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공동체 론 : 화해와 통합의 사회·정치적 기초
박호성 / 효형출판 / 2009.9.10

– 공동체 사상의 역사를 연구·집대성하여 화해와 소통, 통합으로 나아가는 실천적 길을 제시하다
“오래된 ‘공동체 이론’을 21세기의 실천적 담론으로 생환(生還)하고 있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연상케 한다.“ _ 신영복(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공동체 사상의 역사를 연구·집대성하여 화해와 소통, 통합으로 나아가는 실천적 길을 제시하는 ‘공동체론’. 서구 사회에서 2천 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공동체 사상의 풍성하고 다양한 논의 및 그 실천 사례를 집대성한 이 책은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올바르고 유효한 공동체적 가치를 구축ㆍ제시하고 있다.
본문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삶의 공동체’는 공동체 개념의 역사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퇴니스(Tonnies)까지 최선의 ‘삶의 공동체’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관한 고전 사상계의 모색 과정을 분석한다. 주로 유토피아에 뿌리내린 머릿속 구상에서부터 좌절로 끝난 실천적 공동체 실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동체 구상들을 살펴본다.
2부 ‘공동체적 삶’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왜 바람직한 일인지, 그리고 그것을 거부 또는 정당화하는 논리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이론적·현실적으로 점검해본다. 이를 위해 개인주의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 자유주의의 본질 및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수행한다. 아울러 현실적 사례를 대한 구체적인 검증을 위해 한국적 공동체 의식의 특성을 해부하고, ‘연대’의 개념 및 정당성, 그리고 그 인간학적 기초를 분석한다.
○ 목차
서론
1부 ‘삶의 공동체’
2부 ‘공동체적 삶’
결론
○ 저자소개 : 박호성 (朴虎聲)
서울대학교 문리대 외교학과 졸업하고, 서독 베를린 대학교에서 정치학 및 역사를 공부하여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7년부터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정치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미국 버클리 대학교,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연구 교수를 지냈다.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인 계급 문제와 민족 문제에 돈독한 관심을 두고 꾸준히 연구하고자 노력해 학술단체협의회,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정치연구회에서 대표 등의 직책을 맡아 아울러 일했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동대학 현대정치연구소 소장 및 참여사회연구소 이사장으로도 일하고 있다.
지은 책은 서독에서 출판한 박사학위 논문 『Sozialismus und Nationalismus』(1986)와,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1989)에서 시작하여, 『평등론 :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맑스주의의 이론과 현실』(1994), 『노동운동과 민족운동』(1994), 『남북한 민족주의 비교연구 : ‘한반도 민족주의’를 위하여』(1997),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2005), 『휴머니즘론』(2007) 외에 여러 번역서와 논문이 있다. 특히 『평등론』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한 평등에 관한 체계적 연구라 평가되어 한국정치학회 학술상(1996)을 받았다.
그 외에 수상록 『인간적인 것과의 재회 : 바람을 비추는 등불처럼』(1998)과 시평집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 : 호랑이의 자유, 앵무새의 평등』(1999), 『우리 시대의 상식론』(2006) 등을 펴냈다.
『공동체론』으로 2010년 한국출판문화상 학술상을 수상했다.
○ 책 속으로
1.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고 설파한 법정 스님의 법어가 나를 경건하게 배후 조정하였음은 물론이다. (9면)
2. 우리나라의 경우 학연, 지연, 혈연 등 지나친 공동체적 편애가 자아내는 뿌리 깊은 병폐로 인해 온 사회가 얼마나 고달픈 숙환에 시달리고 있는가. (10면)
3. 하나는 ‘검사’ 같은 사람인데, 남의 잘못만 파고들어 무슨 결함이 있나 없나 하는 것만 열심히 파헤치려들고, 다른 한 부류는 ‘중매꾼’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라도 두 상대를 잘 화합시켜보려고, 좋은 말, 따스한 덕담만 애써 찾더라는 것이다. 그러곤 말을 이어서, “나 역시 검사처럼 살아온 것만 같아, 혹여나 내가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솔찬히 중매꾼처럼 살아보고 싶으이”하고 말하며 우울한 낯빛으로 술잔을 비웠다. 나는 그분의 겸허한 인생론에 큰 감동을 받았다. (11면)
4. … 그런 탓에 나는 이따금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었던 덕에, 난쟁이임에도 정작 거인보다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을 때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 길을 간다”는 중국의 옛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야말로 천리마의 꼬리에 단단히 달라붙은 한 마리의 파리였다. (22면)
5. 그러나 작업을 끝낸 지금은 “높고 튼튼한 제방도 개미와 땅강아지 구멍 때문에 무너진다”는 한비자의 말씀이 새로이 나의 뇌리를 파고든다. (22면)
6.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인주의’이다.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는 바로 개인주의이과, 또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개인’은 곧 ‘거인’이다. 힘 있는 존재 만이 ‘자유경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28면)
7.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호랑이들만이 한껏 활개치도록 만든 사회적 불평등을 튼튼히 구축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개인주의는 기회만 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가면서까지 이내 날렵한 이기주의로 손쉽게 변신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다. 하기야 벌써부터 ‘독주’의 자유만 있지, ‘공생’의 여유는 찾기 힘들지 않았는가. (28, 29면)
8. 더구나 전 세계를 단일시장화하는 ‘세계화’의 확산과 더불어 소비주의, 물신주의가 동시에 세계화하고 있다. 국제적인 차원으로까지 비약하여 ‘거인’의 독주만 옹호되고 장려되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도덕적 진보나 인간적 자아실현 등의 이상적 가치들은 비실용적인 것, 속절없는 것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다. 도처에 자신의 발가벗은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인형 인간’만 활보한다. ‘공익’에 대한 존중심이 이러한 황금만능주의의 관심거리가 될 리 있겠는가. (29면)
9. 이처럼 세계화가 질주하는 대로를 따라 자유경쟁과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까지 더불어 질주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 심오한 경쟁주의에 편승한 심각한 약육강식의 사회윤리가 일상화되면서, 결국 대다수의 약자들이 도움을 호소할 길을 찾지 못한 채 대책 없이 쓰러지고 있다. 어디에서 한 뻠의 인도주의라도 찾을 수 있겠는가. (29면)
10.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남한식 ‘출신성분’을 따지는 바로 이러한 부정적 공동체 의식이 전체 사회의 규범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32면)
11. ‘개체화’와 ‘공동체 해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시대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은 공적 세계보다는 자기 자신의 사적 세계에 결정적으로 집착한다. 그러므로 공공 영역이 공공선을 위해 봉사하는 곳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안전과 신분을 보장하는 보조 장치 정도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영역을 식민화하는 주체, 그것은 바로 개인의 사적 세계”라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37, 38면)
12. 특히 Michael Opielka, Gemeinschaft in Gesellschaft … 그는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공동체 문제와의 직접적인 연관성 속에서 사회정책 및 복지국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요컨대 오피엘카는 공공성 회복과 복지국가 체제 수립 사이에는 긴밀한 상관성이 내재할 수밖에 없다는 주목할 만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38면)
13. 미국의 보수적 사회학자인 로버트 니스벳 (Robert A. Nisbet)도 현대의 사회생활에서는 개인의 안전과 만족이 확보될 수 없기 때문에, 20세기의 근본 주제 중 하나는 “공동체의 추구”라고 역설한 적이 있다. 그는 근대적인 정치국가에 대해 언급하면서, “국가는 대중적인 열망을 수렴하고 개혁을 주도하며 전쟁과 같은 거창한 대의를 위하여 동원될 수는 있지만, 인정이나 동료애, 안정감, 참여와 같은 인간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정규적이며 정상적인 수단으로서는 그리 적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작은 규모와 안정된 구조의 공동체”야말로 확산되는 사회적 소외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39면)
14. 이런 탓에, 많은 뛰어난 이론가들이 공동체 관련 연구가 얼마나 힘들고 까다로운가에 대해 한탄하는 목소리가 나의 귀에 쏙 들어오기도 했다. 예컨대 필립 셀즈닉(Philip Selznick)은 “많은 필자(그리고 독자)들이 공동체 관념이 얼마나 골치 아픈(elusive) 주제인가 하는 사실로 인해 골치를 썩인다. 그것이 지니는 핵심적 의미에 대한 명확한 합의도 없는 것 같다. 물론 사회과학과 철학 분야의 많은 다른 핵심개념에 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겠지만”이라고 말했다. (45면)
15. 예컨대 데릭 에디베인(Derek Edyvane)은 ‘공동체(community)’가 “다른 문맥으로 모든 방식에서 놀라울 정도로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a term used with alarming frequency)”이기도 하면서, “정의 내리기가 악명 높을 정도로 골치 아픈 (notoriously awkward)” 개념인 데 대해 불만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45, 46면)
16. 백종국은 자신의 ‘공동체주의의 개념적 유용성에 대해서’ … 라는 논문에서, 특히 한국사회에서 “공동체주의의 정치적 남용” 문제를 대단히 설득력 있게 파헤치면서, 이 개념의 “오용과 남용” 실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49면)
17. 이처럼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우리가 연대를 선언하는 대상에 대해 우리와 ‘같은 인류’라 지칭하기보다는 바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동료 시민’이라고 선언할 때, 우리의 연대 의식이 “가장 강렬한” 힘을 발휘한다고 역설한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연대하고자 시도할 때 ‘동료 인간’이라는 외침은 절실함이 약하고 별반 호소력이 없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51면)
18. 이런 취지에서 나는 ‘같은 인간’ 식의 추상적인 도덕률과 사변적인 철학적 규범 등에 집착하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동료 미국 시민’ 식으로 인간의 구체적 삶과 일상생활이 지니는 가치에 더욱 강한 애착을 표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나의 관심을 보편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일반적인 것에서 ‘국지적인’ 것으로, 그리고 초시간적인 것에서 ‘일시적인’ 것으로 되돌려놓고자 노력한 것이다. (51면)
19. 스티븐 툴민 지음, 이종흡 옮김, ‘코스모폴리스: 근대의 숨은 이야깃거리들’ … 그는 예컨대 17세기 이래 철학자들은 “실천철학의 구체적이고 일시적이고 특수한 주제들을 무시하는 대신, 추상적이고 초시간적이고 보편적인(즉 이론적인) 주제들에 헌신”해 왔는데, “이론에 치중된 300년의 열정은 이제 매력을 상실했다”고 단정짓는다. … 이런 취지에서 툴민은 “17세기에 일어난 전환의 특징은 인문주의에서 이성주의로의 ‘정신적 변화’에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역방향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단언한다. 요컨대 17세기 이래로 “기록된 것, 보편적인 것, 일반적인 것, 초시간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온 ‘근대’ 철학자들은, 다시금 구전적인 것, 특수한 것, 국지적인 것, 일시적인 것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51, 52면)
20. 이론의 발달사는 ‘개념’의 발달사라 할 수 있다. 널리 통용되던 기존 개념들이 패사당하거나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며 새로이 태어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전혀 이질적인 개념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뿌리내리는 고난의 역정을 거치면서 이론과 학문의 발전이 촉진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회과학적 개념은 시대와 역사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개념에 대한 약속 없이는 학문적 토론이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사회과학적 개념은 현실적 실천의 문제와 직결된다. (58면)
2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제1권 제1장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포문을 연다. “모든 국가는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선을 목표로 성립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존재는 스스로가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공동체가 어떠한 선을 목적으로 삼는 존재라면, 그중에서도 최대한도로 그리고 최고의 선을 지향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장 중요한 공동체가 있을진대, 그것이 바로 이른바 국가 또는 국가 공동체라는 것이다.” (61, 62면)
22. 아울러 koinonia라는 명사의 어원이 koinen(공유하다)이라는 동사라는 점을 고려해 ‘공동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한상수의 주장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 (61면)
23.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의 사회계약론자들과는 달리 ‘가상적인 자연 상태’ 속의 개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에게 관점의 초점은 오히려 개인과 개인의 ‘자연적인’ 결합체, 즉 구체적인 정치적 공동체였다. (67면)
24. 이를테면 폴리스는 ‘좋은 삶’과 ‘자족성’을 구현하는 완전한 인간 공동체인 것이다. (68면)
25. 그러한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를 보완함으로써 비로소 공동체의 안정성과 일체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의 개체적 이질성과 공동체적 가치의 다양성이야말로 공동체의 분열이 아니라 결속을 추진하는 필수 요인임을 역설한다. (68면)
26.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친애’와 ‘합심’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개체적 관심과 이해관계의 의의를 역설하기를 잊지 않는다. “모든 자가 한 사람같이 동일한 것을 내 것이라 부르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겠지만 실행할 수는 없다. … 최대 다수가 공유되는 것은 가장 빈약한 취급을 받는다. 모든 자는 주로 자기 자신의 것을 생각하고 공유물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그 자신 개인으로서 관련될 때 비로소 흥미와 이해를 갖게 된다. … 누구나 남이 해주리라고 기대하는 임무에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71면)
27. 인간을 정치적 창조물로 이해하고 국가를 자연의 산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정치적 영역 또는 공적 영역이 바로 자유의 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자유주의 사상가들과는 정반대로 공동체가 개인에 우선한다. (74면)
28. 이러한 자연법적, 세계동포주의적 인간관은 사회적, 민족적 한계를 외면한, 또는 그것을 초월하는 도덕적 정신세계로의 몰입을 의미했다. (76면)
29. 그와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는 달리, 사회란 “자연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 그(홉스)의 소신이었다. (80면)
30. 특히 루소는 사회의 출발을 불평등의 효시로 단정했다. 나아가 역사의 진전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다져 나가고 사유재산권을 더욱 굳혀나가는 법과 제도들 역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83면)
31. 앞에서도 잠시 눈길을 주었듯이, 홉스, 로크, 루소 등 이른바 ‘사회계약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식 국가의 ‘자연 창조론’에 이의를 제기하며, 국가가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창조물이라 주장했다. (84면)
32. 그러나 헤겔에 이르러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의 복귀 현상이 나타났다. 헤겔은 국가가 결코 개인의 자의적 의지에 따른 계약의 산물일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함으로써 사회계약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에게 국가는 절대적 필연성의 산물이었다. 국가는 초계급적 공통성을 구현하는 절대정신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85면)
33.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하강하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상승한다ㅏ. 즉 우리는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인간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이 말하는 것, 상상하거나 관념하는 것으로부터, 또는 말해지거나 사유된, 그리고 관념된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일하는 인간에서 출발하고,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과정을 분석한다. … 도덕, 종교, 형이상학이나 키타 이데올로기 및 그들에 부합하는 의식 형태들은 여기서는 더 이상 독자성의 징표를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어떠한 역사나 발전도 갖지 못한다. 다만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그들의 사고와 사고의 생산물을 변경시킨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88, 89면)
34.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를 ‘유기체’라 한다면, 사회는 ‘인공적 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퇴니스의 기본 입장이다. (102면)
35. 일반적으로 이들 공동체 내부의 상호 관계는 호혜주의 성향을 띤다. 하지만 교환 관계가 아니라 상호부조 관계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내부는 영향력, 능력 등의 면에서 ‘불평등 관계’, 다시 말해 위계질서가 지배하게 된다. 퇴니스에 의하면, 이러한 불평등의 구조적 차이가 크면 클수록 공동체 내부의 결집력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요컨대 불평등 구조와 공동체의 내적 결속력 상호 간에는 비례관계가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103, 104면)
36. 그는 단순히 “사회의 시대는 공동체 시대의 뒤를 잇는다”라고만 밝힐 따름이다. (108면)
37. 그러나 ‘대도시’에 이르면, 상황이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토착민과 외래인의 구별도 사라진다. 고립된 개인 및 가정만이 서로 대치할 뿐, 공동체적 삶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진다. 오직 자신의 재산만이 유일하게 유효하고 본원적인 특성으로 자리 잡을 뿐, 공동으로 소유한다든가 함께 향유한다는 미덕은 찾아볼 길이 없어진다. 인륜의 힘을 쌓아가고 윤리적 인간으로 양성할 수 있는 길 역시 요원해진다. 뿐만 아니라 퇴니스는 대도시를 사회의 전형으로까지 간주한다. (109면)
… 노직의 정의관은 ‘앞으로의’ 분배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취득과 이전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 하는 문제에만 집중적으로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 노직은 전형적인 보수주의자가 그러하듯이, 결코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그는 오직 최초의 취득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과정이 옳았는지 어땠는지에만 관심을 쏟는다. (346면)
○ 출판사 서평
– 공동체 사상의 역사를 연구·집대성하여 화해와 소통, 통합으로 나아가는 실천적 길을 제시하다
따뜻한 인간애에 바탕을 둔 연구 활동으로 유명한 휴머니스트 정치학자 박호성(서강대 정외과). 그의 새 저작 ‘공동체론 : 화해와 통합의 사회·정치적 기초’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이번 저작을 통해 자신의 지난 30여 년간의 정치사상론 연구 인생에 또 하나의 커다란 방점을 찍게 되었다. 서구 사상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고금의 ‘공동체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집대성한 이 책은, ‘독주’의 자유만 있고 ‘공생’의 여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오늘의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2008년 안식년을 맞은 저자는 영국 옥스퍼드로 건너가 1년간 연구교수로 체재하며 공동체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서구 사회에서 2천 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공동체 사상의 풍성하고 다양한 논의 및 그 실천 사례를 집대성, 이 책의 척추를 구축해냈다. 아울러 한국사회가 지닌 전통적 공동체 의식의 원형을 추적하고 그것이 발현된, 혹은 오용된 실례를 찾아 그 명과 암을 따져보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올바르고 유효한 공동체적 가치를 구축, 제시하고 있다.
– ‘거인’의 자유를 넘어 ‘조무래기’들의 평화로
공동체란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뇌리에 자리 잡은 ‘공동체’의 개념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두루뭉술한 수준에 그치는 게 현실이다. ‘학교 공동체’, ‘직장 공동체’와 같이 ‘공동체’라는 어휘가 단순한 모임, 조직 등과 등가의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또한 한국의 전통적 공동체 의식은 현대에 들어와 이상한 형태로 변형되어 불순한 지배 세력 등에 의해 악용되기 일쑤였다. 이처럼 개념 정립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못한 한국 공동체 논의의 현실을 직시한 저자는, 공동체에 대한 올바른 개념 형성과 향후 지속적인 논의를 유도하기 위해 이 기획의 전반부를 구상했다.
후반부의 집필 동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 비롯한다. 지구상을 살아가는 인류의 한 명으로서, 우리에게 닥친 이중의 위기, 곧 ‘인간 위기’와 ‘자연 위기’ 상황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묻는다. “세계화로 인해 힘센 ‘거인’만이 살아남게 된 ‘정글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 같이 힘없는 사회적 ‘조무래기’들은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논의는 그 해답을 공동체에서 찾았다. 시장만능주의와 전 지구적 세계화가 맹렬한 기세로 지구상을 잠식하고 있는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공동체적 가치’의 회복을 제안하고, 우리 사회에 드리운 ‘사회적 정신분열증’의 어두운 그림자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연대’를 제시한다.
저자는 일찌감치 ‘공동체’라는 주제에 대한 근원적 회의의 유혹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 ‘공동체의 부활’을 촉구하는 시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거나 몽상적인 작태는 아닐까.” 스스로 거듭 묻고 힐난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유일한 길은 공동체의 회복에 있다는 확신으로 집필에 몰두했다. ‘사회적 소외(개체화·이기화)’ 현상의 범람, 위태로운 정신적 공황장애 등으로 탈진해버린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며, 이러한 사회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하는 건강한 사회 통합을 이루어내기 위한 대안은 바로 공동체 정신의 핵심인 ‘연대’의 가치를 사회 속에 당당히 복권시키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한다.
– ‘공동체론’은 1부 ‘삶의 공동체’와 2부 ‘공동체적 삶’,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의 공동체’ : 공동체 사상의 역사를 집대성
1부 ‘삶의 공동체’는 공동체 개념의 역사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퇴니스까지, 최선의 ‘삶의 공동체’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관한 고전 사상계의 모색 과정을 분석한다. 주로 유토피아에 뿌리내린 머릿속 구상에서부터, 좌절로 끝난 실천적 공동체 실험에 이르는 다양한 공동체 구상을 다룬다. 요컨대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토마스 모어(Thomas More), 근대적 사회주의사상의 원류라 할 프랑스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 그리고 처음으로 노동운동과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희망을 긴밀히 결합함으로써 사회개량 및 노동조합 운동의 기수로 떠오른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의 공동체 구상을 총체적으로 점검한다. 나아가 서양 정신사 전통의 토대라 할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적 특성은 물론, 유학 중심인 동양사회의 공동체 정신까지 살핀다.
.‘공동체적 삶’ : 이 땅의 공동체 건설을 위한 제안
2부 ‘공동체적 삶’에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왜 바람직한 일인지, 그리고 그것을 거부 또는 정당화 하는 논리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이론적· 현실적으로 점검해본다. 이를 위해 개인주의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 자유주의의 본질 및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수행한다. 아울러 현실적 사례를 구체적으로 검증하고자 한국사회에 주목, 한국적 공동체 의식의 특성을 해부한 후, 공동체 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연대’의 개념 및 정당성, 그리고 그 인간학적 기초를 분석한다. 한국적 공동체 의식의 문제점을 해부해나가는 와중에, 특히 공동체 의식과 민족의식의 상관관계를 점검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한국사회에서는 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가 절실히 요구되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당위성을 파헤친다.
마지막으로 저자 고유의 정치사상이라 할 ‘인연 공동체론’을 제시한다. 인간 본성의 본질적 구성 요소인 ‘고독’과 ‘욕망’에서 비롯되는 ‘공포심’과 ‘이해관계’는, 곧 인간을 서로 결집하게 해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이끄는 자연적 추동력이다. 이로써 성립하는 ‘관계성’의 이름이 바로 ‘인연’이다. 공포를 극복해나가며 비범한 이해관계를 관철시켜온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바로 인류의 역사다. 그러나 소비주의, 물신주의의 범람은 도덕적 진보와 인간적 자아실현의 위축,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를 낳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3공주의, 곧 ‘공생주의(국민 복지 확대)’, ‘공화주의(시민 참여)’, ‘공영주의(민족 통일)’를 주창한다. 결국 우리 민족 공동체에게 주어진 21세기의 과업은 “시민 참여·국민 복지 확대로 민족 통일의 달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삶은 거래가 아니라 나눔이다
전 세계를 단일시장화 하는 전 지구적 세계화의 확산과 더불어 소비주의, 물신주의가 동시에 세계화하는 오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인 형 인간’만 도처에 활보하고 있다. ‘거인’의 독주만이 옹호되고 장려되는 실정이다. 이로써 도덕적 진보나 인간적 자아실현 등의 이상적 가치들은 비실용적인 것, 속절없는 것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 ‘공익’에 대한 존중심이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사회에서 관심거리가 될 리 있겠는가. 하지만 저자는 ‘공동체론’을 통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다. “삶은 거래(trade)가 아니라 나눔(share)이다.”
전작 ‘평등론’, ‘휴머니즘론’ 등을 통해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정치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바 있는 저자는 휴머니즘에 뿌리내린 문화적 동질성,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적 동등성, 자연과의 교감을 지향하는 자연적 동화성, 그리고 민족 통일에 의해 이룩되는 공간적 동일성의 토양 위에서, 비로소 ‘공동체적 삶’이 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적 ‘한계’를 줄여나감과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조금씩 높여나가리라 여겨지는 ‘공동체적 삶’에 한뜻으로 매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라 역설한다.
○ 추천평
“오래된 ‘공동체 이론’을 21세기의 실천적 담론으로 생환(生還)하고 있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연상케 한다.” _ 신영복(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 참여사회연구소의 [참여사회포럼: 대화 #1] 박호성 교수의 ‘공동체론‘

참여사회연구소가 새롭게 시작한 ‘참여사회포럼: 대화’(이하 ‘대화’)의 첫 번째 모임이 2009년 10월 12일 참여연대 3층 중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날의 주제는 박호성 서강대 교수가 9월에 낸 <공동체론>으로 홍윤기 동국대 교수(‘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가 지정토론자로 참석하였고 장은주 영산대 교수(‘시민과 세계’ 편집주간)가 사회를 맡았다.
박호성 교수는 ‘대화’ 서두에서 ‘진보적인 사람이 보면 저를 복고적 반동분자라고 부를 것 같고 보수주의자들이 보면 혁신적 난동분자라고 꾸짖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삶을 찾아보자는 이야기가 석기 시대로 돌아가자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아실 것임을 믿고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라며 <공동체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박 교수는 자신이 <공동체론>을 쓴 이유에 대해 “현재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도덕적 진보라든가 인간적 자아실현 같은 이상적 가치는 비실용적이고 속절없는 것으로 손가락질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상인형 인간만 만들어내는 사회가 된 것이다. 공익에 대한 존중은 찾아보기 힘들고 황금만능주의의 행태가 우리는 지배하고 있다. 굉장히 심각한 약육강식의 사회윤리의 일상화되고 대다수 약자들이 도움을 호소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쓰러져 가는 현실에 봉착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힘없는 조무래기들은 어디로 가며 사회적으로 힘있는 왈짜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는 이중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다”라며 이런 배경하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위계질서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전 국민이 이웃사촌처럼 수평적 공존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동체 저술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정토론자로 나선 홍윤기 교수는 박 교수가 퇴니스의 공동체와 사회(이익사회와 공동사회로 잘못 번역된 것)론을 이야기할 때 ‘공동체’와 ‘사회’라는 단어가 쓰인 연대가 다르다는 것을 정확하게 짚었다는 점을 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홍 교수는 신자유주의적인 삶에 대한 대안으로 박 교수가 주장하는 공동체 대신에 ‘사회체제를 고치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체제에 저항할 수 있는 민주적 시민성을 강화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반문하였다. 또 현대적 공동체라는 불가능하지만 테레사 수녀나 피에르 신부 같은 현대안의 공동체는 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였다.
박 교수는 공동체가 집단주의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인 위험에 노출될 위험성에 대한 질문에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연대의 위험성에 대한 서술을 분명히 해놓았다며 연대론 부분을 조금더 세심하게 읽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는 ‘동양은 대동의 사상, 합의 사상입이지만 그러나 개별적 자유와 책임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서양은 개인이 있으면서 공(公)이 있는, 공화주의 사상이 있다’며 ‘동서의 그늘을 걷어내고 합치는, 새로운 거리가 있는 사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 최원주 씨는 ‘정책적으로 제시한 부분을 보면 시민운동 촉진, 복지국가, 통일국가가 되야 한다고 하셨는데 중앙권력층이 이를 지향하는 세력이 되야 하는데 지금 이명박 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지금 이것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런 가치를 지향할 수 있는 세력이 있고 반대세력이 있다. 이 두 세력을 화해시키고 통합시키려면 공동적인 가치를 공유해야 하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그런 가치들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공동체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며 이 두 세력을 어떻게 화해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였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이 책을 한마디로 줄이라면 ‘시민참여와 국민복지확대로 민족통일을’ 이 될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에서 생기는 결속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답했다.
시민 유정희 씨는 ‘공동체라는 것 자체는 가치중립적인데 공동체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며 ‘유토피아란 능력에 맞게 일하고 필요에 맞게 소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향으로 보면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믿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저는 지역공동체가 앞으로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박호성 교수는 마지막으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연대하면 지형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며 엘리트주의적인 활동 방식을 버리고 경제적인 문제에 주력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현재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사회세력화라며 하루 빨리 노동자 집단이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하고 존엄한 사회집단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 독자의 평 1
1.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는 것 같더라는 말로 문을 열었다. 하나는 ‘검사’같은 사람인데, 남의 잘못만 파고들어 무슨 결함이 있나 없나 하는 것만 열심히 파헤치려들고 다른 한 부류는, 다른 한 부류는 ‘중매꾼’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라도 두 상대를 잘 화합시켜보려고, 좋은 말, 따스한 덕담만 애써 찾더라는 것이다.
2. 이따금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었던 덕에, 난쟁이임에도 정작 거인보다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을 때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 길을 간다”
3. 자유주의의 깃발 아래서는 오직 ‘거인’만이 진정한 개인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 번영의 뒤안길에는 ‘개인 없는 개인주의’만이 음습하게 번져나갈 뿐이다.
4. 자신의 개인적 결핍이나 결함을 외부의 도움을 얻어 보충할 수밖에 없는 우리 힘없는 ‘조무래기’들은 도대체 어디로 발길을 옮겨야 할까
5. 인륜의 가치보다는 경제성장을, 상호협력보다는 경쟁을, 그리고 공동체의 단합보다는 개인의 사익과 업적을 더욱 열렬히 기리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 하지만 사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공동체적 삶의 양식에 대단히 숙달된 민족이다.
– 우리에게는 ‘나’라는 개인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인 ‘우리’의 이로움을 앞서 찾고 배려하는 미덕을 존중해온 전통이 있다.
6. 우리 사회에서 정치, 사회, 분화 분야 등, 이 집단의식이 침투하지 않는 영역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문제의 밑바닥에는 대부분 이런 부정적 공동체의식이 돋기를 머금고 똬리를 틀고 앉아있게 되는 것이다.
– 우리는 모둔 언젠가 이 세계를 떠날 수밖에 없는 동등한 유한자로서, 서로 아끼고 도와야 할 준엄한 숙명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지 않은가
7. 아인슈타인까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겠는가. 그는 “우리는 동물까지도 포함하는 경계 없는 윤리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명에 대해 경외감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기도만을 하지 않는다. 그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자신을 투신할 것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도 주변 생명들의 연장선에 있는 똑같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8.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9. 공공영역이 공공선을 위해 봉사하는 곳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개인의 안전과 신분을 보조하는 보조 장치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고영역을 식민화하는 주체, 그것은 바로 개인의 사적 세계”라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10. “국가는 대중적인 열망을 수렴하고 개혁을 주도하며 전쟁과 같은 거창한 대의를 위하여 동원될 수도 있지만, 인정이나 동료애, 안정감, 참여와 같은 인간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정규적이며 정상적인 수단으로서는 그리 적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 “작은 규모와 안정된 구조의 공동체”야말로 확산되는 사회적 소외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 강조하는 것이다.
11.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죄는 인간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무관심이거늘, 너는 지금 다른 사람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12. “우리의 동료 인간이기 때문에”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우리들의 동료 미국시민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 둘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호소력이 있을까?
– “우리들의 동료 미국 시민”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도덕적, 정치적으로 훨씬 더 깊은 신뢰감을 준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절망적으로 살고 있다는 주장이 훨씬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13.이론화할 수 없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으나, 현실화할 수 없는 이론은 존재한다는 점을 스스로 잊지 않으려 애썼다.
– 아이디어가 없는 결과물은 존재하지 않으나, 결과물을 내지 못할 아이디어는 존재한다.
14. “모든 공동체에는 일정한 유형의 친애와 정의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예컨대 같은 선박 여행객이나 동료 군인을 친구라 여긴다. 공동체의 범위는 친구, 마찬가지로 정의의 범주다. 그러므로 ‘친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공동의 것이다.’라는 격언은 맞는 말이다.
– 같은 배를 타고 함께 항해하는 동료 여행객에 대해서까지 우의에 입각한 동등한 공동체 소속원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공동체 범주는 엄밀한 사회구조적 차원의 조직 체계를 뛰어넘어, 공동의 목표나 활동을 공유하는 일상행활의 사적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15.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이나 능력 등이 헌신적이고 이타적으로 발휘된다 해도, 또 그것이 공동체의 결속을 공고히 하는 데 직접적으로 이바지한다 해도, 그 과정에 필연적으로 권위주의적, 절대주의적 지배 관계가 생성될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6. 사회를 “개인들의 인위적인 집합”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개인들의 의지와 관심의 영역이 수많은 결합체 속에 내재하긴 하지만, 이 사회 속에서 이들은 내면적인 상호 연결 없이 서로 개별적으로 흩어져있을 뿐이다.
17. “다른 시대의 유토피아인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속의 비참하고 발가벗은 상태로 살고 있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모든 진보의 원리이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시도”
– 인간이 근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꿈 자체를 포기하거나 배척할 수 없는 유한한 피조물
– 유토피아야말로 비판 의식과 개혁 의지에 기초하여 우리 인간을 끝없이 싸우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좌절을 극복하고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이끄는 역사적 진보의 원동력
– ‘현실적 이상주의’, 실현 불가능성을 전제하기는 하지만 평화롭고 조화로운 미래 사회에 대한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18. ‘비례적 평등’, 곧 능력에 따른 불평등에 토대를 둔 플라톤의 정의는 “향유하는 권리가 아니라 봉사하는 의무에서의 불평등”에 뿌리를 둔다고 말할 수 있다.
– 플라톤의 평등관 속에는 이미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을 전제하는 그 자신의 인간론이 녹아들어가 있다.
– “특별히 어느 한 집단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시민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
– 그에 의하면, 이상적인 삶은 우리 영혼의 각 부분이 서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할 일을 하되 전체로서 조화를 이룰 때, 요컨대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를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에게 속하는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마치 영락없는 세음정, 즉 최저음과 최고음 그리고 중간음처럼, 전체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 플라톤은 인간을 지혜를 사랑하는 자, 명예를 사랑하는 자, 그리고 이득을 추구하는 자의 세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19. 혈연과 직업 계승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경우, 유토피아에서는 직업 쪽이 더 중시된다. 따라서 아들이 부친의 직업을 거부하는 경우, 그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수행하고 있는 다른 가족연합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어있다.
– 우선 사회 구성원 전체를 골고룰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생산량을 확보해야 하고, 다음에는 확보된 생산량을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노동을 면제받았는데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가령 이들의 정신적 지도력이 실망스러울 경우, 이들은 다시 ‘노동자 계급’으로 강등된다. 반면에 노종자임에도 여가를 잘 선용하고 학문적 성과를 보이는 경우, 시포그란트의 우두모리인 대족장 트라니보어, 성직자, 외교관, 시장등을 배출하는 ‘학자 계급’으로 ‘승급’ 되기도 한다.
– 잡스러운 노동과 귀찮은 일등은 죄수나 종교적 신념을 지닌 수도원생들이 맡는다. 그리고 수도원생들은 특별히 사회적 존경을 받기도 한다.
20. 푸리에는 자신의 글 [통일의 이론]에서 특히 공동체 정신의 기본 토대가 되는 ‘연대’개념에 거의 처음으로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연대를 네 개의 상이한 범주로 구분했다. 첫째, 빚 보상을 위한 다수인의 공동 책임과 관련된 “보험의 법칙”, 둘째, 결핍된 자들과의 “자원공유태세”, 셋째, 공동체 소속감을 증진시키는 “사회적, 집단적 결속”, 넷째, 가족 최저 생계 보장을 지원하는 “공공 부양”으로 나눈 것이다.
22. 오웬은 무엇보다 노동자 및 그 자녀들의 바람직한 성격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새로운 교육 체제를 수립하고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 교육 문제는 오웬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핵심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는 개인적 행복과 사회의 보편적 행복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이성적 질서가 사회에 저절로 수립된다고는 보지 않았다.
– 교육을 이성적 사회질서 구현을 위한 지렛대로 삼았다. 그는 인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오웬의 교육 이념은 한마디로 ‘사회교육’이었고, 교육 이론은 ‘환경론’이었다. 따라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하고 이성적으로 행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객관적 상황 및 환경의 창조가 급선무로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 인간의 욕망의 존재이다. 개인의 안으로 수렴하는 욕망의 수준을 교육을 통해서 발산형 욕망으로 바꿀 수 있다. 발산형 욕망은 개인간의 공동의 욕망으로 향한다. 그 지향점의 끝에는 ‘사랑’이 있다.
– 교육은 공공의 목표에 기여하기 위한 방법이다.
– 객관적 노동조건과 주관적 품성을 동시에 향상시킴으로써, 사업 실적 역시 폭넓게 확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23. 바울을 비롯한 장인 선교사들은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직업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선교 활동을 퍼나가는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십이사도는 소유와 생계 수단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공동체로부터 물심양면의 후원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데 비해, 예컨대 바울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그러한 ‘특권’에서 배제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근로를 통한 정착적 생계 해결 방식이 예컨대 갈릴리 같은 시골풍의 ‘반가정적인’ 급진적 유랑 생활보다는 오히려 헬라화한 도시 문명의 경제적 상황에 보다 부합한다는 새로운 인식의 소산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24. ‘예수 운동’의 공동체적 특성은 시골에서 도시로의 팽창, 그리고 절대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의 대상이었던 예수의 복음선포 고수에서 실용성 추구로의 변모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윽고 이 새로운 삶의 공동체는 이스라엘 민족의 경계를 넘어 이방 세계까지도 포괄하는 ‘예수 운동’의 ‘세계화’를 이룩해냈다.
25. 첫째로, 현재 우리 교회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불우한 이웃’과 정치적으로 핍박받는 개인 및 집단을 위해 과연 어느 정도로 ‘예수정신’을 발휘나고 있는가?
– 둘째로, 몰트만은 인간성이 분열과 증오로 파괴되는 현실에 직면하여, “기독교의 통일”이야말로 “생존을 향한 희망의 표지”라 힘주어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지금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확립하기 위해, 과연 어떠한 ‘희망의 메시지’를 사회에 던지고 있는가?
–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교회 상호 간의 일치가 필요한가, 아니면 분파적 상호 경쟁이 더 절실한가?
– 초기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은 ‘하느님 나라’의 운동권 투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그들과 비교할 때, 지금 우리 기독교 공동체는 과연 어떠한 성향을 지니고 있고, 또 주로 어떠한 사회집단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가?
– 투사와 백성은 다르다.
26. 밀은 “지배자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을 전통적인 자유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제한’의 방안으로 첫째, “지배자로 하여금 정치적 자유 혹은 권리로 불리는 일정한 면책조항을 인정하게 만들고”, 그 침해에 대한 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둘째, 더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공동체 혹은 그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의 동의”를 권력행사의 “필요요건”으로 만드는 헌정적 제약을 확립하는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주의에 의한 자유의 수호 방책도 바로 이러한 물줄기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27. 모든 개인은 자신이 어떠한 자본을 지니고 있든 간에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일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사실상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득이지 사회의 이득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득에 대해 곰곰이 연구해보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또는 반드시 사회에 가장 유리한 일을 선호하도록 그를 이끌 것이다.
–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고 끊임없이 노력해 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곰곰히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28. 존 샤르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오로지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사람들에 의해 가장 높이 평가받는 재질들”에 대해서만 기회의 균등이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회의 균등이란 구호는 “대단히 보수적”이다.
29. “법은 정의롭다. 법은 빵을 훔친 죄로 부자와 가난뱅이를 평등하게 처벌한다.”
– “법은 그 장엄한 평등 속에서,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부자에게도 다리 밑에서 자고, 거리에서 구걸하고, 빵을 훔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
– “사자와 소를 위한 하나의 법은 억압”
30. 세계화의 본질을 “과학 기술의 발달과 이로 인한 시장 기제의 작동 영역의 확대”에 따른 ‘상호의존성의 증가’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 듯하다.
31. 곰은 이상적인 내적인 힘의 원천을 상징한다
– 곰은 힘을 안으로 간직하고 있다. 맹수면서도 우둔하고 점잖은 편이다. 끈기와 참을성이 있다.
32. 민족의식은 원칙적으로 자기 민족과 국가의 이해관계를 위해 복무하지만, 공동체 의식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해 때로는 자신이 속한 민족과 국가의 이해관계를 위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33. ‘기독교적 자비’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자기애와 조화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타인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단지 어색한 책무 같은 것으로 인식할 따름
34. ‘유기적 연대’, 노동 분업이 심화되면 될수록 개인은 더욱 사회에 의존하고, 반면에 각자의 활동 영역이 특수화하면 할수록 더욱 개인적이 된다고 주장한다.
35. 연대는 항상 자발성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36. “무한히 멀리 떨어진 목표는 목표가 아니라 함정 같은 것이다. 목표는 더욱 가까이 있어야 한다.”
37. 개별 사회집단의 대립적인 이해관계를 당사자 간의 직접 협상 또는 사회적 조정 과정을 거쳐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나간다는 발상
– ‘관용’의 정신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관용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및 자기 규율을 요구하는, 따라서 사회의 문화적 발전 수준이 높은 곳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공적이고 개인적인 덕망이라 할 수 있다.
38. 내가 1927년 1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스탠딩 락에 갔을 때, 비드 신부를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그가 ‘변호사 비드’가 된 것을 알았고, 한 숭고하고 진실한 전도자로 살아가는 그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네, 저는 수우족이 유일한 참신을 섬기는 사람이며, 그들의 종교가 진리와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교사가 아니라 법정에게 그들을 지켜줄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팽개치고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몇 년 후 저는 노스다코타에서 변호사가 되었고, 지금은 법정으로 이송된 인디언에 관계된 모든 사건에 그들의 공식적인 상임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39. “욕구가 높으면 높을수록 이기심이 일정하게 줄어드는” 현상이 생겨난다. 예컨대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욕구이므로 자기 자신만 만족하면 그만이지만, “사랑 및 자기 존중의 욕구”는 다른 사람들의 만족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삶들을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있다.
40. “써도 삼키고, 달아도 뱉는’ 고탄감토식 이타적 풍모로 거친 삶을 당당히 헤쳐갈 수 있는 유일하게 이성적인 생명체
41. 넬슨 만델라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 거기에 삶의 가장 큰 영광이 존재한”고 외치고 있다.
42. 인간 본성의 본질적 구성 요소인 ‘고독’과 ‘욕망’은 끝내는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적 유한성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본성적 한계로부터 ‘공포심’과 ‘이해관계’가 생성된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공포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 ‘욕망’으로 가득찬 존재인 탓에 본능적으로 이해관계에 속박당할 수밖에 없다.
– 인류는 애초에 이러한 공포심을 줄여나가는 동시에 자기 이득을 늘여가기 위한 방편으로 공동체 건설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43. ‘신용카드는 통하지만 언어는 통하지 않는 현실’, 이것이 이른바 ‘세계화’의 본질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세계화 시대의 ‘영구 집권’을 알리는 팡파르가 높이 울려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공동체 시대는 끈기 있게 존속하리라 예상한다.
44. “바람의 움직임과 새들의 날갯짓을 통해 자연현상을 파악하는, 오랜 옛날의 지혜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도의 인류학자들도 “이들은 바람의 냄새를 맡고, 노 젓는 소리로 바다의 깊이를 헤아리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45. 부족 중에 궁핌한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엄청난 부를 소유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천하에 불명예스러운 죄이다. 만일 상거래를 통해서나 전쟁을 통해서나 또는 위대한 영이 그에게 내려준 축복의 선물로 어떤 사람이 자신과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선물을 주는 축제를 벌여 남는 것을 그들의 필요대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여야 한다. 특히 과부와 고아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46. 첫째, 공동체는 정치적 단위이기에 우선 대내외적으로 생존 근거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의 가장 본원적인 존립 원칙은 ‘자결’이라 할 수 있다.
– 둘째, 공동체는 또한 문화적 단위이므로, 공동체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구성원 상호 간의 대내적 결속에 필요한 문화적, 심성적 일체감 조성 및 강화가 필수적이다.
47. ‘존재'(물질적 이해관계)와 ‘의식'(정신적 공속감)이 상호 통일을 이루고 있을 때, 해당 공동체의 결속력과 추진력은 가장 강력해질 수 있다.
48. ‘사회’는 거래의, 거래에 의한, 거래를 위한 행위 양식을 그 본질로 한다.
– 반면에 ‘공동체’는 공유를 존중하는 원칙을 미덕으로 여긴다.
49. “자기애는 자신의 일만 문제삼으므로, 자신의 진짜 욕구가 충족되면 만족한다. 반면에 “이기심은 항상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보기 때문에, 만족하는 일이 결코 없고, 또 만족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감정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사람에 대해서도 그 자신보다 자기를 사랑해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50. 사회는 검법과 이성이, 반면에 공동체는 본능과 감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51. 우선 우리 것부터 찾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나라의 것을 여유 있게 끌어안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우리의 것 중 첨단 과학기술과 융합이 가능한 분야?
52.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본성으로 인해 서로를 숙명적으로 필요로하는 존재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바로 ‘욕망’과 ‘고독’이기 때문이다.
53. 연대의 수단은 ‘자유’에서 찾고, 목적은 ‘평등’에 직결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간략히 말해서,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선택과 동참 여부 결정 및 그 운영 과정에서 자유가 철저히 보장 되어야 한다. 연대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다르다고해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는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 동등함은 연대를 실천하는 데 결정적인 것이다.그리고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 상혼 간, 나아가서는 전체 인류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동체는 평등의 구축 및 확산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54. 대개의 생활인들은 대기업, 정부 등과 같이 대중과 멀리 떨어져있는 대규모 기구들보다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기관이나 하부 사회조직들에 더 강한 친밀감을 느끼는 자연스러운 습성을 지니고 있다.
– 소비자 심리 측면에서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은 크지만, 서로를 배려할 수 있을 만큼의 작은 규모인 기업체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 미국의 보수적 사회학자인 로버트 니스벳도 “작은 규모와 안정된 구조의 공동체”야말로 확산되는 사회적 소외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 역설하고 있다.
55. 우리는 서로 아끼고 도와야 할 소명을 안고 이 지구에 태아났을 분만 아니라 주위에 굶어 죽어가는 동료 시민이 있다면 무조건 살려내야 할 천부적인 의무 역시 함께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 ‘공생주의’, 공동체 전 구성원들이 빈부, 귀천의 차별 없이 상부상조하고 협동함으로써 공동의 삶을 평화롭게 더불어 잘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진취적인 삶의 의지
– ‘공화주의’, 공동체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공동으로 화합하여 처리해나가는 민주적 이념
–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더불어 번영을 도모하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류적 소명 의식과 직결된다.
–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지름길은 없다.”
– ‘시만참여, 국민 복지 확대로 민족 통일 달성,
56. 불현듯 키르케고르까지 나타난다. 그는 “역설은 사고의 열정”이라 부추긴다. 오직 위대한 영혼만이 정열에 자기를 내맡기듯이, 오직 위대한 사상가만이 역설 앞에 자기를 내놓는 것이요, 역설 없는 사상가란 마치 정열 없는 애인과 다를 바 없다고 다그친다. 나아가 키르케고르는 “모든 정열의 극치는 항상 자기 자신의 파멸을 의욕하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오성의 최고 열정 역시 충돌하면 결국은 자기 파멸로 끝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충돌을 욕구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고의 최고의 역설은, 자기가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외침으로 끝맺는다.
– 케르케고르는 도전에 한계를 두지 말고, 오히려 한계에 도전할 것을 권유하지는 않았을까.
○ 독자의 평 2
한 사람만이 ‘역설’에 대해 꿈꾸면 이는 꿈일 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역설’을 함께 꿈꾼다면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겠는가. 바람의 방향은 바꿀 수 없어도, 배의 방향은 조정할 수 있지 않는가. 낙관론자는 꿈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비관론자는 악몽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하지 않던가…
불현듯 키르케고르까지 나타난다. 그는 “역설은 사고의 열정”이라 부추긴다. 오직 위대한 영혼만이 정열에 자기를 내맡기듯이, 오직 위대한 사상가만이 역설 앞에 자기를 내놓는 것이요, 역설 없는 사상가란 마치 정열 없는 애인과 다를 바 없다고 다그친다. 나아가 키르케고르는 “모든 정열의 극치는 항상 자기 자신의 파멸을 의욕하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오성의 최고 열정 역시 충돌하면 결국은 자기 파멸로 끝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충돌을 욕구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고의 최고의 역설은, 자기가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외침으로 끝맺는다. 키르케고르는 도전에 한계를 두지 말고, 오히려 한계에 도전할 것을 권유하지는 않았을까. p.626.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썩은 풀숲에서 여름밤을 밝히는 반딧불이가 나오고, 더러운 흙 속에 살던 굼벵이가 자라 가을바람에 이슬 마시는 매미가 되는 것처럼, 그리고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처럼, 진실로 깨끗한 것은 언제나 더러운 것으로부터 나오고, 밝음 또한 언제나 어둠에서 비롯하지 않는가. 방향석 식물은 성장하는 동안에는 향기를 내뿜지 않는다. 하지만 이윽고 땅 위에 떨어져 짓밟히고 으깨어지면 달콤한 향기를 사방에 흩날린다. 이러하니 어둡고 더러운 비리와 부조리를 잘 퇴치함으로써 더욱더 밝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 이 역시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일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우리의 앞에는 걸림돌을 디딤돌ㄹ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역사적 과업이 놓여 있다. 하지만 낚시줄을 물에 드리우지 않고 어찌 고기를 잡을 수 있겠는가.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유일한 죄는 다만 시도하지 않는 것,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리라.
그런데 이러한 나의 꿈은 이상인가, 환상인가.
다만 드넓은 광야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려 다니는 모래알만한 불씨라도 되어준다면 하는 소박한 꿈일 따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한 여정이 플라톤과 토머스 모어, 로버트 오웬을 거쳐 한국의 공동체까지 지난한 여정을 끝마쳤다. 함께 읽고 있는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과 많은 부분 겹친다. 우연인지 아니면 과학적 사고의 결과인지 좀 더 두고볼 문제이지만. 이 책을 통해 로버트 오웬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시민사회운동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게 만드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거리 좁히기’란 단어 속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얼마나 좁힐것이냐에 대해서는 이미 대학시절부터 나를 괴롭히던 화두였던것이다. 그런 면에서 난 이상주의자도 아니었고 현실주의자도 아니었다. 현실속에서 이상을 때론 이상속에서 현실을 꿈꾸는 소아적 발상이 내 혈관속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낀다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일까. 간혹은 이상적인 발언들이 조금은 거슬리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스펙트럼 역시 예사롭지 않다.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지만 결국 이것 또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공동체 또는 평등 연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가볍지만 의미있게 읽혀질 책이다. 아마 조만간 다시 정리하며 읽어보지 않을까 싶다.
○ 독자의 평 3
공동체란 무엇인가? 자문을 해 본다. 조지프 히스, 등 몇 권의 경제학 책을 읽고 나면, 이 현상들의 극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결국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정책의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건 경제학자들이 풀 수 없는 ‘야성적 충동’이 저변에 깔려 있는 사회학으로의 접근을 전제로 할 것이다. ‘연대의 실존적인 동인은 고독’이라고 한 호르크 하이머 의 말이 귀중한 것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섬 안에서 스스로 ‘절대군주’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한 인간은 ‘관계’할 수밖에 없고, ‘조직’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론”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인류가 구성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공동체에 대한 저자의 광범위한 고찰을 통해 공동체의 개론학적 의미를 습득하기 위해서이다.
왜 이 시기에 다시 공동체의 논의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속성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는 이 단어로 인한 오늘, 예를 들자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들어 준 자본주의의 속성인 개인주의(법인을 인격체로 한 개인까지 포함한)가 최대로 발아한 이 시점, 주요 선진국을 제외한 이러저러한 국명을 가진 나라들의 물류량 점유비의 비교(1980년 비교적 가난한 나라 102개국에서 7.9%인 것이 1990년 1.4%로 감소한 다국적재벌에 의한 승자독식주의의 결과)나 산업진흥, 국토개발, 감세 및 송사제도의 완비 등을 통한 양극화(심지어 절도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가혹하면서도 절도억제를 위한 사회제도는 매우 불충분한 결과)의 현상, 특히나 심하게 드러내고 있는 ‘자연적 공동체’와 ‘인위적 공동체’가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고 있는 현상 등을 고려하면, 한번쯤 자성의 기회로써 이 논의를 점검하고 반성하며, 제시된 대안에 의한 실천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 1부 ‘삶의 공동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중세 및 근대, 그리고 퇴니스에 이르는 공동체 탐구의 서설을 다른 1장과 플라톤의 ‘귀족 공동체’, 토머스 모어의 ‘만민 공동체’, 로버트 오웬의 ‘노동 공동체’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와 동양사회의 ‘공동체’라는 화두에 대한 고전적인 각종 사상들을 다루어 주었다. 제 2부 ‘공동체적 삶’에서는 자유주의 시대의 공동체 논의와 함께 한국사회, 그리고 현실과 그 대안들을 다루면서 공동체의 궤적을 ‘생명공동체’로 결론 맺고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그 방대한 역사와 사상의 전개를 꼼꼼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는 이 책의 미덕은 모자람이 없다. 가족이란 구성에서 종족으로, 신분으로 발전한 공동체가 16세기를 지나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민족공동체로까지 전개되는 과정과 그 과정속의 찬반의 논리를 아주 세세하게 길잡이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귀족에서 노동에 이르는 공동체 사회의 여정, 자연에서 출발하여 다시 자연으로 귀속되는 공동체의 이념을 살피면서 한국사회 공동체적 삶의 특징을 제시하고, 그 대안 및 미래상을 제시해 주고 있다.
마치 경주마처럼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눈을 가리고 오직 ‘신분’, ‘재산’, ‘욕망’을 위해 달려 온 19세기 이후의 역사들이 남겨 놓은 개인적 평등과 개체의 존엄성을 치켜세우면서 ‘있는 자’의 명분 쌓기에 열중하면서 개인과 개인과의 이기적 갈등과 충동을 반드시 그 명분의 동반자로 삼음으로써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지배구조만을 만드는 이 악취 나는 쓰레기장에서 솎아내어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연대다. 훼손되지 않은 이념으로 무장된, 허울뿐인 균등한 기회(누구나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균등한 기회는 이미 80년대 이전의 넋두리일 것이다. 강남의 뒤틀린 교육열에 의한 현상들을 균등한 기회라 보긴 어려울 터이니)를 실질적인 기회와 반성의 계기로 삼게 할 수 있는 것은 ‘참의식’을 전제로 한 건강한 공동체의 복원이다. 딱 내 몸 같이만 이웃을 배려하고, 안빈낙도를 최고의 덕으로 숭상한 민족의 후손답게 한 숟가락의 욕심만 덜어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위적 공동체들의 건강한 연대에 있는데, 이 연대는 새로운 주체들이 외형상 연대의 수준을 뛰어 넘는 더 발전된 단위의 공동체로서의 정착을 위한 부단한 노력과 주체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지원세력을 육성하고, 이 확장된 범위들이 사회적 이슈가 되도록 공론의 장으로 마련되는 이 순환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자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해가 부족했던가? 아니면 편집상의 문제일까? 사회과학도서들이 필자의 유명세와 그룹핑을 적절하게 배합함으로써 소위 ‘공동 또는 집단창작’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는 세태에 필자의 모든 학문적 성과와 한국사회에 대한 날 선 시각의 홀로서기 때문일까? 다소 아쉬운 부문은, 2부 초기까지 숨차게 전개되는 공동체의 학문적 고찰이 저자 자신도 밝혔듯이, 이미 출간된 내용의 요약이라던지,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전편에 흐르고 있는 탐구적 방식에서 몇 줄에 불과한 흥분된 어조로써의 급박한 마무리)등이 편집체계 및 다루고자 하는 비중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생각이며, 특히 끝 부분의 100여 페이지는 500여 면을 읽어 오면서 다소 지치기까지 한 독자의 형편을 친절한 복습의 기회로 바꾸고자 했는지, 앞 부문에 충분히 설명된 각종 사상가의 이론들을 부연설명해 주는 친절을 가졌는데. 그게 도리어 결론부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힘을 감소시킨 것 같다. 그러니까 책 한권으로는 소화하지 못할 공동체, 생명공동체로까지의 지향점에 대한 노력과 전달된 지식에 탐복 하면서도 왠지 그 노력이 보다 매끄럽게 와 닿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나하는 개인적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끝내 지켜보기를 희망한 ‘생명을 지키는 힘의 연대를 통해, 왕성한 시민참여와 국민복지 확대로 통일이 달성되는 날’을 그리고 우리민족의 유구한 정서인 음풍농월과 죽림칠현의 바탕 속에 미래를 설계하는 저력의 강조는 적극 동의할 수밖에 없음이 또 하나의 공동체의 사심일 뿐일까? 아니다, 적어도 최고의 수단을 ‘선’과 ‘정의’로 삼는다면, 결코 훼손되지 않을 욕심일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