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지성인의 미래와 새계급의 성장
앨빈 W. 굴드너 (Alvin W. Gouldner) / 이화여자대학교출판 / 1994.10.15
저자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지식 계급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고 사회 변동 과정에 따라 지식을 소유한 새 계급의 점차적인 득세 현황에 좌파적 헤겔주의의 논리로써 이들 사회 세력의 모순된 성격을 분석하였다. 그러한 비판을 뚜렷이 하면서도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논리로써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이론 체계, 명제, 추측, 논쟁, 미래의 전망을 논하였다.

○ 목차
옮긴이의 말
고마움의 말
머리말
주제1. 마르크스주의 시나리오의 결점들
주제2. 농민과 전위대
주제3. <새 계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주제4. 겨룸의 마당
주제5. 문화적 부르조아지인 <새 계급>
주제6. 말의 공동체인 <새 계급>
주제7. 교육과 <새 계급>의 재생산
주제8. 인텔리겐차와 지성인
주제9. 명령 수행적인 옛 관료, 참모적인 새 인텔리겐차
주제10. 혁명적 지성인
주제11. 지성인과 인텔리겐차의 소외
주제12. 소외 재생산에서의 가족
주제13. 마르크스주의의 딜레마와 전위조직
주제14. 결함을 가진 보편계급
주제15. 정치적 맥락
주제16. 죽어가는 계급에게 주는 위로
맺음말
참고문헌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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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앨빈 워드 굴드너 (Alvin Ward Gouldner, 1920 ~ 1980)
앨빈 워드 굴드너 (Alvin Ward Gouldner, 1920년 7월 29일 ~ 1980년 12월 15일)는 뉴욕 출생으로, 뉴욕학파의 한 사람으로서, R.K.머턴의 지도를 받고 1959~1964년 세인트 루이스의 워싱턴대학 교수로 있다가 1972~1976년 암스테르담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초기의 연구는 M.베버를 중심으로 한 관료제 분석에 집중하여 ‘산업에 있어서의 관료제’ (Patterns of Industrial Bureaucracy, 1955) 등 현장의 관찰조사에 의한 이론을 전개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강단사회학 (講壇社會學)과 기계론적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바탕으로 ‘자기반성의 사회학’ 확립에 전념하였으며, ‘사회학의 재생을 위하여’ (The Coming Crisis of Western Sociology, 1970)는 사회학의 비판성 회복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전체의 패러다임 (paradigm) 논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73년 이후 ‘Theory and Society’ 지(誌)를 주재하여 비판사회학의 지적 조직화에도 힘썼다.
만년에는 신(新)헤겔파 사회학이라 자칭하는 입장에서 이데올로기 · 테크놀러지 · 지식인 · 마르크스주의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주요저서에 ‘The Dialectic of Ideology and Technology’ (1976), ‘The Future of Intellectuals and the Rise of the New Class’ (1979), ‘The Two Marxisms’ (1980) 등이 있다.

– 역자 : 박영신
1938년 경북 문경 출생.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버클리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를 받았다. 사회학 이론, 역사 사회학, 사회 운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와 교육을 해왔지만, 일관된 관심은 우리 사회의 가치 지향성과 도덕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이며, 녹색연합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연세대 교육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 미국 예일대 종교학 석사, 버클리대 사회학 박사.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현상과 인식’ 편집인, 한국사회이론학회 초대회장,
한국사회운동학회 초대회장, 노인시민연대 공동대표, 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 역임.
녹색연합 상임대표, 예람교회 공동목사, 재단법인 목민 이사장.
주요 저서로는 ‘사회학 이론과 현실 인식’, ‘역사와 사회 변동’, ‘우리 사회의 성찰적 인식’,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가 있다.
○ 출판사 서평
저자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지식 계급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고 사회 변동 과정에 따라 지식을 소유한 새 계급의 점차적인 득세 현황에 좌파적 헤겔주의의 논리로써 이들 사회 세력의 모순된 성격을 분석하였다. 그러한 비판을 뚜렷이 하면서도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논리로써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이론 체계, 명제, 추측, 논쟁, 미래의 전망을 논하였다.
○ 역자의 글
– 과시와 절제에 대하여 _ 박영신
* 아래의 글은 한국사회이론학회 (주제: 과시하는 한국 사회 / 2011년 12월 10일 / 경북대학교)에서 제가 발표한 것 (요약문)입니다.
과시와 절제에 대하여 _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1. 머리말
오늘날의 ‘과시’ 현상은 소비주의 또는 소비 문화에 곧바로 이어질 것이다. 소비 행위처럼 온 세계를 뒤덮고 있는 강박 현상은 없다고 할 정도이다. 지구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고,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로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개인과 국가의 소비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갈등과 대결을 일삼는다.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과시 현상은 분명 이와 같은 소비 행위와 뗄 수 없게 이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만을 들추어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풀이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 나름의 관심 내용과 표현 방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사회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사회 현상에 대한 이론 관심을 끌어들일 수 있다. 개인에게는 자기가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좋아하고 눈에 들어 하는 바대로 행동한다. 반드시 자기의 편리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대로 따라 한다. 과시 현상은 이러한 행동 방식과 이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과시 현상을 풀이하고자 한다면 구체스런 우리의 문화 맥락과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단순히 소비주의나 소비 문화에 대한 논의를 겨냥하지 않고 인간의 사회 행위를 풀이하는 이론 안에 머물러 있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의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또 끌어들이게 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과시 행위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느며, 무엇을 과시의 항목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은 무엇 때문인지에 대한 논의를 아래서 짧게 펴 보고자 한다. 아래에서 과시 현상에 대한 풀이를 시도하게 되겠지만 이와 함께 그 현상에 대한 비판도 곁들이고자 한다.
2. 적정성의 문제
개인은 모두 자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사회에서 용납될 수 있는 적정한 선의 테두리 안에 들어서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여러 사회 조건에 따라 변하는 옷차림을 보기로 들어 표현 행위를 풀이해 볼 수 있다.
옷은 자기를 표현하는 자기 진술이다.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옷 하나 걸치더라도 그것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남에게 알리고자 하며, 뒤바꾸어 자기도 다른 어떤 사람이 걸친 옷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게도 된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모두가 마주하는 현상이다. 누구라도 자기를 보여야 하고 드러내야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고 드러내야 한다.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고 옷을 입기는 하지만 여자는 여자의 옷을 입고 남자는 남자의 옷을 입는다. 나이와 때와 곳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한다. 옷을 골라 입는 행위는 자기를 스스로 해석하여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 표현이다.
이와 같은 관심을 좀 더 넓혀보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예외 없이 자기를 남들에게 드러나게 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소통 행위의 밑바탕이다. 개인은 입는 옷을 통하여 자기가 누구인지를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듯이, 모두가 자기를 사회 구성원에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것은 반드시 패션과 같은 유행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Davis, 1994).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재산을 드러내고 자기가 이룩한 성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옳다고 여기고 왜 그렇게 여기는지를 남에게 들려주고 싶어 한다. 사회 구성원은 자기의 생각과 의도와 가치를 사회 구성원에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행동은 개인이 행사하는 ‘적극’ 표현이다.
과시란 적극 표현의 범위를 넘어 실체보다 크게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사회 행동이다. 표현의 행위에서 삼감과 절제함이 없이 실제를 과대하게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게 되는 현상이 과시이다.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적정성’을 빌어 말하면 자기 평가가 ‘과잉’의 수준으로 넘어가면 과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감정과 생각과 행동이 적정하고 적정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 구성원 일반의 것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일치하지 않는가에서 판단된다(스미스, 1996: I, 4). 여기에는 상징 교섭론(불루머, 1982)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상상에 의해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고 그가 어떤 느낌을 갖는지를 느껴볼 수 있는 동감의 능력이 전제되어 있다. 개인에게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없다. 그 거울은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그러므로 과시와 같이 적정성을 넘어서지 않도록 조절하기 위해서는 개인 모두 사회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윤원근.박영신, 1999).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앞에 말한 적극의 표현과 과시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이점은 우리의 경제 성장 과정과 그 경험에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3. 성장과 의식
우리에게 경제 성장은 앞서 경제를 일군 나라의 모방을 뜻하였다. 광복을 맞아 겨우 나라를 다시 세운 다음 민주주의를 제도화시키고 있을 때 겨레끼리 서로 싸워 죽이게 된 뜻하지 않은 전쟁에 휘말려 들어 나라가 온통 불이나 쑥대밭이 되었다. 그래도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다 써가며 경제를 일구고자 하였다. 그 즈음 부정 선거 사건이 일어나 정권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후 새 정부가 들어서 민주 체제를 정비하고 경제 발전을 기획하여 추진하려던 그 때,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강력한 권위주의 정권 밑에서 비로소 경제 성장을 향한 동원 체제가 만들어져 경제 개발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앞서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들을 뒤따라 그 길을 향하여 속력을 내는 정책이었다.
로스토의 저작(Rostow, 1960)이 경제 성장의 교본이었다. 그는 복잡한 경제 성장의 역사를 다섯 단계로 간단명료하게 나누어 풀이하였다. 곧, 전통 사회, 도약의 예비, 도약, 성숙 추진, 대량 소비라는 ‘단계’였다. 이것은 경제 성장을 이룩하겠다고 나선 군사 정권에게 매우 유용하고도 편리한 길잡이였다. 이 정권은 우선 도약의 예비 단계를 거쳐 도약을 이룬 다음 성숙한 단계에 다다르고 마침내는 대량 소비의 시대에 든다는 강력한 동기와 열정에 넘쳐 있었고, 국민 모두가 이러한 경제 성장의 열기에 휩싸여 열을 띠며 성장의 대열에 끼어들었다(박영신, 1995).
이제 우리 사회는 단계론으로 우리의 경제 상황을 이해하고 경제 성장의 방향과 도정을 그려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 시대를 도약의 준비 단계로 보았고 도약이 곧 다가올 다음 단계로 믿고 그것을 향하여 힘을 쏟아 부었으며, 도약 그 이후의 성숙 단계와 대중의 대량 소비의 단계를 꿈꾸며 모두 경제 부흥의 신도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 길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 세계의 모든 나라가 경제 성장의 단계를 밟아 소비의 시대로 나아가야 했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제력을 얼마나 갖추었고 재산을 어느 정도로 모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우선하는 삶의 지표로 올라섰다. 개체의 수준에서는 자기 집이 동네의 다른 집에 견주어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드러내고, 재산의 크기로 자기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것은 집단이나 지역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범세계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면서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견주어 어느 쯤에 서 있는지를 스스로 해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경제 지향의 가치와 행동이 매우 강력한 자기 진술의 내용이 되었다. 군사 정권은 경제 성장의 결과를 “양화된 지표”로 나타내고자 하여, “거시지표 기타 수량적 지표”를 동원하였다. 결국은 “성장의 외관”에 치중한 “외관주의”라는 병리 현상까지 낳기에 이르렀다(김철, 2000: 18-40). 정권은 전후의 폐허 위에서도 우리나라가 얼마나 짧은 기간 안에 경제 성장을 이룩했는지를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른바 ‘네 마리 호랑이’ 가운데 우리나라도 들어있게 되어 그것을 안팎으로 드러내 과시하며 우쭐거렸다(박영신, 윗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얼마 동안은 근검절약의 구호를 내세웠지만 대량 소비 시대로 가야 하는 경제 성장의 목표와 성장의 어느 단계에서는 소비를 누려야 한다는 기대와 욕구와 신념과 충돌하면서 그것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상층부의 소비가 하층부로 확대되면서 소비는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즐겨야 할 항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모두가 오로지 경제 이야기에 파묻혀 모든 것을 개발 이익과 이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러한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경제가 삶 전체를 압도하게 되면서 인권과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를 포함하는 삶의 다차원성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개발주의 시대의 새마을운동이 모범으로 보여주었듯이, 모두가 ‘경제 인간’으로 졸아들어 돈을 벌고 재산을 늘려 ‘잘 사는 집’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성공 사례’가 되고자 하였다(박 영신, 2011ㄷ). 이와 같은 의식 세계가 자기 고장을 개발하여 다른 고장에 뒤지지 않고 그것을 앞질러가고자 하여, 다른 고장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을 끌어들여 더욱 번지르르한 고장으로 꾸며놓고자 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다른 나라의 수도와 대도시에 견주어 수도 서울을 치장하여 한껏 과시하고자 하였다.

4. 과시와 대항 과시
경제 성장의 과시 행위는 경제 성장의 열정에 버금하는 열기를 뿜어내었다. 경제 정책을 앞에서 이끈 군사 정권의 머리통을 이룬 권력 지도층과 기술 관료와 재벌은 제각기 그들의 계획과 추진력과 성과는 세계의 선망 대상이 되었다고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 세력 모두 그 과시의 행렬에 같이 참가하였다. 동유럽을 비롯한 소비에트 체제가 허물어진 다음,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맺어진 다음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곳을 드나들게 되면서 이들은 입을 모아 한결같이 그곳 나라사람들이 못산다고 떠들어대며 과시하였다. 이들 나라의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는 문학과 음악과 사상에 대한 이해는커녕 관심과 안목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보기, 박영신, 1993, 2000).
이처럼 경제 성장의 정도가 유일한 삶의 표준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 성장은 곧 지고의 절대 가치였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괴롭혀 온 보릿고개를 정복하였고 우리를 다스려온 전래하는 관습과 제도조차도 단숨에 허물어뜨릴 수 있는 위력을 뿜어내었다. 이 점에서 그것은 기적이었고 무적의 힘이었다.
우리가 이룩한 경제 성장이라는 그 가치와 성과에 대한 자족감이 우리의 과시 행위가 자리한 문화 맥락이었다. 경제라는 영역에 모든 관심이 모여 있고 거기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과 통로가 있을 수 없었다. 경제 영역 이외의 영역에 대한 관심은 정도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경제 성장과 거기에 터한 경제 가치가 절대화되어 우리 사회는 그 가치의 잣대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풀이하고 가늠하고자 하였다. 자기 진술은 경제 진술이었고 지배 언어는 경제 언어였다.(달음1)
경제의 성장과 함께 늘어나는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이 급속히 개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과 들을 버려두지 않고 개발해야 하고 도로를 넓게 내고 간척 사업을 서둘러야 했다. 자연이란 모두가 개발의 대상이 되었다. 뭐든지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은 경제 성장의 가치에 맞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곧 대량 소비의 단계로 나아가는 선진 문명국의 건설 이념에도 어긋난다고 여겼다. 생태계의 안녕 따위는 경제 성장의 의식 세계에 들어서 있지 않았다.
경제 성장을 통한 과시 행위에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물론 통례의 힘 있는 세력 집단이 아니었다. 정치 세력도 아니었고 종교 세력도 아니었다. 이 모두는 경제 성장의 가치를 적극 표상코자 하였다. 경제주이에 빠진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앞 다투어 대규모 개발 정책을 내놓고는 자기 당의 개발 계획을 과시코자 하였다. 종교 집단 또한 열렬히 경제 성장의 이념에 합세하였다. 종교 영역에서는 성장을 교세 확장의 이념으로 활용하여 종교 조직의 크기와 건물의 크기 따위로 그 위용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경제 성장을 통한 과시를 문제시하여 거기에 맞서 대항 과시의 목소리를 낸 것은 시민 세력이었다. 이들은 성장이 적정성을 넘으면서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며 이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왔던 것이다.
성장 이데올로기에 젖어 적정 소비 감수성을 잃어버린 국민에게 이 시민 세력이 들고 나온 대항 과시의 호소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념만은 특별했다. 이들은 경제 성장을 통한 과시에 대항하여 생태계의 적정성 가치에 주목하기를 요구하고 나왔던 것이다. 산을 마구 잘라내고 강줄기를 바꾸는 토목 공사를 벌이면서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상을 과시코자 하는 의식 세계에 대하여, 시민 세력은 생태계의 적정성을 지키는 것이 더욱 값지다고 설파하였다. 걸핏하면 골프장을 짓겠다고 돈으로 동네 사람들을 매수하여 과잉 개발을 일삼는 의식 세계에 대하여, 생태주의에 터한 운동 세력은 그것은 멀쩡한 삶의 공동체와 자연 생태계를 한꺼번에 죽이는 짓이고, 나아가 먼 후손이 누려야 할 그들의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규탄하였다. 4대강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의 흐름을 타고 내려온 강물줄기를 공연스레 시멘트로 방파제를 만들어 막고 가까이 다가가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친근한 강을 토목 공사로 낯설게 만들어 그것으로 과시하려는 과잉 개발의 행태를, 생태 운동 세력은 자연의 강을 자연의 강 그대로 두어야 한다며 생태계의 적정성을 외쳤다. 개발을 통한 과시 관행에 대하여 생태주의 쪽에서는 경제 성장이 놓치고 있는, 이 말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 자본’에(Gardiner, 2010) 대한 감수성도 요청된다고 호소하였다.
5. 절제의 미덕
우리나라는 로스토의 경제 성장론에 충실하였다. 그 교본에 따라 대량 소비를 즐길 수 있는 날을 학수고대하였고, 드디어 그 날에 들게 되었다. 무역 규모가 1조 달러를 달성하였다며 우리나라가 이제 경제 대국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고 자랑도 한다. 소비 행위는 더욱 광분하여 충동 구매는 물론 삶의 공허와 불안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강박 구매’도 더해질 조짐이다. 이 문제는 정치 세력이나 경제 전문가에게 맡길 것이 아니다. 아니, 어떤 과학 기술 전문가에게 해답을 구할 것도 아니다. 이들은 권력의 과시와 전문 지식의 과시에 현혹되어 있고 그 과시를 위해 더욱 자기의 권력과 지식을 돋보이게 하는 체제의 기득권자들이다(굴드너, 1983). 그들은 경제의 힘으로 과시코자 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러한 문제에 대한 도덕 감수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 자신에게 맡겨져 있다.
모든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경제 품목에 집착하는 우리식의 과시 행각을 절제함 없이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절제의 미덕을 소중히 여겨 과시 대항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결단해야 할 뿐이다. 이것은 상층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에 널리 스며있기에 계급과 계급 사이의 문제일 수 없고 좌와 우의 이념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절제의 윤리를 통하여 근대의 합리스런 자본주의의 모체가 되었던 종교의 금욕주의 정신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과시와 대항 과시의 의식 세계는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을 중히 여기는 물질주의 지향성과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를 두는 새로운 금욕주의 지향성, 이 둘이 벌이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달음2). 이 싸움은 그러므로 계급을 넘어서며 통례의 이데올로기와 정파의 구분도 넘어선다.
우리의 경제 성장 역사에서 절제란 도약의 예비 단계 그 어느 지점에서만 의미 있는 덕목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시라고 하는 겉발림의 무절제함이 토해내는 진부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성스러운’ 내면의 세계를 대변하고 증거하는 행동이고, 속되고 천한 과시의 행동에 맞서는 자기 절제의 적절성이자 고결한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담배와 술에 대한 절제 운동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던 때가 있었지만 그 운동 관심이 오늘에 와서 단순히 건강의 중요성과 안전 문제에 이어지는 유용성을 넘어 절제 그 자체의 의미에 이어지게 되면서 금연과 금주의 행위가 더욱 높이 평가되고 품위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운동 관심이 뒤르케임이 말하는 ‘사회다운 것’ 곧 ‘도덕스런 것’이라는 차원과 사회의 성스러운 차원 거기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증거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절제의 삶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의 삶이 보이지 않는 초월의 세계에 대한 감수성보다는 보이는 물질 세계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스미스가 말한 ‘불편부당한 관찰자’(스미스, 1996, II, 2.2.; 윤원근/박영신, 1999)가 만인의 과시 행위 그 늪에서 설자리를 잃게 되었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과시의 허영심에 맞서 제동을 걸어 균형을 맞추고 조절해 줄 수 있는 자원을 찾기란 몹시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통상의 틀을 부수고 그 너머 예외의 세계에 대한 헌신의 어려움과 예외성 때문에, 대항 과시의 주장과 행동은 거룩함에 맞닿아 있다고 들림을 받고, 그 까닭에 대항 과시는 품위를 지닌 삶이라고 올림을 받게 된다.
6. 맺으며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나 ‘한 줄’로 서야 하고 그 줄에 끼어들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여긴다. 자기 아이가 원하는 성형 수술을 미리 해주어 정형화된 얼굴 모양을 갖추도록 집안이 나서서 한다. 짐짓 자기다움을 내세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다움을 잃어버리는 ‘획일성’의 줄에 모두가 들어선다. 그렇게 줄에 들어서야만 최소한 생존할 수 있다고 여긴다. 생존 욕구가 획일화를 강화한다.
소비의 획일화는 소비의 증대를 불러오며 그것은 곧 경제 성장을 위한 끝없는 개발을 정당화하게 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된다. 그러기에 모두가 그 줄에 들어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삶의 품위를 귀히 여기는 사람은 모두가 들어선 현실이라는 줄을 거부하고 그 줄에서 떨어져 나온다. 이 행동은 남다른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 현대의 습속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능력’, 소비 문화를 문화 그 자체로 믿으며 살아가는 무리를 하찮게 여길 수 있는 ‘능력’(박 영신, 2011), 이제의 세상을 다라고 여겨 거기에 붙어버리는 얕은 삶을 미련한 것으로 보고 거기에서 벗어나 더욱 깊은 올제의 삶을 그려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전문 지식 세력이 은밀한 가운데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새로운 제국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박 영신, 2011)”을 포함한다. 이러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대항 과시의 행동을 묵묵히 실천해 갈 것이다. 이것은 지난날에도 그러하였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듯이, 앞날에도 그럴 수밖에 없다(2011).
– 도움 받은 글
굴드너, 앨빈,「지성인의 미래와 새 계급의 성장」(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3). 원제는 Alvin W. Gouldner, The Future of Intellectuals and the Rise of the New Class (New York: Macmillan, 1979).
김 철, “현대 한국 문화에 대한 법철학적 접근–바람직한 시민 사회 윤리의 정립을 위하여,” 「현상과인식」, 24권 1/2호(2000년 봄/여름).
박영신, “현대 사회의 구조화와 실존적 참여–<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재인식,” 「현상과인식」, 4권 4호(1980년 겨울), 또는 「현대 사회의 구조와 이론」 (서울: 일지사, 1981).
——, 「역사와 사회 변동」 (서울: 민영사, 1987).
——, 「동유럽의 개혁 운동: 폴란드와 헝가리의 비교」 (서울: 집문당, 1993).
——, 「우리 사회의 성찰적 인식」 (서울: 현상과인식,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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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 바츨라브 하벨의 역사 참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 “제국의 지배와 인간의 책임–나의 공공 설교–,” 「본질과 현상」, 2011년 6월호.
——, “시민이 바라는 서울의 친환경 도시상–어느 생태주의자의 생각 하나–”(서울시 예산 녹색화 방안 토론회/기조 강연/2011년 9월 23일/서울시의회 대회의실). 녹색연합 ‘전문칼럼 558’ http://greenkorea.org/
——, “탈개발주의를 향한 도덕 관심의 구조”(2011 박경리문학제 <환경포럼> 주제발표/2011ㄷ년 10월 28-29일/원주 토지문화관).
——, “「우주 이야기」와의 만남”(<바람과물포럼>발제문/2011ㄹ년 11월 25일).
——/윤 원근, “동감의 사회학: 선한 사회의 조건에 대한 탐구,” 「현상과인식」, 23권 1/2호(1999년 봄).
불루머, 허버트, 「사회 과학의 상징적 교섭론」(서울: 까치, 1982). 원제는 Herbert Blumer, Symbolic Interactionism: Perspective and Method (Englewood Cliffs, New Jersey: Prentice-Hall, 1969). 우리말 옮김판은 원본의 부분임.
스미스, 아담, 「道德感情論」(서울: 비봉출판사, 1996). 원제는 Adam Smith,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Indianapolis: Liberty Classics, 19760[1759].
이 황직, “한국 사회운동 참여자의 문화적 습속,” 「현상과인식」, 28권 4호(2004년 겨울).
Bellah, Robert N. 들, Habits of the Heart: Individualism and Commitment in American Life (New York: Harper & Row, 1985).
Davis, Fred. Fashion, Culture, and Ident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Gardiner, Barry, “Natural Capital: The True Wealth of Nations,” The New Statesman, 2010년 9월 16일.
Rostow, W. W., The Stages of Economic Growth: A Non-Communist Manifesto (Cambridge: Cambridge
– 달음
(1) 위에서 쓴 ‘경제 언어’라는 말은 문화 담론의 양식을 일컫기 위한 것이다. 미국 사회를 분석한 벨라와 그 동료들이 ‘언어’를 도덕 차원의 생각과 관심을 밝혀주는 “문화 담론의 양식”으로 보고, 미국을 지배하는 ‘개인주의’ 지향의 생각과 관심을 가리키기 위해 ‘일차 언어’라는 말을 쓰고, 이와는 구별되는 성서와 공화주의 전통에 이어지는 생각과 관심의 양식을 가리키기 위하여 ‘이차 언어’라는 말을 쓴 바 있다(Bellah 들, 1985). 이러한 논지와 이어 우리나라의 가족주의에 의해 틀지어진 ‘언어’를 주목한 글(이황직, 2004: 85-111) 볼 것. 우리의 가족주의와 이 글에서 말하는 경제 중심의 의식 세계를 말하는 경제주의가 어떤 기제를 통하여 전개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 자세하게 논의된 바 있다(박영신, 1987: 245-302, 1995).
(2) 베버가 논의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이어지는 합리화 과정과 그 결과로 나타난 쇠우리의 상황을 내가 되새겨보면서, 그 윤리가 낳은 금욕주의로 돌아가 거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박영신, 1980/1981). 위에서 말한 것도 이 논지와 이어진다. 그리고 물질주의라고 한 것은 현대 산업 사회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속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던 오래된 인간의 문화 지향성이다. 이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 나의 글 (1995 / 2006) 볼 것.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