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 : 어느 노신학자의 고백
한도명 / 신학비평사 / 2010.11.10
이 책을 손에 집어 들고 몰입한 때는 종교력으로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시기였다. 결단을 하고 일어나 떠나야 할 곳과 무수한 고난이 있다 해도 반드시 이르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평생에 익숙했던 곳을 단호하게 결별하고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가는 한 노년의 모습에서 나는 이 절기의 진정한 뜻을 새기면서, 출애굽과 부활의 진실을 새롭게 목격하게 된다. _ 김민웅 교수 (성공회대학교)
○ 목차

첫머리에
1. 나는 평생 그리스도교를 끼고 살았는데
2.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알짬
3. 허점투성이인 그리스도 대속론
4. 그 밖의 그리스도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5.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탐탁하지 않아서
6. 한국교회가 싫어서
7. 글을 마치면서
○ 저자소개 : 한도명
저자 한도명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스스로를 언급한 바에 의하면 그는 1933년 생으로 남도에서 태어나, 한 평생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끼고 살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쳐왔다며 그러나 “이제 신학을 내려놓고 일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노닐며 사는 법을 익히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최근작이 2010년 11월 출간한 본서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가 이다.
○ 언론소개
십자가 예수? 하느님은 “피에 굶주린 잔인한 신”?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한도명의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 _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 종교의 기만에 반기를 든 노신학자
나이 80에 이르는 어느 노신학자가 평생 그 자신의 몸과 영혼을 담그고 있던 종교에서 떠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현실 교회에 대한 매서운 질타이자, 온몸을 던진 반격이며 그 종교의 “죽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목소리에 여전히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종교를 팔아 자신들의 배를 살찌우고, 의미 없는 교리와 자기 자랑, 이에 더해 본질적으로는 금전 요구 그리고 세뇌에 가까운 이야기를 설교라고 내세우며 이를 반복하면서 세상과 교인들을 기만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인간을 괴롭히는 악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 악이 무력해지도록 함께 손을 잡고 힘껏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의 실체를 은폐하고 그 악과 대결하려는 이들을 도리어 악마로 모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런 곳에서 부정의한 권력은 둥지를 틀고 약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성립되는 특권은 보호받는다. 교회가 그러고 있으니 사탄은 할 일이 없게 된다. 제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교회를 나갈 수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마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존재는 겨자씨처럼 작다. 그래서 언제나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다. 이들을 기필코 지켜내야 한다. 반면에 부하고 강한 교회들은 군단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 예수가 돼지 떼 속으로 몰아낸 레기온 집단이다. 레기온은 로마 군단의 명칭이다. 그것은 죽음의 부대이다. 겉으로는 생명을 외치면서 정작은 인간에게 죽음을 가하는 폭력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바로 이들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신학적 깃발을 들지 않고서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인간해방의 길을 열어나간 예수는 끝끝내 실종되고 말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이 땅에 돌아온 예수를 배척하고 추방하는 대심문관의 모습과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그리 다르지 않다.
한도명의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신학비평사 펴냄)는 그렇게 현실이 내쫓아낸 역사의 예수, 인간의 진실을 담고 있는 존재를 찾아 나서는 노신학자의 용기 있는 여정의 고백이다.
– 유월절, 그리고 부활절
이 책을 손에 집어 들고 몰입한 때는 종교력으로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시기였다. 결단을 하고 일어나 떠나야 할 곳과 무수한 고난이 있다 해도 반드시 이르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평생에 익숙했던 곳을 단호하게 결별하고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가는 한 노년의 모습에서 나는 이 절기의 진정한 뜻을 새기면서, 출애굽과 부활의 진실을 새롭게 목격하게 된다.
2011년 4월 19일은 유대교에서 유월절(逾越節)로 지키고, 그것이 끝나는 4월 25일 전날인 4월 24일은 기독교에서 부활절로 기념하는 주일이다. 금년 4·19 혁명이 유월절과 겹친 날짜라는 것도 우연치고는 참으로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둘 다 억눌렸던 민중이 해방을 향해 나간 역사의 경계선이 그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4월 17일은 교회력으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알린 종려주일이었다. 종려주일이라고 붙인 까닭은 승전자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히브리 풍속이 반영된 결과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기서 사용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히브리”라는 단어는 “합비루”라는 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합비루는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이리저리 유랑하며 힘들게 살았던 무리에 대한 총칭이다. 따라서 히브리는 본래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 계급 내지는 계층적 개념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폭력적인 국가주의에 의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되었지만 2000년도 넘는 전의 시대에 이들은 지금의 팔레스타인과 갈은 처지의 명칭이었다.
따라서 “히브리”라는 단어는 거부되고 몰리고 내쫓기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좀체 가지기 어려운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 셈이었다. 유월절은 이런 이들에게 주어진 해방의 축복이었다. 그건 죽어지냈던 이들 히브리인들의 부활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말에는 죽어버렸다고 여긴 존재들의 “봉기”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 해방의 사건을 향해
그렇지 않아도 이 글이 ‘프레시안 books’ 지면을 통해 나가는 4월 22일 금요일 저녁은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해서 예수의 수난이 십자가에서 정점에 이르는 날을 기리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이 주간을 예수의 고난과 함께 하는 수난절로 지킨다. 수난이 끝나고 부활을 축하하는 시간이 이어지는 셈이다.
조금 더 자세히 풀자면, 유월절은 고대 이집트 제국에서 노예로 짓밟히고 있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선두로 해서 파라오의 권력에 도전하고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절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 최대 명절이다. 모세 당시 히브리인들이 믿는 신 야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인간을 노예화하고 지중해 세계에서 최대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던 이집트 제국에 재앙을 내린다. 그런 강제력 없이는 파라오가 자신의 권력을 손에 놓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국 전체가 겪게 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그 집은 그냥 넘어가준다고 해서 넘어갈 유(逾)와 월(越)자를 써 유월절이라고 불렀다. 이는 히브리어 “페사크”를 번역한 단어로 영어로는 “패스오버(passover)”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 집의 장자는 모두 몰살당하게 되어 있었다.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 잔혹한 이야기지만, 장자의 죽음은 노예를 밟고 서 있는 체제는 더는 유지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상징해준다. 계승자가 없는 제국의 비극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떠나온 제국을 제 발로 도로 걸어 들어가 제왕의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 한국 기독교 내지는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비극이 있다. 제국의 모형을 닮고자 하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잃은 채 하늘이 이미 준 진실된 인간성을 완성시켜나가는 길을 모르게 되고 있다.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의 한도명은 바로 이 점을 집중적으로 질타하고 기존의 신학적 전제를 일거에 타격하고 나선다.
– 한도명은 누군가?
사실 저자 한도명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없다. 책은 그가 1933년 생으로 남도에서 태어났으며, “한 평생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끼고 살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쳐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이제 신학을 내려놓고 일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노닐며 사는 법을 익히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실제로 누구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냥 짐작하기로는 평생에 신학을 하면서 인간의 진실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옮겨온 <신학비평>의 편집자 송기득 선생 본인이기도 한 것 같고, 그의 분신과 다를 바 없는 그 누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두이기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의 온 생애를 바쳐 몰두해온 기독교/그리스도교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고 밝히고, 신 앞에서 솔직한 존재로 돌아가는 그의 결단과 그 모습 자체다. 한도명은 그래서 너일 수도, 나일 수도, 또는 우리 모두일 수도 있는 이름이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나는 아무래도 그리스도교를 아주 떠나야 할 것 같다. 아니 이미 떠났다고 해야 옳다.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 분명한 것은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를 보다 잘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떠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본래의 인간 해방의 실체를 가려버린 신학적 고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론의 핵심인 대속론을 비판적으로 짚고 나간다. 대속론은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었다는 신앙 고백의 핵심이다. 우리의 죄를 그가 대신 걸머지고 희생되었다는 의미가 담긴 신학 교리다.
– 대속론의 모순
이에 대해 한도명은 대속론이 하느님이 꼭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해야만 용서하시는 “피에 굶주린 잔인한 신”처럼 만들었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누군가를 대리해서 처벌받도록 하는 책임회피와 주체성 상실의 결과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나약한 존재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반박에 대해 그 나약한 존재가 누군가를 대신해서 벌을 받게 하면 그건 도대체 뭔가라고 묻는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죄까지 대속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면, 정의는 어떻게 가능해질 것인지 반문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견해는 치열한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해볼 바는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에 대해, 그는 정면으로 새로운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교리란 절대적 진리가 아니고, 어느 특정한 역사의 시점에 정리된 생각이자 교리의 위상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압박이 주도한 경우도 적지 않다. 서기 318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에 의한, 신과 예수와 성령이 하나라는 3위 일체론 공포는 이단자 색출과 함께 자유로운 신학적 논쟁을 봉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도명은 인간을 참 인간이 되게 하는 역사적 예수와의 만남이 보다 결정적인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각도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길을 향해 나간 진정한 인간으로서, 그의 길을 뒤따르는 것이 우선이지 그저 신앙의 대상으로 올려놓고 복을 주는 존재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은 예수의 실체에 대한 배반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현실에 우리는 예수처럼 살기보다는 예수에게 뭘 좀 달라고 비는 쪽이 신앙의 대세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 허접한 설교들
그러니 그가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앉아 있을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은 목사들의 설교가 싫어서다.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은혜는커녕 열을 받는다. (…) 심지어 설교를 빌려 자신의 불만 어린 감정을 터뜨린다든지, 하는 짓을 보고 있노라면 열을 받다 못해 화가 치민다.”
그러나 그가 모든 설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람다움을 말하는 설교가 있다면 그리스도교를 떠난 뒤에도 즐겨 찾아가서 경청하곤 할 것이다.” 이러면서 그는 세례가 마치 성찬예식의 자격처럼 되고 있는 것도 못마땅해 한다. 그 뜻에 동참하고 함께 하고 싶은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떠나니까, 역사의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보였고,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넘어선 ‘참 하느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역사의 예수를 넘어서 ‘민중(다중)’에게서 사람다움(인간화)의 길을 찾으려 하며, 하느님과 함께 노닐며 사는 생천주(生天主)긔 자리를 넘보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겠는가? 내가 그리스도교를 떠나게 된 것,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작품 가운데 ‘바보 김펠 (Gimpel the Fool)’이라는 단편이 있다. 내용은 바보 김펠이 사람들에게 계속 기만당하고 농락의 대상이 되면서도 그걸 알고도 그대로 당해주는 모습을 그려냈다. 결국 김펠은 집을 떠나 세상을 다니면서 사람들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데 그의 모습은 점차 성자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 바보 김펠, 바보 한도명 그리고 “봉기”
문학적 전통 속에서는 바보 문학의 흐름의 한 갈래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조롱과 농락이 결국 신에 대한 농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신의 이름은 인간에 대한 믿음, 정의, 평화, 생명 그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좋다. 우리는 그런 가치들이 농락당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작품에서 폭로되고 있는 것은 인간 또는 신을 조롱하는 자들의 추악함이다.
한도명은 이런 세상에서 바보 또는 어리석은 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신학자가 그리스도교를 떠나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떠나지 않으면 열리지 못하는 길이다. 신조차 농락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결별 선언을 하지 않는 한, 진정한 신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정신적 갈림길에 서 있지 않은가?
이 책은 많은 논쟁이 필요한 대목을 지니고 있지만, 제기하는 문제 자체로 이미 우리의 현실을 보다 통쾌하게 앞으로 밀어내고 있다.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의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죽었다고 여긴 이들이 다시 일어나 봉기를 일으키는 시작은 그렇게 온다. _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 독자의 평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는 평생을 그리스도교 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친 한도명이란 분이 자신이 왜 그리스도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밝힌 글이다. 사안의 핵심은 당연히“왜”이다.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와, 예수가 생각한 그리스도가 달랐다는 사실을 배경 설명으로 제시한다. 베드로는 예수를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승리와 영광의 지도자로 보았던 데 비해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서의 대속적(代贖的)의미의 죽임이 예정된, 하느님의 사역적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울 것 없는 이 엇갈림을 보고 나는“베드로가 바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에 대해서보다 베드로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다.”(한스 요아힘 마즈 지음 ’사이코의 섬‘ 288 페이지)는 말을 떠올렸다.
마즈의 말은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베드로는 어째서 무력의 질(質)과 양(量) 양면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능력과는 거리가 먼 예수라는 존재를 의심 없이 따랐으며, 예수는 자신이 대속 제물로 죽을 운명이 예정된 사실을 잘 알면서 어째서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식했는가?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저자에 의하면 정치적 해방자를 뜻하는 히브리어인 메시아가 정치적 의미가 배제된 채 종교적 의미로 고착되어 그리스도라는 그리스어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대속론에서 드러난 이런 허점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인 중보론, 육화론, 양성론, 삼위일체론 등에서도 드러난다. 저자에 의하면 대속론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법적 사고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침으로써 속죄를 받는다는 제의적 사고가 결합된 원시적 산물이다.
대속론의 첫 번째 결함은 하느님을 피에 굶주린 잔인한 하느님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꼭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사(赦)해주기 위해 사람이나 짐승의 피를 요구해야 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을 저자와는 일정 정도 다르게 본다. 대속을 실행했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사에 개입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개입은 구약 성경의 도처에 드러난다. 문제는 오늘날은 그런 개입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하느님의 섭리를 감지하지 못하는 섬세한 영적 감수성의 결여의 결과로 돌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실상과 구약의 실상은 너무 판이하다. 상징적인 의미인지 모르지만 구약에서 하느님은 인간들과 직접 말을 주고 받았다. 신학자들은 아담의 죄(불순종)로 온 인류가 죄인이 된 것과, 예수의 죽음으로 온 인류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구약과 신약의 상응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상응이 이루어지고 어떤 부분은 상응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어째서 아담과 예수의 상응을 절묘한 것이라도 되는 양 주장하는 분들이 구약에서의 하느님의 일상적 개입과 신약 이후에서의 침묵이라는 근본적 불상응에 대해서는 침묵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혼탁함과 죄악상은 도무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게 한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의 일원론에서는 죄란 없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죄란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결론을 생각해 보라. 기독교 신학은 죄가 전능(全能), 전선(全善)의 하느님에게서 나올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가 있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악용한 결과라고 말하지만 이는 어정쩡한 절충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란 없다는 결론과 악의 실재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원죄를 끌어들였지만 그 악의 출처가 어디인가, 하는 아포리아는 해결하지 못했다. 대속론을 인정하지 않는 저자는 진정으로 죄를 뉘우친다면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며 그 징표로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을 거론한다. 즉 세례 요한이 깬 유대교적 대속론을 다시 깨고 악을 대속하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악을 없애기 위해 싸우다 죽은 예수를 대속론적으로 해석하는 교리의 문제를 지적하는 저자의 논리는 절묘하다.(52 페이지)
이 부분이 절묘한 것은 저자의 논리(예수는 악을 대속하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악을 없애기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를 수용할 때만이 전기(前記)한 예수의 탄식(‘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민중신학적 메시지가 강하게 들어있는 부분이다. 반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그 만남을 매개하는 중보자(仲保者: mediator) 개념의 불필요함을 역설하는 부분은 자기초월의 경지, 탈아(脫我) 상태에서 신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음을 말하는 신비주의적 가르침을 긍정한 부분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중간자 개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플라톤 사상에서 더욱 참되고 아름답고 선하고 거룩한 자리에 이르려는 자기상승의 정신과 활동인 에로스는 궁극의 자리에 이른 다음에는 현실의 자리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 하강의 실천을 그리스 사람들은 아가페라 불렀고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전이시켰다.(60 페이지)
신인 양성론의 불합리함을 논하는 자리 역시 치열하다. 흔히 신인 양성론은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녔음을 의미하는데 이를 단지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것으로 보는 대신 신의 불변성과 인간의 무상성을 또는 신의 절대성과 인간의 상대성을 어떻게 함께 지닐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신인 양성론은 모순적이고 애매한 개념임이 바로 드러난다. 저자는 예수를 신앙의 예수가 아닌 역사적 예수로 받아들인다. 그것은“그리스도교에 갇혀 있거나 가려진 하느님을,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완전히 곡해한 역사의 예수를 제대로 드러내자는”(81 페이지) 말이 증명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도 저자의 예봉(銳鋒)을 피해가지 못한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다. 저자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바탕을 제시하는 요한복음에서조차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런가 하면 오랜 동안 내게는 난제였던“나는 나다“라는 야훼의 선언에 나오는 이다라는 동사는 되다, 하게 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 판명되고 있다고 한다.(89 페이지)
구약의 야훼는 존재 개념이 아닌 행동개념, 역사개념으로 보아야 옳은 것이다. 민중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는 저자는 당연히 예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91 페이지) ”만일 전능하고 전지한 신이 사람이라는 탈을 쓰고 처녀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타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온갖 병자들을 고치고 기득권자들의 횡포와 싸우고 율법의 악용에 맞서고 기존 가치체계에 대해서 도전하고 성전에 침입하여 기물을 때려부수는 따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고 상상해보자.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다 알고 그 각본에 따라 활동한 것이 예수였다면 예수는 얼마나 황당한 쇼를 하는 것이 되겠는가?“(91, 92 페이지) 저자는 히브리인들의 성서가 편집된 것은 기원전 600년 무렵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는 사실을 적시(摘示)한다.
요는 창조 이야기가 성서의 가장 처음에 편집된 것은 암울한 실상을 희망으로 이겨보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저자가 그리스도교를 떠난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이용되는 하느님이 싫어서이다. 하느님이 독재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115 페이지) 저자가 그리스도교를 떠난 또 하나의 이유는 교회가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주제와 내용과 본문이 제 각각인 설교를 하고 맘몬주의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 세계관에 침윤(浸潤)된 채 공부하지 않는, 또는 어떤 경우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는 성직자들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교회를 찾는 목적이 좋은(인간다움을 말하는) 설교를 듣기 위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데 있음을 말한다.(157 페이지) 예배만은 경건하고 진실하고 진지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예배의 하이라이트인 설교가 오히려 교회를 시장처럼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과 반(反)하는 설교는 없는 것만 못하다. 그 대신 바로크나 고전,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수많은 칸타타, 코랄, 레퀴엠 등을 듣는 것으로 바꿔도 좋을 것 같다. 아니 조용히 집에서 그런 음악을 듣는 나는 경건함에서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반면 저자는 일요일이면 산으로 가서 명상에 잠기거나 하느님을 생각한다고 한다. 비 안개 자욱한 숲길을 걷다 보면 신비로움에 젖어 금방이라도 하느님이 나타나실 것만, 아니 하느님을 만나 뵈옵는 듯 싶다고 한다. 그리고 황홀경에 묻히면 하느님마저 잊어버린다고 한다.(158 페이지) 이 도저한 신비주의적 성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도로테 죌레 박사 생각이 난다. 죌레 박사는 신비주의의 역사는 하나님 사랑의 역사이며 신비주의는 저항을 의미한다는 말을 했다. 죌레 박사는 내적 신비주의와 외적인 정치 지향성의 차별을 없애려 했던 분이다.‘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를 읽고 나는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지난 1992년 시골 교회 청년회에서 홀로 민중신학적 가치관을 수용하고 있던 나는 서울 명동의 향린교회(기독교 장로회)에 입적(入籍)한 뒤 오고 가는 데 꼬박 네 시간이나 걸리는 예배를 위한 고행(?)길을 자처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저자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교회는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그런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람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저자는 역사의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 메시지와 그가 벌인 하느님 나라 운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183 페이지) 저자는 오늘날 예수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예수를 넘어서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는 곧 역사의 예수를 재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의 민중론은 다중(多衆)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이어진다. 마침 네그리의‘전복의 정치학’을 읽으려 하는 내게 저자의 메시지는 반갑게 들린다. 저자가 그리스도교를 떠나고 다중론을 펼치기까지 깊은 고뇌와 모색의 시간들을 보냈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고개 숙여 존경을 표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