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캉디드
볼테르 / 아로파 / 2016.8.11
– 순진한 낙관주의자 캉디드가 겪는 깨달음의 여정, 기발한 상상력 속에 볼테르의 철학적 사유를 담다!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극작가, 소설가인 볼테르의 대표작 ‘캉디드’는 순진한 청년 캉디드가 겪는 모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낙관주의를 의심 없이 믿어 왔던 캉디드는 에덴과도 같은 툰더텐트론크 성에서 쫓겨난 뒤 갖은 고행을 겪으며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에 휘말린다. 때로는 대담하게, 때로는 익살맞게 세상의 부조리에 일침을 가했던 볼테르는 이 작품에서 당시 퍼져 있던 낙관주의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던진다. ‘캉디드’는 출간 당시에도 뜨거운 감자였을 뿐만 아니라, 출간된지 2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며 사랑받고 있다.

도서 말미에는 ‘깊이읽기’ 코너를 마련해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는 자세한 해설과 아로파 세계문학만의 강점인 토론, 논술 문제를 수록하였다. 청소년을 비롯한 독자들이 문학 작품의 감상력을 키우고 사고의 깊이를 넓히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 목차
캉디드
캉디드 깊이읽기
_ 해설편
_ 토론 논술 문제편
○ 저자소개 : 볼테르 (Voltaire, 본명 :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인 다재다능한 작가 볼테르 (필명)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ois Marie Arouet)’라는 이름으로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볼테르는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 (Louis le Grand) 학교에 들어가는데, 이 학교에서 금세 두각을 드러내고 평생 이어갈 교유관계들도 형성한다. 한편,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 (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 (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간다.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한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플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한다.
이후에도 소 (Sceaux)성 (城)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학적 재능을 증명해 보이던 그는 청년 시대에 섭정 오를레랑 공을 풍자한 시의 작자로 간주되어 바스띠유에 갇혔다가 출옥한 뒤, 볼떼르란 필명으로 24세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이디푸스 (Oedipus)』(1718)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진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볼테르도 존중받는 장르였던 비극과 시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작가로서의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반면, 나중에 재미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1759), 『자디그 (Zadig, ou la Destinee)』(1748), 『랭제뉘 (L’Ingenu)』 (1767)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 (Pantheon)에 안치된다.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꼽히는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저서들 속에는 당대의 지배적 종교 권력이었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통적 가치들의 토대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비난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는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생전에는 대시인으로 대접받았지만, 그의 재능의 본질은 풍자 작가, 명쾌하고 기지에 찬 프랑스적 산문 작가의 전형에 있으며, 특히 철학적 에세이와 우화 소설에 뛰어났다. 이신론(理神論), 이성론의 입장에서 초자연을 강하게 부정하고 신랄하게 성서를 비판해, 후세에 그의 이름은 회의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계몽주의의 보급을 통해 대혁명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철학의 간』(1734), 『깡디드』(1759), 『관용론』(1763), 『철학사전』(1764) 등이 있다.
– 역자 : 현성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보들레르와 벤야민 연구’로 파리 8대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 책 속으로
팡글로스는 형이상학적·신학적·우주론적 바보학을 가르쳤다. 그는 원인이 없는 결과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가능 세계들 중에서 가장 좋은 이 세계에서 남작의 성이 가장 훌륭하며 툰더텐트론크 남작 부인이 이 세상 모든 남작 부인 중 가장 훌륭하다는 것을 멋지게 증명했다. — 「제1장」
“그렇습니다, 나리. 관례가 이래요. 우리에게 옷이라고는 1년에 딱 두 번씩 받는 질 나쁜 속옷 한 장이 전부이지요. 우리는 사탕수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맷돌에 끼면 손이 잘립니다. 도망가려 하면 다리가 잘리고요. 나는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하지요. 당신들이 유럽에서 설탕을 먹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이런 희생을 치르기 때문입니다. (중략) 개나 원숭이, 앵무새도 우리보다 천배는 덜 불행할 겁니다. 나를 개종시킨 네덜란드 목사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말하기를 검든 하얗든 우리 모두가 아담의 자식이라고 말했어요. 내가 족보학자는 아닙니다만 이 설교자들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한 가족이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를 지독히도 끔찍하게 이용해 먹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할 거예요.” 흑인이 답했다.
“오, 팡글로스 선생님! 이런 끔찍한 일은 상상도 못 하셨을 거예요. 이젠 모두 끝입니다. … 결국 저는 선생님의 낙관주의를 버려야겠어요.” 캉디드가 탄식했다.
“낙관주의라는 게 뭡니까?” 카캉보가 물었다.
“맙소사! 그건 나쁜데도 모든 게 좋다고 우기는 광기라네.” — 「제19장」
때때로 팡글로스는 캉디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능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자네가 퀴네공드 양을 사랑해서 엉덩이를 발로 차여 아름다운 성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만일 자네가 종교 재판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일 자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았더라면, 만일 자네가 남작을 찌르지 않았더라면, 또 만일 자네가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양들을 모두 잃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여기서 설탕에 절인 시트론과 피스타치오를 먹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럴 때마다 캉디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 맞는 말이네요. 좌우간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일구어야 합니다.” — 「제30장」
이제까지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예단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앞에서 그 어떤 확신에도 기댈 수 없는 사생아이자 고아인 캉디드는 새로운 진리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과 다른 의견과 입장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관용적 태도로 껴안으며 스스로의 운명을 짊어진다.— 본문 중에서
○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는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가 1759년에 쓴 철학적 풍자 소설이다. 당시의 지배 계급이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 와 종교재판소 등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묘사해 큰 파문을 일으킨 작품이다.
–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
.언어: 프랑스어
.장르: 철학 꽁트, 풍자, 피카레스크 소설, 성장소설
– 개요
당대에 논란이 되고 있던 철학사상을 염두에 두고 쓴 볼테르의 철학소설이다. 볼테르는 ‘순박한’ 캉디드를 통해 당시의 정치, 철학, 종교 등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삶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역경을 겪으면서도 낙천주의자 캉디드가 추구했던 행복은 많은 논점을 던지고 있다.
– 해설
캉디드, ‘순진한’, ‘순박한’이란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작가 볼테르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에서는 대단한 문제작이며 훌륭한 작품으로 최근에도 많은 연구 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상을 낙천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비관주의로 볼 것인가를 화두로 던지고, 끝까지 이 두 이데올로기의 반복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는 당대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던 철학사상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인 것이다.
우선 이 작품은 주인공 캉디드를 내세워서 낙천주의로 출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작가는 우선은 낙천주의, 즉 당대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철학적 논쟁 중에서 라이프니츠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라이프니츠의 틀에 박힌 듯한 낙천주의를 공격한 것일까? 반대로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의 편에 가담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제 3의 철학을 택할 것인가? 아마도 그 대답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시점에서야 알게 될 것이다.
캉디드, 그는 이름의 뜻처럼 순진하기 이를 데 없다. 소위 말하면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여정을 추적하는 것 자체가 흥미를 유발하고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에 실소를 자아내게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어렸을 적에 배운 낙천주의를 유지한다.
– 줄거리
매우 유순하고 고지식하고 순박한 소년 캉디드는 웨스트팔리아의 툰더 텐 트롱크 남작의 성에서 자라게 된다. 그는 남작의 아들 및 그의 누이동생 퀴네공드 양과 함께 팡글로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선생은 ‘세상은 최선으로 되어있다’ (Tout est pour le mieux)는 것을 증명해 보이곤 했다. 요컨대 “세상과 인생의 의의 및 가치에 대해 악이나 반가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세계와 인생을 최선의 것으로 보는 주의” 말이다. 비록 현실은 괴롭다 치자! 그래도 미래는 분명 즐겁고 희망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의 낙천관은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캉디드의 삶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캉디드가 남작으로부터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다는 의심을 받고 성에서 쫓겨나, 불가리아 군대에 들어가는 일,네덜란드에서 착한 재침례교도를 만난 일, 아메리카에서 겪는 일, 등 그가 만나는 일들은 최선의 상태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악, 최악으로 되어있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가 가는 곳은 엘도라도를 제외하고는 어디나 낙천적인 모습들보다는 추한 모습이며 악한 모습들로 가득 차있다. 군인도, 거룩해야할 종교계의 신부들의 모습도 추악한 모습들뿐이다. 어디에나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사기, 평화가 아니라 싸움이나 전쟁만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발생하는 지진 같은 것 그가 가는 곳 어디나 불행의 요소, 즉 비관적인 요소들만이 등장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사람들도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는 일을 막거나 방해하는 사람들,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기를 치고, 속이고 핍박을 가하는 사람들이며, 그가 어깨를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에게 의지하려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뿐인가? 착하디착하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본의 아니게 가톨릭 종교재판소 판사를 죽이기도 하고 예수회 신부를 칼로 찌르고 도망치기도 하고, 원숭이를 죽이기도 한다. 어디에 가나 속고 사기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며 도무지 되는 일이라곤 전혀 없다. 그야말로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며 최악으로 구성된 비관적인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에게는 그토록 존경하는 팡글로스 선생이 가르쳐준 낙천주의 철학을 버리는 일만이 남아있다.
이제 그 일을 부추기기 위한 존재로 마르탱이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까?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세계 및 인생을 추악하고 괴로운 것으로 보며, 진보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철학”의 편에 서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의 순진한 주인공은 낙천주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모두가 비관적인 일뿐이다. 심지어 그의 주변 인물들이나, 잊혔던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경험담 역시 온갖 추악한 일들뿐이다. 결국 선과 악으로 대별되는 마음의 싸움에서 악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신의 섭리라면 이제는 이 세상을 비관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팡글로스를 다시 만난다. 팡글로스의 모습은 변했으나 여전히 낙천적이다. 그래서 낙천주의는 유보되지만 이후에도 당하는 일마다 비관적인 상황들뿐이다. 그러면 이 소설은 낙천주의를 비판하고 비관주의를 옹호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소설은 어떤 철학의 편을 드러내지 않고, 독자에게 그 판단을 유보하며 끝을 맺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