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백범일지 김구 : 白凡逸志 金九
김구 / 열화당 / 2019.3.1
“김구 선생이 자호 (自號)하기를 백범 (白凡), 즉 백정이나 범부의 신분으로 스스로를 낮추고 독립운동을 하셨듯이, 책 만드는 우리도 스스로 염장이 또는 염꾼의 신분으로 몸을 낮추어, 우리 역사의 말뿌리와 글뿌리를 가다듬고 복원하는 일에 임해야 한다.” _ ‘정본 백범일지’ 편찬에 임하는 열화당 이기웅 발행인의 노트에서
○ 목차
인과 신 두 아들에게 주는 글
- 상권
조상과 가정 / 출생 및 유년 시대 / 학동 시대 / 학구 시대 / 동학 접주 / 청국 시찰 / 국모의 원수를 갚다 /
투옥 / 사형선고를 받다 / 대군주께서 형 집행을 정지하라고 / 친히 전화하다 / 파옥 / 치도 / 예수교와 교육자 /
두번째 투옥 / 세번째 투옥 / 옥중생활 / 농부 / 출국 / 경무국장 / 내무총장 / 상처 / 국무령 / 국무위원
- 하권
자인언 / 상해 도착
계속
통일 문제 / 광복군 조직 공작의 성과
편집자 주
「정본 백범일지」를 펴내며
색인
○ 저자소개 : 김구 (金九; 본명 김창수, 1876 ~ 1949)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가난과 양반들의 횡포를 경험했기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근대적 교육사업과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에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때 백정, 범부들 (평범한 사람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백범 (白凡)이라는 호를 썼다.
3.1운동 후에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원하였고, 광복군 창설 등 항일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에 돌아온 그는 남북분단을 우려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힘쓰다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경교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지난날을 알리려 쓴 것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있다.
○ 출판사 서평
- 왜 『백범일지』를 다시 출간하는가
『백범일지』가 초판 발행된 것은 백범 선생이 돌아가시기 두 해 전인 1947년이었다. 당시 국사원 (國士院) 내에 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출판사무소’에서 화보 (畵報)와 백범 선생의 서문 (序文), 『백범일지』의 「상권」 「하권」 「계속」의 내용을 싣고, 부록 형식으로 「나의 소원」을 덧붙여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이다. 규모는 사륙판 424면으로, 원문이 대폭 축소 간행되었다. 이후 백범 선생의 차남 김신 (金信) 선생이 좋은 뜻으로 저작권을 스스로 해제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무분별한 출판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팔십여 종의 『백범일지』가 국내에서 출간되는 우려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백범일지』의 출간은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원본성 (原本性)이 크게 훼손된 것이다. 첫 출간 당시 원고의 윤문을 한 이는 춘원 (春園) 이광수 (李光洙) 선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로 인해 백범의 냄새가 많이 지워져 버렸고, 중국 상해 (上海)와 중경 (重慶)의 긴박했던 독립운동 현장에서 기록한 원본의 생생함이 적잖이 희석되었으며, 백범 특유의 투박한 듯한 문체가 윤색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명과 지명의 착오, 내용의 뒤바뀐 서술, 원문의 대폭 생략 등, ‘원본에서 가장 멀어진 판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국사원 본이 당시로서는 백범 선생의 서문을 받아 수록했고, 또 백범 선생의 발간 승인을 얻어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를 저본 (底本) 또는 대본 (臺本)으로 하는 『백범일지』가 이후 계속해서 출간되어 국민들에게 널리 읽혀 왔고, 안타깝게도 초판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은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열화당은 오랫동안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정본 백범일지’의 출간을 계획해 오다가 실제 편찬에 착수하여, 삼 년에 걸친 작업 끝에 친필 원본을 그대로 활자화한 한문 정본 『백범일지』, 그리고 역시 친필 원본을 저본으로 삼아 오늘의 말로 풀어 쓴 한글 정본 『백범일지』, 이렇게 두 권으로 이루어진 ‘정본 백범일지’ 이백 질을 2015년 12월에 제작하였다. 그리고 삼 년여 동안 시판하지 않고, 다시금 여러 차례 검토하면서 몇몇 오기 (誤記)나 오류를 정정하여 완성도를 높이는 숙성의 시간을 가져 오다가, 오늘 일반에 내놓게 되었다.
이 두 권은 모두 친필본과 같은 세로쓰기 체제로 편집하였으며, 친필본과 같은 크기의 판형으로 제작되었다. 올바른 원본이 존재한 연후에 이를 토대로 한 주석본, 번역본, 축약본, 교육용 도서, 아동용 도서, 그리고 영화, 연극, 오페라, 뮤지컬 등이 나와야 함이 원칙이라 한다면,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정본 백범일지’가 출간되어야 하는 당위는 충분할 것이다.
- 어떤 책만들기로 ‘정본’을 지향하였는가
‘정본 백범일지’의 출간은 원본성 문제에서 출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결정을 하기까지에는 우리의 올바른 ‘말뿌리’와 ‘글뿌리’를 찾고자 하는 열화당의 출판정신이 그 배경에 깊숙이 깔려 있다. 세종 임금께서 1443년 훈민정음 (訓民正音)을 창제하셨으나, 알다시피 19세기까지 우리의 ‘글쓰기’는 주로 한문 (漢文)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올바른 말뿌리와 글뿌리를 찾는 일은 이런 우리 언어의 태생적 역사적 운명을 소상히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기웅 발행인은 간행사 「‘정본 백범일지’를 펴내며: 우리 기록문화유산의 올바른 보존과 정립을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범일지』 원본의 수많은 한자, 그리고 한문투의 문장 들은 한자와 한글이 함께해 온 우리말, 우리 문자의 역사적 운명의 소산이다. 한자는 ‘동아시아 문자’이지 중국만의 글자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페니키아 문자, 라틴 문자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 알파벳이 ‘서양 공용의 문자’이듯이, 한자 (漢字)는 그 이름이 중국 한 (漢)나라에 원연을 두고 있을 뿐이지, 엄연히 ‘동아시아 공용의 문자’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글과 한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떼어서는 아니 되는 언어적 숙명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 어문을 향한 백범의 글쓰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출판에서 ‘책의 형식’ 또한 우리 말뿌리, 글뿌리를 복원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동아시아에서 ‘세로쓰기’는 필사 (筆寫)나 책자 (冊子) 형식의 기본원리로, 오늘에 맞는 세로쓰기의 복원을 통해 우리는 『백범일지』 원본의 형식뿐 아니라 백범의 정신과 숨결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럼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정본’이 되리라고 자부한다. 이기웅 발행인은 “우리가 오랜 세월 지켜 오던 세로쓰기를 이토록 철저하게 버린 것은,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알파벳 자판에 맹목으로 무릎을 꿇은 결과이다. 『훈민정음해례 (訓民正音解例)』에서 보다시피, 한글 창제 당시부터 세로쓰기 원칙을 알 수 있으며, 1980년대 중반까지 우리는 세로쓰기를 지켜 왔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본 백범일지’는 원본의 체제와 같은 세로쓰기를 채택하였는데, 특히 첫째 권 ‘한문 정본’은 원본의 한자는 한자 그대로, 한글은 한글 그대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오늘에 맞는 세로쓰기’가 되게 하기 위해 한자마다 어깨글자로 독음을 달아 가독성을 높였다.
책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정본’을 지향하면서 교정과 편집에 철저함을 기하였다. 실무 작업에 앞서 우선 계획안 작성에 착수하여 『백범김구전집』(전12권, 대한매일신문사, 1999)과 『친필을 원색영인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집문당, 2004)를 비롯하여, 기존에 친필 원본을 저본으로 삼아 출간하였거나 충실한 번역본을 지향하여 출간한 여러 판본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이 판본들이 범한 다수의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정본 백범일지』의 첫째 권인 ‘한문 정본’은 모두 여덟 차례의 대교 (對校)와 교정 (校訂) 작업을, 이를 토대로 조심스럽게 우리말로 풀어낸 ‘한글 정본’은 여섯 차례의 번역과 교정 작업을 거쳤다. 사료적 (史料的) 활용을 위해 두 권 모두 책 말미에 상세한 색인을 수록하였고, ‘한글 정본’은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 주 (註)’ 약 760여개를 달았다.
이기웅 발행인은 이 책 말미에 수록한 발간사에서 출간의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백범일지』의 간행 역사를 보면, 어떠한 기록이라도 환경과 여건에 따라 그 본의가 잘못 전달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이것이 참기록인 듯 그대로 전해질까 두려워하면서, 백범의 체취가 살아 있는 육필 원고를 정성껏 염 (殮)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간행하였다. 『백범일지』의 출간에서 힘을 빌릴 최고의 솜씨는 오로지 백범뿐이다.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 이런 생각으로 우리는 철두철미 원본에 근거한 ‘정본 백범일지’를 지향해 왔으며, 이같은 작업이야말로 정녕 우리 민족의 자존이 걸린 일일 것이다.”
○ 독자의 평
- 백범일지 : 어린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인과 신 두 아들에게 남기는 글로 백범일지 상권을 쓰기 시작했다. 언제 왜놈들에게 잡혀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식들에게 자신의 기록을 남기려는 일종의 유서였다.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라는 집안 내력부터 어린시절, 여러가지 옥고를 치룬 뒤에 상해로 망명하기 직전까지 인생의 전반부를 다룬 것이 상권의 내용이다.
조선 효종 시절, 병자호란의 복수로 북벌론이 대두된 적이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문신으로 인조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세워서 영의정까지 지냈던 김구의 직계 조상 김자점(1588년 ~ 1651년)이 효종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였고, 이로 인해 김자점은 역모죄와 국가 기밀 누설죄로 1651년에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멸문지화의 위기에서 온 집안은 황해도 해주 텃골이라는 곳에 숨을 자리를 구하고 양반의 행색을 감춘 채 상놈 행세를 하면서 살게 되었다.
극도로 빈곤한 삶을 이어가던 때에 김구가 태어나게 되는데, 얼마나 가난했던지 김구의 어머니는 항상 본인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셨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삶의 환경 속에서도 어린 김구는 꿋꿋이 성장했고, 선생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황해도 강령군 삼거리로 이사를 했다.
김구 선생이 어린 시기 엄청난 개구장이였다는 일화들이 많이 나열되고 있다.
이웃 양반집에 놀러간 어린 김구는 그 집 아이들이 “해주놈을 때려주자!”며 이유 없는 집단 구타를 가하자 그 길로 집으로 달려가 부엌칼을 들고 나왔다.
비록 복수는 커녕 칼은 빼앗기고 다시 실컷 얻어맞기만 했지만, 5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어린 김구의 행동이었다.
또 다른 일화는 아버지가 거금의 돈을 집안에 숨기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어린 김구는 그 돈을 전부 꺼내서 떡 사먹을 생각으로 집을 나선다.
하지만 길에서 종조부 할아버지께 딱 걸려 아버지에게 들키게 되는데, 불같은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김구를 빨랫줄로 꽁꽁 동여 들보에 달아매고 매질을 했다.
다행히 평소 어린 김구를 끔찍이도 사랑해 주었던 장련 할아버지의 등장으로 어린 김구는 아버지의 매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