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직하학 연구 : 중국 고대의 사상적 자유와 백가쟁명
바이시 / 소나무 / 2013.10
.동양 최초의 씽크탱크, 직하학궁!
중국 고대의 사상적 자유와 백가쟁명 ‘직하학 연구’. ‘직하학궁’은 기원전 4세기 중엽 제나라가 도성 임치의 직문 아래 대규모 건물을 세우고, 널리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들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과 이론 활동을 하게 하였으며, 또한 정치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였던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은 직하학궁에서 발생한 백가쟁명을 연구한 학술서이다. 직하학궁의 번창에서 쇠퇴에 이르는 역사를 분석하고, 직하학궁에서 활약했던 각 학파의 학설을 탐구하며 또한 그것들이 후대의 학술에 미친 영향을 설명한다. 특히 직하의 주류 학파가 황로학이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 목차

서문 백가쟁명의 근원을 탐구한 역작 (리션즈李愼之)
머리말
제1장 직하학궁 출현의 문화적 배경
1. 정치 경제적 변혁과 사인 계층의 흥기
2. 현사를 예우하는 기풍과 평민 출신 경상의 출현
3. 제자백가 학설의 출현
제2장 직하학궁과 제나라
1. 제나라의 경제·정치·문화
2. 기타 열국에 대한 분석
제3장 직하학궁의 성쇠
1. 기원
2. 창립
3. 흥성
4. 쇠락과 중흥 그리고 종결
제4장 직하학궁의 성격과 기능
1. “정치를 담당하지 않고 의론만 하는” 곳
2. 정치적 기능
3. 학술 활동
제5장 직하학 총람
1. 학파, 문헌, 학자
2. 학술 특징
3. 발전 추세
4. 역사적 지위
제6장 직하학궁의 주류 황로학
1. 직하학궁에서 출현하고 성숙한 황로학
2. 직하 황로학파의 초석을 놓은 『황제사경』
3. 신도와 전병의 학술 비교
제7장 맹자와 직하학
1. 맹자는 직하선생이 아니다
2. 맹자는 『관자』 심기론의 영향을 받았다
제8장 ‘송윤학파’와 직하학
1. ‘송윤학파’ 질의
2. 묵학에 대한 송견의 계승과 발전
3. 명과 법을 강조한 윤문의 황로 사상
제9장 직하 제학의 대표작 『관자』
1. 『관자』의 성서 연대와 작자
2. 『관자』의 황로 사상
3. 『관자』의 음양오행 사상
제10장 추연과 직하학
1. 추연의 사상적 전향과 그 학술의 연원
2. 추연 학설의 주요 내용
제11장 순자의 직하학 수용과 발전
1. 순자의 인성론과 직하학
2. 예와 법을 결합한 순자의 정치론과 직하학
3. 순자의 천인관계론과 직하학
4. 순자의 인식 방법론과 직하학
맺음말
후기
부록 1 직하학궁 사건 연표
부록 2 직하학자의 대략적인 생졸 연표
주요 참고 문헌
찾아보기 (인명·문헌·사항)
○ 저자 소개 : 바이시
저자 바이시는 1953년 베이징 출생으로 수도사범대학(首都師範大學) 철학과 교수이다. 현재 중국의 저명한 중견 학자로서 중국철학사, 특히 선진(先秦)철학 및 중국 전통 사상문화와 그 현대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평소 엉덩이에 못이 박히도록 연구한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문헌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방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한 그의 연구는 기존의 통설들을 반박하고 새로운 이해를 건립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특히 제자백가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 그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군소 학자들과 문헌 자료를 연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자백가의 상호 교류와 영향 관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는 중국철학사를 그 근원부터 다시 연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상적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先秦哲學?思錄』(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7), 『老子評傳』(陳鼓應 공저, 南京大學出版社, 2001)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직하학궁, 동양 최초의 씽크탱크
‘제자백가’나 ‘백가쟁명’이란 말은 익숙하지만, ‘직하학(稷下學)’이나 ‘직하학궁(稷下學宮)’을 얘기하면 대개는 고개를 갸우뚱하리라. 직하학이란 말이 낯설기는 중국인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실상 백가쟁명은 주로 직하학궁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니, 직하학궁이 없었다면 중국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백가쟁명도 없었을 것이다. 직하학궁은 다양한 학술을 포용하고 관대하며 자유로운 학술 분위기로 인해 전국 중후기 고대 중국 학술의 중심이자 창조적 사상을 생산하는 터전이 되었다. 중국 고대의 학술과 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최고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황금시대를 경험했다.
‘직하학궁’이란 무엇인가? 기원전 4세기 중엽, 전국 중기로 접어들었을 때, 전씨 제나라는 대량의 물자를 투입하여 도성 임치(臨淄)의 직문(稷門) 아래 대규모 건물을 세우고, 널리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들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과 이론 활동을 하게 하였으며, 또한 정치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역사는 이것을 ‘직하학궁’이라 한다. 곧 직하학궁은 제자백가가 쟁명하고 논쟁하던 주된 장소였으며, 직하학은 제자백가 학술의 집약적인 표현이다. 직하학궁은 한 세기 반 동안(기원전 374~221년) 존속하다가 진시황이 제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끝을 맺었다. 그 이후부터 청나라 말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직하학궁의 전성기와 같은 백가쟁명이란 국면이 다시는 출현하지 않았다.
중국 고대의 학술과 사상의 발전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직하학은 매우 중요한 고리로서 전국 중후기 모든 주요 학파와 그 대표 인물들을 거의 망라하며, 또한 진한 이후 학술과 사상의 흐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직하학과 관련된 많은 문제와 분야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없거나 매우 적었다. 이 책 ‘직하학 연구’는 직하학에 대한 전면적이고 체계적이며 깊이 있는 연구서로서, 직하학궁에서 발생한 백가쟁명을 탐구한 역작이다.
이 책은 직하학궁의 번창에서 쇠퇴에 이르는 역사를 분석하며, 직하학궁에서 활약했던 각 학파의 학설을 탐구하고, 또한 그것들이 후대의 학술에 미친 영향을 설명한다. 특히 직하의 주류 학파가 황로학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또한 중국 전통 학술의 기본 범주들, 가령 심(心)·성(性)·기(氣)·천(天)·음양(陰陽)·오행(五行)의 기원과 변천을 탐구하며, 직하학의 대표작인 ‘관자’의 도법결합(道法結合)·이도론법(以道論法)·예법병용(禮法竝用)의 이론을 연구하고, 이 이론들이 사실상 이후 2,000년 중국 정치의 모델, 즉 “밖으로는 유가를 표방하며 안으로 법가를 운영하는(外儒內法)” 모델의 효시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정치를 담당하지 않고 의론(議論)만 하다”
어떤 이들은 직하학궁을 전씨 제나라 정권의 ‘참의원’, ‘브레인 집단’, ‘사상의 보고’ 또는 중국 고대의 ‘RAND 연구소’라고 말한다.
직하선생들은 학궁에서 비교적 충분한 언론의 자유를 누렸으므로 자유롭게 정치를 의론할 수 있었고 심지어 정부와 군주를 비판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바로 정부와 군주가 격려하고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직하선생들 대부분은 대담하고 직설적으로 간하였으며, 국가의 안위와 치란에 대해 일종의 책임감을 갖고 군주에게 영합하기 위해 아첨하는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고대 지식인들의 언론의 자유는 직하학궁에서 그 최대한도까지 발휘되었는데, 이는 이전에도 없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이후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2,000여 년의 중국 역사에서 이처럼 관대한 정치 풍토와 자유로운 학술 풍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풍족한 생활상의 처우와 충분한 언론의 자유라는 이중의 보장이 있었기 때문에 직하학궁의 학술과 사상은 “정치를 담당하지 않고 의론만 하는” 방법을 통해 활기차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직하선생들은 직하학궁에서, 첫째 생계의 수단을 찾아 걱정하거나 분주하게 지낼 필요가 없었으며, 둘째 지위가 낮거나 명성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는 일이 없었고, 셋째 관직을 맡아 업무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으며, 넷째 논의가 타당하지 않다고 하여 밥그릇을 잃게 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 놓고 전력을 다해 책을 저술하고 학설을 세우며 제자를 받아 학문을 전수하는 등의 학술과 교육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학궁에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많은 정력을 쏟아 부었으며 자신의 재능과 지혜를 충분히 발휘하였으므로, 수많은 저명한 사상가들이 여기에서 출현하였고 많은 저명한 학술 저작들이 여기에서 발표되었으며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친 많은 사상과 이론들이 여기에서 탄생하였다. 직하학궁은 만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학술과 문화의 중심이자 백가쟁명의 주요 무대였으며, 전국 중기 이래 지식인들이 동경하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여기에 각 학파의 주요 대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전국 중후기의 비교적 중요한 사상가들은 거의 모두 직하에 발을 들였으며 학궁의 발전과 학술 사상의 번영에 이바지하였다.
전씨 제나라 정권은 개명된 문화 정책을 실시하여, 결코 자신의 입맛에 따라 어떤 하나의 학파를 우대하지 않았다. 누구나 차별 없이 대하며 두루 수용하고 지원했으며, 각자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여러 학파의 학자들을 직하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런 학파들이 크든 작든, 주장이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서로 충돌하더라도, 학궁에서는 모두 자유롭게 발전하고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에 그들은 활발하게 책을 쓰고 이론을 전개하며 자신만의 주장을 펼쳤고, 이를 통해 학궁에서 수많은 학파가 공존하며 백화제방(百花齊放)이라는 번영을 이루었다. 당시 사회의 거의 모든 학파들이 학궁에 자신의 대표자들을 두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활기차고 자유로운 학술 분위기는 각 학파의 분화, 상호 간의 삼투와 융합을 촉진하였다. 같은 학파에 속하는 학자일지라도 각자의 사상과 주장에는 서로 경향과 개성이 달랐으므로 사상과 주장이 완전히 같은 것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설사 스승과 제자 간에 전수받은 것일지라도 제각기 자신만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중국 고대에 매우 영향력이 컸던 대량의 저작들이 직하학궁에서 발표되었다. (139~140쪽)
.사상의 자유와 학술의 독립이 낳은 직하학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직하학궁에서 꽃피운 백가쟁명의 참된 정신이다. 즉 그것은 사상의 자유와 학술의 독립인데, 중국 역사상 춘추전국 시대만이 진정으로 사상이 자유로운 시대였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제자백가들이 직하학궁에 모여서 학문을 강연하고 서로 논박하며,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발표하고 서로를 자극하는 가운데 비로소 백가쟁명이라는 활기찬 광경이 펼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하의 학자들이 모두 정치에 종사하기는 했지만, 이는 정부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직하의 학자들은 학문적으로 독립된 지위를 유지했는데, 정부는 학궁의 학술 활동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으며, 또 자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에 따라 어떤 학파만을 단독으로 떠받들거나 억압하지 않았고, 각 학파의 독립된 사유에 따라 자유롭게 발전하도록 하였다. 불행히도 진시황과 한무제가 천하를 통일함에 따라 백가쟁명의 상황은 곧 하나의 사상만을 떠받드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때부터 사상의 자유나 학술의 독립과는 인연이 없어졌다. ‘독존獨尊’은 사람들의 사상을 억압했을 뿐 아니라 단독으로 떠받듦을 받는 사상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독립된 지위와 가치를 잃고 정치권력의 기생물이나 사상 통제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저자는 “2,000여 년이나 상실했던 사상의 자유와 학술의 독립을 되찾는 것은 오늘날 지식인들의 역사적 사명”임을 역설한다.
사상과 이론의 다원화, 자유와 평등은 학술 번영과 발전의 전제이며 중요한 조건이다. 겨우 한 학파의 주장만 있거나 한 송이 꽃만 홀로 피어 있다면 번영은 말할 것이 못 된다. 고압적인 정치 아래 있는 학술은 부자유스럽고 독립성을 잃은 것이며, 그 결과 학술이 정치에 종속되거나 혹은 학술의 발전이 압살될 수밖에 없다. 학술 간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번영과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직하학궁이 최고의 성공을 이뤄 내고, 직하학이 이처럼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사상과 이론의 다원화에 있고 고도의 학술적 자유와 평등에 있다. 이는 역사적 경험이 확증해 주는 것이며, 또한 직하학 연구가 우리를 현실적으로 각성하게 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168쪽)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