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세계 역사의 관찰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 휴머니스트 / 2008.6.2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5,000년에 걸친 인류역사를 관찰하면서, 역사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를 다룬 강의록이다.
저자는 역사에 나타나는 ‘되풀이 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역사에서 늘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상수’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먼저 역사에 나타나는 세 잠재력을 국가, 종교, 문화로 보고 이 세 잠재력이 맺는 상호관계에 따라 나타나는 여섯 가지 상태를 관찰한다.
즉,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역사에 항상 존재하는 ‘상수’들이 작용한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역사에 등장한 ‘위대한 개인’, ‘전쟁과 혁명’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데, 이처럼 저자는 국가, 종교, 문화를 통해 역사의 중심 줄기를 바라보는 한편, 개인, 전쟁, 혁명 등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역사를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그 의미를 화두로 삼는다.
역사라는 드넓은 강을 한 눈에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의 도움을 얻는다면, 비록 유럽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시아갸 한 층 확장될 수 있음을 느낄 것이다.
○ 목차
옮긴이의 말
제1부 역사의 관찰 – 되풀이 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
제2부 역사에 나타나는 세 잠재력 – 국가·종교·문화
제3부 세 잠재력의 상호작용 – 여섯 가지 제약받음의 관찰
제4부 역사상의 위기들 – 전쟁과 혁명
제5부 위대한 개인들 – 개체성과 보편성
제6부 세계사의 행운과 불운에 대하여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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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스위스 바젤과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역사학을 전공했고, 역사를 공부하면서 문학과 미술도 함께 공부했다.
바젤 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와 미술사 교수를 동시에 역임했다. 미술사 교수직을 맡으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문학 연구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의 문학 연구는 원어 텍스트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그리스어, 라틴어, 이탈리아, 프랑스, 영어, 도이치어 등).
젊은 시절 부르크하르트는 랑케 (Leopold von Ranke, 1795~1886) 밑에서 공부를 했고, 랑케가 물러난 다음에 베를린 대학교 역사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 (1872년) 정중히 거절하고 고향인 바젤에 남았다.
바젤은 도이치 문화권의 변방에 위치한 도시지만 지성의 역사에서 톡톡히 한 몫을 한 곳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이 부르크하르트에게 배우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 연구의 임무란 ‘발전’이 아니라 역사에서 ‘항상 있는 것, 되풀이되는 것, 전형적인 것’을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다고 함으로써 우리 현대 문화의 발전에 대한 이해를 위해 결정적인 작용을 남겼다.
그는 문화사 및 예술사가로서 정통의 도이치 역사학 전통에서 벗어나 특출한 인물이다.
역사학자로서 그의 독특한 위치와 영향력은 그동안에도 이미 확고불변한 것이었거니와, 오늘날 문화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오히려 더욱 커지는 일면이 있다.
– 역자 : 안인희
인문학자이자 도이치어권 대표 번역자. 북유럽 신화, 유럽의 문화와 역사 등 여러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밤베르크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옮긴 책으로는 『데미안』 『돈 카를로스』 『파우스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한국번역가협회 번역대상)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 (한독문학번역상) 『트리스탄과 이졸데』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그림 전설집』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전3권)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등이 있다.
역자 안인희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문학 전공(문학박사). 독일 밤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프리드리히 쉴러의 『발렌슈타인』으로 본격적인 번역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5년에는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로 제2회 한독문학번역상을 수상하였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걸출한 작가를 발굴, 국내에 널리 소개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필두로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 『폭력에 대항한 양심』, 『발자크 평전』까지 일련의 츠바이크 작품을 번역함으로써 국내에 츠바이크 마니아층을 형성하였다. 원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여 전달한다는 번역의 기본 원칙 아래, 원문의 향기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독자들에게 마치 우리글을 읽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번역을 추구하는 그는 힘 있는 필체로 문학성을 지닌 깊이 있는 인문서 번역과 집필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지은 책으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2003년 민음사 제정 올해의 논픽션상 수상)와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2』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인류역사 5,000년을 ‘관찰’한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 – 이 책의 개요
인류역사 전체를 꿰뚫는 관찰로 세계 역사를 유형화하여 서술한 문화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Jakob Burckhardt, 1818~1897)의 작품 《세계 역사의 관찰 (Weltgeschichtliche Betrachtungen)》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의 번역은 독일어권 인문서의 번역과 집필이라는 한 길을 걷고 있는 인문학자 안인희 선생이 맡았다. 이 책은 1868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역사의 연구 (Uber Studium der Geschichte)’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의를 정리한 것으로, 당시 바젤 대학교의 고전 문헌학 교수였던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청강하여 감동받은 강의로 널리 알려진 고전이다.
《세계 역사의 관찰》은 1868~1869년과 1870~1871년에 했던 동일한 강의를 그가 죽은 다음 1905년에 발간한 책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책에서 역사 연구의 임무란 역사를 ‘발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항상 있는 것, 되풀이되는 것, 전형적인 것’을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세계 역사의 관찰》은 ‘역사 연구’에 대해 사유한다. 역사를 지역으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에서 나타나는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곧 역사에서 ‘늘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변하지 않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에 나타나는 ‘세 잠재력’으로 국가, 종교, 문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움직이는 힘인 문화를 고정된 힘인 국가나 종교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고, 문화를 국가와 종교에서 분리시켜 관찰하는데, 세 잠재력 각각의 개념을 정의하는 데서 부르크하르트의 독특한 눈길을 볼 수 있다. 역사에서 세 잠재력이 제각기 따로따로 관찰되지 않고, 그들의 상호관계가 관찰대상이 되는데, 그것도 각각의 요소가 번갈아 다른 요소들에게 제약을 받는 여섯 가지 상태로 나뉘어 관찰된다. 역사상 겉으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라도 속을 잘 들여다보면 ‘항상 거듭 되풀이되는 전형적인 특성’이 관찰의 핵심을 이룬다.
더 나아가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개인’까지 관찰한다. 이 대목 역시 그의 독특한 관점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을 주제로 삼았던 역사가였다. 그에게 절실한 질문은 “역사가 인간에게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가?”이다. 집단의 인간이 아닌 자의식을 가진 개인이 그의 주요한 관심사였고, 세계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개인들의 특성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가 부르크하르트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담고 있는 책이다. 곧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내용도 쉽지 않고 그것 말고도 여러 이유에서 이 책의 번역은 유독 힘들었다. 교양과목 강의록이 이토록 철저히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글의 전체 맥락과 수많은 구절에서 부르크하르트 특유의 문장과 사색을 만날 수 있음은 아주 분명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원문이 출판을 전제로 한 책의 원고로 쓰인 것이 아니고 강의록을 손질한 것이라, 잘 보이지는 않아도 여기저기 문맥이 끊긴 부분들이 많아 문맥과 세부적인 내용을 잡아나가기가 부분적으로 몹시 어려웠다.
낯선 종교들과 그밖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다. 다만 번역의 출전으로 삼은 크뢰너 (Kroner)판의 발행인 루돌프 마르크 (Rudolf Mark)가 상세한 해제를 붙여놓은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필요한 곳마다 그의 해제를 번역하고 요약해서 각주로 붙여 놓았다. 동시에 유감이지만 저자의 원주 (原註)를 책의 뒤쪽으로 돌렸다. 그렇게 하는 편이 독자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물론 각주의 일부는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 pp.16~17, 「옮긴이의 말」중에서
- 역사를 ‘관찰’한다는 것의 의미 – 이 책의 특징 1
《세계 역사의 관찰》 도입부에서 부르크하르트는 강의의 주제와 방법론을 펼친다. “역사에서 무엇을 볼 것이며,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역사를 관찰할 때 관찰자의 의도와 진정한 역사 인식이란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학문적 의미에서의 역사 탐구가 아닌 정신적 세계의 여러 영역에서 역사적인 것 (역사성)을 탐구하도록 자극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세계사적인 이념들’을 탐색하는 게 아니라 지각 (知覺)하는 것이고, 가능한 한 많은 방향에서 역사를 통한 횡단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학이 그 시작을 밝힐 수 없고, 그 종말도 예측해서 말할 수가 없는 불확실한 분야임을 고백한다. 동시에 ‘절대정신’이 역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고 보는 역사철학을 단호히 거부한다. 역사가 일정한 체계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역사철학의 관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역사 관찰에서는 처음과 종말이 밝혀지지 않은 채 열려있다.
시작과 끝이 밝혀지지 않은 채 열려 있는 역사는 그냥 과정일 뿐인데, 그 과정도 확정할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이다. 다만 긴 시간을 두고 역사를 관찰해보면 역사의 흐름을 꿰뚫는 일종의 핵심현상이 보인다. 곧 거대한 역사상의 힘이 새로 나타나 절정기에 이르렀다가 다시 몰락해 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식 (Erkenntnis)’과 ‘의도 (Absichten)’라는 양극단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역사적인 글에서 이미 인식을 향한 열망은, 전승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수많은 의도라는 장애물에 부딪친다. 그 밖에도 우리는 자신의 시대와 사람을 지향하는 의도들에서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아마도 인식에는 더욱 나쁜 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시험은 다음과 같다. 역사가 우리 자신이 속한 세기와 우리 자신에게 가까워지면 우리는 모든 것이 훨씬 ‘더 흥미롭다’고 여긴다. 이것은 실은 우리의 ‘관심이 더 커진다’는 뜻일 뿐이다. 여기에 개인들과 [민족] 전체의 운명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 덧붙여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불확실성을 향해 눈길을 돌리고, 우리의 예감에는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과거의 수많은 실마리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우리가 추적할 수 없는 것이다. — p.36, 「01 우리의 과제」중에서

-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 – 이 책의 특징 2
역사책들은 역사를 지역으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서술하고 있고, 역사가들은 과거를 훨씬 발전된 현재에 대한 대립이나 전 (前) 단계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는 선형적인 발전론을 거부한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에서 발전이 아니라 ‘늘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상수 (常數)’에 주목한 것이다.
시작에 대한 사변에 붙잡혀 있고,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역사학자의 운명이라지만, 부르크하르트는 이를 거부하고 시작의 이론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고, 따라서 종말의 이론에 대한 요구도 없다고 설파한다.
역사 전체의 흐름을 꿰뚫는 거대한 핵심현상이 있다. 언제나 그 순간의 최고 정통성을 지닌 역사적 권력이 나타나곤 한다. 온갖 종류의 지상의 생명 형태들, 곧 (헌)법, 특권계층, 시간성 전체와 깊이 뒤얽힌 종교, 대소유계층, 완전한 사회적 관습, 특수한 법의 개념 등이 그 권력에서 발전되어 나오거나 거기 의존하고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만이 이 권력을 뒷받침하고, 또 그 시대의 도덕적 힘을 담당하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오로지 정신만은 깊이 생각하고 들이파는 활동을 계속한다. 물론 [앞에 말한] 모든 생명 형태들은 변화에 저항하지만, 결국은 혁명을 통해서나 서서히 부패함으로써 마침내 단절이 나타난다. 도덕과 종교의 붕괴, 이른바 몰락, 그야말로 세계의 몰락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벌써 정신은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데, 이 새로운 건물도 시간이 흐르면서 동일한 운명을 겪는다.
한 시대를 사는 개인은 이런 역사적 권력들에 마주서게 되면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다. 개인은 일반적으로 공격하는 당파나 저항하는 당파에 귀속된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과정 바깥에서 자신을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지레를 박을] 점을 찾아내 이 모든 것을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보상은 그리 크지 않고, 비가 (悲歌)의 느낌을 막을 길이 없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모조리 어느 한 당파에 소속되어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뒷날에야 정신은 자유롭게 이런 과거를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가능한 온갖 가면을 쓴 채 천 가지 모습으로 복잡하게, 자유롭고도 부자유스럽게 흔들리는 그대로의 역사적 생명이 바로 이런 핵심현상의 작용이다. — pp. 32~33, 「01 우리의 과제」중에서
- 역사에 나타나는 세 잠재력, 국가·종교·문화 – 이 책의 특징 3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에 나타나는 세 잠재력인 국가와 종교, 문화를 그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이 세 잠재력은 그가 임의적으로 나누었다. 마치 그림 한 장에서 몇몇 모습들만 떼어내고 나머지는 그대로 버려두는 것과 같다. 이렇게 떼어내는 것은 ‘관찰’을 위해서다. 세 잠재력은 서로 이질적이기에 나란히 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안정된 두 가지, 곧 국가와 종교를 나란히 놓는다 해도 문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물질적?정신적 욕구에 어울리는 문화는 물질적인 삶을 후원하기 위해, 그리고 정신적, 도덕적 삶의 표현으로서 임의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말하며, 온갖 사교, 기술, 예술, 문학, 학문 등이 여기 속한다. 문화는 움직이는 것, 자유로운 것의 세계이다. 필연적인 보편성이 아니고, 따라서 억지로 타당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세 잠재력의 특성을 살펴보고, 이어서 그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로 살핀다. 그들은 때로는 그 기능이 서로 뒤섞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로 정치적인 시대와 주로 종교적인 시대가 있었고, 위대한 문화적 목적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시대도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제한하거나 서로에게 제한받음은 급격히 바뀌곤 하였다. 특히 수많은 시대들의 유산이 층층이 쌓여 있는 시대는 더욱 그러했다.
임의로 일어나고, 또 그 어떤 보편적 타당성이나 강제적 타당성을 요구하지 않는 정신적 발전의 총합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문화는 고정된 삶의 두 장치들 [=국가와 종교]에 대해 끊임없이 수정하고 녹이는 작용을 한다. 이들이 문화를 완전히 장악하여 자기들의 목적만을 위하도록 제한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다. 그 밖에 문화는 국가와 종교에 대한 비판이며, 국가와 종교에서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다.
나아가 문화는 종족적인 차원의 소박한 행동이 성찰의 능력으로 바뀌는 수많은 형태의 과정이다. 그 마지막의 가장 높은 단계, 곧 학문과 특히 철학에서 [이런 종족적인 차원의 소박한 행동이] 순수한 성찰로 바뀐다.
하지만 국가와 종교에 대한 문화의 외적인 형식 전체는 가장 광범위한 의미의 사회다.
문화 요소들 하나하나는 국가와 종교처럼 저마다의 생성과 전성기―곧 완전한 자기실현―쇠퇴, 그리고 일반적인 전통에서 계속 살아감 (그럴 능력과 품위를 갖추고 있는 한) 등의 단계를 갖는다. 잊혀진 그 어떤 민족에게서 인류의 혈통 안으로 들어왔을 수많은 온갖 습득물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의식되지 않은 채 계속 살아 있다. 민족과 개인들에게서 문화의 성과물이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쌓였음을 언제나 계산에 넣어야 한다. — pp.98~99, 「05 문화」중에서
5.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개인들 – 이 책의 특징 4
세계의 잠재력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여러 영향들을 관찰하고, 과정을 재촉하는 것 (위기)을 관찰한 뒤, 세계의 변혁을 이끈 특별한 개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위대한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위대성’이라는 개념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다음 인간의 하찮음, 과민함, 산만함에서 출발한다. 저자에게 위대함은 ‘우리가 아닌 그 무엇’이다. “풀숲의 풍뎅이에게는 개암나무 관목도 (풍뎅이가 그것을 이용할 경우) 매우 크게 보인다. 그가 풍뎅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위대한 개인들, 또는 역사상의 위대성이란 무엇인가? 부르크하르트는 다른 주제와는 달리 이 주제를 대학 강의의 범위를 벗어나 공개 강연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발표했다. 위대성에 대해서는 현대를 사는 우리도 관심이 많지만, 오늘날 우리는 출세하거나 돈을 많이 번 유명한 사람을 위대한 인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역사적 위대성이란 개인의 범주를 벗어나 전체 인류라는 보편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사회를 변화시킨 위대한 개인들 역시 보편성을 바탕에 두고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이따금 갑자기 한 인간에게서 응축되어 나타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세계가 그의 말에 복종한다. 이런 위대한 개인들은 보편성과 특수성, 지속적인 것과 변혁 등이 한 인간에게서 동시에 출현한 경우다. 그들은 국가, 종교, 문화, 위기를 요약하고 있다.
한 민족 전체를 하나의 문화 상태에서 갑자기 다른 상태로 넘어가게 만드는 인물들이 극히 놀랍다. 예를 들면 칭기즈 칸을 통해 몽골 사람들은 유목민에서 세계정복자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 치하에서 러시아 사람들도 여기서 언급할 수 있다. 그들은 대제를 통해 오리엔트 [=동양] 사람에서 유럽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화민족을 낡은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위대하게 보인다. 그에 반해 단순한 파괴자들은 위대한 것이 아니다. 티무르는 몽골 사람들을 격려하지 않았다. 그가 지나간 뒤로 사정은 전보다 더욱 나빠졌다. 칭기즈 칸이 위대한 그만큼 그는 작은 존재다.
위기에서는 현존하는 것과 새로운 것 (혁명)이 함께 위대한 개인들에게서 절정에 이른다. 그들의 본질은 세계 역사의 진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들이 자기 시대에 대해 갖는 관계는, 거의 오로지 무시무시한 시대에만 가능한 히에로스 가모스 (?ερ?? γ?μο?, 거룩한 혼인)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시대만이 위대함의 유일한 최고 척도를 제시하고, 또한 이런 시대만이 위대함에 대한 욕구를 갖는다.
위기의 처음에는 언제나 이른바 위대한 남자들이 넘쳐난다. 흔히 정파 (政派)의 지도자들이나 재능과 신선함을 지닌 현실의 사람들이 자주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곤 한다. 변혁은 그것을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완전히 대변할 남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소박한 전제가 있지만, 변혁 자체가 처음에는 짐작도 못했던 변화 속으로 휘몰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 pp.346~347, 「15 위대한 개인들, 역사적 위대성이란 무엇인가」중에서

- 역자 안인희 인터뷰 – 《세계 역사의 관찰》 출간 의미를 중심으로
책이 출간되기 전 안인희 선생에게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인상적이게 들어왔다. 출간에 즈음하여 안인희 선생에게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몇 가지 질문을 보냈다. 이 인터뷰는 그 답신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는 안인희 선생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히틀러 평전》 등을 발간할 때 맺은 인연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꾸준히 교유하고 있다. 《세계 역사의 관찰》을 읽고 감동받아 직접 번역에 뛰어든 안인희 선생님, 무엇이 그를 힘들고 어려움 일에 몰두하게 했을까? ‘부르크하르트’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가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었다. (정리 휴머니스트 선완규)
.예 선생님, 안녕하세요. 번역과 탈고 그리고 여러 차례의 검토를 거쳐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인류역사 5000년을 ‘관찰’한 책이라고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셨습니다. “역사를 관찰한다.” 인문학자들에게 ‘관찰’이라는 단어는 ‘분석’. ‘성찰’과 다른 이색적인 개념일 듯한데요. ‘관찰’의 의미가 무척 궁금합니다.
-저자 자신이 붙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책의 제목이 ‘관찰’이니까요. 이것은 실은 ‘역사의 연구’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의 내용입니다. 어떤 시대나 민족의 특정한 역사를 서술한 책이 아니라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 어떻게 연구할 것이냐를 다룬 책입니다. 여기서는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를 바라보는 일종의 철학 같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연히 역사란 무엇이냐, 역사를 오래 연구하면 거기서 어떤 통찰을 얻을 수가 있느냐, 등도 아주 광범위한 의미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근본 입장은 헤겔 방식의 사변적 역사관으로는 안 된다는 거죠. 도식적으로 되어 있어 다루기는 편하지만 역사란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지는 도식으로 만들어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정교한 시대사를 여럿이나 연구해서 대작 연구서들을 낸 사학자가 바라본 세계 역사인데요. 그의 관점은 지구라는 공간과 시간을 잠시 벗어나 우주선을 타고 인류 역사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어요. 이렇게 통 큰 관점에서 바라보니 인류의 역사가 그저 한 생명체의 삶처럼 보이더라는 거죠. 각각의 개인들이 이 안에서 수천 년 동안 바글바글 싸우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은 크게 보면 인류가 하나의 생명체인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위대한 인물의 특성이 보편성에 다가간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순간에 권력을 장악했느냐가 아니라, 인류라는 생명체를 위해 어떤 공헌을 했느냐가 문제라는 거죠.
부르크하르트는 다방면의 재능을 가졌던 천재인데요. 그는 몹시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그의 본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는 ‘관찰자’입니다. 그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고, 또 많은 사람이 그렇게 평가합니다. 그가 관찰자라는 점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그의 예술작품 관찰입니다. 모든 역사 관찰에서 그는 정교한 눈길로 문학과 미술작품의 관찰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번역을 자처한 저도 서양문학을 전공했습니다만 부르크하르트가 문학을 논하는 부분을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엄청 방대하고 통이 클 뿐만 아니라 내용이 몹시 정교하고 게다가 냉철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크하르트라는 마법에 한번 걸려들면 쉽게 다시 벗어나지 못하는 요인이 바로 이것이죠. 절대로 쉽지 않은 그 문장의 힘도 대단합니다.
그는 오랜 시간을 두고 치밀하고 정확한 관찰을 한 다음 그것을 허풍이 없는 문장에 담아내는데, 그 조용한 목소리가 아주 특이한 힘을 가집니다. 이른바 언더스테이트먼트 (understatement, 낮추어 말하기)의 버릇을 가진 사람인데요, 놀라운 것은 이 조용한 목소리가 하는 말이 허풍을 떠는 그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나중에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발언이 된다는 거죠.
.선생님께서 번역하면서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해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인문학의 보물’이라고 적은 것이었습니다. 방법론의 보물일까요, 사유의 거대함의 보물일까요. 아니면 인문학이라는 큰 틀에서 보물일까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인문학이란 그야말로 문, 사, 철을 합친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 예술과 미적 취향을 다룬 미학을 함께 넣어야겠지만. 미학을 미술학으로 혼동하기 쉽지만, 또 흔히 철학의 한 분야로 잡기도 하지만, 문학 분야와도 긴밀하게 접촉하지요. 문학, 역사, 철학은 오늘날 갈라놓아 그렇지 그렇게 서로 명료하게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억지로 갈라놓고 보자면 이렇습니다. 역사가 전체의 기반이 되지요. 역사적 배경이 없는 문학 연구나 철학 연구란 지구라는 발판을 떠난 문학과 철학이나 한 가지입니다. 참을 추구하는 철학이 논증의 방식으로 가장 심오한 발언들을 하지만, 위대한 문학작품은 감각의 방식으로 철학과 아름다움을 합쳐서 안에 지닙니다.
부르크하르트의 책들은 이런 인문학의 정수를 모아놓은 것 같은 특성을 보입니다. 인문학의 어느 한 분야나 작은 곁가지가 아니라 정통으로 정면대결을 해서 보여줍니다. 역사를 관찰하는 그의 통 큰 눈길은 역사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또 신학을 깊이 연구했던 그가 철학을 몰랐던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앞서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그의 역사연구에는 어디서나 그 분야 학자 뺨치는 문학과 미술 관찰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방에서 얻게 되는 역사 인식과 풍부한 지식, 그리고 그 독특한 문체. 이걸 두고 ‘인문학의 보물’이라는 말로밖에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방대하고 어려운 일들을 끊임없이 하고 계십니다. 뭐랄까요. 당신 자신의 숙명처럼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 부르크하르트 (세계 역사의 성찰)가 갖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저 말입니까? 글쎄요. 저는 인식과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인식과 아름다움을 가장 정교하게 표현해주는 것은 언어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런 것에 홀린 매혹된 영혼이라고 느낍니다. 매번 그런 건 아니고 그런 순간들이 있다는 거죠. 그런 순간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요.
이 책은 다시 읽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읽는 것 아닙니까? 이 시대에 안 맞는 것 같은 ‘거대담론’을 우리 새대 속에 던져보고 싶었어요. 내가 매혹되어 있으니까 아마 남들도 그렇게 홀리지 않을까, 이렇게 망상을 품어보는 거죠.
우리는 우리 조선 사람이 세계를 향해 발언할 것이 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저는 과거에 이미 세계 일류의 학자들이 발언한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관찰의 능력’과 ‘표현의 능력’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부르크하르트가 천재였다고 해도 그 이전의 학문적 전통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러니까 관찰의 내용뿐 아니라 그 표현의 힘도 전통의 일부입니다. 엄청난 정신적 전통이죠. 우리 학자들이나 인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거 안 읽어도 될까요? 뭐 전 국민이 읽어야 할 책이라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부르크하르트는 문화사가, 예술사가, 혁명사가로 이야기합니다. 관찰과 관조에 대한 능력은 예술적 감각과 통찰력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적어도 그의 경우에는 말이지요. 그가 역사와 예술작품을 관찰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예술적 감각 및 능력이 인식의 방식으로 발현되었다고 느낍니다.
.부르크하르트는 혁명적인 변혁들이 전개되고 있던 시대를 살면서도 시대적 이해관계에 빠지지 않고 초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말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부르크하르트의 ‘위대한 개인’에 관심이 많으셨지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위대한 개인의 특성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관찰이 들어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식을 위대하게 키우고 싶은 열망이 특히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나 세계적인 과학자, 스포츠맨 등등 세계적인 위대성을 열망하지 않나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정말 그런 결실 비슷한 것을 볼 때도 있지 않습니까?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요.
그래서 세계 역사를 관찰한 학자가 말하는 ‘위대한 개인의 특성이 무엇이고, 위대한 지도자란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일까’를 교육열 높은 사람들이 좀 알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또한 정치 지도자들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대성은 타고난 부분이 꽤 큰데다가, 잘 읽어보면 궁극적으로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명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희생적인 측면이 너무 커서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자신의 명성까지도 포기해버리는 희생이지요. 많은 학자나 예술가 지망생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그렇게 흐지부지 스러져가지 않았습니까? 능력이 부족해서, 시대적 운이 없어서, 또는 그냥 원래 그런 거라서 말입니다. 이런 자기희생을 강조하기에는 우리는 좀 현세적인 사람들 아닙니까?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제가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부제로 표현된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 항상 있는 것, 전형적인 것에 대하여’입니다. 이런 것들을 과거의 문화 성과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편집자인 저보다 훨씬 깊이 들여다본 안인희 선생님께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어느 대목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전부 다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번역하느라 고생할 때는 흥미를 싹 잃어버린 순간도 있었지만. 가장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헤겔 역사관과의 차이 부분입니다. 헤겔 역사철학은 흔히 기독교 역사관이라고도 불리지요.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세계이성, 또는 절대정신이 역사의 시작과 끝을 만들어내고 또 역사의 전체 흐름을 이끌어가는 거니까요. 절대정신을 신이라고 바꾸면 기독교 세계관이 나타납니다.
역사철학을 거부하고 부르크하르트가 생각하는 것이 역사란 처음도 끝도 없이 중간뿐이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신이 빠진 역사에서 결국은 도덕성이 판단의 잣대가 되고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동아시아 전통의 역사관과 맥이 닿는 부분이 아주 크다고 느껴졌거든요.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이 없는 중국과 한국에서―일본은 잘 모르겠고―그동안 역사의 판결이란 신의 판결이나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조선왕조실록을 그토록 성실하게 기록한 조상들의 행적을 보십시오.
이렇게 보면 이 조용한 스위스 교수님이 우리에게는 전혀 낯선 방식으로 발언한 내용이 근본적으로는 우리 동양 사람들의 사유내용과 아주 닮았다는 뜻인데요. 책 맨 앞에서 헤겔 역사철학에 멋들어지게 주먹 한 방 날리고 관찰을 시작한 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책의 전체 내용이 꽤 낯선 것인데도 친숙하게 느껴지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저도 헤겔의 발상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몹시 못마땅하던 참이었거든요.
.우리 사회에 거대담론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5000년 역사에 대한 관찰을 담은 이런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에 어떤 여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런 건 그냥 일시적인 유행일 뿐이지요. 여기 나오는 것 같은 거대담론이 완전히 없어지는 경우가 있을까요? 부르크하르트의 생각처럼 따지고 보면 인류 전체가 한 생명체라는 건 우리가 잊고 있어도 언제나 사실일 텐데요. 공상과학 영화에도 나오지 않나요?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지구인들이 한 덩어리가 되던 걸요.
한 생명체인 인류를 바라보는 눈길을 작게 좁히면 인간이 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던가요? 열심히 돈만 보고 달리다가도 덜컹 멈추어 서서 ‘그런데 내가 누구지? 왜 이러고 살지?’ 하고 묻는 존재지요. 여기서 조금 더 크게 나가면 결국 부르크하르트의 거대담론에도 도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계속 걸어온 길을 앞으로도 꾸준히 가실 것 같은데요. 계획들을 밝혀주십시오.
-도이치 정신의 뿌리에 해당하는 북유럽 신화와 중세 도이치 문학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른바 ‘콘텐츠’의 뿌리이기도 하지요. 이 부분은 도이치 낭만파 (1795~1850) 작가와 학자들이 밝혀놓은 내용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전반부 도이치 낭만주의에 대한 전체적인 소개도 꼭 필요할 것 같아요. 도이치 낭만주의는 도이치 문화 전성기의 철학, 문학, 음악의 역사입니다. 이미 나온 책들인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나 《북유럽 신화》 등이 크게 보면 이 틀 안에 들어가지요.
더 나이 들면 고대 그리스 문학과 역사에 파묻혀 지낼 생각입니다. 고대 그리스 말을 공부해 두었어요. 지금도 조금씩 계속하고 있지요. 고대 그리스 정신세계에서 정신의 낙원을 봅니다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실제로는 상당히 끔찍한 생활이었다고 합니다만).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이 정신의 낙원에 들어갈 생각이지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