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 사계절 / 2000.6.30
이 책은 마르코 폴로의 생생한 여행담을 기록한 것이다.

여러 나라의 기이한 풍습과 역사를 바라보되 결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의 객관적-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시선이 13세기 후반의 전세계를 이해하는 코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특히 이 동방견문록은 그간의 것들과는 달리 인명과 지명 그리고 사건 등에 대한 저자의 심도있는 연구가 기반이 되어 동방견문록이 여행담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이유를 알려준다.
○ 목차
해설 – 마르코 폴로와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 목차
서편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대카안의 수도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
중국의 동남부
인도양
대초원
찾아보기
○ 저자소개 : 마르코 폴로 (1254년 9월 15일 ~1324년 1월 8일)
마르코 폴로 (1254년 9월 15일 ~1324년 1월 8일)는 열다섯 살 때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동방 여행길에 올라,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과 인도를 거치는 25년의 여정을 마치고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온다. 그 뒤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베네치아군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는데, 감옥에서 소설가 루스티첼로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마르코 폴로의 경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글로 옮겨, 마침내 위대한 고전「동방견문록」이 탄생한다.

마르코 폴로는 1254년경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그가 태어날 때 중앙아시아의 중국에 있었으며, 그가 15세 때 돌아왔다. 17세 때 아버지와 함께 베네치아를 떠나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1275년 원나라의 세조가 있던 카이펑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원나라에 간 이유는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요청으로 예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의 성유와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방과의 교류를 원하고 있었던 쿠빌라이 칸으로서는 그리스도교 (기독교)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같이 여행을 시작한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들은 모두 돌아가, 성유만 갖고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세조의 신임을 얻은 그는 정치, 외교 등의 요직을 맡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관리로써 원나라를 위해서 일하면서 17년 동안 중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을 비롯하여 몽고 · 버마 · 베트남까지 다녀왔다. 1292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제노바와의 해전에 가리 함대에 속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쟁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 주었는데, 이때 작가 루스티켈로가 자신의 중국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마르코의 이야기를 받아적어, 그 유명한 《동방견문록》이 쓰여졌다. 하지만 원제는 《세계의 서술》이었으며, 이는 유럽인이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 서적은 유럽인의 동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중세 동방 연구에 관한 중요한 문헌이다.
– 역자 : 김호동 (金浩東)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황하에서 천산까지』 ,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몽골제국과 고려』,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한 역사학자가 쓴 성경 이야기: 구약편』 등이 있고, 역서로는 『역사서설』, 『유목 사회의 구조』,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슬람 1400년』, 『몽골제국 기행: 마르코 폴로의 선구자들』, 『라시드 앗 딘의 집사』(2019년 전5권 완간 예정)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풍습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마르코 폴로의 글 안에서 다른 문화와 관습에 대한 경멸심, 후일 그의 후손들이 비서구사회를 보고 곧잘 느꼈던 서구문명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글에서 자기 문화의 잣대로 다른 문화의 이모저모를 저울질하고 재단하려는 태도보다는 신기하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기독교도였고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까지 부정할 까닭은 없다. 그 역시 시대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종교관이 현대의 다원주의와 같은 것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기억해야 할 점은 종교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태도와 서술이 당시 유럽인들의 눈에는 ‘위험’할 정도로 자유로웠다는 사실이다. — p.35~36
그 안에는 샘물들과 강과 잔디밭이 많다. 대카안은 그곳에 각종 짐승들, 즉 숫사슴과 영양과 노루 따위를 키워서 그곳 새장 안에 기르고 있는 해동청이나 매에게 먹이로 준다. 200마리 이상의 해동청이 있어 그는 매주 한 번씩 그것을 직접 보기 위해 새장을 찾는다. 그리고 대카안은 담으로 둘러싸인 이 정원에서 종종 말을 타고 다니는데, 말 엉덩이에 표범 하나를 묶어서 데리고 다니다가 생각이 나면 그놈을 풀어주어 숫사슴이나 영양이나 노루를 공격하게 한 뒤, 그것을 새장 안에 있는 해동청에게 먹이로 주곤 한다. — p.211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_ 이경덕
진정한 중국의 모습을 서방에 전한 사람은 유명한 마르코 폴로였다. 마르코 폴로는 뤼브리키가 중국에 있던 시기인 1254년에 베니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숙부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왕궁을 방문하고 베니스와의 교역 협정을 맺은 상태였다. 폴로형제는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황제가 교황에게 보내는 친서를 지참했다. _ 이경덕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진정한 중국의 모습을 서방에 전한 사람은 유명한 마르코 폴로였다. 마르코 폴로는 뤼브리키가 중국에 있던 시기인 1254년에 베니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숙부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왕궁을 방문하고 베니스와의 교역 협정을 맺은 상태였다. 폴로형제는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황제가 교황에게 보내는 친서를 지참했다.
그리고 얼마 후 로마교황이 폴로 형제에게 원나라로 가서 몽골 황제에게 친서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원나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17세였던 마르코 폴로도 이 여정에 참가했다.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육로로 지난 다음 페르시아 만에서 배를 타고 호르무즈로 간 후 거기서 걸어서 이란고원을 지나고 파미르고원을 지나 감숙성을 통과해 내몽골에 이르렀다. 그곳에 쿠빌라이 황제가 머무르는 여름 별장이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몽골어, 중국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등을 금방 깨우쳤다. 그의 이러한 재능은 쿠빌라이를 만족시켰고 몽골제국의 특사가 되어 여러 지역으로 파견되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마르코 폴로의 발길은 중국 곳곳으로 향했다. 그사이에 원은 남쪽의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전체를 장악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은 물론, 티베트와 미얀마까지 발길을 옮겼다.
마르코 폴로가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린 것은 1292년이었다. 무려 17년이라는 긴 세월을 중국에서 보낸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몇 차례 고향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쿠빌라이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원나라의 공주가 이란에 있는 일한국(一汗國)으로 시집을 가게 되자 안내자 역할로 선발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마르코 폴로 이전에도 중국에 오랫동안 체류한 서방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황제의 신임을 얻어 특사 자격으로 중국 곳곳을 다닐 수 있었고 또한 그 체험들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따라서 그가 보고 체험한 중국을 기록한 『동방견문록』은 과거에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남긴 것에는 사연이 있다. 처음부터 마음을 먹고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자기의 체험을 글로 남길 생각도 없었다. 마르코 폴로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릴 때 이탈리아를 떠났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교양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방견문록』은 전쟁이라는 엉뚱한 사건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1295년 고향인 이탈리아의 베니스로 돌아간 마르코 폴로는 몇 년 후 베니스와 제노바의 전쟁에 휘말려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드넓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던 마르코 폴로는 좁은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마르코 폴로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피사 출신인 작가 루스티첼로(Rustichello)에게 자기가 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풀어냈고 루스티첼로는 그것은 받아 적었다. 『동방견문록』은 이렇게 감옥에서 탄생했다.
– 『동방견문록』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세계 4대 기행서의 하나로 꼽히는 『동방견문록』의 가치는 엄청나다. 이 책은 전성기를 맞이한 몽골제국을 구석구석 체험하면서 중국이 이룩해온 문화를 제대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중국의 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빛나는 것이었다.
특히 유럽인이라는 시각과 몽골의 관리로서의 시각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여행서가 갖기 쉬운 자기중심의 편견에서 벗어났다는 점, 17년 동안 장기간 한 중국에서 체류하면서 중국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이 때문에 뿌리 깊은 중국의 중화사상과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유일신 신앙인 그리스도교를 토대로 한 유럽은 자기들 외에도 위대한 문화를 갖고 있는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중화사상이 그렇듯이 유럽의 자문화 중심주의도 뿌리 깊은 것이었다. 『동방견문록』이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가까운 친구들조차 책의 내용이 거짓말이라고 단정하고 회개할 것을 권유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마르코 폴로는 이런 지적에 오히려 하지 못한 말이 더 많다고 대답하며 회개의 권유를 일축했다.
세상에 신은 하나이고 그 신을 믿는 자기들만이 뛰어난 문명인임을 자부하고 있었던 유럽 사람들은 자기들 외에 다른 뛰어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훗날 코페르니코스의 태양이 아닌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 다윈의 신의 창조론을 부정한 진화론 등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상충되는 주장이 세상에 나왔을 때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지동설이나 진화론에 대한 반응을 떠올려보면 『동방견문록』이 유럽에 던진 충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동방견문록』은 지동설이나 진화론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것이었다.
그 때문에 『동방견문록』은 많은 오해를 낳았고 여러 차례 변형을 거쳤다. 오늘날 루스티첼로가 마르코 폴로의 말을 받아 적은 『동방견문록』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140여 종의 서로 다른 판본만 전해지고 있다. 원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판본이 존재하는 셈이다.
여기서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루스티첼로가 작가였다는 점에 주목해서 많은 부분이 과장되고 미화되었다는 주장에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가본 적이 없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루스티첼로의 과장과 미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가본 적이 없다는 주장은 『동방견문록』이 지닌 무게 때문에 매우 충격적이지만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중국의 사료에 그 어디에도 마르코 폴로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특히 마르코 폴로가 귀향할 때 일한국으로 공주를 호송하는 안내인의 역할을 맡았다고 했지만 그 호송하는 사람들의 명단에 마르코 폴로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 젓가락의 사용이나 만리장성 등 중국의 독특한 문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한 상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구술한 것이 『동방견문록』이라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방견문록』에만 전하는 역사적 사실도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후세의 왜곡이다. 아직 인쇄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방견문록』은 손으로 옮겨 적는 이른바 필사를 통해 세상에 퍼졌다. 이 과정에서 필사하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누락하거나 다르게 표현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또한 앞에서 소개한 유럽 중심주의도 한몫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기들의 생각과 세계관에 맞게 개작하기도 했고 심지어 필사를 넘어서 모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판본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주장 또한 일리가 있다.
소설화된 『동방견문록』은 그 흥미 때문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오히려 원본에 가까운 『동방견문록』보다 소설화된 것이 더 널리 퍼지고 읽혔다. 진실보다 부풀려진 소문이 빠른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사정이 어떠하든 『동방견문록』은 최고의 역사적 사료임에 틀림없고 유럽인의 마음에 깊은 그림자를 남겼다. 즉 유럽에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국을 소개하고 유럽인들에게 동방에 대한 환상과 모험 정신을 불러일으켰으며 문화적인 충격을 주었다. 훗날 콜럼버스가 『동방견문록』을 품에 안고 항해에 나선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