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예수의 의미
톰 라이트, 마커스 보그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1.4.30
역사적 예수 논쟁의 핵심 문제들에 대하여 오늘날 대표적인 예수 연구가 두 사람이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 동창생으로서의 우정을 지닌 채 보수주의 진영과 진보주의 진영을 대표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 목차
1. 예수에 관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 보기 : 자료, 관점, 방법
예수 알기 : 신앙과 역사
2. 예수는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가르쳤는가?
예수의 사명과 메시지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 : 유대교 신비가와 기독교의 메시아
3. 예수의 죽음
예수는 왜 처형되었는가?
신앙의 급소(急所)
4.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다”
몸의 부활의 변혁적 현실
부활절의 진실
5. 예수는 하느님이었는가?
예수와 하느님
예수의 신성(神性)
6. 예수의 출생
동정녀에게서 출생?
출생 이야기의 의미
7. “그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재림 : 당시와 현재
예수의 미래
8. 예수와 기독교인의 생활
복음의 진리와 기독교인의 생활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비전
○ 저자소개 : 톰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N. T. Wright), 마커스 보그

– 저자 : 톰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N. T. Wright)
시대를 선도하는 신약학자, 초기 기독교 역사에 정통한 역사가, 목회 현장과 성도들의 삶에 깊이 관심하는 사제이다. 1948년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BA, DD) 케임브리지, 맥길,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약성서학을 가르쳤으며, 웨스트민스터 참사회원 신학자이자 영국 성공회 더럼 주교를 역임했다. 2010년부터 스코틀랜드 소재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에서 신약학 및 초기 기독교 역사를 가르쳤고, 2019년에 자신이 수학했던 옥스퍼드 위클리프 홀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신약학 및 초기 기독교 교수로 있다.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를 다룬 6부작 시리즈로 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며 ‘역사적 예수 연구’와 ‘바울 신학’ 분야의 독보적인 학자로 인정받았다. E. P. 샌더스, 제임스 던과 더불어 이른바 ‘새 관점’을 대표하는 이로 알려져 있다. 모든 사람이 성경 읽기를 즐기고 유익을 얻도록 신약성경 각 권을 풀어낸 ‘에브리원 신약 주석 시리즈’를 펴냈다.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1992),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1996),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2003),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2013, 이상 CH북스 역간)은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다룬 전 6권 시리즈 총서 (SPCK / Fortress Press)중 첫 네 권이다.
그 밖에도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 (2011, 새물결플러스 역간), ‘본래의 예수’ (1996),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1997, 에클레시아북스 역간), ‘언약의 절정’ (1992), 에브리원 성서주석시리즈(IVP 역간),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광장에 선 하나님’, ‘이것이 복음이다’, ‘혁명이 시작된 날’, 그리고 그리스-로마 세계 속에서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실체를 재구성한 역작 The New Testament in Its World: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Literature, and Theology of the First Christians (비아토르 출간) 등 학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저작을 왕성하게 내놓고 있다.

– 저자 : 마커스 보그
오늘날 대표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오레곤 주립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미국 성서학회의 역사적 예수 분과 책임자이며 예수 세미나의 정회원이다.
Marcus Joel Borg was an American New Testament scholar and theologian. He was among the most widely known and influential voices in progressive Christianity. As a fellow of the Jesus Seminar, Borg was a major figure in historical Jesus scholarship.
– 역자 :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이며 감신대 겸임교수이다. ‘세계의 신학’과 ‘설교자 노트’ 편집인이며, 역서로 ‘예수에게 솔직히’ ‘역사적 예수’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우리는 바울에게 ‘공연히 그러지 마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본대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진리를 다르게 봅니다. 즉 관찰자들 만큼이나 많은 ‘진리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처럼 ‘진리’라고 외쳐대는 것은 단순히 당신 자신의 불안을 돋구는 것이며 당신 자신의 힘의 논리를 내세우는 것일 따름입니다.’하고 말하고 싶어한다. 이런 주장은 물론 궁극적으로 스스로 패배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진리주장을 의심해야 한다면, 모든 진리주장을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의심해야만 한다.
후기 현대적 주장은 무슨 권리로 가만히 서서 나머지 세계가 비뚤어진 원을 돌고 있다고 보는가? 기독교 신학, 성서, 예수, 그리고 지식 자체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이처럼 소용돌이치며 매우 감정적인 문화적 싸움터 한복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p.323
우리가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이런 주장들의 역사적 근거에 관한 것이다. 신약성서의 부활절 전승들 배후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서로 의견을 달리 하는 것은 부활절의 진실이 빈 무덤에 달려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의 시체에 정말로 놀라운 어떤 일이 벌어져서 그 무덤이 빈 것인가?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들의 의견 차이에 또 다른 기본적 문제는 우리가 빈 무덤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출현에 관한 복음서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만일 당시에 누군가 비디오 카메라를 갖고 그 현장에 있었다면, 녹화할 수 있었던 종류의 사건들을 보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만일 무관심한 구경꾼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들도 볼 수 있었을 사건이었는가? 이런 역사적 물음은 해석적인 신학적 질문과 연결되는데, 즉 부활절의 진실이 빈 무덤과 출현 이야기들이 객관적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사실인 것에 달려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톰 라이트와 나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서로 다르게 대답한다. 톰은 빈 무덤의 역사적 사실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그것을 부활절의 진실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그는 소위 “육체적 부활”(physical resurrection)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예수의 시체에 정말로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져, 다시 말해, 그 시체가 “새로운 형태의 육체”(new mode of physicality)로 변형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빈 무덤과 예수의 시체에 무슨 일이 벌어졌건 간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부활절의 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본다. 톰은 부활절에 관한 복음서의 이야기들–빈 무덤과 출현 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 여러 목격자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들이라고 본다. 만일 내가 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의 주장은 만일 누군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복음서의 목격자들이 보았던 것을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야기들이 발전하는 전승의 산물이며 또한 강력하게 진실한 은유적 이야기들(meta-phorical narratives) 이라고 본다. — p.202-203

○ 독자의 평 1
신앙인들은 늘 고민한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다. 나는 하나님의 종속적인 관계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존재인가? 성경은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하는 것인가? 그 안에 또 다른 참된 의미 또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는 기독교란 종교가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논쟁되어왔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감히 예수의 정통성에 대해서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믿고 있는 신에 대해 나약한 인간이 함부로 건드린다는 것 자체가 불경건죄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역사상 계몽시대를 거치고 이성적 판단이 객관성의 중요한 잣대가 되는 시대가 되며 하나님에 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논쟁은 그 전 다른 어떤 시대보다 극렬하게 진행되어 왔고 현재까지 이르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예수의 의미」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갖고 있는 저자들이 자신이 서 있는 입장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신학적 논쟁을 벌인다. 아니 그들의 말대로라면 대화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차이에 읽는 독자를 귀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자의 폭이 얼마나 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구든 이 책을 읽고 난 후 한 쪽 입장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나 자신이 정통 신앙을 유지한 복음주의자라 굳건히 믿고 이 책을 읽었지만, 마커스 보그의 주장에 대해 쉽사리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나와 그가 지닌 현격한 지평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 역시 나름대로의 변증으로 기독교 신앙 가치를 증명했다는 것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커스 보그와 톰 라이트의 입장의 차이는 극명히 차이가 나지만 결국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시작이 다르다. 마커스 보그는 현실적, 이성적 접근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대변했다면 톰 라이트는 신앙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건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논한다. 그는 예수가 유대인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고 선포했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과 함께 할 것을 요구하였다. 더불어 그렇지 않을 경우에 나타날 결과들에 대해 경고했으며,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그런 상징적 행동과 비밀스런 말씀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임을 믿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마커스 보그는 부활절 이전과 이후의 예수를 구분하며 전자는 유대교 신비가이고, 후자는 기독교 메시아라고 주장한다. 그는 부활절 이전의 예수가 스스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를 비메시아적 범주로 묘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높여진 예수의 칭호들은 부활절 이후의 고백이며 그것들이 예수 자신에게까지 적용 된다는 점을 의심한다. 유대교 신비가인 예수는 메시아적 소명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보그와 라이트는 상대의 입장을 서로 존중하며 다른 점에 대해서 예의 바르게 반박하며 자신의 입장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세 가지를 얻고자 한다. 첫째, 비기독교인에게 흥미와 유익을 주기 위해서 둘째, 정체된 논쟁을 유익한 가능성으로 바꾸기 위해 셋째, 자신들이 주장하는 서로 다른 두 견해가 어떻게 상충 될 수 있는가이다. 그들의 요구에 이제 내 입장에 대해 다시금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모든 학문의 분야가 그렇겠지만 신학이라는 학문 즉, 하나님에 관해 배우는 학문은 오히려 배울수록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모르겠다는 말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자신이 배움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 자체는 스스로가 무식하다는 말 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나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작은 부분만을 편협하고 무지 했는지를 느끼게 된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교육을 받으며 그것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학교를 들어와 많은 것이 깨졌다. 내가 알지 못한 하나님에 관한 다양한 측면을 접하며 커다란 충격에 빠져들기도 하고 신앙적 회의감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그런 과정이 나를 전보다 더 단단한 신앙을 갖게 만들어 줬다. 내게 있어 이 책은 그런 측면에 있어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양 측의 의견은 매우 흥미로웠으며 내 자신이 가진 입장과는 별도로 어느 한 측면에 손을 들어준다는 사실이 어려웠다. 둘 다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며 치열하게 논쟁하는 과정이 매우 세밀하고 정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기도 본인은 톰 라이트 입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마커스 보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서 있는 자리 자체가 톰 라이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그의 반대적 견해를 말하려 한다.
보그는 의미라는 측면에 강조를 둔다. ‘성경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믿는다. 그것은 현재 받아드리는 우리에게 가질 수 있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예수는 여전히 체험되고 있고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런 그의 주장에 동의하기 난해하다. 물론 의미는 중요하다. 실제 예수 당시의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일어난 일들을 현재 지금에 적용시키는데 무리가 있는 부분도 많다. 우리는 그런 성경의 텍스트를 바라볼 때 당시 정황을 근거로 무엇에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며 지금 삶의 현장에 적용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예수의 이야기 즉 성경의 이야기가 톰 라이트의 말처럼 역사적 사실성을 근거를 바탕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그의 의미적 입장은 성경 본문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객관성이 없기에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이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복음서 역시 역사적 바탕을 근거로 두고 있다. 근거가 없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소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인식이 어디까지냐 하는 것이다. 수천 년 전 역사의 사실성을 따지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정확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예전 로마와 자웅을 겨루었던 카르타고는 해안가 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해안으로부터 수 십 킬로 떨어져 있다고 한다. 지금 그곳을 누가 해안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래되면 오래됐고 짧다면 짧은 이천 오백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것이 변했다. 예수의 생애가 있었던 이천년 전, 이 역시 많은 것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기다. 우리는 현재에 와서 모든 것을 지금의 (이성이 지배하는 객관성이 최고의 중심이 되는) 학문 혹은 과학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이란 잣대는 한계가 있다. 이성 안에서 나온 과학 역시 마찬가지다. 신앙은 과학이 풀 수 없는 범주가 있다. 이는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그의 현상학적 예수 해석은 인간적으로 매우 훌륭하기는 하나, 현상학적으로 신앙을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는 보그에 대해 비판하려 한다기보다, 그가 서 있는 입장에 대한 한계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합리성을 추구한다지만 어찌 보면 그는 그가 믿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적 신앙 가치관을 갖고 있다. 복음서 역시 그렇게 풀고 역사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역사의 해석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역사라는 것 자체는 사실 주관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어느 역사서든지 마치 비디오 영상을 보듯 가감 없는 것은 없다. 일반적으로 사관들은 시대적 정황을 기계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때로 본인의 감정에 매우 충실해 쓸 때도 있고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나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관적 입장은 그리 크지 않으며 그것은 늘 사실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예수의 기록인 복음서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사실을 토대로 저술자의 주관적 입장이 들어간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 사실을 이미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바라본다. 우리는 때로 복음서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이야기들로 인해 혼란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저술자들이 기록 당시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으며 이러한 사실을 서술해 나갔냐고 하는 것이다. 더불어 지난 이천년 동안 복음서에 대한 의심과 평가절하는 항상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이천년 전의 내용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 수많은 이단종파 또는 정통과는 다른 견해를 주장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음이 반복해 왔음을 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현재 복음주의 자들이 받아드리는 기독교 가치는 변함없이 지켜져 왔다. 이는 우리가 지키고 있는 그것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인증하는 일이다. ‘보그와 라이트’ 이런 논쟁 자체를 쉽게 볼 수 없지만 결국 또 몇 천 년 아니, 백 년만 지나도 소모적이었다고 우리 후손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보그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분명 인정하는 바이나, 결국 그 역시 인간적 노력에서 벗어나지 못 할지 모른다.
견해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인지해야 하는 사실은 결국 하나님 테두리 내에서 우리의 선택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실제 자신이 성경을 통해 보여준 일과 다른 견해를 펼친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워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실은 분명 인정하실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 역시 인간은 제한적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분명 아실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구난방으로 예수, 성경에 대한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재 기준에서 인정할 수 있는 범주 밖으로 더 나갈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위험성은 기독교 진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적 가치관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더 많은 노력과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배타성을 조심해야 한다. 비록 다른 입장에 서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건강한 정통을 지키는데 있어 좋은 촉매제가 될 수 있고 미처 정통적 입장에서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다름의 문제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포용력 있게 반대 입장을 이해할 것이다.
끝으로 내가 서 있는 입장 역시 한계성은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나는 정통주의를 지향하는 복음주의자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의 학문적 범주 안에서 형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의 입장이 한계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내 관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그런 관점과 넓이가 내가 건강하게 신앙생활,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 독자의 평 2
이 책은 4년 전 ‘역사적 예수’라는 연구 분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추천했던 책이다. 그 때 반 정도를 읽다가 실수로 빨래와 함께 세탁기에 들어가는 바람에 한동안 미루어 두던 중 작년에 다시 구입해서 이번에야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4년 전 처음 읽을 때의 당혹스러움이 기억난다. 예수의 육체적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지라도 신앙의 본질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거나,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외아들, 또는 메시아라는 인식을 하지 않았을거라는 주장, 특히 마커스 보그의 주장은 당시 나로서 굉장히 생소하고 어색한 것이었다. 그 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친한 교회 형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형, 이책 희한해. 예수가 메시아라는 자각이 없었을 거라네. 동정녀 탄생도 아마 사실이 아닐거라고…” 어쩌면 그때 절반 즈음 읽은 상태에서 세탁기에 침몰한건 다행인지도 모른다. 당시로서는 어색한 거부감만 남기고,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마지막 장을 덮어야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에 다시 도전하기까지 3~4년의 시간동안 다른 책들을 통해 차츰차츰 그 분야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가는지 대략적인 사정을 알 수 있었고, 나의 생각도 다원주의를 수용하면서 많이 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야 이전에 갸우뚱거리던 마커스 보그의 주장들을 무릎을 치며 읽을 수 있었고, 톰 라이트에 대해서도 이전의 막연한 동질감을 벗어나 비록 다른 입장의 나를 발견하더라도 그 진정성에 대해 더 긍정적으로 생각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공저’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작품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 보수주의 진영의 톰 라이트와 진보주의 진영의 마커스 보그가 오랜 우정의 결과물로 내놓은 뜻깊은 결실이다. 두 저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동문이며 비록 같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조지 케어드라는 교수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흔히 학계에서 다른 입장에 서 있을 때 특히, 그 입장이라는 것이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수식될 때에는 더더욱 건강한 토론이라는 것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서로 만나지 않거나, 만나면 대화가 아닌 감정적 싸움이 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기본적이고도 가장 큰 매력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의 ‘만남’이다. [예수에 관해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연구방법론), [예수는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가르쳤는가?], [예수의 죽음],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다”], [예수는 하느님이었는가?], [예수의 출생], [“그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와 기독교인의 생활] 이라는 여덟 개의 주제를 두고 두 저자가 그 주제마다 순서를 바꾸어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이 때 두 저자의 우정에 힘입어 저술 과정에서 상대방의 기존 저작과 이 책의 초고를 읽고 공명(共鳴)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읽는 책에서는 그 부분을 중요 지점에서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부담에 얽매여 반드시 어느 한편을 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두 입장의 차이를 대충 타협시켜 그 중간에 나를 두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모든 주제에서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비록 마커스 보그의 입장, 즉 예수는 하나님의 궁극계시이기는 하나 반드시 유일하고 배타적인 계시일 이유는 없으며, 예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록이 ‘기억된 역사’가 아닌 ‘은유화된 역사’이고, 예수가 스스로 메시아라고 자각했으리라고 보기 어려우며, 예수가 자신의 공생애에서 그의 죽음을 사역의 절정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한 흐름으로 받아들였고, 예수의 육체적 부활, 육체적 재림에 대한 표현을 은유적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여전히 기독교의 본질적 순수 신앙은 퇴색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의 조심스럽고도 열정적인 주장, 특히 부활과 동정녀 탄생 및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그의 입장은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한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은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성할 수 있는가? 아마도 마커스 보그와 톰 라이트 역시 그 다양한 스펙트럼의 한 부분일 것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의 자리를 멀리 떨어뜨려 보게 되지만, 둘 모두 지양하는 초자연주의적 신론이나, 이신론 또는 역사적 예수만을 강조하고 복음서의 예수, 고백된 예수를 하찮게 여기는 입장들과 견주어 볼 때 둘은 어쩌면 넓은 스펙트럼에서 굉장히 인접한 이웃의 입장인지도 모른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주장과 논거에 못지않게 이 책이 나에게 준 큰 선물이다. 이웃하지만 다름을 인정하는 것, 그 다름이 다툼의 원인이 아니라 풍성한 대화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독점하고 나와 다른 신앙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귀를 막아버리는 우리의 현실에 반드시 갖추어져야할 태도일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확증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즉 예쑤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what God is like), 그리고 하느님으로 충만한 생활이 어떤 것인지(what a life full of God is like)에 대한 결정적 계시이다. 예수는 그 둘 모두의 계시이며, 드러남이며, 나타남이다. “참 하느님”이며 또한 “참 인간”으로서 예수는 우리가 그를 통해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으로 충만한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보는 렌즈이다. –p361
중요한 것은 그 렌즈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다. — p360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