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누멘 / 2018.3
인생 최초로 마음을 빼앗겼던 루 살로메와 실연한 뒤의 고통과 고독 속에서, 더욱이 점점 더 심해지는 폐병을 무릅쓰고 탄생시킨 니체의 전 사상과 철학이 상징적으로 유감없이 나타난 필생의 대표작. 이 책에는 니체 철학의 핵심인 초인, 운명, 운명애, 영원회귀의 우주관, 삶에의 의지, 새로운 가치표준 등이 큰 조화 속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니체는 이 책에서 개인의 생명을 우주적인 삶과 통일시키고 자유롭게 의욕하는 자아를 초인의 이상으로까지 끌어 올린다. 위대한 개인을 부각시켜 창조적 천재이자 긍정하는 영웅으로 나타내 주는가 하면, 모든 기성 사상과 가치를 인정치 않으며 온갖 권위로부터 인간의 능력을 무한까지 해방시킨다. 강자의 삶은 끝까지 찬양하며 의지의 승리자가 지배자임을 서슴지 않고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동시대인들에게는 바위와 같이 튼튼했던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는가 하면, 국가가 끝나는 곳에 인간이 시작된다고 하여 온갖 제도와 질서에까지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다. 그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구원의 사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점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자신의 사상을 개진해 본 것이다.
○ 목차

제1부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차라투스트라의 연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덕의 강단에 대하여
내세론자에 대하여
육체를 경멸하는 자에 대하여
희열과 정열에 대하여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산 위의 나무에 대하여
죽음의 설교자에 대하여
전쟁과 전사에 대하여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시장의 파리들에 대하여
순결에 대하여
벗에 대하여
천 개의 목표와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
이웃 간의 사랑에 대하여
창조자의 길에 대하여
늙은 여인과 젊은 여인에 대하여
독사가 문 상처에 대하여
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베푸는 덕에 대하여
제2부
거울을 가진 어린아이
행복이 넘치는 섬에서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성직자들에 대하여
도덕가들에 대하여
천민에 대하여
타란툴라에 대하여
유명한 현자들에 대하여
밤의 노래
춤의 노래
무덤의 노래
자기 극복에 대하여
숭고한 사람들에 대하여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
때묻지 않은 인식에 대하여
학자들에 대하여
시인들에 대하여
커다란 사건에 대하여
예언자
구원에 대하여
현명한 처세술에 대하여
가장 조용한 시간
제3부
방랑자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원치 않는 행복에 대하여
해뜨기 전
작아지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감람산에서
통과하는 것에 대하여
배신자에 대하여
귀향
세 가지 악에 대하여
중력의 영혼에 대하여
낡은 서판(書板)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회복되어 가는 사람
위대한 그리움에 대하여
또 다른 춤의 노래
일곱 개의 봉인(또는 “그렇다”와 “아멘”의 노래)
제4부 최종편
제물로 바친 꿀
비명(悲鳴)
왕들과의 대화
거머리
마술사
일자리를 잃음
가장 추악한 사람
자발적으로 거지가 된 자
그림자
정오
환영 인사
최후의 만찬
더 높은 사람에 대하여
우울한 노래
학문에 대하여
사막의 딸들 사이에서
각성
나귀의 축제
명정가(酩酊歌)
징조
참고 문헌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소개 및 제목의 내용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독일어: Also sprach Zarathustra 알조 슈프라흐 차라투스트라)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철학 소설이다. 영원 회귀, 신의 죽음,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의 “예언” 등의 개념을 다룬다.

– 소개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씀으로써,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Innerhalb meiner Schriften steht für sich mein Zarathustra. Ich habe mit ihm der Menschheit das grösste Geschenk gemacht, das ihr bisher gemacht worden ist. — 《이 사람을 보라》, 서문, 4번글.
초기 저술들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를 허무주의로 규정하고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참다운 예술의 근원으로 본다. 미술적인 형식과 음악적인 내용이 예술의 원천을 이룬다는 주장이다. 중기 저술들에서 니체는 초기의 예술비판을 확장해 문명 전체에 대한 비판의 붓을 든다.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현대 문명의 허무주의와 퇴폐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생성 개념을 강조한다.
삶은 끊임없이 되돌아오므로 이러한 운명은 긍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개인은 힘의지를 발휘하여 허무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다. 데카당, 허무주의,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 등은 왜소하다. 왜소함을 극복하는 한 방편은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위버멘쉬가 되는 것이다.
– 제목의 의미
제목으로 쓰인 ‘차라투스트라’라는 말은 일종의 패러디이다. 니체는 패러디를 즐겨 사용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이라 불리는 가장 심각한 오류를 만들어낸 인간이다. 그는 필연적으로 도덕이 오류임을 자각한 최초의 인간임이 분명하다.(중략)내 말을 알겠는가? 정직성을 통한 도덕의 자기 극복,나라는 대립을 통한 도덕군자의 자기 극복,그것이 내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이 뜻하는 바이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3번글.
○ ‘영원 회귀’ 사상
영원 회귀(永遠回歸, 영어: eternal return, eternal recurrence) 또는 같은 것의 영원 회귀(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는 니체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근본사상의 하나로 “똑같은 것이 그대로의 형태로 영원에 돌아가는 것(回歸)이 삶의 실상(實相)이다”라는 생각이다. 모든 생성(生成)을 한 원환(円環) 안에서의 되풀이로 보는 이 사상에서는 모든 점이 바로 중심점(中心點)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이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凝縮)시킨 영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며, 이리하여 현재의 모든 순간, 현실의 이 대지(大地) 위의 삶 자체가 그대로 영원한 가치로 이어져 힘차게 긍정되어 간다는 것이다.
– 개요
니체의 후기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처음 제창되었다.
‘시간은 무한하고, 물질은 유한하다’라는 전제에서 무한의 시간 중에서 유한의 물질을 조합한 것이 세계라면, 현재의 세계가 과거에 존재해, 혹은 장래도 재차 완전히 같은 조합으로부터 구성될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니체에게 이 세계의 원환적 구조는 단순히 존재론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 의지의 문제와 묶을 수 있다.
영원 회귀하는 것은 종말을 맞이하는 일 없이 때를 넘겨 동일한 것으로 하고, 한편 만물이다. 만물제동. 즉, 영원 회귀는 종말에서의 구제라는 옵티미즘과의 대비로 자주 염세주의와 결부되어 말해지지만, 그 한편, 구제되도록 지금의 행동을 바로잡는다는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밝기도 있다. 세계가 몇 번 둘러싸 와도, 지금 여기에 있는 순간이 쓰는 있는 것을 바란다는 강한 삶의 긍정의 사상이기도 하다. 그 의미로, 영원 회귀는 삶을 소홀히 하지 않는 초인에게만 맡는 것이 가능한, 존재와 의지와의 자유의 경지이다. 영원 회귀는 단순한 숙명이 아니고, 자유 의지에 의해서 초래되는 세계의 근원적인 상태인 것이다.
영원 회귀는 삶에의 강한 긍정의 사상인 것과 동시에, ‘1회성의 연속’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전생 사상과 같이 전생→현세→내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결코 없고, 인생이란 카셋트 데이프와 같이 만일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그 해 그 때 그 순간까지, 완전히 같이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만일 2006년, 당신은 파란 옷을 입고, 흰 바지를 신어 2시에 역앞의 학원행 버스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하자. 삶이 다해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2006년, 당신은 파란 옷을 입고, 흰 바지를 신어 2시에 역앞의 학원행 버스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리셋하고 카셋트 데이프를 되감았을 뿐인 상태가 된다. 이것이 ‘1회성의 연속’이다. 그것을 영원히 반복한다. 고로, 당신의 인생에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렇다’라고 말하기 위해, 강한 인생에의 긍정이 필요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스스로 기른 어둠에 먹혀 죽는 환영을 본다. 최고에는 항상 최고 깊이로부터. 초인은 신들의 황혼에 강력하게 나타난다. 어둠을 알아, 어둠을 파해, 죽어 더 삶에의 강한 ‘그렇다’를 반복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순간의 당신에게 강하게 수긍하는 태도, 그야말로가 초인에게의 길이며, 영원 회귀의 근간이다.
니체 자신은 영원 회귀의 사상을 암시에만 머문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그 근거의 하나로 하고 있다.
영원 회귀에 대해 니시베 스스무(평론가)는 말했다. ‘찾아내야 하는 것은 실재(진리)지만, 실재는 말을 거처로 해, 그리고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 거처의 지키는 사람을 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 역사라는 이름의 초원을 이동하면서 실재를 옮기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지키는 사람이든지 목자든지의 삶을 통해서 서서히 원으로부터 되어 오는 것은, 실재는, 거기에 있으면 지시받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무(無)’라고 부르면, 인간은 실재를 요구하고, 자신이 무에 영원히 회귀할 수 밖에 없다고 안다. 즉 니체의 ‘영원 회귀’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무와 관계되는 것으로서의 인간에게서의 실재의 모습이다.’
– 철학사에서의 의의
니체는 영원 회귀를 직감적, 문학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그 체계적인 의미는 불명료하다.
단지, 종교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영원 회귀는 크리스트교적인 내세나 동양적인 전생의 부정이며, 철학사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변증법의 부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니체는 영원 회귀를 말해, 변증법을 부정하는 것에 의해서, 근대화 그 자체, 사회는 보다 좋아져 가는 것이라는 서양적인 진보 사관 그 자체를 뒤집으려고 했던 것이다. 변증법은 근대 철학의 완성자라는 헤겔의 기본 개념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근대 철학을 뒤집으려는 시도였다. 니체의 영원 회귀의 사상은 포스트 모던의 근대 비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모든 선악, 우열은 인간의 주관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고, 절대적인 선악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인 선악도 부정하는, 가치 상대주의의 극한이라는 점에서는 부처의 제행무상·제법무아, 장자의 만물제동론에 가깝다. 절대 정의를 말하는 크리스트교의 강한 서양사상보다, 동양 사상에 잘 볼 수 있는 발상이다.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대관이라고 니체는 부인하고 있으므로, 영원 회귀는 더 능동적이다. 모든 것은 평등하게 무가치이며, 마지막도 시작도 없는 영원 회귀라는 궁극의 허무주의로부터, 운명애에 이르러, 무로부터 신가치를 창조, 확립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니체는 초인이라 부른다. 속박도 전통도 질서도 완전한 무인 것은 거기로부터 모든 신가치, 신질서가 구성 가능하다는 것이다.
– 영원 회귀 비판
그러나, ‘역사의 종말’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들에게 비판되듯이, 축적하고 있는 지식이나 역사가, 근대화라는 불가역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회과학적인 사실이며, 영원 회귀의 사상은 인류 역사적인 스탠스에서 보면 잘못이다. 역사는 반복하고 있는 것 같고,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연과학적 관점에 서면, 1.세계는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의해 항상 확산·다양화해 나가므로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어도 전혀 같은 상황이 재현될 것은 없다는 열역학 목표 견해나, 2.유한의 계에 무한의 시간을 주어도 반복이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한 혼돈 이론, 혹은, 3.본질적으로 불확정성을 내포하는 양자론 등, 특히 물리학에 의해서 영원 회귀를 부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는 나치스에 베르사유 체제 타파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어 결과적으로 유럽에 파멸적인 전재를 주었다. 전후, 신좌익의 젊은이들의 사이에서도 유행해, 그들의 찰나적이고, 망동적인 폭력 행위를 부추겼다. 절대적인 선악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인 선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만행이나 흉행도 모두 용서된다는 위험사상에 용이하게 직결한다. 그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쉬운 위험성과 반성으로부터, 철학자 나가이 히토시는 그 패배의 완벽함에서의 사상적인 의의를 찬미 하면서도, ‘니체는 사상가로서는 패배했다. 마르크스에게는 부활의 가능성이 있지만, 이미 니체에게는 없다’라고 지적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유태적 대등 욕구(노예 도덕)는 게르만적 우월 욕구(귀족 도덕)에 승리했다’라고 지적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역사에는 목적이나 마지막이 있다고 하여, 역사의 마지막을 말했다. 붓다는 ‘코뿔소의 뿔과 같이 혼자 걸을 수 있다’라고 말해, 허무주의의 정치화를 경고하고 있다.
영원 회귀는 과학적으로 확정되는 현상이나 정치사상으로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존주의의 자세의 기둥의 하나이며, 개인의 심리적 현상내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개인 환상의 범위내라면, 인간은 인과율도 시간축도 넘을 수 있는 것을 외쳐, 개인 환상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고 싶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나가이 히토시는 영원 회귀는 사상보다, 어느 날 돌연 니체를 덮친 체험인 점을 강조했다.
나가이 히토시는 니체 철학은 철저히 한 ‘물음’이라 지적하고 있다. 확실히 니체 철학은 광기를 배고 있지만, 그것은 무지나 단락적 사고로부터 오는 광기는 아니다. 일반인이라면 적당한 곳에서 그만두어 버리는 의문을 계속 물은 결과이며, 철학적 사색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광기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가치 상대주의를 말하지만, 모든 가치를 계속 상대화하면, 절대적인 선악 뿐만이 아니라 상대적 선악도 부정되어 버려, 궁극적으로는 선악 모든 것이 무의미화하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는 국민의 평등을 말하지만,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가치가 있는 것은 모든 국민에게는 평등하게 가치가 없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크리스트교는 보편애를 말하지만,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인 것은 아닌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니체의 근대 비판은 본질적으로 근원적이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곤란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영원 회귀의 능동적 허무주의로부터 귀족 도덕의 부활을 말하는 니체 사상은 현대인의 시점으로는 위험사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수파의 지지를 받을 리는 없고, 이미 정치사상으로서 부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점에서 니체는 사상가로서는 틀림없이 완패했다. 그러나, 감각적으로 거부할 수 있어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곤란한 점이 니체 철학의 특징의 하나이다.
○ 책 속으로
나의 제자들이여 나는 홀로 가련다! 너희도 각각 홀로 길을 떠나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타라에 맞서라! 더 바람직한 것은, 그의 존재를 부끄러워 하라 !
그가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인식하는 인간은 자신의 적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벗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만 한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는가?
너희는 나를 숭배한다. 하지만 어느 날 너희의 숭배가 뒤집히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신상에 깔려 죽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너희가 차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는가?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뭐 중요하단 말인가 !
너희는 나의 신도다. 하지만 신도가 뭐 중요하단 말인가 !
너희는 너희 자신을 아직도 찾아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너희는 나를 발견했다.
신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모양이다. 그러니 신앙이란 것이 하나같이 그렇고 그럴 수 밖에.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해라.
그리고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에야 나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할 바 없이 끔찍한 미증유의 인간이다
; 그렇다고 이것이 내가 비할 바 없이 좋은 일을 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이다 : 그래서 나는 파괴자 중의 파괴자인 것이다.
선과 악의 창조자이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파괴자여야만 하며 가치를 파괴해야만 한다.
이렇게 최고악은 최고선에 속한다 : 하지만 이것이 창조적 선이다. ―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보라, 우리의 주위가 얼마나 풍만한가를! 이와 같이 넘쳐흐르는 자연 속에 먼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신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Übermensch)’을 이야기하라고 가르친다. 신이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다. 나는 이 억측이 그대들이 창조하려는 의지를 넘어서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들은 하나의 신을 창조할 수 있었는가 –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간구하노라. 모든 신에 대해 침묵을 지켜라. 그대들은 능히 초인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 中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랑, 그대의 창조와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정의가 다리를 절며 그대를 뒤따라올 것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두려움을 알면서 두려움을 제압하는 자, 심연을 보지만 자긍심이 있는 자가 대담한 자다. 심연을 보지만 독수리의 눈으로 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붙잡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이제 나를 떠나보내고 자신을 찾으라. 그리고 그대들이 나를 모두 부정했을 때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가리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묘비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추종자들에게 한 말임.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변했군. 그대는 자신의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날라 갔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로 날라 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에게로 가서 뭘 하자는 건가. 바다 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주었지. 그런데도 그대는 뭍에 오르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 테지.”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얼마간을 빼앗아 그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 인간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하게.”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자선을 베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오.”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왜 그대는 나처럼 곰들 속의 한 마리 곰, 새들 속의 한 마리 새로 머물고자 하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신은 인간을 죽임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을 ‘정의’로 정의한다. 니체는 정의라는 진리를 죽임으로써 정의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진리의 말살은 곧 진리.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신을 죽인다. 하지만 니체는 외친다.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우리는 신을 죽인 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 즉 삶의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신은 이미 죽었다. 신이 된 우리는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우리는 풀 수 없다. 우리는 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들 외친다. 하지만 우리가 죽인 신이 만들었던 영원불멸의 시스템은 행복과 슬픔, 분노, 공포, 모든 감정 느낌을 허무하게 만든다.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그대의 몸은 그대의 철학보다 더 많은 지혜를 품고 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독일 라이프치히 근교의 뢰켄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루터 교회의 목사였다.
슐포르타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바그너의 음악과 독일 낭만주의 작가들의 글에 심취했다. 그러나 뒷날엔 바그너의 음악을 비롯해 낭만주의를 맹비난한다. 본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녔으며, 24세에 바젤 대학 교수가 되었다.
1872년에 최초의 저서 『비극의 탄생』 출간했다.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선과 악을 넘어서』(1886), 『적그리스도』(1888) 등을 발표했다.
1889년에 신경쇠약을 겪은 뒤로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다.
○ 추천평
니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큰 업적을 찾는다면 그것은 유럽 정신사에 큰 변화와 혁명을 가져 왔다는 점이다. 사상사의 흐름을 방향 전환시킨 감을 줄 정도로 그의 뜻과 업적이 지대했었다. 그 내용들은 다음 항에서 언급되어야겠다. 그러나 니체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정신계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영향은 컸었고 그가 남겨 준 역사의 전환기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니체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취급되고 있다. 시인과 예술가로서의 니체가 있는가 하면, 시대 및 사회사상가로서의 니체의 업적도 중요하다. 그리고 실존철학과 더불어 철학자로서의 니체는 더 큰 후광을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형석(전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이나 기독교의 그 어떠한 사상과도 비교될 수 없는 사상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플라톤적이고 기독교적인 사유방식과의 가장 철저한 대결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어떠한 전통적인 사유도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영원회귀 사상이 지닌 이러한 성격이 바로 니체에게 그 사상이 갖는 심대한 의미를 시사한다. 니체에게 그것은 모든 사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따라서 이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우리는 니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긍정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적이고 기독교적인 모든 사상이 현실을 부정하는 반면에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가능한 한 최고도로 긍정하고자 한다. -박찬국(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