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간양록 : 바다 건너 왜국에서 보낸 환란의 세월
강항 / 서해문집 / 2005.2.28
임진·정유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포로의 수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간 것만은 사실이다. 이들은 일본에 정착하기도 하고 일부는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으며, 극히 운이 좋은 사람만이 조선으로 귀환했다. 귀환한 포로들 중에는 자신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 이도 있다. 지금도 전해지는 것으로는 노인 (魯認)의 ‘금계일기’ (錦溪日記), 정희득 (鄭希得)의 ‘월봉해상록’ (月峯海上錄), 정경득 (鄭慶得)의 ‘만사록’ (萬死錄), 정호인 (鄭好仁)의 ‘정유피란기’ (丁酉避亂記)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으뜸은 역시 강항의 ‘간양록’이다.
‘간양록’은 강항이 정유재란 중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다가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피난 중에 아비와 헤어졌을 뿐 아니라 자식들을 잃은 사연, ‘적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 하며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적에게 구출되어 낯선 일본 땅까지 끌려간 일, 몇 번이나 탈출을 도모하다가 붙잡힌 일,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여러 포로들의 삶 등이 이 책에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강항은 그 문장이 일품으로, 이는 ‘간양록’ 속에 실려 있는 수십 편의 자작시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환란 생활 중에 겪은 수난과 고독, 나라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 임 (조선 왕)에 대한 그리움을 애절하게 읊은 그의 시는 그 자체로 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간양록’은 뒤에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통신사 일행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인식되기도 했다고 한다.

– 강항이 정유재란 중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다가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책
책의 원래 제목은 죄인이 타는 수레를 가리키는 ‘건차록 巾車錄’이었으나, 뒤에 그의 제자들이 간양록 (看羊錄)으로 바꾸었다. ‘간양 (看羊)’은 강항이 지은 시로 스스로를 ‘외로운 양치기’에 빗댄 구절이다.
피난 중에 아버지와 헤어지고, 자식들까지 읽은 사연, ‘적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 적에게 구출되어 일본 땅까지 끌려간 일,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일, 일본에 억류된 여러 포로들의 삶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환란 중에 겪은 수난과 고독, 나라에 대한 염려, 임금에 대한 그리움 등을 읊은 수십 편의 자작시도 함께 실렸다.
목판본의 1권 1책으로 규장각도서이다. 看羊은 흉노에 포로로 잡혀갔던 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로, 본래의 제목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巾車錄이라 하였으나, 1656년 (효종 7) 책이 간행될 때 제자들이 강항의 애국충절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간양으로 고쳤다. 3년 동안 지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본의 지리, 풍토, 인문 (人文), 兵備 등과 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포로가 되었을 때부터 귀국하였을 때까지의 일기를 涉亂事蹟이라 하여 권말에 첨부하였다.
○ 목차
역자 서문
국역 간양록을 다시 펴내며
‘간양록’에 붙이는 유계(兪啓)의 글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賊中奉疏]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賊中聞見錄]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告?人檄]
승정원에 나아가 여쭌 글[詣承政院啓辭]
환란 생활의 기록[涉亂事迹]
‘간양록’에 붙이는 윤순거(尹舜擧)의 끝말

○ 저자소개 : 강항 (姜沆, 1567 ~ 1618)
강항 (姜沆, 1567년 6월 23일 / 음력 5월 17일 ~ 1618년 6월 27일 / 음력 5월 6일)의 본관은 진주 (晉州), 자는 태초 (太初), 호는 수은(睡隱)으로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1588년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 박사, 교서관 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좌랑, 형조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분호조판서 이광정 (李光庭)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영광에서 김상준 (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영광도 적에게 함락되고, 강항은 가족과 함께 해로로 탈출하려다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적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고초를 당하다가 1600년 귀국할 때까지,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기록하여 우리의 국익에 보탬이 될 만한 내용들을 엮은 것이 바로 간양록(看羊錄)이다. 또한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를 만나 그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元祖가 되기도 하였다. 1600년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고국에 돌아온 뒤 1602년 대구 교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1608년 순천 교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로 수은집(睡隱集), 운제록(雲堤錄), 건거록(巾車錄), 강감회요(綱鑑會要) 등이 있다.
역자 : 이을호
호는 현암(玄庵). 경술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해에 태어나 중앙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중앙고보를 나왔으며, 경성 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찍이 동무 이제마와 함께 사상의학을 연구하였던 최승달의 문하에서 『동의수세보원』을 익히고, 이를 번역·출간하여 이제마의 사상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1937년 영광 갑술구락부 및 체육단을 주도하여 광복운동에 투신하고 2년여의 옥중생활을 겪으면서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한국의 문화와 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1955년 전남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특히 정약용을 비롯한 한국 실학사상의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향년 88세로 서거하였다. 저서로는 『다산경학사상연구』, 『개신유학사시론』, 『한사상의 묘맥』 등 한국의 정신적 실체를 밝힌 논문 100여 편이 있으며, 유고집 『이을호전서』 9책 24권을 남겼다.

○ 책 속으로
정유년 침략 때의 일입니다. 수길이는 출정 장병들에게 이런 엄포를 놓았습니다.
“사람마다 귀는 둘이요 코는 하나야! 목을 베는 대신에 조선 놈의 코를 베는 것이 옳다. 병졸 하나에 코 한 되씩이야! 모조리 소금으로 절여서 보내도록 하라.”
이렇게 적장에게 명령을 내려서 적장들은 제 콧수를 채운 뒤에야 비로소 사로잡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니 이러한 민족적 참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적괴는 산더미같이 실어 오는 코를 일일이 검사한 다음에 북문 밖 10리만큼 되는 데에 쌓아 산 하나를 만들었으니 동포의 참변을 호소할 곳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일 년이 채 못 되어 제 배때기 속에다 소금을 처박게 되었으니 세상일은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_ p. 62~63
맏형이 돌아가실 적에 말문이 어둔하여 종이를 빌려 기록하신 말이 있다. “네가 있으니 나는 잊고 간다. 형수를 부탁한다.” 하셨으니, 그 말씀 아직도 역력하건만 이 일이 웬일인가! 너무도 기막히고 너무도 원통한 이 사실을 호소할 곳조차 없었다. 내 목숨마저 언제 어찌 될지 모르질 않나! 종놈들이라 해 봤자 나를 버리고 도망간 놈은 고스란히 살게 되고, 차마 떨어질 수 없다며 따라선 놈들은 도리어 죽게 되니 애달픈 일이었다. 기구한 운명이라고 치기에는 너무도 안타까운 사실이 아닌가!
놈들은 뭇 배를 끌고 남으로 내리 뺐다. 영산창 우수영을 지나 순천에 배를 댔는데 놈들은 순천을 중심으로 갯가에다 둥그렇게 성을 쌓고 뱃전을 지어놓고 있었다. 성은 하늘에 솟구쳐 은하수를 가르듯 하고 뭇 배는 떼를 지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포로들을 실은 배 100여 척만이 큰 바다 물결에 출렁거릴 뿐이었다. 잡혀 온 날을 손꼽아 보니 오늘이 아흐레째로구나! 그래도 죽지 않은 게 용해. 물 한 모금 적시지 않았건만 그래도 멀뚱멀뚱 살아 있으니 말이야. _ p. 194

○ 출판사 서평
– 조선의 선비가 쓴 ‘포로 실기문학’의 백미 『간양록』
임진·정유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포로의 수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간 것만은 사실이다. 이들은 일본에 정착하기도 하고 일부는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으며, 극히 운이 좋은 사람만이 조선으로 귀환했다. 귀환한 포로들 중에는 자신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 이도 있다. 지금도 전해지는 것으로는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 정희득鄭希得의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 정경득鄭慶得의 『만사록萬死錄』, 정호인鄭好仁의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 등이 있으며, 그 가운데 으뜸은 역시 강항의 『간양록』이다. 『간양록』은 강항이 정유재란 중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다가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 적국의 실태와 그들의 생활상을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피난 중에 아비와 헤어졌을 뿐 아니라 자식들을 잃은 사연, ‘적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겠다’ 하며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적에게 구출되어 낯선 일본 땅까지 끌려간 일, 몇 번이나 탈출을 도모하다가 붙잡힌 일,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여러 포로들의 삶 등이 이 책에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강항은 그 문장이 일품으로, 이는 『간양록』 속에 실려 있는 수십 편의 자작시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환란 생활 중에 겪은 수난과 고독, 나라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 임(조선 왕)에 대한 그리움을 애절하게 읊은 그의 시는 그 자체로 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간양록』은 뒤에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통신사 일행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인식되기도 했다고 한다.

– 외로운 양치기 강항과 『간양록』
이 책의 맨 처음 제목은 『건차록 巾車錄』으로 강항이 손수 붙인 이름이다. ‘건차’란 본래 죄인이 타는 수레로서, 강항은 포로가 되어 왜국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일에 대해 스스로를 나라의 죄인으로 자처한 데서 이러한 제목을 단 것이다. 그러나 뒤에 그의 문인과 제자들이 그의 문집을 정리하여 책으로 펴내는 가운데 제목을 『간양록看羊錄』으로 바꾸었다. ‘간양 看羊’은 강항이 지은 시에 스스로를 ‘외로운 양치기’에 빗댄 구절, 또 권석주 權石州의 시 (“郎爲看羊落 書?賴雁傳”)에 소중랑의 죽지 않은 절개를 읊조리며 ‘간양看羊’이라 한 것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1597 년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강항은 남원에 내려온 분호조참판 이광정의 군량미 운반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주한 뒤 육지로의 길이 열리고 왜군은 파죽지세로 몰려왔다. 남원이 함락되었다. 강항은 이제 영광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영광까지 적에게 짓밟히고 애써 모은 의병들 또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강항은 하는 수 없이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으나 일본 수군에게 붙잡혀 포로로서 일본 땅에 끌려간다. 『간양록』은 바로 이때부터 1600년에 귀국할 때까지의 기록으로,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 [賊中奉疏], 적국에서 보고 들은 것[賊中聞見錄],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 [告?人檄], 승정원에 나아가 여쭌 글 [詣承政院啓辭], 환란 생활의 기록 [涉亂事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적국의 포로로 살면서도 나라의 임금을 생각하며 적국의 실정을 탐문하여 보고하고,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포로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격려하며, 나라의 방비를 걱정하는 등 나라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을 절절하게 토로하고 있다. 또한 강항은 조선의 관리이자 독서를 즐기며 글과 그림에 능한 조선의 선비로, 강항은 후지와라 (藤原醒窩)와 아카마쓰 (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특히 후지와라에게는 조선의 과거절차, 춘추석전 (성균관에 모신 공자를 제사 지내는 절차), 경연조저 (임금께 유학 경전을 강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가르치는 일) 등을 전했으며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그럼에도 포로된 그의 신세는 외로운 양치기 (看羊)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