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비트겐슈타인 평전 : 천재의 의무
레이 몽크 / 필로소픽 / 2019.4.26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탄생 130주년 기념, 완벽한 삶을 꿈꿨던 천재 철학자의 치열한 삶과 사상
20세기 최고의 천재 철학자로 평가되는 비트겐슈타인 전기의 결정판,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평전’ (Ludwig Wittgenstein : Duty of Genius)이 2019년 4월 26일, 비트겐슈타인 탄생 130주년을 기념하여 리커버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됐다. 이번 탄생 130주년 기념 리커버 개정판 표지는, 말년에 찍었던 하얀 바탕의 구판 사진 대신 좀 더 앞선 1946년 케임브리지에서 찍은 사진을 사용했다. 당시 자신의 후기 철학에 몰두하던 비트겐슈타인의 모습을 검은 바탕 위에 부각했다. 또한 내용적으로도 최근의 학계 흐름을 반영해 번역과 문장을 더 가다듬었으며, 독자들이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이고, 사진의 선명도를 개선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책은 난해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흐름 속에서 꼼꼼히 재구성해낸 전기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흥미진진한 전기로서뿐만 아니라 철학 연구서로서도 손색없는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 연구자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추천되는 책이다.
○ 목차
감사의 글
서문
옮긴이 서문
1부 1889~1919
1. 자기 파괴를 위한 실험실
2. 맨체스터
3. 러셀의 제자
4. 러셀의 선생
5. 노르웨이
6. 후방에서
7. 전선에서
2부 1919~1928
8. 출판될 수 없는 진리
9. 완전한 시골의 삶
10. 황야 밖으로
3부 1929~1941
11. 두 번째 귀환
12. 검증주의적 단계
13. 안개가 걷히다
14. 새로운 시작
15. 프랜시스
16. 언어게임: 청색 책과 갈색 책
17. 보통 사람으로 살기 위해
18. 고백
19. 오스트리아의 최후
20. 머뭇거리는 교수
4부 1941~1951
21. 전쟁 중의 일
22. 스완지
23. 시대의 어두움
24. 모습의 변화
25. 아일랜드
26. 무공동체의 시민
27. 이야기가 끝나다
부록. 바틀리의 『비트겐슈타인』과 암호로 적힌 단평들
인용 출처
주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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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레이 몽크
1992년부터 영국 사우스햄턴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있으며, 전기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러셀의 전기 《Bertrand Russell: The Spirit of Solitude 1872-1921》을 펴냈다. 본서 《비트겐슈타인 평전》으로 1990년 35세 이하의 영국 작가가 쓴 최고 작품에 주어지는 ‘존 루엘린 라이스 상’을 수상했다. 수리철학과 분석철학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Bertrand Russell》, 《Robert Oppenheimer》 등 여러 전기를 펴냈다.
– 역자 : 남기창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 주립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6회 철학연구회 논문상을 받았다. 현재 인천재능대학 명예 교수이다. 본서 외 옮긴 책으로 《비트겐슈타인과 철학》, 《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관심은 많지만 그의 생애를 모른 채 그의 철학만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그의 삶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의 철학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양극단으로 나누어진 것은 불행한 일처럼 보인다. 가령 노먼 맬컴 (Norman Malcolm)이 쓴 ‘비트겐슈타인의 추억’ (A Memoir)을 읽고 책에서 묘사된 인물에 매혹된 후 스스로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를 직접 읽을 마음이 생겨나 읽어보았지만 한 글자도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경험은 흔히 있는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탐구한 철학적 주제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입문서들이 많이 있다고는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과 그의 철학과의 관계 (그의 삶을 지배했던 정신적, 윤리적 관심사와, 그것과는 조금 동떨어진 것 같지만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철학적 문제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빠뜨리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이러한 틈을 메우는 것이다. 그의 생애와 철학을 한 이야기 안에서 서술함으로써, 그의 철학이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는지를 밝히고 싶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을 읽는 사람이면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그의 철학적 관심과 정서적, 영적 삶의 합일을 보여주고 싶다. — p.16
램지와 스라파를 제외하곤,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교수들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 그는 무어의 표현의 정확성을 높이 사고, 종종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특정한 의미에 맞는 정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곤 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를 독창적인 철학자로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무어? 그는 전혀 아무런 지적 능력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 비트겐슈타인은 존슨을 논리학자로서보다 피아니스트로서 더 좋아했고, 존슨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그의 일요일 저녁 ‘집(at home)’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존슨 쪽에서 보면, 비록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하며 칭찬했지만 그의 귀환을 ‘케임브리지에 닥친 재앙’으로 생각했다. 존슨은 비트겐슈타인을 ‘토론을 같이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 p.378~379
그의 강의 스타일은 다른 강사들의 스타일과 아주 달라서 자주 묘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노트 없이 강의를 했고, 자주 수강생들 앞에서 그저 혼자 중얼거리며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그는 “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라고 말하면서 강의를 멈춘 후 몇 분 동안 위로 향한 자신의 손을 응시하면서 앉아 있곤 했다. 때때로 강의는 용감한 학생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 시작되곤 했다. 종종 그는 “나는 멍청이야!”라든가 “이건 지독하게 어렵군!”이라고 격렬한 탄성을 지르며 자신의 우둔함을 저주하기도 했다. — p.415~416
비트겐슈타인이 친구들과 학생들에게 학교를 떠나라고 충고한 것은 알맞은 생활을 하기에는 학교의 공기가 너무 희박하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그는 드루어리에게 케임브리지에는 산소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공기를 제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케임브리지의 공기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는 거기를 떠나서 더 건강한 환경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 p.477~478
허트와 파스칼 모두에게 고백을 듣는 것은 불쾌한 경험이었다. 허트의 경우, 불쾌하게 느낀 이유는 라이언스의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은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죄를 크고 분명한 음성으로 낭송하는 동안 그저 앉아 있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파스칼은 모든 것에 화가 났다. 비트겐슈타인은 적절치 않은 시간에 전화를 해서 그녀를 보러 갈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가 급한 일이냐고 묻자, 급한 일이라서 기다릴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 어느 순간 그녀는 이렇게 외쳤다. “뭐가 문제입니까? 당신은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까?” 그러자 그는 벽력같이 외쳤다. “물론이야! 나는 완전하게 되기를 원해!” — p.526~527
그의 팔에는 윈드 재킷과 낡은 군복 바지를 입은 가냘픈 노인이 기대어 있었다. 만일 지성으로 빛나는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를 맬컴이 추위를 피하게 해주려고 데려온 거리의 부랑자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 나는 개스(Gass)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개스는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농담하지 말라”라는 식의 말을 했다. 그 후 맬컴과 비트겐슈타인이 입장했다. 블라스토스 (Gregory Vlastos)가 소개되었고 그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모임의 사회를 보던 블랙이 일어서서 그의 오른편을 향했다. 이제 분명해졌다.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 맬컴이 모임에 데리고 온 그 야윈 노인에게 블랙이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비트겐슈타인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블랙이 말했다. 블랙이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이 숨을 크게 멈추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1949년의 철학 세계에선, 특히 코넬에선 신비스럽고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 숨이 멎는 소리는 블랙이 “플라톤,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을 경우에 생겼을 것과 같은 것이었다. — p.797
○ 출판사 서평
“내가 아는 한 비트겐슈타인은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전통적 천재상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례이다.” -버트런드 러셀
– 30대 나이에 전설이 된 신비의 철학자
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의 막내로 태어나, 실업학교에 입학해서 히틀러와 같이 공부했고, 영국에서 공학을 공부하던 중 케임브리지 대학의 러셀에게 철학적 천재성을 인정받은 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노르웨이의 외딴 오두막에서 홀로 철학을 연구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나자 자원입대하였으며, 전후에는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며 연구를 중단하고 유산 상속마저 거부한 채 산골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선택한다.
사우샘프턴 대학 철학과의 레이 몽크 교수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이면서 이론과 개인적 삶 모든 측면에서 수수께끼로 가득 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을 20세기 초 유럽 사상사 속에서 하나의 연대기적 드라마로 소개한다.
– 천재이거나 자살하거나
철강 재벌의 8남매 중 막내아들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은 음악 신동으로 불리는 형제들 속에서 네 살까지 말도 못 하고, 학교 성적도 좋지 못했던 평범한 아이로 자라났다. 청소년 시절 그는 《성과 성격》이라는 문제작을 남기고 베토벤의 집에서 23세에 권총 자살한 유대인 사상가 오토 바이닝거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면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이 세상의 ‘잉여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살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괴로워하던 그는, 철학에 천재적 재능을 지녔다는 사실을 러셀에게 확인받은 뒤에야 비로소 자살 충동을 극복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미치거나 몇 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만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강도 높은 사유로써 철학 연구에 전념한다. 그 결과 러셀과 공부한 지 1년 만에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제자에서 러셀의 선생이 될 정도로 논리학에서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로 인정받는다. ‘천재의 의무’란 자신에게 주어진 철학적 충동을 완전히 따름으로써 위대한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목숨을 걸고 철학하기
“이해하든가 아니면 죽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 러셀의 증언처럼, 비트겐슈타인은 명료한 이해를 위해 분투했다. 무자비할 정도로 밀고 나가는 그의 탐구 스타일은 다른 철학자들이 기가 질릴 정도로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탐구 모델로 36시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작곡에 몰두한 베토벤을 꼽았고, 철학은 시적인 글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주장을 논증으로 정당화하지 않았다. 자기가 숨 쉴 공기를 스스로 제조하는 철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연구에 각주를 달지 않았고, 남의 얘기를 가지고 적당하게 이론을 만들어내는 강단 철학자들을 경멸했다.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남의 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을 ‘진정한’ 철학자로 간주하지 않았던 그는,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를 한 줄도 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24세에 철학에 몰두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 노르웨이에서 “수행자처럼 완전히 홀로” 오두막에 살면서 오직 논리학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명료해지기를, 그렇지 않다면 오래 살지 않기를” 신에게 기도한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한 독창적인 논리학 연구를 《논리학 노트》로 만들어 무어에게 보내 학사 논문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지 문의하지만, 서문과 각주, 참고문헌이 없다는 형식상의 미비로 거부당한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돼지들에게 진주(‘철학의 다음번 큰 자취’)를 준 것을 후회하면서 케임브리지에서 학위를 얻으려는 계획을 포기한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러셀에게 논리학이 지적인 호기심의 대상이었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학은 “윤리학과 근본적으로 같았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의무”였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1차 대전이 일어나자 탈장으로 징집 면제 대상이었음에도 수술을 받고 자원입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인생의 징표”라고 생각한 그는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임무”를 맡기 위해 최전방 보병 부대로 지원한다. 포탄이 날아드는 관측소에 배치된 그는 거의 매일 밤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신에게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을 정면에서 마주 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쓴 작전 수행의 공로를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받는다.
전쟁 중에도 계속된 그의 논리학 연구는 원래 논리학의 기초를 다루는 책으로 계획되었으나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의 실존적 체험이 반영되어 신과 인생의 의미를 포함한 세계의 본질로 확대된다. 이렇게 전쟁터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완성한 《논리철학논고》는 논리학과 신비주의가 기묘하게 결합된 100쪽도 안 되는 소책자였지만, 후대에는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출판사들의 잇따른 거절로 출간에 어려움을 겪었고, 스승인 러셀과 프레게조차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비트겐슈타인은 좌절해야 했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로 시작하는 이 책을 통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며 철학을 떠난다.
– “자, 신이 도착했다”
전쟁 중 톨스토이의 사상에 감화를 받은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가난한 예술가들과 누이들과 형에게 나누어주고 가난한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로서 소박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부유하고 이상한 귀족’으로 여겨진 그는 학부모인 마을 사람들과 융화하지 못했고, 학생 체벌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되자 6년 만에 교사직을 포기하게 된다.
그 후 정원사와 건축사를 전전하는 인생의 방황기를 거치지만, 그사이 ‘논리철학논고’는 빈 학파에 영향을 주고 케임브리지에서 철학 논의의 중심이 되는 등 유럽 학계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케임브리지의 천재 수학자 램지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철학에 오류가 있음을 깨달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으로 복귀한다. 케인스는 “자, 신이 도착했다”라는 말로 영국 지성계에 비트겐슈타인의 케임브리지 복귀를 알린다.
– 가장 실존주의적으로 산 분석철학자
대부분의 철학자가 단지 자신의 철학을 말로 하는 것에 그치는 데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대로 살아가기 위해 평생에 걸쳐 삶과 철학을 일치시키려 분투한 철학자이다.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라는 자신의 명제처럼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자신의 힘으로 번 돈이 아니라는 이유로 엄청난 유산을 포기했고, 자원하여 1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2차 대전 때는 전쟁 환자를 돌보는 병원에서 일했다. 허영심을 버리기 위해 자신이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죄’들을 글로 써서 여러 친구에게 고백하고 수십 년 전 체벌한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가 참회하기도 했다. 철학자 박이문 교수는 이런 그를 두고 ‘정신적 귀족’에 속하는 인물로 평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언어그림이론, 언어게임, 가족유사성을 주창한 분석철학자로만 알려졌던 비트겐슈타인이 여느 실존주의 철학자 못지않게, 어쩌면 더 극단적으로 삶의 의미 문제를 천착한 실존주의자였고, 과학과 이론에 대한 물신숭배를 경멸한 신비주의자였으며, 톨스토이와 러스킨의 사상에 공명했고, 소련에서 육체노동자로 살고자 했던 ‘마음으로는’ 공산주의자였음을 알게 된다.
– 완전한 삶을 꿈꿨던 철학자의 치열한 일생
지적인 명료함이 윤리적 완전성으로 이어진다는 결벽에 가까운 철학적 신념, 러셀과 포퍼를 비롯한 당대 철학자들을 두려워하게 만든 지배적이고 예민한 성격, 젊은 제자들과의 동성애, 자신의 타락에 대한 죄의식과 참회, 직업 철학에 대한 혐오와 노르웨이와 아일랜드에서의 칩거 생활, 철학 교수직을 버리고 소련에서 육체노동자로 살아가려 했던 시도, 숨 막히는 철학적 영감의 탄생과 탈진 직전까지 가는 고통스러운 사유의 과정, 러셀, 프레게, 무어, 케인스, 스라파, 튜링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의 우정과 갈등, 지적인 격돌….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일기와 서신 등 방대한 자료와 현지답사, 인터뷰 등을 통해 박진감 넘치게 재구성해낸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연구를 위해 고독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좌절하여 끊임없이 번민했고 사랑을 갈구했다. 특히 이 책은 사랑에 대해 플라토닉적 관념을 가진 비트겐슈타인의 동성애 관련 자료를 숨김없이 보여줌으로써, 바틀리의 평전이 불러일으킨 ‘죄책감에 사로잡힌 난잡한 동성애자’ 비트겐슈타인의 이미지를 설득력 있게 불식시킨다.
언어의 의미가 생활양식 속에서 규정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따르는 것처럼 이 책은 그의 철학을 개인적 삶의 흐름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복원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람에게서, 그 시대에, 그곳에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그의 철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목숨을 걸고 철학을 했던 한 남자의 삶과 사상, 윤리적·미학적·논리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고 싶었던 어느 철학 천재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이 담긴 최고의 전기문학이다.
○ 추천사
“비트겐슈타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엄숙하고 숭고하며 인간으로서 그는 위대하고 아름답다. 그는 문학 속의 주인공 안티고네와 카르멘 같은 정신적 귀족에 속한다. (…) 몽크의 재미나는 소설같이 읽히는 전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진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정신위생학적으로도 귀중한 양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박이문
“몽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을 철학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에서 탁월하게 직조해냈다.” -《선데이 타임스》
“몽크의 평전은 지적으로 심오하면서도 일반 독자에게 쉽게 읽힌다. 이 책은 아름다운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초상화다.” -《가디언》
“비트겐슈타인의 전 생애를 다룬 최초의 실질적 전기. 스토리는 잘 짜였고, 묘사는 생생하고 명료하며, 공감과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뉴욕 타임스》
○ 언론소개
- 비트겐슈타인 또는 내면이 없는 삶
– 비트겐슈타인 평전 (레이 몽크 / 필로소픽)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89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가장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저녁엔 브람스나 말러가 방문하고, 식구가 클림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그런 집이었다. 실업 학교를 졸업하고 공학을 공부하러 영국 맨체스터에 갔다가 수리 논리학 책을 읽었다. 케임브리지의 버트런드 러셀을 찾아갔다. 러셀은 천재를 알아보았고, 제자와 선생의 위치가 바뀌는 과정을 경험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지원병으로 입대했다. 최전방을 자원했고 무공으로 훈장도 받았다. 마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전선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끼고 다녔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에 대한 부분은 거의 외울 정도였다. 유산을 예술가들에게 나눠주는 데 썼다. 비상한 관대함에 놀란 누군가가 그를 방문했다가 “미시킨 (도스토옙스키 소설 <백치>의 주인공)을 본 것 같았다”라고 썼다. <논리철학논고>가 완성되었다. 철학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거기서 더 할 일은 없었다.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경험은 좋지 않게 끝난다.
1970년대 전파과학사에서 출간한 나카이 히사오의 짧은 에세이 (1972)는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를 문학적으로 접하게 해주는, 한동안 거의 유일한 글이었다. 읽고 감명을 받은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이두와 김영사에서 출간한 존 히튼의 만화책 (1992)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요령 있게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아쉽게도 이 역시 절판되었다. 레이 몽크의 두툼한 <비트겐슈타인 평전> (1990)은 관련 지인의 증언이 수집 가능한 마지막 시점에 나온 책으로, 결정적인 전기라는 평을 받고 있다. 실은 히튼의 만화책보다 읽기가 수월하다. 만화에 불가피한 압축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보통 분리되어 설명되는 생애와 사상이 이 평전에서는 맞물려 등장하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발발했다. 이런 때 대학에서 지내는 것보다 그에게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었다. 무어의 주선으로 병원의 약품 운반부가 되었다. 툭하면 포탄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병원은 새 일꾼의 정체를 알았지만 모른 척해 주었다. 제자가 군대에서 편지를 보내 왔다. 원하는 보직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내용이었다. “네 편지에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그는 꾸짖었다. “너는 최전선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거기서 너는 최소한 인생 비슷한 삶을 살 것이다. (…) 나는 오랜 투쟁 끝에 용기를 끌어내어 무언가를 실행한 후에는 언제나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느꼈다. 너는 기는 것을 그만두고 걷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책임질 일을 찾아서 그것을 수행하려고 노력해라. 내가 이런 말을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할 말은 그것이 전부다.” 고맙게도 몽크는 어려움에 처한 보통 인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 편지를 길게 인용해 준다. 곤경이 시작되면 철학은 멈춘다는 세간의 격언이 있지만 비트겐슈타인과는 무관한 얘기였다.
“그의 삶과 철학을 ‘한 이야기’ 안에서 서술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게 보통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왠지 비트겐슈타인 전기에서라면 가능할 것 같지 않은가. 그는 모든 고투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마치 내면이 따로 없을 것 같은 삶을 살았다. 그게 우리가 받는 매혹의 원천이다. 유언으로 자신이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 달라고 했는데, ‘멋진’ (wonderful)의 통상적인 의미를 수정해서라도 우리는 그 말을 믿게 된다. _ 김영준 열린책들 문학 주간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Wittgenstein, Ludwig Josef Johann) 개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1951년 4월 29일에 사망했다.
그의 생전에는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논리-철학 논고》(1921)만이 철학서로서는 유일하게 출판되었으며, 사후에야 그의 후기 대표작인 《철학적 탐구》 (1953)를 비롯하여 《청색 책·갈색 책》 (1958), 《철학적 소견들》 (1964), 《쪽지》 (1967), 《철학적 문법》 (1969), 《확실성에 관하여》 (1969), 《문화와 가치》 (1980) 등이 출판되었으며, 《유고집》 (2000)이 시디롬으로 발행되었다.
이외에도 《미학과 심리학 및 종교적 믿음에 관한 강의와 대화》 (1966),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 (1976) 등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강의록이 여러 권 출판되었다.
- 비트겐슈타인 연보
1889년(출생) – 4월26일 빈에서 태어났으며, 루트비히 요셉 요한(Ludwig Josef Johann)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다섯 형제와 세 자매의 막내였다. 가족은 유대인 후손이었지만, 유대교를 믿지는 않았다. 가정은 부유하고 교양있는 집안이었으며, 비트겐슈타인 아버지 칼은 지적이고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두려움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전문기술자인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철강산업 설립자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정은 빈 사람들의 생활의 문화적인, 특히 음악적 중심지였다. 클라라 슈만은 거기서 비공식적인 연주회를 가졌고 요하네스 브람스는 좋은 친구였다. 이렇게 가정의 분위기가 예술적으로 된 것은 일차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매우 음악적이었지만 그는 실업가였기 때문에 예술이 바쁜 생활 속에서의 기분전환 이상의 것은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상당한 음악적 재능을 가졌으며 그 중 한 사람 상파울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1903년(14세) – 14세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 다음 3년 동안은 북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유년기에 기계에 대해 흥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의 기술고등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 곳에서 봄까지 머물러 있었다. 기계에 대한 이러한 흥미는 비트겐슈타인이 일생 동안 지니고 있었던 또 하나의 관심사였다.
1911년(22세) –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의 기술고등학교를 마친 후 비트겐슈타인은 영국으로 갔다. 가을에 그는 맨체스터 대학교의 공학과에 연구생으로 등록하여 1911년 가을까지 거기에 머물면서 항공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의 관심은 점차적으로 검은(순수) 수학에로 그 다음은 수학의 기초에로 옮아갔다. 이것은 그가 철학에 들어가게 된 관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의 기초에 관한 작품 중에서 제일 먼저 읽은 작품은 1903년에 출판된 러셀의 「수학의 원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으로 하여금 프레게의 작품을 읽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프레게는 현대 수리 논리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앞으로의 공부를 위한 자신의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독일 예나에 있는 프레게를 방문했으며, 프레게는 곧 비트겐슈타인에게 케임브리지로 가서 러셀 밑에서 공부하라고 충고했다.
1912년(23세) –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1912년 가을부터 다음 학년도 2학기까지(1913-1914) 그 대학교에 등록하였다.
1914년(25세) – 전쟁이 발발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노르웨이의 한 농장에서 보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으며 그와 오랫동안 대화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있는 지적 모험중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전쟁시 비트겐슈타인은 탈장 때문에 병역의무가 면제되었지만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지원병으로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했다.
1918년(29세) – 그는 장교로 훈련을 받고 동부전선으로 그 다음엔 남부전선에서 싸우다 1918년 11월에 이탈리아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남부 이탈리아 몬테 카지노 근처의 수용소에서 전쟁포로로서 약6개월을 보냈다. 비트겐슈타인은 1912년 이래로 여러 가지 기본적인 논리적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왔고, 그 생각을 노트에 적었다. 그는 이 작업을 전쟁 중에도 계속하였고, 이는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로 그는 명제의 의의나 의미에 관련된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8월에 비트겐슈타인의 첫번째 작품이 빈의 군 휴가 중에 완성되었다. 그 책은 「Logische-Philosophische Abhandlung」 이라는 이름으로 1912년에 독일어로 출판되었다.
1919년(30세) – 「Logische-Philosophische Abhandlung」는 독영 대역판으로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라는 인상적인 라틴어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무어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잠시 남부 오스트리아의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이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시골학교 교사가 되기에 적절한 기질을 갖지는 않았다.
1926년(37세) – 4월. 자진해서 사표를 내고 아주 불행하게 빈으로 돌아왔다.
1928년(39세) – 3월에 브라우어가 수학의 기초에 관해 강의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 강의가 그를 그 영역으로 돌아오도록 자극했다고 한다.
1929년(40세) –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그는 학위논문으로 「논고」를 제출하여 같은 해 6월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 다음해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이 되었다.
1933년(44세) – 연구원 생활의 2-3년 동안 「논고」에 제시했던 이론들로부터 차츰 벗어나려고 했다.
1933-34년(44-45세) – 「청색책」과 「갈색책」이 학생들에 의해서 쓰여지게 되었다.
1936년(47세) – 트리니티 연구원의 임기가 끝나자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협만에 있는 작고 한적한 집에 약 1년간 칩거. 여기서부터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의 제1부를 쓰기 시작 (제1부는 1945년에 완성)
1937년(48세) –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1938년 영국 귀화. 1939년에 철학과 무어의 후임으로 임명
1939년(50세) – 취임전 제2차 대전이 일어나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한번 전쟁에 기여하기 위하여 그의 일을 포기. 그는 처음엔 런던의 가이즈 병원에 잡부로 일했으며 후에는 뉴캐슬의 의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1947년(56세) – 전쟁후 케임브리지로 돌아오자 그는 곧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그의 교수직을 포기
1948년(59세) – 「탐구」의 제2부를 완성한 것은 다음해 봄이었다.
1950년(61세) – 가을에 한 친구와 함께 다시 한번 노르웨이를 방문
1951년(62세) – 4월29일. 그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그의 의사의 집에서 암으로 사망
크리스천라일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