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카트린 드 메디치 : 검은 베일 속의 백합
장 오리외 / 들녘 / 2005.5.3
암흑의 중세를 지나 예술과 문학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16세기.
그러나 여전히 봉건적 사고에 사로잡힌 상황 속에서 왕족도 아닌 한 이탈리아의 여인이 프랑스 왕비로, 황태후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왕비로서 10여 년, 황태후로서 30여 년, 이렇게 40여 년의 기간 동안 그녀의 궤적을 좇는 것은 바로 그 기간 동안의 프랑스 역사의 원류를 따라가는 것과 다름없다.
비록 우리에게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과 관련있는 황태후 정도로 간략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삶을 좇다 보면 이탈리아의 거대 금융 가문 메디치를 만나게 되고, 프랑스를 통치한 다섯 명의 왕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목차
서문
- 상승
- 프랑스 왕위
- 왕들의 어머니, 왕들을 지배하다
○ 저자소개 : 장 오리외 (Jean Orieux)
1907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나 1990년에 사망했다. 1941년에 발표한 첫 번째 소설 『레 퐁타그르 LesFontagre』로 194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수상했다. 철저한 고증과 해석을 바탕으로 볼테르, 탈레랑, 라 퐁텐 등의 전기와 여러 편의 역사소설을 남겼다.
– 역자 : 이재형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원대학교, 상명여자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우리에게 생소했던 프랑스 소설의 세계를 소개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많은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지금은 프랑스에 머물면서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세상의 용도』, 『부엔 까미노』, 『어느 하녀의 일기』,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꾸뻬 씨의 시간 여행』, 『꾸뻬 씨의 사랑 여행』, 『마르셀의 여름 1, 2』, 『사막의 정원사 무싸』, 『카트린 드 메디치』, 『장미와 에델바이스』, 『이중설계』, 『시티 오브 조이』,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 『레이스 뜨는 여자』, 『정원으로 가는 길』,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 『사회계약론』, 『법의 정신』, 『군중심리』, 『사회계약론』, 『패자의 기억』, 『최후의 성 말빌』, 『세월의 거품』, 『밤의 노예』, 『지구는 우리의 조국』, 『마법의 백과사전』, 『말빌』, 『신혼여행』, 『어느 나무의 일기』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16세기, 한 여인의 삶을 통해 격랑의 시대를 경험한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했으나 정면으로 나서지 못하거나 우리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의 하나로, 프랑스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시기를 통치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를 선보이게 되었다. 암흑의 중세를 지나 예술과 문학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16세기. 그러나 여전히 봉건적 사고에 사로잡힌 상황 속에서 왕족도 아닌 한 이탈리아의 여인이 프랑스 왕비로, 황태후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왕비로서 10여 년, 황태후로서 30여 년, 이렇게 40여 년의 기간 동안 그녀의 궤적을 좇는 것은 바로 그 기간 동안의 프랑스 역사의 원류를 따라가는 것과 다름없다. 비록 우리에게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과 관련있는 황태후 정도로 간략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삶을 좇다 보면 이탈리아의 거대 금융 가문 메디치를 만나게 되고, 프랑스를 통치한 다섯 명의 왕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장 오리외 Jean Orieux는 첫 번째 소설 [레 퐁타그르 LesFontagre]로 194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수상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코르네유, 라신, 볼테르, 샤토브리앙, 위고, 르낭, 베르그송 등 프랑스 문학사에서 이름있는 인물들 대부분이 회원들이며 유럽의 수많은 문학 아카데미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최고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문학 아카데미다. 철저한 고증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 주요인물들의 전기와 여러 편의 역사소설을 써왔던 오리외는, [검은 베일 속의 백합-카트린 드 메디치 Catherine de M?dicis]에 대해서만큼은 신중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카트린은 외국 여성인데다가 왕족도 아니였으니 수많은 사가 (史家)들의 폄하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살아생전에도 온갖 악의에 찬 비방문에 시달려야 했던 카트린은 죽어서도 역시 그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카트린에 대한 평가는 19세기의 대중작가들이 그녀를 음모와 배신, 독살의 주인공으로 폄하해온 탓에 오랜 기간 동안 왜곡되어 왔다. 그러나 대문호 발자크만큼은 카트린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그는 1840년에 직관적인 통찰력을 발휘해 카트린을 ‘정치가’로 묘사했으며, 그런 카트린의 면모는 1세기 뒤 우리 시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오리외 역시 나름대로의 냉철한 시선을 잃지 않고 방대한 자료를 정리했으며, 기존의 평가를 날카롭게 꼬집는가 하면, 카트린이 지니고 있었던 한계에 대해서도 특유의 언변을 발휘해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이 작품이 발표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수많은 독자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이 책을 통해 우리 독자들도 16세기의 가장 광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 속에서 유럽의 정세를 생생하게 체험할 뿐만 아니라, 순종과 겸손함으로 상대를 무장시킨 전략가이자 단 한 번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치가, 그리고 가장 불행했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와 함께 격랑의 한 시대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 메디치 가의 영광, 카트린 마침내 프랑스 왕비가 되다
15세기 말, 르네상스의 발현과 더불어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이자 정치가로서 권력의 절정기에 있던 메디치 가문은 그 위광 (威光)과 영향력을 런던과 파리, 브뤼헤, 빈, 그리고 로마 등 유럽의 모든 대도시까지 확대시켜가고 있었다. 이 가문이 가지고 있던 것은 무기의 위력이나 영광이 아니라,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돈의 힘이었다. 왕들은 메디치 가문에서 돈을 빌렸으며, 메디치 가문은 왕들이 벌이는 전쟁에 돈을 대주었다. 1519년 4월 13일에 태어난 카트린 드 메디치 (1519 ~ 1589). 그러나 그 아기의 아버지는 옆방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어머니 역시 빈사 상태에서 헤매고 있었다. 아기 또한 오로지 희망의 끈으로 생명과 연결되어 있었다. ‘위대한 자 로렌초’의 유일한 합법적 직계 후손인 병약한 아기를 보며, 다들 아이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렇듯 극적인 출생은 앞으로의 그녀 삶이 결코 순탄치 않음에 대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사이에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지배권을 유지하려고 자기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자 종손녀인 (항간에는 조카딸로 알려진) 카트린을 프랑수아 1세의 둘째아들 앙리와의 결혼을 추진, 마침내 성공한다. 피렌체를 떠난 그녀는 그 누구의 관심이나 배려도 받지 못하고, 무관심한 남편의 침대 속으로, 적대감이 난무하는 궁정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그곳에서 평생을 다 바쳐 사랑할 대상, 매혹적이지만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는 골족의 나라, 프랑스를 발견했다. 그녀의 적응 방식은 궁정 사람들과 정반대였다. 당시 그들은 이탈리아화 (化) 되는 게 유행이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프랑스화 (化) 되도록 자신을 채찍질해야 했다. 그녀는 왕족이 아니라 금융가의 후손이었고, 낯선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은 늘 짝사랑으로 이어졌고, 그녀가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우상처럼 섬겼지만 남편은 오로지 의무감으로만 그녀를 받아들였고, 그런 남편의 그늘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프랑스화되었다. 이렇듯 그녀는 당시 세계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던 프랑스 신성 로마제국 (스페인을 포함한)?교황령의 틈바구니 속에 철저하게 고립되고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으나 그녀는 그 상황을 멋있게 극복했다. 지성과 영혼의 혁명이 이루어진 르네상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간하여,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다른 땅덩어리들과 함께 외톨이로 회전하는 둥근 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그 무엇보다도 그들 삶의 근간이었던 교회의 가르침과 로마의 제도가 문제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루터와 칼뱅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카트린은 남편 (앙리 2세, 1519 ~ 1559. 재위기간 1547 ~ 59)의 왕관과 더불어 프랑스 역사의 가장 거대하고 가장 광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분쟁을 물려받게 되었다. 바로 종교전쟁이었다. 모든 것은 독설로 시작되고, 반란과 형벌로 이어졌으며, 내란으로 치달았다. 그녀는 이 격동의 시대의 중심에 서서 30년 동안 섭정 황태후로서 아들들의 왕관과 더불어 프랑스 왕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 위협받는 왕권을 지키기 위한 30년 동안의 섭정
카트린은 통찰력을 발휘하여 냉철한 시선으로 세계와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과, 사람들을 조종해서 적극 활용하는 기술을 프랑스에 도입했다. 이 협의술 (協議術)과 외교술은 바로 피렌체의 산물이었으며, 그녀의 선조들이 애독한 책은 바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는 충실한 학생이었다. 카트린은 남편 앙리 2세와 정부 (情婦) 디안 드 푸아티에 사이에서 기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며 인욕의 삶의 살았으며, 결혼 후 10년 동안 후사를 잇지 못하다가 그후로 줄줄이 10명의 아이를 낳게 되었다. 앙리 2세가 죽기 전까지 카트린은 숨죽여 살아야 했으며 심지어 아이들의 양육까지 디안의 손에 맡겨야 했다. 앙리 2세가 죽고 마침내 장남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르고 카트린이 섭정 황태후로서 본격적으로 등극하게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녀는 영원토록 복상 (服喪)을 한다는 뜻에서 더 이상 비단 옷을 입지 않았다. 그후 그녀는 ‘검은 왕비’로 불렸다. ‘검은 왕비’로서 그녀는 가톨릭 교도와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신교도들 사이에서 위험한 줄다리기를 타며 관용의 정치를 펼쳤다. 그녀는 두뇌 회전이 빠르고 계산적이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증오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하여 오늘의 적이 어쩌면 내일은 없어서는 안 되는 동지가 될 수도 있음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적 갈등은 피할 수 없었으며, 수 차례의 내전을 비롯해 16세기 말 프랑스 전역을 시끄럽게 했던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 (1572년 8월 24일 ~ 25일)을 일으킨 주범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뜨거운 모정의 카트린, 그러나 가장 불행한 어머니
첫째아들 프랑수아 2세 (1544 ~ 1560, 재위기간 1년), 둘째아들 샤를 9세 (1550 ~ 1574, 재위 1560 ~ 74), 셋째아들 앙리 3세 (1551 ~ 1589, 재위 1574 ~ 89)의 시대를 거치면서 카트린은 프랑스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프랑스가 종교전쟁의 광기에 휩쓸릴 때 카트린에겐 가톨릭 교도든 신교도든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사랑하는 아들들이 이끌어가는 프랑스 왕권만이 유일한 종교이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풍전등화와 같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동맹관계의 수단이었던 정략결혼을 활용, 당시 막강 전력을 자랑하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첫딸인 엘리자베트를 결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후 둘째아들 샤를 9세를 당시 신교도의 정신적 지주였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시키려고 추진했다. 잉글랜드 여왕의 나이가 그녀의 아들보다 두 배나 많다는 사실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청혼한 것이었다. 기상천외한 계산이요,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카트린은 그래도 잉글랜드와의 평화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앙리 2세는 물론, 이후 열여섯 살인 막내아들 알랑송을 40대로 접어드는 엘리자베스 1세와의 결혼을 다시 추진했다. 어찌 보면 섬뜩할 정도로 집요한 모성이었다. 그녀는 온갖 음모 속에서 왕권은 물론 자식들을 지켜야 했다. 딸 마르그리트 (‘왕비 마르고’로 널리 알려진 딸)와 관련된 추문들, 아들인 앙리 3세의 광기, 막내아들인 알랑송의 반역 등 끔찍한 순간들과 마주치면서도 그들을 위해 수없이 연회를 베풀고 화해의 장을 마련해주었으며 (물론 자식들은 거짓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언제 어디서든 어머니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대부분의 메디치 가 사람들은 유전적인 결함을 가지고 태어났다. 결핵균은 그들의 체내에서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자라났고, 매독균과 연주창 (連珠瘡) 역시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카트린의 유산 속에는 프랑스의 미래에 커다란 위협을 가할 이 같은 결점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독 수명이 짧았던 카트린의 자식들. 저자가 표현한 대로 그 이유가 메디치 가문의 유전적인 결함이라고는 하지만, 다행히 오직 한 아이, 나바라의 앙리 (후에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앙리 4세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다)와 결혼한 막내딸 마르고만이 유일하게 60세를 넘어섰다. 아무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는 자식에 대해서는 이성적 (理性的)이 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녀가 특히 기대를 걸었던 앙리 3세에 대해서는 냉철함을 발휘하지 못했다. 카트린의 삶은 프랑스사에 등장하는 한 뛰어난 인물의 삶일 뿐만 아니라 근대 유럽 문명의 결정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아수라장 같은 종교전쟁 속에서 그녀는 이탈리아인 특유의 예술적 감각을 발휘하여 프랑스 건축물의 거대한 걸작인 튈르리 궁을 신축했으며, 축제를 조직하고, 무도극을 기획하고, 야만스런 골족의 궁정에 에티켓을 도입하고, 연회를 베풀고, 혁신적인 요리법과 승마술로 그 화려한 무대를 눈부시게 장식했다. ‘검은 왕비’는 카트린은 가장 눈부시고, 재능과 아름다움과 새로움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혁명적이고 열정적이었으나 불의와 잔인함에서 있어서도 창의적이었던 이 세기의 역사를 여전히 통치하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