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한글자로 신학하기
구미정 / 대한기독교서회 / 2007.3.19
정, 물, 몸, 길, 신…. 모두 한 글자지만, 백마디 천마디도 말로도 다할 수 없는 뜻을 지닌 단어들이다. 생태여성신학자 구미정 숭실대 겸임교수가 이 ‘한 글자’를 신학적으로 풀어냈다. 그자 2006년 한 해 동안 개신교계 대표적인 월간지인 「기독교사상」에 매달 한 차례씩 누에고치가 살을 풀어내듯이 토해낸 글이 「한글자로 신학 하기」로 나왔다.
이 글을 쓰면서 내내 ‘몸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몸살에 시달렸다는 저자는 ‘몸의 신학’에서 “가족이 아프면 나 역시 편하게 밥을 넘기기 미안해지고, 이웃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 살도 덩달아 떨려오고, 환경에 문제가 생기면 내 피부도 아토피로 반응하듯이 몸살을 앓는다는 것은 나의 몸이 다른 생명의 몸/살과 공명하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라고 묻는다. 이화여대 철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은 먹물이라기보다는 인천 부개동의 달동네에서 공동묘지를 놀이터 삼아 사내아이들과 전쟁놀이와 귀신놀이를 하며 놀던 선머슴 같은 그의 영성훈련은 그런 몸살인지 모른다. 무생물인 한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도 그런 아픔과 몸살이었을 것이다.

그는 ‘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서려야 설 줄이 없어 허공 위의 줄에 오른, 영화 <왕의 남자> 의 장생과 공길의 줄에서 민중의 한을 위로하고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구원과 해방을 발견하고, 예수가 세상에 올 때 무력과 전쟁을 상징하는 군마의 밥통에 담겨 오신 뜻에서 제국과 폭력을 넘어서려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메시지를 본다. 저자는 ‘살의 신학’에서 “힘들더라도 화에, 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일어나 춤을 추자”고 부추긴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다윗처럼 ‘힘차게’추지 말고, 예수처럼 ‘살살’추자고 한다. 그렇게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 흥겨운 신명에 젖을 때 비로소 신(神)이 나고, 하나님이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열화와 같은 독자들의 연재연장 요청에도 꿈, 한, 똥, 멋, 맛 , 술, 돗 등 수많은 한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뒷사람의 몫으로 남겼다. 마지막 글은 ‘비움’을 뜻하는 ‘공의신학’이었다.
○ 목차
1. 정의 신학
2. 통의 신학
3. 줄의 신학
4. 달의 신학
5. 물의 신학
6. 몸의 신학
7. 길의 신학
8. 살의 신학
9. 색의 신학
10. 문의 신학
11. 신의 신학
12. 공의 신학
참고문헌

○ 저자소개 : 구미정
이화여대 철학과와 같은 대학원 기독교학과를 졸업했다. 생태여성주의를 바탕으로 신학과윤리를 재구성하는 참신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여성과 자연,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삼고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있다. 저서로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가 있으며, 역서로 「교회 다시 살리기」, 「기초생명윤리학」, 「생명의 해방」등이 있다. 계명대학교, 대구대학교, 영남신학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지금은 숭실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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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봄내(春川) 출신이다. 말만 또랑또랑하지 속은 어벙한 게 감자바위라는 말도 듣는다. 이화여대 철학과와 같은 대학원 기독교학과를 졸업했다. 생태여성주의에 바탕을 두고 신학과 윤리를 재구성하는 참심한 논문으로 우리 나이로 서른셋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여성과 자연,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삼고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있다. 저서로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 ‘한글자로 신학하기’가 있으며, 역서로 ‘교회 다시 살리기’, ‘생명의 해방’ 등이 있다. 계명대학교, 대구대학교, 영남신학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지금은 서울복음교회 교육목사와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로 있다. ‘나는 모든 글쓰기가 치유글쓰기라고 믿는다. 하다못해 지루하고 딱딱한 논문을 쓰더라도, 문장이 조악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매끄럽도록 집중해서 사고를 단련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정화되는 것 같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전국구 시간강사로 ‘보따리 장사’를 하는 고달픈 생활 중에도 아직(?)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치유글쓰기의 힘이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헤매고 여전히 넘어지고 여전히 깨지는 삶의 길 위에 있지만, 나는 아직(!)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내 글을 읽어주고 나와 함께 고민하며 적나라한 생명의 춤을 함께 추는 글벗들이 있는 한, 나는 감히 행복하다고 말하련다.

○ 책 속으로 : 몸의 신학
‘한’ 글자로 신학하기는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도록 이어주는 한 글자 짜리 단어를 열쇠말 삼아, 그 안에 숨어있는 신학적 상념들을 풀어내는 작업이다.
-몸이 화두인 시대
요즘만치 몸에 몰두했던 시대가 또 있을까 싶다.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언저리로 밀려나 있던 몸이 학문과 대중 담론 속으로 당당히 귀환했다. 바야흐로 몸이 화두인 시대에 접어들었다.
흔히 관계의 단절을 선언할 때 최후통첩으로 내뱉곤 하던 ‘잘 먹고 잘 살아라.’가 이제는 욕은커녕 온 국민이 지향해야 할 삶의 지표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웰빙(well-being) 열풍을 타고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알려주는 TV 프로그램들이 봇물을 이룬다. 아울러 ‘몸매 가꾸는 법’까지 세트로 안내해주니, 참으로 친절한 TV가 아닐 수 없다. 한쪽에서는 전국의 소문난 맛집들을 쫓아다니며 잘 먹으라 부추기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이런저런 다이어트 비법들을 소개해주며 부지런히 빼라 협박한다. 이 무슨 해괴한 난리 브루스인지…….
시몬느 드 보봐르가 말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오늘날 몸을 두고 한 예언 같지 않은가? 일본 말로 ‘야사시사’(부드럽고 공손하다는 뜻)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배용준이 100일 만에 강한 근육질 남성으로 재탄생한 과정을 보라. 그 방면에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그의 조각 같은 몸매가 ‘JP의 작품’이라고들 한다. 비, 권상우, 차인표 등 내노라 하는 몸짱 스타들이 다 그의 손을 거쳤단다. 헬스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JP(임종필)씨는 2004년 말 일본의 아줌마 부대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욘사마의 몸-작품에 특별히 애착을 느껴, 최근 자신의 몸매 만들기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어내기까지 했다. 욘사마의 몸을 찍은 화보집과 그의 몸을 만든 트레이너의 경험담이 세트로 대박을 터뜨리는 걸 보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빠진 몸’은 곧장 ‘상품(商品)’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태어난 그대로, 생긴 대로 사는 몸은 궁색함과 비천함의 상징인 반면,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로 다듬어지고 관리되는 몸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전자가 자연이라면, 후자는 문화다. 자연은 문화에 의해 변형되고 지배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근대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다. 자연에 손을 대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은 ‘미개(未開)’요 ‘야만(野蠻)’으로 간주된다. 기술적 도구들을 가지고 끝끝내 쳐들어가 개발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므로 자연/문화 이원론이 식민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로 이용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은 피식민지 영토와 백성에게도 미개의 꼬리표를 붙여놓고,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시혜적 문명화’라고 정당화한다. 피식민지 경험을 화인(火印)처럼 지닌 우리로서는 이런 식의 적반하장에 살이 떨리지만 말이다.
‘자연 보호’라는 개념도 따지고 보면 오지랖 넓은 인간들의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자연은 그냥 두면 저 홀로 알아서 스스로 치유하고 정화하고 회복한다. 보호한답시고 섣불리 개입하는 게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많다. 그러니 노자가 왜 그렇게 인위(人爲)를 싫어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에게 도는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도덕경 제19장)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에서 도를 보는 노자의 안목이 없는 우리로서는 생경한 가르침이지만, 유위문화(有爲文化)의 길을 따라 너무도 멀리 와 버린 지금 세대가 반드시 되새겨야 할 금언이 아닐 수 없다.
주름살과 흰머리, 기미와 검버섯, 터진 배와 늘어진 뱃살은 그 자체가 자연이고, 역사이며, 실존이다. 인간의 삶의 궤적이 가감없이 기록되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정직한 몸은 그 자체가 예술이고, 시이며, 영성이다. 그런데도 ‘젊고 탱탱한 몸’을 우상시하는 시장의 논리 앞에서 정직한 몸은 당장에 추한 몸으로 전락하니, 이 무슨 횡포인가 싶다. 시장은 정직한 몸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보톡스 주사를 맞으시지요, 염색은 왜 안하고 다니세요, 필링(박피)이나 레이저 치료를 받으시지요, 지방흡입술은 어떠신가요……. 과거에는 여성의 몸을 집중 공략하더니만, 이제는 남성에게도 추파를 던지는 시장의 간교함이여! 온갖 기술과 미디어로 중무장한 채 호시탐탐 우리를 소비자로 끌어들이려는 시장의 유혹 앞에서 과연 누가 초연할 수 있을까?

– 그녀, ‘코르셋’을 벗다
사회학자들은 우리 사회가 88올림픽을 전후로 본격적인 소비사회에 돌입하면서 몸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졌다고 분석한다. 과거 생산사회에서의 몸은 웬만한 노동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몸이 선호되었으나, 소비사회의 몸은 노동과 상관없는, 아니 도리어 노동에 부적합한 ‘날씬하고 마른 몸’이 각광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자본이 남성에게 편중되어 있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남성은 보는 존재, 여성은 보여지는 존재’라는 의식이 팽배하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대한 규제와 감시가 더욱 노골적일 수밖에 없다. 미스코리아니 수퍼모델이니 전국 규모의 미인대회는 말할 것도 없고, 고추아가씨, 양파아가씨, 감귤아가씨, 한우아가씨 등 지역 특산물을 내건 온갖 미인대회가 성행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런 미인대회들은 여성의 몸을 34-24-35라는 획일적인 수치 아래 종속시킴과 동시에, 남성의 관음증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여성에게 독(毒)인데도 쉬이 사라질 줄을 모른다.
정병각 감독의 데뷔작 <코르셋>(1996)은 소비사회의 물화(物化)된 몸,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차별을 다룬 문제작이다. 이 작품으로 신인여우상을 휩쓴 이혜은은 극중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단기간에 살을 찌웠다가 도로 빼는 이른바 ‘고무줄 몸무게’를 선보여 화제가 됐었다. 하여간 <역도산>의 설경구도 그렇고, 배우들의 몸은 정말로 ‘유순한 몸’인 것 같다. 죽어라 애를 써도 1킬로그램을 덜어내기가 쉽지 않은 우리네 몸과 달리, 그네들의 몸은 어째 그렇게 말을 잘 듣는지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각설하고 영화 <코르셋>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공선주는 실력 있는 속옷 디자이너지만, 단지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집단따돌림을 당한다. 스물아홉 살 크리스마스 이브, 술에 취해 무단횡단을 한 이 노처녀에게 교통경찰이 내뱉은 말 한 마디는 조롱의 절정이다. “이런 날, 뚱보가 어딜 활개치고 다녀? 뚱보한테 통행제한 하는 법은 없나? 10부제라도 만들어서 체급별로 다니게 해야 하는 건데.” 남성의 눈요기감이 되지 못하는 여성은 ‘사회악’이고 ‘격리대상’이란다. 이런 차별과 편견이 지배적인 현실에서 공선주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홀연히 나타난 ‘킹카’ 강 과장. 그는 사실 ‘여자 사냥꾼’이라는 별명답게 ‘특이한 것’을 취미삼아 모은다는 생각에서 공선주에게 접근한 것이지만, 이미 황송한 사랑에 눈이 먼 공선주가 이런 사실을 알아챌 리가 없다. 공선주는 이 멋진 남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날마다 자기 살들을 코르셋 속으로 밀어 넣으며 죽기 살기로 다이어트에 돌입한다.
코르셋……, 불후의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가 거구의 흑인 유모의 도움을 받아가며 숨이 막히도록 꽉 조여 입던 그 코르셋. 원작 소설에 보면 스칼렛의 허리는 고작 17인치로 나온다. 성인 여성의 허리라 하기에는 엄청나게 무리한 사이즈이다. 그런데 중세 유럽 사회에서 상류층 귀부인들의 경우는 훨씬 더했다. 개미허리를 갖기 위해 어릴 때부터 코르셋을 착용했던 그들을 마침내 12인치 내지 10인치라는 기상천외할 사이즈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아울러 갈비뼈가 부러지고, 척추가 손상되며, 간이 두 조각으로 분리되는 등 치명적인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이쯤되면 코르셋이 ‘살인무기’라고 하는 고발도 괜한 누명이 아니다.
영화 <코르셋>은 바로 그 코르셋, 다시 말해 남성의 기호와 취향에 맞추어 여성의 몸을 재단하는 온갖 규제 장치들에 의문부호를 찍는다. 공선주는 강과장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코르셋을 조이지만, 불행히도 강과장은 그런 공선주를 비웃으며 보란 듯이 쭉쭉빵빵한 미녀에게로 떠나가 버린다. 게다가 이 미녀는 경쟁사에서 방금 스카웃된 신참 주제에, 경력과 업적 면에서 월등한 공선주를 밀어내고 수석 디자이너 자리까지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사랑과 일에서 모두 낙오자가 된 공선주, 그의 구원은 과연 어디에서 올 것인가? (여기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사회통념이 그대로 투사된 점은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현상적으로 그런 모습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건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여성 고유의 본래적 속성은 아니라고 본다. 거꾸로 ‘남자의 적은 남자’일 때도 많지 않은가?)
만약에 이 영화의 장르가 공포 스릴러물이라면 <미저리>(Misery) 식으로 흘러야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코미디인 관계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처럼 결말이 해피하다. 공선주는 단골 횟집의 ‘왼손잡이’ 주방장과 동병상린의 아픔을 나누다가 결혼에 골인하고, 빅 사이즈 여성을 위한 속옷 전문점을 여는 등, 사랑과 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다. 코미디이기에 가능한 결말이지, 리얼리즘 영화라면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 수 있을까 싶다.
그래서 이 영화의 미덕은 결말에 있다기 보다는 소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에게 더욱 가혹한 외모차별의 문제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에서 공선주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데 단초가 되는 ‘꿈’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꿈에서 공선주는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산 속을 헤맨다. 길을 잃고 울며 서 있는 그에게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온다. 공선주는 그 음성을 좇아 붉은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 방은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이상한 곳이다. 거울 속에 비친 공선주의 몸은 어느새 어른의 몸으로 바뀌어 있다. 이어지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속삭임. “선주야, 가만히 들여다봐.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건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야. 그렇지, 신기하지? 네 몸을 구석구석 들여다봐. 그게 바로 너야. 네가 한 번도 봐주지 않고 쓰다듬어 주지 않는데, 누가 대신 너를 사랑해 주겠니? 네가 너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너를 망가뜨리지 못해.”
예술은 보이는 것의 재생산이 아니라, 실제를 보이게 만든다더니, 이 장면에서 내 눈에는 어머니로 화(化)한 하나님이 보인다. 공선주처럼 나도 하나님의 너른 품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가 통째로 용납되는 경험을 하는 것만 같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공선주가 어머니의 부름을 따라 들어간 붉은 방은 어쩌면 하나님의 모태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에 등장하는 ‘모태’라는 모티브를 주목해보라.) 거기서 공선주는 정신분석학이 이야기하는 거울단계, 곧 자기 신체 이미지와 자기 자신을 통합하는 단계를 거쳐 새로운 자아로 재탄생한다. 한마디로 몸과 화해한 것이다. 더 이상 몸에 대한 외부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누가 뭐래든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겨났다. 코르셋을 벗어던지는 공선주의 몸짓은 그 어떤 정치적 혁명보다 위대해 보인다.
부활을 존재의 변화라 한다면, 그 밤이 지나고 공선주는 그야말로 부활한 것이다. 과거의 공선주는 죽고 새로운 공선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를 과거의 공선주처럼 대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걸음마다 당당한 에너지를 발하면서 새 일을 벌여나가는 그는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엡 5:8)라는 고백은 이럴 때 나와야 딱 맞는다. 자기에게 수치와 절망만 안겨주던 코르셋에서 완전히 해방된 그는 과거의 자기처럼 코르셋 속에 갇혀 있는 몸들을 구원하는 일에 뛰어든다.

– 몸에 갇힌 여자들
마가복음 5장의 혈루병 여인이 길로 나선 것도 상징적 의미의 코르셋을 벗어버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여성의 자궁에서 유출되는 피에 대한 유대 율법의 금기(레 15:19-30)는 그 어떤 코르셋보다 더 단단하게 여성의 몸을 옥죄는 규제 장치가 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정결과 부정의 잣대로 가르던 유대교의 이분법은 여성의 월경을 부정의 목록에 포함시킨다. 월경하는 여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한 여자에게 어쩌다 몸이 닿는 남자 역시 부정을 타게 된다. 여자가 부정한 기간 중에 눕는 자리나 앉는 자리도 모두 부정을 타는 마당이니, 그 여자와 동침하는 남자는 더 말해 무엇하랴? “그 여자의 불결한 상태가 그 남자에게 옮아서” 남자도 이레 동안 부정하고, 그 남자가 눕는 잠자리도 부정하다고 정죄된다. 고약한 것은 월경 기간 외에도 만성 자궁출혈이 있는 경우이다. 월경이 자연현상이면, 만성 자궁출혈은 질병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서는 어떤 경우든지 간에 예외 없이 부정하다.
어떤 여자가 자기 몸이 월경 기간이 아닌데도, 여러 날 동안 줄곧 피를 흘리거나, 월경 기간이 끝났는데도, 줄곧 피를 흘리면, 피가 흐르는 그 기간 동안 그 여자는 부정하다. 몸이 불결한 때와 같이, 이 기간에도 그 여자는 부정하다. 그 여자가 피를 흘리는 동안 눕는 잠자리는 모두, 월경 기간에 눕는 잠자리와 마찬가지로 부정하고, 그 여자가 앉는 자리도, 월경 기간에 앉는 자리가 부정하듯이, 모두 부정하다.(레 15:25-26)
그러니까 만성 자궁출혈은 여성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이다. 부정하다는 낙인이 찍힘과 동시에 일체의 사회활동이 금지되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마저 끊어진다. 이른바 ‘불가촉(Untouchable)’의 범주에 든다는 것은 종교적 파문이요 사회적 죽음을 암시한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자기 몸에 최초의 월경이 일어났던 때를 회고하며 “마치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에게 월경은 여성이라는 해부학적 몸으로부터 도저히 도망칠 수 없다는 표지이고, 따라서 ‘저주받은 몸’에 갇히는 증거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여성이 월경을 축복이 아닌 저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여성의 일차적 존재 이유를 ‘아이 낳는 것’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적 통념과, 바로 그 출산을 하나님의 형벌로 해석하는 기독교 문화가 이중나선형 구조로 단단히 꼬여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부장적 기독교’ 문화권 속의 여성은 자신의 월경을 몸의 소외와 차별과 억압을 야기하는 주된 요인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이 손님이 달갑지 않은 불청객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문명사회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1세기 유대 사회에서 만성적으로 하혈하던 이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마가복음 5장 25-34절에 등장하는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는 그 앞(21-24절)과 뒤(35-43절)에 연이어 소개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와 샌드위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김득중은 마가가 이 이야기를 구성한 목적이 의도적으로 유대사회 계층의 두 극단을 대조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김득중, 370) 두 여성 모두의 이름이 익명으로 처리된 것이야 시대적 한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혈루병 여인의 경우에는 출신 성분이 전혀 나와 있지 않은 데 비해, 소녀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버젓이 등장한다. 이 소녀는 회당장(지위가 높다!) 야이로(이름이 있다!)의 딸이다. 그는 ‘12년’ 동안 유명(有名)인사인 아버지의 후광 아래서 사회적 특권을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반면에 혈루병 여인은 ‘12년’ 동안 가진 자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밑바닥 계층으로 전락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26절)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에 시달렸다니, 보지 않아도 그 인생의 곤고함과 참담함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12라는 숫자는 12달, 12간지, 12지파, 12제자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완전한 주기’를 상징한다. 다 차고, 그 다음부터는 새로 시작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혈루병을 12년이나 앓았다는 말은 아플 만큼 아팠다, 더 이상 아플래야 아플 수가 없을 정도로 끝까지 갔다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한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12살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로서의 삶이 끝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임을 암시한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사춘기, 곧 2차 성징이 출현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가 성인식(바르 미쯔바)을 치르는 연령이 13살이라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할례와 더불어 성인식은 이스라엘 남성 문화의 두 기둥으로, 부권 확립에 기여한다. 그런데 인생의 이 중대한 시점에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 제목처럼 ‘소녀에서 여인으로’ 넘어가야 할 과도기에 무엇 때문인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 그것도 발 아래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걸 보면, 그 딸이 얼마나 귀한 존재로 대접받고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혈루병 여인은 철저히 혼자다. 자기를 대신해 예수님을 모셔올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하나 없다. 부정하다고 낙인찍힌 몸에 갇혀, 부정탄다고 버림받은 세월이 어언 12년이다. 그 즈음에 예수의 소문이 들려온다. 귀가 번쩍 열린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나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여기서 끝내든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든지 무슨 수를 내야 한다. 여인은 살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선다. 드보라가 야엘에게 했던 칭찬을 이 여인에게도 그대로 해주고 싶다. “어느 여인보다 복을 받아라. 방구석에 묻혀 사는 어느 여인보다 복을 받아라!”(삿 5:24, 공동번역)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택한 여인은 이미 복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생명을 택하면 살게끔 되어 있다.(신 30:19 참고)

– 몸통한 영성으로 예수께 나아가라
드디어 저 멀리 군중에 에워싸인 예수님이 보인다.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28절) 여인은 용기를 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예수님께 나아간다. 그건 정말로 큰 용기다. 사람들이 알아서 비켜주지 않는 한, 부득불 몸끼리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부정을 옮기게 되니,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저들은 저녁때까지만 부정하면 그 뿐이지만, 나는 열 두해를 이러고 살지 않았나?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계시는데, 이것저것 따지며 지체할 겨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오늘만큼은 좀 봐줘도 된다……. 물불 안 가리는 이 용기야말로 폴 틸리히가 말한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라고 할 것이다. 그런 용기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마침내 예수님께 가까워진 여인은 뒤에서 몰래 그의 옷에 손을 댄다. 그랬더니 정말로 몸이 나아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인의 몸이 나은 것이 예수님의 옷 때문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34절) 만약에 예수님의 옷 자체가 기적의 원인이라면, 그 옷에 무슨 신통력이 있는 것이라면, 거기에 닿았을 무수한 몸들도 기적을 체험했어야 옳을 것이다. 허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 현장에서 예수님을 따른 큰 무리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혈루병 여인뿐이었다. 전체적으로 열 두 제자의 ‘믿음 없음’을 시종일관 고발하는 마가의 견지에서는 이 여인이야말로 예수의 참 제자인 셈이다.
여인은 자기의 믿음대로(본래 믿음이란 합리를 넘어서기 때문에 불가해한 측면이 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자, 곧바로 “몸이 나은 것을 느낀다.”(29절) 의사에게 확인 받는 복잡한 절차도 필요치 않다. 그냥 몸이 저절로 안다.(공동번역에서는 “그 여자는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로 옮겼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신다.”(30절) 여기서 여인과 예수가 보여주는 영성은 철저히 ‘몸통한 영성(embodied spirituality)’이다. 이 영성은 서구 형이상학의 중심 토대인 영/육 이분법을 통쾌하게 무너뜨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육화(embodi-ment)를 믿는 기독교 본연의 고유한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로서의 기독교는 히브리 사상에서 물려받은 정결/부정의 이원론과 희랍 사상에서 물려받은 영/육 이원론이 적당히 버무려진 형태로 발전되었지만, 이러한 잔재들은 사실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위배된다. 예수는 부정한 몸들을 정죄하거나 구원에서 배제시키기는커녕, 스스로 부정과 하나가 되어 구원의 지평을 넓히신다. 혈루병 여인과 접촉함으로써 자기 역시 부정해지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신다. 예수를 만진 것이 유대 정결법의 위반인 것을 알기에 두려워 떠는 여인을 도리어 칭찬하고 축복하시는 모습(34절)은 ‘진기함(novelty)’ 그 자체이다. 더 나아가 예수는 사람들이 이미 죽었다고 선언한 소녀(외관상 ‘시신’이다. 고로 부정의 절정이다!)를 만짐으로(41절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스스로 정결법을 위반하신다. 부정(否定)의 부정은 긍정이라더니, 율법이 정한 부정(不淨)들이 예수에 의해 부정(否定)되는 이 위대한 긍정의 사건이야말로 복음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예수는 몸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몸의 경험과 몸의 구원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주기도의 하단부가 ‘일용할 양식’으로 시작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빵이 없어도 또한 살 수 없는 법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첫 번째 이적으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준 일화를 소개한다.(막 1:21-28) 안식일법을 고의적으로 위반하면서까지 예수가 가르치고자 했던 진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의 긴박한 우선성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몸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신 게 분명하다. 그런 건 몸을 ‘영혼의 감옥’ 내지 ‘의식을 담는 그릇’ 쯤으로 생각하는 관념론자들의 발상이지, 예수의 뜻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몸을 빼버리면, 소위 말하는 영지주의 이단으로 흐르게 된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이 하나님의 가면놀이나 되는 것처럼 진지하게 취급되지 못하는 가현설(假現說)로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비중으로 ‘마리아의 아들’임을 주장해야 한다. 여성-몸-땅-물질을 상징하는 마리아의 존재는 예수의 성육신의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몸통한 주체(embodied subject)’로 여기셨다. 그는 우리가 몸을 매개로 하여 다른 사람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세계의 운명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몸에 대한 율법상의 금기와 관습상의 규제가 엄존하여 인간의 행동을 터무니없이 제약하던 그 시절에, 예수는 다양한 몸들 사이를 바람처럼 자유롭게 오가며 부지런히 생명을 실어 나르셨다. 나이든 여자의 몸이든 어린 소녀의 몸이든, 병든 몸이든 건강한 몸이든, 부유한 몸이든 가난한 몸이든, 유대인의 몸이든 이방인의 몸이든, 성과 계급과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몸에 하나님의 얼이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 예수 사역의 목적이었다.
혈루병 여인이 자기와 같은 여자들을 사회의 변두리로 내모는 정결법 규정에 저항하기로 결단했을 때, 그는 비로소 몸통한 주체로 거듭난 것이다. “해방을 위해 스스로 이니셔티브를 취한”(김득중, 370) 이 여인의 적극적인 행동은 예수로 하여금 남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여성의 경험에 깊이 공감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이 여인과의 만남은 예수에게 1세기 유대 남성으로서의 자기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자극제요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어진 야이로의 딸과의 만남에서 예수는 이제 스스로 ‘해방의 이니셔티브’를 취하신다. 지극히 능동적이었던 혈루병 여인에 비하면 이 소녀는 한없이 수동적이다. 소녀가 왜 죽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병에 걸렸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이 소녀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를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회당장)의 믿음을 보고 살리신 것 같지도 않다. 회당장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절)고 말하자, 예수를 비웃기까지 한다. 잠자는 상태조차도 죽음으로 간주하는 저들의 반(反)생명적 시선과, 죽은 상태조차도 잠자는 것으로 보는 예수의 생명적 시선이 서로 충돌하면서 불꽃 튀는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죽음의 세력들은 예수에 의해 추방된다.(40절 참고) 그들은 생명의 굿판이 벌어지는 신명나는 현장에 참여할 권리도, 능력도 없다. 어쨌거나 소녀는 예수께서 그 손을 잡으시며 ‘달리다굼!’이라고 말하자, 놀랍게도 진짜 살아서 일어나 걸으며 음식을 먹기까지 한다.(42-43절 참고) 소녀가 몸통한 주체로 등장하는 대목은 유일하게 여기뿐이다. 소녀는 이제 여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바라건대, 혈루병 여인처럼 믿음의 용기를 지닌 주체적인 여성으로 커나갔으면 좋겠다. 그의 몸이 닿는 모든 관계마다 생명의 꽃이 피어났으면 좋겠다.
– 몸살을 앓는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몸살에 시달렸다. 자업자득이다. 한쪽 다리에 깁스까지 한 채로, 몸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막고는 무식하게 몸을 혹사했으니, 몸살이 안 나고서 배기겠는가?
몸통한 영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몸을 지배하거나 조종하거나 속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나치게 몸(이 때의 몸은 주로 ‘살’이다.)에 집착하여 신체적 안녕과 편안에만 몰두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영/육 이분법에 사로잡혀 몸을 부정하고 영혼에만 전념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몸 성히’ 지내는 일은 정말로 중요한 영성생활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몸이나 다른 사람의 몸을 대할 때는 단순히 살덩어리를 대하는 것 이상의 존경심이 필요하다. 몸은 이미 하나님의 얼을 씨앗처럼 품고 있는 거룩한 터전이라고 봐야 한다. 그 씨앗이 자람에 따라 몸의 개념도 확대된다. 단순히 피부 울타리로 둘러싸인 내 몸의 안위만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무수한 존재들의 몸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몸인 세계의 운명과 나 자신의 운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우주적 숨결이 곧 나의 호흡이 되는 ‘천지만물여아일체(天地萬物與我一體)’의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살’은 동물과 식물의 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의 살과 연결된다. 나의 몸은 결국 세계의 살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공간이다. 식사(食事)를 통해 무수한 생명체의 살들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니, 식사는 곧 장사(葬事)라는 말이 얼마나 절묘한지 모르겠다. 심지어 햇살이 없으면 당장에 죽는 것이 뭇생명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몸살을 앓는다는 것은 나의 몸이 다른 생명의 몸/살과 공명하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가족이 아프면 나 역시 편하게 밥을 넘기기가 미안해진다. 이웃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 살도 덩달아 떨려온다. 환경에 문제가 있으면 내 피부는 당장에 아토피로 반응한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몸살을 통해서 우리는 몸통한 영성을 훈련하고 점검하는 절호의 기회를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몸살을 앓을 때마다 영성의 깊이도 덩달아 깊어진다면, 내 기꺼이 몸살을 반겨 맞이하련만…….
_ 구미정 박사는 이화여대 철학과(B.A.)와 동대학원 기독교학과(M.A. & Ph.D.)를 졸업했다. 여성과 자연, 생명과 평화를 신학적 화두로 삼고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있다. 저서로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가 있으며, 역서로 『교회 다시 살리기』, 『기초생명윤리학』 등이 있다. 현재 대구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생명문화아카데미 원장으로도 활동한다.
○ 독자평
– “보고서 내실 때 괜히 앞표지 만들고 그러지 마세요. 종이를 만들려고 지금도 나무가 계속 베어지고 있잖아요. 종이 낭비하지 말고 표지 절대 만들지 마세요.”
작년의 일이다. 구미정 박사의 수업시간이었다. 나는 ‘꼴랑 한장 가지고 그러실까, 오바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나는 구미정 박사의 강의에서 몇 번이나 눈물을 글썽거려야 했다. 내 가슴을 울리는 강의였다. 고지론과 청부론을 극복한 마리아의 태교와 평생을 혈루병으로 고통 받았던 여인 치유, 고멜과 호세아의 이야기 등등..무엇보다도 예수를 포함한 성경 속 인물들의 마음을 오늘 나에게 느끼게 해주는 마음의 강의였다. 또한 구 박사님과 몇 번의 점심식사를 통해서, 나는 박사님에게서 신학에 ‘몸과 마음’을 내던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에 나는『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구미정)』를 읽으며 과제물 앞표지를 안 만드는 ‘꼴랑 종이 한장 아낌의 가치’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분이 올해부터 숭실대 기독교학과의 겸임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한글자로 신학하기』라는 책을 출판하셨다.『기독교사상』에 폭발적인 인기로 연재하던 「한글자로 신학하기」시리즈를 묶어 출판한 것이다. 정의신학, 줄의신학, 색의신학, 물의신학 등등 12개의 한글자로 풀어나가는 신학여행이다. 신학이 멀게만 느껴지고, 무관하게 느껴지는 분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 한글자로 신학하기라?
우선 책제목이 신선하다.
책읽기는 첫장을 펼침으로 시작된다.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남도여행일번지 강진 남녘교회 어깨춤 임의진 목사의 동화같은 삽화가 눈길을 잡는다.
나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사로잡은 저자의 머릿말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나는 강원도 봄내春川출신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나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또박또박 말하는 말투 때문에 나를 영락 없는 서울 깍정이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친해지면 ‘아하, 어쩐지’ 그런다. 말만 똑똑하게 하지 속은 어벙한 게, 틀림없는 감자바위라나?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그 소리가 싫지 않게 들리니, 그래 맞다. 내 몸에는 과연 감자바위의 피가 흐른다.
… 중략…
철학과에 들어갔다. 무슨 거창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철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그거 해서 입에 풀칠이나 하겠느냐고 뜯어말리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도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어머니는 다만 내가 수석으로 들어갔다는 것,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게 자랑스러우실 뿐, 전공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삶의 이유 내지 근거 같은 게 필요했다. 생각을 해야 했다. 인생이란 게 도대체 뭔가, 행복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등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 중략…
그러다가 신학을 만났다. 내가 신앙으로 붙잡고 있던, 사실은 나의 게으른 고정관념에 불과한, 낡은 신념 체계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렵지만 매혹적인 유혹이었다. 신학은, 아니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유혹했다.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라고.
… 생략 …
이 글이 나를 이 책에 빠져들게 유혹했다.
글이란 읽는 맛이 있어야 한다.
저자가 아무리 유식해도 글솜씨가 어줍잖으면 독서 자체가 고역이다.
우리 글맛의 진수를 맛보려면 최명희의 “혼불”, 홍명희의 “임꺽정”, 김주영의 “객주”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감히 비기건데 그에 못지않게 이 책을 펼침으로 젊은 여성신학자의 감칠맛나는 글쓰기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