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아침놀
F.니체 / 책세상 / 2004.4
‘아침놀’은 니체가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에서 수행하는 도덕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본격적으로 개시하는 책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아침놀>과 더불어 도덕에 대한 나의 전투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니체는 이 책에서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필생의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면서 기존 도덕 가치들의 구속에서 벗어나 ‘이제까지 금지되고 경멸되었으며 저주받았던 것’을 긍정한다.
○ 목차
서문
제1권
제2권
제3권
제4권
제5권
주
해설
연보
○ 책 속으로
그대들은 그대들의 내면에서 역사를, 큰 동요를, 지진을, 오랫동안 지속되는 큰 슬픔을, 섬광 같은 행복을 체험했는가? 그대들은 크고 작은 바보들과 함께 바보로 존재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선량한 인간들의 광기와 아픔을 정말 체험했는가? 그리고 최악의 인간들의 아픔과 행복을 체험했는가? 그렇다면 내게 도덕에 대해 말해도 좋다. 하지만 그런 적이 없다면 내게 도덕을 말하지 말라! ― 아침놀
풍습은 이익이 되거나 해를 끼친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예전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느끼는 풍습에 대한 감정은 그러한 경험 자체가 아니라 풍습의 오래됨, 신성함, 자명함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감정은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고 풍습을 수정하는 것에 반발한다. 즉 윤리는 새롭고 좀더 나은 풍습의 발생을 저해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다. ― 아침놀, ‘풍습과 풍습에 대한 감정’
기원전 수천 년 동안, 그리고 이후 대체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모든 공동체들은 ‘풍습의 윤리’에서 비롯된 저 가공할 중압속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이단적인 사상과 가치 평가, 그리고 충동이 거듭 출현할 때마다, 이는 무시무시한 현상들을 수반하면서 일어났다. 거의 모든 곳에서 새로운 사상에 길을 열어주면서, 존중되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은 광기다.
그대들은 왜 그것이 광기여야만 했는지 이해하는가? 날씨와 바다의 악마적인 변덕처럼 소리와 몸짓이 전율을 일으키는 불가해한 것, 그 때문에 그러한 날씨와 바다와 유사하게 경외할 만하고 관찰할 가치가 있는 그런 어떤 것을 그대들은 이해하는가? 간질 환자한테서 나타나는 마비 증상과 거품처럼, 전혀 자유의지를 갖지 않은 상태의 징후를 현저하게 보이게 하면서 광인을 이처럼 신성의 가면이자 확성기로 나타나게 하는 어떤 것을? 새로운 사상의 소유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외경과 두려움을 갖게 하고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게 하면서 그를 새로운 사상의 예언자이자 순교자가 되도록 몰아대는 어떤 것을?
오늘 날에도 여전히 천재에게는 한 알의 소금 대신 광기를 일으키는 약초가 주어진다고 거듭 이야기되지만, 이전의 모든 인간들은 광기가 존재하는 곳에는 약간의 천재성과 지혜, 즉 사람들이 서로 속삭이는 것처럼 ‘신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였다. 아니, 사람들은 속삭이는 것을 넘어 강력한 이러한 사상을 표명했다. “광기를 통해 그리스는 최대의 자산을 갖게 되었다”라고 플라톤은 고대의 인류 전체와 함께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어떤 윤리의 질곡을 부수면서 새로운 법을 부여하려는, 거역하기 어려운 유혹에 사로잡혔던 저 탁월한 모든 인간들에게는 그들이 실제로 미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을 미치게 하거나 미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종교적 영역이나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실로 모든 영역의 혁신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시의 운율을 혁신했던 사람들마저 광기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
“미치지도 않았고 미친 것처럼 보이게 할 용기도 없을 경우 어떻게 자신을 미치게 할 것인가?” 고대 문명의 중요한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무서운 사상을 따랐다. 이와 관련해 감정을 깨끗하게 하고 생각과 기도를 성스럽게 하는 것 외에 여러 비결들과 식이 요법에 대한 은밀한 가르침이 전해졌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마술사가 되기 위해, 중세 기독교인들이 성자가 되기 위해, 그린란드인들이 안게코크가 되기 위해, 브라질인들이 파헤가 되기 위해 취했던 처방은 본질적으로 같다.
즉 무의미한 단식, 성욕의 지속적인 억제, 사막으로 가거나 산에 오르거나 기둥에 오르는 것, ‘멀리 호수가 보이는 오래된 버드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황홀경이나 정신의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는 처방들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시대의 가장 생산적인 인간들이 아마 겪었을 가장 쓰라리면서도 황량하기 짝이 없는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누가 감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인가? 저 고독하고 어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한숨을 누가 감히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아아, 그대 하늘에 있는 자들이여, 광기를 주소서! 마침내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광기를 주소서! 황홀경과 마비, 섬광과 암흑을 주소서! 일찍이 죽어야 할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 없는 혹한과 뜨거운 열로 나를 겁에 질리게 하소서! 포효하며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형태로 나를 겁에 질리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울부짖고 신음하게 하시고 동물처럼 기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게만 하소서! 의심이 나를 파먹어갑니다. 나는 법을 파괴했습니다. 시체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처럼 법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내가 법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면, 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타락한 자입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정신이 당신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내가 당신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디 나에게 증명해주소서, 광기만이 나에게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은 지나칠 만큼 자주,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 그 목표에 도달했다. ― 아침놀, 도덕의 역사에서 광기의 중요성
수녀의 순결, 그녀는 그 얼마나 강한 비난의 눈길로 다르게 사는 여인들의 얼굴을 쳐다보는가! 그녀의 눈에 얼마나 많은 복수와 쾌감이 존재하는지! 주제곡은 짧고 변주곡은 수없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쉽게 지루해지지는 않는다. 우월의 도덕은 근본적으로 세련된 잔인성에 대한 쾌감이다. ― 아침놀, ‘고상한 잔혹함’
첫째,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피하면서 가능한한 오랫동안 불만족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충동을 약화하고 시들게 할 수 있다.
둘째, 충동을 만족시킬 때 자신에게 엄격한 규칙을 부과할 수 있다. 이렇게 충동 자체에 규칙을 부과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시간을 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사람들은 더 이상 충동에 의해 교란되지 않는 시간들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통해 첫 번째 방법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의도적으로 충동을 거칠고 자유분방하게 만족시키면서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역겨움을 통해 충동을 이겨내는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경우 죽을 때까지 말을 몰아대다가 결국 자신의 목마저 부러뜨리고 마는 기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방법에서는 그 기수처럼 되는 것이 보통이다.
넷째, 지적인 책략이 있다. 매우 고통스러운 생각을 만족 전체와 확고하게 결부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약간 연습한 후에는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생각 그 자체가 늘 즉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다섯째, 무언가 특히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을 자신에게 부과하거나 의도적으로 새로운 자극과 즐거움에 몸을 맡기는 방식으로 생각과 육체적인 힘의 움직임을 다른 길로 유도함으로써 많은 힘의 방향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
여섯째, 육체와 정신의 조직 전체를 약화시킴으로써 개별적인 격렬한 충동을 약화한다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예를들어 고행자처럼 자신의 감각을 철저히 굶기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육체와, 종종 자신의 지성도 함께 굶김으로써 육체와 정신을 쓸모없게 만드는 사람의 방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떤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 이 방법으로 효과를 거두는가 못 거두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오히려 이 과정 전체에서 우리의 지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격렬한 충동의 경쟁자인 다른 충동의 맹목적 도구일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이 안식에 대한 충동이든지, 치욕이나 다른 나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이든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충동의 격렬함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사실은 다른 충동에 대해 어떤 충동이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충동의 격렬함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충동과 똑같이 격렬하거나 훨씬 더 격렬한 다른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의 지성이 어느 쪽이든 편을 들어야만 하는 투쟁이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 아침놀, ‘충동을 극복하기 위한 여섯 가지 방법’
현재 정말로 활동적인 인간들은 마음속으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중간 정도 수준인 좀더 온순하고 좀더 관상적인 사람들은 오직 (현재에 맞게) 조정된 기독교, 즉 놀라울 만큼 단순화된 기독교를 믿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사랑 속에서 모든 것이 협력해 선을 이루게 하는 신, 행복과 마찬가지로 덕을 우리에게 주거나 빼앗으면서 전체적으로는 항상 올바르고 선하게 진행되게 하고 우리가 삶에 대해 불평하거나 비난할 아무런 근거가 없게 하는 신 .
간단히 말해 신성으로까지 높여진 체념과 겸손ㅡ 이것이 여전히 기독교에 남아 있는 최상의 것이자 가장 생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우리는 기독교가 부드러운 도덕주의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신, 자유, 불사’가 아니라, 오히려 호의와 절도 있는 법도, 그리고 호의와 절도 있는 법도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안락사다. ― 아침놀, ‘기독교가 죽어가는 침대에서’
가련한 인류, 뇌 속의 피가 한 방울 더 많거나 더 적으면 우리의 인생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지고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가 그의 심장을 쪼아 먹는 독수리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것 이상으로 이 한 방울의 피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저 한 방울이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지도 못하면서 ‘악마’라든가 ‘죄’가 원인이라고 생각할 때 가장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다.
육체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자들.- 단지 위, 내장, 심장의 고동, 신경, 담즙, 정액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ㅡ즉 저 모든 불쾌감, 무기력, 과도한 긴장,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계(육체)의 우연성 전체! ㅡ 파스칼과 같은 기독교인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 신인가 악마인가, 선인가 악인가, 구원인가 저주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이 모든 것을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오, 얼마나 불행한 해석가인가! ― 아침놀, ‘가련한 인류, 육체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자들’
○ 출판사 서평
1. 한국 니체전집의 정본을 만나다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계몽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 니체에게서 계몽주의자의 면모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그러나“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간이 지향해야 할 모든 가치 기준을 해체하려는 허무주의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이러한 어려움 역시 니체 철학에 대한 무지와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 이후 수천 년 동안 유럽을 지배한 서구 철학과 기독교의 도덕적 편견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아침놀》 (니체전집 10)에서 우리는‘계몽주의자’니체를 만나게 된다. 이성과 도덕규범을 신성화한 계몽주의를‘계몽’하는 니체의 작업은 도덕규범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도덕의 기원과 도덕 교육,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넘나들며 건강한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아침놀》은 1983년에 청하에서‘서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어 중역본이었던《서광》과 달리《아침놀》은 니체의 원전을 온전히 한국어로 옮겼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한국 니체전집의 정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니체 사상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취지에도 부합하며 독자들은《아침놀》에서 살아 숨쉬는 니체의 정신을 생생히 접하게 될 것이다.
2. 도덕의 근원은 없다 니체 연구자들은 보통 니체의 사상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눈다. 니체가 이성의 과도한 지배를 서양의 문화와 정신이 퇴화된 원인으로 분석하고 바그너의 음악 정신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시기가 첫 번째 단계이고, 예술에 대한 열광적 믿음에서 벗어나 계몽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시기가 두 번째 단계다. 동일한 것의 영원 회귀에 대한 사상과 위버멘쉬 사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세 번째 단계인데, 1881년에 출간된《아침놀》은 두 번째 단계에 속하는 저작이다. 따라서《아침놀》은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선악의 저편》과《도덕의 계보》에 담긴 도덕에 대한 분석과 비판의 서곡이라 할 수 있다. 특히《아침놀》은 알려진 것과 달리 니체가 기존의 모든 가치 기준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니체가 생각한 도덕규범은 인간 세계를 초월한 채 삶의 모든 진리를 제공하는 절대 규범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침에 불과했다. 그런데 수천 년 동안 철학자와 기독교인들은 플라톤이 초월적 가치의 세계인 이데아를 상정한 것처럼 도덕의 근원을 상정하고 인간의 인식 능력이 도달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니체의 도덕 비판은 여기서 시작된다.
3. 도덕적 편견의 어둠을 깨뜨리다 보편타당한 도덕규범의 존재는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신과 도덕의 근원을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죽음으로 끝나는 덧없는 현실을 스스로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 인간들은 결국 가공의 신과 무조건적인 도덕 법칙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니체는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이 신이나 도덕규범에 의지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통찰한다. 신이나 도덕규범에 대한 의지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는데, 사람들은 행여나 신과 도덕의 명령을 어길까봐 불안에 떨며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특히 신과 도덕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은 육체와 대립되는 순수한 정신을 상정함으로써 육체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충동을 억압한다. 병든 인간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과 도덕의 근원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도덕규범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을 얽어매는 양심의 가책도 허위일 뿐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4.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노동자 종교와 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와 가치관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니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고 한탄하며 자본주의 모순의 정곡을 찌른다. 특히 임금이 높아진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노예 상태가 바뀌지는 않는다고 비판한 부분에서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인다. 니체의 자본주의 비판은 그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온 기독교의 신과 절대적 도덕규범이 자본주의의 물신 숭배로 대체되는 현실을 통찰한 결과다. 따라서 니체의 자본주의 비판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된 도덕적 편견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5. 위버멘쉬 사상의 단초,《아침놀》 그렇다면 신과 도덕규범, 자본주의 사회를 모두 극복한 새로운 인간은 어떠한 모습일까? 신이나 도덕규범에 의지하지 않고 이성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충동과 욕망의 자연스러움을 부정하지 않는 인간,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과 용기를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간섭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건전한 접근을 허용하는 인간, 신에 의지해 자신의 행복조차 외부로부터 주어지기를 희망하며 사는 기독교인과 대비되는 인간을 니체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제시한다. 이렇듯 정신뿐 아니라 육체도 함께 건강한 인간상, 정신에 의한 육체의 억압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상은 위버멘쉬 사상의 서광을 비추고 있는 셈이다. 《아침놀》은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피안의 신이나 전통적 도덕규범에 의지해 행복을 추구하는 나약한 현대인에게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니체
독일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20세기를 연 문제적인 철학자이다. 1844년 독일 레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체의 조상은 폴란드 계라고 알려져 있다. 5세 때 목사인 아버지를 사별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집에서 자랐다. 14세에 슐포르타 기숙학교에서 엄격한 고전 교육을 받고 1864년 본 대학에 진학하여 신학과 고전 문헌학을 공부했다. 1865년 스승인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 두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입문했다. 28세 때 최초의 저작『비극의 탄생』을 펴냈으며 이 저작에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가치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의 구분을 통해 유럽 문명 전반을 꿰뚫는 통찰을 제시한다. 1873년부터 1876년까지는 독일과 독일민족, 유럽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며,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새로운 인간형으로 제시한 『반시대적 고찰』을 집필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재직중이던 바젤 대학을 퇴직하고, 이후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요양지에 머물며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1888년 말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니체는 이후 병마에 시달리다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의 정신병을 두고 원인이 분분하지만 젊었을 적 얻었던 매독이 발전되어 정신분열로 이어졌다는 설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까지도 그의 유고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 유고들은 니체연구 학자들에 의해 현재 독일에서 니체전집으로 출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니체가 사망한 해인 1900년은 특별한 상징을 지닌다. 19세기를 마감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20세기를 새롭게 연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실제로 니체는 ‘사후, 나는 신화가 될 것이다’는 예언을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이 되었다.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프란츠 카프카 등 니체를 선망하는 일련의 작가들이 니체의 사상을 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카프카가 니체를 엄청나게 존경했다는 사실과 카프카의 작품 세계는 결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매듭이다. 또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등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니체를 실존철학의 시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자들, 그러니까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 역시 니체를 위대한 사상가로 평하며 저마다 계승 의식을 발현했다. 한편, 한국에서도 니체에 대한 열광은 대단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라는 박상륭 작가의 소설이 출간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니체 전문가로 꼽히는 사람으로는 고병권이 있다. 마지막으로 파시즘에 의한 니체 사상의 오용이 있다. ‘권력’, ‘힘’, ‘미학’, ‘귀족주의’ 등 니체가 중시한 가치를 파시즘이 차용함으로써 모순적이게도 니체의 사상은 파시즘과 나치즘에 의해 선전된 바 있다. 저서로는『니체 최후의 고백』『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피안』『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권력에의 의지』등이 있다. 니체의 작품 세계에서 대표작인『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치는 각별하다. 이 작품은 그의 집필 활동의 정점에 씌여진 것으로, 그의 활동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언 형식의 아포리즘이 니체 저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아포리즘의 절정이다. 반대로 영미철학이 자주 구사하는 식의 논지 전개를 니체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저서가 『도덕의 계보』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한 마디로 요약하기가 불가능하다. 특히 니체 이후, 니체 계승자라고 자처한 학자들이 제각각의 니체를 창조함으로써 니체 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적극적 니힐리스트로 규정하였고, 푸코는 권력-지식 담론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니체는 고정된 가치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기독교적 덕목을 혐오하였다. 니체 사후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니체에 대한 숭배는 끊이지 않는다. 푸코는 ‘앞으로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지만, 여전히 21세기는 니체의 시대가 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