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말씀묵상
행복이라는 것(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항상 기뻐하라>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반복해서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금욕하라는 것이 아니라 늘 행복하고 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지금 내가 고통스럽고, 지금 내가 힘든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성경본문에서 ‘너희들이 힘들 수 있지만 기뻐하면 좋겠다, 아니면 너희들이 고통스러울 때에도 기뻐하도록 노력하라!’가 아니라 단호하게 이러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명령어입니다. 분명히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데 왜 우리는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처음 마음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그것을 첫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구원의 확신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연애할 때에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습니까? 그런데 결혼을 하면 그 마음이 사라지고 갈등이 시작됩니다. 처음 마음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 마음을 잊어버리면 사랑의 자리에 분노와 미움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 안에 사라지는 것이 많이 있는데, 머리카락이 사라지고, 기억력이 사라지고, 친구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 중에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즐거움과 웃음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웃지도 않을 뿐 더러 웃는다고 해도 피식 정도입니다.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도 재미없다고 말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도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는 늙어도 너무 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을 만나면 작은 일에도 깔깔거리며 웃는 분들이 있습니다, 소년 소녀와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열정적으로 합니다, 재미있게 합니다, 달려들면서 합니다, 그게 바로 살아있음의 표시입니다.
심리학박사인 이민규박사가 쓴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라는 책에서 웃음은 전염병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교 월리엄 프라이박사의 조사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6세정도의 유치원생들은 하루 평균 300번 정도 웃지만 성인이 되면 그 20분의 1인 15번 정도로 줄어든다고 한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웃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안에 기쁨도 행복도 죽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또 우리가 항상 기뻐하지 않는 이유는 본질을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들이 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꼭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것,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결혼의 본질이다. 이것만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가? 그런데 왜 우리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상하고 불편하고 행복하지 않은가? 그것은 비본질이 자꾸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생각하면 복잡하다. 그럴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꾸민다고 하는 본질에 충실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니 갈등도 있고 서로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욱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지만 곰곰이 본질을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공동체가 아닙니까? 본질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단순해지고 쉽습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부모와 자녀들 모두가 본질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 본질이 무엇입니까? 사랑 아닌가요? 부모도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도 부모를 사랑합니다. 단지 비본질의 문제 때문에 행복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질을 잡고 살면 항상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본질을 붙잡고 비본질을 내려놓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관용”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들!
관용한가요? 신앙인은, 예수쟁이는 관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관대함이 기다려주는 것이고, 믿어주는 것이고, 이해해주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그런데 우리는 사랑으로 행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본질을 붙잡고 나머지는 비 본질이기 때문에 자유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인 것입니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아마도 빌립보교인들 가운데 이런 질문을 사도바울에게 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6-7절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에는 몇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사실 바울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내가 어떻게 될까? 앞으로 감옥생활이 언제 끝날 것인가가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염려는 인간실존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염려를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하는 말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염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가 찾아올 때에 즉시 기도로 전환하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의 삶속에 염려할 것이 생겼습니까? 염려한다고 어떤 변화가 일어남니까? 염려한다고 문제 한 가지라도 풀어집니까?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빨리 기도하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바꾸어서 말하면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염려할 것이 생겼느냐? 그렇다면 빨리 기도모드로 전환하라”, “그리고 염려 없이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고 한다면 기도하는 삶을 살라.” 결국 기도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입니다.
이것은 기도할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이것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기도 가운데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으로 믿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고 베풀어주심에 대해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누가 행복한가요? 감사할 것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불평인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주어도 계속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에 늘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데이비스 대학교 심리학교 교수인 로버트 에먼스 교수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바로 감사하는 태도가 사람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내고자 하는 실험이었습니다. 먼저 자원봉사자를 뽑아 실험그룹을 만들고 이들을 A,B,C 그룹으로 나누어서 그들에게 일주일 동안 세 가지 말과 행동에 집중토록 했습니다.
A그룹은 기분 나쁜 말과 행동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날씨가 왜 이렇게 추운거야, 못살겠다, 이 놈의 나라는 왜 그렇게 사건사고가 많아등과 같은 것들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B그룹은 고마움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음식점에 가서 종업원들에게 고맙습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늘 눈이 왔는 데 너무 멋졌어요 등의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C그룹은 일상적인 말들과 행동에 집중하게 하였습니다. 옷장을 정리했어요, 구두를 샀어요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실험참가자들은 일 주일동안 충실하게 행동한 후에 심리를 분석한 결과 감사하는 태도에 집중한 B그룹의 사람들이 가장 행복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확장하여 1년간 심층분석한 결과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매일 감사하는 태도를 연습하면 더 효과적입니다. 매일 무엇에든 감사하는 사람들이 남을 배려하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여러분의 자리에 감사가 넘치게 하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고 감사가 넘치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결론-하나님의 평강>
결국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어떻게 해주시겠다는 것인가요? 그것에 대한 해답이 바로 7절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런데 사실 빌립보서 4:6절을 암송하고 읽으면서 늘 이런 희망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우리가 구하고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리라.”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쉽게 말하면 상황을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문제가 하나도 해결이 안 되고, 상황이 안 바뀌었는데 마음의 평강이 찾아온다고 행복한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잘 몰라서 던진 질문입니다..
저명한 세포 생물학자이면서 스탠퍼드 의대교수인 브루스 립튼 박사가 1998년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질병과 몸의 부정적인 증상의 95%가 스트레스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문제가 처음 시작되는 곳이 어디인 줄 아쉽니까? 바로 “의식”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의식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이성이 마비되면서 모든 상황이나 환경이 엉망진창으로 바뀐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문제가 되는 판단을 한 경우는 다 의식의 문제, 생각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자주 “귀신에게 홀렸다~ 정신이 빠졌다, 내가 미쳤다, 그때 내가 무엇에 홀렸어”라고 말하는 것은 다 내 생각과 의식의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힐링코드라는 책에서 “무엇이 문제든 십중팔구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관계 문제, 수행능력 문제와 그 밖의 다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문제의 뿌리를 해결해야 한다.”
문제의 뿌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입니다.
잠언 4:23에서도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는 삶에 있어서 객관적 사실은 인생을 통 털어 겨우 10%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90%는 그 일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내가 10%에 대한 사실에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우리의 행복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행복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평강에서 출발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기도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바꾸면 무엇입니까? 바로 “은혜”입니다.
“목사님, 예수 믿는데도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습니다. “진짜 은혜를 못 받아서 그래요” 진짜 은혜를 못 받으니까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은혜 받으면 행복한가? 그렇다. 진짜 은혜 받으면 행복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송상구 목사(시드니예일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