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신앙과 지식 : 세기와 용서
자크 데리다 / 아카넷 / 2016.3.7

‘신앙과 지식 : 세기와 용서’는 우리 시대가 직면한 화두인 ‘종교’와 ‘용서’로 포스트모던의 시간과 공간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신앙과 지식’은 1994년 2월 28일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종교’에 관해 행한 발표문이고, ‘세기와 용서’는 미셸 비비오르카 (Michel Wieviorka)와 ‘용서’를 주제로 나눈 대화문이다.
– 우리 시대의 화두 ‘종교’와 ‘용서’로 성찰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와 공간
이 책은 데리다 후기 철학의 주요 주제를 다루는 두 개의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신앙과 지식’은 1994년 2월 28일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종교’에 관해 행한 발표문이고, ‘세기와 용서’는 미셸 비비오르카(Michel Wieviorka)와 ‘용서’를 주제로 나눈 대화문으로 1999년 12월 르몽드 데 데바(Le Monde des debats) 9호에 실린 글이다.
‘신앙과 지식’은 데리다가 ‘종교적인 것의 회귀’라는 우리 시대의 현상을 ‘자가면역(auto-immunite)’의 논리에 입각해 상세하게 정식화한 첫 번째 책이라는 점에서, ‘세기와 용서’는 선물·정의·환대 등 데리다의 윤리적 입장을 대변하는 주요 키워드에 비해 국내에 소개된 적이 드문 ‘용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출간의 의의가 크다. ‘신앙과 지식 : 세기와 용서’는 우리 시대가 직면한 화두인 ‘종교’와 ‘용서’로 포스트모던의 시간과 공간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 목차
.옮긴이 해제: 번역가의 독서 카드 ― 데리다의 오늘, 오늘의 데리다
.신앙과 지식 ― 순전한 이성의 한계에 자리한 ‘종교’의 두 원천
.세기와 용서 ― 미셸 비비오르카와의 대담

○ 저자소개: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년 알제리(Algérie)의 수도 알제(Alger)의 엘비아(El-biar)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프랑스 시민권자로 태어나 불어로 교육을 받으며 지역의 다른 언어에 둘러싸여 자랐다.
19살에 소위 메트로폴이라 불리던 프랑스, 즉 ‘식민 본국’으로 건너와 수험 준비를 시작해 1952년 고등사범학교(ENS)에 입학한 후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를 만났다.
장 이폴리트( Jean Hyppolite)를 지도교수로 「후설철학에서 기원의 문제(Le Problème de la genèse dans la philosophie de Husserl)」로 논문을 썼다(Paris, PUF, 1990).
1953년에서 1954년 쓰여진 데리다의 이 첫번째 글은 데리다의 초기연구의 기반으로 볼 수 있다. 데리다는 ‘기원(genèse)’을 주제어로 삼아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사유에서 시간, 변동, 역사에 대한 고려가 초월적 주체의 구성, 감각과 감각 대상- 특히 과학적 대상-의 의도적 생산에 불러온 수정과 복잡화를 분석한다.
이후 데리다는 후설의 사유에 관해 『기하학의 기원(Introduction à L’origine de la géométrie)』(Paris, PUF, 1962)(후설의 원고 번역과 해설),『목소리와 현상(La voix et le phénomène)』(Paris, PUF, 1967)을 썼다.
1957년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하고 60년부터 64년까지 소르본에서 강의하며 바슐라르(G. Bachelard), 컹길렘 (G. Canguilhem), 리쾨르(P. Ricoeur), 장 발( J. Wahl)의 조교로 일했다. 이 무렵 「텔켈(Tel Quel)」에 글을 게재하고 교류하기도 했다. 1964년 고등사범학교의 철학 교사로 임명돼 1984년까지 일종의 조교수 자격으로 강의했다.
폴 드만(Paul de Man)과의 인연으로 예일(Yale)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시작한 후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국제 철학학교(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설립에 참여했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책임자로 있었다.
1984년부터 데리다의 마지막 세미나가 되는 ‘짐승과 주권(La bête et le souverain)’(2001-2002, 2002- 2003)까지 사회과학고등연구원(L’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강의했다.

주요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기하학의 기원 (배의용 역, 2008) Introduction(et traduction) à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 E. Husserl, PUF, 1962.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응권 역, 2004) De la grammatologie, 1967, Les Éditions de Minuit.
.글쓰기와 차이(남수인 역, 2001)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1967, Seuil.
.입장들 (박성창 편역, 1992) Positions, 1972,Les Éditions de Minuit.
.해체 (김보현 역, 1996) La dissémination, 1972, Seuil.
.에쁘롱 – 니체의 문체들 (김다은, 황순희 역, 1998) Éperons. Les styles de Nietzsche, 1972, Champs Flammarion (Voir Friedrich Nietzsche
.시선의 권리(신방흔 역, 2004) Droit de regards, éditions de Minuit, 1985 ; nouvelle édition :Les Impressions Nouvelles
.시네퐁주(허정아 역, 1998) Signéponge
.정신에 대하여(박찬국 역, 2005) De l’esprit, 1990, Galilée.
.다른 곶(김다흔, 이혜지 역, 1997) L’autre cap
.마르크스의 유령들(양운덕 역, 1996) Spectres de Marx, 1993, Galilée. (Voir Karl Marx
.법의 힘(진태원 역, 2004) Force de loi
.에코그라피 (김재희 외 역, 2002) Échographies – de la télévision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진태원, 한형식 역, 2009)Marx en jeu (avec Marc Guillaume), 1997, Descartes & Cie.
.환대에 대하여(남수인 역, 2004) De l’hospitalité(avec Anne Dufourmantelle), 1997, Calmann-Lévy.
.불량배들 –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이경신 역, 2003) Voyous
.이론 이후 삶(강우성 역, 2007) / Life.after.theory: Jacques Derrida, Frank Kermode, Toril Moi and Christopher Norris
– 역자 : 신정아
프랑스 파리3대학(소르본 누벨)에서 [17~18세기 라신 작품 수용에 관한 사회시학적 연구(1659~1763)]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프랑스 문학, 프랑스 예술 입문, 프랑스 영화 읽기, 퀘벡 연구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주요 관심은 현대 사회와 문화를 비평적으로 읽고 분석하는 것이다. 저서로 [바로크](2004), [노랑신호등―포스트모던 비평의 지점](2012, 공저) 등이, 역서로 [번역가의 초상](2007), [페드르와 이폴리트](2013), [정념의 기호학](2014, 공역)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La condition humaine dans Le Temps sauvage: du temps sauvage au temps humain](2012),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에 나타난 폭력과 윤리의 문제](2013), [라신과 바로크](2015)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오늘날 종교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 반작용하고 있는 원격과학기술과 동맹을 맺고 있다. 종교는 한편으로 진정한 세계라틴화이다. 그것은 자본과 미디어에 의해 원격적으로 전파되는 지식을 생산하고, 받아들이고 활용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황의 방문과 세계적인 이슈화도, ‘살만 루슈디 사건’의 국가 간 공조도, 전 세계적 테러리즘도 이런 리듬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징후들을 무한히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곧바로, 동시에 반작용한다. 종교는 자신을 자신의 모든 고유한 장소로부터, 사실상 장소자체로부터, 자신의 진실의 장소-가짐/일어남으로부터 쫒아내기 위해서만 자기에게 이 새로운 권력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종교는 이러한 모순적인, 즉 면역적이면서 자가면역적인 이중의 구조에 따라서 자신을 위협하기 위해서만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맞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한다.” —「신앙과 지식」중에서
“바로 거기에서 메마르고 무자비하며 가차 없는 형식으로 기술할 수 있는 아포리아가 나옵니다. 즉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불가능성으로 자신을 알려야만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용서는 오직 불가능을 행하기 위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세기와 용서」중에서

○ 출판사 서평
[신앙과 지식]
– 종교전쟁과 종교적인 것의 회귀
1995년 7월부터 10월까지 관용의 나라 프랑스 파리에서 모두 8건의 지하철 테러가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5년 11월 파리 11구 바타클랑 극장에서 130여 명의 사상자를 낸 테러가 또다시 발생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테러 사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천명한 이래로, 종교는 이성과 빛, 계몽과 거리가 먼 것으로, 심지어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런데 기계와 기술, 과학기술, 원격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한 오늘날, 다시 말해 종교를 말하기에는 너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 시대에 종교가 되돌아오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도 너무나 끔찍한 형태로? 오늘날 전쟁은 다시 종교전쟁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종교전쟁은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부추긴다는 점에서 점점 더 가열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종교적인 것의 회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에서 대면하고자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회피하지 않을 문제 중 하나는 종교의 문제다.”
– 데리다의 해체는 부정신학의 현대적 판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오늘날 다시 종교에 대해, 아니 보다 정확히 종교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근원적 추상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데리다의 이런 조치는 부정신학을 현대로, 후기근대로 다시 소환한다. 신을 긍정의 방식이 아닌 부정의 방식으로 규정하려는 부정신학의 현대적 판본은 어떤 형태로 전개되는가? 데리다는 종교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신중함, 조심함, 존중 혹은 삼감(religio)의 태도를 갖추고 이른바 ‘사막 안의 사막’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즉 종교를 그것의 역사로부터, 그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일체의 지식으로부터 떼어내 ‘종교적인 것’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사막 안의 사막은 모든 기원의 장소, 혹은 장소 자체의 기원 곧 코라에 다름 아니다. 이곳에서 서로 절대 혼동되지 않으면서도 교차하고 얽히고 전염되는 종교적인 것의 두 기원, 두 근원, 두 원천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아무런 의심 없이 라틴어(religio)로, 대개의 경우 미국식 영어(religion)를 통하여 감히 말하고 있는 종교란 무엇인가? 데리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종교(religion)는 대답(response)이며, 책임(responsibility)이다. 요컨대 종교는 타자에게, 타자 앞에서 책임을 떠안는 것이며, 이를 약속하는 것이다. 약속의 행위는 약속의 보증을 담보해야 한다. 그리고 약속의 보증이라는 수행적 행위는 거의 자동적으로 신을 산출해내게 된다. 신탁적 행위 속에서 신은 자동적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신의 이름이 거명되었는가 아닌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이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의 문제를, 종교와 과학을 문제를 다시 사유하고자 하는 부정신학의 포스트모던적 장소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오늘날 종교 혹은 종교적인 것의 회귀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종교를, 비판 혹은 과학과 종교를, 과학기술적인 근대성과 종교를 대립시켜온 순진한 믿음을 버려야만 한다. 종교와 이성은 동일한 원천에서 출발해 함께 발전했기 때문이다.
– 디지털 문화와 종교
최근 tvN에서 방영 중인 프로그램 〈오 마이 갓〉 시즌 3의 부제가 “신부, 스님, 목사의 세상살이 응답소”인 것처럼 오늘날 종교행위가 상연되는 장소는 스크린이다. 데리다는 디지털문화, 제트, TV가 없다면 오늘날 그 어떤 종교적인 현시도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현대인의 일상은 종교와 무관하다. 이 일상을 채우는 것은 디지털문화, 제트, TV다. 여기가 바로 데리다가 종교적인 것의 회귀를 재발견하고자 한 후기근대의 지점이다. 유튜브가 없었다면 과연 IS가 현재의 모습으로 출현하고 활동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종교를 사유한다는 것은 신앙과 이성의 위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신성성과 기계성의 공모를 풀어헤치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 공모의 가장 완벽한 형태가 세계화 곧 ‘세계라틴화’이다. 이 신조어는 세계화는 라틴화이며 라틴화는 기독교화이고, 기독교는 신의 죽음을 정식화한 최초의 종교임을 함의한다. 오늘날 죽은 신을 다시 불러내는 것은 기계다. 그런데 기계는 신을 해치기 위해서만 신을 풀어놓는다. 데리다에 따르면 “종교는 이러한 모순적인, 즉 면역적이면서 자가면역적인 이중의 구조에 따라서 자신을 위협하기 위해서만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맞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한다.” [신앙과 지식]에서 데리다가 제기한 질문을 세속화시켜보자. 오늘날 가장 완벽한 방어 시스템은 무엇일까? 그 방어 시스템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런데 그 시스템이 면역적일 뿐만 아니라 자가면역적이라면? 신성성과 기계성의 공모로 이루어진 우리 시대의 세계상은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지배하는 스크린의 세계와 무척 닮아 있다.
– 세기와 용서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한다.
데리다는 세기말 전(全)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용서의 담화가 갖는 구조를 드러낸다. 그는 얀켈레비치가 [공소시효 없음]에서 제기한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라는 개념을 용서의 맥락에서 재조명하면서, 용서의 한계에 대해,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논한다. 그에 따르면 용서는 모든 교환의 조건적 논리에서 벗어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조건 없이, 절대적으로 용서할 때만 그 이름에 합당한 것이 된다. 즉,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하며, 용서 불가능한 것만이 용서를 부르는 유일한 것이다.
– 영화 〈귀향〉의 열풍과 절대적 희생자 만들기
그런데 왜 이 문제가 세기의 문제인가?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한 조건은 다름 아닌 용서이다. 그렇다면 예컨대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는 이러한 조건에 부합한 것인가? 데리다는 이러한 계산이 용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새로운 시대는 계산을 통해 여는 것이 아니라 계산 불가능한 것으로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용서 담화의 문제는 무엇인가? 데리다는 ‘절대적 희생자 만들기’라는 음모를 파헤친다. 절대적 희생자는 참된 용서의 기회를 박탈당한 희생자다. 최근의 세계대전 이래로 지정학적 무대에서는 참회와 고백과 용서 혹은 사과의 장면이 속출하고 있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공식적으로 용서하는 가운데 침묵당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절대적 희생자다. 국가 혹은 공적기구라는 익명의 실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할 권리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한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군가에게 용서할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피해자일 뿐 제3의 기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주권 없는 용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분노의 시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용서가 더욱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구에 어떻게 부응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침묵당한 절대적 희생자에게 어떻게 목소리를 되돌려줄 것인가? 데리다는 [세기와 용서]에서 용서라는 이름에 합당한 ‘순수한’ 용서의 가능성을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권력이 없는 용서, 즉 무조건적이지만 주권 없는 용서이다. 무조건성과 주권을 분리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물론 오늘내일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비록 사유를 위한 꿈일지라도 불가능의 가능으로서 광기에 준하는 용서의 담론을 펼쳐보는 것은 데리다의 말처럼 어쩌면 그렇게 미친 짓은 아닐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