평왕이 태자 건을 죽이려고 하자 건(建)은 도망쳤다. 그리고 오자서(伍子胥)는 오나라로 갔다. 이때부터 당진의 공실은 쇠약해지고 육경(六卿)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섯 집안이 세력을 다투어 싸웠기 때문에 오랫동안 섬진과 당진은 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애공 31년 기원전 506년, 오왕(吳王) 합려(闔閭)와 오자서가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초평왕의 아들 초소왕(楚昭王)은 영도(郢都)를 버리고 수(隨)나라로 도망쳤다. 오나라 군사들이 영도에 입성하였다. 초나라 대부 신포서(申包舒)가 섬진으로 달려와 초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군을 청하며 7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매일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그래서 섬진의 애공이 마음이 움직여 병거 500승을 주어 초나라를 구하게 하였다. 섬진의 군사가 오나라 군사와 회전하여 싸움에서 이겼다. 오나라 군사가 영도에서 철수하자 초소왕은 다시 영성으로 돌아왔다.
애공이 재위 36년 만인 기원전 501년에 죽었다. 태자는 이공(夷公)이었으나 애공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군위에 오르지 못하고 이공(夷公)의 아들이 섰다. 이가 혜공(惠公)이다.
혜공 원년 기원전500년, 공자(孔子)가 노나라 재상의 일을 대리했다.
혜공 5년 기원전 496년, 당진의 육경 중에서 중항씨(中行氏)와 범씨(范氏)가 반란을 일으키자 당진의 군주가 지씨(智氏)와 조간자(趙簡子)를 시켜 토벌하도록 했다. 중항씨와 범씨는 제나라로 도망쳤다.
혜공이 재위 10년 만인 기원전 491년에 죽자 그의 아들은 도공(悼公)이 뒤를 이었다.
도공(悼公) 2년 기원전 489년, 제나라의 신하인 전걸(田乞)이 그의 군주인 유자(孺子)를 시해하고 유자의 서형 양생(陽生)을 세웠다. 이가 제도공(齊悼公)이다.
도공 6년 기원전 485년, 오나라가 제나라를 쳐들어가 제군을 애릉(艾陵)에서 크게 무찔렀다. 제나라 신하들이 도공을 시해하고 그의 아들을 세웠다. 이가 제간공(齊簡公)이다.
도공 9년 기원전 482년, 진정공(晉定公)과 오왕 부차(夫差)가 여러 제후들과 황지(黃池)에서 회맹하면서 맹주의 자리를 다투었으나 결국맹주는 오나라가 되었다. 오나라는 자기들의 자기들의 강한 세력을 믿고 중원의 제후국들을 능멸했다.
도공 12년 기원전 479년, 제나라 전상(田常)이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그 동생 평공(平公)을 세웠다. 전상은 스스로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도공 13년 기원전 478년,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하고 현(縣)으로 삼았다. 섬진의 도공이 재위 14년 만인 기원전 477년에 죽고 그의 아들 려공공(厲共公)이 뒤를 이었다. 공자는 도공 12년인 기원전 479년에 졸했다.
려공공 2년 기원전 475년, 촉인(蜀人)이 재물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려공공 16년 기원전 461년, 하수 주변에 인공 수로를 팠으며 2만의 군사로 대려(大荔)를 정벌하여 그 왕성을 점령하였다.
려공공 21년 기원전 456년, 처음으로 빈양(頻陽)에 현(縣)을 설치하였다. 당진이 쳐들어와 무성(武城)을 빼앗아 갔다.
려공공 24년 기원전 453년, 당진에 내란이 일어나 지백(智伯)이 살해당하고 그 종족들의 땅은 조(趙), 한(韓), 위(魏) 삼가가 나누어 가졌다.
려공공 25년 기원전 452년, 지개(智開)가 그의 종족들을 이끌고 망명해왔다.
려공공 33년 기원전 444년, 의거(義渠)를 정벌하여 그의 왕을 사로잡았다.
려공공 34년 기원전 443년, 일식이 있었다. 려공공이 죽고 그 아들 조공(躁公)이 섰다.
조공(躁公) 2년 기원전 441년, 남정(南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조공 13년 기원전 430년, 의거가 쳐들어와서 위남(渭南)에 이르렀다. 조공이 재위 14년 만인 기원전 429년에 죽고 그의 동생 회공(懷公)이 섰다.
회공4년 기원전 425년, 서장(庶長) 조(晁)와 대신들이 힘을 합하여 회공을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회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회공의 태자는 소자(昭子)였는데 일찍 요절하여 대신들이 소자의 아들을 세웠다. 이가 영공(靈公)이다. 영공은 회공의 손자다.
영공 6년 기원전 419년, 당진이 소량(少梁)에 성을 쌓자 섬진이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였다.
영공 13년 기원전 412년 섬진이 적고(籍姑)에다 성을 쌓았다. 이해에 영공이 죽었으나 그의 아들 헌공(獻公)이 즉위하지 못하고 영공의 막내 숙부인 도자(悼子)가 뒤를 이었다. 이가 간공(簡公)이다. 간공은 소자의 동생이며 회공의 아들이다.
간공 6년 기원전 409년, 관리들에게 칼을 차고 다니게 하였다. 락수(洛水) 주변에 인공 수로를 파고 중천(重泉)에 성을 쌓았다. 간공이 재위 16년 만인 기원전 399년에 죽고 그의 아들 혜공(惠公)이 즉위하였다.
혜공 12년 기원전 388년, 아들 출자(出子)를 낳았다.
혜공 13년 기원전 387년, 촉을 정벌하고 남정을 평정했다. 혜공이 죽고 출자(出子)가 뒤를 이었다.
출자 2년 기원전 385년, 서장(庶長) 개(改)가 영공(靈公)의 아들 헌공(獻公)을 하서(河西)에서 불러와 섬진의 군주로 삼았다. 출자와 그의 모친을 죽여 그 시체를 깊은 연못에 던져 버렸다. 섬진이 수차에 걸쳐 그들이 군주를 바꾸자 군신 간에 틈이 벌어지고 혼란이 일어난 틈에 당진이 다시 힘을 얻어 섬진으로부터 하서의 땅을 빼앗아 갔다.
헌공 원년 기원전 384년, 순장(旬葬)의 제도를 없앴다.
헌공 2년 기원전 383년 역양(櫟陽)에 성을 쌓았다.
헌공 4년 기원전 381년 정월 경인(庚寅) 날에 효공(孝公)이 출생하였다.
헌공 11년 기원전 374년 주나라 태사(太史) 담(儋)이 헌공을 만나서 말했다.
「옛날 주나라와 섬진은 한나라였다가 나뉘어져 다시500년 후에 합쳐지고 다시17년 후에는 합쳐져서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는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
헌공 16년 기원전 369년, 복숭아나무가 겨울에 꽃을 피웠다.
헌공 18년 기원전 367년 역양(櫟陽)의 하늘에서 금비가 내렸다.
헌공 21년 기원전 364년, 위(魏)나라와 석문(石門)에서 회전하여 그 군사 8만명을 죽였다. 천자가 수를 놓은 비단으로 만든 예복을 보내와 석문에서의 승리를 축하했다.
헌공이 재위 23년 만인 기원전 362년에 죽고 그의 아들 효공(孝公)이 즉위하였다. 그때 효공의 나이는 이미 21살이었다.
효공 원년 기원전 361년의 정세는 하수(河水) 효산(殽山) 이동에 여섯 강국에는 제위왕(齊威王), 초선왕(楚宣王), 위혜왕(魏惠王), 연도공(燕悼公), 한애후(韓哀侯), 조성후(趙成侯)가 있었고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에는 소국인 노(魯), 송(宋), 위(衛), 주(邾)등 10여 개의 나라가 있었다. 초와 위(魏)나라는 국경을 접하였고 위나라는 정나라로부터 낙수(洛水)을 따라서 북쪽의 상군(上郡)까지 장성을 쌓았다. 또 초나라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한중(漢中), 서쪽으로는 파(巴)와 검중(黔中)에 이르렀다. 주왕실의 세력이 더욱 미약해져 제후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서로간에 땅을 다투느라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섬진의 땅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옹주(雍州)에 있었기 때문에 제후국들의 회맹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원의 제후국들은 섬진을 대하기를 이적(夷翟)과 같이 하였다. 효공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며 전사를 모집하고 논공행상(論功行賞)과 법령의 시행을 분명히 한 후에 나라 안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령을 내렸다.
「옛날에 목공께서 기산(岐山)과 옹(雍) 땅 사이에 계시면서 덕정을 베푸시고 병사를 기르셨다. 동쪽으로는 당진의 란을 평정하시어 나라의 경계를 하수에 이르게 하시고 서쪽으로는 융적(戎翟)을 제패하시어 천리에 달하는 강역을 개척하셨다. 천자께서 패자의 칭호를 하사하시자 제후들이 래조하여 축하의 말을 올렸다. 후세를 위하여 개업하셨으니 그 덕이 크게 빛내셨다. 옛날에 려공(厲公), 조공(躁公), 간공(簡公), 출자(出子)의 때에 편안하지 못하고 나라 안에서 내환이 있어 나라 밖의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당진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 선군께서 확보하신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아 가고 중원의 제후들은 우리를 업신여겨 그 치욕의 크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헌공께서 즉위하시어 변경을 진무하시고 역양(櫟陽)으로 천도하여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다시 동쪽으로 나가시어 목공께서 확보하신 땅을 다시 찾으시고 그 정령(政令)을 따르셨다. 과인이 선군의 뜻을 따르고자 항상 가슴 아파해 왔다. 빈객이나 군신들 중 우리 섬진을 부강하게 할 훌륭한 계책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또한 그의 관작을 높이고 봉지를 나누어주겠다. 」
그런 다음 동쪽으로는 군사를 보내어 섬성(陝城)을 포위하였으며 서쪽의 융족을 공격하여 그들의 왕인 원왕(嫄王)을 죽였다. 위앙(衛鞅)이 효공의 포고령을 듣고 서쪽으로 길을 떠나 섬진에 들어와서 경감(景監)을 통하여 효공의 알현을 청했다.
효공(孝公) 2년 기원전 360년, 주나라 천자가 제사에 올린 고기를 보내왔다.
효공 3년 기원전 359년, 위앙이 효공에게 변법의 실행과 형벌의 정비를 권하고 안으로는 농업에 힘쓰고 밖으로는 외국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에게 상벌을 분명히 할 것을 설파했다. 효공이 위앙의 말을 좋게 생각했다. 그러나 감룡(甘龍)과 두지(杜摯)가 변법의 시행을 반대하여 위앙과 논쟁을 벌렸다. 효공은 마침내 위앙의 말을 따라 변법을 시행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괴로워했으나 3년이 지나자 오히려 법을 지키는 것을 편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어서 효공은 위앙을 좌서장(左庶長)에게 임명하여 섬진의 국정을 맡겼다. 그 일에 대해서는 『상군열전(商君列傳)』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효공 7년 기원전 355년, 효공은 위혜왕(魏惠王)과 두평(杜平)에서 만나 회맹했다.
효공 8년 기원전 354년, 섬진이 위(魏)나라 군사들과 원리(原里)에서 회전하여 승리했다.
효공 10년 기원전 352년, 위앙을 대량조(大良造)에 임명했다. 위앙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위(魏)나라의 안읍(安邑)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위나라가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효공12년 기원전350년, 함양(咸陽)에 궁궐을 축조하고 기궐(冀闕)을 세운 후에 천도했다. 작은 고을들은 합하여 큰 현으로 만들고 현령(縣令)을 보내어 전국을 41개의 현(縣)으로 재편했다. 전답의 경계를 없애고 정전제(井田制)를 폐지하였다. 동쪽으로는 그 영토를 넓혀 락수(洛水)를 건넜다.
효공 14년 기원전 348년, 처음으로 부세(賦稅)를 걷기 시작했다.
효공 19년 기원전 343년, 천자가 패자(覇者)의 칭호를 내렸다.
효공 20년 기원전 342년, 제후들이 와서 하례를 올렸다. 공자 소관(少官)이 군사를 이끌고 봉택(逢澤)으로 나가 천자를 조현했다.
효공 21년 기원전 341년, 제나라가 마릉(馬陵)55)에서 위군(魏軍)을 격파했다.
효공 22년 기원전 340년, 위앙이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공자 앙(卬)을 포로로 잡았다. 같은 해 위앙을 열후(列侯)에 봉하여 상군(商君)이라 칭했다.
효공 24년 기원전 338년, 삼진(三晋)의 위(魏)나라와 응문(應門)에서 싸워 그 장수 위조(魏錯)를 사로잡았다. 이해에 효공이 죽고 그의 아들 혜문군(惠文君)이 뒤를 이었다. 혜문군은 위앙을 죽었다. 위앙이 처음에 변법을 시행할 때 그 법령이 행해지지 않고 태자가 법을 위반하였다. 위앙이 효공에게 말했었다.
「법령이 행해지지 않는 이유는 공실의 귀척(貴戚)들 때문입니다. 주군께서 법령을 필히 행하시려고 하신다면 먼저 태자를 처벌해야 합니다. 태자에게는 경형(黥刑)을 시행할 수 없음으로 태자를 잘못 이끈 그 사부를 대신 처벌해야 합니다.」
효공이 위앙의 말을 쫓아 태자의 사부을 경형에 처하자 변법이 섬진에서 통하게 되어 섬진은 크게 다스려졌다. 이윽고 효공이 죽고 태자가 서자 평소에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던 공실의 귀척들이 위앙을 죽이려고 하였다. 위앙이 도망쳤으나 오히려 반란죄로 몰려 잡혀와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서 죽었다.
혜문군 원년 기원전 337년, 초(楚), 한(韓), 조(趙), 촉(蜀)나라가 사람을 보내와 래조하였다.
혜문군2년 기원전336년, 천자가 사람을 보내와 하례를 올렸다.
혜문군4년 기원전334년. 천자가 문왕과 무왕의 제사에 올린 고기를 보내왔다. 같은 해 제(齊)와 위(魏)가 왕호(王號)를 칭했다.
혜문군5년 기원전333년, 음진(陰晉) 사람 서수(犀首)를 대량조(大良造)로 삼았다.
혜문군6년 기원전332년, 위(魏)나라가 음진(陰晉)의 땅을 섬진에게 바쳤다. 섬진이 음진을 영진(寧秦)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혜문군7년 기원전331년, 공자앙(公子卬)이 위나라와 싸워 그 장수 용고(龍賈)를 사로잡고 위나라 군사8 만의 목을 베었다.
혜문군8년 기원전330년, 위(魏)나라가 하서(河西)의 땅을 바쳤다.
혜문군9년 기원전329년, 하수를 건너 분음(汾陰)의 피지(皮氏)를 점령했다. 같은 해 위왕(魏王)과 응(應)에서 회맹하였다. 초성(焦城)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항복했다.
혜문군10년 기원전328년, 장의(張儀)를 섬진의 상국으로 삼았다. 위(魏)나라가 상군(上郡)의15개 현(縣)을 바쳤다.
혜문군11년 기원전327년 의거(義渠)에 처음으로 현을 설치했다. 이어서 초성(焦城)과 곡옥(曲沃)을 위나라에 돌려주었다. 의거의 군주가 와서 신하되기를 청했다. 소량(少梁)의 이름을 하양(河陽)이라고 바꾸었다.
혜문군12년 기원전326년, 처음으로 랍제(臘祭)를 올렸다.
혜문군13년 기원전325년, 4월 무오(戊午) 일에 위(魏)와 한(韓) 두 나라가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장의를 시켜 섬(陝)을 공격하게 하여 점령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혜문군14년 기원전324년 개원(改元)했다. 혜문군의 시호는 혜왕(惠王)이다.
혜왕2년 기원전323년, 장의가 제(齊)와 초(楚) 두 나라의 대신들과 교상(嚙桑)에서 회합했다.
혜왕3년 기원전322년, 한(韓)과 위(魏) 두 나라 태자들이 래조하러 들어왔다. 장의가 위(魏)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혜왕5년 기원전320년, 왕이 순수(巡狩)를 나가 북하(北河)에 이르렀다.
혜왕7년 기원전318년, 악지(樂池)를 섬진의 상국으로 삼았다.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齊)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흉노의 군사들과 함께 섬진을 공격했다. 섬진이 서장(庶長) 질(疾)을 시켜 수어(修魚)에 나가 오국의 연합군을 막아 싸우도록 하여 그들의 장수 신차(申差)를 포로로 잡았다. 이어서 조나라의 공자갈(公子渴)과 한나라 태자환(太子奐)을 격파하고 그들의 군사8만2천을 참수하여 죽였다.
혜왕8년 기원전317년, 장의가 다시 위나라에서 돌아와 섬진의 재상이 되었다.
혜왕9년 기원전316년, 사마조(司馬錯)가 촉(蜀)나라를 공격하여 멸했다. 다시 조(趙)나라의 중도(中都)와 서양(西陽)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혜왕10년 기원전315년, 한나라 태자창(太子蒼)이 섬진으로 와서 인질이 되었다. 다시 한나라의 석장(石章)을 공격하여 섬진의 땅으로 만들고 이어서 대장 니(泥)가 이끄는 조나라의 군사를 패퇴시켰다. 의거(義渠)에 출병하여 그 25개의 성을 취했다. 저리질(樗里疾)을 시켜 위(魏)의 초성(焦城)을 공격하자 항복해 왔다. 이어서 한나라를 공격하여 안문(岸門)에서 회전하여 크게 이기고 그 군사 만 명을 참수했다. 한나라 장수 서수(犀首)는 달아났다. 공자 통(通)을 촉(蜀)에 봉했다. 연왕 쾌(噲)가 그의 신하 자지(子之)에게 군주의 자리를 선양했다.
혜왕12년 기원전313년, 혜왕과 양혜왕이 임진(臨晉)에서 만나 회맹하였다. 서장(庶長) 질(疾)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그 장수 장(庄)을 포로로 삼았다. 서장 장(章)이 초나라의 단양(丹陽)을 공격하여 그 장수 굴개(屈匃)를 포로로 하고 군사 8만명을 참수했다. 다시 초나라 땅이었던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성과 그 주위의 600리 땅을 점령하고 그 곳에 한중군을 설치했다. 초나라가 반격하여 옹지(雍氏)를 포위하자 섬진의 서장 질(疾)이 한나라와 힘을 합쳐 동쪽의 제나라를 공격하고 이어서 도만(到滿)을 보내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정벌했다.
혜왕14년 기원전312년 초나라를 정벌하여 소릉(邵陵)을 취하고 융족인 단(丹)과 리(犁)가 복속해 와서 신하가 되었다. 촉나라의 상국 장(壯)이 촉후(蜀侯)를 살해하고 항복해 왔다. 혜왕이 죽자 왕자 무왕(武王)이 섰다. 한(韓), 위(魏), 제(齊), 초(楚), 월(越)나라가 모두 사절을 보내어 복종을 맹세했다.
무왕(武王) 원년 기원전311년 양혜왕과 임진(臨晉)에서 만나 회맹하고 촉나라의 상국이었던 장(壯)을 죽였다. 장의와 위장(魏章)이 섬진에서 몸을 피하여 위나라로 갔다. 의거를 정벌하고 같은 융족의 나라인 단(丹)과 리(犁)를 공격하였다.
무왕2년 기원전310년, 처음으로 승상(丞相)을 두어 저리질(樗里疾)과 감무(甘茂)를 좌우 승상에 임명하였다. 장의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무왕3년 기원전309년, 한양왕(韓襄王)과 임진(臨晉)의 들판에서 만나 회맹 하였다. 남공(南公) 게(揭)가 죽었다. 저리질이 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무왕이 감무에게 말했다.
「과인이 유람용 수레를 타고 삼천(三川)을 지나 락읍에 가서 주도(周都)를 볼 수만 있다면 내가 죽어도 한(恨)이 없겠소!」
그해 가을 감무와 서장(庶長) 봉(封)을 시켜 의양(宜陽)을 정벌하게 했다.
무왕4년 기원전308년, 한나라의 의양(宜陽)을 함락시키고 그 군사 6만 명을 죽였다. 다시 하수(河水)를 건너 무수(武遂)73)에 성을 쌓았다. 위나라 태자가 래조하러 들어왔다. 무왕은 장사였기 때문에 힘겨루기를 좋아했다. 장사 임비(任鄙), 오획(烏獲), 맹열(孟說) 등을 모두 높은 관직에 올렸다. 왕과 맹열이 정(鼎)을 들어 힘겨루기를 하다가 무왕의 무릎뼈가 부러졌다. 그해 8월에 무왕이 죽자 맹열의 종족들은 멸족 당했다. 무왕은 위녀(魏女)를 왕비로 삼았으나 그 사이에서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무왕의 뒤는 그의 이모제가 이었다. 이가 소양왕(昭襄王)이다. 소양왕의 모친은 초나라 여인으로써 성은 미씨(羋氏)인데 선태후(宣太后)라 불렀다. 무왕이 죽을 때 소양왕은 연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연왕이 귀국을 허락하여 진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소양왕 원년 기원전306년, 엄군(嚴君) 질(疾)이 상국이 되었다. 감무가 진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다.
소양왕2년 기원전305년, 혜성이 나타났다. 서장장과 조정의 대신들 및 지방의 제후와 공자들이 역모를 일으켰으나 발각되어 모두 주살되었다. 혜왕(惠王)의 비(妃)인 혜문후(惠文后)까지 연루되어 결국은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무왕의 상을 아직 끝내지 못한 도무왕후(悼武王后)가 진나라를 떠나 친정인 위나라로 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소양왕3년 기원전304년, 왕이 20세의 성년이 되어 관을 썼다. 초왕(楚王)과 황극(黃棘)에서 회맹하고 상용(上庸)의 땅을 주었다.
소양왕4년 기원전303년, 포판(蒲阪)을 취했다.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소양왕5년 기원전302년, 위왕이 응정(應亭)에 와서 조현을 하여 다시 위나라에게 포판을 돌려주었다.
소양왕6년 기원전301년, 촉후(蜀侯) 휘(輝)가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조(司馬錯)를 보내 촉나라를 평정했다. 서장(庶長) 환(奐)이 초나라에 쳐들어가 그 군사 2만을 죽였다. 경양군(涇陽君)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일식이 있어 낮임에도 어둡게 되었다.
소양왕7년 기원전300년, 신성(新城)을 함락시켰다. 저리질(樗里疾)이 죽었다.
소양왕8년 기원전299년, 장군 미융(羋戎)을 시켜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미융이 신시(新市)를 빼았았다. 제나라는 장자(章子)를, 위나라는 공손희(公孫喜)를, 한나라는 포연(暴鳶)을 각각 장군으로 보내어 초나라의 방성(防城)을 공격하고 그 장수 당매(唐眛)를 죽였다. 조나라가 중산국을 함락시키자 그 군주는 제나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죽었다. 위공자(魏公子) 경(勁), 한공자(韓公子) 장(長)이 위(魏)와 한(韓)나라로부터 각각 분봉을 받아 제후가 되었다.
소양왕9년 기원전298년, 제나라의 공자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이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서장환(庶長奐)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8개의 성읍을 빼앗고 초장(楚將) 경쾌(景快)를 죽였다.
소양왕10년 기원전297년, 총회왕(楚懷王)이 입조하자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시켰다. 맹상군 전문을 금수(金受)의 말을 듣고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한 다음 감금시켰다. 맹산군의 뒤를 이어 루완(樓緩)이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소양왕11년 기원전296년,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송(宋)의 다섯 나라와 조나라의 중산(中山)이 일제히 군사를 내어 진나라를 공격하고 염지(鹽氏)에 이른 다음 회군하였다. 진(秦)이 한(韓)과 위(魏) 두 나라에 하수(河水) 이북에서 봉릉(封陵)에 이르는 땅을 주고 화의(和議)를 맺었다.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초회왕(楚懷王)이 진나라에서 달아나 조나라로 갔으나 조나라가 받아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회왕은 다시 진나라로 돌아가서 얼마 있지 않아 그곳에서 죽었다. 진나라는 초회왕의 시신을 초나라에 돌려주어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다.
소양왕12년 기원전295년, 루완(樓緩)을 승상의 자리에서 면직시키고 양후(穰侯) 위염(魏冉)을 임명했다. 식량 5만 석을 초나라에 보냈다.
소양왕13년 기원전294년, 상수(向壽)가 한나라를 정벌하여 무시(武始)를 점령하였다. 좌경(左更) 직에 있던 백기(白起)가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오대부(五大夫)의 직에 있던 례(禮)가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위(魏)나라로 망명했다. 장사 임비(任鄙)를 보내어 한중(漢中)을 지키게 하였다.
소양왕14년 기원전293년, 좌경(左更) 백기(白起)가 다시 한(韓)과 위(魏)의 연합군과 이궐(伊闕)에서 크게 싸워 적군 24만 명의 수급을 베고 위장(魏將) 공손희(公孫喜)를 포로로 잡은 후에 계속해서 진군하여 한위(韓魏)의 다섯 개 성을 함락시켰다.
소양왕15년 기원전292년, 대량조(大良造)로 관직이 오른 백기(白起)는 위나라에 다시 쳐들어가 원(垣) 땅을 빼앗았으나 후에 다시 돌려주었다. 다시 남쪽으로 초나라로 진격하여 완성(宛城)88)을 점령했다.
소양왕16년 기원전291년, 좌경(左更)으로 관작이 오른 사마조(司馬錯)는 지(軹)와 등(鄧)에 이르는 땅을 공격하여 진나라 영토로 만들었다. 승상 위염(魏冉)을 면직하고 공자불(公子巿)은 완(宛)에, 공자회(公子悝)는 등(鄧)에, 위염(魏冉)은 도(陶)에 각각 봉하여 제후로 만들었다.
소양왕17년 기원전290년, 한나라의 성양군(城陽君)이 입조 하였다. 이어서 동주(東周)의 군주도 와서 래조하였다. 진나라가 원(垣) 땅을 위나라의 포판(蒲阪)과 피지(皮氏)와 교환하였다. 왕이 의양(宜陽)을 방문하였다.
소양왕18년 기원전289년 사마조가 원(垣)과 하옹(河雍)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점령한 후에 다리를 끊었다.
소양왕19년 기원전288년, 진왕이 서제(西帝)를 제왕(齊王)이 동제(東帝)를 칭했다가 얼마 후에 제호(帝號)를 취소하였다. 여례(呂禮)가 스스로 찾아와 투항했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을 함락시키자 송왕은 위나라로 달아났다가 온(溫) 땅에서 죽었다. 한중(漢中)을 지키던 장사 임비(任鄙)가 죽었다.
소양왕20년 기원전287년, 왕이 한중(漢中)에 들렸다가 상군(上郡)을 거쳐서 북하(北河)를 방문하였다.
소양왕21년 기원전286년, 사마조가 위나라의 하내(河內)를 공격하였다. 위나라가 안읍의 땅을 진나라에 바치자 진나라는 안읍에 살던 위나라 백성들을 쫓아내고 안읍을 중심으로 하동(河東)의 땅에 진나라 사람들은 모집하여 이주시켰다. 진나라는 하동으로 이주한 진나라 사람들에게 작위를 각기 하사했다. 죄인 중에서도 선발하여 그 죄를 용서한 후에 이주심켜 하동에 살게 하였다. 경양군(涇陽君)을 완(宛)에 봉했다.
소양왕22년 기원전285년, 몽무(蒙武)를 시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하동의 땅을 분할하여 9개의 현을 두었고 초왕과는 완(宛)에서, 조왕과는 중양(中陽)에서 각각 만나 회맹하였다.
소양왕23년 기원전284년, 도위(都尉) 사리(斯離)가 삼진과 연나라 군사들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소양왕24년 기원전283년, 초왕과 언(鄢)에서 만나 회맹하고 다시 양(穰) 땅에서 만났다.
소양왕25년 기원전282년, 조나라의 두 성을 함락하고 한왕과는 신성(新城)에서, 위왕과는 신명읍(新明邑)에서 연달아 회맹을 행했다.
소양왕26년 기원전281년, 죄인들을 사면하여 양성(穰城)으로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양후(穰侯) 위염(魏冉)이 승상의 자리에 다시 복위하였다.
소양왕27년 기원전 사마조(司馬錯)가 초나라를 정벌했다. 다시 범죄자들을 사면하여 그들을 남양(南陽)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백기(白起)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대(代) 땅의 광랑성(光狼城)을 빼앗았다. 다시 사마조에게 명하여 농서(隴西)에서 군사들을 징발하고 촉 땅을 지나 초나라 땅인 검중(黔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소양왕28년 기원전279년, 대량조(大良造)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하고 언성(鄢城)과 등성(鄧城)을 빼앗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 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소양왕29년 기원전278년, 대량조 백기가 초나라로 진격하여 영도(郢都)를 점령한 후에 현소(縣所)를 설치하여 남군(南郡)이라고 하였다. 초왕은 영도에서 달아났다. 주군(周君)이 래조하러 왔다. 진왕과 초왕이 양릉(襄陵)에서 만나 회맹하였다. 백기가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져 제후가 되었다.
소양왕30년 기원전277년, 촉을 지키던 장수 장약(張若)이 초나라로 진격하여 초나라의 무군(巫郡)과 강남(江南)을 탈취하여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하였다.
소양왕31년 기원전276년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양좌성(兩座城)을 점령하였다. 초나라가 강남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승상인 양후(穰侯) 위염(魏冉)은 군사를 이끌고 위(魏)나라로 진격하여 곧바로 대량(大梁)에 당도하여 포연(暴鳶)이 이끄는 위나라의 군사를 대파하고 그들의 군사4만의 목을 베었다. 포연은 달아나고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세 개의 현을 바치면서 강화를 청해 왔다.
소양왕33년 기원전274년, 객경 호양(胡陽)을 시켜 위나라의 권성(卷城), 채양(蔡陽), 장사(長社)를 모두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서 화양(華陽)에서 망묘(芒卯)가 이끌던 위군을 대파하고 그 군사15만 명의 목을 베었다. 위나라가 남양(南陽)을 바치며 강화를 요청해 와서 허락했다.
소양왕34년 기원전273년, 위(魏)와 한(韓) 두 나라에게 상용(上庸)의 땅을 떼어주어 일군(一郡)을 만들게 한 후에 남양(南陽)의 죄인(罪人)들을 용서한 후 옮겨 살게 하였다.
소양왕35년 기원전272년, 한(韓), 위(魏), 초(楚)와 연합하여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남양군(南陽郡)을 설치하였다.
소양왕36년 기원전271년, 객경 조(灶)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두 고을을 취하여 양후(穰侯)에게 바쳤다.
소양왕38년 기원전269년, 중경(中更) 호양(胡陽)이 조나라의 연여(閼與)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소양왕40년 기원전267년, 도태자(悼太子)가 위나라에서 죽어 시신을 진나라로 모셔와 국장을 치르고 지양(芷陽)에 장사 지냈다.
소양왕41년 기원전266년, 여름 위나라를 공격하여 형구(邢丘)와 회(懷)의 두 땅을 점령했다.
소양왕42년 기원전265년, 안국군(安國君)을 태자로 삼았다. 그해 9월 양후(穰侯)가 승상의 직에서 물러나 자기의 봉지인 도(陶)로 갔다. 10월 선태후(宣太后)가 죽어 지양(芷陽)의 여산(驪山) 밑에 장사 지냈다.
소양왕43년 기원전264년, 무안군 백기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아홉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한나라 군사 5 만명의 목을 베었다.
소양왕44년 기원전263년, 한나라의 남양군(南陽郡)을 공격하여 점령하여 진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소양왕45년 기원전262년, 오대부(五大夫) 분(賁)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열 개의 성을 취했다. 섭양군(葉陽君) 회(悝)가 도성을 탈출하여 자기의 봉지로 갔으나 봉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죽었다.
소양왕47년 기원전260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군(上党郡)을 공격하자 상당군의 태수가 상당군을 들어 조나라에 투항했다. 진나라가 방향을 바꾸어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반격을 가하고 대치하였다. 진나라가 무안군 백기를 보내 조군을 공격하게 하여 장평(長平)에서 대파하였다. 백기가 항복한 조나라 40여 만의 군사를 모두 흙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소양왕48년 기원전259년, 10월 한나라가 원옹(垣雍)의 땅을 바쳤다. 진나라가 군사를 삼대로 나누고 무안군을 불러 귀국토록 했다. 왕흘(王齕)이 무안군을 대신하여 군사들을 지휘하여 조나라의 피뢰(皮牢)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사마경(司馬梗)이 한나라의 북쪽 땅인 태원(太原)을 평정하여 한나라 소유의 상당군의 전부를 점령하여 진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정월 싸움을 중지시키고 상당을 지키게 하였다. 그해 10월 오대부(五大夫) 능(陵)이 조나라의 도성 한단(邯鄲)을 공격하였다.
소양왕49년 기원전258년, 정월 진나라가 증원군을 보내어 사마경을 돕게 했으나 사마경은 끝내 공을 세우지 못했다. 진나라는 사마경을 대장의 자리에서 면직하고 왕흘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그해 10월 장군 장당(張唐)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빼앗은 땅을 부장(部將) 채위(蔡尉)에게 지키게 하고 출전하였으나 채위가 지키지 못하고 그 땅을 잃었음으로 장당이 돌아와 참수했다.
소양왕50년 기원전257년, 10월 무안군 백기가 죄를 얻어 작록을 박탈하고 사병으로 만들어 음밀(陰密)로 옮겨가 살게 하였다. 장당(張唐)이 계속해서 정(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해 12월 군사를 증원하여 분성(汾城) 근처에서 주둔하였다. 무안군 백기가 죄를 다시 짓자 죽였다. 왕흘(王齕)이 한단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거두어 분성 근처의 주둔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두 달 뒤에 위나라를 공격하여 파하고 그들의 군사 6천 명의 목을 베었다. 싸움 중에 죽은 2만 명이 넘는 위(魏)와 초(楚) 두 나라 군사들의 시체가 하수에 둥둥 떠서 흘러갔다. 왕흘은 다시 분성 근처의 주둔지로 돌아가 분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장당은 일지의 군마를 나누어 영신중(寧新中)으로 나아가 점령하고 그곳의 이름을 안양(安養)이라고 개명하였다. 처음으로 하수(河水)에 다리를 짓고 그 이름을 포진교(蒲津橋)라 했다.
소양왕51년 기원전256년 장군 규(摎)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양성(陽城)과 부서(負黍)를 취하고 그 군사 4만 여명의 목을 베었다.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여 20여 개의 현을 점령하고 9만 여명의 군사들 목을 베었다. 서주(西周)의 군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중원의 제후국들과 맹약을 한 다음 천하의 정예로운 군사들이 서주의 경내인 이궐(伊闕)에 모여 진나라를 공격하고 진나라가 양성(陽城)을 통하여 중원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진나라가 장군 규(摎)를 시켜 서주(西周)를 공격하게 하였다. 서주의 군주가 스스로 들어와 머리를 조아리고 죄의 용서를 빌려 서주의 36개 성과 그 주민 3만명을 전부 바쳤다. 진왕이 성과 주민을 받아들이고 서주의 군주를 자기나라로 돌려 보냈다.
소양왕52년 기원전255년, 주나라 백성들이 동쪽으로 달아나고 그 구정(九鼎)은 진나라가 가져왔다. 주나라가 망했다.
소양왕53년 기원전254년, 천하의 제후들이 사절을 보내어 진나라에 복종했다. 위나라가 끝까지 사절을 보내지 않고 버티자 진나라가 장군 규(摎)를 보내 위나라를 정벌하게 하고 오성(吳城)을 빼앗았다. 한왕이 입조하여 위나라를 대신해서 진왕의 령을 받들었다.
소양왕54년 기원전253년, 진왕이 옹성(雍城)의 교외에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올렸다.
소양왕56년 기원전251년, 가을 소양왕 죽고 그 아들 주(柱)가 섰다. 이가 효문왕(孝文王)이다. 그때는 이미 죽은 효문왕의 생모인 당팔자(唐八子)를 태후(太后)로 올리고 선왕인 소양왕과 합께 합장하였다. 한왕은 상복을 입고 입조 하여 문상을 와서 제단에 절을 했으며 다른 제후들도 모두 장상(將相)들을 보내어 문상을 하게 하고 상을 치르는 것을 도왔다.
효문왕 원년 기원전250년, 나라에 사면령을 내려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고, 또한 선왕의 공신들의 공을 치하하고 종친들을 후대하였다. 왕실의 정원과 동물원들을 부셔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었다. 효문왕이 선왕의 상을 끝내고 그해 10월에 기해(己亥) 일에 왕위에 올랐으나 삼일만인 신축(辛丑)일에 죽었다. 그 아들 자초(子楚)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가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 원년 기원전249년,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려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고 선왕 때의 공신들 공적을 표창하고 친족들을 후하게 대하고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었다. 동주(東周)의 군주와 제후들이 모의하여 진나라를 도모하려고 하자 상국 여불위(呂不韋)를 보내 토벌하여 죽이고 동주의 영토는 모두 진나라에 병합하였다. 진나라가 동주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양인(陽人)의 땅을 주군(周君)에게 주어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몽오(蒙驁)를 시켜 한나라를 정벌하게 하자 한나라가 성고(成皐)와 공성(鞏城)을 바쳤다. 마침내 진나라의 국경은 대량(大梁)과 접하게 되었다. 주나라 땅이었던 삼천(三川) 지방에 삼천군(三川郡)을 설치하였다.
장양왕2년 기원전248년, 몽오를 시켜 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태원(太原)을 점령하였다.
장왕왕3년 기원전247년, 몽오가 계속하여 위나라의 고도(高都)와 급(汲)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서 유차(楡次), 신성(新城), 랑맹(狼孟) 등 37개 성을 함락시켰다. 4월에 일식이 있었다.
장양왕4년 기원전247년, 왕흘이 상당군(上党郡)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태원군(太原郡)을 설치하였다.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무기(无忌)가 다섯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에 쳐들어왔다. 진나라가 하외(河外)의 땅으로 퇴각하였다. 이어서 벌어진 싸움에서 몽오가 이끌던 진나라 군사들이 패하여 철수하였다. 5월 병오(丙午) 일에 장양왕이 죽고 그 아들 정(政)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진시황(秦始皇)이다.
진왕 정이 왕위에 올라 26년 만에 처음으로 천하의 36군을 병합하고 통일 국가를 이루어 그 호칭을 시황제(始皇帝)라고 했다. 시황제가 재위 51년 만에 죽고 그 아들 호해(胡亥)가 뒤를 이었다. 이가 이세황제(二世皇帝)다. 이세황제 3년에 제후들이 들고일어나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조고(趙高)가 이세황제를 죽이고 그 아들 영(嬰)을 세웠다. 자영(子嬰)이 선지 한 달 만에 제후들이 자영을 붙잡아 죽이고 이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써있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진나라의 선조는 영성(嬴姓)이다. 구 후손들이 분봉을 받아 각 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면서 그들이 씨가 되었다. 유서씨(有徐氏), 담씨(郯氏), 거씨(莒氏), 종려씨(終黎氏), 운엄씨(運奄氏), 토구씨(菟裘氏), 장량씨(將梁氏), 황씨(黃氏), 강씨(江氏), 수어씨(修魚氏), 백명씨(白冥氏), 비렴씨(蜚廉氏), 진씨(秦氏) 등은 모두 같은 성(姓)에서 나온 씨족들이다. 후에 진(秦)의 선조인 조보(造父)가 조(趙) 땅에 봉해지자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 관련 사자성어
1) 원철골수 (怨徹骨髓)
.원한 (怨恨)이 깊어 잊을 수 없다는 뜻.
.골수 (骨髓)는 마음 속 깊은 곳을 비유한 말이다. 원철골수 (怨徹骨髓)는 ‘원한이 골수를 꿰뚫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다’라는 뜻으로 ‘원한(怨恨)이 깊어 잊을 수 없다’라는 뜻의 고사성어다. _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
중국 춘추시대 (春秋時代), 주(周)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제후(諸侯)들이 천하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서로 공격하며 세력을 키우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들 여러 제후들 중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이 정(鄭)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신하인 백리혜(百里傒)와 건숙(蹇叔) 등이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목공은 백리혜와 건숙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결국 그들의 자식들 세 명을 장수로 하여 정나라를 정벌하라 명하였다.
그러나 정나라를 정벌하러 가던 세 장수는 소장수 현고(弦高)에게 속아 정나라 대신 진(晉)나라에 속한 활(滑)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이에 화가 난 진(晉)나라의 왕이 이들을 무찌르고 세 장수를 사로잡았다.
진(晉)나라 왕의 어머니는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의 딸이었는데, 진(秦)나라의 장수들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무사히 돌려보내기 위해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장수는 정나라가 아닌 다른 곳을 정벌하였고, 또 패배하여 사로잡힌 자들로, 진(秦)나라 목공(繆公)의 이 세 사람을 원망함은 골수(骨髓)에 차 있습니다. 바라건대 이 세 사람을 돌아가게 하여, 나의 아버지인 진(秦)나라 목공(繆公)이 사로잡아 스스로 통쾌하게 그들을 삶아서 죽이게 하십시오.”
진(晉)나라 왕은 어머니의 뜻을 따랐고, 그리하여 사로잡혔던 장수들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원철골수(怨徹骨髓)는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로,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실려 있다.
2) 식마육불음주상인 (食馬肉不飮酒傷人) .덕(德)으로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것을 비유한 말.
.식마육불음주상인 (食馬肉不飮酒傷人)은 ‘말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건강을 해친다’라는 뜻으로 덕(德)으로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것을 비유한 고사성어다. _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
진(秦)나라의 목공(繆公)이 여러 마리의 명마(名馬)를 잃어버렸는데, 알고 보니 기산(岐山) 밑에 사는 삼백여 명의 백성들이 잡아먹은 것이었다. 관리들이 말을 잡아먹은 백성들을 붙잡아 벌을 주려 하자, 목공은 이를 말리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명마를 잡아 먹은 백성들을 용서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술까지 하사하였다.
“군자(君子)는 가축 때문에 사람들을 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건강을 해친다고 들었으니, 저들에게 술을 하사(下賜)하거라.”
후일 진(秦)나라의 목공이 진(晉)나라와 전투를 벌이다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데, 말을 잡아먹었던 기산 밑의 삼백 여 명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목공을 위기에서 구해주어 그 은혜에 보답하였다.
식마육불음주상인(食馬肉不飮酒傷人)은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로,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실려 있다. 당나라 태종 때 편찬한 군서치요(群書治要)에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