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송경령 평전
장롱, 존 핼리데이 / 지식산업사 / 1992.3.1
손문의 부인으로 잘 알려진 중국혁명에 크게 공헌한 인물 송경령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책. 우리가 몰랐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드러내어 송경경이라는 한 여성을 충분히 이해시켜 줄 뿐 아니라,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송경령의 생애와 활동에 관련된 많은 사료들을 이용해 묘사했다.

○ 목차
- 유년 시절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 시절
- 망명의 시절
- 장개석 통치하의 상해
- 항일전과 내전
- 인민 공화국
- 문화 혁명과 만년
○ 저자소개 : 장롱, 존 핼리데이
- 장롱
주요저서로 <송경령 평전>이 있다. - 존 핼리데이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의 선임 객원 특별연구원으로 재직하였으며 8권의 책을 집필하거나 편집했다. - 역자 : 이양자
부산 출신(1941년생), 경남여고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 문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동양사 전공) 문학석사
영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동양사 전공) 문학박사
2019년 현재 동의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전 중국사학회 회장, 현재 고문
전 한중인문학회 고문
중국근현대사학회, 동양사학회 평의원
여성문제연구회 부산지회 명예회장
저서: <송경령 연구>(1998), <역사를 움직인 중국 여성들>(2014), <자성의 길목에서>(2017), <20세기 중국을 빛낸 자매, 송경령과 송미령>(2019) 등

○ 출판사 서평
역사인물 교양서. 해당 인물이 어떻게 삶을 살아갔는지, 그 인물의 삶은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손문의 부인으로 잘 알려진 중국혁명에 크게 공헌한 인물 송경령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책. 우리가 몰랐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드러내어 송경경이라는 한 여성을 충분히 이해시켜 줄 뿐 아니라,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송경령의 생애와 활동에 관련된 많은 사료들을 이용해 묘사했다.
○ 독자의 평
중국여성에 관한 발표를 준비하면서 한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중국의 양심’, ‘중국의 잔다르크’, ‘중국의 미완성 혁명의 양심’, ‘기회주의라는 것과는 너무 무관하게 산 여인’, ‘이보다 더 훌륭하게 살수는 없었다’ 등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중국 여성 송경령이다. 송경령에 대해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가 발견한 책 역시 그녀의 이름 앞에 20세기 중국을 빛낸 위대한 여성이란 조금은 거창해 보이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그녀에 대한 화려한 평가들을 살펴보면서 송경령에 대해 몇 가지 궁금증을 가질 수 있었다. 과연 어떤 인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있을까? 송씨자매로 유명한 송경령의 언니를 ‘부를 사랑한 애령’, 그녀의 동생을 ‘권력을 사랑한 미령’ 이라고 부르면서 이와 대비되게 송경령은 ‘중국을 사랑한 경령’ 이라고 중국인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아버지뻘 되는 나이의 손문과의 로맨스는 진정한 사랑이었을까? 또한 손문의 후광이 없었다면 과연 송경령은 그만큼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송경령」을 읽어가면서 천천히 해소되었다. 이는 송경령의 생애자체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책의 저자 이스라엘 엡스타인의 애정 어린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1915년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으로 어린시절부터 중국 천진에서 살았다. 1931년 영국계『천진타임즈』에서 기자활동을 시작해 1937년 미국 UP통신사 기자로 국민당 종군기자가 되었고, 1950년대 말에는 중국국적을 획득하였다. 그와 송경령의 관계는 1939년에 이루어진다. 당시 UP통신사는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할 것이라 판단하여 엡스타인을 포함한 중국담당기자를 해고하였다. 이 때 엡스타인은 송경령의 추천으로 영자신문인 홍콩일간신문사에서 편집일을 담당했고 전시구제 활동의 매개체로서 송경령이 주도하여 결성한 보위중국동맹 홍보를 담당하여 『보위중국동맹신문통신 (China Defence League Newsletter)』을 발행하였다.

- 유년 시절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1893~1915)
송경령은 1893년 1월 27일, 아주 유별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서구적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그녀의 아버지인 찰리 송 역시 어렸을 때부터 외국을 전전하신 분이었다. 찰리송은 원래 성직자였지만 그 직업을 그만두고 매판자본가로 사업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었고 경령은 집은 당시 중국농민들과는 달리 아주 부유했다. 그녀는 6남매 가운데 두 번째였으며 딸 셋중에서는 가운데였다.
1908년 경령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미국으로 보내졌는데 처음은 뉴저지주의 서미트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조지아주의 메이컨시에 있는 웨슬리안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경령은 미국의 환경 속에 빠져들지 않았고 미국언어나 풍습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그녀는 철학을 전공하였고 얼마 동안 학교 잡지의 문학 편집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중국의 운명과 세계의 관심사라는 커다란 문제들에 깊이 빠졌었다. 그녀가 생각한 생기에 가득 찬 국가의 표본은 서유럽이었고 서양 국가들에 대해서 거의 꿈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송경령의 혁명에 대한 접근은 그 당시는 비폭력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호소하였으며 그것은 파업이나 폭동, 정치적 혼란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더 보편적인 교육과 계몽에 의해서 확보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중국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이상의 것이 필요하였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그녀가 골라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중매결혼제도였다. 그 당시 중매결혼은 모든 중국 사회의 기본적인 관습이었고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경령은 서구식 해방 관념을 가지고 이제도 맞서 싸웠다.
중국은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패배를 거듭하였고, 수많은 굴욕과 광범한 영토의 상실과, 민족의 주권과 경제권을 상실한 후 청조는 내부까지 타락해 있었으며 효과적인 내부 개혁을 달성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그리하여 급진주의자들은 청조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혁명을 지도하게 된 사람이 손문이었다.
국내의 여러 가지 요인들과 국제적 간섭의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아 손문은 일본이 중국을 공격했던 1894년에 혁명을 구체화시켰고 그 다음해 귀국하여 혁명 봉기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손문은 하와이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경령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고 정열적인 방법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고 이는 손문의 낙천주의와 곧잘 어울렸다. 그리하여 경령은 1913년 졸업을 함으로써 손문을 만날 수 있었고 1915년 10월 25일 두 사람은 도쿄에서 결혼을 하였다.
녀는 손문의 혁명운동에 대한 거리낌없는 정열을 가지고 완벽하게 그에게 헌신하였고 그의 계획과 희망과 이상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센세이셔널한 것이었고 반대를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긍정적인 반응이 훨씬 더 강했다. 이미 부인과 자식이 있었던 손문과의 결혼은 봉건적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집을 나간 경령의 행동은 여성해방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또한 경령의 외모적 특성도 중국 국민들에게 민족의 혁명지도자의 아내로서의 올바른 이미지를 제공해 주었으며 손문의 망명 시절에 그녀가 손문과 결혼한 사실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 운동에 헌신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경령을 훌륭하고 위엄있는 ‘first lady’로 환영해주었다.
손문과의 결혼은 경령을 중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졌으며 험난한 인생 여정을 밟게 하였다. 그녀는 손문의 부인 자격으로 난공불락의 지위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용기나 손문이 주장했던 여러 가지 원칙에 대한 그녀의 헌신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던 그녀 자신의 힘으로도 얻어냈던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