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 문학과지성사 / 2015.3.31
- ‘사람, 장소, 환대’는 ‘사회적 성원권’, ‘환대’ 등의 문제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인류학자 김현경의 첫 저서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며, 사회를 ‘시계’, 즉 기능을 가진 구조들의 총체나 ‘벌집ㅡ재생산적 실천을 하는 주체들에 의해 재생산되는 구조’에 비유하는 구조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를 다시 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저자는 사유의 궤적이 드러나는 묵직한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추상적인 개념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방면의 참고문헌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논의를 전개해나감으로써 일반 독자들도 지적 자극과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를 다시 정의한다!
‘사회적 성원권’ ‘환대’ 등의 문제를 오랜 기간 연구해 온 인류학자 김현경의 첫 저서 ‘사람, 장소, 환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며, 사회를 ‘시계’ (즉 기능을 가진 구조들의 총체)나 ‘벌집’ (재생산적 실천을 하는 주체들에 의해 재생산되는 구조)에 비유하는 구조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를 다시 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 목차

프롤로그 그림자를 판 사나이
1장 사람의 개념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주인과 노예
외국인의 문제
오염의 메타포
3장 사람의 연기/수행
가면과 얼굴
명예와 존엄
4장 모욕의 의미
인격에 대한 의례
배제와 낙인
신분과 모욕
사회의 발견
“사람이 되어라”
굴욕에 대하여
5장 우정의 조건
순수한 우정과 순수한 선물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
증여와 환대
공동체에 대한 두 개의 상상
6장 절대적 환대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
7장 신성한 것
죽은 자의 자리
서바이벌 로터리
부록 장소에 대한 두 개의 메모
장소/자리의 의미
여성과 장소/자리
감사의 말
○ 저자소개 : 김현경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역사와 문명’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한국의 근대화와 해외유학 관행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서울대, 덕성여대, 연세대 등에서 인류학을 가르쳤다. 독립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학술 논문에도 대중적인 에세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사람, 장소, 환대’, ‘공간주권으로의 초대’ (공저)가, 옮긴 책으로는 ‘언어와 상징권력’,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공역)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태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인간의 태아는 분명히 인간이지만,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그러하다. 법은 인간 생명이 출생과 더불어 사람의 지위를 얻는다고 명시한다. 출생이란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바깥으로 나와서 모체와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 전까지 태아는 모체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는 태아를 죽이는 행위가 살인죄를 구성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관습은 태아의 지위에 대한 법의 이 같은 판단을 지지한다. 유산된 태아를 위해 아무런 애도의 의례를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_32쪽
현대의 사형제도는 이와 대조적으로, 범죄자를 격리된 장소로 끌고 가서 소수의 입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범죄자가 이미 사회 바깥에 있다는 생각은 그를 좀더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에 불과하기에, 그의 고통은 어떤 상징적인 가치도 갖지 않으며, 그에 대한 마지막 배려 역시 ‘동물 복지’를 논할 때와 유사하게,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문제에 집중된다._54쪽
외국인에 대한 환대의 철회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의해 정당화된다. ‘우리나라에서 받는 대접이 못마땅하다면 자기네 나라로 가면 된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한번 바꾸었다가 다시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외국인’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다른 장소는 종종 허구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나는 두 가지 예를 들고 싶다. 하나는 재일조선인들의 ‘조선’이고, 다른 하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원주민들의 ‘홈랜드’인 반투스탄 (Bantustan)이다._69쪽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율성을 박탈당하고 사소한 것까지 잔소리를 들으면서, “나이의 위계에서 돌이킬 수 없이 강등되었다는 공포감”을 경험한다. 아이의 이미지는 여기서 그들의 신체와 정신이 더 쉽게 침범될 수 있음을 표시한다. 그들은 더 작은 명예를 지니며, 더 쉽게 모욕당하고, 그러면서 그 모욕의 무게를 평가절하당한다. 그들은 불완전한 사람, ‘모자라는’ 사람이다. 그들의 그림자는 남들보다 작고 희미하다._141쪽
우리는 노동자나 자본가로서, 혹은 소비자나 생산자로서 시장에서 만난다. 우리의 관계는 계약적이다. 계약의 이름으로 우리의 불평등은 정당화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사람으로서 연결되어 있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서로 평등하다. 계약관계의 기초에는 사람으로서의 평등이 있다.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 불평등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경제질서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가 과연 사회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_162쪽
사회 안에서 우리가 갖는 자리가 장소들에 대한 권리 속에서 또는 우리의 몸이 장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며,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곧 이 장소에 대해 권리를 갖는다는 것, 손님이자 주인으로서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역의 노숙자들. 그들은 갈 데가 없어서 거기 있는 것인데, ‘갈 데가 없다’는 표현은 그들이 이 사회 안에서 갖고 있는 자리의 위태로움을 드러낸다._289쪽
로마에서는 영아 유기 (expositio)가 성행했는데, 유기된 아이를 데려다 키운 사람은 그 아이를 종으로 부리든지 내다 팔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양자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아이가 버려졌을 때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는 생각이 이러한 관행을 정당화하였다. 말하자면, 아이가 자기를 거두어준 사람에게 생명을 빚졌다는 생각, 그리고 생명에 대한 빚은 생명으로만 (즉 일생을 바쳐서만) 갚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증여의 논리이지 환대의 논리가 아니다. 환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버림받은 아이는 목숨을 건진 뒤에도 사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를 구조한 노예 상인은 그의 죽음을 유예했을 뿐, 그를 환대한 게 아니다. 그들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오히려 지속적인 적대이다. 노예 상인은 아무 때나 아이를 죽일 수 있고, 매질과 모욕으로 끊임없이 죽음을 환기시키면서 아이의 복종을 끌어내기 때문이다._216~217쪽
○ 출판사 서평
-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를 다시 정의한다!

‘사회적 성원권’ ‘환대’ 등의 문제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인류학자 김현경의 첫 저서 ‘사람, 장소, 환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며, 사회를 ‘시계’ (즉 기능을 가진 구조들의 총체)나 ‘벌집’ (재생산적 실천을 하는 주체들에 의해 재생산되는 구조)에 비유하는 구조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를 다시 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경계는 이 나날의 인정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어진다.”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사람과 장소를 근원적으로 연관된 개념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러한 접근은 한나 아렌트와 유사하다. 아렌트에 따르자면, 사회는 물리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갖는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현상하고, 타인이 나에게 현상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아렌트의 관심이 주로 정치적, 법적 문제에 맞추어져 있다면, 김현경은 공동체와 주체를 구성하는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층위로 시야를 확장한다. 사람은 법적 주체일 뿐 아니라, 일상의 의례를 통해 재생산되는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상호작용 질서 (interaction order)’에 대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연구는 이러한 확장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김현경은 상호작용 질서 대 사회구조라는 고프먼의 이분법을 따르면서, 상호작용 질서에서의 형식적 평등과 구조 안에서의 실질적 불평등이 어떻게 현대 사회 특유의 긴장을 가져오는지 설명한다. 현대 사회는 우리가 잘살건 못살건 배웠건 못 배웠건 모두 사람으로서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사람행세를 하고 사람대접을 받는 데 물질적인 조건들은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근대 이전에 존재하던 신분적 모욕이 어떻게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새로운 형태의 더욱 미묘하고 일반화된 모욕, 즉 굴욕의 형태로 등장하는가에 대한 분석은 아주 날카롭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 (즉 구조의 담지자로서 구조가 명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 우정이란 무엇인가? 적 (敵)을 환대하는 것은 가능한가?
이 책은 또한 환대 (hospitality)의 개념이 내포하는 역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우리는 적대적인 타자까지도 환대할 수 있는가?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고, 대가를 전혀 계산하지 않고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돌변하여 우리를 해치려 할 때도 여전히 그러한가? 김현경은 데리다가 환대를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자신의 사적 공간을 개방하는 문제와 결부시키거나, 주인의 자리에 개인 대신 ‘국민’을 대입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환대는 외부인을 맞이하는 문제, 또는 울타리를 개방하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서 국민이 되고, 가족의 일원이 되는가?
이 책은 환대를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로 볼 것을 제안한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인같이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계속 환대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절대적 환대이다. 아니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할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사람, 장소, 환대’는 다양한 분야에서 논의되어온 이론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학계의 관행이나 기준에 따른 건조한 논문의 형식을 띠고 있지 않다. 저자는 사유의 궤적이 드러나는 묵직한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추상적인 개념에 의지하기보다는 오랜 연구와 강의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기대하기 힘들 다방면의 참고문헌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논의를 전개해나감으로써 일반 독자들도 지적 자극과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만만치 않은 문제의식에 유려한 글 솜씨까지 갖춘, 우리가 새롭게 주목해야 할 저자의 등장을 알리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 독자의 평 1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中略)…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 제 1장 「사람의 개념 중에서」
위의 인용 문장은 책 첫 페이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렇게 길게 옮긴 이유는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항시 ‘사람’임을 인정받고 있는가?, 그리고 국적, 인종, 직업, 성별, 연령과 무관하게 타인을 ‘사람’으로 환대하고 있는가를 생각게 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사람이란 외형적, 생물학적 동일성이라는 보편성에 의거한 종(種)으로서의 ‘인간’과는 구분되는, 인간 상호간의 의례(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에 대한 이름이다.
현대 사회, 오늘 우리의 사회는 ‘의례적 평등 원칙’을 표면적으로는 상호작용 규제 규범으로 하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말은 의례교환의 대칭성을 선언하는 대표 원칙이란 얘기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현실 세계에서 지켜지지 않는다. 이 의례원칙이 사라지는 예외지대가, 아니 예외 현상이 오히려 만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 모욕과 신분주의
유교적 세계관에 뿌리박은 낡은 신분주의가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여전히 횡행하고 있으며, 배금주의 토양위에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신분주의 또한 의례적 평등주의를 훼손하고 위협하며 파괴하고 있다. 한 쪽이 다른 쪽을 모욕할 수 있는 의례코드 자체의 비대칭성이 차별을 수용한다는 조건하에 상호작용 집단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는 다는 것은 조건부로 사람됨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며, 이는 의례적 불평등이 일상화 되었다는 의미이다.
신분적 의례가 상호작용 질서를 압도할 때 지배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인간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는 자격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사람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상호작용 공동체 (집단)의 성원권을 잃는다는 뜻이다. 같은 공간 안에 있지만 ‘거기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 다시 말해 ‘비가시화’되고, 현상되는 공간의 바깥으로 배제되어버린다는 것이다.인격,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그 상호작용의 틀 속에서 사라지고 비인격화되어 버리는 것, 모욕 받는 것이다. 모욕은 이렇게 존엄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며, 마침내 기존의 자기 이미지를 포기케 하여 굴종을 정상화하고 사회에 현상하지 않는 존재처럼 지워버린다.
문득 2020년 4월 15일 선거결과가 한국사회의 상호작용 의례에 만연한 비대칭성, 의례적 불평등을 겪고 있는 시민 개개인들의 자각에 따른, 모욕의 상시화에 대한 시정의 외침이 아니었을까하는데 생각이 다다른다. 마치 자신들 이외에는 사람이 없다는 듯히 행동하던 수구 기득권 집단에게 비가시화된 시민들의 저항이었다고 말이다. 너희들이 비인격화한 인간이‘사람’으로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고.
행위자들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의례적 권리/의무가 달라지는 이 사회의 불순함과 물질 우선의 신자유주의 신봉, 양반/노비 타령을 하는 지역적 특성, 가부장적 권위주의 지향의 보수주의자들의 신분주의적 권력과 정치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었을 것이다. (물론 일부 지역의 투표권자들은 어떠한 모욕도 없는 사회에 있다고 해야겠지만)
고관대작도 재벌도 아닌 대다수의 시민들은 무수한 모욕을 떠안으며 신분 (지위, 재산 등등)이 낮을수록 그들에게 행해지는 무례함의 한도가 커질 뿐 아니라 모욕의 질량이 평가절하된다. 이렇게 사회에 만연한 모욕에는 그 고유한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 타인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부정에 대해서 다시금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크게 복창해!” 모욕은 이처럼 자기 부정을 강요하여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게 하는 폭력이다. 이러한 의례적 폭력은 사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순히 이에 협조하지 않으면 간신히 걸친 사람의 자격을 완전히 박탈당할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의례적 비대칭성이라는 신분주의는 곧 구조적 폭력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극단적 표현을 빌린다면 신분주의를 숭배하는 보수주의 집단의 한국사회는 근본적 폭력사회를 지향한다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 김현경은 “존비법이 엄격한 사회는 엄청난 감정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임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 건물 경비원, 백화점 판매원, 골프장 캐디, 전화 교환원. 마트 계산원 등등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상황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 그만한 배려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뼛속 깊은 신분주의적 가치관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제복 착용을 강요받고 신분적 차별의 대상으로 공시한다. 낙인찍기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스티그마의 한국사회 면모일 것이다. 상호작용의 평등성, 대칭성은 이렇게 파괴되어있고, 신자유주의적 노동세계는 이처럼 신분적 모욕을 일상화한다.
한편 가해자가 있는 ‘모욕’은 이제 가해자 없는 ‘굴욕’의 형태로 변화하여 그 모습을 감추고 더욱 극렬하게 인격을 무너뜨리고 있다. 예고 없는 실직 (문자로 날아온 해직 통보), 일한 대가와 무관한 보수, 일방적인 월세 인상 … 아무도 굴욕을 당하는 사람을 모욕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장주의가 명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 굴욕감은 전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상호작용 질서차원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주장하면서 구조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으며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라고 비아냥거리는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인 수구주의자들은 이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형식적 평등, 실질적 불평등을 정상화하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사실 공포 그 자체이다.
- ‘절대적 환대’를 생각하며
이 정도에서 ‘사람’의 자격에 대한 객설은 마쳐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쓰도록 한 동기는 지하철에 탑승한 독일 거주 9년차인 한국인 부부를 향해 독일인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5인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빌미로 노골적으로 인종차별과 성희롱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하는 2020년 4월 27일 뉴스 매체의 영상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관할 독일 경찰은 구타의 흔적이 없으므로 사건 접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무시했으며, 이에 주독일 한국영사관이 항의하자 조사해보겠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저자 김현경은 “공간에 대한 권리이자 교제의 권리, 즉 친교의 가능성으로 충전된 현상학적 공간에 들어갈 권리”라는 칸트의 ‘환대’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됨을 부정하지 않는”것이라는‘절대적 환대’를 주장한다.
환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며, 이러한 인정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몸짓과 말을 통해 표현된다.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조건부로 사람됨을 인정받는 현실에 외국인이라 불리는 이방인에게 무조건 자리를 내주는 절대적 환대가 가능하겠는가라는 의구심이 앞선다. 그럼에도 사회란 절대적 환대를 통해서 성립했다고, 만일 이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몸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 나오는 동시에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무조건적 환대는 사회의 기본 원칙”이란 것이다.
그러나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복수하지 않는 환대가 가능한 것인가? 칼을 들고 뛰어드는 강도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저자는 말한다, 비록 범죄자이더라도 그를 사회 바깥으로 두는 순간 그가 더는 공동체의 성원이 아닌, 즉 사람이 아니므로 법의 질서하에서 그를 처벌할 수 없게된다는 것이다. 결국 법의 바깥에 있는 것인데 어떻게 범죄가 된다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또한 희생 담론을 인용하면서 ‘사후의 명예’라는 죽은 자의 산자들 사이의 자리에 대한 믿음처럼 자리란 신성한 것, 불가침의 무엇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구에서 들려오는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폭력의 뉴스는 계속되고, 하물며 일본,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조차 한국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 사건은 그치지 않고 들려온다. 절대적 환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단 한번도 실현된 적이 없지만 사회운동이란 현재 속에 이미 도래해 있다고 이해하며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서바이벌 로타리의 모순, 사적 공간과 공적공간을 분리하지 못했다며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 부정론 비판에 따르는 저자의 성찰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계의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람자격의 박탈 소식은 모욕감으로 떨려온다.
이 저술을 이렇게 국한된 사건에 한정하여 서술하는 것은 내 부족함이다. 조건부로만 사람됨을 인정하는 유교의 전근대적 인권의 시각에서부터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과 ‘예외 상태’의 담론을 활용한 사람의 자격에 대한 사유, 공리주의 피터 싱어와 론 해리스의 왜곡된 생명윤리에 대한 시각 비판을 통한 의례대상으로서의 사람에 대한 통찰적 분석은 가히 인간 존엄에 대한, 사람의 평등에 대한 중대한 시사를 안겨준다. 아마 책 전체가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타인을 대하는 보다 성숙된 지적 풍부함과 아울러 도덕적, 비판적 성찰로 이끄는 사유들로 빼곡하게 차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 독자의 평 2
사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모두들 알지만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질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사람’의 의미는 특정 장소와의 연관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그 장소에 거주하는 이들로부터 환대를 통하여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양한 철학과 사회학적 이론들이 펼쳐지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차원에서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전체적인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 책의 논리 전개 방식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저자는 자신의 논리를 펼쳐내기 전에 ‘프롤로그’에서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악마와의 거래로 자신의 그림자를 팔고 막대한 금화를 얻게 되지만,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우화적 기법을 사용한 이 소설의 제재라 할 수 있는 ‘그림자’의 의미를 통해, 사람의 존재 조건을 생각해보도록 하고 있다. 그림자를 판 대가로 부자가 되지만, 또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사나이! 그렇다면 ‘그림자’는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인간임을 증명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이 아닌 ‘그림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 이쯤해서 ‘그림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조건으로서의 비유임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이제 저자는 본격적으로 ‘사람의 개념’ (1장)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태아와 노예, 그리고 군인과 사형수 등의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들이 처한 조건과 사회 속에서의 위치를 상기시키며 논의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공동체 내부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나 법적 제도 속에서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일단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기에, 적어도 이들은 완전한 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군인’은 전쟁이 벌어지면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때 개인은 인간도 아니고 심지어 시민도 아니며 단순한 병사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처한 위상은 무엇일까? 저자는 공동체의 ‘성원권과 인정투쟁’ (2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을 주목하면서, ‘사람의 개념은 장소 의존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때 ‘장소’란 공동체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과 노예’, ‘외국인의 문제’ 그리고 미국의 흑인과 조선시대 여성의 역할과 사회적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하는 것,그것이 바로 공동체 성원들의 신성함과 그것을 오염시키는 존재들로 치부하여 사회의 성원권을 부정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사람을 연기하거나 혹은 존재하게 한다는 의미’의 ‘수행’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사람의 연기 / 수행’ (3장)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저자의 생소한 논법에 대해서 이 부분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인간 관계의 측면에 주목하면서, ‘모욕의 의미’ (4장)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이와 상반되는 측면에서 ‘우정의 조건’ (5장)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로서는 여전히 그 의미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 ‘절대적 환대’ (6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사람 자체를 ‘신성한 것’ (7장)으로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뒤르켐의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을 비판한 ‘죽은 자의 자리’나 존 해리스의 ‘서바이벌 로터리’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 자체의 ‘신성함’을 성찰하게 한다고 이해된다. 아마도 사회학에서는 이러한 이론들을 통해서 ‘사람’의 존재 의미를 성찰하게 만드는 방식이라 이해되지만, 어찌 보면 굳이 이러한 이론들이 아니더라도 자명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충분히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전제에서, 그럼에도 사람의 사회적 조건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따져보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차니)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