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예술이란 무엇인가
레프 톨스토이 / 범우사 / 1998.09.15

– 작가 톨스토이가 만년에 내놓은예술론
현대 예술의 사명은 현재 지배하고 있는 폭력대신 신(神)의 세계, 즉 사랑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만년의 예술관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인생을 위한 예술’을 가장 대답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근대 예술은 예술에 있어서의 방언으로 비난 받을 사실주의에 의하여 장해를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술이란 폭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만이 이것을 행할 수 있다. 예술의 사명이란 신의 왕국, 즉 사랑의 왕국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 목차
제 1장 – 제 21장으로 구성
연보
○ 저자소개 : 레프 톨스토이 (Leo Nikolayevich Tolstoy, Lev Nikolaevich Tolstoi)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곧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처녀작인 자전소설 『유년시대』를 발표하여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53년에는 『소년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인 야스나야 뽈랴나에 농민 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농민학교를 세웠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으며,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크로이체르 소나타』『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등의 작품이 쓰인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를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해서 저술하고 활동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고,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이처 소나타』(1889)를 통해 깊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현재 톨스토이 역이 되어 있는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기를 거부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귀족의 아들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인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고귀한 인생 성찰을 통해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수많은 걸작을 남겨 지금까지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 그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의 철학을 남긴 사상가였다. 톨스토이의 작품만이 지닌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 보아도 여전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이며,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 출판사 서평
작가 톨스토이는 1828년에 태어나 1910년까지 82년간의 생애를 살다가 갔다. 그의 생애는 말할 것도 없이 끊임없는 자기변혁의 도정(道程)이었다. 때문에 톨스토이의 일생만큼 드라마틱한 생애도 없으리라 여겨진다. 그것은 수많은 변전과 기복의 연속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것은 대학 중퇴, 카프카스 여행, 결혼, 「참회록」 집필, 가출(家出)의 다섯 가지 사건이다.
톨스토이는 부유한 백작령(伯爵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는 불운을 겪었지만, 물질적으로는 조금도 부족함을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다.
당시 귀족의 습관에 따라 가정교사로부터 초등 · 중등교육을 받은 후, 1844년 카잔 대학의 동양어과에 입학했다. 이때 톨스토이의 나이 16세였다. 그것은 곧 누구나 의식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아울러 최초로 인생의 위기에 직면하는 고뇌에 찬 나이이기도 했다. 유난히 다정다감한 톨스토이로서는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없었다. 쾌락만을 좇는 상류 사회와 틀에 박힌 대학 시험과 수업의 틈바구니에 끼여, 그는 ‘이래도 좋은가?’ 라고 몇 번이나 자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보통 청년들이 별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상류 사회와 대학에 등을 돌리고, 일생을 좌우하는 굳은 결의를 하게 되었다.
1847년 봄,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도시의 상류 사회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그것은 주위생활을 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성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려는 결의였다. 그리하여 이 결의를 굳혔을 때 톨스토이는 자기도 모르게 작가에의 제일보를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 중략 )
톨스토이적 사상이란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귀족 대신 소박한 민중을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보아, 그것이 자연과 융합한다고 생각하고 그 자연의 저편에 신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정신 적인 방황 끝에 카프카스에 도피했다가 돌아온 톨스토이는 독자적인 사상과 신진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새로운 문제를 갖고 톨스토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문제란 당시 러시아 사상의 주류를 이룬 ‘진보’의 문제였다. 그것은 인간 개개인의 향상과 완성이라는 발상에 적응해 가려는 톨스토이를 방황하게 했다. 하나의 이념이나 이상적 상태를 향해 진보해가는 사회와 인간 그 자체의 문제를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톨스토이의 중요한 과제였다.
1860년 이후 톨스토이의 독자적인 농민 교육이라든지, 57년과 60년 두 차례의 서구 여행이라든지, 특히 당시의 다채로운 창작 활동은 한결같이 이 문제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후 소피아 부인과의 결혼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삶 속에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함으로써 그는 셰익스피어나 괴테에 비견되는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1897년에 발표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톨스토이는 선(善)을 촉진하는 것만이 참된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가 1889년 봄에 시작하여 근 10년 가까이 퇴고를 거듭한 끝에 1897년 가을에 비로소 완성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모스크바 심리학회지 《철학과 심리한의 문제》에 발표하여,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천명했다. 하지만 이 논저는 검열 당국의 손에 의한 정정과 삭제를 피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다시 뜯어고쳐 에일머 모드에게 넘기었다.
톨스토이가 피력하고 있는 새 해석에 따른 참된 예술의 사명이란, 인류의 안녕과 행복이 그들의 융합일치에 있다는 진리를 차디찬 이성의 범위에서 따뜻한 감정의 밭으로 옮겨놓으며, 지금 현재 군림하고 있는 폭력 대신에 신(神)의 나라를, 즉 인류생활의 최고 목적으로 여겨지는 사랑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한 번 읽어서 이내 이해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양식과 언어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예술을 위한 예술, 이른바 순수 예술을 부정하고 어디까지나 지상적 · 인간적인 것이 되게 하려고 한 공리적인 그의 간결 · 단순 · 성실이라는 예술에 있어서의 ? 세 표준의 의의에 대하여 이론이 있을지 몰라도 ? 본편은 하나의 새로운 예술에 대한 견해를 대담하게 역설하는데 가치를 두고 있다.
이 작품을 만남으로써 톨스토이 만년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톨스토이의 후기 작품을 일관하는 특징을 연구하는 데에도 지극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옮긴이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