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단상
장 칼뱅(Jean Calvin)의 생가
지난 2016년 6월 20일(월)부터 7월 2일(토)까지 호주에서 출발해 한국을 경유한 유럽(프랑스)방문이 있었다. 6월 21일(화)부터 24일(금)까지 파리한인침례교회(이상구 목사 시무) 비전센터(수양관)에서 “유럽한인디아스포로 신앙공동체 이해(Understanding Korean Christian Diaspora in Europe)”란 주제로 열렸으며 포럼 후 파리인근의 기독문화유적들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_편집자 주
‘기독문화유적지 탐방’ 첫 장소로 느와용(Noyon)에 위치한 장 칼뱅(Jean Calvin, 존 칼빈 또는 요한 칼빈)의 생가를 찾았다. 장 칼뱅(1509년 7월 10일-1564년 5월 27일)은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이다. 현지 숙소에서 1시간 가량 이동해 도착한 느와용은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에 위치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소도시였다. 현재 약 1만5천명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칼뱅은 느와용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았다. 칼뱅이 출생할 때 그의 아버지 제라드는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했고 어머니는 경건한 여인이었지만 일찍 죽었다.
칼뱅의 생가는 3층으로 구성되어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칼뱅 생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는데 그 이후에 남아 있는 그림과 판화의 모습을 바탕으로 본래 모습을 추정해 복원했다고 한다.
칼뱅의 생가는 프랑스 현지에서 사역하는 채희석 목사(프랑스 제자교회 시무)의 설명으로 살펴보았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시발점인 칼뱅의 생가에는 기독교강요 원본과 올리비에땅이 번역한 불란서 성경번역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2층에는 가톨릭의 많은 핍박을 받았던 개혁자들이 큰 절벽 밑에서 핍박을 피해 망을 보며 예배를 드렸던 그림, 어느 곳에서라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조립식이였던 칼뱅의 설교단상, 개혁자들이 화형당하는 모습과 칼뱅의 마지막 유언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 혹은 개신교도를 위그노라 조롱하며 죄인 취급해 붙잡아 배 젓는 노예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는 배 모형 등을 보면서 당시 개신교도들의 순교적 신앙과 칼뱅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개신교도란 이유로 붙잡혀 평생 배에서 노 젓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죽음을 당하거나 자유민의 신분으로부터 해상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함에도 불구고 신앙을 지켰던 당시 개신교도들의 신앙에서 위대함을 느꼈다.
또한 이단심문관에게 잡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절벽에서 망을 보며 진행된 예배와 언제든 빨리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진 조립식 강대상을 보며 프로테스탄티즘이 결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희생을 불사르고 죽음과 박해 앞에서도 담대히 지켜온 유산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칼뱅 생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은 다 의미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경의 무게’라는 그림이었다. 양팔저울의 한쪽에 수많은 사탄과 사제들이 매달려 있고 다른 쪽엔 단 한권의 성경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울은 성경 쪽으로 기울어져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그 성경 뒤쪽에는 칼뱅을 비롯한 여러 종교 개혁자들이 서있었다. 그 무엇보다 말씀의 권위가 무겁고 높음을 보여주며 당시 종교 제도적 권위와 관습보다 성경이 우선함을 잘 보여줬다.
칼뱅의 생가 박물관을 둘러보며 현대 기독교인들의 안일함과 나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칼뱅의 생애 요약
칼뱅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느와용의 가톨릭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학교 까뻬뜨였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뱅은 11살이 되던 해인 1521년 5월부터 대성당으로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칼뱅이 가톨릭교회 신부(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갈등 이후 칼뱅에게 진로를 바꾸길 권했다.
1523년 8월에 칼뱅과 몽모르 가문의 소년 몇이 공부를 더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칼뱅이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삼촌인 리샤르의 집에 머물렀으나 두 달 후에 마르슈 학교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마뚜랭 꼬르디에르에게 라틴어 문법을 배웠다. 비록 칼뱅은 이 학교에 몇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꼬르디에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이후 1562년 꼬르디에르는 칼뱅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옮겨와 가르쳤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칼뱅은 자신의 이름을 요아니스 칼비누스(라틴어: Ioanis Calvinus)로 개명해 이로 인해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523년 말 즈음에 그는 파리 대학교의 몽테귀 컬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인문학자이자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와 라블레 등에게 배울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칼뱅은 당대의 다양한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 사상을 가진 콥(Cop) 가문의 몇 사람과 친분을 가졌으며, 이 시기 칼뱅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그의 사촌인 삐에르 로베르 올리비에땅(Pierre Olivetan) 등이 있다. 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도 역시 장 칼뱅과 비슷한 시기에 이 몽떼귀 학교에 다녔는데, 그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칼뱅은 느와용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사역 대부분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이뤄졌다. 칼뱅은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을 만들었고, 스트라스부르에서 ‘기독교 강요’(2판)을 완성했다. 또한 스트라스부르에서 마르틴 부처를 만났다.
칼뱅의 생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올리비에땅이 번역한 불란서 성경번역본은 1935년 6월 4일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은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앞에 나오는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뱅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뱅은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뱅은 고대교회의 교부중 한 명인 크리소스톰 주교의 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의’의 초판작업도 계속해 1535년 완성했다. ‘기독교 강의’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칼뱅은 1536년 종교개혁을 수용키로 한 제네바로 건너갔을 때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칼뱅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제네바의 종교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하기에 수용하고 바젤로 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제네바로 돌아와 생 피에르 성당에서 바울서신들을 강해하는 성서 교사로서의 임무를 시작했다. 1538년에는 시의회가 교회의 관례들을 제네바에 도입하려 하자 칼뱅은 이에 순응하지 않았고 그해 제네바로부터 추방되어 칼뱅과 파렐은 베른과 취리히를 거쳐 바젤로 갔다.
바젤에서 몇 주를 지낸 후 파렐은 뇌사뗄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목사가 되었다. 칼뱅은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기독교 강요’ 두 번째 판을 준비하기 위해 바젤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러나 1538년 마르틴 부서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슈트라스부르크로 올 것을 종용했고 칼뱅은 프랑스 망명객으로 구성된 교회의 목사가 되어 1539년 김나지움으로 옮겨 신약성서 해석을 가르쳤다. 슈트라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칼뱅은 ‘기독교 강요’ 두 번째 라틴어판 출판(1539년), ‘로마서 주석’ 출판(1540년), 평신도들을 위한 ‘성만찬 소고’(1541년) 등을 집필했다. 1540년 8월에는 재세례파 쟝 스또르되르가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이 즈음 제네바 시의회에서는 칼뱅을 제네바로 돌아오게 할 방안을 강구중이었고, 1540년 10월 칼뱅에게 제네바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칼뱅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1541년 5월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에게 내려졌던 금지령을 폐지하고 만장일치로 칼뱅을 다시 청방하기로 결정해 칼뱅은 마침내 1541년 9월 제네바로 돌아가 노년까지 사역한다.
1556년부터 칼뱅의 건강은 쇠약해져 1558-59년 심하게 앓았다. 1559년에 이르러 비로소 칼뱅은 제네바 시민권을 얻었다. 1564년 초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 중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1564년 2월 2일에 에스겔서를 인용하며 칼뱅은 마지막 강의를 했고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했다. 4월 칼뱅은 제네바 시 장관들과 목회자들과 작별인사를 했고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베자를 추천했다. 1564년 5월 27일 칼뱅은 사망하였고 다음 날 매장되었다. 칼뱅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숭배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의 정확한 무덤의 위치를 알기 어렵다고 한다.
– 장 칼뱅 생가안내
·주소: Musee Calvin et Societe des Amis du Musee Calvin
6, place aristide Briand 60400 NOYON FRANCE
·전화: 33-3 4444 0359
임운규 목사(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