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바울신학 :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헤르만 리델보스 / 개혁주의신행협회 / 1992.3.31
리델보스 박사는 성경 본문으로 바울신학 연구를 가장 완전하고도 자세한 주석의 기반을 이룩한 유럽의 최초의 학자이며, 바울서신의 학적 연구의 풍부함에 있어서도 그 기술과 기교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바울신학은 리델보스 교수의 바울 연구사의 간결한 개론으로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가끔 그의 해석자들에 의해 어떻게 불완전하게 잘못 취급되어 왔는가를 보여 준다.
바울 사고의 건물의 열려지지 않는 열쇠를 찾아내기 위해 본문에 대한 양심적이고도 비타협적 충실함에서보다 그 시대의 정신에 더 한층 의존한 그 결과는 곧 불완전하게 마련된 근대의 일시적 양식의 호소 때문에 그 의도는 곧 왜곡되고 말았다.
리델보스 교수는 그의 메시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죽음과, 부활로서 새 시대를 구현한 구원의 종말론적 시기의 해명과 선포로서 보여질 때만이 바울은 가장 잘 이해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그 메시지는 믿지 못할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리델보스는 그 특징적 뉘앙스를 자세하게 분명히 하고 있으며 때때로는 바울서신의 근저에 깔려있는 교리의 통일성을 모호하게 허용하기도 한다. 젊은 교회들에게 그가 쓸 때에 바울은 죄와 율법, 의와 화목의 신학적 세부뿐만 아니라 그의 중심부에 관여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가 특징짓고 있는 기독교 교회였다.
리델보스 교수는 20세기의 교회에서도 현재 계속 행사되고 있는 1세기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한 윤리적 논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로서는 세상 권세에 대한 복종, 여자 지위 문제, 방언 문제, 그리고 기독교인의 참 자유에 관한 것들이다.
○ 목차
1장 바울 해석사의 주요 흐름
2장 근본 구조들
3장 죄 가운데서의 삶
4장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
5장 화해
6장 새 생명의 삶
7장 새로운 순종
8장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9장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10장 세례와 성찬
11장 교회의 세워짐
12장 주의 미래
○ 저자소개 : 헤르만 리델보스 (Herman Nicolaas Ridderbos, 1909 ~ 2007)
헤르만 니콜라스 리델보스 (Herman Nicolaas Ridderbos, 1909년 2월 13일 ~ 2007년 3월 8일)는 네덜란드의 신학자이며 성경의 학자였다.
그는 저명한 신약학자로서 구원사 (Heilsgeschichte)와 성경신학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네덜란드 프리슬란트주 이스터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얀 리델보스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으며 성경주석가이자 캄펜 신학교에서 구약학자였다.

그는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크로쉐데(F. W. Grosheide) 지도아래 박사학위를 1936년에 받았다. 논문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의 취지였다[The Tenor of the Sermon on the Mount according to Matthew].
네덜란트 프로테스탄트교회 소속으로 8년 동안 목회를 하였고 1943년 캄펜 신학교에서 세클 그래다니우스(Seakle Greijdanus )의 후임으로 신약신학을 40년 이상 강의했다.
Gereformeerde Weekblad의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 ‘하나님 나라’, ‘바울과 예수’, ‘마태복음강해’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믿음과 소망처럼 사랑도 교회의 존재 형태이기 때문에 사랑은 형제와의 연합 즉 몸을 세우는 사역가운데서 나타나야 하고, 따라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개인주의적, 분리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몸과 긴물한 관계를 가지게 한다. 어떤 큰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결핍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몸과 어떤 연합도 이룩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는 오직 사랑 가운데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 p.364
○ 출판사 서평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언어로 체계적으로 제시 한 것은 아주 심오하고 복잡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바울에 대한 연구 의 역사 속에서 아주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어 온 것은 그리 놀랄 일 이 아니다. 바울 해석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 분과로 다루어져야 하고, 그 해석사를 빠짐없이 세밀하게 다 다루는 것은 이 책에서 서론이 차지하는 분량에 비추어 볼 때에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바울에 대 한 연구가 특히 지난 수백 년 동안에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 왔는지, 그 주요 흐름을 아는 것은 유익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 과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바울의 선포와 가르침 의 근본적인 구조, 달리 말하면, 바울 신학이라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을 얻는 데 있다. 물론, 그 건물로 들어갈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문들 중에서 그 건물 전체로 통하는 대문 또는 정 문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특히 지난 수백 년의 연구에서 서 로 아주 다른 대답들이 제시되어 왔다. 이 문제의 성격상, 이러한 차이는 학자들이 이 건물 전체의 구조와 배치에 대하여 지니고 있던 견해들 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는 개략적으로 말한다면,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선포가 이 건물로 들어가는 정문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로마 가톨릭의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에 맞서 큰 싸움을 벌이고 있던 그들에게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법정적인 선언문들이 가장 근 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들이었다. 그 결과, 바울 서신들에 대한 종교개 혁자들의 견해는 일차적으로 이 ‘이신칭의’ 교리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 었다. 이것은 특히 루터 (Luther)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서,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되 풀이해서 역설하는 것” (Preface to James and Jude)은 신약 전체의 구원 교리 가 말하고 있는 유일한 원리이자 정경 내에서 정경을 판별해 내는 기준 이었는데, 그러한 예는 야고보서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 바울신학 (리델보스 저, 박영희 역)

1. 바울신학 연구에 대한 해석사
바울신학 연구에 대한 해석 사는 먼저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 튀빙겐 학파들의 주장, 종교사 학자들의 주장, 종말론 학파들의 주장, 실존주의자들의 주장 등이 있는데 아래에서 각각의 주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A.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
종교개혁 시대에는 바울 신학의 입구(入口)를 이신 득의(以信得義)에 대한 설교에서 찾았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신 득의 교리는 모든 신약성경 구원교리에 대한 유일한 원리요 판단 기준인 동시에, 야고보 서신에 대한 그 자신의 비평에서 보여지고 있는 바대로 정경안의 정경을 위한 원리요 기준이기도 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바울의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가 정경 되게 하는 주 원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와의 싸움 때문에 바울의 칭의 교리는 칼빈주의 전통에서도 전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 개혁자들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바울 교리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성화, 영적 싸움 등에까지 밀접하게 연관 시켰다.
B.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
바우어가 헤겔 철학에 기초했던 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희랍적-헬레니즘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바울에 의해 기록된 모든 것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근거로 하고 있는 이신 득의 교리등을 감출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사상안에는 통일된 사상이 없다고 했다.
바울에 대한 이런 자유주의적 개념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바울의 영성 개념이 헬라 적인 것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유대주의 적인 것에서 왔기 때문이다.
C. 튀빙겐 학파의 견해
튀빙겐 학파의 아버지는 바우어(Baur)이다. 그는 기독교 역사를 헤겔의 철학적 도식에 의해 해석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헤겔 철학의 도식에 영향을 받아 바우어는 바울 설교의 핵심을 기독론이 아닌 성령과 육의 그 반위적 주제에서 찾았다. 바우어는 바울의 의식이 율법과 기독교 사이에 대조적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이 ‘대조적’ 주제는 바우어에게 있어서 정경 및 기록 시기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헤겔의 역사관과 절대정신의 이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바우어의 착상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D. 종교사 학자의 견해
바울의 설교에 나타난 각종 주제들을 헬레니즘 시대의 대중적인 종교 개념과 현상, 특별히 그 당시의 종교적 혼합 주의, 이른바 동방 문화의 영향 아래 서양 종교 아래서 일어났던, 곧 신비 종교와 제식을 통해 뚜렷이 드러난 혼합 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종교사학파 학자들은 신비 종교들과 “성례전” 행위, 특별히 기독교 초기 지역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신적인 인물에 대한 신비적 접근 등이 바울의 설교와 “종교”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현상과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보고 부분적으로 그런 입장에서 바울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사학파들의 견해는 성경을 면밀하게 상고하면 금세 성경과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코 바울이 기록한 성경 내용들이 신비 종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 것이다. 바울의 설교와 기독론의 근본적 구조는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의 설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속 사적 약속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취에서 찾아야만 한다.
E. 종말론 학파의 견해

종교사학파의 노력에 철저한 반대자의 입장을 고수한 사람은 슈바이처이다. 슈바이처는 전(全)바울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열쇠로 종말론적 동기를 지적하였다. 슈바이처는 바울 설교의 모든 국면들을 종말론적 그리스도-신비주의 사상의 관점으로부터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는 예수와 바울 사이의 통일성을 이룩하려고 노력한 점, 그의 모든 강조 점을 바울이 설교한 구원의 구속 사적 특성에 두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F. 실존주의적 해석
실존주의자들의 대표자는 불트만이라 하겠다. 불트만은 하이덱거의 실존철학에 근거하여 해석하였다. 지금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은 성경의 모든 것을 신화화했다. 그래서 더이상 이적과 기사에 관한 기사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트만은 이러한 신화적인 요소들을 통해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말함으로서 신신학자로서의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우리는 결코 세상 철학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되겠다. 튀빙겐 학파의 바우어는 헤겔 철학,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헬라철학, 슈바이처의 종말론적 견해, 불트만은 하이덱거의 실존철학에 근거한 신학을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신약 특히 바울 신학은 구약 성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에서 찾아야만 하겠다.바울 설교의 지배적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역사이다.
2. 죄 아래 있는 삶
죄의 신학적 및 인간론적 정의, 죄의 성격 및 죄의 결과에 대하여 아래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A. 죄의 신학적 및 인간론적 정의
바울에게 있어서의 인간학적 개념은 종교사학파 등의 학자들이 말한 인간학적 이원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는 우주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윤리적인 것이다.
바울의 죄에 대한 개념은 불트만의 인간학적 개념(실존론적 해석)과는 다르다. 불트만의 해석에 있어서 잘못된 점은 인간의 제한성 등등을 뜻하는 육으로부터 마치 인간의 제한성 안에서 죄에 대한 접촉점이 놓여 있는 것처럼 다시 한번 육으로부터 죄 개념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육’이 새로운 피조물, 성령 안의 삶과의 구속 사적 대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적절했었다. 육과 영은 이원론을 이루고 있으나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이 아니라 구속 사적인 이원론이다. 로마서 8:6을 통해서 우리는 신학적인 것(죄)은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야기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학적인 것(사망)이 신의 관점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부패하여 그 창조주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못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만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학적인 선언은 신학적 선언에 기초하고 있다.
B. 죄의 성격: 하나님의 진노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며, 그에 대한 순종의 거절이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작정하신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 죄의 결과가 뜻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이고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개념을 우리는 익숙한 표현인 ‘하나님의 진노’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술어를 통해 죄에 대한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이 표현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표현을 반영하고 있는데 바울 서신에서는 전자가 지배적 용법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일종의 신적인 감정이나 혹은 신적인 그분 안에 있는 마음의 움직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다는 오히려 죄와 세상에 대하여 선언되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역에 있어서 그분이 어떤분이시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철저하게 하나님 자신의 의와 거룩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즉 이교도들의 표현에 나타나는 무자비하고 무법적인 복수 행위에 대한 사상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히 하나님의 의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종종 로마서 9:22의 토기장이 이야기가 하나님이 무자비 하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 사용되는데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 무자비함을 나타내는 본문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듭해서 쌍방을 같은 문맥에서 사용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의로운 심판’ 혹은 하나님의 진노와 ‘의’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때때로 일종의 종말론적 실제로 언급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유보적인 면이 있지만 가능성의 정도가 아닌 반드시 있을 결정적인 것이다. 종말론적 실재는 모든 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의와 죄의 사면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진노와 심판의 실행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사람이 알도록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은 복음의 강력한 선포를 동반하게 된다. ‘주의 두려우심’에 대한 지식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 시키려는 바울의 사도적 열심의 가장 강력하고 긴급한 이유 중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의 사역자로서 항상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의 심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적대감은 일순간에도 하나님의 화목케 하는 의지와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
C. 죄의 결과

죄의 결과적으로 부패를 가져오는데 그 첫째는 사망이다. 이것은 바로 죄의 삯이다(롬 6:23). 둘째는 죄에 대한 속박과 도덕적 무능력이다. 인간의 부패를 설명할 때 바울은 ‘겉 사람’, ‘ 속 사람’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겉 사람이란 인간의 외적인 면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면을 속 사람은 마음, 정신 등을 나타낸다.
죄의 부패와 관련해서 속사람이란 마음안에 나타난 부패와 관련되며 이 속사람의 부패로 인해 겉사람(사악한 행위)의 몸과 지체에도 확산된다.
반대로 겉사람의 사악한 행위로 인해 속사람이 강력한 죄의 세력을 대항할 수 없기도 하다.
겉 사람, 속사람, 몸, 정신, 마음, 혼과 영등에 대한 논의가 이 부분에서 필요하다.
겉사람과 속사람 사이의 관계는 죄의 부패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몸, 정신, 마음등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알아야만 한다.
몸에 대한 개념은 바울의 죄에 대한 교리의 인간학적 적용을 올바를게 통찰하는대 중요한다. 바울에게서 ‘몸’은 일차적으로 가견적인 신체를 의미한다(갈6:17, 고후 4:10, 고전 7:4등).
하지만 ‘몸’의 의미가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그 자신’을 나타내는더 쓰이고 있다. 로마서 12:1과 에베소서 5:28에서는 ‘그의 몸’과 ‘그 자신’ 이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몸’과 ‘육체’는 때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때로는 다르게 사용된다. 육은 심지어 인간 죄성에 대한 암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도 항상 연약성과 무상성을 갖고 있는 인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반대로 ‘몸’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나님을 위해 계획 되어졌고, 그리하여 하나님에 의해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게 될 인간의 형상을 대변한고 있다.
정신, 마음, 뜻, 혼, 영, 양심등의 낱말을 사용해서 바울은 속사람을 설명하곤한다. 이 중에서 정신(누스)이 가장 중요한 낱말이다. ‘누스’를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누스’는 한편으로 사고하는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인간의 기관, 가능성을 가리키며, 또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어떤 것이다.
마음의 개념은 ‘누스’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마음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물론 자기 주위에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이 자신의 사고, 애정, 열망, 결단을 통해 나타내는 자아를 지칭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마음은 종교적-도덕적 자질을 갖고 있는 인간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누스’는 ‘마음(카르디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누스와 카르디아는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혼’과 ‘영’중에서 혼(푸케이)은 바울의 사상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혼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을 가리킨다. 이때 ‘혼’은 ‘영’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혼도 육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가능성과 실제와 대립되는 제한성과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가리키고 있다.
바울의 죄 개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연대적으로 죄 아래 넘겨졌다는 사실과, 육신에 있다는 사실과, 모든 방면으로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죄의 권세아래 떨어져 있다는 사실, 말하자면 죄의 권세가 인간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죄와 몸 사이의 연결관계에 그토록 강한 강조점이 주어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같은 이유 때문이다.
3. 칭의의 종말론적 성격
리델보스는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라는 큰 주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바울의 설교의 기본적인 종말론적-기독론적 구조와 연결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을, 그리고 다시 말하여 어떻게 칭의가 그 설교로부터 유기적으로 유출되는가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바로 말하고 있다.
바울이 롬1:17, 3:21등에서 ‘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철저하게 구약에서 예언된 것의 성취된 것임을, 즉 종말론적으로 취급된다.
바울의 칭의 교리는 그의 종말론의 명확한 해석이자 적용인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은, 믿음으로 죄 없다 함을 받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함은 약속을 따라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의미이며 이 약속의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는 바로 종말과 관련된다. 따라서 ‘칭의’는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이 칭의는 그리스 도안에서 실현된 것이다.
바울 설교에 나타난 칭의를 너무 강조하다가 다른 진리가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되겠다. 리델보스가 이렇게 칭의의 종말론적 성격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바로 이점을 염두 해 두고 한 말로서 올바른 지적이라 할 수 있겠다. 많은 주석 가들이 칭의의 종말론적 성격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해 왔다고 리델보스는 말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의 차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인간 자신의 의로움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간에게 허용하시는 의로움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 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인간이 무죄 방면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법정적 의미와 관련된다. ‘의’가 법정적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은 유대주의에서 온 것이지 헬라 사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리델보스는 말한다.
‘의’에 대해서 바울이 미래적 의미로 말하는데 복음서의 현재적 의미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리델보스도 “… 사람들이 그것을 현재적 의미로도 그리고 미래적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바울신학. P. 211)”라고 했다.
4.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
칭의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화목케 됨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0은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엡2:13, 골 1:20 등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인간을 위한 대속적 중음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화목케 됨’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연관성에 대한 면밀한 고찰 이후에 얻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곧 화목 제물이 되셨던 것임을 로마서 3:25절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하여 어떨 때는 능동적으로 어떨 때는 수동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상호 모순이 아니라 보완적 설명에 사용된 것이다. 즉 능동적이라 함은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였다는 의미로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표현한 것이고 수동적이라 함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염두 해 두고 한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뜻)에(수동) 자원하는(능동) 마음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 사실은 베드로 서신과도 일치한다.
‘화목하게 함’이란 말이 바울 서신에 1회밖에 안 나타나지만 분명히 바울 설교의 중심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화목하게 함’을 전제하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5.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삶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삶을 논하는데 로마서 6장의 말씀으로 시작해 본다.
(롬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해 죽은 우리”는 단회 적이고 구속 사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세례에 관한 말씀들을 통해(고전12:13, 갈3:27) 집합적 개념이 분명히 나타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일어난 일이 그리스도 자신에게 유효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고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됨으로써 신자들도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서 부활에도 연합 한자가 되었다(롬6:5). 여기에서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의 연합이란 그리스도와 동일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교회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죽음과 부활은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 사적 실재성 속에서 이해되어진다. 둘째, 성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연합되는 것인 세례 안에서 신자들에게 적용된다. 셋째, 교회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교회의 실재적 평가의 내용을 형성한다. 넷째, 그것의 효과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서의 삶의 표현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교회로 하여금 ‘연합’되게 하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리델보스는 “교회로 하여금 칭의를 얻기 위하여서 뿐 아니라 죄가 교회의 삶에 있어서 행사하기를 원하는 지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동참자가 된 사실을 의식하여야만 한다(바울신학, P.261)”고 잘 말하였다.
6. 성령을 통한 생명
바울의 설명에 있어서 새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아주 밀접할 뿐 아니라 성령과도 밀접하다. 바울 설교에서 본질적 구조인 성령과 육체 사이의 대조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인간학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구속 사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구원의 수단으로서 율법은 부적합하다. 율법과 성령은 율법이 실패한 곳, 즉 죄와 육체와의 싸움에 그 세력을 정복하기 위하여 성령이 돌입한다는 의미에서 상호 대립된다.
성령을 보내신 목적은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완성되게 함이다. 성령은 새롭고 자유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자이다. 자신을 성령의 인도에 맡길 때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을 때처럼 죄에 대해서 무력하게 되지 않는다.
주(主)이신 성령이 계신 곳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유와 담대함만이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곧 교회와 성령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새 생명의 모든 표현들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바울은 새 생명과 새로운 삶의 전반에 걸친 모든 공적을 성령과 그의 사역과 그의 능력과 은사들에 돌리고 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 인의 새 생명은 명령권 자로서의 성부, 실제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 바울 윤리에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
새 생명을 받은 자의 새로운 삶은 인간 자신의 마음과 관계없이 외부적 힘에 의하여서만 되어지는 그런 류가 아니다.
바울 설교의 도덕적 내용을 조사해 볼 때 직설법과 명령법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열매로서 선언되는 것과 관련되는 직설법이 있는가 하면 인간을 향해 명령하는 명령법도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들이 상호 모순이라고 쉽게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바울 서신에서는 이러한 직설법과 명령법이 같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롬 6장과 8장, 갈 4장,5장을 통해서 볼 때 명령법은 직설법 위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순서는 뒤바뀌어 질 수 없다. 즉 명령법은 항상 직설법의 결론의 형태로 나온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에 필요한 것을 인간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 설교에 나타난 직설법과 명령법은 상호 모순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은(직설법과 관련)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명령법과 관계). 결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8. 하나님의 백성의 다양한 명칭, 택하심의 성격
A. 하나님의 백성의 다양한 명칭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표현으로서 에클레시아 외에 ‘성도’, ‘택하신(자들)’, ‘사랑하는(자들)’, ‘부르심을 받은(자들)’등이 있다.
‘성도’는 서신서의 인사말에 주로 나타나 ‘에클레시아’란 의미와 같이 쓰인다. 그러면서도 주님에 의해 불신과 심판으로부터 구원되고, 보존되는 하나님의 창 백성의 칭호로서의 발전을 보여준다.
‘택하신(자들)’도 이와 같이 교회 또는 성도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철저하게 구약 명칭에 소급된다.
‘사랑하는(자들)’은 바울에 의해 ‘택하신(자들)’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명칭도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호세아서에서는 애정 관계로 나타난다.
‘부르심을 받은(자들)’도 바울에 의해 자주 사용된 교회의 또 다른 호칭이다. 이 용어는 주님의 역사적인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구약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은’개념과 에클레시아의 개념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더욱 명백한 사실이다.
‘성도’, ‘택하신(자들)’, ‘사랑하는(자들)’, ‘부르심을 받은(자들)’등의 교회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명칭들이 그들의 특유한 의미에 관한 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며 상호보완적이다. 교회란 명칭과 함께 이런 칭호들은 말씀의 구속 사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의 연속과 구현으로 명시한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명칭들이 구약과 유관함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B. 택하심의 성격
신약 교회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지 별다르고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약 교회의 하나님은 바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시다”라는 통일성이 있다. 구약 예언 가운데 이미 그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 택하심의 성격, 아브라함의 자손들 사이의 차별, 택한 백성의 목적과 성취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당사자의 우수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 자비하심의 성격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뜻 즉 그의 택하심과 복음 전도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 둘의 관계가 모순되는 것인가? 아니면 상호 조화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택하셨으니까 전도는 무의미한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의 결여로 인해 하나님의 택하시고 예정하심에 관한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의 인간적 책임을 충분히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이 책임에 적합하게 하신다는 점, 그리고 인간의 자유가 상실되어 영적으로 무능력하고 눈이 멀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책임은 빼앗기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책임을 논했던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택하심과 복음 전도 사이의 분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의 관계는 조화가 되는 것이다.
9.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A. 몸과 그리스도의 머리
몸의 진정한 본질은 그 통일성과 다양성에 있다. 바울이 어떤 의도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표현을 사용했는가? 롬12:5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란 표현을 접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은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대표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몸’이란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함께 참여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 안에서 상호간에 하나의 새로운 연합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몸은 영혼과 분리된 이분법적 표현이 아니라 영혼을 포함한 구속 사적인 “객관적”연합으로 생각되어진다. 몸의 각 지체는 한 성령에 의한 것으로 통일성이 나타난다(고전12:13). 그리스도와 몸 그리고 성령의 연합의 전진은 “그리스도→그리스도 안의 몸 → 성령의 방향”으로 나아간다(이것의 반대 방향으로의 진행은 불가능하다). 즉 성령은 몸을 구성하는 요인이 아니요 단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공유하는 은사로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주의 만찬에 관한 내용(고전 10:16-17)에서 ‘피’와 ‘몸’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희생 제사의 어휘로서 그가 자진해서 죽음에 넘기어진 것을 상기시켜 준다.
B. 몸과 머리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개념이 더 확장되고 정교해졌음을 볼 수 있다.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만물의 머리로서 특히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있으며, 머리인 그리스도로부터 채우심을 입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현시켜야 하며, 그의 몸으로서 세워져야 하며 스스로를 세워야 한다. 머리됨이란 것은 통치권과 권위의 위치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몸의 보호자요 구원자이시다.
머리는 단순히 우월성, 통제, 다스림 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우선적으로 시작의 관계 즉 전존재를 위하여 결정적인 관계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그는 그의 몸의 보호자이며 구원자이다.
바울의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이 머리-몸에 대한 영지주의적 해석과 유대적 배경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전자를 우리는 받을 수 없고 후자를 받아 들여야 한다. 유대주의적 해석의 가치는 ‘머리’의 개념을 ‘대표’의 개념으로 보았다는데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몸’은 하나 안의 여럿의 개념과 관련한다. 이것은 바로 바울의 구원론의 특징이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는 몸으로서의 교회라고 하는 계시에 모든 정신이 집중되었다고 한다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와 그 자신의 백성간의 약정이 고찰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그 약정의 지속적, 영적인 의미 또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 관계에 내포되어 있는 교회를 위한 특권이 교회의 충만이라고 하는데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10. 외향적 세움과 내향적 세움, 교회의 영적 장비인 은사
A. 외향적 세움과 내향적 세움
교회의 세움의 성격은 성도의 증가와 거기에 수반되는 교회의 내적 충실화이다. 세움의 요소로 확장과 보존, 외향적 선교와 내향적 견고화를 말할 수 있겠다.
외향적 선교의 관점이 신약의 세움 개념에 나타나는데 바울의 용례를 들 수 있다. 바울의 사고 체계에서 지리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교회의 확장과 진전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의 중간기 동안에 있어서 기독교회의 본질적 성격과 필수 조건에 속한다.
바울은 실제 이와 일치해서 직접 선교를 하였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들 중의 일부이다. 선교의 가장 깊은 동기는 교회 자체나 성도의 숫자, 성도의 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종말론적 구원 계시이다.
바울 설교의 거대한 구속 사적 전망들에 근거하여 실로 교회의 ‘보존’과 교회의 ‘증가’사이의 우선 순위와 우월을 말하기 어렵다.
바울 설교에서 내적 세움 즉 내적 충실화에 대한 강조도 나타난다(엡4:13).
세움의 시작과 기초는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성도들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은 정적인 상태를 의미함이 아니라 계속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성장에는 양적인 성장만이 아니라 질적인 성장도 포함된다.
세움의 다른 국면은 상호간의 일치와 사랑이다. 공동체와 개인의 바른 관계인 상호 조화가 유지되어야 한다. 바울은 영적 개인주의와 영적 자기만족을 경고한다. 모든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되어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매는 띠가 바로 사랑이다.
우리는 외향적 세움과 내향적 세움 중에서 어느 한편만을 강조하여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이 둘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다. 즉 외향적 세움과 관련된 교회의 행동은 내향적 세움과 관련된 교회의 행동의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B. 교회의 영적 장비인 은사
교회의 영적 장비에 관한 논의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좀(Rudolf Sohm)이라는 사람은 교회의 영적 장비와 유관(有關)한 교회의 조직을 부정하며 성령께서 우발적으로, 독자적으로 역사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좀의 이런 생각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하르낙(Harnack)과 후기의 홀(Holl)은 좀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목회 서신에서 분명히 제도적 조직을 가리키는 수많은 직.간접 자료들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르낙의 좀에 대한 비판은 한계성을 노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르낙 자신도 역시 좀과 같이 자유주의적 교회관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 좀의 잘못된 생각은 신약의 올바른 교회관에 의해 설명되어질 때 바른 이해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속 사적 교회 개념이 교회의 본성과 명시 사이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줄 것이다.
가견성과 불가견성, 형식과 성령이라는 이원론은 바울의 교회관뿐아니라 신약의 교회관에도 맞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의 가견적인 세움과 수단은 성령의 열매요 대상으로 비단 신약의 다른 곳에서 뿐 아니라 바울 서신들에서도 언급되었다. 교회의 은사들과 직분도 이러한 견지에서 연구되어져야 한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고 장비 하는 것에 소용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일반적 명칭으로 두 가지 말 즉 ‘은사’와 ‘직분’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이외에 역사, 일, 경륜 등의 단어가 나타나기는 은사와 직분이 영적 장비를 가장 잘 나타낸다.
교회의 영적 장비 인 은사에 대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해보자.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주의 할 것은 은사와 직분과 무관한 그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분이란 은사가 교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사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교회에 다양하게 자유로이 부여하시는 바를 가리키는 것이다.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교회의 세움과 완성을 위해 역사 하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고전 12:31).
은사의 내용을 비범하고 볼만한 것, 예를 들면 병고침, 방언말함등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고전12-14장에서는 언급되었으나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서는 조금도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은사의 사용은 반드시 교회에 유익을 주어야 하며 다양한 은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은사는 성령이 교회를 장비하고 덕을 세우려 사용하길 원하시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은사적 직분과 비 은사적 직분의 구분을 불필요하다. 각자는 자신의 은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다. 모두는 그분의 절대 주권적 의지 하에 있고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행동해야 한다.
11.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볼 때 그의 종말론은 철저하게 언약의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하고 있다. 즉 약속의 성취로 분명히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역을 했고 부활을 한 것이 확실한 만큼 약속의 나머지 부분인 그리스도의 재림 또한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종말론의 구조는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으로 되어 있다.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미’와 ‘아직’사이의 기간을 우리는 중간기(즉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라고 부른다. 바울은 도래할 주의 오심을 ‘긴박감’을 주는 표현을 사용해서 중간 기에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더욱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파울이 사용한 ‘긴박감’을 주는 표현 중에 하나가 ‘가까움’이라는 것인데 이것으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바울 생전에 주께서 도래하실 것을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말할 때 사용한 ‘우리’란 말을 ‘임의적 의미를 가진 일반 호칭’임을 고려하면 말이 달라진다.
이에 대하여 ‘미래를 향한 그의 기대와 권면의 힘은 영광 중에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과 그 사건이 현재에서 가지는 의미에서 근거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가까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바울 서신의 ‘종말론’에 있어서의 완료 시제와 현재 시제의 뚜렷한 일치성이다.
재림의 임박 성이 재림의 시기에 대한 통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첫째 강림으로 시작된 구속의 종말론적 시기의 엄청난 중요성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완료시재, 현재시재, 미래시재 등을 통해 보았을 때). 바울의 종말론적 동기는 현세 상의 삶에 대하여 긍정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다.
바울의 종말론에 관한 연구에서 생각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죽은 자들에 관한 것 즉 중간 상태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가끔 ‘잠자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잠’자는 것은 무의식 상태를 의미하기 위함이 아니라 ‘죽은 자’의 모습이 잠자는 것 같다는 의미이다. 바울 서신에서 우리가 따져 봐야 할 부분은 빌1:20과 고후 5:1-10이다. 분명한 것은 이 두 부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 5장 1-10절에 대한 헤르만 리델보스의 설명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리델보스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에 대해서 ” 이 새 집의 의미하는 것은 육신에 반대되는 영광의 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고 했으며 “바울의 선포의 전체를 볼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있어질 일들이라고 밖에는 달리 이해하기 어렵다”고 함으로써 ‘부활체’를 의미했다.
어떤 이들이 ‘하늘의 영원한 집’을 육신의 몸 대신 다른 새로운 몸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한 리델보스의 강한 반대는 참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리델보스가 그것을 부활의 몸이라고 생각한 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오히려 나는 ‘하늘의 영원한 집’ 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란 천국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리델보스는 ‘육신을 장막집’에 상대적인 의미로서 ‘하늘의 집’이 부활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육신의 장막집’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의미하며 ‘하늘의 집’은 이 세상을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고 봄이 더 문맥상 자연스럽다. 그래서 ‘하늘의 집’은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빌1:23과 고후 5:8절에 ‘주와 함께 거함’이라고 했는데 이는 천국에서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이미 천국의 어떠함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도 바울께서 이 세상에서의 고난 등을 생각하면서 천국을 그처럼 소망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박윤선께서 잘 지적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란 것은 신자가 별세하여 그 영혼으로 들어가는 천당을 의미한다. 천당이라는 말을 이 문구에서 끌어 낼 수 있다. 혹설에 여기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는 것이 천당을 의미하지 않고 별세한 영혼이 저 세상에서 받아 입을 혹종의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받을 수 없는 해석이다. 그 이유는 별세한 영혼이 저 세상에서 어떠한 몸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의 영혼이 받을 부활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도 우리의 문맥에 부합하지 않는다. 바울의 이 부분 말씀은 분명히 별세한 영혼이 즉시 들어갈 수 있는 천당을 가리킨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에야 바울 서신 이외의 성경과 일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6장19-31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 23:43의 회개하는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 유다서 6-7등과 조화가 된다.
리델보스는 누가복음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내용에는 가치를 두지 않고 그저 이기적인 것을 경계하는 교훈쯤으로 가볍게 취급함은 올바르지 않다. 비유더라도 분명한 사실적인 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설명하신 것으로 우리는 받아야 할 것이다. 또 회개한 강도에게 보장된 낙원은 곧 천국임을 고후 12:3-4등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재림에 직전에 나타날 일들에 관해서 바울 서신은 언급하고 있는데 그 구절들은 고전 15:51이하, 살전4:13-18, 살후 2:1-11, 롬11:25등이다. 바울은 재림의 때를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한다. 또 성도들에게는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혹자는 이를 잘못 해석해서 성도들은 재림의 때를 알 수 있다고 하는 잘못을 범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성도들이 깨어 근신함으로 주의 재림을 잘 맞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재림 직전에 나타날 일은 ‘불법의 사람’의 출현(살후2:1-11), 배교의 행동, 막는 자 등이 있다. Berkouwer같은 이는 요한 서신과 바울 서신의 불법의 사람에 대한 내용이 서로 상충된다고 하는 잘못을 범한다. 우리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통일성’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해도 좋다고 본다.
이것은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했다는 분명하고 올바른 성경관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성경 내용 중 혹 모순같이 보이는 부분들이 있을 때 우리는 가볍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더 깊은 무슨 뜻이 있는지를 상고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울 서신과 요한 서신의 내용들 중 어느 한쪽이 더 우세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충 내지는 조화를 나타낸다고 본다. 이에 대하여 리델보스가 잘 표현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동일하게 먼저 적 그리스도의 현재적 연관성을 방어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진지성을 위해 목회 자적인 돌봄의 심정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임박 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는 것을 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방해’와 ‘지연’을 가르침으로써 이를 수행한다. 불법의 신비는 이미 활동 중에 있다. 그 능력은 이미 분주하나 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요한 일서 2장과 조화가 여기서 가능해 질뿐만 아니라 완전히 명백해진다(바울신학, P.612)”

불법의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답하려고 노력했다. 리델보스는 이를 상징적 표현이라고 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어떤 역사적 인물 일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묵시의 글들이 상징을 많이 사용한다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분명히 드러날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하는 문맥에 있는 내용이니 만큼 분명한 역사적 인물일 것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재림에 대하여 바울은 ‘주의 오심’, ‘나타나심’, ‘드러남’, ‘그 날’등의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재림 시에 있을 각종 현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에 하나님의 백성이 참여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지금 육신 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뿐 아니라 이미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들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의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다.
부활은 바울의 설교와 그의 종말론에 있어서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고전15장을 우리는 부활 장이라고 부른다. 성령은 성도의 부활을 위한 보증이 되신다. 부활은 신자들의 큰 소망에 속한다. 신자의 부활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자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이단 사상을 우리는 배격한다.
주의 재림시 부활 사건이 있으며 동시에 심판이 있음을 바울 서신에서 이야기한다. 철저한 공의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바울서신, 특히 고전15:23이하와 살전 4:13-18을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과 만물의 마지막 사이에 중간기가 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두 번째의 부활 사상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리델보스가 잘 말해 주었다.
“이러한 모든 생각은(중간 왕국 존재 및 두 번째 부활이 있다는 생각) 유지되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계20장의) 천년 왕국 사상을 고린 도전서 15:22 이하에 도입시키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문장의 분명한 의미와 조화되지 못한다…..또 다른 부활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 도전서 15장에서는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23절의 ‘차례’를 부류나 계층으로 번역하거나 24절의 텔로스를 ‘남는 자들’로서 보고자 하는 생각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며 참으로 반대의 경우이다.(바울신학, P. 660-661)
가끔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낱말들은 사실상 다른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데 공헌하고 있다.
○ 독자의 평 1
헤르만 리델보스는 성경적인 관점을 가진 현대 신약신학의 기둥과도 같은 학자입니다. 바울신학을 공부하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모두 거치는 분입니다. 개혁주의관점의 바울신학 기틀을 잡는데 많은 도움을 줄것입니다. 새관점 바울신학자들 공부하기 전에 꼭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리델보스의 ‘하나님 나라’ 또한 추천합니다.
○ 독자의 평 2
두꺼운 책이라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보는데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씩 바울에 대한 헤르만 리델보스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바울이 기독교에 미친 신학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현대신학으로 풀기조차 힘든 역사적이고도 심미한 것임을 알게되었다. 간결하고도 까다롭지 않은(번역이 조금은 어설펐지만) 어체로 바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저자는 특히 ‘죄’,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교회’라는 Chapter에서 기독교인이 알고있는 것보다 한층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바울의 사상과 또한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연구하고 싶은 사람있다면 헤르만 리델보스의 바울신학을 적극 추천한다. 또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믿음과 소망처럼 사랑도 교회의 존재 형태이기 때문에 사랑은 형제와의 연합 즉 몸을 세우는 사역가운데서 나타나야 하고, 따라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개인주의적, 분리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몸과 긴물한 관계를 가지게 한다. 어떤 큰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결핍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몸과 어떤 연합도 이룩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는 오직 사랑 가운데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