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 급진적 휴머니스트의 혁명적 구약 읽기
에리히 프롬 · 에릭 프롬 / 휴 펴냄 / 2013.6.17

– 우상숭배의 역사, 에리히 프롬의 무신론적 하나님을 만나다! 급진적 휴머니스트의 혁명적 구약 읽기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 소외의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에리히 프롬이 사회심리학과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구약의 새로운 가치 읽기를 시도한다.
절대 다수가 돈이라는 우상에 빠져 있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자유의지’와 우상숭배와의 투쟁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즉 구약은 끊임없는 우상숭배와의 투쟁을 그린 드라마이며 인류의 역사는 결국 우상숭배의 역사라고 단언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반항으로 시작된 구약은 인간의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투쟁의 기록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의 역사는 휴머니즘의 정수인 ‘자유’와 ‘사랑’을 체득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불복종 이야기를 ‘타락’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의 해석은 인간의 자유라는 이야기의 명백한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했다.
○ 목차
Chapter 1 머리말
Chapter 2 서론
Chapter 3 하나님에 대하여
Chapter 4 인간관
Chapter 5 역사관
Chapter 6 죄와 회개에 대하여
Chapter 7 길
Chapter 8 시편
Chapter 9 맺음말
보론

○ 저자소개 : 에리히 프롬 · 에릭 프롬 (Erich Fromm)
에리히 프롬은 한평생 근대인에게 있어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으며 소외를 넘어선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 속의 적과 싸운 사람이었다. 그는 마르크스로부터 사회 구조의 변혁에 대한 감각을, 프로이트로부터 인간의 심연을 분석하고 해방하려는 의도를 배웠다. 방법론적으로는 ‘사회적 조건’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으며 이 3자의 역학관계에 의해 역사와 사회의 변동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근대 사회의 숨어있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이러한 방법론을 적용하여, 납득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광기로 가득찬 나치즘을 수용하고 지지한 대중들의 심리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온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에리히 프롬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론이 확립되었음을 선언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책은 감당할 수 없는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 근대인의 심리적 기반이 나치즘이라는 우상을 수용했음을 밝힌 것이다.
나아가 프롬은 사회심리학적 시각으로 현대인들의 소외의 양상을 유형별로 고찰하고 근대적 세계 속에서 인간이 참다운 자기를 실현하여 가는 길을 찾고자 하였다.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은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야말로 인간을 소외로 몰고 가는 근본적인 틀임이 거듭 밝혀지고, 이를 넘어서고자 할 때 인간 개인의 내면적 해방과 사회구조의 변혁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고 프롬은 주장한다. 이를 통해 『건전한 사회』, 즉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요 삶의 보람이라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다.
이러한 프롬의 주장은 너무나 원론적인 것이어서 때로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문제 인식과 방향 설정에 하나의 유효한 도구가 됨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 외 저서로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가 있다.

○ 책 속으로
나는 구약을 ‘하나님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구약이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각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쓴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유신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은 수천 년 동안 타당성을 유지해온 여러 규범과 원리를 표현해놓은 대단한 책이다. 지금도 여전히 타당하며 장차 실현해야 할 일종의 비전을 선언한 책이다 —p.13
우상의 본질은 특정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 때문에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상숭배 개념에 익숙한 헤브라이인은 어느 이름 없는 역사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 없는 우상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점을 알고 헤브라이인의 인식 수준에 맞게 양보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이름을 지은 뒤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출애굽기 3장 14절)—p.37
“인간은 자신의 열망과 자질을 우상으로 변형시킨다. 인간이 무기력해질수록 우상은 더욱 강력해진다. 우상은 어떤 경험에서 인간 자신이 소외된 형태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제한된 일면인 지능, 체력, 권력, 명예 따위를 숭배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일면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그 일면으로 제한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전체성을 상실하고 성장을 멈춘다. 인간은 우상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만 자신의 피난처를 찾을 수 있기에 그 우상에 의지한다.” —p.51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서 소외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 우상이고, 이런 능력과 접촉하는 방식이 우상에게 복종하며 집착하는 것이라면, 우상숭배는 필연적으로 자유, 자주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예언자들은 우상숭배를 자기학대와 자기비하로, 하나님 숭배를 자기해방과 타자로부터의 해방으로 거듭 규정짓는다.—p.54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은 역사 과정에 개입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외톨이가 되어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하나님은 돕지만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돕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줌으로써 돕는다. 어떤 신도 믿지 않는 내 어법으로 말하면 이렇다. 요컨대, 인간은 외톨이가 된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무도 그를 대신해 처리해줄 수 없다.—p.106
모세의 죽음은 혁명이 가능한지를 다루는 문제에 대한 성서의 해법에 종지부를 찍는다. 혁명은 때맞춰 단계를 밟아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 저항은 고통에서 비롯되며,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은 저항에서 비롯된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면(freedom from serfdom)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freedom to a new life)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은 기적적으로 바뀌지 않으므로 각 세대는 오직 한 걸음만 내디딜 수 있다. 고통에 시달린 끝에 혁명에 착수한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정해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노예제도 아래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만 성공적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p.131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바랐다면,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원했다면,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이 모질어지게 놔두는 대신에 그의 마음뿐 아니라 헤브라이인의 마음까지 변화시킬 수 있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헤브라이인은 금으로 만든 송아지상을 숭배하지 않았을뿐더러 약속의 땅을 정복한 뒤 새로운 우상숭배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권능이 모자랐던 것일까? 단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p.133
예언자라는 개념은 메시아시대에 관한 개념과 마찬가지로 성서에서 언급하는 특유한 개념이다. 예언자는 진리의 계시자다. 노자와 부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언자는 정치 활동과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은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다. 예언자는 정신적 영역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분야에 관심을 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언자는 항상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영성을 체험한다.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계시하기 때문에, 예언자는 정치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정치 활동에서 노선을 잘못 선택하는 한, 예언자는 반대자이자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다.—p.135

성서에 담긴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인간이 이성과 사랑을 발휘할 능력을 개발해 완전한 인간이 되어 원래 자기 모습을 되찾는 과정이다. 인간은 잃어버린 조화와 순수를 되찾지만, 그것은 새로운 조화이자 새로운 순수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경지의 조화다. 인간은 마침내 망상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인간은 역사 과정에서 자신을 창조한다. 인간은 잠재된 자질을 개 발하여, 뱀(지혜와 저항의 상징)이 약속한 바와 가부장적이면서 다른 신의 숭배를 용서하지 않는 아담의 하나님이 원치 않은 경지에 이른다. 즉,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p.140~141
에덴동산과 메시아시대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성립한다. 에덴동산은 다른 문화의 여러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의 황금기에 해당한다. 메시아시대는 미래의 황금기다. 두 시대는 조화로운 상태라는 점에서 같다. 인간이 아직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최초의 조화로운 상태가 존재하는 반면, 인간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남으로써 새로이 조화로운 상태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두 시대는 다르다. 메시아시대는 인간이 순수를 상실한 뒤 애써 추구하는 목표이므로 순수로 복귀하는 것일 뿐이다.—p.141
성서 구절은 삶과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원리와 가치로 언급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성장하고, 발전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성장을 멈추고, 고착되고, 어떤 사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은 삶의 가치와 죽음의 가치 중에서 하나를 분명히 선택하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에 속하지 못한 채 몸은 살아 있으나 정신은 죽어버린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삶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랑과 자유와 진리의 필요조건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다. 《시편》 작가는 그 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은 사람은 주님을 찬양하지 못한다.”(시편 115편 17절)—p.203
안식일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 상태를 상징한다.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말해서 자연 작용과 사회 변화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은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다.—p.218
전통적 안식일의 개념에서 ‘휴식’은 일을 하지 않거나 어떤 활동을 하지 않는 ‘쉼’과 전혀 다르다(이는 예언자 전승에서 평화[샬롬]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과 같다. 그 말은 조화, 곧 일체성을 나타낸다).안식일이 되면 인간은 생존 투쟁과 생물학적 생명 유지를 주요 활동으로 삼는 동물의 생활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안식일이 되면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 그것 말고 다른 임무는 없다. 유대교 전승에서 최상의 가치는 노동이 아니라 휴식이다. 휴식은 오로지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목적만 추구하는 상태다. —p.219

○ 출판사 서평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에리히 프롬의 충격적 구약 해설!
급진적 휴머니스트, 에리히 프롬이 사회심리학과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구약의 새로운 가치 읽기를 시도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 소외의 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던 에리히 프롬이 구약 속에서 깨알같이 찾아낸, 숨겨진 보물들의 파노라마다. 나치에게 친인척을 잃고, 고향인 독일을 떠나 미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는 한평생 인간이 ‘우상’과의 투쟁을 통해 길어 올린 자유와 자주를 획득하는 과정을 탐색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구약 하면 떠올리는 드라마가 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하나님의 벌, 죄지은 인간의 행보… 과연 그 얘기뿐일까? 그게 진실일까? 에리히 프롬은 결단코 ‘아니오’라고 선언하며, 물음표를 던진다. 그에게 구약은 “장차 이뤄져야 할 비전이 담겨 있는 혁명서”이다. 그 비전은 근본적 휴머니즘(Radical Humanism)의 실현이다. “이 책에서는 구약을 근본적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근본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류의 조화(oneness), 즉 인간이 자기 능력을 개발하고, 조화로운 정신세계에 도달하여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는 구약의 포괄적 사상을 언급한다. 근본적 휴머니즘에서는 인간이 완전한 자주성을 가진 존재를 지향한다고 보는데, 이는 허구와 환상을 꿰뚫어보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리히 프롬은 구약 속 하나님을 통해 인간 해방의 실마리를 찾았다. 아담과 이브의 ‘반항’으로 시작된 구약의 드라마는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투쟁의 기록이다.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신비주의(nontheistic mysticism)를 지지한다’고 밝힌 에리히 프롬에게 하나님은 실존하는 형상이 아니라, 휴머니즘에 담겨 있는 최고 가치를 시적으로 표현한 여러 단어 중 하나이다.
에리히 프롬이 타계한 지 4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바라던 구약의 비전은 실현되었는가? 현대인은 우상숭배로부터 탈주했는가? 그는 절대 다수가 ‘돈’이라는 우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오늘의 현대인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돈과 외모, 명성이라는 우상에 집착하는 우리 세대가 에리히 프롬의 구약 해설서를 다시금 곱씹어봐야 하는 명제가 여기에 있다. 현대인은 우상숭배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모두의 바람과 달리, 결론은 어디까지나 물음표다. 그 실현은 하나님이 ‘무한대로 펼쳐놓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의 원천은 ‘무신론적 하나님’이었다!
에리히 프롬의 혁명적 구약 읽기는 인간의 원죄설에 대한 전복적 해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유대인이면서 기꺼이 유대교 신자의 길을 버린 그의 자유의지는 구약 속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래’를 새롭게 응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휴머니즘의 정수인 ‘자유’와 ‘사랑’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첫 번째 불복종 행위가 인류 역사의 기원이다. 인간의 자유는 거기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인간의 불복종 이야기를 ‘타락’으로 보는 기독교의 해석은 이야기 자체의 명백한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한다. “구약 원문에는 ‘죄’라는 말이 언급되지도 않았다. 요컨대 인간은 하나님의 최고 권능에 도전한다. 그는 장차 하나님이 될 가망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최고 권능에 도전할 수 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행위는 자유를 향한 첫 도전이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기꺼이 환영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들들이 나를 이겼다, 나를 이겼어.”
결국 인간 역사의 목표는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고 예언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자궁 속의 존재’로 지내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를 참을 수 없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고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고 싶어하며 ‘이집트의 노예상태’로 회귀하고 싶어한다.
구약은 끊임없는 우상숭배와의 투쟁을 그린 드라마이며, 인류의 역사는 결국 우상숭배의 역사이다.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에 절을 하던 인간은 오늘에 이르러 ‘폭력’과 ‘돈’에 무한 복종한다. 그런 인간에게 자유와 사랑을 실현할 가능성은 있는가? 에리히 프롬은 구약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무한한 진화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 어느 하시디즘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뒤 잘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가축과 그 밖의 모든 것은 창조된 뒤 완성되었지만,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세 5경과 예언서에서 밝힌 하나님의 말을 지침 삼아 역사에서 타고난 본성을 개발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 진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혈연과 지연에 대한 밀접한(incestuous) 유대에서 벗어나 자주와 자유로 탈출하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될 때 자유로워진다. 구약과 후기 유대교 전승에서 보면, 자유와 자주는 인간 발달의 목표이며, 인간 행위의 목적은 과거, 자연, 씨족, 우상의 굴레로부터 인간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신학이 아닌, 우상숭배에 관한 학문이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이 볼 때 유일신 사상은 우상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름 없는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인간이 우상숭배라는 어리석은 함정에서 빠져나와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 실존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해답이다. 인간은 인류 발생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이성이라는 인간의 특별한 자질을 최대한 개발함으로써 세계와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상숭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프롬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달을 구분하라고 끊임없이 제안한다. 그런데 오늘의 달(하나님)은 ‘신학’이라는 포장지 속에서 또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즉 신학이 이름 없는 하나님에 대한 여러 사상을 논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신학을 통해 ‘하나님’이라는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우를 범하는 셈이다. 프롬은 오히려 신학 대신에 ‘우상숭배에 관한 학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신학이 발 디딜 여지는 없다 하더라도 ‘우상에 관한 학문(idology)’이 생겨날 여지와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이 학문은 우상과 우상숭배의 본질을 밝히고, 오늘날까지 숭배되어온 여러 우상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프롬은 ‘우상에 관한 학문’은 소외된 인간이 필연적으로 일종의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외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외부 사물로 변형시킴으로써 스스로 무기력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일면을 조금이나마 유지하면서 결국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외부 사물을 숭배할 수밖에 없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인간이 마음속 깊이 열망하는 표본이다. 그것은 땅, 곧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이며 소유, 권력, 명예 따위에 대한 갈망이다. 우상으로 상징되는 열망은 인간의 가치체계 안에서 최고의 가치에 해당한다. 우상숭배 역사를 살펴보기만 해도 우상을 수백 개나 열거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어떤 열망과 욕구를 상징하는지 분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우상숭배의 역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원시시대에는 진흙이나 나무로 된 우상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우상화된 신의 은총으로 신격화된 국가와 지도자, 생산과 소비라는 우상이 있다.”
우상숭배에서 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근본적 휴머니즘의 부활’이다. “(구약속) 예언서의 정신과 희망이 널리 유포된다면, 이와 같은 새로운 휴머니즘의 힘과 생명력에 따라 상황은 바뀔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