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리처드 3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 동인 / 2014.7.8

『리처드 3세』에서 주시할 점은 리처드가 드러내는 연극성이다.
리처드는 작품의 도입부에서 불구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들먹이면서 관객의 동정심을 확보하고 자신이 ‘악당 역’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 목차
발간사
옮긴이의 글
등장인물
1막
2막
3막
4막
5막
주
작품설명
셰익스피어 생애 및 작품 연보

○ 저자소개 :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이자 세계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멸의 거장.
“한 시대가 아닌 모든 시대를 위한 작가”로 불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읽히고 상연되며 늘 새롭게 해석되고 사랑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학은 물론, 세대와 분야를 불문하고 문화 전반에 방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1564년 잉글랜드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부유한 상인이자 유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586년 무렵 고향 스트랫퍼드를 떠나, 1589년 첫 작품 『헨리 6세』를 발표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즈음부터 이미 왕실로부터 두터운 후의를 입을 만큼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계층을 가리지 않고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1600~06년경에 ‘4대 비극’인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를 차례로 발표하며 세계문학의 위대한 걸작들을 남긴다.
1610년경 스트랫퍼드로 돌아가 『폭풍우』 등을 발표하며 지내다가 1616년 그곳에서 사망하고 묻혔으며, 평생 37편의 희곡과 154편의 쏘네트, 2편의 이야기시 등을 집필했다.
당대를 풍미한 극작가로서 천재적인 언어 능력과 사회를 꿰뚫는 통찰을 보여주었고, “만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라고 일컬어질 만큼 인간에 대한 다각적이고 깊은 이해로 타계한 지 400년이 지나도록 최고의 작가로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에 대하여
영국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1564년 4월 23일 존(John) 셰익스피어와 메리 아든(Mary Arden) 사이에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영국 잉글랜드 워릭셔주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존 부부의 첫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경과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셰익스피어는 11살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경과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그리스어도 배웠지만 그리 신통하지는 않았다.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대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는 못했지만,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운 자연의 아들이자 천재였다.
1582년 앤 해서웨이와 결혼하여 딸과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 이후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겨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극작가로 성공했으며 희극 배우로도 활동했다. 후원자 사우샘프턴 백작의 도움으로 궁정에도 출입하며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 1세에게 후대를 받아 1594년에는 궁내부장관 극단의 전속 극작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사업적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재산 관리에도 능숙해 상당한 부동산을 구입하여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다.
수많은 희곡 중 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무어인 장군 오셀로가 이아고의 간계에 빠져 사랑하는 아내를 질투하고 살해하는 비극을 다룬 『오셀로』, 자신에 대한 딸들의 충성을 시험하다 비극을 맞는 『리어왕』,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비극을 초래하는 『맥베스』, 그리고 마지막이 이 4대 비극 중 가장 앞서 쓰였다는 『햄릿』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그렸다. 인간을 들여다보는 깊이 있는 시선은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들에 길고긴 생명을 부여한다. 끊임없는 재해석이 그 방증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인물들을 파고들고 해석하는데, 문학에서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가치를 그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1590년 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다. 특히 『헨리 6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작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인기는 더해갔다. 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668년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극찬했다. 1610년경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셰익스피어는 대저택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서거하여 성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되었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극작가로서, 대표 작품으로는 『공연한 소동』, 『12야 (夜)』, 『자(尺)에는 자로』, 등의 희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 왕』,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의 비극을 비롯해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헨리 4세』, 등 10편의 비극(로마극 포함),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 『비너스와 아도니스』, 등의 시집 및 『소네트집』도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 줄거리
《리처드 3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 에드워드 4세의 짧은 통치 이후 왕위에 오른 그의 동생 리처드 3세 통치 하에서 귀족들의 반란으로 영국이 다시 내란에 휩싸이고, 마침내 랑카스터 가의 외척이자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된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에 의해 평정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강력했던 군주 헨리 5세 사후, 그의 유약한 아들 헨리 6세의 통치하에 있던 15세기 영국은 왕가인 랭커스터 가문과 그 친척이자 경쟁자였던 요크 가문의 권력투쟁으로 삼십여 년의 내란을 겪는다. 두 가문이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문장으로 했던 까닭에 이 내란을 ‘장미전쟁’이라 한다.
헨리 6세와 그의 태자 (‘최후의 랭커스터’)의 죽음으로 전쟁은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 가의 승리로 끝난다.
셰익스피어가 영국사의 이 기간을 연대기적으로 극화한 작품은 그의 출세작으로 간주되는 ≪헨리 6세 3부작≫이다.
이어서 발표된 작품이 바로 ≪리처드 3세≫이다.
이 극은 에드워드 4세의 짧은 통치 이후 왕위에 오른 그의 동생 리처드 3세 때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 영국은 귀족들의 반란으로 다시 내란에 휩싸였고, 결국 랭커스터 가의 외척이자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된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에 의해 평정되었다.
영국의 왕 · 아일랜드 영주 리처드 3세 (Richard Ⅲ, 1452 ~ 1485) 개관
리처드 3세 (Richard Ⅲ, 1452년 10월 2일 ~ 1485년 8월 22일)은 잉글랜드 요크 왕가 최후의 왕(재위 : 1483년 ~ 1485년)이다.

– 리처드 3세 (Richard III)
.출생: 1452년 10월 2일, 노샘프턴셔, 파서링게이 성
.사망: 1485년 8월 22일 (32세 사망), 보즈워스 필드
.매장: 2015년 3월 26일, 영국 레스터 레스터 대성당
.왕조: 플랜태저넷
.가문: 요크
.부모: 부)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모) 세실리 네빌
.배우자: 앤 네빌
.자녀: 웨일스 공 미들햄의 에드워드
.형제자매: 에드워드 4세, 조지 플랜태저넷 클래런스 공작 등
*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영주
.재위: 1483년 6월 26일 ~ 1485년 8월 22일
.대관식: 1483년 7월 6일
.전임: 에드워드 5세 / 후임: 헨리 7세
장미 전쟁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4세의 동생으로 조카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섭정 (Lord Protector)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돌변해서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하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사건이 일어났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장미 전쟁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영국 중세사를 논할 때 상당히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 생애 및 활동
1452년 10월 2일 현 영국 잉글랜드 이스트 미들랜즈의 노샘프턴셔에 있는 포더링헤이 (Fotheringhay) 성에서 요크의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13남매 중 12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웬즐리데일에 있는 미들햄 (Middleham) 성에서 보냈는데, 그 성은 사촌형이기도 한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소유였다. 그곳에서 리처드는 워릭의 딸들 이사벨과 앤, 그리고 워릭의 피후견인 프랜시스 러블과 친하게 지냈고 이후 그 친구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둘째 형 에드먼드가 죽자 어머니가 바로 윗형 조지와 함께 저지대 국가들로 보내어 1년간 피난 생활을 했다. 그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 큰형으로부터 글로스터 공작위를 받았다. 다만 아직 나이가 어려 어린 시절 살던 미들햄 성으로 보내져 12살까지 기사 훈련을 받았다.
에드워드 4세의 막내 동생으로,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글로스터 공작이 된다. 이후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집안에서 기사훈련을 받고 17세에는 군사지휘관이 되었는데, 에드워드 4세가 쫓겨났다 다시 왕위를 되찾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죽음 전에 리처드를 단독 섭정으로 임명하였을 정도로 리처드를 총애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4세가 죽자 당시 12세였던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를 대신해 섭정으로 잉글랜드를 다스리게 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치르기 직전에, 에드워드 5세의 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은 중혼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의회에서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에드워드 5세와 그 형제는 서자로 인지되어 왕위계승권이 낮춰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던 리처드 3세가 약 2달 후인 6월 경에 왕위에 오른다. 두 조카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는 8월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튜더 왕조 성립 이후에 리처드 3세가 런던탑에 가두어 살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1484년 1월 23일, 리처드는 재위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회를 열어 27일 동안 사법 18개조, 공법 15개조를 통과시켰다. 18가지 사법들은 전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버킹엄 공작 일당을 단죄하고, 존 하워드에게 노퍽 공작을 수여하고, 북부 지역의 유력 귀족인 스탠리 가문에 토지와 벼슬을 퍼주면서 왕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목적에서 만들어진 <Titulus Regius (왕의 권리)> 라는 문서는 상술한 에드워드 4세의 혼인 문제를 근거로 리처드 3세의 계승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정리했다. 이후 헨리 7세는 이 문서의 원본을 포함한 모든 사본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크로일랜드 수도원에 한 부가 살아남아 현존한다.
15가지 공법들은 덕세를 폐지하는 등 사법 체계를 개혁하고 잉글랜드 상인과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힘없는 평민들에게 유리한 개혁이었기에 프랜시스 베이컨 경을 포함한 후대 학자들에게 호평받는다.

아래는 15가지 공법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1조 – “이제부터 모든 토지 양도, 토지 선물과 그와 같은 행동들은 판매자와 그 자손이 아니라 구매자에게 유리한 조건이어야 한다.”
2조 – “이 왕국의 백성들은 어떠한 덕세도 부담하지 않는다.”
3조 – “모든 치안 판사는 죄수에게 조건부 석방 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 죄수가 사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어떤 공무원도 그의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
4조 – “신용과 토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주 장관의 순회 때에 배심원을 선정해야 한다.”
5조 – “1조는 오랫동안 내려오던 규정을 바꾼 것이 아니며, 왕은 영지 수령권을 유용할 수 없다.”
6조 – “모든 파이가루 법정에서 원고 혹은 그의 변호사는 반드시 선서해야만 한다.”
7조 – “개인은 민사법원의 재판관들 앞에서 부과된 재산 양도 민사소송 (fine)과 그 선언서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8조 – “브로드는 팔리기 전에 반드시 완전히 세탁되어야 하고 길이는 24야드, 너비는 2야드여야 한다. 직물 거래에 어떤 부정직한 일도 있어서는 안 되고, 하얀 직물에는 분필로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9조 – “이탈리아 상인들이 상품을 파는 방식에 어느 정도의 외국인 규제가 필요하다.”
10조 – “비단 레이스, 리본, 가위, 방울, 못 따위의 수입을 금지한다.”
11조 – “이탈리아 상인들은 포도주 1통당 10개의 좋은 활을 만들 막대를 가져와야 한다.”
12조 – “이 왕국에 특정한 상품들을 들여오는 걸 금지한 이유는 그것들이 초래할 결과 때문이다.”
13조 – “포도주와 기름은 양을 재기 전에는 용기에 담아 판매할 수 없다.”
14조 – “성직자의 십일조 (dismes)를 걷는 회계사는 재무부에서 진행되는 다른 사람의 소송에 증인으로 불려나오지 않는다.”
15조 – “전임 잉글랜드 왕비 엘리자베스 그레이에게 국가에서 내려준 모든 것과 영지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이중 4조는 악용의 가능성이 많았고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개인의 돈이 많을수록 지닌 미덕도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 랭커스터 왕들이 부족한 정통성을 의회의 도움으로 통치하려던것과 달리 요크 가문 왕들은 의회를 무시하고 상속권으로만 통치하려 했던게 실책으로 보인다. 뒤늦은 조치와 달리 요크 가문의 통치는 의회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리처드 3세가 급속하게 민심을 잃고 몰락한 것도 이것과 영향이 있다. 물론 이 시절 의회는 지금과 달리 상하원을 막론하고 귀족과 젠트리들이 좌우했다.

그런데 리처드에게 큰 타격을 준 사건은, 1484년 후계자인 외아들의 죽음이었다.
리처드는 두 조카를 죽이고 나서도 뻔뻔했다. 리처드 3세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가 죽고나자 후계자가 없었고 일단 자신의 누이의 아들인 외조카 존 드 라 폴을 추정상속자로 지명했다.
왕비 앤 네빌은 아이 없이 4월에 사망했다.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할 때까진 그나마 괜찮았지만, 유일한 적자가 죽은 데다가 두 조카를 죽인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리처드는 30살 넘고 후계자도 없는 데다가 장애인이었고, 조카들까지 살해했기 때문에 후계자도 없어졌으므로 왕권의 지지기반이 흔들렸다.
요크 가문 지지자들은 두 조카를 죽인 것에 반발했고, 리처드도 민심을 수습하고자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두 사람이 결혼설이 퍼지자 비밀리에 우드빌 왕비와 동맹을 맺었던 헨리 튜더가 급히 프랑스의 지원과 랭커스터 지지자와 요크 지지자들 중 리처드에 등돌린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이 상륙하자 놀란 리처드는 전투에 나섰다.
장미 전쟁 중이던 1485년 보즈워스에서 있었던 헨리 튜더와의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플렌테저넷 최후의 왕이자, 전투에서 죽은 마지막 잉글랜드의 국왕이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죽은 해럴드 2세를 이어 잉글랜드 내 전투에서 죽은 두 왕 중 한 명이다.
튜더 시대를 거치면서 리처드 3세는 곱추에 한쪽 팔이 기형이며 권세욕이 강하고 음모와 책략에 뛰어난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리처드 3세가 가진 폭군의 이미지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 존재하고 있다.
2012년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굴됨에 따라 최소한 그의 외모에 대한 것은 옳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리처드 3세는 척추측만증이 있긴 했으나 옷을 갖춰 입으면 크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으며, 키 172cm 정도에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을 것이라 한다.
2015년 3월 26일에는 리처드 3세의 시신이 레스터에 위치한 레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