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이자에비치 솔제니친 / 민음사 / 2015.7.22

– 한 개인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지배권력의 허상을 폭로한 소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솔제니친의 대표작!
작가 솔제니친이 직접 경험했던 노동수용소 생활의 하루 일상을 세련되고 절제된 필치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평범하고 가련한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인물을 통해 지배권력에 의해 죄없이 고통당하는 힘없는 약자에 대한 숭고한 애정을 보여 주면서, 그러한 약자들을 대변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고 그러한 예술이야말로 예술의 궁극적 목적임을 역설한다.
솔제니친은 이 작품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다양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인간 군상들은 수용소 내부의 부패되고 모순된 소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지만, 스탈린 시대의 사회 축소판으로서 더욱더 폭넓은 의미의 확장을 통해 부패된 정치권력과 사회적 생활상, 모순되고 획일적이고 비인도적인 사회 제도, 종교 문제, 인간 본성의 문제까지도 시사하고 있다.
○ 목차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작품 해설/이영의
작가 연보

○ 저자소개 : 알렉산드르 이자에비치 솔제니친 (Aleksandr Isaevich Solzhenitsyn, 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
‘러시아의 양심’이라 불리는 러시아의 저항작가. 카프카스 산맥의 작은 휴양지 키스로보츠크에서 태어난 솔제니친은 홀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했다. 로스로프대학교에서 물리와 수학을 공부하고 모스크바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했다. 1940년 결혼하고 이듬해 대학을 졸업한 그는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군에 입대해 포병장교가 되었다. 그러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재자 스탈린을 ‘콧수염 남자’로 빗대 말한 것이 탄로나 1945년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가 ‘반혁명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것은 27세 때였다.
1956년부터는 러시아 랴잔시 중학교 수학교사로 일했으며,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데뷔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구상하였다. 이후 1962년에 이 단편소설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70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 대위로 근무하던 중 투옥돼 10년간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그린 『수용소의 군도』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소련의 정치제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과 몇몇 동료 반체제작가들에 대한 소련 당국의 냉대를 끊임없이 비판하였다.
1974년에는 반역죄로 소련에서 추방 당했으며, 이후 미국 버몬트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소련연방 붕괴 후인 1994년, 20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조국 러시아의 부활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2007년 6월 러시아는 그에게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상인 국가공로상을 수여하였다.
2008년 8월 3일 향년 89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 역자 : 이명의
1964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에서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민담 장시 연구’라는 테마로 박사 논문을 쓰고 모스크바 교육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서로 『출구 없는 러시아』,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대위의 딸』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저 사람들이 슈호프를 가르키면서, 저 녀석은 출소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그다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슈호프 자신은 어쩐지 그다지 믿어지지 않는다. 슈호프가 직접 본 일로, 옛날 전쟁중에 형기가 끝난 죄수들을 모두 <추후 상부 방침이 있을 때 까지>, 그러니까 1949년까지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붙잡아뒀다. 게다가 더욱 심한 것은, 누군가 삼 년을 언도 받았는데, 형기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오 년으로 추가형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법률이란 것은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 십년을 다 살고 난 다음에, 옜다 이 녀석아, 한 십 년 더 살아라 하게 될지, 아니면 유형살이를 보낼지 누가 알겠는가. — p.82
슈호프는 소용소에 들어온 이후로 전에 고향 마을에 있을 때 배불리 먹던 일을 자주 회상하고는 한다. 프라이팬에 구운 감자를 몇 개씩이나 먹어치우던 일이며, 야채를 넣어 끓인 죽을 냄비째 먹던 일, 그리고 식량 사정이 좋았던 옛날에는 제법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먹었던 때도 있었고, 게다가 배가 터지도록 우유를 마셔대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렇게 먹어대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를 해본다. 음식은 그 맛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어야 제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이 빵조각을 먹듯이 먹어야 하는 법이다. 입 안에 조금씩 넣고, 혀 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침이 묻어나도록 한 다음에 씹는다. 그러면, 아직 설익은 빵이라도 얼마나 향기로운지 모른다. — p.60
배가 따뜻한 놈들이 한데서 떠는 사람의 심정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혹한이 온 몸을 움츠리게 한다.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가 슈호프를 엄습해서 기침이 나올 지경이었다. 기온은 영하 이십칠도였고, 슈호프는 열이 삼십 칠 점 이도였다. 자, 이젠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인가. — p.31
그런 다음, 그는 때묻은 얇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어느새 침대 사이의 통로엔 점호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옆 반 반원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p.207-208
하긴, 이해하려 들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한들 소용이 있겠는가! — p.124
문을 열자 하얀 냉기가 서린다. 그는 얼른 문을 닫는다 (그는 〈야, 이놈아 빨리 문 닫아!〉 하고 소리를 지를까봐 잽싸게 문을 닫았던 것이다).
사무소 안은 한증막에라도 온 것처럼 더웠다. 유리창 가에얼어붙은 얼음을 통해 바라다보이는 태양은 중앙난방센터에서보던 것처럼 그렇게 냉랭하게 느껴지지 않고, 아주 따사롭고기분 좋게 느껴진다. 그 햇살 사이로 체자리의 담뱃대에서는 성
저녁이 되어, 이때쯤 여기서 인원 점검을 받을 때, 그다음 수용소 문을 통과하여 막사 안으로 돌아올 때, 죄수들에게는 이때가 하루 중에서 가장 춥고 배고플 때이다. 지금 같은 때는 맹물 양배춧국이라 해도 뜨뜻한 국 한 그릇이 가뭄에 단비같이 간절한 것이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단숨에 들이켜게 된다. 이 한 그릇의 양배춧국이 지금의 그들에겐 자유보다, 지금까지의 전 생애보다 아니, 앞으로의 모든 삶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 p.157
– 뭣 때문에 당신은 자유를 원하는 거죠? 만일 자유의 몸이 된다면, 당신의 마지막 남은 믿음마저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감옥에 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셔야 해요! 그래도 이곳에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 p.203
– 슈호프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본다. 그는 이젠,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 처음에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는 아주 애타게 자유를 갈망했다. 밤마다 앞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보곤 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에는, 이제 그것마저도 싫증이 났다. 그다음에는 형기가 끝나더라도 어차피 집에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유형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형지에서의 생활이 과연, 이곳에서의 생활보다 더 나을지 어떨지 그것도 그는 잘 모르는 일이다. — p.204
아, 이 순간만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다!
윗사람들이 상의를 하고 있는 동안
아무 곳이나 따뜻한 곳을 찾아
불 옆에 앉아
조금 후에 시작될
고된 노동의 시간에 대비하는 것이다.
운이 좋아 난로 옆에라도 앉게 되면,
발싸개라도 풀어서 불을 쬐는 것이다.
그러면 하루 종일 발가락들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난로가 없어도 이 순간의 자유로움이란 너무도 행복한 것이다. — p.13
쉽게 번 돈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자기가 힘들여서 번 돈이라는 실감도 나지 않는 법이다.
노동 없이는 열매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 그른 데가 없다.
지금은 겉옷을 풀어헤치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집으로 들어갈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모두들 <집으로 간다>라고 말한다. 이 집 외에 <다른 집>에 대해선 하루 종일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다. — p.152
슈호프는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남아 계세요 체자리 마르코비치! 저기 저 구석에 숨어 있으면 돼요. 얼마 후에 간수와 당번이 순찰을 돌테니, 그때 밖으로 나와요. 몸이 불편해서 좀 늦게 나간다고 하세요. 그리고 그 다음에 들어올 때는 제가 제일 먼저 들어올게요. 그러면 아무도 손을 못 댈 거예요…‘ — p.194
이봐, 이곳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밀림의 법칙이라는거야.
그러나 이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
수용소 안에서 죽어가는놈이 있다면, 그놈은 남의 빈 그릇을 핥는 놈들이고, 맨날 의무실에 갈 궁리나 하는 놈들, 그리고 정보부원들을 찿아다니는 놈들이야
알료쉬카는 누가 무슨 부탁을 해도 싫다는 내색을 하는 법이 없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뿐이었다면, 슈호프도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도움을 청하는데 어떻게 그걸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알료쉬카의 동료들은 올바른 인간들임에 틀림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 하느님, 저를 구해 주소서. 영창에 가지 않도록 해 주소서!’라고 말이다.
슈호프는 남은 국물과 함께 양배추 건더기를 먹기 시작한다. 감자는 두 개의 국그릇 중에서 체자리의 국그릇에 하나 들어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게다가 얼어서 상한 것이었지만, 흐물흐물한 것이 달짝지근한 데가 있기도 하다. 생선 살은 거의 없고, 앙상한 등뼈만 보인다. 생선 지느러미와 뼈는 꼭꼭 씹어서 국물을 쪽쪽 빨아 먹어야 한다. 뼈다귀 속에 든 국물은 자양분이 아주 많다. 이것을 깨끗이 처치하려면,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슈호프로서는 달리 서두를 일도 없다. 그에게 오늘은 명절과 다름없는 날이다. 점심도 두 몫을 먹었고, 저녁도 두 몫을 먹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면, 다른 일을 뒤로 좀 미룬다고 해서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는 끝이 다 닳은 나무 수저로 건더기도 없는 국물을 단정한 모습으로 먹는다. 다른 죄수들처럼 국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먹는 것이 아니라, 수저를 높이 들고 먹는다. 이는 아래위로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뼈처럼 굳은 잇몸으로 딱딱한 빵을 먹고 있다.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어딘가 당당한 빛이 있다. 산에서 캐낸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무스름하다. 쩍쩍 갈라진 거무스름한 손은 그가 걸어온 수십 년의 감옥살이를 통해, 한 번도 가벼운 노동이나 사무직 같은 것을 얻어 일한 적이 없이, 생고생만 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굴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타협도 하려 들지 않는다. 삼백 그램의 빵만 하더라도, 다른 죄수들처럼 더러운 식탁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지 않고, 깨끗한 천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내려놓는다.
알료쉬카는 슈호프가 “하느님”이라고 말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슈호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것 보세요, 이반 데니소비치! 당신의 영혼이 하느님을 찾고 있어요. 왜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합니까?”
슈호프는 힐끔 알료쉬카를 쳐다본다. 두 눈이 촛불처럼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슈호프는 휴우 하고 한숨을 쉰다.
“왜,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냐구? 알료쉬카, 기도라는 건 죄수들이 써 내는 진정서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말해 봤자, 꿩 구워 먹은 소식이 될 뿐이고, 거절당하기 십상이란 말이야!”
당신의 마지막 남은 믿음마저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감옥에 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셔야 해요! 그래도 이곳에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명심해야 해요.”
슈호프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본다. 그는 이젠, 자기가 과연 자유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를 지경이었다.
슈호프는 수용소에 들어온 이후로 전에 고향 마을에 있을 때 배불리 먹던 일을 자주 회상하고는 한다. 프라이팬에 구운 감자를 몇 개씩이나 먹어치우던 일이며, 야채를 넣어 끓인 죽을 냄비째 먹던 일, 그리고 식량 사정이 좋았던 옛날에는 제법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먹었던때도 있었고, 게다가 배가 터지도록 우유를 마셔대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렇게 먹어대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를 해본다. 음식은 그 맛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어야 제맛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이 빵조각을 먹듯이 먹어야 하는 법이다. 입 안에 조금씩 넣고, 혀끝으로 이리저리 굴리면서, 침이 묻어나도록 한 다음에 씹는다. 그러면, 아직 설익은 빵이라도 얼마나 향기로운지 모른다. 수용소에서 생활한 지 만 팔 년째, 그러니까 벌써 구 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그 동안 슈호프가 먹은 것이 무엇인가. 옛날 같으면 입에 대지도 못할 그런 것들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싫증이 났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천만에 말씀이다.
이렇게 이백 그램짜리 빵 한 덩어리에 온 정신이 팔려 있는 슈호프 옆에는 제104반 전원이 모두 똑같이 이 빵에 넋을 잃고 보고 앉아 있는 것이다. — p.60
그런데 무엇 때문에 수용소 생활을 십 년씩이나 한 죄수가 작업에 열을 올린단 말인가? 못 하겠다고 버티면 그만 아닌가? 저녁까지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다 밤이 되면, 그때부턴 죄수들 세상이 아니던가 말이다.
어림없는 얘기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반이라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닌가 말이다. 똑같은 반이라도 이반에겐 이반대로, 표트르는 표트르대로 임금을 지불해 주는 그런 자유 세상에 있는 반하고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수용소에선, 상관이 감독을 하지 않아도 반원들끼리 채근을 하며 작업을 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 반이다. 반 전원이 상여 급식을 타먹게 되느냐, 아니면 배를 주리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걸린 것이다. 이것이 수용소의 반이라는 제도다. 어, 이놈이 게으름을 피우네, 네놈 때문에 반원들이 모두 배를 곯는다는 것을 몰라? 한눈 팔지 말고 빨리 일 못해! 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것이 바로 그 반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 같은 날은 한눈 팔 시간이 없다. 아프건 말건, 뛰고 달리란 말이야. — p.72
슈호프는 자기 몫의 국을 다 먹어 가고 있었지만, 여느 때와 같이 옆자리를 힐끔거리지는 않는다. 정당한 자기 몫을 먹고 있는데, 굳이 남의 그릇에 눈독을 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앞쪽에 있던 녀석이 자리를 뜨자 키가 큰 노인인 유-81호가 와서 앉는 것만은 놓치지 않는다. 슈호프는 이 노인이 제64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포인도소에서 줄을 서 있을 때, 자기 반 대신 ‘사회주의 생활 단지’ 건설장으로 작업을 하러 나간 반이 그 노인의 반이라는 것을 얼핏 들었다. 하루 종일 바람 피할 장소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자기 자신들을 에워싸는 철조망을 치고 돌아왔음이 분명하다.
슈호프는 이 노인에 대해 이렇게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수용소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아예 셀 수도 없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단 한번도 특사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십 년간의 형기가 끝나면, 또다시 십 년을 첨가하고는 했다는 것이다.
슈호프는 오늘 처음으로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수용소 내의 죄수들이 모두 새우등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는 반면에, 이 노인은 유독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 p.176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니, 의자에 뭘 기대고 앉은 것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다. 머리카락은 이미 모두 빠져서 이발할 필요도 없어진 지 오래다. 수용소에서 하도 잘 먹은 탓에 머리가 모두 빠진 모양이다. 그는 식당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듯, 슈호프 머리 너머 어느 곳인가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끝이 다 닳은 나무 수저로 건더기도 없는 국물을 단정한 모습으로 먹는다. 다른 죄수들처럼 국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먹는 것이 아니라, 수저를 높이 들고 먹는다. 이는 아래위로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뼈처럼 굳은 잇몸으로 딱딱한 빵을 먹고 있다.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어딘가 당당한 빛이 있다. 산에서 캐낸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무스름하다. 쩍쩍 갈라진 손은 그가 걸어온 수십 년의 감옥살이를 통해, 한 번도 가벼운 노동이나 사무직 같은 것을 얻어 일한 적이 없이, 생고생만 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굴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타협도 하려 들지 않는다. 삼백 그램의 빵만 하더라도, 다른 죄수들처럼 더러운 식탁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지 않고, 깨끗한 천을 — p.176
오, 하느님. 오늘도 영창에 가지 않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서라면 그런 대로 어떻게 잠들 수 있습니다.
슈호프는 머리를 창문 쪽으로 향하고 누웠다. 칸막이 판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 알료쉬카는, 전등불이 비치는 곳으로 머리를 향하고 슈호프와는 반대쪽으로 누워 있다. 또 성경을 읽고 있나보다.
마침 전등불이 침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무엇을 읽거나 바느질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알료쉬카는 슈호프가 ‘하느님’이라고 말한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슈호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것 보세요, 이반 데니소비치! 당신의 영혼이 하느님을 찾고 있어요. 왜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합니까?”
슈호프는 힐끔 알료쉬카를 쳐다본다. 두 눈이 촛불처럼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슈호프는 휴우 하고 한숨을 쉰다.
“왜,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냐구? 알료쉬카, 기도라는 건 죄수들이 써내는 진정서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말해 봤자, 꿩 구워먹은 소식이 될 뿐이고, 거절당하기 십상이란 말이야!”
수용소 본부 건물 앞에는 진정서를 담아두는 봉인된 진정함이 네 개 걸려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당 지도위 — p.200

○ 독자의 평
누군가 그랬다. 고전이란 “모두가 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대표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이제야 만나니 말이다. 그것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왠지 모를 미안함에 한 문장 한 문장 더 정성스럽게 읽었다.
솔제니친의 대표작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1956년에 소연방 최고재판소 군사심의관 회의에서 복권될 때까지 10년동안 작가 자신이 유형지를 돌며 경험한 수용소 생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때의 수용소 경험은 이 작품을 비롯하여 솔제니친의 다른 작품인 〈암병동〉이나 〈제1영역 안에서〉,〈수용소 열도〉등의 소재가 되었고, 현실에서 직접 목격한 역사적, 정치적 사건과 시대적 비극을 소재로 단순하고 소박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영하 수십도의 시베리아 한가운데에 있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슈호프. 수용소의 일과는 새벽 다섯시부터 시작된다. 아침에 기상해서, 점호, 식사,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과정, 작업일정, 그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 등이 작가의 경험을 기반으로 지나치다시피 세세히 묘사되어 있다.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기록하기 어려운 글이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함과 서로간의 경쟁이 존재하는 그곳도 하나의 세상이며 하나의 우주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 작품은 1970년 솔제니친에게 노벨상을 수여 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수용소에 수용된 여러 인간군상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의 체제와 이념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이념보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온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 이념적 논쟁의 시선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삶의 논리로 바라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세상과 단절된 수용소의 하루를 그리고 있지만, 어쩌면 울타리가 없는 우리네 일상을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일터로 나가고,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저녁시간을 개인적인 소일거리로 채우다가 잠자리에 드는 우리네 일상도 그 모습만 달리할 뿐 수용소의 하루는 대동소이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에겐 자유가 있지만, 수용소내의 그들에겐 자유가 없다는 것만 빼고는 그들이 사는 하루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는 같은 시간, 같은 하루이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절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제자리 대신 순번을 맞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208쪽) 라는 마지막 문단은 이 책의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슈호프나 강제노동수용소가 아닌 곳에서 지내는 우리에게도 하루라는 시간은 똑같다. 그 하루가 슈호프처럼 행운만 있거나, 아니면 불행한 일로만 가득한 하루로 편협되어 주어지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늘 하루가 자신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하루라고 했지만, 책속의 그의 하루를 따라 가다보면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좋지 않은 일, 운이 없는 일도 있었지만 잠자리에 든 그의 뇌리에는 그 모든 기억을 뒤로하고 행복한 기억만 남았을 뿐이다.
우리네 삶은 행운이라는 시실과 불행이라는 날실로 엮어진 천과 같다. 행운과 불행은 거의 같은 분량으로 삶의 매순간 우리와 조우하지만 어느 쪽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만족감은 다르다. 행운과 불행 중 어떤 쪽을 주관적으로 보는냐는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 선택에 의해 슈호프처럼 강제노동수용소의 정치범에게도 어떤 하루는 행복할 수 있고, 자유세상에서 좋은 음식에 좋은 옷을 걸치고 사는 누군가에게 어떤 하루는 불행 할 수도 있다.
오늘이라는 단어를 영어로는 Today 라고도 하고 Present day 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누군가에게는 어제처럼 반복된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선물 같은 날인 것이다. 구태의연한 문구를 예로 들자면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살아간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누군가에겐 간절한 내일이었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지나가는 듯한 하루였고, 누군가에겐 선물 같은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건 누가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다. 죽는 것보다 살아내는 것이 더 힘겨운 수용소에서 슈호프가 살아 낸 하루는 일상에서 살아난 우리네 하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하루였다. 우리네 눈으로 보기에는 행복할 수 있는 그 어떤 조건도 없었지만, 그 어느 날이 행복했고, 그런 행복한 날이 삼천육백오십삼 일이 이어지고 슈호프는 형기를 마쳤다. 수용소의 일상에서 찾아낸 소소한 즐거움이 그가 살아낸 수용소의 하루를 행복한 하루로 만들었다. 자유롭게 사는 우리네보다 더 행복한 하루로 말이다. 슈호프를 통해 솔제니친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슈호프처럼 행복하냐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