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1740~1763)
김장수 / 북코리아 / 2023.1.30
-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 전쟁에 대한 이해
한국내 서양사 학계, 특히 독일사 학계는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크게 증대시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그리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독일 근대사 서술에서 한쪽 또는 두 쪽으로 국한되는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국내 독일사 학계에서 간단히 취급되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18세기 독일 및 유럽 근대사에서 적지 않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18세기의 유럽사, 특히 각국의 외교정책과 거기서 비롯된 이들 간의 이해관계를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제3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 파트너로 참여한 영국과 프랑스가 동시에 식민전쟁도 전개하여 전쟁의 성격을 세계대전으로 변형시켰고, 양국은 이러한 전쟁에서 비롯된 후유증, 즉 재정적인 압박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펼친 제 정책에서 파생된 아메리카 독립전쟁과 프랑스 대혁명도 겪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을 통해 그동안 등한시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이 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독일권에서의 양강구도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에서는 우선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오스트리아 왕위계승권을 부여한 국사조칙의 제정과정과 그것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반응에 대해 살펴본다. 이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프리드리히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장 과정 및 등극에 대해 언급한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등극한 이후 그녀의 왕위계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국가들의 행보 및 그것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응을 다룬다. 그리고 1740년부터 1763년까지 3차에 걸쳐 진행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진행과정과 결과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이후 독일권에서 나타난 권력구도의 변화, 즉 1강 체제에서 2강 체제로 바뀐 것에 대해서도 취급한다.

○ 목차
책을 내면서
제1부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과 각국의 대응
1 국사조칙의 제정
2 프리드리히 2세의 등극
3 마리아 테레지아의 등극
4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에 대한 반발
5 프리드리히 2세의 제안
6 오스트리아의 대응
제2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1 제1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프로이센의 선제공격
오스트리아의 대응
몰비츠 전투
반합스부르크 동맹체제의 결성
카를 7세의 등극
영국의 개입
2 제2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바르샤바 4국 동맹
아헨 평화조약
3 제3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7년 전쟁’
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체제
콜린 전투와 로스바흐 전투
쿠너스도르프 전투
러시아의 황위 교체
신대륙에서의 식민지전쟁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
승자의 행보
마무리하면서: 양강 체제의 정립과 독일의 통합
참고문헌
○ 저자소개 : 김장수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석사 및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Die politische Tätigkeit F. Palackýs, Korea und der ‘Westen’ von 1860 bis 1900, Die Beziehungen Koreas zu den europäischen Großmächten,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r Beziehungen zum Deutschen Reich,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 Palacký)의 정치활동」,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서양의 제 혁명」, 「비스마르크」, 「중유럽 민족문제」(공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주제별로 들여다 본 체코의 역사」, 「주제별로 살펴 본 서양 근대사」,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 방안」, 「후스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격동기(1412-1648)」, 「19세기 독일통합과 제국의 탄생」, 「메테르니히」,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독일통합의 비전을 제시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848 독일혁명」 등이 있으며, 그동안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Franticek Palacký)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vismus)와 19세기 오스트리아제국의 민족문제를 다룬 논문들도 많이 발표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며 한국 세계문화사학회(이전의 한국 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0 ~ 1748) 개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1740년 ~ 1748년)은 거의 모든 유럽의 강대국이 얽힌 전쟁이다. 이 전쟁은 여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 법〉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각국이 개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로이센이 벌인 전투에 후세의 군사적 관심과 역사적 의의가 집중되어 있다. 열강이 이 전쟁에 개입하였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전원이 전문적인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프로이센군의 뛰어난 전투력이었다. 프로이센군은 이전의 전형적인 군대처럼 용병들을 집결시킨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프로이센군의 편제는 당시엔 매우 이례적이었다. 심지어 병과를 조합하는 근대의 전술교리를 창안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조차도 상당한 수의 용병을 운용했는데, 이는 직업적인 상비군을 운용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농민을 징발해서 만든 민병대는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남독일, 네덜란드 및 벨기에 등의 저지대, 그리고 이탈리아는 이 지역에서 전투를 벌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군의 군홧발 아래 짓밟혔다.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굳건한 동맹을 맺었고,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 그리고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이에 맞서 대항축을 이루었다. 유럽 각국은 각자의 이익과 30년 전쟁 혹은 그 이전의 우호관계에 따라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양 세력 중 한쪽에 참여하여 전투를 벌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적대국이던 대영 제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거의 대부분의 군수품을 지원받았다.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가 변했던 국가 중에는 사르데냐 왕국과 작센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이 전쟁은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됨과 함께 종결되었다.

○ 독자의 평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단독으로 출간된 건 처음 보는듯 합니다. 그동안 독일이나 합스부르크관련 역사서적에 포함되어 부분적인 서술로 된것이 대부분이였는데 반갑게도 부담스럽지 않는 분량이라서 하루만에 다 볼 수 있었습니다.
- 상속분쟁의 씨앗
후계자문제로 선친 (레오폴트1세)이 제정한 “상호계승약관”을 약간 수정하여 국사조칙을 발표한다. 카를6세는 1716년 출생한 아들을 잃은 후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에도 딸이 연속 태어남)에 따라 후향후 후계자 문제가 크게 거론될 것이라 판단을 하게되어 이러한 조치를 하게 되었다. 남자 상속이 없어도 자신의 가문이 계속하여 오스트리아왕위를 계승권을 유지할수 있게 내용을 변경하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형인 요제프1세의 장녀는 작센가문에 차녀는 바이에른 가문과 혼인을 하여 여전히 왕위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불씨가 존재한것이다. 또한 승인 안 한 왕국내 귀족들과의 타협과 협조 역시 필요한 것이였는데 1713년 마리아 테리지아가 출생하기 전에 국사조칙을 발표하고 왕국 내의 귀족들의 동의를 받아내고 유럽의 열강들도 러시아를 필두로 국사조칙을 승인하게 딘다.
- 사촌형부의 욕심
1740년 10월20일 카를 6세가 죽은 후 마리아 테리아는 오스트리아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아버지의 측근들의 조언을 받게 되고 이후에는 하우그비츠 백작 카우니츠공작같은 핵심인물을 등용하여 자신만의 중앙집권체제의 발판을 구축하게 된다.
하지만 사촌형부 (요제프1세의 차녀의 남편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흐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1세가 딸 안나가 바에에른 가문과 혼인하면서 합스부르크가문에서 상속자가 단절될 경우 비텔스바흐가문에서 왕위상속이 가능하다는 유언장을 공개하였고 이러한 카를의 주장에 프랑스, 에스파냐,쾰른,작센등 주변 열강들이 동조를 하게되었다. 반면 영국과 네덜란드는 국사조칙을 인정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통성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 프리드리히 대왕의 돌발행동
마리아 테레지아 즉위 5개월전 프로이센왕국의 승계를 이어받은 프리드리히2세 역시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테레지아 즉위 2달후 슐레지엔 지방을 선제 공격하게 되었고 주변 국가들 역시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침략하게 되었다. 바이에른은 북부 오스트리아, 작센은 보헤미아 에스파냐는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영역을 프랑스는 라인강을 도하하여 영토에 침범하게 된것이다.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비밀협상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점유를 인정하고 프리드리히2세는 유리히-베르크 공국을 양도)을 논의중인데 프리드리히2세는 슐레지엔 지방의 확보를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는데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이는 회심의 카드로 협상을 성공적으로 타결하게 된다
-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응과 프리디리히의 배신
프로이센과 비밀협상으로 일단 급한 불을 끄고 영국과 러시아의 협상으로 지지와 지원을 약속받는 성과를 얻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응 프랑스, 바이에른을 동맹국으로 편입하게 된다, 바이에른공국 역시 프랑스와 연합하여 빈으로 진격하고 보헤미아지방까지 점령하였다.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2세와의 비밀협약을 굳게 믿었지만, 이와 같은 프랑스의 선전에 고무된 프리드리히2세는 약속을 어기고 다른 지역 (올뮈츠)까지 점령한다. 한편 바이에른 공국의 카를 대공은 프랑스의 지지를 받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7세로 등극하고 마리아는 바이에른 영지를 공격하게 되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중재로 회담을 개최하고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과 저지대지역을 포함 영토 일부를 프로이센에게 이양하게 된다.
- 짦은 평화와 복마전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원으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데팅겐) 프랑스는 프프로이센의 파병을 재촉하게 되고 다시 프로이센은 전쟁으로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저항과 선전으로 보헤미아지방에서 철수하게 되고 바이에른 지방도 공격하여 뮌헨에서 카를7세는 강제로 추방되었다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드레스덴 조약으로 프란츠1세의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승인을 받아내었지만 아헨 임시평화조약으로 슐레지엔의 포기를 약속하는 아픔도 겪게 되었다.
- 유럽의 헤게모니 변화
프로이센의 국가적 위상은 크데 향상 유럽열강의 반열이 오르게 된다. 중부유럽에서의 패권이 오스트리아가 주도적 역할한 과거와 달리 신교에 바탕을 둔 프로이센이 급부상하게 된다. 자체적인 문제해결도 가능해지고 무엇보다 신성로마제국의 힘이 크게 약화가 된 계기가 된다.

- 오스트리아의 와신상담
마리아 테레지아의 최측근인 카우니츠는 전후 프랑스와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1756년 방어동맹과 공격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그리고 슐레지엔지방회복을 거론하게 되고 대신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할애한다는 조건이였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에게 네덜란드의 보호와 독립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하고 만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대프랑스정책변화가 프로이센의 고립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프리드리히2세는 영국과 동맹관계를 구축하게 되고 하노버공국을 교두부로 삼아 군사동맹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 선빵 날리는 프리드리히 대제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작센의 4국동맹으로 위협을 느낀 프리드리히는 선전포고도 없이 작센을 선제공격하였고 슐레지엔 지방을 공격하지만 다운 장군의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 주력부대를 코린에서 괘멸시킨다. 하지만 이후 로스바흐전투, 로이텐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다 하지만 쿠너스도르프전투에서 결정타를 맞은 프로이센 주력군은 엄청난 피해를 당하면서 전세가 역전당하면서 수도 베를린이 함락당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설상가상 영국의 지원마저 중단이 되었다.
- 러시아의 이탈
러시아의 통치권자 엘리자베타가 백혈병으로 사망하고 나서 조카인 표트르3세가 즉위 (1762.01)하는데 표트로3세는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평화협상을 체결하고 점령지를 모두 반환하며 스웨덴까지 철군시키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의 프리드리히의 생명줄 역할을 하게 된다. 8만명의 군사지휘권까지 양도하지만 부인 예카테리나에게 표트르3세가 암살당하면서 다시 원상복귀가 되었다
- 화폐전쟁
마지막 카드로 오스트리아의 재정위기를 조장하여 전쟁을 종결시키려한다, 품질이 저하된 오스트리아 동전을 중부유럽에 집중적으로 확산시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게 하고 이것은 중앙정부의 재정악화를 불러와 오스트리아가 전쟁중단의 필요성을 느끼게한다는 전략이였고 성공하였다.
- 해외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영국과 프랑스 (7년전쟁=3차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동맹국인 영국 (프로이센)과 프랑스 (오스트리아)는 유럽대륙보다는 북아메리카에서 치열하게 교전을 하였다. 영국은 피트내각이 구성되면서 프로이센에게 군수자금을 지원하고 프랑스 해군을 해상에서 공격하여 군대와 군수물자의 공급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북아메리카에 영국군을 파견하여 프랑스군을 공격하였고 인도에서도 블랙홀사건을 계기로 복수를 한 영국은 역시 프랑스의 영역확산을 좌절시켰다 (플라시전투).
- 기나긴 악연의 종착역
마지막 전투인 부르커스도르프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주력군을 격파하게 되고 후베르투스부르크성에서 조약을 체결한다.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유를 인정하고 테레지아의 아들인 요제프의 선제후권을 인정한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 역시 파리조약을 체결하며 북아메리지역의 패권을 영국에게 넘기게 되고 이때 루이지애나가 에스파냐에게 넘어가지만 훗날 나폴레옹이 다시 루이지애나를 양도받고 미국에게 넘기는 과정이 이어지게 된다.
- 7년 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되고 재정적인 상황도 악화하게 된다.
7년전쟁의 경비가 세입의 11배가 넘었고 지출은 무려 세입의 3배나 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전후 이를 만회할 능력이 없었다.
반면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으며, 영국은 프랑스와의 식민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식민지에 영국의 정책변화 (중상주의 정책 강화)는 식민지인들의 반발을 야기시켰으며, 러시아가 서유럽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요인이 되었다.
[마무리 후기]
다른 책에 본건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신랑 후보감으로 프리드리히 대제가 물망에 오른적도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두 사람이 결혼했다면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 7년전쟁 바이에른 계승전쟁을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수 도 있었을것이다. 그리고 혼인을 했다면 정말 막강한 유럽의 절대왕국이 또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운명은 가혹했다. 테레지아는 평생동안 프리드리히를 싫어했고 저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대제는 추모사를 남겼다고 한다.
여왕이 오스트리아 왕국 및 합스부르크가문에 큰 영예를 남겼으며 자신이 비록 여왕과 긴 정쟁을 벌였지만 결코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고 전해진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