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조직신학 1 (이성과 계시)
폴 틸리히 / 한들 / 2001.11.30
일반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이성과 계시의 대립을 주로 논하였지만 틸리히는 이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이성은 그 자체를 뛰어 넘어 계시로 향하게 되어 있다고 하며, 이것은 바로 이성이 지니고 있는 갈등과 물음을 극복하려는 모습으로 보았다. 그래서 틸리히는 “이성이 계시에 대항하지 않으며 계시는 이성을 다시 종합하기 때문에 이성은 계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조직신학의 한 맥을 형성해 온 인물이다.
칼 바르트가 신학의 교의적이며 초자연적인 차원을 발견했고, 몰트만과 판넨베르크가 신학의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차원을 발견했다면, 틸리히는 신학의 실존적이며 존재론적인 차원을 발견한 신학자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학에 있어서는 바르트와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저서들은 강의의 교재로서 사용될 정도로 소개되어서 논쟁되어 왔지만 틸리히의 주요 저서인 ‘조직신학’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틸리히의 조직신학의 번역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그의 신학사상의 실존적이며 존재론적인 지평을 소화한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 일치, 보수와 진보의 만남, 상생의 신학이 요청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교의와 역사를 재통전한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는 ‘서론’과 제1부 ‘이성과 계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 목차
서론
l. 관점
- 메시지와 상황
- 변증신학과 케리그마
ll. 조직신학의 본질
- 신학의 순환성
- 모든 신학의 두 가지 형식적인 기준
- 신학과 기독교
- 신학과 철학 : 물음
- 신학과 철학 : 대답
lll. 신학의 구성
lV. 조직신학의 방법과 구조
- 조직신학의 자료
- 경험과 조직신학
- 조직신학의 규범
- 조직신학의 합리적인 성격
- 상관관계의 방법
- 신학체계
제1부 이성과 계시
l. 이성과 계시
- 이성의 구조
이성의 두 가지 개념
주관적인 이성과 객관적인 이성
이성의 깊이 - 실존의 이성
현실적인 이성의 유한성과 모호성
현실적인 이성의 갈등과 계시에 대한 요청 - 이성의 인식적인 기능과 계시에 대한 요청
인식의 존재론적인 구조
인식의 관계
진리와 검증
ll. 계시의 실재
- 계시의 의미
계시의 표지
계시의 매개체
계시의 역동성: 기원적인 계시와 의존적인 계시
계시의 지식 - 현실적인 계시
현실적인 계시와 궁극적인 계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궁극적인 계시
계시의 역사
계시와 구원 - 궁극적인 계시의 이성
자율과 타율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계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계시
형식주의와 감정주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계시 - 계시의 근거
하나님과 계시의 신비
궁극적인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

○ 저자소개 : 폴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1886 ~ 1965)
폴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1886년 8월 20일 ~ 1965년 10월 22일)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이다.
폴 틸리히는 1886년 8월 20일 독일에서 출생해 베를린, 할레, 브레슬라우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11년에 신학전문직학위를 취득해 대학에서 가르칠 자격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4년간 군목으로 참전하면서 ‘터전의 흔들림’으로 표현될 만한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1924년에 필립대학의 부교수, 192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정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독일에서 학자로서의 그의 삶은 나치의 등장으로 인해 끝났다. 나치는 그가 유대인 학생들을 도운 것을 문제 삼아 그의 교수직을 박탈했다.
위기에 처한 틸리히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은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였다.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틸리히는 낯선 땅에서 영어를 익히면서 강의를 했다. 어설픈 영어와 독일식의 딱딱한 악센트 때문에 듣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의 강의에는 그에게 주어진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라는 칭호에 걸맞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유니온신학교에서 퇴임한 후 그는 1955년 부터 1962년 까지 하버드대학의 특별교수로 초빙되어 신학부 박사과정학생들을 위한 세미나를 인도하며 집필 활동을 했다. 하버드대학에서 은퇴한 후에는 다시 시카고대학으로 초빙되어 강의를 했다.
틸리히는 1965년 10월 11일 시카고 대학 신학부가 주관한 강연회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친 후 심장에 고통을 느껴 입원했고, 10월 22일 아내와 함께 짧은 독일어 시를 낭송한 후 자리에 누워 숨을 거뒀다.
신학뿐 아니라 철학과 문학과 역사에 정통했던 그가 남긴 저서로는 ‘조직신학 1, 2, 3권’ (Systematic Theology), ‘그리스도교 사상사’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존재의 용기’ (The Courage to Be), ‘믿음의 역동성’ (Dynamics of Faith) 등 다수가 있다.

.폴 요하네스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
.출생: 1886년 8월 20일, Province of Brandenburg
.사망: 1965년 10월 22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영향을 준 인물: 쇠렌 키르케고르, 마르틴 하이데거,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마르틴 부버 등
.영향 받은 인물: 코넬 웨스트, 로버트 벨라, 리처드 니부어, 도날드 A. 크로스비, 칼 E. 피터스 등
.배우자: Hannah Werner-Gottschow (1924~1965년)
.저서: 주저 ‘조직신학 1, 2, 3권’ (Systematic Theology) 외 ‘그리스도교 사상사’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존재의 용기’ (The Courage to Be), ‘믿음의 역동성’ (Dynamics of Faith) 등
20세기 전반기의 독일 교회에는 칼 바르트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한 명의 대 신학자다.
바르트와 같은 해인 1886년에 태어난 폴 틸리히는 여러 가지 점에서 바르트와 대조되는 신학자이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 온전한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면, 틸리히는 이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탐구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바르트처럼 하나님의 계시에서부터 신학을 시작하지 않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에 귀 기울인 다음, 거기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신학을 전개하였다. 즉, 바르트가 하나님 중심, 계시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했다면, 틸리히는 인간 상황에서부터 출발하는 인간 중심 혹은 경험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바르트와 같은 신학의 강점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과 궁극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인간 현실에 부적합해질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틸리히와 같은 변증 신학은 기독교 복음의 상황적 적실성 (contextual relevance)을 가질 수는 있으나 자칫 복음을 왜곡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틸리히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언어로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의미 있게 소개할 길이 없다고 보았기에 부적합의 위험보다는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는 길을 택했으며, 그 가운데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탁월하고 창조적인 신학의 하나를 남기게 되었다.
- 역자 : 유장환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목원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 책 속으로
틸리히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조직신학의 한 맥을 형성해 온 인물이다. 칼 바르트가 신학의 교의적이며 초자연적인 차원을 발견했고, 몰트만과 판넨베르크가 신학의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차원을 발견했다면, 틸리히는 신학의 실존적이며 존재론적인 차원을 발견한 신학자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학에 있어서는 바르트와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저서들은 강의의 교재로서 사용될 정도로 소개되어서 논쟁되어 왔지만 틸리히의 주요 저서인 ‘조직신학’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틸리히의 조직신학의 번역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그의 신학사상의 실존적이며 존재론적인 지평을 소화한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 일치, 보수와 진보의 만남, 상생의 신학이 요청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교의와 역사를 재통전한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 책 표지 중에서
○ 독자의 평 1

일반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이성과 계시의 대립을 주로 논하였지만 틸리히는 이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이성은 그 자체를 뛰어 넘어 계시로 향하게 되어 있다고 하며, 이것은 바로 이성이 지니고 있는 갈등과 물음을 극복하려는 모습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성이 계시에 대항하지 않으며 계시는 이성을 다시 종합하기 때문에 이성은 계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계시를 향한 이성의 모습을 틸리히는 ‘자율’ (autonomy), ‘타율’ (heteronomy), ‘신율’ (theonom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율이란 이성이 본질적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이성 자체만을 주장하는 것이고, 타율이란 본질 (essence)이라는 이름하에 어떤 외부적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고, 신율이라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자율과 타율 사이의 대립의 해결이라고 한다. 자율적 이성은 본질적 이성과 연합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존재 아래에서는 결코 완성할 수 없고 단지 그 연합을 추구할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추구가 바로 계시를 필요로 하는 요청이라고 한다. 이 계시란 바로 우리에게 가장 ‘궁극적 관심’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 계시의 방편으로는 자연, 역사, 집합체, 개인, 언어 등을 포함시킨다. 이러한 것은 계시 자체와 동일시 되지는 않지만 그 자신을 넘어서 신비로 향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단지 어떤 언어 자체가 계시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계시의 방편이 그 자체에 계시의 능력이 있다고 할 때는 이미 계시의 신비를 지표하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요 오히려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한다. 계시란 어떤 제한적, 존재적 실재를 통해 나타나지만 존재하는 어떤 것도 계시를 방해할 수 없고, 계시는 그러한 것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를 방해하는 것은 ‘마귀적’ (demonic)이라고 한다. 이러한 계시의 내용은 어떤 상징(symbol)과 비슷하다고 한다. 모든 계시의 방편은 유한적 상황에서 주어지지만 그 유한성을 부정해야 하며, 그 부정을 통해 그 유한성을 극복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극복된 계시는 존재의 근원 (ground)와 연합된 계시라고 한다. 이러한 ‘최종적 계시’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계시라고 한다. 예수는 궁극성을 주장하려는 모든 유혹을 피했고, 자신을 십자가에서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유한성으로 우리를 주장하려는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최종적 종교’ (final religion)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최종적 계시는 아니지만 그 계시를 증거한다고 한다. 이러한 계시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틸리히에게 그리스도란 역설적 실체이다. 성육신(신-인)이란 바로 존재의 제한성에 굴복되지 않으면서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난 역설적 실체라는 것이다.
물론 틸리히는 주장하기를 역사적 예수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뒷 배경’ (picture)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유한하고 고뇌하고 죄있는 예수가 자신을 부인하며 존재의 근원과 연합된 그 모습 혹은 배경 (picture)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존재 (new being)가 있다고 한다.
간단하나마 이러한 틸리히의 신학을 살려보노라면 그의 신학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존재의 유한성, 역사성, 모호성 등을 해결하기 위해 단지 그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그 존재의 문제를 초월하며 해결하는 ‘존재 그 자체’로 정의하였지만 이러한 하나님은 존재의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틸리히같은 인간 스스로가 자위하는 것에 불과하다. ‘존재 그 자체’란 존재하는 인간 자신의 투영에 불과한 것이다.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신 그와 비슷한 전능한 신을 추론하려고 하다가 결국 ‘존재’가 아닌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정의한 것이다. 사실 틸리히의 신학적 구조는 헤겔 철학에 근거한다고 하겠다. 존재 혹은 경험의 모호성 (ambiguity)은 그 해결을 위해 어떤 절대성을 향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헤겔 철학이다. 한편 모든 객관적 범주를 초월하는 ‘존재 그 자체’의 神개념은 일종의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겠다.
틸리히는 하나님을 주체/객체를 초월하는 분으로 말한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틸리히가 정의하는 ‘존재의 근원’ 역시 초월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어떻게 ‘궁극적 관심’이 혹은 ‘존재 그 자체’가 주체/객체를 초월하는 지 틸리히는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어떤 식이든지 우리가 ‘하나님’ 혹은 ‘궁극적 관심’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객체가 되신 것을 의미한다. 사실 하나님을 한 존재로 본다고 해서 하나님은 유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로 전능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고 우리의 존재를 낳게 하신 창조주이신 것이다. 끝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정의하고 역사적 예수의 존재는 별의미 없는 것으로 보는 틸리히의 기독론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 독자의 평 2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영원한 그리스도교 진리를 오늘의 시대에 새롭게 해명한 매우 방대하고도 치밀한 신학적 축조물이다. 틸리히는 서론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될 중요한 두 가지 전망을 제시한다. 첫째는 신학의 연구에 있어서 오늘의 조직신학의 위치를 성찰한다. 둘째는 조직신학은 고유한 방법과 구조가 있으며, 또 있어야 함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틸리히는 조직신학의 자료를 ‘성서’로 대답한다. 성서는 기독교의 근거가 된 근원적인 문서이다. 그런데 틸리히에 의하면 성서는 기자들이 체험했던 “계시의 사건”에 대한 증언과 해석이지 “계시 자체”일 수 없다. 즉 성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문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자체는 인간의 해석학적인 불꽃에 의해서 이미 담금질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거기에는 이미 인간의 이해가 스며있기 마련이다. 모든 계시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틸리히에 의하면 성서는 이미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 상호 침윤된 침전물이다. 그러나 틸리히는 성서만이 계시를 보증하는 유일한 자료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를 한 권의 성서에 가둘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 속에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언어에 의해 전달될 수 없는 한계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언제나 소극적으로 이해될 뿐이다. 오히려 성서를 계시 자체로 이해하는 것은 은밀한 우상화이며, 이는 우상타파 정신인 프로테스탄트 원리에도 직접적으로 위배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신학자로서도 경계선에 서있는 신학자이다. ‘종교의 실현’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 “나의 생각들이 나의 삶에서 전개되어 나온 과정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나는 경계선의 개념이야말로 나의 인간적, 지적 발전의 전체를 보여주는 적절한 상징이라 생각했다. 거의 모든 순간마다 나는 실존의 두 갈래 가능성 사이에 서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어느 하나에 안착할 수도 없었고 또 그 어느 하나에 순전히 반대입장을 취할 수도 없었다. 생각한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런 입장은 사고를 위해서는 생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있어서 어렵고도 위험한 것이며 끊임없이 결단을 요구하고 그리하여 두 갈래의 기로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 입장과 그에 따른 긴장이 나의 운명과 나의 행적을 결정해 왔다.” 철학과 신학의 경계에 서서 기독교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조직신학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 독자의 평 3
폴 틸리히의 신학의 형성 & 조직신학의 방법과 구조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 ― Introduction, pp.28-68.
- 들어가는 말

무릇 책의 서론은 본문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에 들어가기 앞서 저자가 독자를 향해 마지막에 손 수 쥐어주는 일종의 지형도 (地形圖)이다. 틸리히의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은 영원한 그리스 도교 진리를 오늘의 시대에 새롭게 해명한 매우 방대하고도 치밀한 신학적 축조물이다. 틸리히는 서론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될 중요한 두 가지 전망을 제시한다. 첫째는 신학의 연구에 있어서 오 늘의 조직신학의 위치를 성찰한다. 둘째는 조직신학은 고유한 방법과 구조가 있으며, 또 있어야 함 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우선 틸리히의 깊은 사유의 길과 그 의미를 따라가보자.
- 몸 말
1) 신학의 형성
틸리히에 의하면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에 대한 조직적인 해명”이다. 이러한 신학의 연 구는 ‘역사적인’ (historical) 차원과 ‘구성적인’ (constructive) 차원으로 전개된다. 이 양자의 상호내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우선 전자의 차원인 역사신학은 성서연구, 교회사, 종교-문 화사로 구분되면서 상호 의존적이다. 후자의 차원인 조직신학은 역사신학보다 더욱 체계화 하기 어 렵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조직신학의 체계화에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신학전통의 주요한 항목인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이 슐라이어마허 이후 ‘종교철 학’ (philosophy of religion)으로 대치되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자연신학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비판 과, 종교철학에 대한 신정통주의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극복된다. 둘째, 조직신학 안에서의 ‘변증 학’ (apologetics)의 위치이다. 이 문제는 조직신학이 “대답하는 신학”이라는 사실을 지시하면서 극복된 다. 변증학은 조직신학에 편재하는 요소이다. 셋째, ‘교리’ (dogma)의 역사적인 타락과 ‘교의 학’ (dogmatics)에 대한 불신감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윤리학, 변증학, 교의학의 문제를 포괄 하는 “조직신학”이라는 용어를 취함으로서 극복된다. 마지막으로 신학의 형성은 ‘실천신학’ (practical theology)을 통하여 온전히 성취된다. 실천신학은 신학의 역사적인 차원인 역사신학과 구성적인 차원 인 조직신학을 교회의 삶에 적용시키는 기술이론이다. 실천신학은 그 시대가 품고 있는 새로운 문 제들을 조직신학에 제시한다. 동시에 실천신학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 새로운 탐구를 할 수 있도록 역사신학에 조명한다.
2) 조직신학의 방법과 구조
조직신학의 과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서론적인 질문이 등장한다. 첫째, 조직신학의 ‘자료’ (sources)는 무엇인가? 둘째, 이 자료를 받아들이는 매개 는 무엇인가? 셋째, 자료 사용을 결정하는 ‘규범’ (norm)은 무엇인가? 넷째, 조직신학이 추 구하는 ‘합리적 성격’ (rational character)의 원리는 무엇인가? 다섯째,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 (method of correlation)은 무엇인가? 여섯째, 틸리히의 저서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은 신앙 내용의 어 떠한 차원을 해명하는가?
(1) 조직신학의 자료 : 조직신학의 자료는 무엇인가?
틸리히는 조직신학의 자료를 ‘성서’ (Bible)로 대답한다. 성서는 그리스도교의 근거가 된 근원적인 문서이다. 그런데 틸리히에 의하면 성서는 기자들이 체험했던 “계시의 사건”에 대한 증언과 해석이 지 “계시 자체”일 수 없다. 즉 성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문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 자 체는 인간의 해석학적인 불꽃에 의해서 이미 담금질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거기에는 이미 인간의 이해가 스며있기 마련이다. 모든 계시는 결코 순수하 지 않다. 성서는 이미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 상호 침윤된 침전물이다. ― 성서가 빙의현 상에 의하여 자동기술로 기록되어진 문서가 아닌 바에야, 분명히 성서는 하나님의 노에시스와 인간 의 노에마가 동시에 착상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서는 컨텍스트를 그리워하는 로고스의 케 노시스에 의하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묘한 운명의 텍스트(書)임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성서는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인간의 이해와 해석으로부터 사면의 특전을 누릴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틸리히는 성서만이 계시를 보증하는 유일한 자료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어 느 누구도 하나님의 계시를 한 권의 성서에 가둘 수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 어 속에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언어에 의해 전달될 수 없는 한계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언제나 소극적으로 이해될 뿐이다. 오히려 성서를 계시 자체로 이해하 는 것은 은밀한 우상화이며, 이는 우상타파 정신인 프로테스탄트 원리에도 직접적으로 위배된다.
틸리히는 조직신학의 두번째 자료를 ‘교회사’ (church history)로 대답한다. 교회사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다. 성서 또한 교회사의 한 사건이자 산물이며, 성서를 만나는 모든 사람은 성서의 이해에 있어서도 교회의 전통에 의하여 인도된다. 역사적인 신앙인은 2천년 교회사의 전통을 뛰어넘어 성 서 저자의 상황으로 직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에는 이미 교회사의 전통과 영향사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의 개혁도 그리스도교 전통이 형성하고 보존한 “유일한” 지평 안에서 투쟁을 이루었을 뿐이다. 경험은 결코 전통 자체에 육박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 도교의 역사적 전통의 형세 (形勢)를 드넓게 조망할 수 있는 교회사는 조직신학의 주요한 자료가 된 다. 이러한 맥락에서 틸리히는 조직신학과 교회 전통의 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진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카톨릭은 교회의 전통을 조직신학의 진정한 자료로 삼는다. 성서는 교회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교회에 기초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개신교는 교회의 풍부한 유산들을 궁극적인 관심과 결코 동일화시킬 수 없다 (Sola Scriptura).
틸리히는 성서와 교회사보다 더 넓은 조직신학의 자료를 ‘종교사와 문화사’ (history of religion and culture)로 언급한다. 조직신학은 다차원적인 인간 실존의 질문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그의 과제로 삼는다. 그러기에 종교와 문화라는 다양한 층위에 포함된 실존적인 질문을 조직신학자는 놓치지 않 아야 한다. 종교사와 문화사에 대한 조직신학의 열린 감각은 종교와 문화의 심층에 이미 새로운 그 리스도교 메세지를 근원적으로 갈구하고 있음을 전제하며, 또한 조직신학자는 종교와 문화를 깊은 안목으로 읽고 성찰해야 함을 의미한다.
(2) 체험과 조직신학 : 이 자료를 수용하는 매개는 무엇인가?
“오늘에 있어서 가장 해명되지 않은 것들” (H. G. Gadamer)이라고 할 수 있는 ‘체험’ (experience)의 문 제를 틸리히는 여기에서 조명한다. 틸리히는 존재신비주의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정신사적 계보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모든 학문과 이성적인 탐구의 난제이자 아킬레스건인 ‘체험’의 깊고 심오한 의미를 엿본 신학자이다. 그는 일단 여기에서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모든 자료는 체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체험이라는 매개 없이 자료는 건너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틸리히를 향해 경험신학자라는 오해의 시선을 품을 수도 있다. 이에 그는 다시 지적한다. 자료는 체험으로부터 추상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꺼꾸로 체험을 통하여 자료가 전달된다고 본다. 그는 체험의 불완전한 본성을 강조한다. 즉 체험이 자료 자체이거나, 체험이 자료를 이끈다고 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예로 슐라이어마허를 지적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체험을 통하여 신학의 내용과 자료를 얻어내려 하였다. 그는 신앙의 확실성의 근거를 생생한 실존적 체험으로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신학적인 오류를 지적하면서, 체험은 결코 조직신학의 내 용이 얻어지는 자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체험은 신학의 매개일지언정 신학의 근본자료일 수 는 없다. 이어서 그는 인간의 내재적 경험을 방법론적인 젖줄로 삼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시도한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경험을 가장 궁극적인 범주로 처리해버리면 신학체계에서는 전체 경험을 초월할 수 있는 ‘입각점’ (standpoint)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둘째, 과학 적인 경험의 방법은 신학의 실존적인 운명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방법이다. 셋째, 성령을 통한 참 여의 체험이 없이는 궁극적인 관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최종적으로 틸리히 는 체험의 중요성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체험을 우상화하는 모든 신학을 비판한다.

(3) 조직신학의 규범 : 자료 사용을 결정하는 규범은 무엇인가?
자료의 다양성과 매개의 불명료성과 같은 지극히 불안한 조건들은 결국 든든한 경첩과 같은 ‘규 범’ (norm)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자료와 매개는 규범을 통하여 올바로 인도되고 이에 따라 온전한 신 학세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규범의 기원은 초기 교회사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규범은 모든 교회 사에 관류하며 전승된다. 신조와 성직계급의 출현은 규범의 역사적 기능 속에서 피워낸 교회의 소 중한 유산이다.
규범은 교회와 그리스도교 메세지와의 만남에서 창조된다. 이 둘 사이의 교감은 시대마다 다른 문양(紋樣)으로 형성되기에 규범 또한 변한다. 틸리히는 규범을 ‘성장’하는 운명으로 해석한다. 그 리고 이 규범의 출현은 신학의 사변적인 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생활에 뿌리 를 두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규범은 신학자 개인의 의견으로 마감해서는 안 되고, 교회와 그리스도교 메세지의 만남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조직신 학과 신학자의 운명을 가늠하게 된다.
조직신학은 그 시대를 새롭게 조명해 줄 수 있는 올바른 형식의 규범을 추구한다. 틸리히는 그의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절박한 징후를 바로 진정한 실재를 상실한 인간의 자기소외의 문제라고 강 조한다. 그는 그의 시대 안에서 해명해야 할 문제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 시대의 문제는 바로 우리 실존의 자기소외가 극복되는 화해, 재연합, 창조성, 의미, 희망 등 실재의 문제이다.”(ST, p.49) 틸리히는 이 실재를 ‘새로운 존재’ (New Being)로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결 국 그에게 있어 조직신학의 규범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이고, 이는 조직신학의 모 든 자료를 위한 기준이 된다.
(4) 조직신학의 합리적 성격
조직신학은 그리스도교 메세지를 현재의 상황에 관여하게 하는 구성적인 과제를 갖는다. 그 가운 데 이성은 조직신학의 과제에 매우 주요한 기능으로 사용된다. 특히 진리를 방법론적으로 표현함에 있어서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 이성의 역할을 둘러싼 많은 물음이 여전히 해명 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틸리히는 이성을 ‘황홀한 이성’ (estatic reason)과 ‘기술적 이성’ (technical reason)으로 구분한다. 황홀한 이성은 신앙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이성이다. 기술적 이성은 추상화라 는 방법을 통하여 신앙의 내용을 추론하는 이성이다. 하지만 이 둘 모두가 신학의 자료가 될 수 없 다고 한다. 오히려 신앙의 내용이 이성을 파악한다. 결국 인간의 합리성은 황홀한 이성과 기술적 이성 사이의 끊임없는 줄타기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기에 여전히 모호할 뿐이다. 이는 인간 실존 이 모순의 사각지대를 넘어설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에 예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히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조직신학의 합리적 성격을 결정하는 세 가 지 원리를 제시한다.
첫째가 ‘의미적 합리성’ (semantic rationality)의 원리이다. 신학 언어가 가능한 그 근거는 수학적 형 식주의로 언어를 구성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있게 지시할 수 있다는 점이 다. 신학의 언어는 그가 지시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물론 신학 언어의 모든 의미내용이 서로 정합 적으로 관계되어야 한다. 또한 신학의 언어는 다른 언어세계 내부로 스며들고, 다른 언어들은 신학 의 언어를 향해 지향하고 심지어 깊이 관여하고 있다. 신학의 언어는 결코 모놀로그일 수 없다. 그 러하기에 신학자는 거룩과 계시와 신화에 갇힌 의심스러운 언어들을 새롭게 비추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내용을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비신화화하는 노력은 신학자의 주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바로 신학 언어의 성숙이란 그 신학적 의미가 언어세계의 구석구석까지 교호적으 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단, 의미의 투명성과 실존적인 순결함을 신학자는 견지해야 한다.
둘째, ‘논리적 합리성’ (logical rationality)의 원리이다. 틸리히는 변증법과 형식논리학 사이의 충돌은 없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적 변증법은 논리적 합리성의 원리를 위배하지 않는다. 그 예증 이 바로 종교와 신학에서의 ‘역설’ (paradox)이다. 역설은 논리적 합리성의 원리를 위배하는 모순을 뜻함이 아니고, 모든 인간적인 기대와 가능성을 초월할 때 열리는 전혀 새로운 빛이다. 역설은 하 나님의 행위가 유한한 이성을 초월하지만, 부정하지 않음을 지시한다. 틸리히는 역설을 신학의 고 유한 논리적 합리성으로 포섭시킨다. 틸리히는 무한자와 유한자, 하나님과 존재가 상호 긴밀히 관 여되어 있는 내밀한 틈새이자 초점인 이 역설을 신학적 논리로 정식화한다. 그에 있어서 “역설은 결코 논리적 수수께끼가 아니라 새로운 실재이다.”(ST II, p.92)

셋째, ‘방법론적 합리성’ (methodological rationality)의 원리이다. 실로 신학의 방법은 비합리적인 요 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학은 합리적인 이성을 넘어선 하나님에 진지하게 접근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원리가 확립되면, 그 원리는 합리적으로 일관되게 수행되어야 한다. 방 법론적 합리성을 적용하는 일관성의 최종적인 표현은 ‘신학체계’ (theological system)이다. 그러나 지 도는 땅이 아니고 이름은 사람이 아니듯, ‘체계’는 생동하는 삶과 세계를 결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오히려 체계는 현실을 침범하면서, 동시에, 현실에 침범 당한다. 체계는 순간순간 명멸한다. 틸리히는 ‘체계’에 대한 근원적인 거부를 주장하는 자들의 밑변에 다음과 같은 세가지 관점이 있 다고 분석한다. 첫째, 체계는 연역적이어야 한다는 오해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진리의 실존적 성 격에 비추어 볼 때 연역적 체계는 오히려 모순적이다. 둘째, 체계는 오히려 진일보한 연구를 가로 막는 장애물이라는 오해이다. 하지만 체계는 서술의 한 부분을 넘어 서술 전체의 의미를 밝혀준다. 셋째, 체계는 정신생활의 창조성을 유폐시키는 감옥이라는 오해이다. 하지만, 오히려 인류정신사는 체계를 통하여 관념의 모험이 풍부하게 실현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체계는 무한자의 동어반복(同語 反覆)과 유한자의 시론(試論) 사이에 형성된 긴장의 패턴이다.
(5) 상관의 방법
틸리히에 있어서 신학방법은 하나의 도구이다. 또한 신학방법의 유용성은 조직신학의 목표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방법은 인식과정 자체에서 끊임없이 고려된다. 특히 틸리히는 실존적인 질문과 신학적인 대답의 상호 의존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상관의 방법’ (method of correlation)을 그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용한다. 그에 의하면, 결코 하나님은 인간 에 의해 관여받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방식은 “인간적”이다. 상관의 방법 의 모티프는 바로 “인간적”이라는 강조점의 주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상관의 방법은 하나님의 시선 만을 강조한 ‘정통주의’나 인간의 시선만을 강조한 ‘자유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 이 양자의 관 계를 새롭게 조명한다.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은 실존적인 질문이 출현하는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고, 그리스도교 메세지를 사용하는 상징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임을 보여준다. 그 대답은 조직신학의 자료로부터, 매개를 통하여, 규범 아래에서 얻어지는 대답이다. 또한 그 대답의 내용은 계시적 사건 에 의존하고, 대답의 형식은 물음의 구조에 의존한다.
틸리히의 이러한 상관의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의 오류를 피하면서, 극복한다. 첫째는 구체 적 인간 상황과는 무관한 ‘초자연주의적인 방법’ (supranatur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에 대한 조율이 결핍된 “말씀의 계시”는 인간과는 무관할 뿐이다. 둘째는 구체적인 인간 상황만이 고려가 되는 ‘자연주의적 방법’ (natur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이 “말씀의 계시”로 뒤바뀌어질 때 결 국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게 된다. 셋째는 인간 상황과 하나님 사이에 깊은 골을 그은 ‘이원론적 방법’ (du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과 “말씀의 계시”는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자연신학적인 파토스는 결국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평행선만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틸리히 에 있어서 초자연은 숨겨진 자연이며, 자연은 나타난 초자연이다. 그는 ‘상관의 방법’이라는 묘(妙) 를 통하여, 실존의 분석에서 자연신학을 해명하고, 실존에 내포된 질문에 주어진 대답으로 초자연 신학을 해명한다. 이렇게 하여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해리(解離)는 상관의 방법을 통하여 극복된다.

(6) 신학체계
틸리히는 그리스도교 메세지의 구조와 실존의 구조를 상호 관련시킨다. 그 결과 이 양자는 다섯 차원으로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존재와 하나님’ (Being and God)이다. 유한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분석되고 하나님이 답으로 주어진다. 둘째, ‘실존과 그리스도’ (Existence and Christ)이다. 인간 실존의 소외와 상황이 분석되고 그리스도가 답으로 주어진다. 셋째, ‘생명과 성령’ (Life and Spirit)이다. 생명이라는 모호성 속에 내포된 물음이 분석되고 성령이 답으로 주어진다. 넷째, ‘이성과 계시’ (Reason and Revelation)이다. 인간 이성의 모호성 속에 내포된 물음이 분석되고 계시가 답으 로 주어진다. 다섯째, ‘역사와 하나님나라’ (History and the Kingdom of God)이다. 인간 역사의 모호성 속에 내포된 문제가 분석되고 하나님 나라가 답으로 주어진다. 그런데 틸리히는 네번째 차원인 ‘이성과 계시’를 조직신학의 본문에서 가장 먼저 조명한다. 왜냐하면 조직신학은 신학의 인식론적인 해명, 이성에 대한 해명, 계시에 대한 해명을 가장 근본적으로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 로 그는 체계를 넘어선 계시를, 체계적으로 접근하면서 해명하는 조직신학자의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의 과제에 주목한다.
- 나가는 말
질문으로 대신한다.
첫째, 유한한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물론 틸리히의 하나님은 동정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 에서 보면 그 자신은 동정적이지 않다. 단지 틸리히의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의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이 이미 내함(內含)된 존재이다. ― 틸리히는 이 양자를 상관의 방법으로 매개하고 이 때 출현 하는 딜레마를 ‘역설’의 구조로서 해소해 버린다 ― 여기에서는 존재의 유한성 전체가 하나님의 무한성과 짜맞춰진,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 어둡고도 영원한 침묵의 우주를 배후에 전제해야 할 것이다. 유한의 다양성은 단지 무한의 동일성을 지탱하는 구성요건일 뿐이다. 이렇게 쿠사누스 와 쉘링이 걸어왔던 “반대의 일치”나 “동일성의 철학”의 한계를 틸리히는 어떻게 극복하는가.
둘째, 유한한 존재는 상황 속에서 질문하고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은 상징을 통하여 대답한다(ST, p.64). 분명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받는, 유한한 존재의 그 아르키미데스 점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점은 비존재의 위협에 의해 언제 와해될 지도 모르는 무화(無化)의 운명에 처하는가. 아니면 결 코 와해되지 않고 영원히 불멸하는 점인가. 아니면 영원한 현재의 점인가.
셋째, 틸리히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특징인 성서의 “인격으로서의” 하나님 또한 유한한 인간의 표상에 불과한가(cf. anthropomorphism). 더 나아가 인격으로서의 “하나님” 자체도 주객관계가 빚어낸 잠정적인 암호(K.Jaspers)와 같은 것에 불과한가. 그리고 이러한 표상화-암호화의 자리(locus) 와 주체(subject)는 어디인가.
넷째, 역설(ST, p.57)은 양자의 관계가 비대칭적일 때에만 가능한 개념이다. 틸리히는 존재와 하나 님의 비대칭적 관계를 공간적 은유(ST, p.64)를 통하여 설정한다. 그런데 역설의 구조가 시간적 차원 으로 조명될 때에 과거와 미래는 대칭적이지 않음을 지시하게 된다. 즉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움 이 미래에서부터 현재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틸리히는 “하나님은 새롭다”라는 실체 속성 의 오류를 피하면서도 새로움과 하나님의 관계를 어떻게 규명하는가. _ 전철 (1998년 3월 10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