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추사집 (秋史集)
김정희 / 현암사 / 2014.10.2
간송미술관의 태두 가헌(嘉軒) 최완수(崔完秀) 선생의 첫 노작이었던 『추사집』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새로운 판으로 출간되었다. 1976년 초판을 선보인 이 책은 우리 미술사학의 명저로서 당대 추사 연구의 질적 전환을 가져온 역저였다. 추사의 고갱이를 꼼꼼히번역한 『추사집』은 추사의 진면목을 5부(서론/ 화론/ 금석학/ 경학, 불교학/ 서한문)로 나누어 한데 모은 것이다. 이번 신판은 추사의 형형한 사유와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도판과 방대한 연보 등을 추가했으며, 무엇보다 수년에 걸친 교정과 보충으로 정본 추사집으로 새로이 탄생하였다.
○ 목차

다시 펴내는 추사집 머리말
해제/ 초판 머리말
완당김공소전 阮堂金公小傳
평설/ 추사의 학문과 예술
김추사의 금석학
제1부 서론書論
계첩고 ?帖攷
〈국학본 난정첩〉 뒤에 제함 題國學本蘭亭帖後
〈영상본 난정첩〉 뒤에 제함 題穎上本蘭亭帖後
〈난정서〉 뒤에 씀 書蘭亭後
두 왕씨의 글씨를 논함 論二王書
난정수필 蘭亭隨筆
서파변 書派辯
묵법변 墨法辨
「원교필결」 뒤에 씀 書員嶠筆訣後·Ⅰ
「원교필결」 뒤에 씀 書員嶠筆訣後·Ⅱ
《청애당첩》 뒤에 제함 題淸愛堂帖後
〈예학명〉에 발함 ?鶴銘跋
구양순이 쓴 〈화도사비첩〉 뒤에 제함 題歐書化度寺碑帖後
미남궁 글씨의 옛날 탁본 진본 뒤에 제함 題米南宮墨跡舊拓眞本後
예찬의 글씨 뒤에 제함 題倪瓚書後
원 왕숙명의 글씨 뒤에 제함 題元王叔明書後
축윤명 〈추풍사첩〉 뒤에 제함 題祝允明秋風辭帖後
《이진재첩》에 제함 題?晋齋帖
김군 석준이 소장한 〈배경민비첩〉 뒤에 제함 題金君奭準所藏裴鏡民碑帖後
구양순 · 저수량의 글씨를 논함 論歐?書
미남궁의 글씨를 논함 論米南宮書
성친왕의 글씨를 논함 論成親王書
백하의 글씨를 논함 論白下書
옛사람의 글씨를 논함 論古人書
원교가 산곡을 논한 것을 다시 논함 再論員嶠論山谷
박혜백이 글씨를 묻는 것에 답함 答朴蕙百問書
홍우연에게 써서 주다 書贈洪祐衍
윤생 현부에게 써 보냄 書贈尹生賢夫
정육에게 써 보냄 書贈鄭六
방노에게 써 보냄 書贈方老
상우에게 써 보임 書示佑兒
태제에게 써 보냄 書贈台濟
고동상서 소장 담계 정서 족자에 씀 書古東尙書所藏覃溪正書簇
서지환에게 써 줌 書付徐志渙
서결 書訣
글씨 쓰는 법을 논함 論書法
전서와 예서 배우는 법 學習篆隸法
붓을 논함 論筆
제2부 화론畵論
《석파 난권》에 제함 題石坡蘭卷
《석파 난첩》 뒤에 제함 題石坡蘭帖後
《군자문정첩》에 제함 題君子文情帖
조희룡의 화련에 제함 題趙熙龍畵聯
이재 소장 〈운종 산수정〉에 제함 題?齋所藏雲從山水幀
〈낙목일안도〉에 제함 題落木一?圖
고기패의 〈지두화〉 뒤에 제함 題高其佩指頭畵後
여성전이 그린 〈매란국죽정〉에 붙여 씀 題呂星田畵梅蘭菊竹幀
학옥섬의 〈삼공도〉에 제함 題?玉蟾三公圖
〈인악의 영정〉에 제함 題仁嶽影
〈백파상〉을 기리고 아울러 서를 붙임 白坡像? ?序
〈소당의 작은 영정〉에 제함 題小棠小影
스스로 작은 초상화〉에 제함 自題小照
스스로〈작은 초상화〉에 제함, 제주에 있을 때 自題小照 在濟州時
제3부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
신라 진흥왕릉고 新羅眞興王陵攷
진흥이비고 眞興二碑攷
승가사 〈진흥왕 순수비〉 僧伽寺 眞興王 巡狩碑
북수비문의 뒤에 제함 題北狩碑文後
제4부 경학經學 · 불교학佛敎學 등
천축고天竺攷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說
인재설 人才說
적천리설 適千里說
도천송이 있는 『금강경』 뒤에 제함 題川頌金剛經後
『불설사십이
장경』 뒤에 제함 題佛說四十二章經後
영모암 편액 배면 제지에 발함 永慕庵扁背題識跋
부인 예안 이씨가 돌아간 것을 슬퍼하는 글 夫人禮安李氏哀逝文
제5부 서한문書翰文
둘째 아우 명희에게 與舍仲 命喜 · 1~4
막내아우 상희에게 與舍季 相喜 · 1~9
상무에게 與懋兒 · 1~4
상우에게 與佑兒
사촌 형님 교희씨께 上從兄 敎喜氏 · 1~2
재종손 태제에게 與再從孫 台濟 · 1~2
석파 흥선대원군에게 與石坡 興宣大院君 · 1~7
민질 태호에게 與閔姪 台鎬
조이당 면호에게 답함 答趙怡堂 冕鎬 · 1~3
신위당 관호에게 與申威堂 觀浩 · 1~3
조운석에게 與趙雲石 寅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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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 추사, 완당 김정희

추사, 완당 김정희는 조선왕조 勳戚家門의 하나인 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金魯敬과 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金魯永 앞으로 出系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宗戚으로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그야말로 당대의 엘리트 ‘금수저’라고 할 것이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등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學藝와 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北學派 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翁方綱, 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 燕京學界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종래 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金石學, 史學, 文字學, 音韻學, 天算學, 地理學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禮堂金石過眼錄, 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申緯, 趙寅永, 權敦仁, 申觀浩, 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實事求是說은, 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 천산학, 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華嚴寺라는 가족의 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白坡와 草衣,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影幀의 題辭와 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奉恩寺에 기거하면서, 善知識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詩書畵 一致 사상에 입각한, 高踏的인 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國書와 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眞蹟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書道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趙孟?, 蘇東坡, 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漢·魏시대의 여러 隷書體에 書法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創出한 것이 바로 拙樸淸高한 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天稟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다. 그는 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蘇軾, 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詩道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詩選諸家總論에서 詩論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畵風은 대체로 蘇軾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詩書畵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書卷氣와 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心意를 중시하는 文人?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隷書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枯淡하고 간결한 筆線으로 心意를 노출하는 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蘭을 잘 쳤다. 그래서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趙熙龍, 許維, 李昰應, 田琦, 權敦仁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藝苑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歲寒圖와 ??圖, 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詩書畵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碑派書道가 낳은 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古印의 印譜를 얻어서 직접 秦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自刻風인 秋史刻風을 이룩하여, 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翰墨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諺簡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阮堂尺牘(2권 2책, 1867), 覃?齋詩藁(7권 2책, 1867), 阮堂集(5권 5책, 1868)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은 종현손 金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 역자 : 가헌 최완수
가헌(嘉軒) 최완수(崔完秀) 선생은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연구의 일인자이다. 1942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65~66년 국립박물관을 거쳐, 1966년부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으로 있다. 그동안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서울대 미대 회화과 및 대학원, 이화여대 · 동국대 · 중앙대 · 용인대 대학원, 연세대에서 강의하였으며, 현재 연세대 · 국민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秋史集](1976), [金秋史硏究艸](1976), [그림과 글씨](1978), [佛像硏究](1984), [謙齋 鄭敾 眞景山水畵](1993), [名刹巡禮] 1 · 2 · 3(1994), [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 2(1998), [조선왕조충의열전](1998), [겸재를 따라 가는 금강산 여행](1999), [겸재의 한양진경](2004),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 · 2 · 3(2007), 『겸재 정선』(전3권, 2009)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간다라 佛衣攷’, ‘釋迦佛幀圖說’, ‘謙齋鄭敾’, ‘謙齋眞景山水畵考’, ‘秋史實紀’, ‘秋史書派考’, ‘碑派書考’, ‘韓國書藝史綱’, ‘秋史 一派의 글씨와 그림’, ‘玄齋 沈師正 評傳’, ‘尤庵 당시의 그림과 글씨’, ‘古德面誌總史’ ,「謙齋 鄭敾 評傳」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추사는 전무후무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시대사조의 전환기를 산 새로운 지식의 기수이며, 노쇠한 조선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케 한 선각자였다.” _초판 머리말에서
대작 [추사집]은 서예가로서뿐 아니라 사상가, 금석고증학의 전문가로서 진경시대 문화의 진경을 보여준 추사 김정희가 남긴 다양한 분야의 글과 작품을 가려 실은 책이다. 서화(書畵), 경학, 불교학, 금석고증학에 이르는 여러 분야에 남긴 김정희의 커다란 족적은 물론이고 정치적 파고를 헤쳐 가며 살아간 한 선비의 내밀한 심경까지 고스란히 담은 정선(精選) 문집이다.
가헌 최완수 선생은 조선왕조 오백 년 정체설(停滯說)을 주창한 일제 식민사관의 부당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일찍이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예술, 사상, 정치, 경제사 등 문화사 제반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 문화의 능동성과 특장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문화사 중 그 절정기를 이루는 진경시대를 미술사로 조명하여 그 영광의 현장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진력하였다. 1966년 간송미술관에 부임한 젊은 미술사학자 최완수는 추사체를 창안하고 진경문화의 정점을 보여준 이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 추사 김정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1976년 첫 책『추사집』을 펴내기에 이른다.
『추사집』은 김익환이 편찬한 『완당선생전집』을 저본으로 삼아, 주로 서, 화, 금석학(金石學)에 관계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가려내 번역하고, 경학(經學)과 불교(佛敎) 관련 글 일부와, 유배 기간에 형제와 조카, 제자들에게 쓴 서간문을 여러 편 옮겼다. 특히 제1편 서론(書論)에서는 고금의 금석탁본, 법첩(法帖)의 명필과 서체를 종횡으로 논파한 글을 모았는데, 이를 통해 추사체의 비의(秘義)를 짐작케 한다. 제2편 화론(畵論)에서는 詩, 書, 畵 일치의 새로운 이념미를 추구한 추사의 문인화 미학이 드러난다.
최완수 선생은 지난 2009년에 역시 근 40년에 걸친 겸재 연구를 일단락 짓고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겸재 정선』3권을 출판하였다. 이어 추사 연구도 마무리지는 작업에 들어갔다. 각종 경전과 사서(史書) 및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각종 문집 자료 등을 재검색하기 시작했다. 관련 자료가 워낙 방대한 터라 추사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밝히기 위해 상세한 연보 작성에 우선 착수하였다. 연보의 큰 틀을 짠 후 시대 상황과 가족관계, 교우 관계, 정치 상황, 청나라 문사들과의 교유 사실, 고증학관(考證學觀), 추사체의 성립 과정 등을 염두에 두고 그와 관련된 사실들을 가능한 한 상세히 보태나가는 지난한 작업을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다.
이 작업과 동시에 38년 전 출간한『추사집』을 새로이 복간하여 추사 연구의 바탕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 동안 수정을 거듭해왔던 『추사집』의 번역문과 원문을 꼼꼼히 대조하는 작업에 돌입하여 아쉬운 부분들을 과감하게 바로잡아 나갔다. 주석(註)의 도움 없이 이해가 어려운 내용은 더욱 보충했다. 그리고 한문 소양이 없거나 서예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세대를 위해 몇 가지 비빌 언덕을 만들어 넣었다. 우선 16교에 걸친 교정을 통해 되도록 오늘의 독자를 감안한 문장과 어휘로 다듬었으며, 『추사집』에 수록한 원문의 원본이 남아 있는 것은 가능한 한 원본 사진을 찾아 도판으로 함께 싣고, 본문이나 주에서 언급되는 비문(碑文)이나 법첩 등의 사진도 삽도로 함께 실었다. 초판에 없던 「김추사의 금석학」을 수록하여 평설을 늘였으며, 추사 가계도와 연보를 대폭 늘였다. 이러다보니 393쪽이었던 초판이 768쪽의 개정증보판으로 바뀌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